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카톡으로 ‘3대 바보’에 관해 적은 글을 받았다. 그 중 하나는 노후 자금을 자식들에게 넘겨주고 자식 눈치 보며 사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 글을 읽을 때 간접적으로 들은 한 지인의 사연이 떠올랐다. 그는 사업을 하는 아들이 이자를 쳐서 매월 드릴 터이니 돈을 꿔 달라고 사정하여 몇 차례에 걸쳐 은행에 넣어 두었던 돈을 모두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얼마 동안은 약속한 날짜에 꼬박꼬박 돈을 보냈다. 그래서 그는 노후자금 넘겨주기를 잘 하였다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은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제 날짜에 돈을 보낼 수 없게 되었다. 생활비가 없는 그는 노인 일자리를 찾아 이 일 저 일을 하며 고생스럽게 산다고 한다. 그가 노후 자금을 아들에게 모두 넘기지 않았다면 생활비가 없어 고통을 겪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은 자금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겠지만, 실패를 딛고 젊음의 용기와 패기로 극복하고 이겨냈을 것이다.

   노인이 가진 돈을 자식들에게 생전에 증여하는 것이 좋은가, 죽은 뒤에 상속하는 것이 좋은가? 얼마 전에 TV 프로그램 「황금연못」에서 50여 명의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노후자금이나 부동산을 자녀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좋은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다가 남는 것을 상속받게 하는 것이 좋은가를 놓고 토론하는 것을 보았다. 나눠주는 것이 좋다는 사람은 자녀들이 필요로 할 때 나눠주어 힘을 펴게 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은 노년의 품위를 유지하며 살아야 하고, 자녀들이 부모에게 관심을 갖게 하려면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날 모인 사람들의 의견은 ‘생전의 증여’보다는 ‘사후의 상속’이 조금 더 많았다.

   이 문제에 관해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옛날이야기 「나도 계집 있다」에 이에 대한 해법이 담겨 있다. 옛날에 한 농부가 섣달 그믐날 아들과 며느리가 떡을 하느라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 떡이 익자 아들과 며느리는 아이들을 불러 먹으면서 그에게는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 뒤늦게 외출하였다가 돌아온 그의 아내가 아들과 며느리를 꾸짖은 뒤에 떡을 가져왔다. 그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떡을 먹었다. 그 때 마침 아들이 방문 앞을 지나자 문을 열어젖히고, "너만 계집 있느냐! 나도 계집 있다!"라고 외쳤다. 명절이 지난 뒤에 그는 논과 밭을 모두 팔아 가지고 아내와 함께 멀리 떠났다. 농사지을 땅이 없어진 아들 내외는 빈궁한 생활을 하며 백방으로 아버지의 행방을 찾는다. 어렵사리 아버지를 찾은 아들이 용서를 빌며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아버지는 거절한다. 3년이 지난 뒤에 그는 아들 내외와 아이들이 겨우 먹고 살 정도의 토지를 사서 주고, 나머지 재산은 마음대로 쓰면서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세 가지의 교훈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첫째, 자녀는 부모에게 재산이 있어야 관심을 갖는다. 둘째, 자녀가 생활할 수 있는 만큼의 재산은 미리 나눠준다. 셋째, 남은 재산은 자기가 가지고 관리하면서 쓰다가 남으면 상속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와 같은 삶의 지혜를 옛날이야기 속에 숨겨 전하였다. 이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노후의 생활 모습이 달라질 것이다.

   얼마 전에 60대 후반의 제자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직장에서 은퇴한 아버지가 장성한 아들에게 자립정신을 강조하며 재산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이혼하자며 재산 분할을 요구하였다. 그 이유를 물으니, 아내는 재산을 분할 받아 아들에게 주려고 그런다고 하였다. 그는 아내의 뜻을 꺾을 수 없어 아들에게 노후 자금의 반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재산 증여에 대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이 다를 수 있음이 나타난다.

