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내와 함께 P 교장의 남편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P 교장은 30여 년 전에 교육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석사논문 지도를 한 여제자이다. 그가 두 학기 강의가 끝난 뒤에 나의 지도를 받겠다고 하여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수강 태도가 좋았고, 내가 지도하는 석사·박사 과정의 재학생과 졸업생의 연구모임인 월곡회에도 열심히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나는 그가 3년 과정을 마친 뒤에 좋은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삼천포에서 열리는 월곡회 연구 모임에 참석하여 학업을 중단하겠다고 하였다. 깜짝 놀라 그 연유를 물으니,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겠다고 하였다. 나는 근황을 자세히 들은 뒤에 힘주어 말했다. 남편의 병은 쉽게 낫는 병이 아닌 것 같으니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석사학위를 받은 뒤에 승진하려던 계획과 교육계에서 펼치려던 꿈을 접고, 병간호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힘들고 고생스럽겠지만, 병간호와 꿈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병행하기 바란다. 그래야 두 아들도 어려움을 견뎌내는 엄마를 보며 기죽지 않고 힘을 내어 자기 할 일을 할 것이다.

   이어서 뇌출혈로 쓰러져 오랜 기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 오랜 기간 앓는 남편을 간호하다가 찌든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예로 들며 설득하였다. 남편의 병에 대한 걱정과 경제적인 어려움, 눈앞에 닥친 모진 현실에 대한 원망과 분노회한으로 괴로운 그에게 나의 말이 모질게 들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려 한동안 오열한 뒤에 울음을 그치고, 내 말을 명심하겠다고 하였다. 그 뒤로 그는 29년 동안 투병하는 남편을 간호하면서 온갖 어려움과 고통과 맞서 이겨내고 오늘을 맞이하였다.

   나는 빈소의 영정 앞에 서서 고인이 주님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런 뒤에 그의 얼굴을 대하니, 그가 한 말과 글 또는 그와 가까이 지내는 제자들을 통하여 알게 된, 그가 그 동안 겪은 일들이 떠올랐다. 30여 년 전, 그의 남편은 사업에 실패하여 살고 있던 작은 아파트마저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 충격으로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남편은 여러 병원으로 옮겨 다니며 치료를 받은 끝에 회생하였으나 반마비로 겨우 화장실 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재활치료를 받으며 투병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아버지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그는 좁은 단간 방에 남편과 시아버지를 모시고 간호하는 한편, 고등학생중학생인 두 아들을 보살피며 학교에 근무하였다.

   얼마 뒤에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남편은 재활 치료를 받아 조금씩 회복되었으므로 한동안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집 앞에 나갔다가 계단에서 넘어져 대퇴부 골절로 인공관절 수술을 받고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은 장애등급을 받고 요양원에 장기 입원하였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서는 남편을 잘 돌봐주었다. 그래서 그는 학교에 출근하면서 요양원에 있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였다. 대학원 공부도 계속하여 좋은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현장 연구도 열심히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교감교장으로 승진을 하였고, 큰아들이 결혼하는 경사도 있었다.

   그는 몇 년 전에 40여 년 봉직하던 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였다. 그는 시간을 내어 성당 어르신대학, 교도소에 가서 노래 부르기와 리크레이션 지도를 하였다. 또 남편이 있는 요양병원을 비롯하여 여러 요양병원에 가서 환우들을 위한 노래 부르기 봉사활동도 아주 열심히 하였다. 그 때 남편을 비롯한 여러 환우들이 기뻐하며 고마워하던 모습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는 온갖 짐을 자기에게 떠넘기고 오랜 동안 요양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남편에 대한 원망과 측은함, 아름다운 추억과 연민의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분출하곤 하였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지쳐 하루하루가 지겹고,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럴 때에는 국내의 성지를 순례하며 신앙의 선배들이 겪은 고난과 믿음을 성찰하고, 피정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며 주님께 의지하였다. 그러는 동안 신앙의 선배들이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남긴 신앙의 메시지를 깨닫기도 하고, 자기의 처지를 신앙의 힘으로 이겨낼 선하고 의로운 용기를 얻기도 하였다.

