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는 예로부터 나무나 돌로 남녀 성기(性器)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신체(神體)로 상정(想定)하거나, 남녀 성기 모양의 바위 또는 바위에 성기나 성교(性交) 장면을 조각한 것을 신체로 상정하여 제의를 올리는 신앙이 있다. 이를 성기신앙(性器信仰) 또는 성신앙(性信仰)이라고 한다. 이것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전해 오고 있다.   
 
            남근을 제물로 받는 해신(海神)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 2리 신남 마을에서는 매해 음력 정월 보름과 10월 첫 오일(午日)에 나무로 정성껏 깎은 남근(男根)을 해신당(海神堂) 당집 안과 신나무[神樹, 神木]에 제물로 바치고, 마을의 평안과 풍어(豊漁)를 빈다.

  해신당 안에는 중앙의 벽에 젊고 예쁜 해신(海神)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제단 위에는 나무로 실물과 같거나 약간 크게 깎은 남자의 성기 9개를 짚으로 엮어 세워 놓았다. 해신도(海神圖)의 왼쪽 기둥에는 남근 5개를 옆으로 넣고 유리를 끼운 상자가 걸려 있고, 오른쪽 기둥에는 새끼줄에 긴 남근 9개가 걸려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가로지른 나무에도 2개가 걸려 있다.

  해신당 뒤 바다쪽으로 약 10m쯤 떨어진 곳에는 몇 백년 되었음직한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검정 색으로 '海神堂'이라고 세로로 쓴 널빤지가 걸려 있다. 이 나무가 오래 전부터 남근(男根)을 제물로 받던 신나무이다.

  이 마을에 이러한 풍습이 생겨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이 마을에 서로 사랑하여 장차 결혼하기로 약속한 처녀와 총각이 살았다. 하루는 처녀가 해신당 북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돌김을 뜯으러 갔다. 처녀는 김을 뜯는 데에 정신이 팔려 파도가 높아지는 줄도 몰랐다. 총각이 약속한 시간에 처녀를 데리러 가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에 풍랑이 심하여 도저히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처녀는 바다에 빠지지 않으려고 바위를 잡고 애를 쓰다가 힘이 빠져 풍랑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 바위를 '애바위'라고 한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마을 사람들은 고기가 잡히지 않아 생계가 곤란하게 되었다.

  어느 날, 죽은 처녀가 그 총각의 꿈에 나타나 지금 신나무로 받드는 향나무에 자기의 영혼을 모셔달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나무에 처녀의 영혼을 모시고, 위령제(慰靈祭)를 지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냈건만, 여전히 물고기는 잡히지 않고,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젊은이들이 죽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러자 한 어부가 술에 만취하여 이곳에 와서 욕을 하면서, 신나무에다가 오줌을 누고 내려왔다.

  그 다음날, 그 어부가 바다에 나가 그물질을 하였는데, 그 사람은 많은 고기를 잡았다. 그는 만선(滿船)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면서, 자기가 고기를 많이 잡은 것은 간밤에 처녀의 영혼을 모신 신나무에 방뇨를 했기 때문인데, 처녀의 영혼은 제물보다 남자의 성기를 원한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어부는 그 다음날에 몇 가지 제물과 함께 소나무로 깎은 남근을 가지고 가서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그는 그 다음날에도 남달리 많은 고기를 잡았다.

  어부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남근을 깎아 향나무 앞에 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를 지낸 사람은 모두 고기를 많이 잡았다. 마을 사람들은 제각기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는 함께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동제(洞祭)로 지내기로 하고, 정월 보름날과 시월 첫 오일(午日)에 동제를 지낸다. <1994년 8월 20일에 이 마을의 이장 김진철(남, 48세, 어업) 씨에게 들은 이야기임.>

  바다의 상징적인 성(性)은 여성이라 할 수 있다. 바다의 신이 된 신남 마을 처녀가 성적으로 결핍된 상태에서는 그 마을 사람들이 평안과 풍요를 누릴 수 없다. 해신(海神)이 성적인 충족을 얻어야만 마을의 평안과 풍어(豊漁)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남근을 깎아 해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전설과 목제(木製) 남근(男根)을 바치는 습속은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안인진 2리의 '해랑당(海娘堂)'에도 전해 왔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 바닷가 안인진 마을에 한 어부가 과년한 딸과 함께 살았다. 어느 날, 그 처녀는 바닷가에 나갔다가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 청년을 사모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그녀는 그 청년을 만나 청혼을 하리라 굳게 마음먹고, 그 청년이 있는 곳으로 갔는데, 그 청년은 벌써 고깃배를 타고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바다로 나간 뒤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청년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자, 처녀는 마침내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 처녀가 죽은 후 이 마을에는 고기가 전혀 잡히지 않을 뿐더러 연달아  재앙이 생기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 사람의 꿈에 그 처녀가 나타나서 말하였다.