   얼마 전에 남편을 여읜 지인이 이런 말을 하였다. 그의 남편은 자녀들에게 생전에 부모에게 의탁할 생각을 하지 말라며 자립정신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아들도 딸도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며 잘 살고 있다고 하였다. 자녀는 어린 시절부터 정신 교육을 제대로 하여 성인이 된 뒤에 자립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노부모의 생활을 어렵게 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혼인하여 삼남매를 두었다. 그래서 내가 은퇴 후의 생활 계획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을 때에 모두 혼인을 하였다. 나는 내 형편에 맞게 도와주어서 그들이 인생을 출발함에 큰 어려움이 없도록 해 주었다. 그 뒤에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조금씩 도와주었다. 나는 연금 받는 것이 있으니,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는다. 다만, 큰일이 생겼을 때에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의 돈만 조금 가지고 있으면 된다. 연금을 받으며 노후를 편안히 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살고 있다. (2023. 7. 11)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보다 행동으로  (0) 2023.08.28
기도하고 시작한 강의  (0) 2023.07.22
하나님의 계획  (0) 2023.06.26
세계 최초의 교회를 찾아서  (0) 2023.05.26
자물쇠 채운 기원문  (0) 2023.05.22

   얼마 전 김 교수와 전북 고창군 흥덕에 갔을 때의 일이다. 거기서 김 교수는 아끼는 제자 송 목사에게 전화를 하니, 그가 달려왔다. 우리는 그가 담임한 교회 신축공사장에 가서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본당 자리에 둘러서서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공사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는 백석대학교 선교학과 졸업생이다. 그는 재학 시절에 나이 많은 학생으로, 학업에 매우 열중하였다. 나는 그 무렵에 백석대학교에 강사로 가서 선교학과와 신학과 학생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강의하였다. 송 목사는 그 때 내 강의를 들은 학생인데, 과대표로 강의 분위기 조성에 앞장섰던 ‘노학생’이어서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그에게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형편을 묻고, 목회에 성공하기까지 겪은 일들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였다. 그는 고향인 군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고 다니며 파는 장사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나이가 좀 든 뒤에는 전기와 설비 기술을 익혀 건설 현장에 가서 열심히 일하였다.

   그는 20세에 아는 사람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새벽기도 중에 “너는 공부를 더 하여라.”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몹시 가난하였던 그는 그 말씀을 무시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계속하였다. 군에서 제대한 뒤에는 서울에 있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며 교회에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심신이 몹시 피곤하여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폐결핵이라고 하였다. 그는 객지 생활에, 당시에 불치병으로 여기던 폐결핵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 빠졌다. 그는 약을 먹으며 기도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 무렵에 그가 다니는 교회의 처녀 전도사가 그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는 처음에는 중졸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신학대학을 졸업한 전도사와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망설였다. 그러나 서로의 진심이 통하여 어른들의 허락을 얻어 29세에 결혼하였다. 신혼에 투병하는 일이 쉽지 않았으나, 굳은 의지와 믿음으로 이겨냈다.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왜 공부하라는 내 말을 따르지 않느냐? 더 공부해라!”라는 강한 음성을 들었다. 그는 그 말씀을 따르기로 하고, 36세가 되던 해 1월에 노량진의 고입검정고시학원에 등록하였다. 전에 배운 것은 다 잊어버렸고, 정신 집중도 잘 안 되어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공부를 시작한 지 두 달이 되는 3월에 고입검정시험에 합격하고, 그해 8월에 대입검정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래서 37세에 백석대학교 선교학과에 입학하였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그는 한 시 반 때도 놀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래서 장학금을 받으며 학부 과정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가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의 기도와 도움이 큰 몫을 하였다. 그는 대학원을 마치고 전도사로 일한 뒤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14년 전에 교인이 열세 명인 흥덕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 교회의 교인과 지역 주민은 대부분이 노인들이었다. 그는 교회 승합차로 동네 어른을 태워다드리며, 사는 형편과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를 묻곤 하였다. 어른들 중에는 수도가 잘 나오지 않아서, 전등·TV·냉장고·세탁기 등의 가전제품이 고장 나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이 계셨다. 그는 이런 말을 듣는 즉시 달려가서, 청년 시절에 익힌 설비와 전기 기술을 발휘하여 무료로 수리해 드렸다. 이런 일이 알려지자 이웃동네 어른들도 어려움을 호소하며 그를 불렀다. 이렇게 하는 동안 어른들과 친해지면서 조심스럽게 전도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그 동네는 물론 이웃동네의 어른들이 한 분 두 분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사는 그 분들의 자녀가 흥덕교회로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교인이 130여 명이 되었다. 교인이 늘고 보니, 교회를 신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교인들과 뜻을 모아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시골교회에서 목회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투철한 신앙심, 늦깎이 학생으로 열심히 공부해 쌓은 실력이 바탕이 되었다. 그 위에 장사를 한 경험, 전에 익힌 전기와 설비의 기술이 어우러진 결과라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시골교회 목회에 적합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목회자로 키우려는 장기 계획에 의한 것이리라.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는 사람이 헤아리기 어렵다.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하고 시작한 강의  (0) 2023.07.22
재산의 증여와 상속  (0) 2023.07.11
세계 최초의 교회를 찾아서  (0) 2023.05.26
자물쇠 채운 기원문  (0) 2023.05.22
앨범 없애기  (0) 2023.05.05