   그는 남편 간호하는 일에서 벗어나 틈틈이 자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요양병원의 요양보호사들이 애써주는 덕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이 커졌다. 그래서 72세 되던 해에 나이를 무릅쓰고 요양보호사를 양성하는 학원에 등록하여 이론 공부와 실습을 마치고, 시험에 통과하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남편이 있는 요양병원에 가서 6개월 동안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남편을 대하는 마음으로 입원해 있는 어르신들을 보살폈다. 병원 규정상 남편을 직접 보살피지는 못하지만 일이 끝난 뒤에 면회할 수는 있었다. 남편은 매일 그를 만나는 것을 기뻐하였고, 건강 상태도 조금 좋아졌다. 그래서 음식을 스스로 섭취하지 못하여 끼웠던 콧줄을 제거할 만큼 몸이 좋아졌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그는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하나님 곁으로 가고 싶다는 남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묵은 살림살이를 처분하고, 실내 단장을 한 뒤에 남편을 집으로 모셨다. 그가 고생할 것을 염려하여 반대하던 아들들도 아버지의 귀가를 환영하고 아버지 간호를 도왔다. 그는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주변의 일들을 모두 끊고, 오직 남편의 곁에만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편안하고 행복하다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리고 아들들과 며느리, 손자에게 정겨운 인사를 한 뒤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였다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그는 그동안 병수발에 지친 때문인지 작은 체구가 더 왜소해 보였다. 문상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화장기 없는 그의 얼굴을 보니, 한없이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30년 가까이 남편 병 수발을 하고, 70이 넘은 나이에 요양병원에서 간병 체험을 한 뒤에 남편을 집으로 모셔 집에서 죽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 그의 섬김과 희생의 마음은 그 무엇보다 넓고 크게 느껴졌다. 그는 보통 사람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큰일을 한 작은 거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교장을 지낸 서울교대 제1회 동기 두 사람을 만났다. 그가 부장교사일 때와 교감일 때 함께 근무하였다는 두 사람은 그가 학교에 근무할 때의 태도와 생활 모습을 이야기하였다. 또 그곳에서 그와 가깝게 지내는 대학원 제자 두 사람을 만나 그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 섬김과 봉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그가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남편과 자식을 위한 섬김과 희생이 컸음을 느끼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이제 병고에 시달리던 남편은 이를 벗어나 주님 곁에서 편히 쉬면서 그동안 희생과 섬김을 실천한 그에게 감사의 미소를 보낼 것이다. 이제 그가 남편을 보낸 아쉬움과 슬픔, 더 잘 보살피지 못하였다는 회한의 마음을 훌훌 벗고, 마음의 평안과 용기를 회복하여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두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함께 행복을 누리기를 기원한다. (2024. 6. 26.)

   수덕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에 있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이 만들어 낸 덕숭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다닌 갈산초등학교, 갈산중학교, 홍성고등학교는 10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그래서 초·중·고교 시절에 78회 소풍을 갔던 친숙한 곳이다.

   이 절은 백제 위덕왕(554597) 때 창건되었다. 이곳에는 여러 건물과 석탑이 있지만, 가장 주의를 끄는 곳은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1308)년에 건축된 목조 건물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과 함께 고려 시대의 목조 건물로 유명하다.

   나는 얼마 전에 수덕사를 다시 찾았다.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여러 번 왔던 곳이지만, 다시 이곳저곳을 살펴본 뒤에 대웅전 뒤편에 있는 큰 바위 관음암 앞에 섰다. 그 앞에는 불상이 서 있고, 돗자리가 깔려 있다. 그 옆 축대의 벽면에 수덕 각시가 바위틈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을 간략히 적은 대리석판이 붙어 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니, 관음암을 가리키며 이 바위가 수덕 각시가 들어간 바위라고 하면서 둘러보고 가는 사람, 대리석판에 새긴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고 가는 사람, 불상 앞의 돗자리에 신발을 벗고 올라서서 절하며 소원을 비는 사람이 있었다. 수덕 각시가 절을 중창하고 바위 속으로 들어간 이곳에 와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비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수덕 각시 이야기를 어렸을 때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전설을 채록하려고 이곳에 와서 1999년에는 수덕사 포교국장 정암 스님, 2001년에는 이곳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홍순목 씨에게서 이 이야기를 채록하여 《함께 떠나는 이야기 여행》(민속원, 2001)에 수록하였다.

