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축은 이즈미르(İzmir)에서 남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 있는, 인구 약 25,000명의 도시이다. 셀축은 가까이에 에페스(에베소)가 있고, 많은 참배객이 찾아오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곳이어서 고대로부터 역사의 중심지로 이름이 있다. 셀축은 바울 사도가 전도 여행 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고, 성모 마리아의 집과 성 요한 교회 등이 있어서 기독교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다.

   셀축은 아야슬룩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평화로운 도시인데, 둘레에 있는 관광 명소를 찾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이곳은 활기가 넘치는 관광 명소라기보다는 관광객이 며칠 동안 머물면서 주변 관광을 하는 베이스 캠프(base camp)로 삼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Efes Arkeoloji Müzesi)

   셀축 시내에 있는 이 박물관에는 에페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은 모두 6개인데, 출토 장소와 종류에 따라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다1전시실에는 테라스식 주택에서 캐낸 저울, 장신구, 화장품 상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거기에 거대한 남근을 자랑하는 조각상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그 조각상은 다산(多産)의 신 프리아포스(Priapos)이다. 프리아포스는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그 지역과 농토, 포도밭을 지켜주는 신이다. 과장된 남근은 풍요의 상징이다.

다산의 신 프리아포스

로마 시대의 주화

   다른 전시실에는 주화(鑄貨), 장례용품, 조각상 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 전시실은 에로스(Eros)를 묘사한 조각들로 채워져 있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으로, 활과 화살을 가진 나체의 어린이로 나타나는데, 그가 쏜 금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지고, 납화살을 맞으면 증오하게 된다고 한다. 이 전시실에는 에로스의 역할을 드러내는 조각상이 많이 있다. , 거대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머리와 팔도 볼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 룸도 있어 소크라테스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 다른 전시실에는 검투사들이 사용하였던 무기와 훈련 방법, 이들이 주로 당했던 부상의 유형 등을 보여 주었다.

사랑의 신 에로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제6전시실의 아르테미스 상이다. 이 전시실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조각상이 양쪽에 하나씩 둘이 있는데, 좀 작은 것은 프리티네이온에서 발견된 것을 옮겨온 것이고, 조금 큰 것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것을 축소하여 복제한 것이다. 여신의 조각상의 좌우에 있는 동물과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은 아나톨리아의 지모신 키벨레를 떠올리게 한다. 여신의 가슴에는 둥근 알 같은 것이 20여개 달려 있다. 이것은 꿀벌의 알 또는 황소의 고환이라고 하는데, 풍요의 상징이다. 배 부분에는 사자, , 꿀벌, 장미, 그리핀(griffin, 머리·앞발·날개는 독수리이고, 몸통·뒷발은 사자인 상상의 동물)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풍요를 나타낸 것이다. 나는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고대인들이 사랑, 풍요에 대한 갈망이 매우 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아나톨리아의 지모신 키벨레 여신상

프리티네온에서 발견된 아르테미스 여신상  

                       아르테미스 신전에 있던 아르테미스 여신상

요한 사도 교회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요한 사도를 기리기 위해 세운 교회이다. 요한은 두 차례에 걸쳐 에페스에 왔다. 한번은 서기 37년에서 48년 사이에 어머니를 보살펴 달라는 예수의 부탁을 받은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이곳으로 모시고 와서 살았다.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요한이 자기의 신전에 참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트모스(밧모)섬으로 귀양 보냈다. 요한은 귀양에서 풀려나온 뒤인 서기 95년에 다시 와서 지금 요한 사도 교회가 있는 아야술룩(Ayasuluk) 언덕에서 복음서를 집필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요한 사도 교회는 4세기경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 교회는 6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Emperor Justianus, 재위 A.D. 527-565) 황제가 대대적으로 증축하였다.

