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새로운 보금자리에서》가 도서출판 '학연제'에서 나왔다.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머리말의 일부와 글의 차례를 적는다.

   수필은 마음의 행로(行路)를 진솔하게 쓰는 글이다. 마음이 걷는 길에는 기쁘고 즐거운 일, 슬프고 괴로운 일, 힘들고 어려운 일 등 다양한 일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를 제대로 적으려면 사물에 대한 관찰력과 감성, 지적 능력과 자기를 성찰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문장력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점에 유의하면서 글을 써 왔다.

   이 책에 실은 글은 필자가 생활 주변에서 글감을 취하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을 진솔하게 서술한 글도 있고, 칼럼의 성격을 띤 글도 있다. 또 필자가 만났거나 찾아가 본 대상의 특징과 감회를 적은 글도 있고, 역사와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을 탐방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본 글도 있다.

   필자는 금년에 한국 나이로 팔순이 되었다. 팔순이 되었다 하여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어떤 일에 집착하는 마음이 줄어들었고, 매사에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 책에 실린 글에도 조금씩 나타나 있다.

   앞으로도 수필 쓰는 일을 계속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쓴 글보다 더 잘 써서 독자들에게 지적 만족과 함께 감동을 주고 싶다. 쓴 글은 컴퓨터에 저장해 두고 가끔씩 꺼내어 읽고 다듬어서 5년 뒤에 회혼(回婚)을 기념하는 수필집으로 발간하였으면 좋겠다.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건강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차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은행에 담긴 정 11

쌀에 담긴 따스한 마음 18

정겨운 참새 23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28

합죽선의 멋과 아름다움 33

제자를 잘 둔 제자 39

성묘와 이장 43

스님이 된 제자 상봉 49

잘한 일 두 가지 55

전업주부 체험 61

첫눈을 맞으며 67

하나님의 계획 72

 

  원칙 지키기와 융통성

원칙 지키기와 융통성 81

세면대 마개와 물컵 86

뿌리 깊은 나무 91

이 또한 지나가리라 97

개망초의 누명 101

가장 좋아하는 떡 107

영화 「사랑의 선물」을 보고 114

구정이 아니라 ‘설․설날’ 119

연하장의 진화 124

양사언 어머니의 지혜와 희생 129

   

   응봉산 개나리

‘3’을 좋아하는 까닭 135

호칭어 바로 알고 쓰기 141

응봉산 개나리 146

인왕산 숲길을 걸으며 152

사랑을 이루게 한 노래 158

수종사의 다향 164

자연과 과학이 아우른 호명호수 170

기지시줄다리기와 용 176

위대한 신의 예술품 182

요세미티 공원의 증기기관차 191

   

   독산성의 세마전술

효성 어린 면천두견주 199

독산성의 세마전술 206

정릉에 얽힌 사랑과 미움 212

양녕대군의 처신 218

천 년 세월의 농다리 224

‘생거진천’의 유래 231

전설이 숨 쉬는 의림지 237

우애 깊은 형제 이야기의 현장 244

풀이 나지 않는 무덤 250

무덤이 둘인 공양왕 256

   지난해부터 코로나 19의 창궐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고 있으므로,관광명소나 유적지 중에서 사람이 비교적 적게 모이는 곳을 골라 탐방하고 있다.지난3월10일에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16대 인조와 인열왕후의 무덤)을 둘러본 뒤에 파주시 파평면 화석정로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을 찾았다.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기의 문신 길재(吉再)가 조선 개국 후에 벼슬을 버리고 와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를 추모하여 이곳에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폐허가 되었던 이곳에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5대조인 이명신(李明晨) 선생이 세종 25(1443)년에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 성종 9(1478)년에 이숙함(李淑瑊) 선생이 화석정(花石亭)이라 명명하였다. 이 정자를 율곡 선생이 중수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시를 지으며 학문을 논하고, ()를 연구하였다. 그 때에 중국의 칙사 황홍헌(黃洪憲)이 율곡 선생을 찾아와 경관이 빼어난 이 정자에서 시를 읊으며 놀았다고 한다.

   화석정은 임진강가 절벽 위에 장단 쪽을 향하여 서 있다. 정자에서는 바로 밑을 흐르는 임진강을 볼 수 있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전에는 화석정 주변에 느티나무가 울창하였고, 그 아래 임진강에는 밤낮으로 배들이 오락가락 하였으며, 밤에는 고기 잡는 배의 등불이 호화찬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밑에 도로가 나 있고, 그 아래에 철조망이 임진강을 가로막고 있다. 정자 주변에는 느티나무 몇 그루만이 서 있어 옛날의 정취는 느낄 수 없다.