   정암 스님이 구연한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수덕사의 규모가 아주 작을 때 수덕이라고 하는 묘령의 아가씨가 움막에 묵으며 기도하였다. 그러자 인근 재력가의 자제인 정혜도령이 그에게 청혼하였다. 그는 절을 지어주면 혼인하겠다고 하였다. 절이 완공되기 하루 전날 밤에 정혜가 그에게 혼례를 올리고 신방을 차리자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정혜에게 몸단장을 하고 나올 터이니 자기가 거처하는 움막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기다리다 지친 정혜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그가 바위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다급한 마음에 그를 잡았으나 다 잡지 못하고 그의 버선만 잡았다. 그는 버선만 남긴 채 바위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후로 바위틈에서 버선 모양의 꽃이 핀다. 이를 버선꽃또는 ‘골담라고 한다.

   홍순목 씨가 구연한 내용 역시 앞 이야기와 기본 줄거리는 같다. 그러나 남주인공을 부자 정혜대신 목수 덕숭도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덕숭이 마음 깊이 사랑하고 흠모하였던 그를 잃은 뒤에 세상에 나가 결혼하지 않고 정혜사에서 도를 닦으며 일생을 보냈다고 하는 이야기가 첨가되어 있다. 남주인공의 이름을 앞 이야기에서 정혜라고 한 것은 대웅전 뒤편에 정혜사가 있는 것과 관련이 있고, 뒷이야기에서 덕숭이라고 한 것은 수덕사가 있는 산이 덕숭산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불심이 두터운 수덕은 이곳에 절을 짓겠다는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불공드리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인다. 그의 미모에 반한 많은 남자들이 청혼을 하자, 그는 이곳에 절을 지어주는 사람과 혼인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앞 이야기에서는 부자인 정혜, 뒷이야기에서는 재능이 있는 목수 덕숭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절이 완공되기 하루 전날 밤에 정혼자가 그에게 혼인예식을 올리고 신방을 차리자고 제안한다. 그는 이를 뿌리치고 버선만 남긴 채 바위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절은 완공되었지만, 많은 돈과 시간과 노동력을 바친 총각은 실망과 좌절을 안게 된다.

   이야기의 겉면만 보면, 수덕은 자기의 미모를 이용하여 정혜의 재물이나 덕숭의 기술과 노력을 절을 짓는 데에 모두 바치게 한다. 그리고는 절이 완공되자 혼인 약속을 저버린 채 사라져버린 거짓말쟁이로, 사기성이 농후한 나쁜 여인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수덕은 불심보다는 여인의 미모를 탐하는 마음이 더 큰 정혜나 덕숭으로 하여금 탐심을 버리고 자기가 가진 재물이나 기술·노동력을 불심을 닦는 도량을 짓는 데에 바치게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덕숭으로 하여금 불도에 귀의하여 진정한 도를 깨우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수덕은 자기의 미모를 이용하여 보시와 각성의 도를 가르친 신앙의 여인이라 하겠다. 수덕을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보는 것 역시 같은 해석이라 하겠다.

   관음암을 버선꽃과 관련지으며 다시 보니, 별 생각 없이 그 앞을 지나다닌 젊은 날의 발걸음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버선꽃이 필 때 다시 찾아와서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2024. 6. 3.)

                     대웅전 뒤편에 있는 관음암.  위쪽에 골담초(일명 버선꽃) 가지가 보인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 경내에 피어 있는 골담초. 일명 버선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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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아내와 함께 경북 영주시 부석면 복지리 봉황산 기슭에 자리 잡은 부석사를 찾았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676)년에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절이다. 의상 대사는 중국 당나라로 가서 중국 화엄종의 시조인 지엄(智儼) 대사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뒤에 왕의 뜻을 받들어 이 절을 창건하였다. 여기에는 고려 시대에 지은 무량수전(국보 제18)과 조사당(국보 제19), 신라 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의 석등(국보 제17),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 주사당 벽화(국보 제46),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 삼층석탑(보물 제249), 당간지주(보물 제255) 등의 문화재가 있다.

