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명당(明堂)에 집을 짓고 살거나,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발복(發福)하여 잘 된다는 의식이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좋은 집터를 골라 집을 짓고 살고, 부모님의 상을 당하면 명당 자리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곤 하였다. 또 집터나 조상의 묏자리를 보고 길흉(吉凶)을 점쳐서 이사를 하거나 이장(移葬)하기도 하였다. 우리 속담에 '잘 되면 제 복, 못되면 조상의 묏자리 탓'이란 말이 있다. 요즈음 가까운 사람과 주고받는 말 중에 "누구는 조상 묏자리 잘 써서 출세하였고, 누구는 할아버지 묘를 잘못 이장하여 망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요즈음에도 민간에서는 집터나 묏자리를 보아 그 집에 사는 사람이나 후손의 운명을 알아보는 '풍수점(風水占)'을 치기도 한다.

  풍수지리설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신라 말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깊이 연구되고, 민간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확산되어 민간에 넓고 깊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풍수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양택풍수(陽宅風水)와 음택풍수(陰宅風水)

  풍수에는 한 나라의 도읍이나 대궐, 마을이나 집터를 어디에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그 나라나 마을, 집안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믿는 양택풍수와 선대(先代)의 묏자리를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자손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믿는 음택풍수가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가 송악산 기슭에 집을 지을 때 지나던 중이 조금 옮겨 지으면 그 집에서 왕이 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중의 말대로 상량(上樑)까지 한 집을 뜯어 옮겨 지었다. 그 중은 신라 말에 풍수 연구로 이름을 떨친 도선(道詵, 596∼667) 대사였는데, 그 뒤에 그 집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태어났다고 한다. 고려 중기 묘청은 송악은 지기(地氣)가 쇠하였으니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야 나라가 융성할 수 있다면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遷都)하기 전에 도읍할 자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양(漢陽)이 풍수지리로 보아 가장 좋은 곳이라는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말을 듣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의 자리를 선정하여 건축할 때에도 풍수지리설을 깊이 고려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모두 양택풍수와 관련된 것이다. 요즈음에도 유명 인사 누구의 집은 자리와 향(向)이 좋아 잘 되는데, 누구의 집은 자리와 향이 좋지 않아 궂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이것은 양택풍수에 관한 의식의 현대인의 마음속에도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누구네 집은 조상의 묘를 잘 써서 잘 되는데, 누구네 집은 묏자리를 잘못 써서 망했다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많이 들었다. 묏자리에는 자손이 우연히 잘되어 부자도 되고, 출세도 하는 명당자리가 있다고 한다. 명당자리에는 먼 훗날에 자손들이 발복(發福)하는 자리도 있고, 당대에 발복하는 자리도 있으며, 묘를 쓰자마자 금시 발복하는 자리도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아들이 죽거나 집안이 망하고 손이 끊어지는 나쁜 자리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손에게 화가 미치는 나쁜 자리를 피하고, 자손이 발복하는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명당을 얻기 위해 스스로 풍수지리를 공부하기도 하고, 풍수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식견을 갖춘 지관(地官)을 찾기도 하였으며, 선행(善行)을 하면서 기원하기도 하였다.

  이번에 퇴임한 김 대통령은 몇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苦杯)를 마신 뒤에 다시 도전하여 1997년 12월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 대통령이 선거에서 당선한 직후에 '몇 번씩 낙선하던 분이 당선된 것은 선대 묘를 명당(明堂)으로 이장(移葬)하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김 대통령 선대 묘를 둘러보려고 모여들어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되었었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한 야당의 총재가 선대 묘를 명당 자리로 옮겼다는 소문이 퍼져 그 곳 역시 한동안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몇 년 전에는 명당의 지기(地氣)를 억제하기 위해 남의 묘에 쇠붙이를 묻어 두었다가 그 일이 탄로나 벌을 받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의 풍수(風水)에 관한 의식이 요즈음에도 매우 강함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풍수설(風水說)의 핵심

  '풍수(風水)'는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뜻의 '장풍득수(藏風得水)'를 줄인 말로, '감여(堪輿)', '지리(地理)', '지술(地術)' 또는 '풍수지리(風水地理)'라고 한다. 생기(生氣)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추게 되기 때문에 바람을 막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 데서 생기가 응결(凝結)한다는 뜻에서 풍수라는 말이 생겼다. 풍수설은 산수(山水)가 신비로운 생기(生氣)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생활의 배후에서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좌우한다고 믿고, 거기에 인간과 사령(死靈)을 일치·조화시킴으로써 인간 생활에 복리(福利)를 추구하려는 하나의 민간신앙이다. 그런데 이것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원용한 생기론(生氣論)과 감응론(感應論)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주에는 인간과 만물의 운명을 지배하는 생기가 있는데, 생기는 바람·구름·비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주류는 땅속에 흘러들어서 대지의 만물을 길러주고 있다. 땅의 생육력(生育力)은 토양 자체가 아니라 땅속을 흐르는 생기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생기는 사람의 몸속에서 피가 핏줄을 따라 흐르듯이 땅속에서 지맥(地脈)을 따라 흐르고 있는데, 그것에 의해 사물이 생겨난다. 생기가 흐르다가 멈추는 곳이 명당(明堂)인데, 그 위에 집을 지으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생기에 감응(感應)되어 발복하고, 조상의 뼈를 묻으면 생기가 그 뼈에 작용하여 그 뼈와 관계가 깊은 자손에게 감응하여 자손이 발복한다. 이것이 생기론과 감응론의 요지이다.

