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최운식 교수(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가 쓴『성경 이야기와 한국 이야기』가 보고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성경 이야기와 대응되는 한국 이야기를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고, 이들 이야기가 지닌 교훈적・신앙적 의미를 정리하였다.

   이야기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이다.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고,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상상력이나 영감에 의해 꾸며질 수도 있다. 

  성경에는 많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이야기 중에는 이스라엘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것도 있고,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일어난 일을 적은 것도 있을 것이다. 이들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은총,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깊은 뜻과 계획이 녹아 있다.

   한국의 이야기는 한국인이 오래 전부터 생활 속에서, 공동의 의식에 의해 형성된, 일정한 구조를 가진 이야기이다. 그 중에는 진실하고 신성하다고 믿는 ‘신화’도 있고, 실제로 있었다고 주장하며 증거물을 제시하는 ‘전설’도 있으며, 흥미 위주의 ‘민담’도 있다. 그 속에는 흥미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신앙・관습・세계관, 꿈과 낭만・웃음과 재치, 또는 생활을 통해서 얻은 교훈이나 역경을 이겨내는 슬기와 용기 등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들 이야기는 전해 오는 동안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도 갖게 해 주었을 것이다.

   성경 이야기와 한국 이야기를 비교하는 것은, 성경 이야기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질감을 해소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외래종교인 기독교의 성경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는 한국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전제될 때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두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게 되면, 성경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신앙적 의미와 가치 이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다음의 세 가지 요령으로 집필하였다. 첫째,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새번역 성경』의 내용을 원문 그대로 적고,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을 곁들였다. 둘째, 한국 이야기를 소개하고, 한국설화 연구의 성과를 압축하여 설명함으로써 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셋째, 두 이야기를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신앙적․교훈적 의미를 정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성경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신성성과 신앙적 의미도 정리하였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많은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을 제쳐두고 『새번역 성경』을 텍스트로 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은 어려운 한자어와 모호한 표현, 쉼표와 마침표도 없이 길게 쓴 문장, 잘못 이해할 소지가 있는 표현,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표현, 현대에 쓰지 않는 표현,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문장이 많아 읽기에 불편하고, 내용 이해에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일반 교양인의 경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될 수 있으므로, 이런 문제가 없는 『새번역 성경』을 텍스트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이 책에서 다룬 이야기는 구약에서 천지창조와 한국의 개벽신화, 노아의 홍수와 홍수 이야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장자못 이야기, 아들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과 인신공희 이야기, 요셉의 해몽과 해몽 이야기, 버려진 아이 모세와 주몽, 문설주에 바르는 양의 피와 동지팥죽, 홍해를 건넌 모세와 주몽,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부석사 선비화, 도피성과 소도, 남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과 관탈민녀 이야기, 나병을 고친 나아만과 송시열, 숨겨진 왕자 요아스와 궁예, 니느웨로 간 요나와 거타지 이야기 등이다. 신약에서는 예수 탄생과 건국 시조, 아기 예수 살해 기도와 아기장수 이야기, 부자와 거지 나사로와 저승재물 차용 이야기, 회심한 삭개오와 자린고비, 귀신을 쫓은 예수와 처용, 성경의 부활과 재생 이야기 등이다.

   저자는 평생 한국 설화와 민속을 연구한 분으로,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며,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 왔고, 현재는 원로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 이야기를 공부한 기독교인 중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이 책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한국 이야기의 이해를 바탕으로, 성경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확신한다. 혹 성경 이야기에 대응되는 한국 이야기가 있는 것을 몰랐던 기독교인에게는 한국 이야기를 통해 한국인의 의식과 가치관을 이해함으로써 이를 기독교 선교에 활용하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글쓴이-김기창(전 백석대학교 국문과 교수, 백석대학교회 원로장로)

   코로나19의 만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된 요즈음 나의 일과는 매우 단조롭다. 지하철을 타야하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사먹는 일이 부담스러워 연구실에도 자주 나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책을 읽다가 오후에 집 앞에 있는 응봉공원에 가서 걷는 일이 내 일과의 전부이다.

