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6일 금요일에 교일산우회 회원들과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장자호수공원에 갔다. 금년 810일에 지하철 8호선이 암사역에서 남양주시 별내까지 연장 개통되었으므로 장자호수역까지 편히 갈 수 있었다. 전동차에서 내려 보니,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적소에 설치되어 있어 이용하기 편하고, 역사 안이 넓고 깨끗하여 기분이 좋았다. 대합실에서 만난 회원들은 삼복더위를 피하기 위해 한 달 쉬었다가 만나는 첫 모임이어서 모두 반가워하였다.

   장자호수공원역 6번 출입구로 나와 200m쯤 걸으니 공원야외공연장이다. 야외공연장 한쪽에 길게 친 천막 안에서는 내일 열리는 장자못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바로 이어지는 잔디밭에 장자못의 유래를 적은 큰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장자못 전설이 적혀 있어 이곳을 장자호수공원이라고 하는 연유를 적어 놓았다.

   비석에 적혀 있는 전설의 내용은 다른 여러 지방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와 별 차이가 없다. 나는 회원들에게 장자못 전설의 줄거리를 간단히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 오는 지역의 호수와 바위 이름을 열거했다. 또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도 말하였다. 그런 뒤에 산책길을 걸으며 이 전설의 의미를 정리해 보았다.

   옛날 이곳에 욕심 많고 인색한 장자(長者. 부자)가 살았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장자가 외양간을 치우고 있을 때 스님이 와서 시주를 청하였다. 그는 스님에게 땀 흘려 일하지 않고 시주를 받으러 다닌다고 꾸짖으며 쇠똥을 퍼서 바랑에 넣어 주었다. 아침밥을 지으려고 쌀을 가지고 나오던 며느리가 이 모습을 보고, 자기와 아들의 아침밥 지을 쌀을 시주하며 시아버지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

   스님은 며느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에 말했다. “오늘 정오가 되기 전에 저 산 너머 친정으로 가시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뒤에서 어떤 소리가 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 며느리가 스님의 말대로 아기를 업고 고개를 올라갈 때 장대비가 쏟아지며 천둥 번개와 함께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니 집이 폭삭 꺼져 가라앉더니 큰 연못이 되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깨뜨렸으므로 바위가 되었다.

   권선징악적(勸善懲惡的)인 의미를 지닌 이 이야기는 여러 곳에 있는 연못과 바위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전해 온다. 이 전설이 전해 오는 곳 중 널리 알려진 곳으로는 강원도 태백시의 황지고성의 송지호와 화진포호강릉의 경포호, 충북 제천의 의림지, 충남 논산의 장자못공주의 용못 등이 있다.

   이와 비교되는 이야기가 《구약 성경》 「창세기에도 전해 온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주민들의 악행을 보다 못해 이곳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두 천사를 보내어 롯의 착한 마음과 신앙심을 확인한 뒤에 그에게 가족을 데리고 성을 떠나라고 하면서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한다. 두 성이 유황불로 불탈 때 롯은 두 딸과 함께 소알성으로 도피하여 살았지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장자못 이야기는 초월적인 힘을 지닌 분이 악인을 징벌한다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부분적인 면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앞 이야기에서는 초월적인 존재가 하나님이고, 주민의 악함을 확인하고 벌을 내리는 것은 사람의 모습으로 온 두 천사이다. 뒤 이야기에서는 초월적인 존재가 부처님이고, 그 뜻을 받들어 벌을 내리는 것은 스님이다. 이런 차이는 앞 이야기가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고, 뒤 이야기는 불교를 기저로 한 한국인의 신앙심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리라.

   악인을 징벌하는 전설을 배경으로 생긴 장자호수 주변에 생태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이 공원의 유래를 생각하며 체력을 단련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공연장 안쪽으로 들어가니 호수를 끼고 길게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고, 공원 외곽에도 산책로가 있어 사람과 자전거가 통행하도록 하였다. 산책로를 걷는 동안 좌우로 이어지는 잘 가꾼 꽃과 잔디, 정원수는 마음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 조금 더 가니 생태체험관이 있었지만, 계단을 올라가야 하므로 들어가지 않았다.