   몇 년 전 튀르키예 에르지예스대학교 객원교수로 근무할 때 안타키아(Antakya)성 베드로 동굴교회를 찾아갔다. 안타키아는 튀르키예 남동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인구 약 202천명의 도시이다. 이곳은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으로, 옛 이름이 하타이(Hatay)여서 하타이로 표기된 지도도 있다.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은 두 군데이다. 하나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튀르키예 내륙 지방에 있는 얄바츠(Yalvaç)이다. 다른 하나는 수리디아 안디옥으로, 지금의 안타키아이다.

   이곳은 기원전 2,000년경까지 시리아의 아무트 왕국이 통치하였다. 그 뒤를 이어 히타이트, 앗시리아, 페르시아가 다스렸다. 기원전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물맛이 좋은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 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무장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가 이곳에 안티오키아 왕국을 건설하고, 안타키아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 뒤에 로마에 병합되었고, 시저에 의해 재건되어 상업·교육·문화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안디옥은 베드로 사도가 기독교를 로마 여러 곳으로 전파하는 포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 바울 사도와 바나바가 와서 생활하고, 선교 여행을 떠난 곳이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고향이고, 요한 사도의 수제자로 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 감독으로 순교한 폴리갑의 고향이다. 이곳은 신약시대 포교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으로, 기독교에서 예루살렘·로마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3년에 이곳을 성지로 선포하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뒤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열심히 전파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늘어가자 이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심해졌다. 신도들은 스테반의 순교 이후에 박해가 더욱 심해지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던 베드로 사도는 배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그를 따르던 신도들 중 일부가 이곳으로 와서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 사도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이 교회의 신도가 늘어가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이곳으로 보냈다. 이곳에 온 바나바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울 사도의 고향 다소로 가서 바울을 데리고 와 이 교회에서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 당시에 예수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을 크리스천(Christian)’이라 불렀다(11:2226). 이렇게 보면,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고, 이 교회의 신도들은 처음으로 크리스천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이다.

   나는 조금 긴장되고 흥분된 마음으로 하비브 낫자르산 기슭의 큰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바위 안에 세워진 것을 보면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안은 100쯤 되어 보이는 직사각형의 방인데, 전면의 중앙에는 돌로 쌓은 단이 있고, 그 가운데에 돌로 된 제단이 있다. 제단 앞의 벽 위쪽에는 천국의 열쇠와 두루마리 성서를 손에 든 베드로 사도의 상이 서 있다. 제단 오른 쪽에는 병을 낫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하는 약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성수라고 한다. 제단 왼쪽에는 도피처로 가는 터널이 있다. 돌로 만든 제단은 12∽13세기의 것이고, 모자이크 바닥은 45세기 것이라고 한다. 나는 교회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성수를 한 모금 마시면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건한 생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 때 서양 사람으로 보이는 남여 30여 명이 들어와 둘러서자 안내자가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설명이 끝나자 일행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한 뒤에 모두 손을 잡고 찬송을 하였다. 찬송이 끝나자 그 사람이 대표로 기도하였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진지하고 경건하였다. 기도가 끝난 뒤에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이탈리아에서 성지순례를 왔다고 하였다. 나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 사도가 세운 세계 최초의 교회,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처음 생긴 교회를 와 보았다는 감격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산의 증여와 상속  (0) 2023.07.11
하나님의 계획  (0) 2023.06.26
자물쇠 채운 기원문  (0) 2023.05.22
앨범 없애기  (0) 2023.05.05
시골 아가씨의 놀라운 성장과 변화  (0) 2023.03.22

