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0일에 아내와 함께 ‘명보아트시네마’에 가서 영화 <사랑의 선물>을 관람하였다. 이 영화는 탈북자 출신의 김규민 감독이, 북한 황해도에서 있었던, 한 가족의 사랑을 다룬 슬픈 이야기이다. 나는 며칠 전에 우연히 김 감독이 TV에 출연하여 이 영화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순간 북한 출신 감독이, 북한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다룬 영화라면,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상영관을 알아내어 극장을 찾아갔다.

   이 영화의 내용은 1998~1999년 대기근 때 북한 황해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당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다가 하반신이 마비된 상이군인 남편 김강호(출연배우 문영동)와 헌신적인 아내 이소정(출연배우 김소민), 그리고 열 살 된 딸 효심(출연배우 김려원) 등 세 명의 가족이 겪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아내는 가족의 생계와 아픈 남편의 병 치료를 위해 힘든 일·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몸이 으스러지도록 일을 한다. 그러나 남편의 약값을 댈 수 없어 여기저기에서 돈을 꾸어 쓰고, 마침내는 자기 몸까지 팔게 된다. 그러다가 매춘행위를 단속하는 경찰에게 잡혀 어려움을 겪는다. 그녀에게 돈을 빌려준, 그 지역의 핵심 당 간부는 이 일을 약점으로 그녀를 위협하여, 남편이 상이군인이 되면서 받은 집을 빼앗으려고 한다. 아내는 딸 효심의 생일날,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쌀밥에 계란국을 마련한다. 남편이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추궁하자, 아내는 둘러대다가 나중에 ‘장군님 접견자’가 되어 상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장군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이라며 감격한다. 그러나 삶에 지친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각자 쥐약을 사서 먹고 생을 마감한다.

   영화에서 남편은 돈의 출처를 바로 말하지 못하는 아내에게 “비사회주의자로 낙인찍히면 누가 거들떠볼 것 같으냐?”고 힐난한다. 참다못한 아내는, “당신이 쓰러질 때마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맞는 주사랑 약들은 다 어디서 나는데요?” 하고 따진다. 남편이 “그거야 다 병원에서······.” 라고 말끝을 흐리자 아내는, “요즘 어느 병원에서 주사를 주고 약을 주느냐?”고 소리친다. 그리고 “죽을 만큼 힘들어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요. 절약이요? 뭐가 있어야 절약을 하죠!” 하고 울부짖는다. 이 말은 살아보려고 몸부림쳐보았지만, 어찌 할 수 없는 아내의 절규(絶叫)이면서, 동시에 배고픔을 달랠 길 없는 주민들의 외침일 것이다.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을 강조하면서 자력갱생(自力更生, 남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어려움을 타파한다)과 간고분투(艱苦奮鬪,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있는 힘을 다해 싸운다)로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하자고 하였다. 이런 선동의 말에 나오는 ‘낙원’은 독재자 김씨 일가와 그의 추종자들이 ‘권력을 독점하며 잘 먹고 잘 사는 곳’으로, 북한 주민에게는 허황한 구호일 뿐이다. 또 다른 장면에서 아내는 “남조선이 ‘갖다 바친 쌀’을 배급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은 남한에서 그동안 보낸 쌀이 주민들에게는 배급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국민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북한의 암담한 현실에 절망감을 느꼈다. 입으로는 고난의 행군과 당에 대한 충성을 말하면서 주민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기 잇속을 챙기는 당 간부의 파렴치한 행동에 분노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구호나 약속이 허황된 선동의 말인 줄 알면서도 따르겠다고 서약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남편의 처지에는 연민을 금할 수 없었다. 아내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 순진무구한 딸의 말과 행동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넘어 슬픔이 엄습하였다.