   숲속에 자리 잡은 공원의 타원형 보행로(둘레 1,100m 가량) 좌우의 평지와 언덕에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달라졌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상록수가 아닌 나무들의 잎은 단풍이 들어 곱더니, 이제는 누렇게 변한 잎을 떨어뜨리고 맨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내가 공원을 걷는 시간과 새들이 움직이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인지 자주 눈에 띄던 까치와 비둘기는 보이지 않고, 참새가 떼를 지어 날아와 먹이를 찾는다.

   오랜만에 참새를 보니, 참으로 반가웠다. 통통하게 살이 찐 참새들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먹이를 찾다가는 후루룩 소리를 내며 날아올라 나무에 앉는다. 조금 뒤에는 다시 내려와 가벼운 몸놀림으로 먹이를 찾는다. 이런 참새의 모습을 보니, 귀엽고 사랑스럽다. 어린아이처럼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니, 또 후루룩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어린아이 주먹보다 작은 참새들이 떼를 지어 내려와 촐싹대는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에 덫을 놓아 참새를 잡던 일이 떠오른다. 그 시절에는 참새가 참으로 많았다. 숲에서 작은 벌레나 풀씨를 찾아먹던 참새들이 겨울철이면 농가로 찾아들었다. 참새들은 안마당은 물론 토방, 헛간까지 다가오고, 닫힌 문의 틈새로 부엌에 들어가 먹이를 찾기도 하였다.

   이때 나는 참새를 잡을 궁리를 하였다. 참새들이 자주 오는 안마당에 싸리로 만든 발채(짐을 싣기 위하여 지게에 얹는 소쿠리 모양의 물건)를 놓고, 아래쪽은 돌이나 통나무로 눌러놓는다. 발채 밑에는 벼나 쌀을 조금 뿌려 놓고, 발채 머리를 한 뼘쯤 되는 막대기로 받쳐 세운다. 그 막대기의 아래쪽에 가늘고 질긴 실을 매어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방문에 붙인 유리에 눈을 대고, 발채 주변을 주시한다. 참새가 날아와 발채 근처를 서성이면, 나는 바짝 긴장되어 가슴이 콩닥거렸다. 정신을 집중하여 그곳을 응시하다가 참새가 곡식을 먹으려고 발채 밑으로 들어가면, 얼른 실을 잡아당긴다. 그래서 발채가 앞으로 수그러질 때 참새 한두 마리가 발채 밑에 깔린다.

   나는 기뻐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가 발채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참새를 붙잡았다. 참새의 가슴이 팔짝팔짝 뛰는 것이 손에 느껴졌다. 참새의 발에 실을 묶은 뒤에 방안에 놓으면,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멈춘다. 방바닥에 놓으면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이렇게 촐싹거리는 참새의 몸짓은 아주 귀엽고 정겹게 느껴졌다. 나는 참새가 배가 고플 것이라 생각하여 쌀을 물과 함께 주었으나, 통 먹지 않았다. 참새를 빈 방에 두고 하룻밤을 지낸 뒤에 아침에 가보니, 참새는 숨을 거두었다. 나는 죽은 참새가 불쌍하여 눈물을 흘리며 땅에 묻어주었다. 그 뒤로도 한두 번 더 참새를 잡아서 가지고 놀다가 놓아주었다. 그 때 내 손을 벗어나는 참새의 날갯짓은 힘이 넘쳤다.