   이 교회는 가로 110m, 세로 140m 넓이의 땅에 6개의 돔으로 되어 있었다. 교회는 안뜰, 현관, 본당, 부속 예배당, 세례장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본당의 제단에는 복음서의 저자들을 상징하는 4 개의 기둥과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상징하는 3개의 기둥을 세웠다. 교회 안에는 4세기경에 나무로 지은 작은 예배당과 요한 사도의 무덤이 있다. 예전에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목조 건물 안에는 예수, 성모 마리아, 요한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요한 사도 교회는 지진과 약탈 등으로 오랜 세월 폐허로 남아 있다가 100여 년 전에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교회 뒤편에는 교회 평면도와 복원 모형이 있어 당시의 웅장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요한사도교회 입구에 있는 박해의 문 

요한사도교회

                               요한사도교회 복원도

  요한 사도 기념교회를 가기 위해서는 박해의 문을 지나서 올라가야 한다. 박해의 문이 세워진 데에는 깊은 사연이 있다. 기독교가 공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한편으로는 기쁨과 감사의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 친지를 박해하여 죽게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들은 복수를 위해 돌멩이를 들고 원형경기장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그 돌을 던지지 않고, 요한 사도의 무덤 앞에 모아 박해의 문을 세웠다.

   나는 요한 사도 기념교회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에 박해의 문을 지나면서 박해를 받아 죽던 옛 신도들의 처참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돌을 들고 원형경기장으로 달려가던 성난 신도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성난 신도들이 복수를 위해 돌을 던지지 않고 자제한 뒤에 복수의 문을 쌓게 된 힘은 어디서 왔을까?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 친지를 죽인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멈추게 한 것은 바로 요한 사도가 가르친 사랑때문이었을 것이다. 성난 신도들이 자제하지 않고 복수의 돌을 던졌다면, 유혈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고, 기독교의 복음은 허구라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사건은 기독교 발전에 큰 변수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요한 사도가 힘주어 가르친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한사도교회의 세례소

                                요한 사도의 묘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

  
이오니아인들이 이 지역에 왔을 때, 전부터 살고 있던 렐레기안(Leleggian) 족은 풍요(豊饒)와 자연의 여신 키벨레(Cybele)’를 숭배하였다. 이오니아인들은 선주민들과 평화롭게 융화하면서 이 지역의 토속신앙인 키벨레 신앙을 받아들여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신앙을 탄생시켰다. 이것은 사냥과 관계가 깊은 일반적인 그리스 신화 속 여신 아르테미스가 아닌 다산(多産)과 풍요를 상징하는 에페수스(에베소)만의 독특한 아르테미스 신앙이다. 사람들은 이 여신을 모시고 제사하기 위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을 세웠는데,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원근 각지의 주민들은 이 신전에 와서 절하며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이 신전은 B.C. 356년 헤로스트라투스(Herostratus)라는 사람이 불을 질러 불에 탔다. 그런데 그가 신전에 불을 지른 이유는 유명해 지고 싶은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이 신전이 불타던 날 밤에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났다. 전설에 의하면 아르테미스 여신은 이날 밤 알렉산더의 출생을 축하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의 수도에 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신전에 불에 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34년에 이곳에 도착하여 보니, 신전을 다시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알렉산더는 공사비용을 자기가 부담할 터이니 신전을 자기 이름으로 바치게 해 달라고 하였다. 에페수스 사람들은 자기들이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알렉산더 이름으로 바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이 또 다른 신에게 신전을 바친다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닙니다.’ 하는 재치 있는 말로 거절하였다. 신전은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완공되었는데,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크고 웅대하였다. 이 때 지은 신전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가 되었다. 이 신전은 옛날의 웅장한 모습은 볼 수 없고, 기둥 하나만 외롭게 서 있다.

성모 마리아의 집

   성모 마리아의 집은 셀축에서 약 11km, 에페스(에베소)의 아래쪽 정문(북쪽문)에서 약 8.5km, 위쪽 정문(남쪽문)에서 약 7km 거리에 있는 뷜뷜산(Bülbül Dağı)에 있다. 이 집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에페스에 정착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A.D. 37-48) 살았던 곳이다.