   조금 더 가니 통나무를 여러 간격으로 세워 놓은 뱃살통과 테스트장이 있다. 위쪽에 홀쭉(17cm), 날씬(20cm), 표준(23cm), 통통(25cm), 마음만은 홀쭉(27cm), 이러시면 안 됩니다(29cm), 당신은 외계인(32cm)’ 등이 씌어 있다. 이 말들이 퍽 애교스럽게 느껴진다. 자기 몸에 맞는 공간을 옆으로 통과해 보면서 자기의 건강과 몸매를 측정해 봄직하다.

   산책로를 걷다가 둑 아래로 난 데크길로 내려가니 가까워진 호수 수면에 물오리들이 한가로이 놀고 있다. 호수 곳곳에 물속으로 산소를 공급하는 장치가 서 있는 것을 보니, 물고기를 위한 배려가 고맙게 느껴진다. 호수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에는 버드나무가 서 있다. 길게 뻗은 호수 양편에 조성해 놓은 황톳길에서는 시민들이 맨발로 걷고 있었다. 장미정원, 어린이 놀이터, 숲속놀이터, 농구장, 반려견 놀이터 등 다양한 시설들을 바라보며 2시간 가까이 걸었다. 이슬비가 오락가락하였지만, 덥지 않아 산책하기에 좋았다.

    잔디밭 가운데에 원형으로 지붕을 덮은 긴 벤치가 여럿 있다. 우리는 그 중 한곳에 앉아 각자 준비해 온 커피, 과자, 바나나, 떡 등의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가볍고 즐거운 대화를 하였다. 길게 뻗은 호수 양편에 잘 다듬고 가꾼 잔디와 수목 사이로 난 산책길을 걸은 뒤에 환담을 하노라니 한 달 내내 계속되던 폭염을 견뎌내느라고 힘들었던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 듯하다. 한 달 동안 쉬었다가 다시 모인 우리 모임의 힘찬 출발을 자축하며 회원 모두의 건강을 기원한다. (2024.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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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 에세이 《은혜의 샘물》이 기독교연합신문사 도서출판(도서출판 UCN)에서 202475일에 간행되었다. 이 책은 필자가 김기창, 이복규, 임문혁 장로와 돌아가며 써서 20222월부터 202312월까지 《기독교연합신문 》  「은혜의 샘물난에 실은 글들을 한데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4명의 필자가 각자의 생활 영역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글감으로 하여 쓴 신앙 속 삶의 이야기이다.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하는 글을 200자 원고지 10장 분량으로 풀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필자 스스로 은혜를 느끼는 글이어야 독자들과 공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무척 부담스럽고, 긴장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필자는 글을 쓰면서 그야말로 샘물같이 솟아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고, 지난 삶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정리하면서 감사하였다. 그러다 보니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에 앞서 필자가 먼저 감동을 받게 되었다. 필자가 받은 은혜가 독자들에게도 흘러넘치기를 기도하고, 그러리라 믿는다.

   필자 네 사람은 모두 장로, 문인, 박사, 학자이며 30년 이상 교직에서 후학들을 길러낸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글이 연재되는 동안 다음엔 어떤 감동적인 글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신문을 기다리기도 했고, 쓴 글들을 서로 읽어보면서 각자가 일상적인 삶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며 새로운 은혜를 나누기도 하였다.