   참새와 관련된 옛날이야기 중에 「볍씨 한 알」이 있다. 옛날에 부자 노인이 세 며느리에게 선물이라면서 봉투 하나씩을 주었다. 세 며느리가 열어 보니, 볍씨가 한 알씩 들어 있었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첫째와 둘째 며느리는 버리거나 까서 먹었다. 셋째며느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발채로 새덫을 만들고, 볍씨 한 알을 놓아 참새 한 마리를 잡았다. 그 때 이웃집 노파가 약에 쓴다면서 참새를 달걀 하나와 바꾸자고 하여 바꿨다. 시아버지가 병아리를 깨려고 어미닭에게 알을 품게 할 때, 그 달걀에 표시를 하여 함께 품게 하였다. 그 알에서 깬 병아리가 자라 암탉이 되어 달걀을 낳았다. 달걀을 모아 팔아서 암탉 한 마리를 더 사서 길러 알을 낳게 하였다. 그 뒤에 암탉과 달걀을 팔아 새끼돼지를 사서 기르고, 돼지의 숫자가 늘어나자 이웃에 수내(수나이, 가축을 기르게 하고, 이익을 나눔)를 주어 길렀다. 그 돼지를 팔아 송아지를 사서 기르고, 소가 늘자 이웃에 수내를 주어 길렀다. 그래서 10년 뒤에는 논 열 마지기를 샀다. 이를 본 시아버지는 셋째며느리를 크게 칭찬하고, 재산을 셋째 아들․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볍씨 한 알과 작은 참새를 연결시킨 이 이야기는 작은 일에 충실하고, 매사를 계획을 세워 철저히 하라는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공원에서 참새 떼를 보는 순간 나는 참새를 잡아 가지고 벗 삼아 놀던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이 옛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런 추억을 떠올리니, 오랜만에 보는 참새가 더욱 반갑고, 정겹게 느껴졌다.

   참새는 우리 선조들의 생활과 관련이 깊은 새였으므로, 참새와 관련된 관용구나 속담이 많다. 음식을 조금씩 여러 번 먹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는 ‘참새 물 먹듯’이라고 한다. 그만그만한 것들 가운데에서 굳이 크고 작음이나 잘잘못을 가리려고 할 때나, 자질구레한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비꼴 때에는 ‘참새가 기니 짧으니 한다.’라고 한다. 욕심 많은 사람이 이끗(재물의 이익이 되는 실마리)을 보고 가만있지 못하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곳은 그대로 지나치지 못함을 비유적으로 말할 때에는 ‘참새가 방앗간을 그저 지나랴’라고 한다. 아무리 약한 것이라도 너무 괴롭히면 대항한다는 것을 말할 때에는 ‘참새가 죽어도 짹 한다.’라고 한다. 몸은 비록 작아도 능히 큰일을 감당함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는 ‘참새가 작아도 알만 잘 깐다’라고 한다. 실력이 없고 변변치 아니한 무리들이 아무리 떠들어 대더라도 실력이 있는 사람은 이와 맞붙어 함께 다투지 아니한다는 뜻을 드러낼 때에는 ‘참새가 아무리 떠들어도 구렁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한다. 참새가 작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만든 이 말들은, 참새가 우리 조상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음을 말해 준다.

   참새는 텃새로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가을에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만, 여름에는 해로운 곤충을 잡아먹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이로운 새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농촌에서 정겹게 보던 참새를 서울의 공원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요즈음에는 술꾼들이 즐기던 ‘참새구이’가 사라져서 다행이다. 참새가 도시에서도 사람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잘 보호하였으면 좋겠다.(2020.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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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고려 제34대 공양왕릉(恭讓王陵)을 찾았다. 이 능은 쌍릉 형식이며, 두 봉분 앞에 ‘고려 공양왕’, ‘순비 노씨(順妃盧氏)’라는 묘표가 있다. 두 봉분 앞 가운데에 조선 고종 때 세운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란 표석이 있고, 그 앞에 석등과 석호·문인석·무인석이 서 있다. 조금 더 앞에는 ‘개와 먹이그릇’ 석상이 있고, 아래쪽에 작은 연못이 있다. 이 능은 《조선왕조실록》, 고양군지 등의 기록을 근거로, 1970년 2월 28일에 사적 191호로 지정되었다. 고양시 향토문화보존회에서는 고양시의 지원을 받아 매년 공양왕고릉제를 봉행하고 있다. 왕릉 뒤에는 공양왕의 외손인 정(鄭)씨와 신(申)씨의 무덤들이 있다.

   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도 있다. 석축으로 굽을 돌린 무덤 세 기 중 큰 것은 공양왕의 능이고, 작은 것은 두 아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공양왕은 삼척에서 교살되어 이곳에 묻혔다가 고양으로 옮겨갔다고도 한다. 이 무덤에 관하여는 민간에서 구전되어 오다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척주지와 철종 6년(1855)에 김구혁이 쓴 척주선생안에 기록되었다. 이 능은 조선 현종 3년 가을에 삼척 부사 이규현이 개축하였고, 그 뒤에 지방 유지들이 봉축(封築)하였다. 1995년 9월 18일에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3년마다 제를 올려 공양왕을 추모하고 있다.