  생기론과 감응론을 바탕으로 한 풍수설은 산·물·방위·사람을 구성 요소로 하여 간룡법(看龍法), 장풍법(藏風法), 득수법(得水法), 정혈법(定穴法), 좌향론(坐向論), 형국론(形局論) 등에 구체화되고, 체계화되었다. 

  풍수설의 안목으로 서울의 경복궁과 성문의 이름을 보면, 매우 재미있다. 경복궁은 북한산에서 뻗어 내려온 북악(北岳)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낙산을 좌청룡(左靑龍)·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목멱산(남산)을 내안산(內案山)·관악산(冠岳山)을 외안산(外案山)으로 하고, 청계천이 동으로 흘러 한강에 합류하여 유유히 흐르고 있어 풍수설의 요건을 잘 갖췄다고 한다. 그런데 한양에도 풍수적인 결함이 두 가지나 있어서 이를 비보(裨補)하였다. 

  첫째, 동쪽인 진방(震方)의 청룡(靑龍)에 허점이 있다. 서쪽의 백호는 인왕산에서 사직동으로 뻗은 내백호(內白虎)와 안산에서 만리동을 거쳐 효창공원까지 뻗은 외백호(外白虎)의 두 겹으로 되어 있어 장풍(藏風) 하기에 충분하지만, 동쪽의 청룡은 한 겹뿐인데, 그것도 동문 근처에서 끊어져 있고, 이 문에서 망우리에 이르는 사이에는 평야가 있어 장풍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인위적으로 보완하기 위하여 동문의 이름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였다. 풍수설에서 '인(仁)'은 '목(木)'에 속하고, 목은 동쪽을 뜻하므로 '흥인'은 바로 동쪽을 반기는 뜻이 된다. '지(之)' 자는 산맥이 구불구불한 모양을 형상적으로 표시하는 문자이므로, 동쪽의 허한 것을 보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동문은 이름을 '興仁之門'의 넉 자로 하고, 산을 쌓아 비보(裨補)하는 대신 반월형의 석축의 울을 쌓아서 외풍(外風)이 들어오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으려 하였다. 

  둘째, 남쪽인 곤방(坤方)에 있는 관악산이 음양설(陰陽說)로 보아 화기(火氣)가 왕성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남문의 현판 '崇禮門'을 세로로 붙였다. 풍수설의 오행을 보면, '예(禮)'는 불에 속하고, 불은 남쪽을 의미한다. '숭(崇)' 자의 예서(隸書)는 불꽃이 일어나는 형상이므로, '숭례(崇禮)'는 '염화(炎火)'의 뜻으로 불이 타오른다는 풍수문자가 된다. 그런데 그 글자를 세로로 쓰면 불이 붙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써서 걸었는데, 이것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마주 대하게 하여 불로써 불을 제압하여 불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조선 고종 때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重建)하고,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뜰에 해태의 형상 둘을 만들어 세웠다. 이것을 두고, 민간에서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전한다. 해태는 수신(水神)을 상징하므로, 물로서 불을 제압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없으므로, 민간에서 풍수와 관련지어 전해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풍수와 관련된 지명(地名)

  우리 나라에는 풍수와 관련된 지명이나 설화가 많이 있다. 이것은 풍수신앙이 넓고 깊게 퍼짐에 따라 일어난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겠다.

  서울 풍수의 안산(案山)인 목멱산(남산)은 생김새가 누에처럼 생겼다 해서 '잠두봉(蠶頭峰)'이라고도 한다. 도시 풍수에서는 안산을 길러야 그 도시에 불행이 없고 번창한다고 한다. 잠두형은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고 사는 형세이므로, 양안술(養案術)은 누에를 먹이는 뽕나무를 심는 것이다. 그래서 남산의 동쪽에 보이는 당시의 사평리(沙坪里)에 많은 뽕나무를 심고, 여기를 '잠실(蠶室)'이라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잠원동(蠶院洞) 일대를 '잠실'이라고 한다.