   무량수전 서편에 큰 바위를 받침으로 깔고 앉은 넓고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밑 부분이 받침에 완전히 닿지 않고 공중에 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하고,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지을 때 이를 방해하는 이교도들을 선묘(또는 용녀)가 신통력으로 물리쳤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의상 대사는 문무왕 1(661)년에 신라에 왔다 가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그가 양주의 주장(州長)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머무를 때에 그의 딸 선묘(善妙)가 그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선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법도로 대하여 그녀를 제자로 만들었다. 그는 안남성 종남산 지장사로 가서 지엄 대사의 문하에서 10년간 공부하였다.

   그는 일이 생겨 갑자기 귀국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양주에 들러 선묘를 만나려 하였으나 출타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급히 항구로 가서 배를 탔다. 이 소식을 들은 선묘가 항구로 달려가니, 배가 막 출발하였다. 선묘가 그를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가사와 법복을 배를 향해 던지니, 바람을 타고 배에 닿았다. 선묘는 자기 몸이 용이 되어서 의상 대사를 보호하게 해 달라고 발원하였다. 그래서 선묘는 용이 되어 그를 보호하며 신라에 왔다.

   의상 대사가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하자 오백여 명의 이교도들이 이곳은 우리들의 기도처이므로 절을 지을 수 없다며 막아섰다. 그래서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용녀 선묘가 현신하여 커다란 바위를 공중에 세 번이나 들어 올리며 이교도들을 위협하였다. 이교도들이 놀라 겁을 먹고 물러서자 바위를 내려놓았다. 이 바위가 땅위에 떠 있으므로 부석이라 하고, 그 절을 부석사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유증선, 《 영남의 전설 》. 최운식, 《다시 떠나는 이야기 여행 》 참조)

   부석에 관하여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 》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불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옆으로 섰고, 그 위에 큰 돌 하나가 지붕을 덮어 놓은 듯하다. 얼른 보면 위아래가 서로 이어진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두 돌 사이가 서로 눌려져 있지 않다. 약간의 빈틈이 있어 새끼줄을 건너 넘기면 나고 드는 데에 걸림이 없다. 그래서 떠 있는 돌인 줄을 알게 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있는 부석사에도 전해 온다. 의상 대사가 도비산에 절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산에 본거지를 둔 해적들이 방해하여 절을 지을 수 없었다. 이 때 그가 당나라에서 올 때 만났던 용녀가 도비산 꼭대기에 나타나 큰 바위를 들고 해적들에게 이 산을 떠나라고 했다. 도둑들이 떠나자 용녀는 들고 있던 바위를 앞바다에 던졌다. 그 바위는 간만의 차에 구애 없이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뜬 바위’, 부석이라 하였다. 그 산에 지은 절을 부석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산을 섬이 날아간 산이라 하여 도비산(島飛山)이라고 했다. (최운식, 《한국구전설화집 4 》).

   영주 부석사 전설과 서산 부석사 전설은 부석사의 유래를 용녀, 부석과 관련지어 설명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서산 부석사 전설은 바다를 배경으로 함에 따라 이교도해적’, ‘선묘용녀로 바꾸었다. 또 충남 서산시에 부석면이라는 행정 구역, ‘부석사라는 절 이름, ‘도비산이라는 산 이름, ‘부석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로 보아 서산 부석사 전설이 민간에 끼친 영향이 더 컸던 것 같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전해 왔다. 12년 뒤에 인도의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하였다. 그로부터 훨씬 뒤에 고구려의 묵호자가 신라의 서북 지방인 일선군 모례(毛禮)의 집에 기숙하면서 불법을 전하였다. 그래서 모례는 신라인으로서 최초의 불교 신도가 되었다. 그 후 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에서 아도(阿道. 고구려에 왔던 중국승 아도와는 동명이인)가 와서 불법을 전도한 뒤로 신봉하는 자가 늘어났다. 신라 왕실에서는 불교 공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귀족들과 백성의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법흥왕은 527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배불파를 제압하고 불교공인을 선포하였다.

   모든 종교는 전도에 뜻을 두고 이를 위해 온힘을 기울인다. 한 종교가 다른 문화권에 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에는 그 지역에 전해오는 종교 또는 민간신앙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그 충돌을 이겨내면 전도에 승리하는 것이고, 이기지 못하면 그 종교는 그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 것이다. 외래종교인 불교가 신라에서 유난히 전도하기가 힘들었던 것은 신라에 민간신앙의 뿌리가 깊어 저항이 컸기 때문이다.

