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에 있는 한국민속촌에 가면 초가집 앞 가늘게 높이 자란 소나무에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다.'는 뜻의 한자어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쓴 천이 걸려 있고, 그 위에 가로로 묶은 막대기에 오쟁이, 바람개비, 남자 성기 모양의 나무, 수수 이삭, 곡식을 넣은 주머니 등이 매달려 있다. 그 앞에 적어 놓은 설명문에는 풍농( 農)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 볏가릿대[禾竿]라고 적혀 있다. 이곳을 지나는 관람객 중에는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유심히 살펴보고, 설명문을 읽어본 뒤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고, 안내자나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게 무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외국인 중에는 이를 아주 신기하게 여겨 안내자에게 설명을 부탁하기도 한다. 


  볏가릿대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이나 보름날에 세웠다가 음력 2월 초하룻날 내린다. 2월 초하루는 '머슴날'이라 하여 농사가 시작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바탕 놀 수 있는 농부들의 명절이다. 볏가릿대는 농가에서 개인적으로 세우기도 하지만,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워 풍농을 기원한다. 볏가릿대 세우기는 충청남도 서산·당진·태안 지역을 비롯한 충청 서북 지역과 전라도 진도·해남 일부 지역, 그리고 경상도 일부 지역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 널리 행하여 졌으나, 일제 시대부터 급속히 소멸되어 요즈음에는 일부 지방에서만 행해지고 있다. 볏가릿대의 형태는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충남 서산의 볏가릿대

  충남 서산 지방에는 요즈음에도 볏가릿대를 세우는 마을이 여럿 있다. 그 중 2002년 음력 정월 대보름(양력 2월 26일)에 세웠다가 음력 2월 초하룻날(양력 3월 14일)에 철거한 서산시 지곡면 장현 2리의 볏가릿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회관 옆의 밭가에 볏가릿대를 세웠다. 볏가릿대는 긴 대나무로 장대를 만들고, 장대 끝에 두 줌 정도의 수수목을 묶고, 그 아래에 벼·팥·조·수수 등의 곡식을 백지로 싸서 묶었다. 그리고 그 아래 부분에 짚으로 꼰 동아줄 세 가닥을 묶은 뒤에 장대를 세우고, 동아줄 세 가닥을 잡아당겨 땅에 박은 말뚝에 묶어 고정하였다. 
  볏가릿대는 음력 2월 1일에 내렸다. 이날 정오 무렵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회관 앞에 모여 한바탕 풍물놀이를 한 뒤에 볏가릿대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제물은 볏가릿대 앞에 자리를 깔고 상 두 개를 놓은 뒤에 한 상에는 돼지머리와 사과·배·귤·과줄·약과·두부 등을 진설하고, 다른 한 상에는 쌀과 팥을 넣어 찐 떡시루와 촛대를 올려놓았다. 제물 진설이 끝나자 도포를 입고 두건을 쓴 3명의 제관(祭官)이 차례로 술잔을 부어 올리고 절을 한 뒤에 역시 도포를 입고 두건을 쓴 축관(祝官)이 풍농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을 읽은 뒤에 축문을 불에 태웠다. 제관들이 음복(飮福)을 하고 옆으로 비켜서자,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만 원 짜리 지폐를 한 장 또는 두세 장씩을 돼지 입에 끼운 다음 절을 하였다.   
  제사를 마치고 땅에 고정했던 동아줄을 풀어 볏가릿대를 눕혔다. 볏가릿대를 고정하였던 동아줄은 서려서 짚으로 만든 섬에 넣었다. 종이에 싼 곡식을 차례로 풀어 싹이 텄는가를 본 뒤에 다시 싸서 동아줄을 서려 넣은 섬 안에 넣었다. 곡식의 싹이 텄으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그리고 곡식이 가득 든 섬을 묶듯이 새끼줄로 묶었다. 그 섬을 한 사람이 지게에 얹어 짊어지고 앞을 서니, 제복을 입은 제관들이 그 뒤를 따르고, 그 뒤에 풍물패가 풍물을 울리며 따라갔다. 그 뒤에 마을 사람들이 줄을 지어 따랐다. 섬을 진 사람은 자기 집으로 가서 곳간에 섬을 내려놓았다. 뒤따라온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축하의 말을 하고 마을회관으로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푸짐하게 차린 음식과 술을 나눠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볏가릿대 세우기는 농사철이 되기 전에 미리 농사 짓는 것을 가장하여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의례(農耕儀禮)로, 가농작(假農作) 또는 내농작(內農作)이라고도 한다. 서산 지방에서 볏가릿대에 매달았던 곡식 봉지를 섬에 넣어 지고 가서 곳간에 둔 것은 곡식을 추수한 것을 의미한다. 제사의 규모나 절차를 보면, 볏가릿대를 세울 때에는 간단히 제를 올리지만, 볏가릿대를 내릴 때에는 먼저보다 규모가 큰 제사를 올린다. 이것은 곡식을 추수한 뒤에 추수 감사의 뜻으로 큰 규모의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주술적인 힘을 지닌 볏가릿대 

