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디스는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8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옛 도시로, 지금은 사르트(Sart)로 불린다. 사르디스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데이고, 구약 성경에 나오는 스바랏(Sepharad)’이다. 사르디스는 트몰루스 산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산줄기 중 헤무르스 강을 끼고 있는 산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던 전략적 요충지로, B.C. 7세기 당시 번성했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다.

   사르디스는 B.C. 546년경 페르시아에 정복당하여 지배를 받았다. 페르시아가 알렉산더에게 패한 뒤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B.C. 133년 로마로 넘어갔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대도시권의 중심지이자 로마령 리디아 지방의 사법권 집행의 중심지였다. A.D. 17년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어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번영하여 아나톨리아의 대도시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다. 그 당시에 모직물, 양탄자, 금세공 등의 상공업이 특히 성하였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사르디스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대 교회 가운데 하나에 속하였던 관계로 대교구가 설치되는 등 번성하였다. 그러나 잦은 지진과 터키 및 몽골 민족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지금 볼 수 있는 사르디스 유적은 1910~1914년에 발굴하고 복원한 것이다. 이곳에는 고대 리디아의 성채와 리디아인 무덤이 약 1,000개 정도 남아 있다.

   리디아 왕국의 수도인 사르디스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러나 약한 곳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 하였기 때문에 두 번이나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한 번은 기원전 546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시루스) 왕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고, 그 다음은 기원전 218년에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에 의해 함락되었다기원전 546년 페르시아가 쳐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리디아 군사들은 성 밖의 전투에서 패하자 성안으로 들어와 성문을 닫고 수비에 전력을 다하였다. 페르시아군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아크로폴리스를 공격할 방법을 찾지 못해 여러 달 동안 지체하였다. 리디아 군사들은 적군이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안심하면서 긴장을 풀었다. 어느 날, 성 위에서 보초를 서던 리디아 군사 한 명이 깜빡 졸다가 투구를 성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를 본 페르시아 군사들은 얼른 몸을 숨겨 자취를 감추었다. 투구를 떨어뜨린 병사는 적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성이 맞닿아 있는 절벽 사이로 내려와 투구를 주워가지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의 약점을 알아차린 페르시아 군은 그곳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성문을 열어 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요한계시록 3장의 사데교회에 보낸 서신에 만일 네가 깨어 잊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3:3)”는 경고의 말씀은 이 이야기와 관련된 표현이라 하겠다.

   사르디스 유적지에 도착해 보니, 산줄기에 끝에 요새벽(要塞壁)의 유적이 남아 있어 아크로폴리스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토물루스 산에서 아크로폴리스로 놓았던 로마풍의 수로교(水路橋)의 잔해 있고, 로마 시대의 극장과 경기장도 있다. 아크로폴리스 서쪽에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높이 서 있는데, 그곳이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이다. 남아 있는 기둥의 높이와 숫자로 보아 이 신전은 규모가 대단히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신전에서는 아르테미스 신은 물론 소아시아 지역에서 풍요의 신으로 믿던 키벨레(Cybele) 신도 모시고 제사하였다고 한다. 이 신전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에 교회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신전 남동쪽 구석에 소규모 교회당을 지어 예배를 드렸다. 지금 신전 옆에 둥근 담과 아치형 창문이 있는 벽돌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4세기경에 세운 교회 건물이다. 유적지에는 로마식 대규모 목욕탕, 체육관, 유대교 회당 등의 흔적도 있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이곳은 당대 최고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도시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규모가 매우 큰 것으로 보아 당시에 아르테미스 신과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신앙이 매우 널리 퍼지고 성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이곳에는 참된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라 하였고,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3:4).”이라고 하였다. 로마 시대에 부()와 권세(權勢)를 상징하는 옷은 자주색이었으나 사데의 신앙인은 흰옷을 약속 받았다. 그리고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의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3:5).”라고 하여 칭찬과 함께 앞으로 받을 상을 말씀하셨다.


   사데 지역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세계 최초의 금화(金貨)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B.C. 560년경 크로이소스왕은 엄청난 양의 사금(砂金)을 채취해 최대의 부()를 이룬 왕이 되었다. 당시에 순금을 제련하던 도가니가 이곳에서 무려 300여 개 발굴 되었는데, 도가니 밑바닥에는 순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금이 많이 생산되다 보니, 이곳 주민들의 생활도 비교적 넉넉하였다. 그러다 보니,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숭배(偶像崇拜)와 물질문화(物質文化)에 빠져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3:1).”라는 책망을 받았다.