   정자에는 화석정중건상량문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 중에는 율곡 선생이 여덟 살 때(1543) 지었다는 화석정시도 결려 있다. 이 시는 정자 옆에 세워놓은 돌비석에도 번역문과 함께 적혀 있다.

 林亭秋已晩  숲 속 정자엔 가을이 이미 깊어
  騷客意無窮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멀리 보이는 강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이 시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시인의 정취를 잘 드러낸다. 율곡 선생이 여덟 살 때 이런 시를 지었다니, 어린 시절부터 시적 감각이 뛰어났음을 알 것 같다.

    율곡 선생은 틈이 날 때마다 정자의 마루와 기둥을 기름걸레로 닦도록 하였다. 율곡이 세상을 떠난 지 8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북쪽으로 피난하던 중 임진강가에 이르렀다. 그런데 폭풍우가 심해 앞을 볼 수 없었다. 그 때 임금을 모시던 이항복이,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고 한 율곡 선생의 봉서 생각이 났다. 그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다. 기름을 잘 먹은 화석정에 불이 붙자, 불길이 솟아올라 나루 근처가 대낮같이 밝혀졌다. 그 불빛 덕에 선조가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율곡의 예지(叡智,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지혜롭고 밝은 마음)가 잘 드러난다. 나는 이 이야기의 현장을 보고 싶어 전에 찾아왔던 이곳을 오늘 다시 찾아왔다. 정자 앞에 잠시 눈을 감고 서서,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도성을 버리고 파천(播遷)하는 임금과 수행하는 신하들의 마음은 몹시 급하고 당황하여 허둥지둥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런데 임진강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거기에 더하여 폭풍우가 겹쳐 좌우를 분간할 수 없으니,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이 때 율곡 선생이 임종 무렵에 남긴 봉서대로, 그가 사랑하며 아끼던 화석정에 불을 질러 파천길을 밝히게 하였다고 한다. 율곡 선생은 자신의 사후에 임금이 이 길로 파천할 것을 예측하고, 정자의 마루와 기둥에 기름칠을 하고, 불을 지르라고 하는 봉서를 남겼던 것이다. 율곡 선생의 충성된 마음과 신묘한 예지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명나라와 일본의 움직임을 살핀 율곡 선생은, 일찍이 경연에서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을 비롯한 신하들이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禍端, 화를 일으킬 실마리)을 키우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하였으므로 국론으로 채택되지 못하였다(󰡔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16권 선조 15 9 1일조). 10만 양병을 주장한 율곡의 의견을 국론으로 채택하여 대비하였더라면, 국토가 왜병에게 유린되고, 수많은 백성이 도륙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이 허둥지둥 파천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군무를 총괄한 유성룡은 율곡의 의견을 반대하고 무시하였던 일을 후회하며 이이는 선견지명(先見之明,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앞을 내다보고 아는 지혜)이 있고 충근(忠勤, 충성스럽고 부지런함)한 절의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때늦은 후회인 것이다.

   당시에 율곡의 의견에 반대한 이유는 평화로운 때에 백성들에게 전쟁에 대한 불안을 주고, 생업에 종사할 장정을 차출하여 훈련을 하는 것은 생산력을 축소하는 것으로 매우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이 대목은 요즈음 우리가 처한 상황과 겹쳐 보인다. 625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은 정전 상태에서 북의 위협을 안고 살고 있다. 북은 남을 무력으로 적화통일 하겠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핵을 개발하여 핵보유국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부 국민은 북이 한반도비핵화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북이 설마 같은 민족인 우리에게 핵무기를 사용하겠어? 미국에 대한 협상력을 기르려는 것이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929 남북합의서를 들먹이며 북한에 대한 경계를 풀어 놓았다.