   김 감독에 따르면, 이 영화는 북한의 인권문제를 다룬다는 이유로 호응을 얻지 못해 배우 캐스팅(연극이나 영화에서 배역을 정함)부터 국내 개봉까지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투자자가 나서지 않아 최소의 비용으로 만들어야 했으므로, 제작비가 3억 원밖에 들지 않은 초저예산 영화가 되었다. 어린이의 배역을 정할 때에는 촬영 현장에 보호자가 따라옴에 따르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다가 자기의 딸을 캐스팅하였다고 한다. 어렵게 제작을 마치고 국내에서 상영하려고 하니, 정부의 친북정책과 이에 따른 사회 분위기 때문에 상영관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해외 영화제에 출품하여 영국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퀸즈국제인권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울러 밀라노국제영화제, 홍콩 PUFF영화제, 보스턴국제영화제, 런던국제영화감독축제, 오클랜드국제영화제 등에서 공식 상영되거나 수상후보작에 뽑혔다. 이렇게 해외에서 상을 받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뒤에 국내로 들어와 일부의 극장에서 상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북한의 인권문제를 다룬 영화는 발붙일 곳이 없는 우리의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북한의 식량난이나 인권문제가 심각한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허세를 부리며 한국의 식량 지원을 거절하고 있다. 주민의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며 인권을 탄압하는 북한 집권층의 태도에 실망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대하는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의 비위를 맞추려고 북한의 인권 문제에 입을 다물고 있고, 탈북민을 돕는 일에도 소홀히 하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탈북 모자가 굶어 죽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에 따른 대처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이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보면서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 (2019.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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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에 친구들과 ‘우애 깊은 형제 이야기’의 현장 두 곳을 찾았다. 한 곳은 <의좋은 형제>, 다른 한 곳은 <금덩이를 강물에 던진 형제>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곳이다. 두 이야기는 오랜 동안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오래 전에 왔던 곳을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사무소 앞에는 ‘이성만(李成萬)·이순(李淳) 형제 효제비’가 있다. 이 지역에 살던 형제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정성을 다하여 모시고, 돌아가시자 형은 어머니의 묘소, 동생은 아버지의 묘소에서 여묘(廬墓, 무덤 근처에서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킴)하였다. 이들은 아침에는 형이 동생의 집에 가고, 저녁에는 동생이 형의 집에 가서 조석으로 함께 식사하였는데, 국 한 그릇이 있어도 함께 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이들의 지극한 효성과 우애를 기리기 위해 1497년(연산군 3년) 2월에 왕명으로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들의 효행과 우애에 관하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대흥현조(大興縣條)>에도 실려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인 이 비 옆에 ‘의좋은 형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를 하면서 이들 형제의 효행과 우애를 기리고 있다.

   이 지역에는 오래 전부터 이들 형제를 모델로 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에 의좋은 형제가 아래위 마을에 살았다. 어느 해 가을, 벼 베기를 끝낸 뒤에 형은 새살림을 차린 동생에게 많은 벼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생이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형이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해서 좀처럼 해결이 되지 않았다. 하루는 밤에 형이 볏단을 져다가 동생의 낟가리에 놓았다. 그날 밤 동생도 몰래 볏단을 져다가 형의 낟가리에 놓았다. 이튿날 아침, 형이 낟가리를 보니, 볏단이 그대로여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동생 역시 낟가리를 보니, 그 수가 줄지 않았으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두 사람은 이상하게 여기면서 밤마다 볏단을 형은 동생의 낟가리에, 동생은 형의 낟가리에 져다 놓곤 하였다. 어느 어두운 밤, 전과 같이 각각 볏단을 지고 가던 형과 아우는 마을 앞 다리에서 서로 부딪혀 넘어지게 되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볏단이 줄지 않은 까닭을 알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이 이야기에는 아우를 사랑하며 배려하는 형의 마음과 형을 공경하며 사랑하는 동생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한강 하류에 놓인 방화대교 남단의 북쪽 강변에는 ‘서서 금덩이를 던지려는 사람과 앉아서 이를 지켜보는 남자가 탄 배’가 있다. 그 옆의 안내판에는 이를 설명하는 ‘투금탄(投金灘)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 이야기는 《고려사 열전》 권34 <효우정유전(孝友鄭愈傳)>에 처음 전하는 것으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와 《신증동국여지승람》권10 <양천현산천(陽川縣山川) 공암진조(孔巖津條)>에도 실려 있다.