    지난 4월 초에 아내와 함께 남산에 벚꽃을 보러 갔다. 남산 북쪽 순환로에서 타워 쪽으로 올라가는 길 양편에는 꽃을 활짝 피운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벚나무 사이사이에 피어 있는 진달래와 개나리를 비롯하여 키 작은 봄꽃들도 이에 질세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바람 한줄기가 다가와 벚나무를 흔들고 지나가니,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날려 흰 눈이 내리는 겨울을 연상케 한다.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공기를 마음껏 즐기며 걷다보니, 어느새 남산타워 아래에 당도하였다. 팔각정에 올라 잠시 쉰 뒤에 남산타워 옆과 봉수대 아래쪽을 보니, 소원하는 바를 적은 기원문을 걸어두는 판넬이 설치되어 있다. 여러 가지 색의 예쁜 모양 필름이나 플라스틱판에 적은 기원문은 자물쇠에 채워진 채 설치대에 걸려 있다. 겹겹이 걸린 기원문을 보니, 걸은 지 얼마 안 되는 것은 예쁜 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글자도 선명하였다. 그러나 안쪽에 걸려 있는 것은 판이 퇴색하였고, 글자도 지워졌으며, 자물쇠는 녹이 슬었다.

   기원문의 내용은 아주 다양하였다. “우리가 함께 한 1주년, 그리고 함께 할 100, 영원히 오늘 같기를!”이라고 쓴 글은 연인이 사귄 지 1년을 기념하며 사랑이 영원하기를 기원한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돼서도 남산에 이거 보러 오자는 글은 친구 또는 연인이 노인이 될 때까지 건강하여 남산에 다시 와서 이 글을 보자는 다짐이다. “00 사랑해요. 큰 거 하나 당첨되게 해 주세요.”는 사랑을 다짐하면서 행운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백반증이 빨리 낫게 해 주세요.”는 피부에 백색반이 나타나는 질환을 낫게 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다. 자녀의 이름을 쓰고 그 뒤에 입학 축하해. 사랑해, 건강하기를!”이라고 적은 것이나, “우리 가족 영원히 행복하기를!”은 온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모두 가정의 평안과 가족의 건강, 사랑의 결실과 지속, 입시·입사 시험 합격 등 일상적 소망을 적은 것이다. 기원문의 대부분은 한글이지만, 영어 또는 낯선 외국어로 쓴 글도 있는 것으로 보아 외국인도 있는 것 같다.

   기원문을 쓰는 일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집을 새로 짓거나 고쳐 지을 때 쓰는 상량문에는 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공역 일시 등과 함께 집을 지은 뒤에 좋은 일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을 적었다. 입춘에는 대문이나 기둥에 한 해의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며 복을 바라는 입춘축을 써서 붙였다. 정월 대보름에 하는 달집태우기에서는 마을의 평안과 풍년 기원 등 축원의 글을 써서 붙이고 제를 올린 뒤에 태웠다. 액연(厄鳶) 날리기에서는 재액을 멀리 쫓아 버리고, 복을 부르기 위하여 정월 대보름을 기해 연에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 써서 날려 보냈다. 양초에 소원문 쓰고 태우기, 꽃바구니에 발원문 쓰기, 달님 기도문 작성 등도 기원문 쓰기의 풍습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문화에서는 기원문을 써서 붙이거나 불에 태우고, 멀리 보내거나 간직하였다. 기원문을 작성하여 태우는 것은 신에게 그 뜻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기원문을 써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유명 장소에 자물쇠를 채워 거는 것과 같은 일은 없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 널리 행해지는 풍습이 들어온 것 같다.