   미국과 중국이 세계질서를 재편하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고, 북은 남침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국제정세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북의 야욕이 어떠한가를 주시하면서 국가 안보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 그런데도 국가 안보를 소홀히 하고 있고, 북의 비위를 맞추려고 눈치를 살피고 있다. 경계태세를 늦추고 있고, 한미연합훈련마저 탁상훈련으로 대체하고 있다. 안보 태세를 강화하라는 국민의 목소리는 마이동풍(馬耳東風, 동풍이 말의 귀를 스쳐 간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아니하고 지나쳐 흘려버림), 우이독경(牛耳讀經, 쇠귀에 경 읽기라는 뜻으로,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 주어도 알아듣지 못함을 이르는 말)과 같이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다. 율곡 선생의 양병설을 무시하였다가 임진왜란이라는 처참한 일을 당한 조선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역사는 자기 성찰의 거울이고, 희망의 미래는 여는 열쇠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던 화석정은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1673)년에 율곡 선생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복원하였다. 그러나 1950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건물의 정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다. 화석정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다. 화석정이 불에 타는 것과 같은 국가적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였다. (성동문학 21, 성동문인협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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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교회에서 예배 끝날 무렵에 목사님께서 “이 장로님이 나이 드신 분들께 드리려고 지팡이를 가져오셨으니, 필요하신 분은 받아 가십시오”라고 광고하셨다. 나와 아내는 언덕이나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갈 때에 지팡이를 짚으면 훨씬 편하다. 그래서 산에 갈 때에는 등산용 지팡이를 꼭 가지고 간다. 그러나 평지에서는 지팡이가 없어도 괜찮으므로, 지팡이를 달라고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다가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준비해 두자는 생각에서 용기를 내어, 이 장로님께 말씀드려 둘이 하나씩 받아가지고 왔다.

   지팡이는 이 장로님이 경영하시는 ‘현대의료산업’에서 고령자용으로 만든 제품이다. 플라스틱 손잡이에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든 대를 고정시켰고, 길이는 쓰는 사람이 신장에 맞춰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 국가통합인증마크(KC)를 획득한 제품으로, 안전 동작 하중은 100kg이다. 나이 든 교인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안전하고, 품위가 있어 보이는 지팡이를 선물로 주신 이 장로님께 마음 깊이 감사한다.

   지팡이는 노약자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걷거나 서 있을 때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보조기구이다. 지팡이는 본인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넌지시 도움을 청하는 역할도 한다. 특히 시각장애인의 흰 지팡이는 혼자 걸을 때 더듬이 역할을 하여 보행의 안전을 기하게 하며, 타인에게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림으로써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해 준다.

   지팡이가 보행의 보조기구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지팡이는 유목민의 목자에게는 양떼를 인도할 때 쓰는 도구이다. 마법사에게는 마법을 행할 때 꼭 있어야 하는 소품이다. 장로나 족장, 스님, 도인과 같은 사람에게는 권위의 상징물이다. 특히 스님에게는 걸을 때에 도움을 주는 도구이면서 법문(法問, 불법에 대하여 묻고 대답함)할 때나 좌선(坐禪, 고요히 앉아서 참선함)할 때, 그리고 경책(警策, 주의가 산만하거나 조는 사람을 깨우침)할 때에도 손에서 놓지 않는 도반(道伴)이다.

   어떤 사물이 바로 서려면 최소한 세 개의 다리가 있어야 한다. 삼발이도, 세발솥의 다리도 셋이다. 사진기를 받치는 삼각대 역시 다리가 셋이다. 지게를 세울 때에는 작대기로 받쳐서 세 발이 되게 해야 한다. 이 원리는 사람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스핑크스(Sphinx, 상반신은 여자이고 하반신은 날개가 돋친 사자의 모습)는 바위산 길목에서, 행인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풀지 못하면 죽이곤 한다. 어느 날, 스핑크스는 이곳을 지나던 오이디푸스(Oedipus)에게 “목소리는 하나인데, 네 다리, 두 다리, 세 다리로 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오이디푸스가 “그것은 인간이다.”라고 대답하자, 스핑크스는 분노를 내뿜으며 절벽으로 떨어져 죽고, 오이디푸스는 괴물을 물리친 영웅이 된다. 이 수수께끼는 삶의 여정을 말해 주는 것으로, 어린아이 때 네 발로 기는 것처럼 나이든 뒤에 지팡이를 짚는 것도 순리임을 일깨워 준다.

   지인 중에 보행이 불편한데도 지팡이를 짚지 않으려 하는 분이 있다. 늙게 보여서 얻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나이든 사람이 조심할 일 중 가장 큰 것이 낙상(落傷)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이다. 노인은 낙상하면 골절하기 쉽고, 골절로 병상에 눕게 되면 온갖 병이 몰려와서 다시는 땅에 서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종합병원 입원 환자의 절반이 노인이고, 그 절반이 낙상환자라고 한다. 낙상사고를 당한 뒤에 지팡이를 짚지 않은 것을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나이 들어서도 젊어 보이려고 지팡이를 짚지 않는 것은 허세일 뿐이다.