   고려 공민왕 때 형과 함께 길을 가던 동생이 황금 덩어리 두 개를 주웠다. 아우는 그것을 형과 한 덩이씩 나누어 가졌다. 공암나루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별안간 아우가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다. 형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동생은 “내가 평소에는 형을 사랑하였으나, 지금 금덩어리를 나누고 보니 형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니, 차라리 강물에 던지고 잊어버리는 것이 좋겠어서 그랬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들은 형은 “네 말이 과연 옳구나.” 하면서 역시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다. 이 이야기에는 황금보다 우애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형제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두 이야기는 형제 우애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실천을 강조하는 기능을 해 왔다. 나는 우애의 극치를 보여주는 두 이야기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우애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옛 사람들은 형제간의 우애를 효 다음으로 지켜야 할 덕목으로 꼽으면서, 우애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전에는 우애로운 가정이 많았고, 우애 관련 미담도 널리 전하여 왔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자녀의 수가 적은 데다가 개성을 존중하는 의식이 팽배(澎湃)하여 자기 본위의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래서 우애를 강조하는 사람을 보수적인 사람, 또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며칠 전에는 돈 문제로 다투던 58세의 형이 49세의 동생을 죽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형제들이 남은 조위금 분배 문제로 크게 다퉜다는 이야기나,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투던 형제자매가 왕래를 끊고 지낸다는 이야기는 이제 새삼스럽게 들리지도 않는다. 재산 문제로 형제간에 다투는 사람이 몇 년 전만 하여도 일곱 집 중 한 집 정도였는데, 요즈음에는 세 집 중 한 집 정도로 많아졌다고 한다. 이런 일로 미루어 보면, 이제 돈 앞에서는 우애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는 세상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어두워진다.

   나는 어렸을 때 ‘형우제공 부감원노(兄友弟恭 不敢怨怒,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히 하여 감히 원망하거나 성내지 말아야 한다.)’란 말을 듣고, 이를 실천하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퇴계가훈(退溪家訓)>에서 “형은 아우보다 먼저 태어났으니, 아우 되는 이는 형을 반드시 공경하라. 아우는 형보다 뒤에 태어났으니, 형 되는 이는 반드시 아우를 사랑해야 한다. 형제간엔 재물을 잊어버리고, 언제나 마음을 천륜(天倫)에 두어야 한다. 만약 이해를 따지면, 불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형제 사이에 재물이 끼어들고, 이해를 따지게 되면 불화할 수밖에 없으니, 천륜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으라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일찍이 장자(莊子)는, “형제는 수족과 같고, 부부는 의복과 같다. 의복은 찢어지면 새 것으로 바꿔 입을 수 있으나, 수족은 끊어지면 다시 이을 수 없다.”고 하여 우애의 소중함을 강조하였다. 이 말은 부부관계를 폄하(貶下)한 듯하여 아쉬움이 있지만, 우애를 강조한 뜻은 깊이 새겨둘 만하다.

   우애하는 마음을 갖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는 자녀에게 우애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이를 실천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 형제자매와 우애롭게 지내야 한다. 부모가 스스로 우애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 가르침은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또, 자녀가 둘 이상일 때에는 편애(偏愛)하지 말아야 한다. 편애는 자녀의 마음에 불화의 씨앗을 심어놓는 것이다. 그 씨앗이 싹이 터서 자라면, 우애는 민들레 홀씨처럼 공중으로 날아가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자녀들에게 우애로운 형제의 미담을 들려주는 것도 우애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애 깊은 형제 이야기의 현장을 찾아보며 그 이야기의 의미를 되살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2019.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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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로 10여 년, 대학 교수로 30여 년 간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그래서 나에게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대학·대학원에서 가르친 제자가 많이 있다. 그중에는 가끔씩 만나는 사람도 있고, 자주 만나는 사람도 있다. 이를 아는 지인 중에는 나를 ‘제자 잘 둔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보다 제자를 잘 둔 사람도 많이 있다. 나를 보고 제자 잘 둔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 제자인 김 교수를 꼽는다.

 

  나와 김 교수는 그가 대학 2학년 때 내 강의를 수강하면서 학연을 맺었다. 그 뒤에 옮겨간 대학교의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지도교수와 학생으로 다시 만나 학문의 동반자가 되었다. 김 교수는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였고, 이제는 나와 함께 늙어가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전과 다름없이 깍듯하다. 나는 그와 자주 만나 학문·신앙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도 하고, 부부동반으로 국내·외를 여행하기도 한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부럽고 존경스럽다고 입을 모은다.