   필자가 쓴 글 25편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 어머니의 소원     

   * 사탄으로 몰린 집사

    * 돌잡이는 미신인가    

   * 전도에 힘쓰는 택시기사 

   * 신병을 앓는 이에게 전도를 

   * 딸을 위한 기도  

   * 목사 아내의 길

   * 아프리카 파견 선교사의 헌신과 보람

   * 성경 읽기

   * 선교사 아닌 선교사가 되어

   * 산타클로스의 고향

   *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 알고 쓰기

   * 시골 아가씨의 놀라운 성장과 변신

   * 세계 최초의 교회를 찾아서

   * 하나님의 계획

   * 기도하고 시작한 강의

   * 말보다 행동으로

   * 문설주에 바르는 양의 피와 팥죽

   * 실로암주여 당신께

   * 합심 기도

   * 목사 아들을 둔 부모

   * 교도소까지 전해진 은혜의 샘물

   * 고향 친구의 소천

   * 어느 스님의 분노

   * 성모 마리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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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하순의 어느 날 아침 외출하려고 아파트 단지 안의 벚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매미 소리를 들었다. 금년 들어 처음 듣는 매미 소리로, 다른 해보다 이른 시기여서 의아하면서도 반가웠다. 그로부터 23일 뒤에 집 앞의 공원에 가니, 여러 종류의 매미들이 떼를 지어 노래한다. 여러 종류 매미들의 합창 소리를 들은 아내는 시끄럽다고 하였으나,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며 아주 정겹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여름에 매미가 울면 매미 소리를 흉내 내면서 맨손으로 매미를 잡으려고 뛰어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맨손으로 매미를 잡은 적도 있기는 하지만,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매미는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뭇가지를 휘어 원형 또는 4각의 틀을 만들어 장대에 고정시킨 뒤에 거기에 거미줄을 묻혀 매미채를 만들었다. 나뭇가지에서 울고 있는 매미에게 매미채를 대면 매미의 날개가 거미줄에 붙어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거미줄 묻힌 매미채를 만든 것이 전적으로 내 아이디어였는지, 형들이나 어른들의 귀띔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매미채는 잠자리를 잡는 데에도 아주 유용하였다. 잡은 매미는 실로 묶은 뒤에 집 앞의 나무에 올려놓기도 하고, 날려 보내기도 하였다. 여름방학 숙제로 곤충표본을 만들어 학교에 제출한 적도 있다. 그늘에 깔아놓은 밀짚방석에 누워 매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즐기기도 하였다. 매미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련하다.

   매미의 수컷은 사랑을 나눌 상대를 부르기 위해 자기만의 소리를 낸다. 다른 개체의 소리와 구별되는 소리를 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발성한다. 그 소리가 나에게는 맴맴’, ‘쓰름 싸름’, ‘--’, ‘지르르르등으로 들린다. 매미가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나뭇가지에서 사는 기간은 23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수컷의 노래 소리에 마음이 끌린 암컷은 수컷에게 다가가서 짝짓기를 한다. 수컷은 짝짓기를 한 뒤에 죽고, 암컷은 나무껍질 속이나 틈새에 알을 낳은 뒤에 죽는다.

   알은 나무껍질 속에서 추운 겨울을 나고 여름이 되면 애벌레가 되어 땅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여러 차례 허물을 벗으며 보통 5~6, 길게는 17년 가량 산다. 그런 뒤에 다시 나무위로 올라가 우화(羽化)하여 성충 매미가 된다. 길게는 17년을 사는 매미가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기간은 고작 23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렇게 짧은 기간을 노래하는 매미의 한살이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에 매미를 잡아 죽게 하거나 곤충표본을 만들었던 일이 부끄러워진다. 매미가 사랑의 노래를 마음껏 부른 뒤에 상대를 만나 소원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싶다.

   3세기경 중국 진()나라 시인 육운(陸雲)은 매미를 유심히 관찰한 뒤에 다섯 가지 특성을 들어 매미의 오덕(五德)’이라 하였다. 머리 모양과 곧게 뻗은 입 모양이 선비의 갓끈과 유사하니 선비와 같다(). 여느 곤충들과는 달리 이슬과 나무의 진을 먹으니 청렴하다(). 곡식이나 채소, 나무에 해를 끼치지 않으니 염치가 있다(). 자기의 집을 짓지 않으니 검소하다(). 때에 맞추어 울며 살다가 때를 맞추어 죽으니 신의가 있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극을 보면, 왕과 왕세자는 곤룡포를 입고 집무할 때에 익선관(翼善冠)을 쓴다. 앞 꼭대기에 턱이 져서 앞이 낮고 뒤가 높은데, 뒤에는 두 개의 뿔을 날개처럼 달았으며 검은빛의 사() 또는 나()로 둘렀다. 이것은 매미의 날개를 본 뜬 것이다. 매미의 오덕(五德)을 생각하며 백성을 다스린다는 의지를 담은 모자라 하겠다. 익선관은 고려와 조선은 물론, 명나라와 베트남에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왕은 매미의 오덕을 생각하며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의식이 오래 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매미는 그리스인의 진귀한 음식이라고 하였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중앙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몇몇 지역에서는 매미의 애벌레를 튀겨 먹는다고 한다. 일본 도쿄의 한 공원에서는 매미를 즐겨 먹은 사람들이 매미를 쓸어가므로 포획금지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고 한다. 굼벵이가 허물을 벗고 매미로 날아간 뒤에 남은 껍질은 선태(蟬蛻), 또는 선퇴(蟬退)라고 한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한약재로 쓴다. 그러고 보면 매미의 오덕에 식용, 또는 약재로 자기 몸을 내어주는 희생의 덕을 추가해야겠다.

