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페스는 이즈미르(İzmir) 주의 셀축(Selçuk) 지역에 있는 고대 도시이다. 터키에서 세 번째 큰 도시인 이즈미르에서 남쪽으로 약 74km, 셀축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있다. 터키에서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성경에 나오는 에베소가 바로 이곳이다.

   에페스는 기원전 6,000년경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청동기 시대 이후로는 히타이트인의 거주지였는데, 그들은 이곳을 아파사르라 하였다. 에페스는 기원전 1,200년경에 그리스 지역에 살던 이오니아인들이 이곳 해안 지역으로 와서 정착하여 살면서 프리에네, 밀레투스와 함께 건설한 도시이다. 이오니아인들이 이 지역에 왔을 때, 거기에는 렐레기안(Leleggian) 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풍요(豊饒)와 자연의 여신 키벨레(Cybele)'를 숭배하고 있었다. 이오니아인들은 자기들이 전부터 숭배하던 아르테미스 여신에 키벨레(Cybele)’ 신앙을 결합하여 에페스의 아르테미스신앙을 형성하였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냥과 관계가 깊은 여신 아르테미스가 아니고,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에페스만의 독특한 아르테미스 신앙이다. 사람들은 이 여신을 모시고 제사하기 위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을 세웠는데, 그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였다.

   기원전 600년 무렵 에페스에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찾는 신도들과 항구에서 상거래를 하는 상인들이 많이 모였으므로 매우 번화하였고, 그에 따라 도시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리디아(Lydia)의 왕 크로이소스(Croesus)의 공격으로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다. 그래서 아르테미스 신전 남쪽의 내륙 지대로 옮겨 새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 후 에페스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점령할 때까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에 그의 휘하 장군이었던 리시마코스가 이곳을 통치하였다. 그는 인근의 멘데레스 강에서 흘러오는 토사(土砂)가 쌓여 에페스가 항구의 기능을 잃게 되자 주민들을 내륙의 언덕 지대로 이주시켰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에페스 유적이 있는 곳이다. 에페스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크게 발전하여 전성기에는 인구가 25만 명이나 되는 소아시아 지역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뒤에 이곳에 와서 선물을 샀다고 한다. 에페스는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의 신앙이 강한 곳이었지만, 기독교가 전파되어 많은 기독교인이 살았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서 3년 가까이 지내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요한사도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요한복음을 기술하였다.

   에페스 항구에 토사가 계속 쌓이자 역대 통치자들은 준설공사를 하고, 강의 물줄기를 돌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토사의 유입은 막지 못하고 개펄과 습지만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습지가 많아지니 모기가 기승을 부리어 말라리아가 널리 퍼졌다. 기독교인이 늘어감에 따라 아르테미스 신전을 찾는 신도들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신전의 재정 상태도 나빠졌다. 7세기 무렵에는 강에서 유입되는 토사가 바다를 메움에 따라 에페스는 항구도시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그에 따라 에페스는 급속도로 쇠락하면서 도시의 중심을 아야술룩 언덕 지금의 셀축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하여 찬란하였던 당시의 문화를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에페스 유적 관람은 북문 매표소로 들어가 남문까지 올라가면서 보아도 좋고, 남문 매표소로 들어가 북문까지 내려가면서 보아도 좋다. 에페스 유적을 본 뒤에 성모 마리아의 집에 가려면 남문 매표소로 들어가 북문 매표소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 나는 200911월과 20116월에 이곳을 찾았는데, 두 번 다 남문 매표소로 들어가 북문까지 내려가면서 관람하였다. 내가 본 순서대로 기억에 남는 곳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문 매표소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는 것은 한글로 에베소의 역사를 적은 안내판이었다. 먼 나라 터키에서 삼성로고가 그려진 한글 안내판을 보니,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였다.

   바리우스 목욕탕(Varius Bath)

 

 

   에페스에 들어서면 목욕탕이 제일 먼저 방문객을 맞는데, 이것은 다른 고대 도시의 경우와 같다. 먼 길을 여행하는 동안에 묻은 먼지와 병균을 씻고, 피곤한 몸을 쉬게 하려는 뜻에서일 것이다. 목욕탕에서는 아는 사람들을 만나 때를 씻고, 맛사지도 받으면서 사교(社交)를 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1926년에 발굴된 이 목욕탕은 A.D. 1세기에 건립된 목욕탕으로 내부에 냉탕, 온탕, 미온탕, 탈의실, 사우나 등의 시설과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이 욕장은 한국의 온돌처럼 바닥 아래로 온기가 통하도록 되어 있다.