 

   김 교수는 진실한 마음으로 제자들을 대하고, 자상하게 지도하는 교육자이므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사람은 그가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 가르친 제자들이다. 젊은 교사 시절에 어린 학생과 맺은 사제의 인연이 4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니, 정말 특이하고 귀한 일이다. 그 중에는 의사들도 있고, 사업가와 회사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의사 제자들은 “선생님의 건강은 저희들이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그의 건강을 정성으로 보살펴준다고 한다. 그가 50대 후반이 된 이들과 나누는 정은 ‘아름다운 사제의 정’이라 칭송할 만하다. 나는 그의 제자 두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아내가 어깨 통증이 심하여 동네 병원에 다녔으나 차도가 없었다. 이 말을 들은 김 교수는, 종합병원 정형외과에 근무하는, 초등학교 시절의 제자 K 교수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내 아내를 ‘존경하는 김 선생님의 사모님’이라면서 정성스레 진찰하고, 치료해 주었다. 그 덕으로 아내는 병이 나아 지금까지 큰 불편 없이 지내고 있다. 그 일이 있은 뒤에 아내는 두 차례나 K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한 번은 가슴의 통증 때문에, 또 한 번은 시신경(視神經)에 문제가 생겨 K 교수를 다시 찾았다. 그는 먼저는 순환기내과, 그 다음에는 신경과 의사에게 진료를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의 부탁을 받은 두 교수는 ‘K 교수 은사의 사모님’이라는 말을 듣고, 아주 친절하게 대하며 정성껏 진료해 주었다. 제자를 잘 둔 김 교수 덕으로, 아내는 의사를 신뢰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진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였다.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2년 전의 일이다. 김 교수는 스위스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 시절의 제자가 여러 곳을 안내해 준다고 하니,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김 교수 부부를 따라 스위스에 갔다. 공항에 마중 나온, 김 교수의 제자 P씨는 50대 중반으로, 스위스에서 20년째 살고 있으며, 보험회사 임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존경하는 김 선생님을 위해 1주일 휴가를 얻었다면서, 자기 승용차로 우리를 태우고 스위스의 여러 곳을 탐방하였다. 그가 아주 세밀하게 일정을 짜서 안내하였으므로, 우리는 아주 알찬 여행을 하였다. 여행 중에 그가 김 교수를 대하는 말과 행동은 진정한 사랑과 존경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지난달에는 김 교수 내외와 함께 오스트리아와 독일, 체코를 여행하였다. 이번에도 스위스에 사는 P씨가 일주일 휴가를 얻어, 우리를 자기의 승용차에 태워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과 유서 깊은 곳을 안내하였다. 그래서 체코의 크룸로프 성, 오스트리아의 미라벨 궁전·잘츠부르크 성·볼프 강·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 월드, 독일의 히틀러 별장과 소금산 작업장 등을 탐방하였다. 세계적인 음악가 모차르트의 생가와 기념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도 가 보았다.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 교수와 P씨 사이에 오가는 아름다운 사제의 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큰 기쁨과 보람, 감동과 함께 P씨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득 안고 돌아왔다.

 

   나는 제자를 잘 둔 김 교수 덕에 K 교수를 만나 아내의 건강을 되찾게 하였다. 그리고 P씨를 만나 두 차례나, 알차게 유럽여행을 하였다. 나는 K씨와 P씨가 4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김 교수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하는 것을 보면서 사제 간에 흐르는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젊은 시절에 사랑과 정성을 기울인 스승과 나이 들어서도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간직한 제자의 관계는 정말 귀하고, 고결하게 느껴진다.

 

   나는 김 교수와 그의 제자 덕으로 아내의 건강을 회복하였고, 즐겁고 알찬 여행도 하였다. 이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고마운 마음과 함께 흐뭇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제자를 잘 둔 김 교수와 사제의 정을 나누며 살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2019.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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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사는 집 세면대에는 대개 배수구를 막는 마개가 있다. 그래서 그것으로 배수구를 막아 물을 받아놓고 손이나 얼굴을 씻는다. 마개는 전에는 고무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으나, 요즈음에는 쇠에 도금하거나 스테인리스로 된 것을 많이 사용한다. 마개를 닫고 여는 방식을 보면, 전에는 고무마개를 손으로 눌러 막고, 잡아 올려 열곤 하였다. 요즈음에는 수전 뒤쪽에 있는 막대를 이용하거나, 손으로 직접 마개를 눌러 닫고 연다. 세면대에 물을 받아놓고 세수를 하면,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하는 것보다 편하고, 씻는 동작을 하는 동안 물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아 물을 절약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이를 널리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나라의 세면대에 마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아예 설치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터키를 들 수 있다. 내가 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근무할 때 터키인의 가정에 가 보니, 세면대의 설계 자체가 마개를 막을 수 없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오래된 개인주택이라서 그런가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새로 지은 아파트에 가서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면대의 배수구를 막을 수 없으니,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채 흘러내리는 물에 손을 씻거나,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올려 얼굴을 씻어야 한다. 얼굴이나 손을 씻는 동작이 끝날 때까지 수도를 틀어놓고 있어야 하니, 물의 소비가 많을 수밖에 없다.