  고려 말에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중심의 개혁세력은,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고,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하고, 강릉과 강화로 쫓아냈다. 그리고 1389년에 20대 신종의 6대손인 왕요(王瑤)를 왕위에 앉히니, 그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공양왕(1345~1394)은 왕손이긴 하지만, 왕위 승계에서 멀어진 지 오래인지라 왕위에 뜻을 두지 않고 안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그가 45세 되었을 때, 개혁세력인 이성계 쪽에서 왕위에 오를 것을 제의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그들의 강권을 뿌리치지 못해 왕위에 올랐다. 왕좌는 수년간 온갖 노력을 하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오르기 힘든 자리이다. 그런데 그는 뜻하지 않았는데도 절대 권력을 가진 지존(至尊)의 자리에 올랐다. 이것은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비운의 시작이었다.

  개혁세력은 전왕과 고려 충신들을 숙청하는 한편, 이성계의 공적을 선양하려 하였다. 이것이 명분과 민심을 얻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완성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일을 대신해 줄 해결사로 왕요를 선택하여 왕좌에 앉혔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을 보면, 신흥세력의 윤회종(尹會宗)이 우왕과 창왕의 목을 베야 한다는 소(疏)를 올린다. 그러자 힘이 없는 공양왕은 이를 허락하여 왕명으로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이성계의 공적을 기리는 교지를 내리고, 이성계를 고려 개국 공신인 배현경의 예로 중흥공신에 책록한다. 또 이방원이 고려 충신 정몽주를 살해한 일도 적당히 얼버무려 매듭짓는다. 이처럼 개혁세력은 허울뿐인 공양왕의 왕명을 빙자(憑藉)하여 반대파들을 처단하였다. 이것은 자기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반대파를 척결하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음험한 계략이었다.

  공양왕은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을 예감하고, 이성계와 동맹을 맺어 안전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사예(司藝) 조용(趙庸)을 시켜 이성계와 맹약을 맺는 문서의 초안을 잡게 하였다. 그리고 이성계의 집으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이성계와 더불어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력을 굳히고, 장애물을 완전히 제거한 이성계는 1392년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되니, 공양왕은 토끼를 잡은 뒤의 사냥개 신세가 되었다. 그는 곧바로 폐위되었고,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에 안치(安置)되었다가 두 아들과 함께 교살되었다.

  개혁세력은 공양왕을 앞세워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고려 충신들을 제거하였다. 그런 뒤에 공양왕을 두 아들과 함께 죽여 제대로 된 무덤도 없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를 미안하게 생각한 조선 태종은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양에 있는 그의 무덤에 ‘고려공양왕고릉’이라는 능호를 내렸다. 그 뒤에 세종은 안성의 청룡사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어진(御眞)을 고양의 무덤 곁에 있는 암자에 이안(移安)하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태조 이성계가 공양왕을 이용만하고 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하려는 뜻에서 취한 조치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고양의 공양왕릉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공양왕은 개혁세력이 자신을 죽일 것을 예감하고, 몰래 궁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도망쳤다. 산속에서 불빛을 보고 찾아가 작은 절에 이르렀다. 그가 왕임을 알아차린 스님은 크게 놀라면서, 동쪽으로 십리 쯤 떨어진 곳에 있는 누각에 가 있으라고 하였다. 왕과 왕비는 그 누각에서 스님이 날라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하였다. 여기에서 ‘식사동(食寺洞)’이란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어느 날, 이웃사람이 보니 왕이 귀여워하던 청삽살개가 연못가에서 한참을 짖은 뒤에 물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히 여겨 연못의 물을 품고 보니, 왕과 왕비가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애석히 여겨 두 사람을 땅에 묻고, 봉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무덤 앞에 충성과 의리를 지킨 개의 석상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공양왕의 비극적인 최후를 안타까워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담긴 이 이야기는 세 가지 의문점을 풀어 준다. 첫째 이곳에 공양왕릉이 있게 된 내력을 설명해 준다. 둘째 다른 왕릉과 달리 문인석과 무인석 앞에 개의 석상을 세워놓은 까닭을 해명해 준다. 셋째 무덤 아래에 작은 연못이 있는 이유를 말해 준다.