   나는 금년에 한국 나이로 팔순이 되었다. 이 장로님한테서 선물로 받은 지팡이는 잘 보관해 두었다가 보행이 불편하다 싶으면 꺼내어 짚어야겠다. 지팡이를 짚는데 따르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부실한 다리에 쏠리는 체중을 분산시켜 주므로 무릎이 덜 아플 것이다. 그리고 걷다가 지치면 의지해서 잠시 쉬면서 자연과 인생을 관조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 걷게 되어 손도 마음도 허전할 때 지팡이는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자리를 양보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따지며 눈치를 보던 사람도 ‘보행이 불편한 어른’으로 보고,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이다. 나이든 것이 큰 벼슬은 아니어도, 그 정도 대접은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70세 이상의 원로대신들에게 임금이 궤장(几杖, 벽에 세워 놓고 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과 지팡이)을 내렸다. 이때 임금이 주는 지팡이는 명아주로 만든 청려장(靑藜杖)이었다. 명아주는 밭이나 들에서 자라는 한해살이 풀이다. 어린 싹은 봄날에 나물로 먹고, 다 자란 뒤에는 지팡이를 만든다. 명아주는 줄기가 가볍고 단단하며, 손에 쥐는 느낌이 좋고, 구불구불 생긴 모습이 멋스러워 예로부터 지팡이의 재료로 쓰여 왔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청려장을 짚고 다니면 중풍에 걸리지 않고, 신경통이 좋아진다고 해서 귀한 지팡이로 여겼다고 한다. 청려장의 표면이 손바닥을 자극하여 뇌에 자극을 주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런데 청려장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지팡이를 만들만큼 한 해 동안 크게 자라는 명아주를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자연산 명아주 대신 재배한 명아주로 청려장을 만든다. (대표적인 산지는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임.) 지금 남아 있는 청려장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퇴계 선생이 사용하던 것으로, 도산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10월 2일은 ‘노인의 날’이다. 유엔이 정한 노인의 날인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어서 하루 뒤인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정하여, 1997년부터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이날 정부에서는 100세가 된 노인에게 청려장를 주어 축하한다. 이것은 전에 임금님이 원로대신에게 내리던 청려장 못지않게 영광스러운 선물이다. 나는 이 청려장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까? 이 장로님한테 받은 지팡이를 짚으면서 열심히 걸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이 장로님이 주신 지팡이는 나를 청려장 받는 날까지 건강으로 이끌어 갈 매우 귀한 선물이다. 뜻깊은 지팡이를 선물로 주신 이 장로님께 감사하며, 사업이 크게 번창하기를 기도한다. (2021. 3. 1.) 《청하문학》 제20호, 서울: 청하문학회, 2021, 08.

 

내가 선물로 받은 지팡이
지인의 부친이 받은 청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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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고향친구들과 대화하던 중 선산(先山)의 관리와 성묘, 납골묘 조성 등이 화제에 올랐다. 그 중 한 친구는 나의 부모님 산소에 관해서도 물었다. 나는 친구들과 헤어진 뒤에 부모님 산소의 성묘와 이장(移葬)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선친께서는 내가 아홉 살 때 별세하셔서 마을 건너편에 있는 이종형님의 산에 모셨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 상복 차림으로 산소에 가서 곡하며 절하였다. 한 달쯤 되던 어느 날, 성묘하고 돌아올 때 갑자기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소름이 돋고, 온몸이 떨렸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그 말씀을 드리니, “아버지께서 아홉 살짜리 어린 아들이 매일 성묘하러 오는 것이 안쓰러워 정을 떼려고 그러시는 것 같다”라고 하시면서, 매일 성묘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셨다. 그 뒤로는 가끔씩 성묘하고, 때맞추어 벌초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외종형님이 때맞추어 벌초해 주셨고, 나는 방학 때에 성묘하였다. 성묘할 때마다 선친을 모실 자리를 허락해 준 이종형님께 감사하였다. 그런데 이종형님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시면서 그 산을 팔았다. 나는 선친의 묘가 남의 산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선친을 모실 산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얼마 뒤에 삽교에 사시는 큰댁 형님의 주선으로 홍성군 홍북면 신정리에 있는 산(1,270평)을 매입하였다. 그곳으로 이장하고 나니, 선친을 내 산에 모셨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다.