 

   이를 처음 본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물을 아낀다는 의식이 전혀 없나?’, ‘유럽화 경향을 보이는 나라에서 이런 불합리한 현상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왜 이런 문화가 형성되었지?’ 하는 의문이 일었다. 나는 궁금한 것을 풀기 위해 터키 문화에 관한 책을 읽으며, 이런 문화가 형성된 배경과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터키의 주류를 이루는 민족은 튀르크(Türk) 족으로, 우리 역사서에 돌궐(突厥)로 표현된 민족이다. 이들은 일찍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면서 소와 양을 키우던 유목민족이다. 고대에 이들은 중국 북방지역에 거주하면서 우리 한민족과 싸우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19 <고구려본기> 7의 양원왕(24대) 7년(551년)조를 보면, “가을에 돌궐이 고구려에 쳐들어와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병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 보아 돌궐은 고구려와 다퉜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에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협력하였다. 이때를 생각하면, 한민족과 튀르크 족은 형제 관계라는 말이 헛말이 아니라고 하겠다. 터키에서는 역사교과서에서 한국을 형제국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튀르크 족은 전성기에 유라시아 지역 동서와 남북에 걸쳐 대제국을 형성했다. 이들은 중원이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에 의해 통일된 데다 내부 분열이 생기면서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눠졌다. 동돌궐은 630년, 서돌궐은 651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 뒤에 후돌궐이 일어나 전성기를 이루었고, 고유의 문자를 개발하여 사용하면서 ‘돌궐비문’에 강성기(强盛期) 왕의 사적을 기록하였다. 현재 중국 신장의 위구르족이 동돌궐의 후손이라면, 터키는 서돌궐의 분파다. 서돌궐은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자리 잡아 셀주크 튀르크(Seljuk Türk)를 세웠다. 이 나라는 뒤에 오스만 튀르크(Osman Türk)로 이어져 크게 세력을 떨쳤다. 지금의 터키공화국은 오스만 튀르크를 이은 나라이다.

 

   현재 터키는 유목민족의 후예답게 목축을 많이 하지만, 다양한 산업이 발달한 산업국가이다. 그러나 이들은 선조들이 유목생활을 하면서 이룩한 문화를 잊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선조는 유목민이었으므로,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래서 흐르는 물에 세수하고, 몸을 씻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에 비하여 일찍부터 농사를 지으며 정주생활(定住生活)을 한 우리 민족은 집집마다 샘이나 우물을 팔 수 없기에 두멍에 물을 길어다 놓고, 아껴가며 썼다. 이런 생활 방식이 세면대에 마개를 막는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터키 사람들은 집안에 세면대를 설치하면서 마개를 막는 한국이나 유럽의 문화를 따르지 않고, 자기 선조들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그래서 집안에 세면대를 설치하면서 마개를 쓰지 않고, 수도꼭지를 틀어 물이 흐르게 한 뒤에 그 물로 손이나 얼굴을 씻는다.

 

   나는 터키에 있을 때 터키인의 집에 가서 묵은 일이 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세면실에서 칫솔질을 하고, 물로 입안을 가시려고 컵을 찾았으나 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어 손을 오그린 뒤에 물을 받아 입을 가셨다. 집 주인에게 컵이 없다는 말을 하니, 터키인은 컵을 쓰지 않고 손을 오그려 물을 담아 올려 입을 가신다고 하였다. 이것 역시 유목생활을 하던 선조가 흐르는 물가에서 양치질을 하고 입을 가시던 생활습관에서 형성된 문화이리라. 양치질을 할 때 컵을 사용하지 않는 것 역시 이런 문화적 전통에서 연유된 것이라 하겠다.