  "나는 시집도 못 가고 죽어 이렇게 원혼(寃魂)이 되었소. 내일부터라도 이 마을 높은 곳에다 나를 위하여 사당을 짓고, 남자의 신(腎)을 만들어 걸어 주시오. 그러면 고기도 많이 잡히게 될 것이오."

  마을 사람들은 그 처녀가 말하던 대로 사당을 짓고, 오리목나무로 남자의 신을 만들어 걸어 놓고 빌었다. 그랬더니, 과연 그 이튿날부터는 고기가 많이 잡히므로, 어촌 사람들이 그것을 많이 만들어 걸게 되었다고 한다.

  안인진 해랑당에는 1940년대까지 남근을 깎아 바치고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가 행하여졌다고 한다. 지금은 그런 민속이 없어졌는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에 이 마을 이장인 이천오(李千五)의 부인에게 해랑신이 덮쳐 미쳐가지고 밤낮으로 해랑당에 오르내리며, "내가 시집을 갈 터이니, 김대부신(金大夫神)과 혼인 시켜 달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믿지 않자, 이장 부인의 병세는 악화되어 사경(死境)에 이르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동네 노인들이 상의한 끝에 '김대부지신위(金大夫之神位)'라 쓴 위패(位牌)를 만들어 놓고 '해랑신(海娘神)'과 혼인하는 제를 지내니, 이장 부인의 병이 나았다.

  해랑신이 혼인을 하자 마을 사람들은 남근을 바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울진에서 온 큰 배의 선주(船主)가 고기를 많이 잡아가지고 가다가 해랑당에 소를 잡아 제를 지내며 남근을 깎아 달아맸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제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다 고꾸라져 피를 쏟고 즉사해 버렸다. 그것은 남편이 있는 해랑신에게 간음을 시킨 죄로 신벌(神罰)을 맞은 것이라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는 남근을 바칠 수가 없게 되어 현재는 제만 지내고 있다.<김태곤, 한국민간신앙연구. 서울 : 집문당,1983, 157쪽 참조>

  이 이야기는 해랑당에 남근을 깎아 바치는 민속이 없어진 내력을 아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해랑당에 목제 남근을 바친 것은 이들이 성기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중지한 것은 이 마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성기에 대한 신앙심이 약화된 때문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강화된 미신타파 운동과 폭넓게 자리잡게 된 합리적 사고방식, 그리고 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숨기려는 유교적인 체면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에 따라 남근을 깎아 바치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가장 심각하게 고민한 사람이 그 마을의 이장과 그 부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그것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그래서 해랑신을 김대부신과 혼인시키고, 남근 바치는 일을 중지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해랑당에 목제 남근을 바치는 일은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현재 경기 지역에서 동신으로 신앙되고 있는 부군당(府君堂)의 네 벽에 목제 남근 여러 개를 걸어 신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조선 후기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전한다. 또 193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의  조선의 무격(朝鮮の巫覡) 부록 사진에도 '부근당새물(付根堂賽物)'이란 설명으로 목제 남근과 짚신의 사진이 있다. 이것은 이규경의 기록을 실증해 주는 동시에 1930년대까지도 부군당에 남근이 바쳐졌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2년 정축 8월 병진 조에 '부근(付根)'이란 명칭으로 부군당에 대한 기록이 있고,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부군당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이로 보아 부군당 신앙이 조선 중기 이전부터 문제시 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용인 한국 민속촌의 동헌 뒤에 가면, 관원들이 부임하면 임기 중의 평안과 승차되어 떠나게 되기를 빌었다는 부군당이 있다. 당집 안에는 신령의 그림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 길이가 약 50센티미터, 둘레가 약 30센티미터 되는 남근 모양의 자연석이 대나무 통에 고정되어 있다. 이것은 전에 부군당에 돌로 된 남근석을 바치던 습속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이제 남근을 제물로 바치는 습속은 신남의 해신당 한 곳만 남게 되었다. 이 마을 사람들의 일부는 이것을 마을의 자랑거리로 삼아 신남 마을과 신남 해수욕장을 널리 알리려 하고 있다.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을 찾는다고 한다.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재단하려는 독단에서 벗어나, 성을 출생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고, 성기신앙을 지녔던 옛사람의 의식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면, 신나무에 매달아 놓은 남근을 가져가는 일도 없을 것이요, 성을 쾌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데서 생기는 여러 가지 사회 문제와 성범죄도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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