 

  나는 전과 다름없이 명절을 전후하여 가족들과 함께 성묘하고, 9월 첫째 토요일에는 벌초하였다. 처음 몇 년은 낫과 호미로, 예초기가 보급된 뒤에는 예초기로 벌초하였다. 선친 산소를 벌초한 뒤에는 보령 천북으로 가서 친척들과 선대묘소를 벌초하고, 함께 식사하였다. 벌초하는 일을 계기로 친척들을 만나니 좋았다.

 

  2003년 1월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를 아버지와 합장하고, 전과 다름없이 성묘하고, 벌초하러 다녔다. 그런데 차량이 널리 보급되면서 명절이나 벌초하는 때가 되면, 고속도로 정체가 극심해졌다. 새벽 6시에 출발하여 갈 때에는 두 시간 남짓 걸리지만, 서울로 돌아올 때에는 대여섯 시간 걸리곤 하였다. 나는 내 고향이니까 멀고 힘들어도 다니지만, 내가 없으면 아들들이 이 먼 곳을 힘들게 다닐까? 손자가 어른이 된 뒤에는 성묘와 벌초를 할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부모님의 산소를 서울에서 가까운 공원묘지로 이장하는 일을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에서는 묘지가 늘어 산림 훼손이 심각하다면서 화장을 적극 권장하였다. 그에 발맞춰 사회분위기도 차츰 화장 쪽으로 바뀌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난 농촌에서는 선산 관리가 큰 문제였다. 그에 따라 고향에서도 선산의 묘를 파묘하여 봉안당(또는 봉안담)을 조성하는 집안이 점점 늘어갔다.

 

  한국인은 ‘명당(明堂)’에 집을 짓고 살거나,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발복하여 잘 된다는 의식이 있다. 이것은 생기론(生氣論)과 감응론(感應論)을 바탕으로 한 풍수설에 따라 형성된 의식이다. 우주에는 인간과 만물의 운명을 지배하는 생기가 있다. 이것은 바람·구름·비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주류는 땅속에 흘러들어서 지맥을 따라 흐른다. 흐르던 생기가 멈추는 곳이 명당이다. 그곳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자손이 잘 된다고 한다. 풍수설은 신라 말기에 중국에서 들어와 깊이 연구되었고, 민간에 퍼져 풍수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나 역시 이런 의식을 지니고 살아왔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풍수설에 맞는 명당을 고를 수도 없고, 성묘하고 벌초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무시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 문제로 고민하던 때에 풍수에 관한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명당은 착한 사람이라야 얻을 수 있고, 선행을 한 사람의 후손에게만 감응한다. 악행을 한 사람은 명당을 얻을 수 없거나, 얻었을지라도 명당의 생기가 스스로 파괴되어 효험이 없다고 한다. 나의 선친은 농부로 착하게 사시다가 45세에 병으로 돌아가셨으니, 악업을 쌓았을 리 없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시고, 남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신 분이다. 이런 분들을 모신 곳이면 그곳이 바로 명당일 것이고, 명당의 생기가 감응하여 나와 내 자손이 잘 될 것 아닌가!

 

  공원묘지의 경우 묘지법이 바뀌어 매장묘는 사용 기간이 15년(15년씩 세 번 연장 가능)이고, 봉안묘(납골묘)는 영구적이라고 한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부모님의 유해를 봉안묘에 모시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이것은 바뀐 사회 분위기와 국가 시책에 따르면서 성묘에 따르는 자손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다. 유골을 강물이나 나무 밑에 뿌리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생각날 때 찾아가서 추모할 수 있도록 유골은 남겨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무렵에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있는 ‘시안가족추모공원’에 안장한 동서의 묘를 찾게 되었다. 그곳은 봉안묘, 평장묘, 봉안담, 매장묘가 있는 대규모 추모공원이었다. 묘지를 주택에 비유하면, 자기 산에 홀로 있는 묘는 단독주택이고, 시안 같은 공원묘지는 대규모 아파트단지라 할 수 있다. 단독주택도 좋지만, 대단지 아파트가 살기에 편리한 점이 많다. 나는 아내와 아들과 상의한 끝에 부모님을 시안으로 옮겨 모시기로 하였다.

