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

   얼마 전 친구들과 서울특별시 강동구와 경기도 하남시에 자리 잡고 있는 일자산(一字山)에 갔다. 일자산은 경사나 굴곡이 심하지 않은 산등성이가 ()’ 자처럼 이어져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자산에는 고려 말의 대학자였던 이집(李集, 1327~1387) 선생이 1368(공민왕 17)에 신돈(辛旽)의 비행을 비판하고, ()를 피하기 위해 숨어서 지냈다는 둔굴(遁窟)’이 있다. 이집 선생은 이 일을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호를 둔촌(遁村)’이라고 하였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遁村洞)의 동명(洞名)은 이집 선생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일자산의 산길을 걸을 때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개암나무였다. 개암나무는 개암을 담은 파란 주머니를 다닥다닥 달고서 뽐내며 서 있었다. 요즈음 자주 가는 대모산에서 보지 못하던 개암나무가 몇 그루씩 무리를 지어 서 있는 것을 보니 무척 반가웠다. 함께 걷던 친구에게 이게 무슨 나무인지 아느냐고 물으니, 잘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개암나무와 그 열매 개암에 관해 간단히 말한 뒤에 조금 떨어져 걸으면서 개암과 관련된 일들을 생각하였다.

 

   개암은 모양은 도토리 비슷하며, 껍데기는 노르스름하고 속살은 젖빛이다. 맛은 밤 맛과 비슷하나 더 고소하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마을의 뒷산에 개암나무가 유난히 많았다. 그래서 가을에 나무를 하러 산에 가서 나무에 달려 있는 개암을 따기도 하고, 땅에 떨어져 낙엽 속에 있는 개암을 줍기도 하였다. 그 때 겉껍질을 이로 물어 깬 뒤에 속껍질을 벗기고 먹던 개암의 고소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개암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 들은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옛날에 한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개암 하나를 줍자 이것은 아버지께 드려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하나를 줍자 이것은 어머니께 드려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또 하나를 줍자 그제야 이것은 내가 먹어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비를 피하려고 산속의 오두막집에 들어갔는데, 비가 그치지 않았다. 날이 저물자 도깨비들이 몰려와 방망이 하나를 세워놓고, “밥 나와라!” 하면 밥이 나오고, “고기 나와라!” 하면 고기가 나왔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 잔치를 하였다. 다락에 숨어 있던 그는 배가 고파 개암을 먹으려고 이로 겉껍질을 깨무니, ‘-’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놀란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놓아둔 채 도망하였다. 그가 도깨비방망이를 가지고 와서 금 나와라!” 하면 금이 나오고, “은 나와라!” 하면 은이 나왔다. 그래서 그는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웃마을의 한 젊은이가 일부러 도깨비가 나온다는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는 개암을 줍자 이것은 내가 먹어야지.” 하면서 주머니에 넣고, 그 다음에는 이것은 내 색시 주어야지.” 하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처럼 그는 자기와 자기 아내 몫부터 챙기고, 부모는 뒷전이었다. 그가 외딴집에 들어가 있으니, 도깨비들이 몰려왔다. 그가 개암을 깨물자 도깨비들은 다락으로 올라와 지난번에 가져간 방망이를 내놓으라며 때렸다. 그래서 그 사람은 도깨비한테 매만 실컷 맞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은 도깨비도 도와주지만, 자기만 아는 욕심쟁이는 벌을 받는다는 교훈적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산에서 나무하다가 개암을 줍게 되면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어른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마음을 다짐하곤 하였다. 그 후 나는 개암하면 고소한 맛과 더불어 도깨비방망이이야기가 떠오르곤 하였다.