 

   위층 아고라(Upper Agora)

 

   '아고라'는 넓은 마당을 뜻하는 말이다. 아고라에서는 정치적 회의나 종교 의식을 치르기도 하고, 상품을 거래하기도 하였다. 에페스에는 남문 쪽과 북문 쪽에 아고라가 있다. 남문 쪽의 아고라는 폭이 약 73m, 길이가 약 160m인데, 주로 시청에서 주관하는 모임이나 행사가 열렸다. 북문 가까이에 있는 아고라는 상품 거래를 주로 하던 곳으로 남문 쪽 아고라보다 그 규모가 크다.

 

   남문 쪽에 있는 위층 아고라 앞에는 토관(土管)들을 쌓아 놓았다. 이 토관들은 이곳에서 캐낸 것으로, 당시에 도시 전체에 물을 공급하던 수도관이라고 한다. 에페스가 건설되던 B.C. 280년경에 사용하던 것이니, 이 토관들은 2,000년이 된 것이다. 2,000여 년 전에 이런 토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실리카(Basilica)

 

   '바실리카'는 로마 시대에 법정, 교회 따위로 쓴 장방형(長方形)의 회당(會堂)을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시 청사에서 바리우스 목욕탕까지 뻗어 있는 약 165m의 길을 말한다. 아우쿠스투스 황제 때 건립되었는데, 길 양쪽으로 이오니아식 기둥 위에 황소 머리 모양의 조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기둥과 기단(基壇) 부분만 남아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없다.

 

   소극장   

    산언덕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소극장이 있다. 1,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극장은 A.D. 2세기에 귀족 베디우스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인 플라비아 파피아나 세웠다. 소극장은 지붕을 덮었었기 때문에 극장 안에 물이 빠져나갈 배수로(排水路)가 없다.

 

 

   이곳에서는 음악회나 시 낭송회 등이 열렸고, 원로회의 같은 정치적 회합도 열렸다. 모든 시민이 참가하는 대규모 회의는 북쪽에 있는 대극장에서 열리고, 이곳에서는 소규모의 공연과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시 청사(Town Hall)

 

 

 

   소극장 옆에 에페스 시청 건물이 있다. 3세기에 완공되었는데, 중앙의 광장을 중심으로 도리아식 회랑(回廊)이 있었다. 광장의 중앙에 성화(聖火)가 있었는데, 에페스의 번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1년 내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타오르는 불은 번영을 상징한다고 여겼으므로, 신전의 사제나 도시의 원로가 관리하였다고 한다.

 

   1956년에 이곳을 발굴하다가 두 개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발굴하였는데, 여신상은 현재 셀축에 있는 에페스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쿠레테스 거리(Curetes Street)

 

 

   셀수스 도서관에서 헤라클레스 문까지 뻗어 있는 대로를 말한다. ‘쿠레테스는 원래 아르테미스와 아폴로를 낳은 레나 여신을 도왔던 반신반인(半神半人)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에페스에서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업무를 맡아보는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를 거리의 이름에 붙인 것이다.

   이 거리는 에페스의 중심 거리로, 양편에는 기둥으로 이어진 회랑(回廊)들이 있었고, 회랑 뒤에는 향료와 비단을 파는 상점들과 주택들이 즐비하였다. 줄지어 있는 원형 기둥 사이사이에 에페스 중요 인물들의 석상이 있다. 히드리아누스 신전, 공중화장실, 스콜라스티카 욕장(浴場), 트리아누스 샘 등도 이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도미티아누스 신전(Temple of Domitianus)

 