  권좌에 뜻이 없던 공양왕은 이성계 세력에 떠밀려 왕위에 올라 약 3년 동안 역성혁명을 꾀하는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반대 세력을 척결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악역을 마친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무덤이 둘인 것도 그의 비운을 말해 준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를 이용하던 세력도, 이용을 당한 그도 한줌의 흙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무상한 것이 정치권력이다. (2020.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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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나 사물을 부르는 말을 ‘호칭어(呼稱語)’ 또는 ‘부름말’이라고 한다. 우리말의 호칭어는 다양하므로, 바로 알고 써야 한다. 호칭어의 뜻과 용례를 바로 알고 쓰는 사람을 보면, 그에게서 교양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를 잘못 쓰는 사람의 말이나 글을 대하게 되면 신경에 거슬리고, 그 사람의 어휘력 부족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우는 잊히지 않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내 기억에 남은 여러 사례 가운데 몇 가지만 적어본다.

   얼마 전에 유명인사와 그의 친족이 관련된 사건이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그 때 언론은 ‘유명인사 사촌형의 아들’을 ‘5촌 조카’라고 하였다. 사촌형의 아들을 이르는 ‘당질(堂姪)’ 또는 ‘종질(從姪)’이라는 두 음절의 말이 있는데, 왜 언론에서는 그 말을 쓰지 않고 ‘5촌 조카’라고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제의 아들딸은 ‘조카[또는 질아(姪兒)]’라고 하고, 사촌형제의 자녀는 ‘당질’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형제자매는 ‘백부(또는 큰아버지)․숙부(또는 작은아버지)’, 고모이다. 아버지의 사촌형제자매는 당숙(堂叔), 당고모(堂姑母)이다. 나와 아버지 형제의 자녀는 종형제로 4촌이고, 아버지 사촌형제의 자녀는 재종(再從)으로 6촌이다. 남자는 누이의 아들딸을 생질(甥姪)이라 하고, 여자는 언니나 여동생의 아들딸을 이질(姨姪)이라고 한다. 이렇게 적절한 호칭어가 있는데, 요즈음에는 이런 말을 잘 쓰지 않고 길게 풀어서 말한다. 한자말이어서 어렵기도 하지만, 핵가족 시대가 되어 이런 호칭어를 쓸 친족이 없기 때문에 잊혀가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이 든다.

   얼마 전에 온라인 서비스(SNS)에 올린 글 중에 ‘저의 부인이 소천하였습니다’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나는 의아하여 다시 들여다보았으나,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부인(夫人)’이란 말은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는 사대부 집안의 남자가 자기 아내를 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지만, 남에게 말할 때는 쓰지 않았다. 부인은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의 비(妃) 또는 제후의 아내를 이르던 말이다. 고려ㆍ조선 시대에는 외명부의 봉작(封爵) 가운데 하나로, 남편이나 아들의 품계에 따라 그 아내와 어머니를 봉하였다. 이런 점을 따져 볼 때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내를 이르는 말로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저의 부인’이라기보다는 ‘저의 아내(처, 내자)’라고 쓰는 것이 좋았을 터인데, 황망 중에 실수를 하여 여러 사람에게 교양 없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호칭어를 잘못 쓴 일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목회 30주년 기념식을 할 때의 일이 떠오른다. 식순에 그 자리에 참석하신 담임목사의 아버님께 꽃다발을 드리는 순서가 있었다. 그 때 기념식을 진행하는 부담임목사가 “다음은 담임목사님의 ‘선친(先親)’께 꽃다발을 드리는 순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등에서 땀이 흐를 정도로 민망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선친이란 ‘남에게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말’이다. [남에게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를 이를 때에는 ‘선비(先妣)’라고 한다.] 그러므로 제삼자인 젊은 목사가, 살아계셔서 기념식에 참석하신 담임목사의 아버지를 ‘선친’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부적절한 표현이다. 진행을 맡은 젊은 목사는 ‘선친’이란 말을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로 알았던 모양이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느끼게 하였다. 담임목사의 아버지를 높여 말하려면, 한자말로 ‘목사님의 춘부장’이라고 하든지, 쉬운 말로 ‘목사님의 아버님(또는 어르신)’이라고 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TV에서 대정부 질문에 나선 국회의원이 “00당 00지역구 국회의원 ‘000 의원’입니다.”라고 자기소개 하는 것을 보았다. 또, 목사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소개 하기를 “00교회 담임목사 ‘000 목사’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한국인은 상대방을 높이는 뜻에서 이름 뒤에 직명을 붙이고, 끝에 ‘님’자를 붙여 부른다. 이것은 상대방을 높여 부르려는 마음에서 생긴 것으로,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관습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말할 때에 위에 적은 국회의원이나 목사처럼 자기 이름 뒤에 직명을 말하면,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되어 실례가 된다. 따라서 남에게 자기를 말하면서 직명을 밝힐 필요가 있을 때에는 직명을 앞에, 이름을 뒤에 두어 ‘의원 000’, ‘목사 000’라고 해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표현이 된다. 상대방이 직위를 알 경우에는 직명은 생략하고 이름만 말하면 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겸손을 모르는 교만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쉽다.