  서울 불광동 쪽에서 독립문으로 가는 고개를 '무악(毋岳)재'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 터를 물색할 때 하륜(河崙)이 무악재 남쪽을 적극 주장하는데, 일부에서는 명당이 좁다고 반대하므로 태조 3년(1394년)에 태조가 몸소 무학대사를 데리고 가서 조사하였으므로 '무악재' 또는 '무학현(武學峴)'이라 했다고 한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는 '굴레방다리[靭橋]'가 있고, 서강 쪽에 붕괴된 와우아파트가 있던 '와우산(臥牛山)'이 있으며, 무악재 남쪽에 안산(鞍山)이 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큰 소가 길마는 길마재에다 벗어놓고, 굴레는 굴레방다리에다 벗어놓은 다음, 서강(西江)을 향하여 내려가다가 와우산에 이르러 누웠다고 한다. 그래서 '굴레방다리', '와우산', '길마재[鞍山]'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전남 곡성의 진산(鎭山)은 동락산(動樂山)인데, 봉(鳳)이 날아가는 형상이라고 한다. 봉이 날아가 버리면 곡성은 쇠퇴하게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땅이름으로 묶어 놓았다고 한다. 봉은 오동나무에 깃들이므로 봉이 쉴 수 있게 하기 위해 '오지리(梧枝里)'란 땅이름을, 봉은 대 열매만 먹으므로 남쪽에 '죽곡면(竹谷面)'란 땅이름을 지었다. 또 봉은 고양이를 싫어하므로 서쪽을 '묘산(猫山)'이라 하고, 봉은 메추리를 보면 멈추므로 북쪽에 '순자강(鶉子江)'을 두었다고 한다. 

  풍수와 관련된 땅이름 중에는 예언적인 성격을 띤 것도 있다. 충북 청원군 북일면에는 '비상리(飛上里)'란 마을이 있고, 청주시 강서동에 '비하리(飛下里)'란 마을이 있다. 그런데, 1997년 4월 28일에 개항한 청주 비행장의 이륙장(離陸場)이 설치된 곳이 비상리이고, 착륙장이 설치된 곳이 비하리라고 한다. 인천 국제공항은 서울 도심에서 5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영종도(永宗島)와 이 섬에서 5km 거리인 용유도(龍遊島) 사이를 메워서 만든 공항이다. 영종도의 옛이름은 '제비섬[紫燕島]'였는데, 조선 중기부터 '영종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다. 제비는 비행기, 영종(永宗)은 긴 마루라는 뜻으로 광활하게 뻗는 활주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섬과 방파제로 연결된 용유도는 용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노닌다는 뜻으로 볼 수 있으니, 당초부터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내리는 공항이 들어설 자리를 예견하는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충남 당진군 서해안에 '대호지면(大湖芝面)'이 있고, 그 옆의 석문면에 '교로리(橋路理)'라는 마을이 있다. 이 지역에 1981년부터 대규모 간척사업을 하여 큰 호수와 농지가 생겼다. 충남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雲井里)'의 논과 밭은 삽교천 방조제 공사가 완공됨에 따라 삽교호(揷橋湖)로 변하여 아지랑이와 안개가 자욱한 곳이 되었다. 이것 역시 예언적 성격을 띤 지명이다.       

        풍수와 관련된 설화(說話)

  풍수신앙이 널리 퍼짐에 따라 명당자리를 얻기 위한 노력과 정성, 수단과 방법도 다양하여졌다. 그에 따라 크고 작은 일들이 수없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이 풍수 설화의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풍수 설화에는 유능한 지관(地官)을 만나 명당 자리를 얻은 이야기, 적선(積善)을 하여 좋은 자리를 얻은 이야기 등이 있는가 하면, 남을 속이거나 권력을 이용하여 좋은 자리를 차지한 이야기가 있다. 또 자기 선대의 유골을 명당자리에 몰래 묻은 암장(暗葬), 투장(偸葬) 이야기도 있다.

  풍수 설화 중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가난한 노총각이 '금시발복지지(今時發福之地)'에 아버지를 묻고 집에 오니 비가 내리는데, 청상 과부(靑孀寡婦)가 된 서울 재상가의 딸이 비를 피하기 위해 그 집에 들렀다가 함께 살게 되어 장가도 가고,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장가도 들기 전에 죽은 외아들을 '죽은 아들에게서 손자 보는 묏자리[死子生孫之地]'에 묻고 그 옆에 여막(廬幕)을 지어 놓았는데, 죽은 아들의 영혼이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그 여막에 들른 처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아이로 대를 이었다고 한다. 어떤 나무꾼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드러난 해골을 잘 묻어주고 복을 받아 잘 살았는데, 그 자리가 명당 자리였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한 사람에게 호랑이나 노루가 명당 자리를 잡아 주어 잘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요즈음에도 묏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싸움이 종종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것은 남남끼리 벌이는 싸움보다는 친족간에 벌이는 싸움이 더 많고, 또 심하다고 한다.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수 신앙과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자기 직계 자손에게 궂은 일이 없게 함은 물론, 발복하여 잘 살게 하고자 하는 이기심(利己心)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들이 갈 만한 명당자리는 남아 있을까? 큰 산, 작은 산 가릴 것 없이 산세로 보아 좋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예외 없이 절이 들어서 있고, 명당이라고 할 만한 자리에는 왕릉(王陵)이나 한때 세력을 잡았던 양반들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도 돈 있고, 힘있는 사람은 좋은 자리를 골라 부모의 묘를 쓰고, 치산을 한다. 이런 판에 서민들이 명당 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국가에서는 묏자리가 차지하는 면적이 점점 늘어서 효율적인 국토의 이용과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화장(火葬) 후 납골(納骨)을 권장하고 있다. 우리 서민들은 과학적인 근거가 희박한 명당 관념에서 벗어나 국가 시책에 호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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