   오래 전에 튀르키예에 갔을 때의 일이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솟아 있어 절묘한 지형을 자랑하는 카파도키아의 산언덕에 세운 신나무에 수많은 기원문을 걸어놓은 것을 보았다. 이곳에 신나무를 세운 것은 기묘한 지형의 산언덕을 신이한 장소로 본 때문이리라. 에페스(성경에 나오는 에베소) 근처의 뷜뷜산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집앞에 기원문을 거는 판넬이 서 있다. 이곳에는 소원을 적은 종이와 헝겊이 잔뜩 걸려 있었다. 그 중에는 외국인이 걸어놓은 것도 있지만, 무슬림인 튀르키예인들이 걸어 놓은 것이 더 많다고 한다. 무슬림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비는 것은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에 마리아를 선지자 예수의 어머니로 기록하였으므로, 마리아를 거룩한 여인으로 숭배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기원문을 써서 거는 이유는 무엇일까? 옛사람들은 언어는 주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언어주술관은 현대인에게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설날 축원의 뜻을 담아 덕담을 하는 것도 이런 의식의 표현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 역시 말은 현실화한다는 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종교적인 신심을 가진 신앙인은 물론, 일반 사람들도 자기가 믿는 신에게 정성들여 기도한다. 이것은 인간이 소원하는 바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면 신이 이를 받아들여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요즈음에는 자물쇠를 채운 소원의 글을 명소에 거는 일이 국내외에서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 일이 전통문화이든, 외래문화이든 탓할 일이 아니다. 개인적인 소원을 여러 사람이 모이는 명소에 거는 것은 장난기를 겻들인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소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의 발로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다만 퇴색되고, 녹이 슨 기원문은 주기적으로 철거하여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2023. 5. 22.)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계획  (0) 2023.06.26
세계 최초의 교회를 찾아서  (0) 2023.05.26
앨범 없애기  (0) 2023.05.05
시골 아가씨의 놀라운 성장과 변화  (0) 2023.03.22
탁구 모임  (0) 2023.03.09

   얼마 전 주일예배 시간에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셨다. 예수님께서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앞 못 보는 장님을 고쳐주신 기사이적(9:111)을 바탕으로 하신 설교 말씀으로, 아주 은혜로웠다. 그 뒤에 함께 부른 복음성가 실로암은 설교 말씀과 연관되어 큰 감동을 느끼게 하였으므로 힘차게 불렀다. 그런데 옥에도 티가 있듯이 가사 중에 주여 당신께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실로암은 예루살렘에 있는,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을 지닌 연못이다. 구약 성경(열왕기하 18:17, 역대하 32:34)을 보면, 유다의 히스기야왕은 앗시리아 산헤립왕이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면 성 안에 물이 끊길 것을 염려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 밖의 수원지 기혼샘에서부터 533m의 수로를 만들어 성 안의 실로암 연못까지 물이 흐르게 하였다(기원전 701). 그래서 실로암은 그 당시 성 안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해 준 생명의 샘이 되었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장님의 눈에 침으로 갠 진흙을 발라준 뒤에 실로암 물에 씻게 하여 눈을 뜨게 한 곳이다. 이로써 실로암은 장님이 눈을 뜨게 한 기적의 연못, 어두움을 밝힐 빛을 비쳐주는 신성한 연못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실로암1981년에 신상근 목사가 작사 작곡한 복음성가이다. 이 곡은 신 목사가 젊은 시절에 고난과 좌절을 겪다가 주님의 은혜로 삶의 희망을 찾고, 그 은혜에 대한 벅찬 감동을 표현한 곡이다. 이 곡은 사람들에게 장님이 눈을 뜨게 한 실로암처럼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해준 은혜로운 찬양이다. 40여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불려 왔다. 아주 오래 전에 아코디언을 가르쳐 주시던 장로님이 악보를 주셔서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이 곡을 아코디언으로 연주하며 많은 은혜와 감동을 체험하였다.