 

   문화는 오랜 동안 한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쓰며 살아온 사람들(민족)이 생활 속에서 형성하여 전해오는 유형·무형의 것들이다. 이것은 그 민족이 사는 곳의 생활환경과 역사성을 바탕으로, 그들의 공동심성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습관이나 문화는 그 나름의 형성 배경과 이유가 있다. 이를 알아야 그 문화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문화의 형성 배경과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자기 문화의 잣대로 그 문화를 폄하하거나, 자기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면, 관규여측(管窺蠡測, 대롱으로 하늘을 보고 표주박으로 바닷물의 양을 잰다는 뜻으로 사물에 대한 이해나 관찰이 매우 좁거나 단편적임을 비유한 말)의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다른 문화의 형성 배경과 이유를 알고 이해할 때 그 문화와 교류할 수 있고, 그 문화를 지닌 사람들과도 교감하게 될 것이다.(2019.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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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기온이 34°C까지 오른, 아주 더운 날이다. 오후에 볼일이 있어 낙원동에서 인사동을 지나 조계사 쪽으로 걸어갔다. 그 길은 승용차 두 대가 겨우 지날 정도의 이면도로(裏面道路)로 가로수가 없고, 동서로 뻗은 길이어서 빌딩들이 만들어 주는 그늘도 없었다. 그래서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걸어야 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나는 고개를 좀 숙이고 걸으며,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양산이나 넓은 모자챙으로 해를 가리며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문지·책·서류봉투·손수건·부채 등을 높이 들어 해를 가리며 걷는 사람도 있다. 휴대용 선풍기를 얼굴 정면이나 목 부분에 대면서 걷는 젊은이도 있다. 그 중에서 나의 흥미와 관심을 끈 것은 합죽선(合竹扇)을 펴서 해를 가리고 걷는 사람을 여럿 본 것이다.

 

   합죽선(合竹扇)은 얇게 깎은 대나무 껍질로 살을 만들고, 그 위에 한지를 붙여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도록 만든 부채이다. 부채고리에는 장식을 매다는데, 전에는 신분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매달았다고 한다. 고려 때부터 지금까지 전승되는 합죽선은 최고 수준의 정교함과 세련미를 갖추었다. 따라서 합죽선은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을 넘어 멋과 예술을 담은 특별한 예술품이라 하겠다.

 

  부채는 오래 전부터 사용해 왔다. 부채에 관한 오래된 기록은 후백제의 왕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의 즉위 소식을 듣고, 선물로 공작선(孔雀扇, 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을 보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이다. 이 부채가 단선(團扇, 둥글게 만든 부채)인지 접선(摺扇, 접었다 폈다 하게 된 부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합죽선은 더위를 식히는 것 외에도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다. 선비들은 합죽선을 가지고 다니다가 내외하거나(남의 남녀 사이에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 피함.) 예의를 지켜야 할 경우에는 펴서 얼굴을 가려 실례를 범하지 않으려 하였다. 손잡이 부분에 있는 지압점(指壓點)을 눌러 건강 증진의 도구로도 활용하였다. 길을 가다가 불량배나 강도를 만났을 때에는 합죽선으로 막아 화를 면하였다. 시조나 가곡을 부를 때에는 장단을 맞추는 데에 사용하였다. 민요나 판소리를 부르는 소리판이나 무당의 굿판, 전통무용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소품(小品, 연극이나 영화 따위에서, 무대 장치나 분장에 쓰는 작은 도구류)이다.

 