   매미는 변온동물로 보통 15이상 되면 울기 시작하여 더운 여름에 마음껏 울어대다가 가을이 되면 사라진다. 예상보다 일찍 울거나 여름철이 지나 늦가을에도 우는 것은 기후 변화로 기온이 일찍 오르고, 늦게까지 내려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주광성(走光性)인 매미는 대부분 낮에 울고, 밤에는 울지 않는다. 그런데 밤에도 우는 이유는 가로등 등 환한 인공 빛 때문에 밤을 낮으로 착각한 때문이라 하겠다. 얼마 전에 매미가 11층인 우리 아파트의 방충망에 붙어 갑자기 우는 바람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것은 매미가 방향을 잃어 급한 대로 방충망에 앉아 있다가 울음소리를 낸 것이리라.

   오늘도 공원의 숲에서는 매미들이 땅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냈음을 알리면서 사랑을 나눌 상대를 부르는 노래를 목청껏 부른다. 나는 공원 숲속의 벤치에 앉아 매미의 노랫소리를 즐기며 잠시 추억에 젖어본다. 이때 갑자기 위급함을 알리는 매미 소리가 들리더니 멀어지니, 매미가 까치에게 잡혀가는 모양이다. 매미채로 매미를 잡아 통에 넣으며 좋아하는 아이와 그 부모가 보인다. 매미의 한살이를 설명하고 날려 보내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그만두었다. 매미가 까치에게든 사람에게든 잡히지 않고 마음껏 노래하며 짧은 여생을 즐겼으면 좋겠다.(2024.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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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덕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에 있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이 만들어 낸 덕숭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다닌 갈산초등학교, 갈산중학교, 홍성고등학교는 10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그래서 초·중·고교 시절에 78회 소풍을 갔던 친숙한 곳이다.

   이 절은 백제 위덕왕(554597) 때 창건되었다. 이곳에는 여러 건물과 석탑이 있지만, 가장 주의를 끄는 곳은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1308)년에 건축된 목조 건물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과 함께 고려 시대의 목조 건물로 유명하다.

   나는 얼마 전에 수덕사를 다시 찾았다.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여러 번 왔던 곳이지만, 다시 이곳저곳을 살펴본 뒤에 대웅전 뒤편에 있는 큰 바위 관음암 앞에 섰다. 그 앞에는 불상이 서 있고, 돗자리가 깔려 있다. 그 옆 축대의 벽면에 수덕 각시가 바위틈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을 간략히 적은 대리석판이 붙어 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니, 관음암을 가리키며 이 바위가 수덕 각시가 들어간 바위라고 하면서 둘러보고 가는 사람, 대리석판에 새긴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고 가는 사람, 불상 앞의 돗자리에 신발을 벗고 올라서서 절하며 소원을 비는 사람이 있었다. 수덕 각시가 절을 중창하고 바위 속으로 들어간 이곳에 와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비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수덕 각시 이야기를 어렸을 때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전설을 채록하려고 이곳에 와서 1999년에는 수덕사 포교국장 정암 스님, 2001년에는 이곳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홍순목 씨에게서 이 이야기를 채록하여 《함께 떠나는 이야기 여행》(민속원, 2001)에 수록하였다.

   정암 스님이 구연한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수덕사의 규모가 아주 작을 때 수덕이라고 하는 묘령의 아가씨가 움막에 묵으며 기도하였다. 그러자 인근 재력가의 자제인 정혜도령이 그에게 청혼하였다. 그는 절을 지어주면 혼인하겠다고 하였다. 절이 완공되기 하루 전날 밤에 정혜가 그에게 혼례를 올리고 신방을 차리자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정혜에게 몸단장을 하고 나올 터이니 자기가 거처하는 움막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기다리다 지친 정혜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그가 바위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다급한 마음에 그를 잡았으나 다 잡지 못하고 그의 버선만 잡았다. 그는 버선만 남긴 채 바위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후로 바위틈에서 버선 모양의 꽃이 핀다. 이를 버선꽃또는 ‘골담라고 한다.