   이 신전은 A.D. 1세기에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A.D. 81~96)에게 바친 신전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유능하였으나 독재 경향이 강하고, 남을 시기하고 의심하여 유력한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그는 2의 네로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포악한 정치를 하고,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그는 요한사도를 파트모스(밧모) 섬으로 귀양 보냈으며,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기 조카를 처형하였다. 그는 후일 가신들에게 피살당하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기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도록 강요하였으므로, 그의 측근들이 이 신전을 지어 바쳤다. 이 신전은 가로 50m, 세로 100m의 큰 규모인데, 입구에는 7m의 황제 동상이 있었다. 황제가 죽자 신전은 바로 파괴되었다. 황제의 동상은 일부가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기를 신으로 받들어 모신 신전이 완성되자 신전 앞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참배(參拜)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신전 앞을 지나면서도 참배하지 않았다. 황제는 길 가는 사람들을 데려다 참배하게 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게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도 이곳에 끌려와 참배를 강요당하였다. 요한이 끝내 참배하지 않자 요한을 기름 가마에 밀어 넣었다. 요한이 하나님의 섭리로 죽지 않자, 파트모스(밧모)섬으로 귀양 보냈다.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뒤에 에페스로 돌아왔다.

   멤니우스 기념묘(Tomb of Memnius)

 

   헤라클레스의 문을 지나기 전에 있는 유적으로, 멤니우스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멤니우스는 로마 집정관 술라(Sulla)의 손자로, 에페스의 발전에 큰 공이 있는 인물이다.

   헤라클레스 문(Gate of Heracles)

 

   쿠레테스 거리가 시작되는 곳에 사자 가죽을 어깨에 두른 남자를 새긴 기둥 2개가 있다. 이것이 헤라클레스의 문인데, 부조(浮彫)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영웅인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상징인 사자의 가죽을 어깨에 두르고 있는 형상이다. 원래 6개의 기둥에 아치가 있는 2층 문이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2개 밖에 없다. 이 문은 다른 문과 달리 폭이 좁은데, 이것은 수레의 통행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다. 이 문을 지나면 대리석 도로가 나온다. 이 문 앞에 서면 도시가 한눈에 보인다.

   트라이아누스 분수(Fountain of Trajanus)

 

   A.D. 102~114년에 로마 트라이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분수이다. 높이가 12m2층으로 된 이곳에 실제보다 3배쯤 더 크게 만든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석상(石像)이 있었는데, 석상의 발끝에서 물이 흘렀다고 한다. 지금은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없고, 연못이 있었던 곳은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비너스, 세턴, 바커스 등의 신과 황실 가족의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스콜라스티카 목욕탕(Scholastica's Bath)

 

   하드리아누스 신전 뒤에 있는 큰 규모의 목욕탕이다. 3층 건물인 이 목욕탕은 2세기에 지어졌는데, 4세기까지 여러 번 수리되었다. 4세기에 스콜라스티카란 여인이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증축하였다. 이 목욕탕의 이름 스콜라스티카는 이곳의 수리를 담당하였던 여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목욕탕에는 냉탕과 온탕 시설이 있었다. 공중탕과 함께 개인탕도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Temple of Hadrianus)

 

   A.D. 138년에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신전이다. 이 신전은 에페스에서 셀수스 도서관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건축물이다. 이 신전은 도서관에 비하여 규모는 작지만, 코린트식 기둥과 아치의 조각이 아주 정교하여 인상적인 신전이다.

   건물 현관 입구에 4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가운데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다. 현관을 들어서면 정면 아치에는 행운의 여신 티케가 조각되어 있고, 그 안쪽에는 양팔을 벌린 메두사가 조각되어 있다. 그 아래에는 왼쪽부터 아테나 여신, 셀레나 신, 아폴로 신, 에페스를 건설한 안드로클루스, 헤랄테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 데오도시우스 황제, 아르테미스 여신, 데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조각되어 있다. 신전 벽에는 에페스의 기원 전설이 새겨져 있다.