  옛날부터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하여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에는 부채를, 동짓날에는 새해의 농사준비에 도움이 되는 달력을 나눠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단오가 되면 공조(工曹)에서 부채를 만들어 임금께 바치고, 임금은 이를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단오에는 일반인들도 부채를 선물로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여름을 맞아 더위를 이기고 건강을 지키라는 뜻이 담긴 풍습이라 하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오에 부채를 진상(進上)하게 한 뒤에 임금이 이를 신하들과 군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합죽선은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만들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대나무와 한지의 품질이 우수한 전라도 지방에서 만든 것이 호평을 받았다. 전주감영에서는 선자청(扇子廳)을 두어 합죽선을 만들었다. 최근에 와서 합죽선은 역사성‧예술성 면에서 전승‧보존 가치가 높다 하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를 만드는 기술과 기능을 보유한 선자장(扇子匠)을 지명하였다. 합죽선 장인(匠人)의 전승계보를 보면, 제1대는 라경옥 씨이고, 제2대는 그의 아들 라학천 씨이다. 제3대는 라학천 씨의 다섯 아들이고, 제4대는 라학천 씨의 외손자인 김동식 씨이다. 김동식 씨는 외할아버지인 라학천 씨와 셋째 외숙인 라태순 씨의 기술을 이어받은 제4대 선자장이다. 합죽선은 2007년에 전라북도중요무형문화재로, 2015년에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제128호)로 지정되었다. 김동식 씨는 전라북도 지정 선자장에 이어 국가지정 선자장이 되었다. 제5대는 아들 김대성 씨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합죽선 세 개를 가지고 있다. 둘은 전주 지방에 사는 제자가 선물로 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필리핀에 여행 갔던 제자가 사다 준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고종황제께 합죽선을 만들어 바친 제2대 합죽선 장인 라학천 씨의 다섯째 아들 고 라태용 선생이 만든 명품(名品)이다. 이 부채는 잔손을 많이 들여 정밀하게 만든 37개의 살에 기름먹인 한지를 붙여 만들었다. 부채를 펴면 3분의 2쯤 되는 선면(扇面)에 굽은 노송을 그린 묵화(墨畫)가 있고, 그 옆에 송나라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시 「고송(古松)」이 적혀 있다. 끝에는 ‘崔雲植 敎授. 000 拜上/ 丁丑年 元旦 無等)’이라 쓰고 낙관이 찍혀 있다. 부채고리에는 청․홍색 실로 정성껏 만든, 고상하면서도 호사스러운 느낌을 주는 매듭이 달려 있다. 제3대 선자장인 라태용 선생이 만든 부채를 보고 있으면, 아주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선자장인 라 선생께 특별히 부탁하여 얻은 작품을 나에게 선물한 000 선생께 감사한다. 나는 이 부채를 받은 정축년(1997)부터 지금까지 연구실에 두고, 냉방 시설이 가동되지 않아 더울 때에는 더위를 식히고, 심심할 때에는 지압을 하는 소품으로 활용한다. 부채에 적힌 시를 읽으며 고송을 스쳐온 듯한 바람을 느껴보기도 한다.

 

  요즈음 아내는 오죽을 깎아 만든 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접이식 작은 부채[烏竹扇]를 가지고 다닌다. 서예를 공부한 친구가 써준 글귀가 적혀 있어 매우 아끼며 사용한다. 그러나 나는 부채를 가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어디를 가든 실내는 냉방이 잘 되어 있고, 승용차는 물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차안에 에어컨이 있어 덥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밖이 워낙 더웠기 때문에 냉방을 한 은행에 들어가서도 시원함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순번을 기다리는 동안 내내 A4 용지로 부채질을 하면서 합죽선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였다.

 

  요즈음에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부채를 보면, 전통부채 외에 현대부채도 있다. 현대부채는 전체를 플라스틱으로 만들었거나 플라스틱으로 살을 만들어 양쪽에 종이를 접착한 살부채, 종이에 인쇄를 하여 필름으로 코팅을 하고 자루를 끼운 부채 등 다양하다. 이들은 바람을 내는 데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가지고 다니기에는 불편한 일회용품이다. 합죽선이나 오죽선은 오래 사용할 수 있고, 가지고 다니기에 좋으며, 품위가 있어 보인다.

 

  얼마 전에 만난 선배가 가방에서 합죽선을 꺼내 부채질을 하고, 거기에 쓰인 한시를 풀어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합죽선을 애용하는 것은 각자의 건강을 챙기면서 무형문화재의 전승과 보존에 도움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합죽선을 가지고 다니면서 더위를 식히는 한편, 옛사람들의 정취를 느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2019.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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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의재서실(宜齋書室)’이라고 새긴 현판(懸板)을 선물로 받았다. 정년퇴임을 한 뒤에 서각(書刻)을 익혔다는 H 교수가 정성껏 새겨 만든 작품이다. 내 연구실이 있는 종로오피스텔에는 각 방문에 호실이 쓰여 있고, 그 위에 표찰(標札)을 붙일 수 있는 A4용지 크기의 사각 판이 붙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현판을 걸 자리는 없다. 나는 궁리 끝에 현판 사진을 A4용지에 인화하여 사각 판에 붙였다. ‘의재’는 나의 호이고, ‘서실’은 ‘서적을 갖추어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방’이라는 말이니,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종로오피스텔에는 290여 개의 크고 작은 방이 있다. 복도를 지나면서 보면, 각 방문에는 회사, 출판사, 연구실, 변호사·세무사 사무실, 목회상담실, 서예실 이름 등 각양각색의 표찰이 붙어 있다. 그런데 그동안 내 연구실 문에는 표찰을 붙이는 자리에 흰 종이를 붙여 놓았었다. 그래서 나를 찾는 사람은 방 번호를 기억해야 찾아올 수 있었다. 방 번호를 깜빡하였거나, 잘못 기억한 사람은 다른 방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내게 전화를 걸어 묻거나 1층 경비실로 가서 확인하고 찾아오는 불편을 겪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제 표찰을 붙였으니, 이런 불편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표찰을 붙이지 않아 불편을 겪은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가 종로오피스텔에 연구실을 마련한 것은 2007년 10월의 일이다. 그것은 2008년 2월에 있을 교수 정년퇴임을 앞두고 대학의 연구실에 있는 많은 책을 어디로 옮겨 놓고, 연구 활동을 이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때였다. 그 무렵에 먼저 퇴임한 선배 교수의 연구실이 있는 종로오피스텔을 찾게 되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나도 이곳에 개인 연구실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부동산 중개인에게 부탁하였고, 순조롭게 진행되어 작은 방을 매입하여 정년퇴임과 동시에 대학 연구실에 있던 책을 옮겨 놓았다.