  볏가릿대를 세워 풍농을 기원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볏가릿대의 상징적인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하늘로 곧게 선 장대는 신목(神木)으로, 천상의 신이 지상을 오르내리는 통로(通路)의 의미를 지닌다. 볏가릿대는 대나무나 소나무를 사용하는데, 대나무는 휘어지지 않고 곧게 뻗어 올라가므로 마을의 운수가 대나무와 같이 곧게 뻗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용한다고 한다. 소나무는 솔잎처럼 푸르고 곧은 절개를 닮으라는 의미에서 사용한다고 한다. 짚은 땅에서 자란 다산(多産)의 식물로, 우리의 주식(主食)이 되는 벼를 타작하고 남은 줄기여서 신성(神聖)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짚이 쭉쭉 뻗치도록 꼰 동아줄 세 가닥 역시 신성의 의미를 지닌다.
 
  신이 오르내리는 통로로 신성의 의미를 지닌 장대에 벼, 수수, 조, 팥 등을 백지에 싸서 매다는 것은 그와 같은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원하는 모방주술(模倣呪術)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모방주술 심리에서 보면, 생생력(生生力, 또는 생산력)을 지닌 최고의 존재인 달이 새해 들어 처음 뜨는 정월 대보름날 볏가릿대를 세워 풍년을 기원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정월 대보름에 볏가릿대를 세우는 것이다.

  용인 민속촌에 세운 볏가릿대에 매달은 짚으로 만든 오쟁이나 수수 이삭, 곡식을 넣은 주머니 등은 곡식 농사가 잘 되기를 비는 뜻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바람개비나 남자 성기 모양의 나무를 매단 것은 무슨 의미일까? 바람개비는 바람을 조절하여 제 때에 비가 내리고, 햇볕이 쬐기를 비는 뜻을 담은 것이고, 남자의 성기는 생산력을 지닌 성기처럼 농작물이 번성하고 열매를 맺어 풍년이 들기를 비는 마음에서 매달은 것이라 하겠다. 이런 것을 매다는 것 역시 이들이 주술적인 힘을 발휘하여 풍년이 들게 할 것이라고 믿는 심리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볏가릿대는 풍농을 기원하는 농경의례이므로, 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어떤 마을에서는 우물가에 볏가릿대를 세운다. 마을회관 옆에 볏가릿대를 세운 서산시 지곡면 장현 2리에서는 2월 초하룻날 제사를 지내기 직전에 맑은 물을 그릇에 담아놓고 풍물을 울리면서 "뚫어라, 뚫어라! 물구녕만 뚫어라!" 하고 고사소리를 하였다. 이것은 일 년 내내 물 걱정 없이 농사 지을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볏가릿대에 대한 기원

  조선 후기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시골 민가에서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들고, 그 안에 벼·기장·피·조의 이삭을 넣어서 싸고, 또 장대 위에 매달아 집 곁에 세우고, 새끼를 내려뜨려 고정시킨다. 이것을 화적(禾積, 볏가리 또는 낟가리)이라 하는데, 풍년을 비는 것이다. 아이들이 새벽에 일어나 이 화적을 둘러싸고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면서 풍년이 들라는 기원을 하다가 해가 뜨면 그만 둔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볏가릿대를 세우는 풍속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조선 후기에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동국세시기}에는 "대궐 안에서 경작(耕作)하고 수확하는 모양을 본떠서 좌우로 편을 갈라 승부를 겨루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도 풍년을 비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것 역시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에 농사짓는 일을 흉내내어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농경의례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9년 조에 "민간에서 매년 상원(정월 대보름)에 농잠상(農蠶狀)을 만들어 놓고, 풍년의 징조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풍농을 기원하는  가농작(假農作)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뒤에 농사를 권장하는 정책에 따라 궁중의 의식이 되어 매우 다양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런 궁중의 의식은 그 폐해가 노출되어 뒤에 없어졌지만, 민간으로 전파되어 전국적으로 행하여 졌을 것이다. 그래서 {동국세시기}와 {경도잡지(京都雜志)}와 같은 문헌에 기록되고, 단원 김홍도의 [경직도(耕織圖)]에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풍속이 일본에도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볏가릿대가 일본에 영향을 끼친 것이라 하겠다. 

  새 해 들어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에 농사의 핵심 절차를 미리 행하여 풍농을 기원하는 농경의례인 볏가릿대 세우기는, 비슷한 행위를 하면 그와 비슷한 결과가 온다고 믿는 모방 주술 원리를 바탕에 깔고 행하여지는 민속이다. 이것은 주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풍농을 기원하는 농사꾼의 간절한 마음은 확인할 수 있다. 농사꾼들은 풍농을 기원하는 볏가릿대 세우기를 통하여 마을 사람들끼리 지연(地緣) 공동체의 의식을 다지고, 따뜻한 정을 나누면서 새해 농사에 전념할 것을 다짐하곤 하였다. 그러고 보면, 볏가릿대 세우기는 농촌 사람들의 축제의 한 마당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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