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아내와 함께 경북 영주시 부석면 복지리 봉황산 기슭에 자리 잡은 부석사를 찾았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676)년에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절이다. 의상 대사는 중국 당나라로 가서 중국 화엄종의 시조인 지엄(智儼) 대사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뒤에 왕의 뜻을 받들어 이 절을 창건하였다. 여기에는 고려 시대에 지은 무량수전(국보 제18)과 조사당(국보 제19), 신라 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의 석등(국보 제17),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 주사당 벽화(국보 제46),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 삼층석탑(보물 제249), 당간지주(보물 제255) 등의 문화재가 있다.

   무량수전 서편에 큰 바위를 받침으로 깔고 앉은 넓고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밑 부분이 받침에 완전히 닿지 않고 공중에 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하고,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지을 때 이를 방해하는 이교도들을 선묘(또는 용녀)가 신통력으로 물리쳤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의상 대사는 문무왕 1(661)년에 신라에 왔다 가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그가 양주의 주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머무를 때에 그의 딸 선묘(善妙)가 그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선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법도로 대하여 그녀를 제자로 만들었다. 그는 안남성 종남산 지장사로 가서 지엄 대사의 문하에서 10년간 공부하였다.

   그는 일이 생겨 갑자기 귀국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양주에 들러 선묘를 만나려 하였으나 출타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급히 항구로 가서 배를 탔다. 이 소식을 들은 선묘가 항구로 달려가니, 배가 막 출발하였다. 선묘가 그를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가사와 법복을 배를 향해 던지니, 바람을 타고 배에 닿았다. 선묘는 자기 몸이 용이 되어서 의상 대사를 보호하게 해 달라고 발원하였다. 그래서 선묘는 용이 되어 그를 보호하며 신라에 왔다.

   의상 대사가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하자 오백여 명의 이교도들이 이곳은 우리들의 기도처이므로 절을 지을 수 없다며 막아섰다. 그래서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용녀 선묘가 현신하여 커다란 바위를 공중에 세 번이나 들어 올리며 이교도들을 위협하였다. 이교도들이 놀라 겁을 먹고 물러서자 바위를 내려놓았다. 이 바위가 땅위에 떠 있으므로 부석이라 하고, 그 절을 부석사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유증선, 《 영남의 전설 》. 최운식, 《다시 떠나는 이야기 여행 》 참조)

   부석에 관하여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 》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불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옆으로 섰고, 그 위에 큰 돌 하나가 지붕을 덮어 놓은 듯하다. 얼른 보면 위아래가 서로 이어진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두 돌 사이가 서로 눌려져 있지 않다. 약간의 빈틈이 있어 새끼줄을 건너 넘기면 나고 드는 데에 걸림이 없다. 그래서 떠 있는 돌인 줄을 알게 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있는 부석사에도 전해 온다. 의상 대사가 도비산에 절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산에 본거지를 둔 해적들이 방해하여 절을 지을 수 없었다. 이 때 그가 당나라에서 올 때 만났던 용녀가 도비산 꼭대기에 나타나 큰 바위를 들고 해적들에게 이 산을 떠나라고 했다. 도둑들이 떠나자 용녀는 들고 있던 바위를 앞바다에 던졌다. 그 바위는 간만의 차에 구애 없이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뜬 바위’, 부석이라 하였다. 그 산에 지은 절을 부석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산을 섬이 날아간 산이라 하여 도비산(島飛山)이라고 했다. (최운식, 《한국구전설화집 4 》).

   영주 부석사 전설과 서산 부석사 전설은 부석사의 유래를 용녀, 부석과 관련지어 설명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서산 부석사 전설은 바다를 배경으로 함에 따라 이교도해적’, ‘선묘용녀로 바꾸었다. 또 충남 서산시에 부석면이라는 행정 구역, ‘부석사라는 절 이름, ‘도비산이라는 산 이름, ‘부석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로 보아 서산 부석사 전설이 민간에 끼친 영향이 더 컸던 것 같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전해 왔다. 12년 뒤에 인도의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하였다. 그로부터 훨씬 뒤에 고구려의 묵호자가 신라의 서북 지방인 일선군 모례(毛禮)의 집에 기숙하면서 불법을 전하였다. 그래서 모례는 신라인으로서 최초의 불교 신도가 되었다. 그 후 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에서 아도(阿道. 고구려에 왔던 중국승 아도와는 동명이인)가 와서 불법을 전도한 뒤로 신봉하는 자가 늘어났다. 신라 왕실에서는 불교 공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귀족들과 백성의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법흥왕은 527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배불파를 제압하고 불교공인을 선포하였다.

   모든 종교는 전도에 뜻을 두고 이를 위해 온힘을 기울인다. 한 종교가 다른 문화권에 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에는 그 지역에 전해오는 종교 또는 민간신앙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그 충돌을 이겨내면 전도에 승리하는 것이고, 이기지 못하면 그 종교는 그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 것이다. 외래종교인 불교가 신라에서 유난히 전도하기가 힘들었던 것은 신라에 민간신앙의 뿌리가 깊어 저항이 컸기 때문이다.

   위 이야기에서 이교도해적은 민간신앙의 신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절터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민간신앙 신도들의 기도처였을 것이다. 이들이 불교의 포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의 성지(聖地)를 빼앗아 절을 지으려고 하니 이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 때 선묘, 또는 용녀가 큰 바위를 번쩍 들고 위협하여 이들을 굴복하게 만든다. 이것은 불교가 포교하며 절을 지을 때 민간신앙과 충돌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나 신이한 법력을 보임으로써 민간신앙을 제압하고, 승리하였음을 드러낸다.

   선묘가 바다로 던진 가사와 법복이 의상 대사가 탄 배에 닿는다. 선묘가 소원대로 용녀가 되어 대사를 호위하고 신라로 온다. 용녀가 큰 바위를 들고 이교도들을 위협한다. 또 선녀가 내려놓은 바위가 바닥에 닿지 않고 떠 있다. 이런 것들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불교적인 법력을 영검하게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차용한 설화적 수사이다. 승려나 불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래서 불교를 민간신앙보다 우월한 종교, 포교에 승리한 종교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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