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례(喪葬禮)는 사람의 죽음을 맞아, 주검[屍]을 절차에 맞게 처리하고, 근친(近親)들이 슬픔으로 근신(謹愼)하는 기간의 의식 절차를 정한 예절이다. 상장례는 한국인의 생사관(生死觀)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상장례의 절차는 대개 다음의 네 단계로 진행된다.

        초종(初終)
 
  부모의 병이 위독하여 운명할 기미가 보이면, 부모가 쓰던 방으로 모시고 집 안팎을 조용하게 하고, 부모의 손을 잡고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보는데, 이를 임종(臨終)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임종을 못 보는 것을 큰 불효로 여긴다. 임종할 방으로 모신 부모는 동쪽으로 머리를 두게 하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힌다. 혹 유언이 있으면, 이를 머리맡에 앉아 받아 적는다. 마지막 숨이 단절되는 것을 분명히 알기 위해 솜을 입 위에 놓고 숨이 그치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는데, 이를 속광(屬 )이라고 한다. 사망이 확인되면, 모여 앉았던 자손들이 애곡벽용(哀哭 踊, 소리를 질러 비통하게 곡을 하고 가슴을 치며 발을 구름.)한다.
 
  임종 직후에는 밖에 나가서 떠나는 영혼을 부르는 초혼(招魂)을 한다. {예서(禮書)}에는 "죽은 사람의 웃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옷깃을,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 북쪽을 향해 흔들면서, 남자는 관직명이나 자(字)를, 여자는 이름을 부른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죽은 사람의 와이셔츠나 속적삼을 들고 마당에 서서 지붕을 보고, "서울특별시 ㅇㅇ구 ㅇㅇ동 ㅇㅇㅇ번지 ㅇㅇㅇ(亡人의 이름) 복 복 복!" 하고 부른다. 그 옷은 지붕 위에 얹어 두었다가 나중에 내려서 시체의 가슴 위에 얹는다. 이를 초혼(招魂) 또는 고복(皐復)이라고 한다.
 
  육체를 벗어나 떠나가는 영혼을 불러 재생시키려는 초혼 의례는 영육(靈肉) 분리(分離)의 이원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떠나는 영혼을 붙잡기 위해서는 그 영혼과 일생을 같이 한 육신이 나가서 불러야 하겠지만, 그럴 수 없으므로 그 사람이 입었던 옷, 그 중에서도 가슴에 직접 닿았던 속적삼을 들고서 가지 말라고 부른다. 이것은 망인(亡人)의 몸에 닿았던 옷은 일정 기간 망인과 영적(靈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믿는 전염주술(傳染呪術)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육신을 벗어난 영혼은 저승사자의 호송을 받아 저승으로 간다고 한다. 그래서 망인의 영혼을 저승까지 데리고 갈 저승사자에게 인정을 쓰는 뜻에서 사자상(使者床)을 차려 후히 대접한다. 사자상은 저승사자가 세 명이라는 생각에서 밥 세 그릇과 반찬, 돈, 짚신 세 켤레 등을 멍석이나 푼주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상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이 때, 상주들은 재배하고 곡을 한다. 사자상은 {예서}에 없는 일이라 하여 하지 않는 집도 있었으나, 하는 집이 더 많았다. 요즈음에도 상장례를 장례예식장에서 하거나, 교회식으로 하지 않는 집에서는 대개 하고 있다.
 
  초혼과 사자상 차리기가 끝나면, 시신이 굳기 전에 반듯이 놓고 간단하게 묶어 놓는데, 이를 수시(收屍), 또는 소렴(小殮)이라 한다. 수시는 나무토막 또는 베개처럼 묶은 짚 뭉치 세 개 위에 칠성판을 놓은 다음, 그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두 손을 배 위로 모아 흉사(凶事) 때에 공수(拱手)하는 것처럼 포개고, 허리까지 묶는다. 그리고 다리를 곧게 하여 엄지발가락을 끈 또는 붕대나 백지로 매고, 시체의 몇 곳을 묶는다. 그런 다음에 홑이불을 덮고, 그 앞에 병풍을 쳐 놓는다.
 
  병풍 앞에 상을 놓고, 혼백을 만들어 놓는다. 혼백은 백지를 접어 5색실로 묶어 상자에 넣어 만들었으나, 요즈음에는 망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혼백이나 사진 앞에는 주과포혜(酒果脯醯)를 차려 놓고, 향불을 피운다.
 
  친족들은 일을 분담하여 장례 준비를 하는 한편, 상사(喪事)를 여러 사람에게 알린다. 가까운 친척에게는 직접 사람을 보내 알리나,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구에게는 부고장을 보냈다. 요즈음에는 전화나 전보를 이용하여 알리고, 신문에 게재하여 알리기도 한다.
 