 

   나는 부모님의 묘를 서울 가까운 곳으로 이장(移葬)하기 전까지 충남 홍성에 있는 선산(先山)에 벌초를 하러 다녔다. 벌초를 하러 가면, 선영(先塋) 가까운 산길 좌우에 늘어서 있는 개암나무가 나를 맞아주곤 하였다. 나는 개암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개암나무를 볼 때마다 옛일이 생각나서 반가운 마음으로 만져보곤 하였다. 그러나 개암이 여물지 않아 맛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워하곤 하였다. 개암이 익을 무렵에 다시 성묘를 갔으면 부모님도 찾아뵙고, 개암 맛도 볼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하여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작년에 김 교수 내외와 함께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있는 김유정 문학촌에 갔을 때의 일이다. 김유정의 생가와 전시관, 동상(銅像), 디딜방아 등을 관람하고, 안내표지판을 보면서 금병산 실레이야기길을 따라 걸었다. 그 때 길 옆 산언덕에 개암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개암나무들은 키가 크고, 아주 튼튼해 보였다. 개암나무가 자생한 것인지, 정성들여 재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 내가 국내에서 본 개암나무 중 가장 크고, 개암도 많이 열렸다. 얼마 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 연암(燕巖) 물레방아공원에 갔었는데, 그곳에서도 개암이 열린 개암나무 여러 그루를 보았다. 연암 박지원이 1792년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설치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공원에서 개암나무를 보니 무척 반가웠다. 나는 국내 여러 곳에서 개암나무를 보면서 터키 흑해 연안에서 보던 개암나무숲과 맛있게 먹던 개암을 생각하였다.

 

   나는 터키 카이세리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서 객원교수로 2009년부터 4년 동안 근무하였다. 그곳에 간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슈퍼마켓의 견과류 코너에서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함께 간 그곳의 G 교수에게 물으니, 영어로는 헤즐럿(hazelnut), 터키어로는 픈득(fındık)이라고 하였다. 헤즐럿은 우리말로 개암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다가 먹어보니, 정말 고소하고 맛이 좋았다. 어렸을 때 고향의 뒷산에서 주워 먹던 개암의 맛이 연상되었다.

 

   개암에 대한 기록을 보면, 동의보감(東醫寶鑑)에 기력을 높여주며, ()과 위()를 튼튼하게 해 준다고 적혀 있다. 이것을 보면,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개암의 효능을 알았던 것 같다. 요즈음에는 개암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그 장점이 널리 알려졌다. 개암에는 지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단순불포화지방이어서 몸에 좋고, 항암물질인 택솔(taxsol)이 들어 있어 항암 작용을 한다고 한다. 또 개암에는 칼슘과 철분도 많이 들어 있어 골다공증(骨多孔症) 예방에도 도움을 주고, 콜레스톨 수치를 낮춰주며, 암세포 활동을 억제해 준다고 한다. 비타민 E가 많이 들어 있어 심장질환 및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 등의 대사성 질환의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개암은 향()이 좋고 고소한 맛이 있어 커피와 초콜릿, 과자를 만드는 데에도 많이 넣고 있다. 얼굴과 피부에 영양을 공급해 주기 때문에 화장품으로도 이용하고 있다.

 

   터키 속담에 한 줌의 픈득(개암)이 평생의 건강을 지켜준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을 보면, 터키 사람들도 일찍부터 개암의 효능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개암은 터키미국이탈리아스페인 등에서 생산되는데, 터키의 흑해 지방에서 전 세계 소비량의 70%를 생산한다고 한다. 나는 터키에 있는 4년 동안 개암을 떨어지지 않게 사다 놓고 먹었다. 내가 개암을 좋아하니, 나와 인연이 있는 터키 사람들과 터키를 오가는 한국 사람이 개암을 사다 주곤 한다. 그래서 터키에서 돌아온 지 1년이 넘은 지금까지 계속하여 개암을 먹고 있다.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개암을 아느냐고 물으면 잘 모른다고 한다. ‘헤즐럿을 아느냐고 하면, “헤즐럿 커피요?” 하고 반문한다. 커피에 헤즐럿 향을 가미한 헤즐럿 커피는 마셔보았지만, 견과(堅果)인 헤즐럿 즉, 개암을 통째로 먹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묻는 것이리라. 요즈음에는 터키에서 수입한 개암을 남대문시장에서 판다고 한다. 개암은 예로부터 국내 여러 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니,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아 재배하지 못하는 식물은 아닐 것이다. 건강에 좋은 견과류이니 수입해 오는 것도 좋지만, 국내에서 재배하여 많이 생산되었으면 좋겠다.