   위 이야기에서 이교도해적은 민간신앙의 신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절터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민간신앙 신도들의 기도처였을 것이다. 이들이 불교의 포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의 성지(聖地)를 빼앗아 절을 지으려고 하니 이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 때 선묘, 또는 용녀가 큰 바위를 번쩍 들고 위협하여 이들을 굴복하게 만든다. 이것은 불교가 포교하며 절을 지을 때 민간신앙과 충돌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나 신이한 법력을 보임으로써 민간신앙을 제압하고, 승리하였음을 드러낸다.

   선묘가 바다로 던진 가사와 법복이 의상 대사가 탄 배에 닿는다. 선묘가 소원대로 용녀가 되어 대사를 호위하고 신라로 온다. 용녀가 큰 바위를 들고 이교도들을 위협한다. 또 선녀가 내려놓은 바위가 바닥에 닿지 않고 떠 있다. 이런 것들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불교적인 법력을 영검하게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차용한 설화적 수사이다. 승려나 불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래서 불교를 민간신앙보다 우월한 종교, 포교에 승리한 종교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2024. 4. 30.)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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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과 정 선생님은 한문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셨다. 선생님께서는 가끔 한문 명구를 칠판에 쓰시고, 뜻을 설명해 주셨다. 그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다.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 주자(朱子, 1130~1200)가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은 그 의미를 곱씹어 볼수록 좋은 말이어서 꿈 많던 소년 시절의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내 마음이 산란할 때마다 나를 일깨우는 명구가 되었다. 이 말을 책상 앞 벽에 써서 붙이고, 마음에 새겼다. 그로부터 먼저 목표를 설정하고, ‘하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집중력을 강화하며 마음을 다잡곤 하였다. 설정한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며 긴장이 풀리거나 나태해질 때에는 이 말을 되뇌며 마음을 다잡곤 하였다. 그래서 이 말은 나를 일깨우는 경구(警句)가 되기도 하였다.

   교사로, 교수로 교단에 섰을 때에는 계제를 살펴 학생들에게 이 말을 써 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어렸을 때 들은 옛날이야기 <바위를 뚫은 화살>을 이야기해 주곤 하였다.

   옛날에 무과를 준비하는 젊은이가 산속에서 활쏘기를 비롯한 무술 훈련을 하고, 해가 진 뒤에 집으로 향하였다. 그가 어두움을 뚫고 고개를 넘으려고 하는데, 커다란 호랑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놀란 마음을 가다듬고, 호랑이를 활로 쏘아 맞히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세 대의 화살을 날렸다. 화살을 맞은 호랑이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으므로 집으로 달려왔다.

   이튿날 그 곳에 가보니, 큰 바위에 자기 화살 세 대가 꽂혀 있었다. 그는 지난밤에 바위를 호랑이로 알고 화살을 쐈음을 알고 겸연쩍었다. 그러나 화살이 바위를 뚫은 것을 흡족히 여기며 다시 화살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화살은 바위에 튕겨나가곤 하였다. 이 이야기는 옛날부터 널리 퍼져 전해오면서 필사의 각오로 정신을 집중하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교훈적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중국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이광장군열전어느 날 이광(李廣, B.C. ?119)이 사냥을 나갔다가 수풀 속에 큰 호랑이가 있는 것을 보고 활을 쏘아 명중시켰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바위였다. 그리고 살촉이 바위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활을 바위에다 대고 쏘았으나 살촉은 바위를 뚫지 못했다.”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들은 바위를 뚫은 화살이야기가 이 이야기를 모태로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고등학교 때 정 선생님은 모사재인성사재천(謀事在人成事在天)’이란 말과 함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도 가르쳐 주셨다. 앞의 말은 계획을 세우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그 일의 성사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이고, 뒤의 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는 말이다. 이 말은 계획한 일의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최선을 다하면 바라던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준다. 혹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냥 하늘의 뜻으로 알고 실망하거나 비관하지 말라는 뜻도 담겨 있다.