   신약 성경 요한복음(19:26-27)을 보면, 예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 마리아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제자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당부를 받은 요한은 그 때부터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고 한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뒤에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고, 가뭄과 기근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 때 요한은 마리아를 모시고 수리디아 안디옥 즉 지금의 터키 안타키아(안디옥)로 갔다가 에페스(에베소)로 왔다. 에페스에 온 요한은 마리아를 조용한 곳에 집을 짓고 사시게 하였다고 한다.

   마리아가 에페스에 온 것은 확실하지만, 그녀가 살던 집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잘 몰랐다. 지금의 마리아의 집을 발견한 것은 독일인 수녀 캐더린 에머리히(Catherine Emmerich)1878년에 펴낸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에 의해서이다. 케더린 수녀는 이 책에서 병상에서 마리아의 환상을 보고, 꿈속에서 살던 집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1891년 이즈미르의 성직자들이 탐사(探査)하여 숲속에서 옛 집터를 발견하였는데, 이 책에 기록된 것과 거의 일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캐더린 수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독일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곳에 있던 집은 6세기경에 지어진 것인데, 일부는 1세기경의 것으로 밝혀졌다. 마리아의 집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성모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 집터를 성지(聖地)로 선포하였다.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이곳을 방문한 뒤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마리아의 집으로 가는 길가의 마리아상

   나는 200911월에 승용차를 빌려 타고 이곳에 갔다. 마리아의 집으로 올라가는 꼬불꼬불한 산길의 양편에는 올리브나무와 무화과 나무가 울창하였다. 올라가는 길가에는 성모 마리아의 동상이 에페스 유적지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그 옆에는 마리의 집 방문 시간(08:00-19:00)을 적고, 그 아래에 앞으로 6km를 더 가라는 말을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마리아의 집 입구에는 올리브나무와 키가 큰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기념품 가게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커다란 웅덩이가 보이는데, 옛날 세례를 행하던 곳이다. 깊이가 1.5m쯤 되어 보이는 이 웅덩이는 꽤 넓어서 한꺼번에 50여 명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서 조금 앞으로 가니, 두 길이 있었다. 위로 난 길은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래에 있는 길은 나오는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위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터키에 사는 교민들이 만들어놓은 한글 안내판이 서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마리아의 집 앞에 있는 한글 안내판

                                 마리아의 집 앞의 마리아상

교회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아담하였다. 교회 내부는 사진 촬영을 금하는 곳이므로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옷깃을 단정히 한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 강대상 뒤에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걸려 있다. 은은한 불빛이 비치는 교회 안은 엄숙하고 경건함을 느끼게 하였다.

                                           마리아의 집

마리아의 집 앞에서 촛볼을 켜고 기도하는 사람들

                              마리아의 집 앞에 있는 소원의 벽

   교회 아래에는 성수(聖水)로 알려진 샘터가 있다. 그 옆에는 촛불을 켜놓고 소원을 비는 곳도 있고, 소원을 적은 쪽지를 걸어놓은 '소원의 벽도 있다. 소원의 벽에는 소원을 적은 종이와 헝겊이 잔뜩 걸려 있다. 그것은 외국인이 걸어놓은 것도 있지만, 무슬림인 터키인들이 걸어 놓은 것이 더 많다고 한다. 무슬림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비는 것은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에 마리아를 선지자 예수(İsa Peygamber)의 어머니(Meryemana)’로 기록하였으므로, 마리아를 거룩한 여인으로 숭배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외국인인 듯한 사람이 많았지만, 터키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히잡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슬림인 것이 확실한 여인들도 더러 보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이곳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무슬림들도 성지로 받드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누가의 묘

   에페스(에베소) 유적지로 들어가는 주차장 옆에 누가의 묘가 있다. 누가의 묘에는 십자가 밑에 황소를 새긴 비석이 있다. 누가의 묘 앞에는 한글로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거기에는 누가의 행적과 누가의 묘 발견 경위 등이 적혀 있다.