   이런 곡을 은혜로운 설교 말씀에 이어서 부르니 가슴에 큰 울림이 왔다. 그래서 높은 음이 잘 나오지 않지만, 목청을 돋우어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런데 이 곡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후렴 부분의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이라는 대목에서는 크게 부를 수 없었다. ‘오 주여 당신께란 표현은 현대인의 언어감각에 맞지 않을 뿐더러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에 아코디언으로 연주할 때의 느낌도 되살아났다. 주님께 무례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여에서 ‘-는 호격조사이다. 호격조사는 고유명사나 인칭대명사가 누구를 부를 때 쓰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조사로, ‘/가 있다. ‘는 자음 뒤에, ‘는 모음 뒤에 쓰인다. 호격조사는 대개의 경우 친구 사이에서나 아랫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다. ‘/의 존대형으로 /이여이시여가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 대화에서는 잘 쓰이지 않고, 기도문이나 시적 표현 등에서 쓰인다(국립국어원, 한국어 문법1, 432쪽 참조). 이렇게 볼 때 주여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나, 일상의 언어로는 어색한 표현이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부를 때 아버지여’, 또는 어머니여라고 부르지 않은 것과 같다. 여기서는 ‘-라고 하는 호격 조사를 써서 주여하는 것보다는 주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당신이란 말은 2인칭대명사로 쓰일 때와 3인칭 재귀대명사로 쓰일 때에 상대방을 높이는 정도에 차이가 있다(국립국어원, 한국어문법1, 380쪽 참조).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할 때에는 조금 높이는 뜻이 있다. “당신 요즘 피곤하시죠?”라고 할 경우에는 부부 사이에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뜻이 있다. “당신이 뭔데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거야.”는 상대방과 싸우면서 상대방을 낮추어 말할 때 쓴다.

   ‘당신3인칭 재귀대명사로 쓸 때에는 아주 높이는 뜻이 있다. 재귀대명사란 체언을 도로 나타내는 삼인칭 대명사로, ‘자기당신따위가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생전에 당신의 책을 소중히 다루셨다.”라고 할 때에는 할아버지를 아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실로암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주여하고 불렀으니, ‘당신2인칭 대명사로, 낮추거나 조금 높이는 표현이다. ‘, 주님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주여 당신께는 아주 높여야 할 주님에 대한 표현으로 적합하지 않다. ‘주님, 주님께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전해 오는 말 중에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국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 몰랐더라면 주여 당신께란 표현이 마음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감동적인 찬송을 부르면서도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법에 관해 조금 아는 게 병이 된 탓이리라.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아무 저항감 없이 부를 것이다. 그런데 이 찬송 구절에 마음을 쓰는 것은 내가 편협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작사자는 조금 더 유의하여 가사를 쓰고, 그 곡을 부르는 사람은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부르는 기본 지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버리지 못한다

   나의 서재에는 삼익가구에서 튼튼하게 만든 책장이 여러 개 있다. 책을 넣는 칸에는 옆으로 밀어 열고 닫을 수 있는 유리가 끼워 있다. 그래서 책장은 책에 먼지가 끼지 않을 뿐더러 보기에도 좋다. 그런데 그 위에 서류봉투, 문구 용품을 넣은 쇼핑백, 기념패·감사패, 서화 두루마리, 카메라 가방, 앨범 등이 수북이 쌓여 있어 지저분해 보인다. 이들을 둘 데가 마땅치 않으므로 책장 위에 쌓아놓은 탓이다. 아내는 오래 전부터 책장 위의 잡동사니들을 좀 정리하라고 하였지만,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대답만 하고 그대로 지내왔다.