  그 다음에 습렴(襲殮)을 한다. 습(襲)은 시체를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 입히는 것이고, 소렴(小殮)은 시체를 임시로 묶는 것이고, 대렴(大殮)은 시체를 단단히 묶고 관에 넣는 것이다. 전에는 운명한 날에 습하고, 그 다음날에 소렴, 그 다음날에 대렴을 하기도 하였으나, 요즈음에는 이를 한 번에 하는데, 이를 '습렴한다' 또는 약하여 '염한다'고 한다.
 
  염할 때, 전에는 미지근한 물에 향나무를 깎아 넣은 향수(香水)로 전신을 씻겼다. 그러나 근래에는 향수를 솜에다 찍어서 시체를 씻기거나, 알코올을 묻힌 솜으로 얼굴 손등 발등을 문지르는 정도로 그치기도 한다. 그리고 머리를 빗기고, 손톱 발톱을 깎는다. 깎은 손톱 발톱과 머리카락은 베헝겊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에 넣는데, 이 주머니를 조발낭(爪髮囊)이라고 한다. 조발낭은 대개 5개를 만들어 1개에는 머리카락을, 나머지 4개에는 좌우 손가락·발가락에서 자른 손톱과 발톱을 각각 1개씩 넣어 습의(襲衣) 소매나 버선 등에 넣거나, 관 귀퉁이에 넣는다. 이것은 죽은 사람의 몸의 일부였던 머리카락이나 손톱·발톱을 시신과 함께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과 이것을 함부로 다루면 죽은 사람이나 그 가족에게 큰 화가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 역시 전염주술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 다음에 수의(壽衣)를 입힌다. 전에는 소렴에 입히는 염의(殮衣)가 따로 있었으나, 요즈음에는 염의를 쓰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수의로는 남자의 경우, 적삼·고의·두루마기·도포를 입히고, 버선을 신기고, 행전과 대님을 친다. 손에는 주머니 모양의 악수(幄手)를 끼고, 얼굴에는 면건(面巾)을 덮는다. 옷을 입힐 때에는 모두 포개어 한 번에 입히는데, 이불을 덮고 홑이불의 네 귀를 사방에서 잡아서 시신이 보이지 않도록 한다. 
  습이 끝나면 반함(飯含)이라 하여 물에 불린 쌀을 버드나무 수저로 세 번 입에 떠 넣는다. 쌀을 넣을 때에는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가운데에 모두 세 번을 넣는데, 첫 번 숟가락을 넣으면서 '백 석이요.' 하고, 그 다음에는 '천 석이요.', '만 석이요.' 한다. 다음에는 동전이나 주옥(珠玉)을 입에 물리기도 한다. 이것은 저승에 가서 먹고 쓸 양식과 용돈이라고 한다.
  반함할 때 버드나무 수저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간에는 생생력(生生力)을 지녔다고 생각되는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는 의식이 있었다. 버드나무는 물가에서 살고, 이른봄에 싹이 돋으며, 번식력이 강하여 매우 잘 자라므로 신성시하였다. 이런 버드나무로 수저를 만들어 반함하는 것은 죽은 사람이 저 세상에 가서 재생하여 잘 살라는 뜻에서일 것이다.   
 
  반함에 이어 교포(絞布, 시체를 묶는 베)로 시체를 묶는다. 묶을 때에는 세로로 묶은 위에 가로로 묶는다. 가로의 매수는 시체의 크기에 따라 다섯 매 또는 일곱 매로 묶는데, 매듭을 짓지 않고 틀어서 끼운다.
  그 다음에 입관(入棺)을 한다. 어깨나 허리 다리 등이 있는 빈 곳은 짚이나 종이 또는 헌 옷으로 채우는데, 이를 보공(補空)이라 한다. 보공하여 시체가 흔들리지 않게 한 뒤, 그 위에 다른 홑이불인 천금(天衾)을 덮고 관 뚜껑을 덮은 다음, 나무못을 친다. 입관하면 다시는 망인을 볼 수 없으므로, 자녀들은 슬피 운다. 혹 멀리 나가 돌아오지 않은 자녀가 있을 때에는 망인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볼 수 있도록 입관을 늦추기도 한다.
 
  입관이 끝나면, 널 위에 남자는 '某官(無官이면 學生)ㅇㅇㅇ公ㅇㅇ之柩'라 쓰고, 여자는 '某封(無封이면 孺人) ㅇㅇㅇ氏ㅇㅇ之柩'라 쓴다. 그리고 짚과 종이를 섞어서 외로 꼰 밧줄로 관을 묶는다.
 
  입관이 끝나면 복인(服人)들은 상복(喪服)을 입고, 2m 정도로 자른 빨간 천 온 폭에 흰 분가루를 접착제에 개어 붓으로 널에 쓴 것과 같이 쓴 명정(銘旌)을 영좌(靈座) 오른쪽에 걸쳐놓고, 제수를 차린 다음, 성복제(成服祭)를 지낸다. 기독교식으로 하는 가정에서는 입관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정식으로 조객을 맞이한다.
 