   누가의 묘는 이오니아식 건축 양식을 따라 16개의 기둥을 세워 16m의 길이로 건축된 건물 옆에 있었다. 지금은 몇 개의 기둥만 보이는데, 원래 이 건물은 로마 시대에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었다. 이후 비잔틴 시대에 그 구조를 변형시켜 서쪽을 입구로 하고, 동쪽을 머리 방향으로 하여 예배 처소로 사용하였다. 1860년 영국의 고고학자 P.J. Wood가 오데이온을 발굴하던 중 귀가 길에 본건물의 일부인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판정하였다. 누가의 묘는 잊혀져 있었는데, 이즈미르에 사는 교우들이 에페스 박물관에 누가의 무덤을 손질해 달라고 청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누가는 헬라인으로 수리아 안디옥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엔자와 어머니 이리스는 로마의 판사 디오도로스 시리누스의 아버지인 푸리스쿠스의 종이었다. 푸리스쿠스는 누가의 아버지가 헌신적으로 일하다가 죽자 그의 가족을 해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였다. 누가는 디오도로스 시리누스의 딸 루불리아를 사랑하였는데, 그녀가 말라리아로 죽었다. 그는 자기의 애인을 앗아간 원수와 싸워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거기서 감리엘이라는 유대인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예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바울의 친구이자 동역자, 개인 의사로 가까이 하면서 바울의 선교를 도왔다.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독교인으로 로마의 원로인 클레멘스 집정관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올리브 나무에 목매달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후 누가의 시신은 요한 사도가 사역하는 에페스에 묻혔다고 한다.

                                   누가의 묘 비석

7인의 잠자는 동굴(Yedi Uyunlar Mağarası)

   마리아의 집에서 에페스로 가는 길에서 조금 들어가면 잠자는 7인의 동굴이 있다. 이 동굴에는 아주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A.D. 3세기 중엽 로마 데키우스(Decius) 황제가 기독교를 몹시 탄압하였다. 7인의 기독교인이 박해를 피하여 파나이오르 산(Panayır Dağı) 북동쪽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쉬다가 잠이 들었다. 데키우스 황제의 수하들은 이 동굴을 발견하고, 벽을 쌓아 동굴 입구를 막아버렸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뒤에 이 지역에 지진이 발생하여 동굴 입구를 막았던 벽이 허물어졌다. 그 때 잠들었던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들은 배가 몹시 고팠다. 그 중 한 사람이 마을로 내려가 보니,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먹을 것을 사려고 가게에 들어가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놓았다. 가게 주인은 이 돈은 옛날에 쓰던 돈으로 지금은 쓰지 않는데, 어찌 이 돈을 내느냐?”고 물었다. 그가 사실대로 말하니, 가게 주인은 지금은 데오도시우스 2세 황제 시대로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데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이를 부활의 증거로 받아들이고, 이곳을 방문하여 부활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7인이 돈독한 신앙을 지키며 살다가 죽자 이 동굴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이곳에 교회를 지었으나 허물어져 지금은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동굴에는 수많은 구덩이가 보이는데, 수도사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이 전설은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1810절 주()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무슬림들도 이곳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7인의 잠자는 동굴

7인의 잠자는 동굴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사르디스는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8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옛 도시로, 지금은 사르트(Sart)로 불린다. 사르디스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데이고, 구약 성경에 나오는 스바랏(Sepharad)’이다. 사르디스는 트몰루스 산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산줄기 중 헤무르스 강을 끼고 있는 산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던 전략적 요충지로, B.C. 7세기 당시 번성했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다.

   사르디스는 B.C. 546년경 페르시아에 정복당하여 지배를 받았다. 페르시아가 알렉산더에게 패한 뒤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B.C. 133년 로마로 넘어갔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대도시권의 중심지이자 로마령 리디아 지방의 사법권 집행의 중심지였다. A.D. 17년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어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번영하여 아나톨리아의 대도시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다. 그 당시에 모직물, 양탄자, 금세공 등의 상공업이 특히 성하였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사르디스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대 교회 가운데 하나에 속하였던 관계로 대교구가 설치되는 등 번성하였다. 그러나 잦은 지진과 터키 및 몽골 민족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지금 볼 수 있는 사르디스 유적은 1910~1914년에 발굴하고 복원한 것이다. 이곳에는 고대 리디아의 성채와 리디아인 무덤이 약 1,000개 정도 남아 있다.