   삶의 노를 저어 세월의 강을 80여 년을 달려오고 보니, 영원의 바다에 이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주변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책장 위에 쌓아두었던 논문 및 저서를 집필할 때 참고했던 자료, 강의 자료, 방송 출연 자료, 설화 채록 원고, 해외여행 관련 자료, 편지 뭉치 등을 며칠 동안 검토한 뒤에 과감하게 폐기하였다. 그런데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기 전에 필름에 찍어 인화한 사진을 정리한 앨범과 미처 정리하지 못해 책장 아래의 서랍에 넣어둔 사진들을 폐기하려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사진들을 살펴보니,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사진이 한 장씩 있다. 그 뒤에 고등학교, 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 찍은 사진을 비롯하여 아내와 연애하고, 결혼하던 때에 찍은 사진이 이어진다. 삼남매가 자라던 때의 모습, 가정의 대소사를 찍은 사진도 보인다. 또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 시절의 모습, 대학 교수가 된 뒤에 있었던 일, 크고 작은 상을 받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보인다.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도 많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내 삶의 일부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이런 사진을 폐기처분하는 것은 내 삶의 기록을 지워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사진들을 폐기하려고 하나? 그 이유의 하나는 책장 위에 쌓여 있는 앨범과 서랍 속의 많은 사진들을 폐기하여 80대 노인의 주변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다른 하나는 내 아들이나 딸의 짐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죽은 뒤에 내 아들이나 딸은 내가 쓰던 물건들을 정리할 것이다. 그 때 우리 부부 얼굴이 들어간 사진들은 선뜻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나의 경우, 선친께서는 사진을 많이 찍지 않던 시대에, 조금 사시고 일찍 돌아가셨으므로 사진을 한두 장밖에 남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95세까지 사시면서 많은 사진을 찍으셨고, 이를 정리·보관하고 계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0여 년이 지났으나, 나는 어머니의 앨범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그 까닭은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이다. 이렇게 부모의 사진을 버리는 일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면, 내 사진을 내가 폐기하는 것은 내 아들이나 딸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정리해야 할 사진은 모두 1990년대 말까지 찍은 사진이다. 2000년대 초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면서부터 찍은 사진은 파일로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USB에 저장해 놓았다. 이들은 인화한 사진처럼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을뿐더러 폐기할 때에도 파일을 삭제하면 되기 때문에 많은 수고를 요하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남은 세월 동안 보관해 두고 싶은 사진만을 골라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가지고 있는 사진을 모두 파일로 만드는 일은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든다. 그래서 앨범의 사진들을 모두 뗀 뒤에 보관해 두고 싶은 사진만을 골라 따로 놓았다. 고를 때에는 기념이 될 만하고, 구도가 좋으며 초점이 잘 맞은 사진을 골랐다. 선택된 사진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파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에 이를 컴퓨터에 옮긴 뒤에 찍은 날짜와 이름을 적었다. 날짜를 적어 놓지 않은 사진은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여 추정하였다. 그랬더니 사진 파일들이 날짜순으로 정리되었다. 이런 작업을 한 뒤에 파일을 몇 시기로 구분하여 저장하였다. 그 결과 꼭 보관하고 싶은 사진들이 시기별 날짜순으로 정리되었다.

   사진을 떼어낸 빈 앨범을 보니, 두꺼운 판지에 비닐이 덮여 있고, 이를 철선으로 묶었다. 이를 그대로 버리는 것은 쓰레기 분리수거 기준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비닐을 찢어내고, 이를 묶은 철선을 펜치로 끊어서 해체하였다. 그래서 종이, 비닐, 철선을 따로따로 쓰레기 수거 용기에 넣었다. 이 일은 손이 많이 가고, 힘도 들었다.

   이제 사진을 버리는 일이 남았다. 많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찢어 버리자니 손이 많이 가기도 하지만, 나와 사진 속 인물의 몸을 찢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전에 사다 놓은 수동식 서류 파쇄기에 넣어 부수자니, 일이 너무 많고,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불에 태워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이다. 친척이나 친지 중에 아궁이가 있는 집을 알아보아 가지고 가서 태워야겠다.

   책장 위에 얹어 놓았던 앨범과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고 보니, 서재가 정돈된 듯하다. 컴퓨터를 켜고 저장한 파일을 여니, 어린 시절부터 2000년대 초까지의 사진이 컴퓨터 화면 에 차례로 펼쳐진다. 이 작업을 하는 며칠 동안은 힘이 들기도 하였지만, 내 삶의 기록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다. 앨범을 없애야 하는 이유 두 가지를 해소하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하다. (2023. 05. 05.)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 최초의 교회를 찾아서  (0) 2023.05.26
자물쇠 채운 기원문  (0) 2023.05.22
시골 아가씨의 놀라운 성장과 변화  (0) 2023.03.22
탁구 모임  (0) 2023.03.09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 알고 쓰기  (0) 2023.02.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