                                                   <청하문학 13, 서울 : 문예운동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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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 바로 알고 바로 쓰기(10)>

무데뽀, 앗싸리, 부락, 엑기스와 같은 말은 쓰지 말아야

 

  며칠 전에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오가는 것을 들었다. “그렇게 무데뽀로 덤비지 말고 잘 생각해 봐./ 그 사람은 정말 무데뽀.” “그 사람 정말 앗싸리하더라./ 그 일은 질질 끌지 말고 앗싸리하게 거절해.” 이런 대화에 나오는 무데뽀앗싸리는 일본어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말인 줄 알고 쓰고 있다.

 

  ‘무데뽀(むてっぼう)’무철포(無鐵砲)’라는 한자어에서 온 말로, 아무데나 마구 쏘아대는 대포를 뜻한다. 이 말은 그 방향과 시각을 정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마구 쏘아대는 대포처럼 앞뒤 생각 없이 무슨 일을 하거나, 분별없이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 또는 그런 사람을 빗대어 표현하는 말이다. 이에 해당하는 우리말로는 무턱대고/저돌적또는 무모한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위의 대화는 그렇게 무턱대고(저돌적으로) 덤비지 말고 잘 생각해 봐./ 그 사람은 정말 무모한 사람이야.”로 바꿔 쓰는 것이 좋겠다.  ‘앗싸리(あっさり)’담박하게/산뜻하게/시원스럽게의 뜻을 가진 일본어이다. 이에 해당하는 우리말로는 산뜻하게/ 담박하게/ 시원스럽게/ 깨끗하게/ 간단하게가 있다. 그러므로 위의 대화는 그 사람 정말 시원스럽더라./ 그 일은 질질 끌지 말고 깨끗하게 거절해.”로 바꿔 쓰는 것이 좋겠다.

 

   요즈음에도 시골에 가면 자기가 사는 마을을 ‘00부락(部落)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 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격하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부른 이름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부락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마을을 ‘00부락이라고 하는데, 그 마을을 얕잡아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우리는 이러한 뜻을 지닌 부락이라는 말을 버리고 마을/동네로 쓰는 것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인삼 엑기스/매실 엑기스라고 하여 엑기스란 말을 우리말처럼 쓰고 있다. 이 말은 진액/추출액의 뜻을 가지고 있는 영어 엑스트랙트(extract)’에서 나온 말이다. 일본인들은 이 말을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우니까 엑기스라고 줄여서 말하였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가 일상용어처럼 쓰고 있다. 한국인은 어떤 외국어도 자유롭게 발음할 수 있으므로 굳이 일본식 영어를 따라 하지 말고, 영어의 원음 그대로 엑스트랙트라고 하거나 줄여서 엑스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영어의 엑스트랙트나 엑스보다는 같은 뜻을 가진 우리말 농축액/진수/진액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기독교타임즈 제451, 2006. 11. 25.>

 

<우리말 바로 알고 바로 쓰기(9)>

다 같이 기도합시다예배 처음 시간이오니는 부적절한 말

 

 

  대개의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시간에 장로님이나 권사님이 회중을 대표하여 기도를 하는 순서가 있다. 대표 기도를 하는 사람을 보면, 앞에 나가서 바로 기도의 내용을 말한다. 그러나 다 같이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은 사회자가 기도 순서임을 말하여 알거나, 혹은 말하지 않더라도 주보를 보고, 기도 순서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모두 눈을 감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뒤에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한참 뒤에 들리는 첫 말이 다같이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라고 한다면 조금은 당황스럽게 된다. 이러한 엇박자는 교인들로 하여금 대표 기도자의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대표 기도를 맡은 사람은 이런 불필요한 말을 하지 말고, 바로 기도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좋겠다.