 

  시안가족추모공원은 전체적으로 보아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나를 안내해 준 분양담당 이사는 추모공원 전체와 개별 봉안묘의 위치를 풍수설을 기반으로 설명하였다. 나는 풍수상으로 좋다는 위치의 봉안묘(학1-12-24, 24위형)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2012년 7월에 부모님 묘를 파묘하여 유해를 홍성화장장으로 모시고 가서 화장한 뒤에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모시고 왔다. 봉안묘의 윗돌을 열고 석실의 첫째와 둘째 자리에 두 분을 모셨다. 부모님의 함자와 출생일·사망일은 밖의 돌판에 새겼다.

 

  부모님을 시안으로 모시고 나니, 설과 추석 전날에 온 가족이 함께 성묘하는 데에 따르는 부담이 없다. 집에서 40~50분밖에 걸리지 않으니, 몇 시간씩 차를 몰고 오가던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관리비만 내면 알아서 다 해 주니, 벌초하느라 땀을 흘릴 일도, 벌에 쐬지 않을까 걱정하는 일도 없다. 온 가족이 부모님을 추모하며 기도한 뒤에 넓은 공원을 거닐면서 맑은 공기를 마신다. 그리고 맛집을 찾아가 식사를 한 뒤에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 성묘 길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추모하면서 가족들이 친목을 도모하는 나들이 길이 되었다.(2021.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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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초등학교 동창인 박 형을 만나니, 묵직한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의정부에서 농장을 하는 친구가 보내준 은행을 덜어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하였다. 몇 년 전에는 겉껍질을 까서 주었으나, 올해는 까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박 형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면서 점심 대접을 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식탁에 마주 앉아 은행을 깠다. 내가 은행, 밤, 호두 등을 깔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펜치 모양의 기구로 겉껍질을 깨뜨려 놓으면, 아내는 깨진 겉껍질을 벗겨내고 알맹이를 꺼냈다. 은행의 크기에 맞는 홈에 은행을 물리고, 알맞게 힘을 주는 일이 서툴러서 처음에는 알맹이가 깨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행착오를 거듭한 뒤에 요령을 터득하여 제대로 하였다. 은행 껍질을 까는 일이 쉽지 않은데, 전에 박 형이 많은 양의 은행을 까서 준 일을 생각하니,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박 형의 따뜻한 마음에 재삼 감사하면서 은행에 대해 생각하였다.

   은행은 사과나 배와 같은 과일이 아니고, 은행나무에서 열리는 종자(씨앗)이다. 은행은 ‘은빛 나는 살구’라는 뜻에서 은행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은행과 살구씨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은행나무는 ‘공손수(公孫樹)’라고도 한다. 20년 이상 자라야 열매를 맺으므로, 할아버지가 심으면 손자가 수확한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은행나무를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한다. 이것은 은행잎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은행나무는 예로부터 사찰, 향교, 서원이나 마을 어귀에 많이 심었다. 은행은 수명이 길므로, 수령 1,000년 내외의 은행나무가 많이 있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마을을 수호하는 신목(神木)으로 여겨 마을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마을에서는 은행나무의 잎이 싹트는 모양에 따라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이런 나무에는 “은행나무가 밤에 울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거나, “은행나무에 도끼질을 하면 피가 나온다.”는 말이 전해 온다.

   은행나무를 생각하면, 세 곳의 은행나무가 떠오른다. 첫째는 성균관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대성전과 명륜당 앞의 은행나무이다. 대학원에 다닐 때 이 나무 앞을 지나노라면 숙연해지곤 하였다. 옛날에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만들고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학문을 닦는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뿌리가 무성하여 잘 자라고, 수명이 긴 은행나무의 특성과 이 고사가 결합하여 ‘기초가 튼튼해야 학문을 크게 이루듯 유생들이 이를 본받아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는 의미에서 대성전과 명륜당에 앞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은행나무는 학문과 교육 기관을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일본의 도쿄대학교가 은행잎 문양을 학교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 그 예이다.

   그 다음은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이다. 대학생일 때 처음 본 뒤로 몇 차례 가 보았다. 수령 1,100년으로 추정되는 이 노거수(老巨樹)를 보면, 그 자태가 웅장하여 신비감마저 든다. 용문사는 신라 진덕여왕 3(649)년에 원효대사가 세웠고, 은행나무는 그 뒤에 중국을 왕래하던 스님이 가져다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나무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랐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앞 이야기에는 천년을 이어온 신라의 멸망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 있고, 뒤 이야기에는 원효대사의 법력을 찬양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 다음은 인천시 강화군 석모도 낙가산에 있는 보문사의 은행나무이다. 수령 400여 년이 되는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이곳에 홀로 서 있다. 그런데도 열매를 맺으니 의아스러웠다. 30여 년 전에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생들과 전설 조사 갔을 때 만난 이지훈(당시 67세, 고졸, 전 공무원)씨는 석모도 서쪽 섬에 있는 수나무와 마주 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십리 넘게 떨어진 섬에 있는 수나무의 꽃가루가 바다를 건너 날아와 가루받이를 한다니, 풍매화(風媒花)인 은행나무의 번식력이 놀랍기 그지없다.