   이 말의 출처는 《삼국지연의》이다. 촉한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유비가 사망한 뒤에 위나라와 싸울 때 계책을 세워 사마의(司馬懿)의 군사를 골짜기로 유인한 뒤에 화공(火攻)을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큰비가 내려 불이 꺼짐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를 보고 제갈량은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이와 똑같은 뜻을 가진 말이 신약성경에도 있다. 잠언161절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라는 말이다. 지혜의 왕으로 불리는 솔로몬의 이 가르침은 계획을 세우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고 한다. 계획을 세워 추진하는 일의 성격과 내용, 기울이는 노력의 정도를 보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모사재인 성사재천’,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라는 말씀은 젊은 시절의 나를 일깨워주는 명구였다. 이런 명구를 가르쳐주시고, 진학지도를 바르게 해주신 정 선생님 생각이 간절하다.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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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조선일보 일사일언(2023. 12. 28일자 제18)사람보다 나은 침팬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침팬지의 어떤 점이 만물의 영장인 사람보다 낫다는 말인가? 호기심이 발동하여 필자가 누구인가를 살펴본 뒤에 찬찬히 읽었다. 에버랜드의 사육사 송영관 씨가 쓴 이 글은 제목과 내용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방에는 평범한 침팬지를 넣고, 나무 막대를 사용해야만 열 수 있는 먹이상자를 놓아두었다. 오른쪽 방에는 권위적인 대장 침팬지를 넣고, 먹이상자를 열 수 있는 도구만 넣어두었다. 침팬지는 도구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2007년과 2009년에 독일과 일본에서 침팬지에게도 남의 사정을 이해하고 위하거나 이롭게 하는 마음, 즉 이타심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다고 한다.

   실험 결과를 보면, 상황을 파악한 오른쪽 방의 침팬지는 아무런 조건 없이 막대기를 왼쪽 방의 침팬지에게 건네주었다. 왼쪽 방의 침팬지는 건네받은 막대기를 이용하여 먹이상자를 열었다. 그리고는 그 먹이를 오른쪽 방의 침팬지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침팬지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마음, 즉 이타심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 글을 읽고, 침팬지가 이타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큰 울림을 받았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았다.

   이 때 불현듯 세 도둑의 죽음이라는 옛날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부잣집에서 큰돈을 훔친 세 도둑이 한적한 산골로 피신하였다. 그들은 목이 출출하였으므로 한 사람은 주막으로 술을 사러 가고, 둘은 거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돈을 지키던 둘은 돈을 혼자 차지하려는 욕심에서 함께 있던 한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술병을 들고 온 사람마저 죽였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시며 호쾌한 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술을 사러간 사람이 돈을 혼자 차지하려는 속셈에서 술병에 독을 넣었으므로, 그 역시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자기의 이익만을 취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어떠한 결말을 맞게 되는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사람에게는 자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모든 것에 앞서서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 이를 이기심이라고 한다. 이것은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필요한 본능으로 누구나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도를 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겸손히 남에게 사양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이다. 그리고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이러한 인간 성정의 사단(四端), 즉 인지상정(人之常情)에서 이타심이 나온다.

   사람은 남을 배려하기에 앞서 자기의 삶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것을 지향하며 부당한 일에 맞선다. 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고 마음 아파하며 도와주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두 가지 마음 즉, 이기심과 이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두 마음이 균형을 이루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선천적인 본인의 성향이나 환경 요인에 따라 어느 한 가지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이기심이 강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살이에 가장 밝고 똑똑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타심이 강한 사람을 세상 물정을 모르는 호구(虎口)로 생각하고, 이용하려 든다.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쓰면서 이익을 꾀한다. 요즈음에 많이 일어나는 묻지마 폭행이나 보이스피싱 등 사회의 크고 작은 사건이나 범죄행위는 이런 사람들의 소행이다.