   홍순목 씨가 구연한 내용 역시 앞 이야기와 기본 줄거리는 같다. 그러나 남주인공을 부자 정혜대신 목수 덕숭도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덕숭이 마음 깊이 사랑하고 흠모하였던 그를 잃은 뒤에 세상에 나가 결혼하지 않고 정혜사에서 도를 닦으며 일생을 보냈다고 하는 이야기가 첨가되어 있다. 남주인공의 이름을 앞 이야기에서 정혜라고 한 것은 대웅전 뒤편에 정혜사가 있는 것과 관련이 있고, 뒷이야기에서 덕숭이라고 한 것은 수덕사가 있는 산이 덕숭산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불심이 두터운 수덕은 이곳에 절을 짓겠다는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불공드리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인다. 그의 미모에 반한 많은 남자들이 청혼을 하자, 그는 이곳에 절을 지어주는 사람과 혼인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앞 이야기에서는 부자인 정혜, 뒷이야기에서는 재능이 있는 목수 덕숭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절이 완공되기 하루 전날 밤에 정혼자가 그에게 혼인예식을 올리고 신방을 차리자고 제안한다. 그는 이를 뿌리치고 버선만 남긴 채 바위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절은 완공되었지만, 많은 돈과 시간과 노동력을 바친 총각은 실망과 좌절을 안게 된다.

   이야기의 겉면만 보면, 수덕은 자기의 미모를 이용하여 정혜의 재물이나 덕숭의 기술과 노력을 절을 짓는 데에 모두 바치게 한다. 그리고는 절이 완공되자 혼인 약속을 저버린 채 사라져버린 거짓말쟁이로, 사기성이 농후한 나쁜 여인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수덕은 불심보다는 여인의 미모를 탐하는 마음이 더 큰 정혜나 덕숭으로 하여금 탐심을 버리고 자기가 가진 재물이나 기술·노동력을 불심을 닦는 도량을 짓는 데에 바치게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덕숭으로 하여금 불도에 귀의하여 진정한 도를 깨우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수덕은 자기의 미모를 이용하여 보시와 각성의 도를 가르친 신앙의 여인이라 하겠다. 수덕을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보는 것 역시 같은 해석이라 하겠다.

   관음암을 버선꽃과 관련지으며 다시 보니, 별 생각 없이 그 앞을 지나다닌 젊은 날의 발걸음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버선꽃이 필 때 다시 찾아와서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2024. 6. 3.)

                     대웅전 뒤편에 있는 관음암.  위쪽에 골담초(일명 버선꽃) 가지가 보인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 경내에 피어 있는 골담초. 일명 버선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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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아내와 함께 경북 영주시 부석면 복지리 봉황산 기슭에 자리 잡은 부석사를 찾았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676)년에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절이다. 의상 대사는 중국 당나라로 가서 중국 화엄종의 시조인 지엄(智儼) 대사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뒤에 왕의 뜻을 받들어 이 절을 창건하였다. 여기에는 고려 시대에 지은 무량수전(국보 제18)과 조사당(국보 제19), 신라 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의 석등(국보 제17),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 주사당 벽화(국보 제46),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 삼층석탑(보물 제249), 당간지주(보물 제255) 등의 문화재가 있다.

   무량수전 서편에 큰 바위를 받침으로 깔고 앉은 넓고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밑 부분이 받침에 완전히 닿지 않고 공중에 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하고,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지을 때 이를 방해하는 이교도들을 선묘(또는 용녀)가 신통력으로 물리쳤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의상 대사는 문무왕 1(661)년에 신라에 왔다 가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그가 양주의 주장(州長)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머무를 때에 그의 딸 선묘(善妙)가 그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선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법도로 대하여 그녀를 제자로 만들었다. 그는 안남성 종남산 지장사로 가서 지엄 대사의 문하에서 10년간 공부하였다.