   리디아 왕국의 수도인 사르디스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러나 약한 곳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 하였기 때문에 두 번이나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한 번은 기원전 546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시루스) 왕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고, 그 다음은 기원전 218년에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에 의해 함락되었다기원전 546년 페르시아가 쳐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리디아 군사들은 성 밖의 전투에서 패하자 성안으로 들어와 성문을 닫고 수비에 전력을 다하였다. 페르시아군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아크로폴리스를 공격할 방법을 찾지 못해 여러 달 동안 지체하였다. 리디아 군사들은 적군이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안심하면서 긴장을 풀었다. 어느 날, 성 위에서 보초를 서던 리디아 군사 한 명이 깜빡 졸다가 투구를 성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를 본 페르시아 군사들은 얼른 몸을 숨겨 자취를 감추었다. 투구를 떨어뜨린 병사는 적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성이 맞닿아 있는 절벽 사이로 내려와 투구를 주워가지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의 약점을 알아차린 페르시아 군은 그곳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성문을 열어 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요한계시록 3장의 사데교회에 보낸 서신에 만일 네가 깨어 잊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3:3)”는 경고의 말씀은 이 이야기와 관련된 표현이라 하겠다.

   사르디스 유적지에 도착해 보니, 산줄기에 끝에 요새벽(要塞壁)의 유적이 남아 있어 아크로폴리스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토물루스 산에서 아크로폴리스로 놓았던 로마풍의 수로교(水路橋)의 잔해 있고, 로마 시대의 극장과 경기장도 있다. 아크로폴리스 서쪽에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높이 서 있는데, 그곳이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이다. 남아 있는 기둥의 높이와 숫자로 보아 이 신전은 규모가 대단히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신전에서는 아르테미스 신은 물론 소아시아 지역에서 풍요의 신으로 믿던 키벨레(Cybele) 신도 모시고 제사하였다고 한다. 이 신전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에 교회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신전 남동쪽 구석에 소규모 교회당을 지어 예배를 드렸다. 지금 신전 옆에 둥근 담과 아치형 창문이 있는 벽돌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4세기경에 세운 교회 건물이다. 유적지에는 로마식 대규모 목욕탕, 체육관, 유대교 회당 등의 흔적도 있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이곳은 당대 최고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도시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규모가 매우 큰 것으로 보아 당시에 아르테미스 신과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신앙이 매우 널리 퍼지고 성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이곳에는 참된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라 하였고,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3:4).”이라고 하였다. 로마 시대에 부()와 권세(權勢)를 상징하는 옷은 자주색이었으나 사데의 신앙인은 흰옷을 약속 받았다. 그리고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의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3:5).”라고 하여 칭찬과 함께 앞으로 받을 상을 말씀하셨다.


   사데 지역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세계 최초의 금화(金貨)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B.C. 560년경 크로이소스왕은 엄청난 양의 사금(砂金)을 채취해 최대의 부()를 이룬 왕이 되었다. 당시에 순금을 제련하던 도가니가 이곳에서 무려 300여 개 발굴 되었는데, 도가니 밑바닥에는 순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금이 많이 생산되다 보니, 이곳 주민들의 생활도 비교적 넉넉하였다. 그러다 보니,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숭배(偶像崇拜)와 물질문화(物質文化)에 빠져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3:1).”라는 책망을 받았다.

   내가 사데 유적지에 간 20116월에도 이곳에서는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는 거기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은 사르트(Sart)’라고 한다. 옛날의 영화를 뒤로 하고, 폐허로 남아 있는 사데의 모습을 보고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쓸쓸하였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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