   이타심이 강한 사람은 이기심이 강한 사람을 자기만 아는 약삭빠른 사람, 상종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치지도외(置之度外)한다그리고 옳은 일에 힘쓰고,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선다불의한 일을 보았을 때에는 참지 못하고 분연히 일어선다 서울 강서구 방화동 임대아파트에 불이 났을 때 수차례 연기를 뚫고 고령자와 이웃 주민들의 대피를 도운 우영일 씨, 청주 오송 궁평2 지하차도 침수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3명을 구한 유병조 씨, 동해안에서 파도에 휩쓸려 나가는 5명을 구한 이형태 씨 등을 비롯하여 의인, 애국자 등은 이타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에는 누구나 아무 조건 없이 그 아이를 구하려고 한다. 이를 보면 사람은 누구나 이타심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음속에 함께 있는 이기심이 이타심을 억누르고 마음을 지배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도록 마음 수양을 해야 한다. 저급하고 탐욕스런 이기심이 마음을 지배하면 침팬지만도 못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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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신문, 잡지, 학술지 등에 많은 글을 실었다. 그때마다 그 글에 대한 반응이 나타났다. 학술지에 실린 글은 전공분야가 같은 분들의 반응이었고,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글은 일반 교양인이나 지인들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그 반응은 아주 다양하였다.

   한국의 고소설이나 민속, 신화·전설·민담에 관한 글일 경우에는 한국문화의 전통이나 가치관, 지혜에 관한 느낌을 말해 주었다. 교육에 관한 글일 때에는 교사들이 느낌을 말해 주었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글일 경우에는 기독교 교우들이 자기의 신앙 체험과 주님의 은혜에 관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반응은 다른 글을 쓰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요즈음에는 《기독교연합신문》은혜의 샘물코너에 신앙수필을 한 달에 한 편씩 실었다. 여기에 실린 글에 대한 반응은 감동을 받았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깨달음을 얻었다등으로 다양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지인들이 대면이나 전화, 또는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로 받은 반응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의외의 인물로부터 반응이 왔다.

   지난 1월 첫째 주일에 일찍 교회에 가니, 모르는 사람한테 온 편지가 주보함에 꽂혀 있었다. 보낸 사람의 주소를 보니, ‘경북 포항시 흥해우체국 사서함이라 쓰여 있고, 발신인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수신인은 장위교회 최운식 장로님께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나에게 오는 우편물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뜯어서 사연을 읽었다.

   첫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기에 여념이 없으실 장로님께 이렇게 번거로운 서신을 드리게 되어 정말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입니다.’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서 현재 경북 포항시에 있는 포항교도소에 수감 중인 사람이라면서, 나이와 수인번호와 이름을 적었다. 60대 중반인 그는 노안으로 인해 신문과 책을 보는 등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많아 안경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런데 가족과 지인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힘든 처지라고 하였다. 그러니 안경을 구입할 돈 7만원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교도소에서 사용하는 은행 계좌번호를 적었다.

그는 우연히 《기독교연합신문 》 을 보다가 은혜의 샘물난에 실린 목사 아들을 둔 부모란 제목의 내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내가 나가는 장위교회가 자기가 사는 곳 근처에 있다는 말도 하였다. 이로 보아 그는 서울의 북부 지역에 사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다니는 교회 이름에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며  기독교연합신문 》 이 교도소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고, 들어간 신문을 수인들이 찬찬히 읽는다는 것에 적이 놀랐다. 그가 이 글을 읽고 도움을 청할 대상으로 나를 고른 것은 맞다. 그러나 그는 부족한 내 글을 읽고 반가운 마음과 함께 공손한 마음이 들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목사 아들을 둔 부모와 목사가 된 아들의 마음과 신앙심이 그의 마음에 전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의 편지는 문장이 바르고, 표현이 적절하였으며,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잘 하였다. 글씨는 달필은 아니었지만, 읽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말의 앞과 뒤에 인사치레를 잘 하였다. 이로 보아 학력과 교양 수준이 높은 사람인 것 같다. 이런 사람이 무슨 일로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기독교에 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적어 보낸 계좌번호로 돈을 보내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하나님, 그가 이 돈으로 안경을 맞춰 쓰고 밝아진 눈으로 신앙에 관한 글과 성경을 읽고, 예수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무사히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출소하여 새 출발하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 질 것이라 믿는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글은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글이나 신앙을 강요하는 느낌을 주는 글은 좋은 글마저 읽기를 회피하게 만드는 핑계를 만들어 준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내용을 바르고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한 글은 많이 써서 널리 보급해야 한다. 이런 글은 설교 못지않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704, 202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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