   이오니아를 다스리던 안드로클루스(Androclus)는 북쪽에 사는 도리아인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떠나기에 앞서 델피(Delphi) 신전에 가서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지 신탁을 내려 달라고 하였다. 그는 물고기, , 멧돼지의 도움을 받아 새 도시를 건설하라는 신탁을 받았다. 그는 백성들을 이끌고 터기의 서해안으로 왔다. 그가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굽고 있는데, 살아있던 물고기가 그릇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숯불을 뒤엎었다. 이 때문에 근처 숲에 불이 나게 되었다. 그 때 숲에 숨어 있던 멧돼지가 놀라 뛰어나와 해변을 가로질러 도망갔다. 안드로클루스는 이 멧돼지를 뒤쫓아 가서 잡았다. 그는 멧돼지를 잡은 곳에 터를 잡고, 에페스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맞은편에는 고급 주택의 터가 있다. 이곳은 고관들과 귀족들이 살았던 곳으로, 바닥을 모자이크화, 프레스코화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7세기 무렵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공중화장실(Roman Man's Toilet)

 

 

   하드리안 신전 왼쪽에 50여 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이 있다. 중앙에 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있고, 그 둘레에 대리석 변기와 작은 수로가 있다. 화장실 바닥은 모자이크가 있고, 수로에는 깨끗한 물이 흐르도록 설계되었다.

   자기 집에 화장실이 있을 터인데, 공중화장실을 지어놓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공중화장실은 외출하여 거리에 나온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겠지만, 당시에 여유 있는 사람들이 사교의 장으로 활용한 공간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유곽(House of Love)

 

 

   고대의 매춘업소로 추정되는 유곽이 쿠레테스 거리와 대리석 거리가 만나는 모서리에 있다. 이 건물은 다수의 작은 방들이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데, 4세기 무렵에 지어졌다. 매춘부들이 일을 하던 유곽에는 창문이 없었다. 당시의 방은 벽감(벽에 우묵하게 파놓은 부분) 위에 촛불을 두어 실내를 밝혔으며, 이 건물 바닥에는 사계절을 알리는 모자이크 들이 남아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살롱에는 비너스 조각이 있었다.

   대리석 거리에는 유곽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는데, 대리석판에 머리를 단장한 여인의 얼굴, 하트 모양, 조그만 동그라미와 발 모양을 음각하였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광고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곽의 안내판에 발을 그려놓은 것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대리석에 그려진 발보다 작은 사람 즉, 미성년자는 들어올 수 없음을 알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곳을 찾은 남자들은 손과 발을 씻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위생에 신경을 썼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에페스의 유곽은 항구와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러므로 오랜 기간을 바다에서 보낸 뱃사람이나 상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매춘은 지극히 정상적인 직업의 하나로 여겼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당시 에페스의 도시 규모에 비하여 유곽 건물이 아주 작은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고 한다.

   셀수스 도서관(Library of Celsus)

 

 

 

   셀수스 도서관은 대리석 거리의 끝에 위치한 아름다운 건물로, 에페스의 상징과 같은 건축물이다. 이 도서관은 2세기 중반에 로마의 아시아 주 총독이었던 셀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아들이 지은 것이다.

   2세기 초반에 로마 황제는 셀수스 폴레마이누스(Celsus Polemaeanus)를 소아시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소아시아 주의 수도였던 에페스로 부임하여 임무를 마친 뒤에 70세에 이곳에서 죽었다. 그 후에 로마의 집정관이 된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아쿠일라(Tiberius Julius Aquila)가 에페스에서 사망한 자기 아버지를 추모하는 뜻에서 이 도서관을 건립했다. 셀수스는 이 도서관 서쪽에 묻혔다.

   이 도서관에는 모두 12,000여 권의 두루마리 문서가 소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뭄(베르가마)의 도서관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도서관 내부를 보면, 외벽과 내벽 사이에 1m 가량의 틈을 두어 통풍이 되게 함으로써 책들이 극심한 온도와 습도의 변화에도 손상되지 않도록 했다. 이 도서관은 정교한 건축 기법을 적용하여 실제 규모보다 더 크게 보이도록 하였다. 전물 정면 하단은 볼록한 구조로 되어 있어 본관을 더 높게 보이도록 했고, 기둥과 기둥머리들도 끝부분보다 가운데를 더 크게 만들었다.