   은행나무는 파란 잎이 돋아있을 때에도 보기 좋지만, 노랗게 단풍이 든 잎이 가을 햇살에 나부끼는 모습은 참으로 곱고 예쁘다. 은행나무는 병해충에 강하고 미세먼지를 저감시키는 등 대기정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빌로불, 은행산 등을 함유하고 있어 천적들로부터 자기를 지키므로, 병충해에 강하여 잘 자란다. 그래서 여러 곳에서 가로수로 심어 낭만적인 은행나무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은행이 익어 떨어질 즈음에는 육질 외종피에서 나는 악취가 심하다. 그래서 암나무를 수나무로 교체하는 곳도 있다.

   은행에는 카로틴 성분이 있어 기침을 멈추게 하고, 가래를 없애주는 효능이 있다. 비타민, 베타카로틴, 플라보노이드, 미네랄 성분이 있어 각종 질병과 노화를 예방해 주고, 항산화 작용을 하여 활력을 증진시켜 준다. 그리고 뇌기능을 강화하여 기억력, 집중력, 인지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어 뇌와 관련된 퇴행성 질환을 완화시켜 준다. 또 징코플라톤, 플라보노이드 성분이 들어 있어 혈액순환을 도와 혈관의 노폐물을 청소하고, 콜레스톨 수치 감소시켜 동맥경화 같은 심혈관질환 예방에 도움을 준다. 레시틴, 엘고스테린 성분은 체내에서 칼슘의 흡수를 도와 뼈를 튼튼하게 해 준다.

   은행은 이런 효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작용도 있다. 은행에 들어 있는 아미그달린이란 성분은 체내에서 효소에 의해 분해되면서 시안화수소를 생성하여 청색증을 유발하고, 두통을 일으키기도 한다. 심할 경우에는 호흡곤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따라서 은행은 반드시 익혀서 먹어야 하고, 한꺼번에 많이 먹지 말아야 한다. 은행의 하루 섭취량은 어린이 3알, 어른은 10알 이내가 좋다고 한다.

   나는 오래 전에 은행의 효능에 관한 글을 읽고, 은행을 하루에 다섯 알씩 굽거나 쪄서 먹는다. 겉껍질을 까는 일이 번거로워 주로 깐 것을 사다 먹는다. 그런데 은행은 크기, 건조 정도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다. 맛 좋은 은행으로 기억에 남은 것은, 몇 년 전에 공주 갑사 입구에서 할머니한테 산 은행이다. 알이 굵고, 바짝 마르지 않아 부드럽고 맛이 아주 좋았다. 그 다음은 몇 년 전에 박 형이 준 은행이다. 그 은행에는 박 형의 따뜻한 사랑과 정성이 묻어 있어서 더욱 맛이 좋았다.

   아내와 함께 이런 이야기를 하며 은행을 까니, 은행 까는 일이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깐 은행은 몇 개의 작은 비닐봉지에 나눠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하루에 열 알씩 먹으면 몇 달을 먹을 것 같다. 은행을 깐 날로부터 몇 주 지난 뒤에 한라봉 한 상자가 택배로 왔다. 박 형이 제주도에 사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보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은행과 한라봉을 먹으며 박 형의 따뜻하고 고마운 마음을 되새겼다. 월남전 참전용사로, 수술을 받은 적도 있는 박 형이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도록 따뜻한 우정을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2021.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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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초등학교 동창인 친구가 택배로 보낸 쌀을 받았다. 서울에 살면서 고향에 있는 논을 친척에게 농사짓게 하여 수확한 쌀을 보낸 것이다. 작년에도 보내주어 잘 먹었는데, 금년에도 또 보내주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현관 앞에 놓여 있던 쌀 포대를 들여놓고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나는 쌀을 선물로 받은 적이 여러 번 있다. 도시에 사는 제자가 자기 부모님께서 농사지은 쌀을 보내주어 받기도 하였고, 은퇴하여 농촌으로 간 제자가 그 지역에서 나는 쌀을 보내주어 받은 적도 있다. 보내는 사람의 정성이 담겨 있는 선물을 받으면 고맙고 기쁘다. 그런데 나는 쌀을 선물로 받으면 다른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이 한결 더 크게 느껴진다.