 

   기도 중에 지금은 예배 처음 시간이오니~또는 이제 예배를 시작하오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예배 순서를 맡은 분들과 성가대의 입장에 이어 사회자의 예배 시작을 알리는 말로 시작된다. 대표 기도는 예배가 시작되어 조용한 기도(묵도), 성가대의 송영(頌榮), 예배에의 부름, 찬송, 성시 교독 다음에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대표 기도를 하는 사람이 지금은 예배 처음 시간이오니라고 한다면, 기도하기 전까지의 모든 순서는 예배가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것은 잘못 말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의 시종(始終)을 주께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기도 한다. 예배는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이 말 역시 적절하지 않을 뿐더러 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꼭 하고 싶으면 이 예배를 마칠 때까지 주께서 주관하시고,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예배 시작 전에 부르는 찬송을 준비 찬송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찬송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 준비 찬송이 있고, 본 찬송이 있을 수 없다. 예배 시작 전에 찬송을 부를 경우에도 준비 찬송이라 하지 말고, ‘몇 장 찬송으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참고문헌>

이송관김기창,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 알고 바로 쓰자, 서울 : 예찬사, 2000.

<기독교타임즈 제450, 2006. 11. 18.>

 

<우리말 바로 알고 바로 쓰기(8)>

 너무 좋아요(감사합니다/예뻐요).’는 잘못된 표현

 

   교인들 중에는 예배가 끝난 직후에 목사님께 설교 말씀이 너무 좋았어요.”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도움을 준 장로님께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한다.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집사님께 아이가 너무 예뻐요.”라고 칭찬의 말을 한다. 이런 말은 교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쓰는데, 실은 잘못 표현한 말이다.

 

  ‘너무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 분에 넘치게/ 과도하게의 뜻을 나타내는 부사이다. 따라서 이 말의 한정을 받는 말은 부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참외가 너무 익었다.’고 하면, ‘참외가 지나치게 익어서 먹을 수 없다./ 참외가 곯아서 먹을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 날씨가 너무 춥다.’고 하면 날씨가 지나치게 추워서 견디기 어렵거나 활동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위에 적은 설교 말씀이 너무 좋았어요.’는 설교 말씀이 지나치게 좋아서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장로님, 너무 감사합니다는 장로님의 친절이나 호의가 지나쳐서 과잉친절을 하였다는 말이 된다. ‘아이가 너무 예뻐요.’는 아이가 지나치게 예뻐서 좋지 않다는 말이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過猶不及). 그러므로 앞의 말은 설교 말씀이 매우 좋았어요.’, ‘대단히 고맙습니다.’, ‘아주 예뻐요.’라고 하면 말하는 사람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는 바른 표현이 된다. 교인들 중에는 목사님의 말씀에 너무 은혜를 받았어요.’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은 은혜를 지나치게 많이 받아서 감당할 수 없어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다. 이런 인사는 목사님께 대한 치하라기보다는 걱정을 끼쳐드릴 말이다. 이때에는 너무 대신에 많은이나 을 넣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어른들 중에 이 꽃은 너무너무 예뻐요.’라고 하거나, ‘걔는 너무너무 잘 생겼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너무너무너무를 강조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첩어(疊語)에 의한 강조는 아동 언어의 특징이므로 어른들이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너무너무란 말 대신에 매우/ 아주를 넣어 쓰는 것이 좋겠다. 이 말은 너무너무 미워.’, ‘홍수의 피해가 너무너무 비참하였다.’와 같이 한정을 받는 말이 가치개념으로 보아 부정적인 것일 때에는 써도 좋다.

<참고문헌>

박갑수, 우리말의 허상과 실상, 서울 : 한국방송사업단, 1983.

                                                                        <기독교타임즈 제448, 2006. 11. 4.>

<우리말 바로 알고 바로 쓰기(7)>

감사(축하)드립니다’는 감사(축하)니다’로 써야 

 