   그는 일이 생겨 갑자기 귀국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양주에 들러 선묘를 만나려 하였으나 출타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급히 항구로 가서 배를 탔다. 이 소식을 들은 선묘가 항구로 달려가니, 배가 막 출발하였다. 선묘가 그를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가사와 법복을 배를 향해 던지니, 바람을 타고 배에 닿았다. 선묘는 자기 몸이 용이 되어서 의상 대사를 보호하게 해 달라고 발원하였다. 그래서 선묘는 용이 되어 그를 보호하며 신라에 왔다.

   의상 대사가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하자 오백여 명의 이교도들이 이곳은 우리들의 기도처이므로 절을 지을 수 없다며 막아섰다. 그래서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용녀 선묘가 현신하여 커다란 바위를 공중에 세 번이나 들어 올리며 이교도들을 위협하였다. 이교도들이 놀라 겁을 먹고 물러서자 바위를 내려놓았다. 이 바위가 땅위에 떠 있으므로 부석이라 하고, 그 절을 부석사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유증선, 《 영남의 전설 》. 최운식, 《다시 떠나는 이야기 여행 》 참조)

   부석에 관하여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 》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불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옆으로 섰고, 그 위에 큰 돌 하나가 지붕을 덮어 놓은 듯하다. 얼른 보면 위아래가 서로 이어진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두 돌 사이가 서로 눌려져 있지 않다. 약간의 빈틈이 있어 새끼줄을 건너 넘기면 나고 드는 데에 걸림이 없다. 그래서 떠 있는 돌인 줄을 알게 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있는 부석사에도 전해 온다. 의상 대사가 도비산에 절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산에 본거지를 둔 해적들이 방해하여 절을 지을 수 없었다. 이 때 그가 당나라에서 올 때 만났던 용녀가 도비산 꼭대기에 나타나 큰 바위를 들고 해적들에게 이 산을 떠나라고 했다. 도둑들이 떠나자 용녀는 들고 있던 바위를 앞바다에 던졌다. 그 바위는 간만의 차에 구애 없이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뜬 바위’, 부석이라 하였다. 그 산에 지은 절을 부석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산을 섬이 날아간 산이라 하여 도비산(島飛山)이라고 했다. (최운식, 《한국구전설화집 4 》).

   영주 부석사 전설과 서산 부석사 전설은 부석사의 유래를 용녀, 부석과 관련지어 설명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서산 부석사 전설은 바다를 배경으로 함에 따라 이교도해적’, ‘선묘용녀로 바꾸었다. 또 충남 서산시에 부석면이라는 행정 구역, ‘부석사라는 절 이름, ‘도비산이라는 산 이름, ‘부석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로 보아 서산 부석사 전설이 민간에 끼친 영향이 더 컸던 것 같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전해 왔다. 12년 뒤에 인도의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하였다. 그로부터 훨씬 뒤에 고구려의 묵호자가 신라의 서북 지방인 일선군 모례(毛禮)의 집에 기숙하면서 불법을 전하였다. 그래서 모례는 신라인으로서 최초의 불교 신도가 되었다. 그 후 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에서 아도(阿道. 고구려에 왔던 중국승 아도와는 동명이인)가 와서 불법을 전도한 뒤로 신봉하는 자가 늘어났다. 신라 왕실에서는 불교 공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귀족들과 백성의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법흥왕은 527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배불파를 제압하고 불교공인을 선포하였다.

   모든 종교는 전도에 뜻을 두고 이를 위해 온힘을 기울인다. 한 종교가 다른 문화권에 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에는 그 지역에 전해오는 종교 또는 민간신앙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그 충돌을 이겨내면 전도에 승리하는 것이고, 이기지 못하면 그 종교는 그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 것이다. 외래종교인 불교가 신라에서 유난히 전도하기가 힘들었던 것은 신라에 민간신앙의 뿌리가 깊어 저항이 컸기 때문이다.

   위 이야기에서 이교도해적은 민간신앙의 신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절터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민간신앙 신도들의 기도처였을 것이다. 이들이 불교의 포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의 성지(聖地)를 빼앗아 절을 지으려고 하니 이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 때 선묘, 또는 용녀가 큰 바위를 번쩍 들고 위협하여 이들을 굴복하게 만든다. 이것은 불교가 포교하며 절을 지을 때 민간신앙과 충돌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나 신이한 법력을 보임으로써 민간신앙을 제압하고, 승리하였음을 드러낸다.