   호칭어는 자기의 말이나 글이 언론에 노출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온라인 서비스에 올리는 글에도 잘못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 호칭어를 잘못 사용하면, 자기의 무교양을 드러냄은 물론, 국어 실력을 의심받게 된다. 그에 더하여 대인관계가 불편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호칭어의 뜻과 용례를 바로 알고 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노력은 올바른 국어생활을 위해, 원만한 인간관계 지속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잘 모를 때에는 알 만한 사람에게 묻거나, 국어사전을 찾아보며 익히면 된다. 호칭어를 바르게 알고 쓰는 것을 사소한 일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늘 관심을 기울여 실수함이 없도록 해야겠다. (2020.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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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둘째 주에 아내와 함께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독산성(禿山城)을 찾았다. 그 안에 세마대(洗馬臺)와 보적사(寶積寺)가 있다. 사적 140호로 지정된 이 성은 둘레가 약 3.6㎞인데, 현재 약 400m 정도의 성벽과 성문 다섯 곳이 남아 있다. 백제 시대에 쌓은 이 성은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이 이곳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긴 것을 계기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늦은 나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의주목사로 있던 권율은 선조 25(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 자리를 옮겼다. 임금이 북으로 피난을 떠나고, 한양 도성이 함락되자, 전라도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 휘하에 있던 권율은 한양 수복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이 수원과 용인에서 무모한 공격을 하다가 대패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에 돌아온 권율은 지원병을 모집하여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다가 금산의 이치(梨峙)에서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일본 정예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그 공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한 그는 일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북진하던 중 독산성에 주둔하게 되었다.

  권율은 훈련도 되지 않았고, 전투 경험도 부족한 군사를 이끌고 공격적인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독산성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성을 지키며 지구전을 펼쳤다. 일본군 총사령관은 후방이 차단되어 남방의 일본군과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우려하여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독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독산성을 포위한 가토오 기요마사는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을 알고, 성안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끊은 뒤에 물 한 지게를 성안으로 들여보내며 조롱하였다.

  왜군의 의도를 꿰뚫어 본 권율 장군은 군사들을 조련하는 한편, 병사들에게 가장 높은 곳에 백마를 세워놓고서 흰 쌀을 끼얹으라 하였다. 멀리서 이를 지켜본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기는커녕 말을 씻길 만큼 넉넉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기가 꺾인 왜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그는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수많은 왜병을 살상하였다. 권율 장군이 독산성에서 승리하자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각 지역의 의병들이 권율 장군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기세를 업은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으로 옮겨가서 왜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이 그 유명한 행주대첩(1593)이다.   