 

  오래 전에 쌀 도매상을 하는 분한테 들은 말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경기미(여주, 이천, 포천 등)를 일등급으로 치고, 충청도에서 나는 쌀은 이등급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충청남도 홍성, 그 중에서도 갈산에서 나는 쌀을 제일로 여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자신이 사는 땅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체질에 잘 맞는다는 말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에서 나는 쌀을 먹는 것이 나의 건강에 제일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는 홍성 쌀을 제일로 꼽는다.

 

   고향의 산과 논밭은 내가 어렸을 때 늘 대하던 자연환경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루에 서면 보이는 것이 넓은 들의 논이었다. 학교에 오갈 때 걷는 오솔길 양편에도, 자동차가 다니던 신작로의 좌우에도 논이 이어졌다. 나는 논의 모습이 계절에 따라 바뀌는 것을 보며 자랐다. 이른 봄에는 두엄을 져다 부어 놓은 모습을 보았고, 얼마 뒤에는 두엄을 흩은 뒤에 물을 대고 쟁기질을 하고, 이어서 써레질한 뒤에 모내기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모를 심은 뒤에는 벼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였고, 벼이삭이 나와 고개를 숙일 때에는 흐뭇한 마음으로 논두렁을 쏘다니며 메뚜기를 잡았다. 겨울철에는 물을 대 놓은 논의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며 즐거워하였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두엄을 져 나르는 일, 모를 심는 일, 벼를 베는 일을 하였다. 논은 내 생활의 터전이었고, 삶의 일부였으며,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공간이다. 이런 논에서 수확한 쌀이 나와 정서적으로 유대감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우리 집은 가난하였으므로, 쌀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늘 쌀을 아껴 먹어야 했다. 쌀을 아끼기 위해 겨울철에는 고구마로 한 끼를 때우기도 하였고, 보릿고개를 앞두고는 채소를 넣고 죽을 쑤어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겪다 보니, 자연히 쌀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런 마음이 내 의식 속에 잠재되었으므로, 아이들을 키울 때에는 가을에 일 년 먹을 쌀을 사다가 방에 쌓아놓아야 마음이 놓이기도 하였다. 이런 쌀을 선물로 받았으니, 어찌 기쁘고 고맙지 않겠는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날 때 논밭을 다 정리하였다. 고향에는 누님 한 분을 빼고는 가까운 친척이 없다. 그런데다가 학생 때에는 공부하느라고 바빠서, 교수가 된 뒤에는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느라 고향에 자주 찾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음만은 농사지으며 학교 다니던 때를 잊지 않고 있다. 고향의 산과 들은 따스한 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아련한 그리움의 공간이고, 아름다운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래서 고향의 논에서 수확한 쌀은 몸에 영양을 주는 동시에 고향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일깨워주는 보약이다. 나의 몸과 정신의 기능을 조절하고, 저항 능력을 키워 주며 기력을 보충해 주는 보약을 보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되고 귀한 일이다.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에 뿌듯함과 함께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지인 중에는 내가 초등학교 동창 모임 갖는 것을 희한한 일로 여기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살았으니, 서울에서 자리 잡고 사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촌 출신들은 서울에 와서 자리 잡을 때까지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야 했다. 이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따라서 서울서 자리 잡은 초등학교 동창들은 온갖 역경을 이겨낸 용사들로, 보람과 자부심을 지니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동창회를 만들어 노년이 되도록 자주 만나며 정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번에 쌀을 보내준 친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였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건설회사를 설립하여 많은 어려움과 실패를 겪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성공한 의지의 한국인이다. 주관이 뚜렷하고, 생각이 바르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도 넉넉한 사람이다. 그는 부모님의 유산으로 받은 논에서 생산한 쌀을 혼자 차지하는 것이 미안하다며 고향 친구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의 정겹고 따뜻한 마음이 고맙기 그지없다. 이 친구가 얼마 전부터는 하루에 몇 가지씩 약을 먹고,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그렇지만 그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초등학교 친구들의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소모임을 주관하기도 한다. 이 친구가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도록 우정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0.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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