   내가 사데 유적지에 간 20116월에도 이곳에서는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는 거기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은 사르트(Sart)’라고 한다. 옛날의 영화를 뒤로 하고, 폐허로 남아 있는 사데의 모습을 보고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쓸쓸하였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습니다.


 

   필라델피아는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1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옛 도시로, 성경에 나오는 빌라델비아인데, 현지명은 알라셰히르(Alaşehir)이다. 필라델피아는 페르가뭄(Pergamum, 성서의 버가모) 왕국의 아탈로스(Attalus) 2(재위 기간 B.C. 159~138)가 세운 도시이다. 아탈로스 2세는 페르가뭄 왕국의 유메네스 2세 왕의 동생인데, 본래 이름은 필라델푸스(Philadelphus)이다. 그는 뛰어난 정치력과 군사적 지식을 갖고 있었는데, 형을 진심으로 도우며 충성하였다. 그는 뒤에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동부 진출의 전초기지로 이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도시 이름은 자기의 원래 이름을 따서 필라델피아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형제사랑[兄弟愛]’이다.

   토모로우스산 기슭에 자리 잡은 필라델피아는 비옥한 평야를 끼고 있다. 서쪽으로는 페르가뭄과 사르디스(사데)를 잇고, 동쪽으로는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크게 발달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었으나, 지진이 잦아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고, 농민들이 포도 농사를 짓고 사는 작은 도시가 되었다. 필라델피아에는 사도 시대에 약 1,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A.D. 17년과 23년에 일어난 큰 지진으로 도시가 모두 파괴되어 남은 유적이 거의 없다. 옛 도시가 있던 자리에 마을이 들어서 있어서 발굴하는 일도 쉽지 않다. 이곳에는 다만 사도요한 교회의 육중한 돌기둥 두 개와 돌들이 빌라델비아 교회라는 이름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다. 이것은 비잔틴 시대에 세워져 사도 요한에게 바쳐진 교회의 유적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요한계시록(3 : 7~13)에 일곱 교회 중의 하나로 나타난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믿음의 시련 중에서도 복음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한 탓에 서머나 교회와 함께 책망 받지 않고, 칭찬을 받은 교회이다. 서머나 교회의 폴리갑이 순교할 때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 10명도 함께 순교하였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네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3 : 8)는 표현으로 보아 규모도 크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는 무력한 것 같으나 내실이 있는 교회였던 것 같다. 이 교회는 건실한 신앙을 가지고 이단을 물리쳤으며, 여러 가지 신앙의 시련이 닥쳐와도 조금도 요동치 않고 인내와 성실로써 현실을 잘 극복해 나갔다. 그래서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몸에 써 두겠다는 약속을 받은 교회이다.

   버스에서 내려 빌라델비아 교회 터에 가니, ‘성 요한 교회라고 쓴 안내판이 붙어 있다. 주님의 칭찬을 받던 교회의 모습은 간데없고, 돌과 벽돌로 겹겹이 쌓은 육중한 기둥만이 쓸쓸히 서 있다. 교회 기둥 옆에는 주택들이 들어서 있고, 좁은 골목길 맞은편의 작은 자미(이슬람 사원) 앞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다.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돌아본 뒤에 샤데 교회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니, 올 때와 마찬가지로 포도밭이 많다. 키가 작은 포도나무 덩굴에는 알알이 익어가는 포도 알을 마음껏 매단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올바른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까닭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첫째, 이곳에는 지진이 유난히 많았다고 하니, 이곳 사람들은 잦은 지진을 겪으면서 삶에 대한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삶에 대한 불안은 신앙을 뜨겁게 하고,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 해 주었을 것이다. 둘째, 이곳 사람들은 도시보다는 비옥한 땅에서 포도 농사에 힘쓰면서 삶의 체험을 통해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이들은 포도를 수확한 뒤에 다음 해의 포도 수확을 위하여 쓸모없는 가지를 잘랐을 것이다. 이들은 쓸모없는 가지 즉, 열매를 맺지 않은 가지, 앞으로도 열매를 맺지 않을 것 같은 가지를 잘라 땔감으로 쓰면서, 신앙인으로서 쓸모없는 자가 되면 잘라낸 포도나무 가지와 같이 된다는 것을 수없이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열매를 맺어 농부의 보호를 받는 것과 같은 가지 즉, 온전한 믿음을 간직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힘썼을 것이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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