  중국 춘추 시대의 병법가 손무(孫武)는 《손자병법》에서 ‘전쟁은 속임수[兵者詭道也]’라고 하였다. 그의 후손인 손빈(孫矉)은 손자병법 36계에서 ‘무중생유(無中生有, 없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냄)’, ‘수상개화(樹上開花, 나무에 꽃을 피게 함)’의 전술을 말하였다. 왜군을 속여 스스로 물러나게 한 권율 장군의 세마전술은 고도의 심리전으로, 손자병법의 계책을 능가하는 지혜로운 전술이었다. 왜군이 물러간 다음에 선조는 이곳에 ‘세마대’라는 장대를 지어 독산성의 승리를 기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만전술은 해전에서도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유달산 노적봉의 바위를 이엉으로 덮어서 노적가리처럼 꾸몄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서 노적봉 주위를 계속 돌라고 하여 마치 대군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또, 영산강에 백토가루를 뿌려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쌀뜨물로 보이게 하였다. 이를 본 왜적들은 조선군은 군세가 대단하고, 군량이 넉넉한 것으로 알고 후퇴하였다고 한다. 당시 노적봉을 돌던 전술은 훗날 문화예술로 승화되어, ‘강강술래’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1954년에 발행된 초등학교 국어 3-2 교과서에 <8. 노적봉과 영산강>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으므로, 나이든 사람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이다.

  권율 장군의 세마전술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꿔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독산성이 도성 수비에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1594)에 경기도 관찰사 유근은 이 성을 고쳐 쌓았고, 임란 후인 선조 35년(1602)에 방어사 변응성은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환궁하던 중 장마 때문에 독산성에서 하루를 묵고 갔다. 그로부터 30년 뒤 풍수지리 문제로 독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났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를 무시하고, 정조 16년(1792)에 새로 짓는 것과 비슷하게 큰 규모로 공사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독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장대는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었다. 지금 보는 팔작지붕의 세마대는 1957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세마대의 남쪽과 북쪽에 ‘洗馬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중 남쪽의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필적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독산성 동문 안의 세마대 동쪽에는 보적사가 있다. 이 절은 백제 아신왕 10년(401)에 전승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 절에는 “옛날에 노부부가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죽기로 결심하고, 남아 있는 쌀 두 되를 부처님께 공양하고 기도한 뒤에 집에 돌아와 보니, 곳간에 쌀이 가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신통력 있는 절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절 이름을 ‘보적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나는 세마대와 보적사를 둘러본 뒤에 동문에서 출발하여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오산, 수원, 화성에 걸쳐 펼쳐진 평야의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위에 있어 사면이 환히 내려다 보였다. 군사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이 성은 전략적 요충지인 것을 알겠다.  

  독산성에서 보인 권율 장군의 세마전술은 보통사람의 상식을 뛰어넘는 지혜에서 나온 고도의 지략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문신으로 출사한 권율이 장군의 칭호를 얻고,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전략과 전술, 원만한 대인관계, 탁월한 지도력 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런 인물은 현대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지도자가 출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2020. 10. 30.)

독산성 동문
세마대
보적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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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지인이 카카오톡으로 부여 궁남지(宮南池) 주변의 연꽃을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이 사진을 보니, 넓은 연꽃단지와 그 중심에 있는 궁남지의 멋진 풍경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연꽃이 활짝 피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때를 택해 궁남지를 찾았다.

 

   궁남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백제 사비 시대의 궁원지(宮苑池)로, 사적 135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궁남지는 옛 기록을 바탕으로 1965년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만든 것으로, 넓이는 31,750㎡(9,605평)이다. 연못의 한가운데에는 삼신산(三神山)을 모방한 섬을 만들고, 연못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세워 육지와 연결하였다. 섬의 한 가운데에는 널찍한 ‘포룡정(抱龍亭)’이 서 있다.

 

