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40평형 아파트에서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먼저 살던 집으로 이사하여 얼마 동안은 어머니와 막내아들이 함께 살았으므로, 넓은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철을 타려면 신금호역까지 15~20분 걸어가야 하지만, 운동 삼아 걷는다는 생각으로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막내아들이 혼인하여 나가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두 식구가 살기에는 넓은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나이 70을 넘으면서 승용차보다 전철을 이용하는 횟수가 많아지다 보니, 언덕길을 오르내리면서 전철역까지 걸어 다니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전철역 가까운 곳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전부터 알고 지내는 부동산중개인을 만나 재개발이 확정된 금호 제15구역으로 이사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곳보다 빨리 입주할 수 있는 금호 제13구역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곳은 금호산 아랫자락에 싸여 있는 1천 세대가 넘는 단지로, 신금호역과 붙어 있는 초역세권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건축 공사가 진행 중인 그곳은 40평형은 몇 세대 되지 않고, 24·32평형을 주로 짓는 단지였다. 매물로 나온 물건을 보니, 32평형보다 24평형의 위치와 구조가 아내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 생각했던 32평형을 포기하고, 24평형을 골라 계약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건축공사가 끝나고, 입주일이 다가왔다. 이사할 아파트에 가서 보니, 전용면적이 살고 있는 집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2년 전에 두 식구 살 집이니 좁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에서 용기를 내어 24평형을 골랐다. 그런데 막상 이사할 생각을 하니, 위치와 구조가 마음에 덜 들더라도 32평형을 고르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로, 때늦은 후회였다. 그대로 이사를 해야 할 터인데, 많은 세간살이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까가 큰 문제였다.

   아내가 애지중지하며 매일 사용하던 자개장롱과 화장대, 문갑 등은 방이 좁아 놓을 자리가 없었다. 고추장·된장을 담그고, 김장김치를 담가 먹던 크고 작은 항아리 역시 가지고 가야 놓을 자리가 없었다. 그 외에도 필요에 따라 장만한, 크고 작은 세간살이를 놓을 자리가 없었다. 50년 가까이 정들여 사용하던 세간살이를 그냥 버리자니 너무나 아깝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넘겨주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쓸 사람이 있는가를 찾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뜻을 전해들은 사람 중에는 가져가고 싶지만, 놓을 자리가 마땅하지 않아 아쉬워하는 이도 있었다.

나와 아내는 전북 정읍의 제자 김문선 교장을 떠올렸다. 그 무렵 그는 살던 집을 헐고 새로 지었다. 그리고 그 옆에 넓은 건물을 지어 ‘샘소리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의 말을 들은 그는 미처 새 가구를 준비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고맙게 받아 잘 간직하며 쓰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정읍에서 가축을 싣고 서울에 왔다가 빈차로 돌아가는 트럭을 교섭하여 장롱, 화장대, 문갑, 항아리 등 부피가 큰 세간과 장서의 일부를 그의 집으로 보냈다. 그는 새살림을 차린 것 같다며 좋아하였다.

   소장하던 책 중에서 문학작품을 비롯하여 청소년에게 필요한 책은 나의 모교인 갈산중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기로 하고, 택배로 보냈다. 월간지나 비전공 서적은 폐지 수집 장소에 내놓았다. 벽에 걸어 두었던 서화 액자, 장식장에 넣어 두었던 감사패·상패·기념패도 문제였다. 궁리 끝에 일부 액자는 글씨와 그림을 떼어낸 뒤에 부숴서 버렸다. 감사패·상패·기념패 역시 일부는 사진을 찍어 파일로 만든 뒤에 버렸다. 또 어머니 환갑연, 아이들 3남매의 결혼식, 나의 결혼식·출판기념회·환갑기념논문집 봉정식·정년퇴임기념문집 봉정식 등 행사 때 받은 방명록은 사진을 찍어 파일로 만든 뒤에 버렸다. 온갖 사연이 깃들어 있고, 기념이 될 만한 것들이기에 오래 오래 소장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없으니 눈물을 머금고 아픈 가슴 쓸어내리며 처분하였다.

  내 주변에는 정년퇴임할 때 소장하던 책들을 대학도서관이나 연구소에 기증한 교수도 있고, 감사패 대신 종이로 된 감사장을 받던 출판사 사장님도 계시다. 이분들은 버릴 것을 미리 정리한 지혜로운 분들이다. 지인 중에 오래 산 넓은 아파트에서 좀 작은 집으로 이사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 그런데 많은 세간살이를 정리할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기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와 아내의 용기와 실천력에 찬사를 보낸다고 하였다.

   이사하면서 처분한 것들에는 온갖 사연과 함께 애정이 깃들어 있었기에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그러나 없어서 큰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니, 없어도 괜찮은 물건에 집착하였던 것 같다. 우리는 살면서 소유하고 집착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느 시기에 이르면 일부 또는 전부를 버려야 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애에 없어도 괜찮은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미리 정리하는 지혜를 발휘해야겠다. 그래야 버리는 데 따르는 서운함과 아쉬움이 아픔으로 변하여 힘들어 하는 일을 겪지 않게 될 것이다. (2022.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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