   건물 정면 1층 벽에는 4명의 여인의 석상이 있는데, 이들은 각기 지혜, 덕성, 학문, 지식을 상징한다. 지금 이곳에 있는 석상은 모두 모조품이다. 이 도서관은 오스트리아 고고학연구소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는데, 그 때 진품은 오스트리아로 가져갔다. 그래서 진품은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에페수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업 아고라(Commerical Agora)

 

 

   대리석 거리 오른편에 위치한 가로 세로 110m의 넓은 터로 된 이 아고라는 기원전 3세기경에 설치되었다. 두 줄의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뒤에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던 것 같다. 이 아고라는 에페스의 중앙시장 역할을 하였다. 항구와 가까운 곳에 조성되어 있어서 유럽과 지중해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들이 식료품, 향료, 금은보석, 도자기, 고급 옷감 등 온갖 상품을 거래하였다. 이곳에서는 물건뿐만 아니라 잡혀온 노예들까지 거래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커다란 시장이 형성되면서 온갖 물자는 물론 각처에서 각종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어 매우 번화하였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 와서 27개월을 지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시장에서 천막을 만들어 팔면서 복음을 전파하였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 모여 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합당한 행동과 처신을 가르쳤다.

   대리석 거리(Marble Street)

 

 

   대극장에서 셀수스 도서관까지 대리석으로 된 길을 말한다. 원래는 아르테미스 신전까지 길이 뻗어 있었다고 한다. 길 아래에는 대형 수로(水路)가 있었다. 이 길 바닥에 여인의 모습과 왼발이 새겨진 돌이 있는데, 이는 유곽을 광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대극장(Great Theatre)

 

 

   피온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지은 이 극장은 원래 리시마쿠스(Lysimachus) 황제 때 건설되었다. 지금 있는 극장은 A.D. 41년에서 117년 사이에 로마인들에 의해 개축된 것이다. 대극장은 지름 154m, 높이 38m의 반원형 구조로 되어 있다. 극장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18m 높이의 무대 정면 건물은 3층으로 되어 있고, 각종 부조(浮彫)와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지름이 약 40m인 무대가 있는데, 정교한 음향적 구조로 되어 있다. 관중석은 무대에서 멀어질수록 아래쪽 좌석보다 경사가 더 급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것은 보다 나은 시야 확보와 음향 효과를 위한 것이었다. 이 극장의 최대 수용인원은 약 25,000명이다. 고대 극장은 전체 주민의 10%가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규모로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고고학자들은 에페스의 전체 인구가 이 원형극장 수용인원의 10배인 250,000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극장에서는 민회(民會)를 열기도 하고, 연극을 비롯한 문화 예술 공연을 하였다. 로마 시대 말기에는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도 벌어졌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절에는 기독교인들이 사자와 결투를 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19:21~41)에는 바울 사도가 에페스에서 전도할 때 이곳 대극장에서 일어난 소동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이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모형을 만들어 팔아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바울의 선교로 기독교인이 늘어감에 따라 아르테미스 여신에 대한 신앙심이 약해지고, 여신의 모형도 잘 안 팔리는 것에 앙심을 품고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그러자 그의 말에 끌린 사람들이 바울과 함께 전도하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서 대극장으로 끌고 갔다. 바울이 군중 속에 들어가려고 하니, 제자들이 말렸다. 바울을 아는 몇몇 고관들도 바울에게 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다. 바울은 극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시민들이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곳도 이곳 대극장이다.

   객석 위쪽에 오르니, 대극장에서 항구까지 나 있는 아르카디안 거리와 멀리 항구 목욕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음향 효과가 매우 좋아서 현재 터키에서 1년에 한번 특별 공연을 한다고 한다.

   200911월에 이곳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나는 이곳의 음향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 궁금해 하면서 이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때 유럽에서 온 것 같은 단체관광객 20여 명이 무대에 서서 손을 잡고 합창한 뒤에 한 남자가 독창을 하였다. 나는 객석 중간쯤에 앉아 이들의 노래 소리를 들었다. 마이크를 쓰지 않는데도 합창 소리는 물론, 독창 소리까지 잘 들리는 것을 확인하고, 음향 효과가 뛰어난 것을 알았다.

   20116월에 갔을 때의 일이다. 노래를 잘 부르는 이 사장에게 무대로 내려가 한 곡 부르라고 하고, 장위교회 교우들은 객석 중간 부분에 앉았다. 이 사장은 사양하다가 찬송가 한 곡과 가요 한 곡을 불렀다. 이 사장과 몇 십 미터 떨어져 앉아 있었지만, 이 사장의 곱고 아름다운 노래 소리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일행 중에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 더 듣지 못하고 자리를 뜨게 되어 아쉬웠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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