   포룡정은 1971년에 중건하고, 2005년에 보수하여 지금의 단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용을 껴안다’는 뜻을 지닌 이 정자에는 백제 무왕(武王)의 탄생 설화가 전해 온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이 이야기는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아름다운 사랑을 맺게 한 향가 「서동요(薯童謠)」와 함께 널리 알려졌다. 정자 안에는 「포룡정기」와 함께 「서동요」를 향찰(鄕札)로 표기하고, 한글로 풀어쓴 현판이 걸려 있다. 나는 「서동요」를 읊조리며 포룡정을 살펴본 뒤에 서동의 출생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서울 남쪽의 연못가에 홀로 사는 여자가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는 마를 캐어다가 팔아 생계를 꾸렸으므로, 이름을 ‘서동(薯童)’이라고 하였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무척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자른 뒤에 서라벌로 갔다. 그는 동네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하고서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가 유명한 「서동요」이다. 이 노래가 장안에 퍼지자 백관들은 정숙하지 못한 선화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야 한다고 임금에게 주청하였다. 이 일로 쫓겨난 공주가 귀양지로 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타나 공주를 모시겠다고 하였다. 공주와 서동은 함께 가던 중 은밀히 정을 통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서동의 어머니는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서동을 낳았다고 한다. 서동의 어머니가 관계한 남자를 용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 남자는 평민이 아니고, 왕이거나 왕자 또는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동이 나중에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른 것은 그가 왕의 혈통을 이은 인물이었기에 가능하였다.

 

   서동은 아름답다고 소문난 선화공주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갔다. 이 대목을 서동이 신라의 형편을 탐지하라는 왕의 밀명을 받고 서라벌로 갔다고 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붙인 해석이다.

 

   선화공주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서라벌에 간 서동이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부르게 한 까닭은 무엇일까? 옛사람들은 ‘말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동요는 신이(神異)한 존재가 신의(神意)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언어관을 가진 신라의 백관들은 선화공주가 서동과 정을 통하고 있다고 신이 알려주는 것으로 믿고, 선화공주를 귀양 보내라고 주청한다. 왕 역시 그런 언어관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신하들의 말을 꺾지 못하고, 사랑하는 딸을 내쫓는다. 선화공주를 궁궐 밖으로 끌어내는 데에 성공한 서동은, 선화공주에게 접근하여 정을 통하였다. 선화공주는 그와 정을 통한 뒤에 그의 이름이 서동임을 알고, 동요의 영험함을 믿었다고 한다.

 

   「서동요」는 서동이 공주를 얻으려는 속셈에서, 자기의 소망을 표출한 노래이다. 이 노래가 선화공주와의 사랑을 이루게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보면, 서동은 당시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언어주술관을 활용하여 선화공주와의 사랑을 성취한 지혜로운 청년이다. 따라서 「서동요」는 불가능할 것 같던 두 사람의 사랑을 맺게 해 준 ‘사랑의 주가(呪歌)’이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설날에 덕담을 하고, 축원의 말을 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은 말한 것이 그대로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대중가요를 연구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는 대부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신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장수하고, 복을 누린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모두 ‘말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 의식이 현대인에게도 맥을 이어오고 있음을 말해 준다.

 

   선화공주와 함께 백제로 온 서동은 마를 캐던 구덩이에 쌓여 있는 금을 모아 신라 진평왕에게 보냈다. 많은 금을 받은 진평왕은 선화공주와 서동의 혼인을 인정한다. 그래서 서신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미륵사를 지을 때에는 건축기술자를 보내어 돕는다. 여기에는 신분이나 재력 면에서 부족하여 처가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신랑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야’ 처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것은 고구려 평강공주의 남편 온달이 사냥대회에서 1등을 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 내는 공을 세운 뒤에야 평강왕으로부터 “네가 과연 내 사위로다!” 하고 인정을 받는 것과 뜻을 같이 한다.

 

   서동은 나중에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백제 30대 무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무렵의 백제와 신라는 관계가 나빠 혼인을 할 형편이 아니었고, 역사적으로도 두 나라의 국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고, 백제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담아 재미있게 꾸민 이야기라 하겠다.

 

   나는 궁남지를 둘러싸고 있는 넓은 연꽃단지를 구획지어 만든 길을 걸으며, 서동 이야기를 되새겨 보았다. 「서동요」를 지어 서라벌에 퍼뜨리던 꾀 많은 서동의 모습, 선화공주를 얻은 뒤에 환하게 웃는 서동의 모습이 연꽃 위에 어른거린다. 수련이 예쁜 자태를 뽐내는 곳에 이르니 서동과 선화공주의 석상(石像)이 미소를 지으며 반갑다고 눈짓을 한다. 「서동요」를 읊조리며 연꽃단지의 꽃길을 걷던 나는, 진흙땅에서 자라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어내는 연꽃의 심성을 본받겠다는 다짐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2020. 0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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