  손윗사람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감사드립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런 언어 습관이 널리 퍼져서 교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복에 감사드립니다.”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감사(感謝)는 한자어로 고맙게 여김. 또는 그런 마음.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의 뜻을 가진 명사이다. 여기에 접미사 하다가 붙어 동사가 되었다. 고마움을 나타내는 것은 내 마음의 표현이지 드리는 것이 아니다. 말씀은 드린다고 할 수 있지만, ‘감사는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손윗사람이나 하나님께 고마움을 나타낼 때에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드린다는 말을 넣어 말한다고 하여 공경의 뜻이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남의 좋은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뜻으로 인사할 때 축하드립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본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축하역시 드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축하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축하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축하'란 말 뒤에 '드린다'는 말을 넣어 말한다고 하여 공경의 뜻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기도할 때 감사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은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뜻으로 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말한 의도와는 다르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감사한다는 말이 되었다. 그러므로 감사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지 말고, 고마우신 하나님이라고 해야 한다. '고맙다'와 '감사하다'는 같은 뜻의 말이지만, 쓰이는 자리에 맞게 구별해서 써야 한다. 기도할 때 고맙고 감사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같은 말을 중복한 것이므로 적절하지 않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영광돌립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역시 옳지 않다. 이 말에서 감사영광을 받아 서술하는 말은 돌립니다’가 된다.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다. 그러나 감사는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은 감사하옵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해야 한다.

<참고문헌>

이송관김기창,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 알고 바로 쓰자, 서울 : 예찬사, 2000.

리의도,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려면 꼭 알아야 할 것들, 서울 : 설필, 1997.

                                                                     <기독교타임즈 제447, 2006. 10. 28.>

<우리말 바로 알고 바로 쓰기(6)>

‘십팔 번’은 ‘애창곡’, ‘즐겨 부르는 노래’, ‘장기’로 써야

 

 

  어느 학술 발표 모임에 참석하였을 때의 일이다. 식사 후에 오락회가 열렸는데, 진행을 맡은 사람이 참석자에게 노래를 하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는 000님이 십팔 번 ×××을 부르겠습니다.” 진행자는 십팔 번(十八番)’이란 말을 그가 즐겨 부르는 노래의 뜻으로 쓴 것 같다. 이 말은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도 흔히 듣는다. 교인 몇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릴 때에 한 사람이 “000 집사님의 18번인 000장을 부릅시다.” 하고 제안하기도 한다교인들끼리 돌아가며 찬송가나 가곡, 가요를 부르는 자리에서도 십팔 번이란 말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전에 인기를 끌었던 대중가요 <라구요>의 가사 중에 우리 아버지 십팔번은 000이구요, 우리 어머니 십팔번은 000”이란 구절이 있다. 이 노래는 방송 전파를 타고 널리 퍼졌다. 이 말은 일부 국어사전에도 가장 자랑으로 여기는 재주’, ‘가장 잘 부르는 노래’, ‘장기(長技)’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일본에서 들여온 관용어로, 별로 달가운 연원을 가진 말이 아니다.

 

  십팔 번은 일본어 쥬우하찌방(十八番)’을 이르는 것이다. 후지이(藤井之男)가 엮은 <언어대사전(諺語大辭典)>에 보면, 이 말은 배우 이찌까와 단쥬우로우가(市川團十郞家)에 전하는 18종의 예()가 있는데, 무릇 자랑으로 하는 일을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이찌가와 단쥬우로(1660~1704)는 이찌가와가(市川家)7세손으로, 17세기 에도(江戶) 전기에 일본 전통 희극인 가부끼(歌舞伎)의 대표적 배우였다. 그는 이찌가와가의 7대에 성공한 열여덟 가지 예()를 정리하였다. 이것이 가부끼 쥬우하찌방(歌舞伎十八番)’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 사람들이 가장 장기로 하는 예쥬우하찌방이라 이르게 되었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십팔 번이 된 것이다.

 

  일본 가부끼에서 유래한 십팔 번을 우리의 노래나 연희에서 그대로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노래를 말할 때에는 애창곡(愛唱曲)’, ‘즐겨 부르는 노래또는 잘 부르는 노래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노래가 아닌 춤이나 연희일 때에는 장기(長技)’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불필요한 일본어는 쓰지 말아야겠다. 

 

참고문헌: 박갑수, 우리말의 오용과 순화, 서울 : 한국방송사업단, 1984.

박숙희, 반드시 바꿔 써야 할 우리말 속 일본말, 서울 : 한울림, 1996.

                                      <기독교타임즈 제446, 2006.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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