 

   나는 연구실을 기도와 독서·연구의 공간, 사람을 만나 교양을 넓히고 업무를 처리하는 사무실, 건강을 증진시켜 주는 곳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침에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갈 곳도 없고, 할 일이 없어 무료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 참으로 좋다. 연구실에 와서 기도드린 뒤에 홀로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으면, 대학의 연구실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아서 퇴직하였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이 연구실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단독 저서와 공동 저서 몇 권을 집필하였다.

 

   내 연구실은 교통이 좋은 종로 3가의 전철역 가까운 곳에 있어서 지인을 만나기에 편하다. 내가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은 인사차 오는 사람, 함께 담소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사람, 연구하고 토론을 하여 보람을 얻으려는 사람, 출판이나 방송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등 다양하다. 연구실이 없으면 이런 사람들을 집에서 만나야 한다. 교통이 좋은 곳에 연구실이 있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은 집까지 찾아오는 수고를 덜 수 있고, 아내에게는 손님 접대의 부담을 주지 않는다. 점심은 물론 저녁식사도 연구실 근처에서 하는 일이 많으니, 아내에게 이식(二食)·삼식(三食)의 수고를 끼치지 않아서 좋다.

 

   나는 많은 비용을 들여 유지하는 연구실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연구실에 나온다. 연구실에 오고갈 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연구실 밖에 나와 점심을 먹은 뒤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창덕궁을 산책하기도 하고, 인사동이나 종로에 있는 전시장이나 서점을 방문하기도 한다. 이렇게 걷는 일은 운동량이 부족한 나에게 건강 증진의 계기가 된다. 이러한 일들은 연구실을 유지하는 데 따른 장점으로, 연구실 개설과 유지에 따른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연구실을 마련하려고 할 때, “정년퇴임을 하면 쉬는 게 순리인데, 많은 돈을 들여 연구실을 만들려고 하느냐?”고 하면서,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때 만류하는 말을 듣고 연구실을 마련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집의 서재에서 할 것이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은 집에까지 와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지금보다 적을 것이다. 매일 출근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설 일이 없으니, 게으름을 피우는 날이 많아져서 활동량이 적을 것이다. 그리고 정년퇴직을 하던 해에 책을 모두 기증하고 홀가분해 하던 교수가,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아다니는 것과 같은 불편을 겪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니, 그때 연구실을 마련하기를 잘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연구실을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이곳에 와서 새로 구입하는 책이나, 쌓아두기만 하고 읽지 못한 책을 읽을 예정이다. 그런데 기억력이 떨어져 책을 읽을 때는 다 아는 것 같지만, 읽은 뒤에는 그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읽는 동안 희열을 느끼면서 다시 읽으면, 기억에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글감이 잡히는 대로 글을 쓰려고 한다. 그 중에서 수필은 따로 수필집으로 엮어 지인들에게 나눠줄 생각이다. 다만 연구실 서가를 가득 채우고 빈 공간에 쌓여 있는 책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연구실 문에 ‘의재서실’ 현판을 붙이면서 왜 연구실을 가지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의재서실’ 현판을 만들어 주어 연구실을 지니고 있는 데 따른 장점과 행복감을 다시 느끼게 해주신 H 교수께 감사한다.(2019.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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