   선묘가 바다로 던진 가사와 법복이 의상 대사가 탄 배에 닿는다. 선묘가 소원대로 용녀가 되어 대사를 호위하고 신라로 온다. 용녀가 큰 바위를 들고 이교도들을 위협한다. 또 선녀가 내려놓은 바위가 바닥에 닿지 않고 떠 있다. 이런 것들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불교적인 법력을 영검하게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차용한 설화적 수사이다. 승려나 불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래서 불교를 민간신앙보다 우월한 종교, 포교에 승리한 종교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2024. 4. 30.)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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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과 정 선생님은 한문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셨다. 선생님께서는 가끔 한문 명구를 칠판에 쓰시고, 뜻을 설명해 주셨다. 그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다.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 주자(朱子, 1130~1200)가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은 그 의미를 곱씹어 볼수록 좋은 말이어서 꿈 많던 소년 시절의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내 마음이 산란할 때마다 나를 일깨우는 명구가 되었다. 이 말을 책상 앞 벽에 써서 붙이고, 마음에 새겼다. 그로부터 먼저 목표를 설정하고, ‘하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집중력을 강화하며 마음을 다잡곤 하였다. 설정한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며 긴장이 풀리거나 나태해질 때에는 이 말을 되뇌며 마음을 다잡곤 하였다. 그래서 이 말은 나를 일깨우는 경구(警句)가 되기도 하였다.

   교사로, 교수로 교단에 섰을 때에는 계제를 살펴 학생들에게 이 말을 써 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어렸을 때 들은 옛날이야기 <바위를 뚫은 화살>을 이야기해 주곤 하였다.

   옛날에 무과를 준비하는 젊은이가 산속에서 활쏘기를 비롯한 무술 훈련을 하고, 해가 진 뒤에 집으로 향하였다. 그가 어두움을 뚫고 고개를 넘으려고 하는데, 커다란 호랑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놀란 마음을 가다듬고, 호랑이를 활로 쏘아 맞히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세 대의 화살을 날렸다. 화살을 맞은 호랑이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으므로 집으로 달려왔다.

   이튿날 그 곳에 가보니, 큰 바위에 자기 화살 세 대가 꽂혀 있었다. 그는 지난밤에 바위를 호랑이로 알고 화살을 쐈음을 알고 겸연쩍었다. 그러나 화살이 바위를 뚫은 것을 흡족히 여기며 다시 화살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화살은 바위에 튕겨나가곤 하였다. 이 이야기는 옛날부터 널리 퍼져 전해오면서 필사의 각오로 정신을 집중하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교훈적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중국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이광장군열전어느 날 이광(李廣, B.C. ?119)이 사냥을 나갔다가 수풀 속에 큰 호랑이가 있는 것을 보고 활을 쏘아 명중시켰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바위였다. 그리고 살촉이 바위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활을 바위에다 대고 쏘았으나 살촉은 바위를 뚫지 못했다.”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들은 바위를 뚫은 화살이야기가 이 이야기를 모태로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고등학교 때 정 선생님은 모사재인성사재천(謀事在人成事在天)’이란 말과 함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도 가르쳐 주셨다. 앞의 말은 계획을 세우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그 일의 성사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이고, 뒤의 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는 말이다. 이 말은 계획한 일의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최선을 다하면 바라던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준다. 혹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냥 하늘의 뜻으로 알고 실망하거나 비관하지 말라는 뜻도 담겨 있다.

   이 말의 출처는 《삼국지연의》이다. 촉한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유비가 사망한 뒤에 위나라와 싸울 때 계책을 세워 사마의(司馬懿)의 군사를 골짜기로 유인한 뒤에 화공(火攻)을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큰비가 내려 불이 꺼짐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를 보고 제갈량은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이와 똑같은 뜻을 가진 말이 신약성경에도 있다. 잠언161절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라는 말이다. 지혜의 왕으로 불리는 솔로몬의 이 가르침은 계획을 세우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고 한다. 계획을 세워 추진하는 일의 성격과 내용, 기울이는 노력의 정도를 보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모사재인 성사재천’,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라는 말씀은 젊은 시절의 나를 일깨워주는 명구였다. 이런 명구를 가르쳐주시고, 진학지도를 바르게 해주신 정 선생님 생각이 간절하다.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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