  조객의 경우, 전에는 자기 집을 떠나 상가에 오기까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예의로 생각하였으나, 요즈음에는 이러한 생각이 많이 약화되었다. 전에는 조객이 영좌 앞에 분향(焚香)하고, 곡(哭)을 한 다음 재배하고, 상주에게 절하면서 "상사 말씀 무른 말씁입니까." 또는, "갑자기 변고를 당하여 망극하십니다." 하고 조의를 표하면, 상주는 곡하면서 맞절을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상주도, 조객도 곡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치장(治葬)

  주검(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에는 시신을 땅 위에 버리는 풍장(風葬), 땅 속에 묻거나 돌 등으로 덮는 매장(埋葬), 불에 태우는 화장(火葬), 물 속에 버리는 수장(水葬) 등의 방법이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대개 매장을 하고, 일부에서 화장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가장 많이 행해지고 있는 매장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전에는 장기(葬期)와 장일(葬日)이 사회 계층에 따라 달랐으나, 요즈음에는 3일장 (또는  5일장)이 일반적이다. 장일(葬日)이 되면 장지(葬地)를 선정하여 매장한다. 장지 선정은 대개 지관(地官)에게 부탁하고, 지관은 풍수설(風水說)에 맞추어 좋은 자리를 고른다. 풍수설에 따르면,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생기(生氣)가 지맥(地脈)을 따라 흐르다가 멈추는 곳이 좋은 자리 즉 명당(明堂)인데, 그 곳에 죽은 사람을 매장하면, 생기가 망인의 뼈에 작용하여 자손이 발복(發福)한다고 한다.

    장지가 선정되면 산역(山役)을 하는데,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장지 위쪽에서 북쪽을 향해 제물을 차리고 산신제(山神祭)를 지낸다. 산역은 먼저 묘역(墓域) 주변을 표시하고, 그 중앙에 외광(外壙)과 내광(內壙)을 판다. 외광은 너비 2m에 길이 3m 정도, 깊이 1m 이상을 판다. 내광은 외광의 중앙에 너비 50cm에 길이는 망인의 키보다 20cm 정도 길게, 깊이는 50cm 정도 파고 곱게 다듬는다.

    집에서 장지로 떠나기에 앞서 발인제(發靷祭)를 지낸다. 기독교식으로 하는 가정에서는 발인 예배를 드린다. 지방에 따라 행상 도중에 상여(또는 영구차)를 세워 놓고 노전제(路奠祭)를 지내기도 한다.

  장지에 도착하면 하관(下棺) 시간에 맞춰 시신을 광내(壙內)에 모신다. 명정을 걷고, 관묶음을 풀고, 관까지 매장할 때에는 들 끈으로 관을 들고, 관을 벗길 때에는 뚜껑을 열고 시신만을 들 끈으로 들어 내광에 반듯하게 모신다. 광중(壙中) 안의 빈 곳을 흙으로 채우고, 횡대(橫帶)로 덮는다. 주상(主喪)이 청색 홍색의 천을 횡대 위에 올려 드리면, 시신의 가슴 부위에 청색 폐백을, 다리 부위에 홍색 폐백을 횡대를 들고 얹는다.

  그 다음 고운 흙으로 외광을 채우고, 시신의 발치에 지석(誌石)을 놓고 흙으로 덮는다. 기독교식으로 하는 가정에서는 하관 예배를 드린다.

    광내가 메워지면 평토제(平土祭)를 지낸다. 지방에 따라서는 봉분(封墳)을 만든 뒤 평토제를 지내기도 한다. 평토제를 지내고 나서 상주는 혼백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다.

                  흉제(凶祭)

  치장이 끝난 뒤 길제(吉祭)까지의 제사를 흉제라고 한다. 시체를 매장하고, 신주(神主)나 혼백만을 모시고 지내는 첫제사로 반혼제(返魂祭)를 지내는데, 초우제(初虞祭)를 겸하기도 한다. 우제(虞祭)는 시체를 보내고 영혼을 맞이하여 지내는 제사인데, 초우제(初虞祭), 재우제(再虞祭), 삼우제(三虞祭)가 있다. 초우제는 장일(葬日)에 집에 돌아와 지내는 제사인데, 전에는 장지가 멀어서 당일 영좌(靈座)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면 주막에서라도 지냈다. 재우제는 초우제를 지낸 뒤 처음 맞는 유일(柔日, 일진에 乙 丁 己 辛 癸가 드는 날)에 지낸다. 삼우제는 재우제 뒤의 첫 강일(剛日, 일진에 甲 丙 戊 庚 壬이 드는 날)에 지낸다.

  초상 후 3개월이 지난 다음에 맞는 강일을 택하여 아침에 졸곡제(卒哭祭)를 지낸다. 초상 1주년이 되는 날 올리는 제사를 소상(小喪)이라 한다. 2주년이 되는 날을 대상(大祥)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고, 탈상(脫喪)한다. 대상 후 100일 되는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조상의 신주를 고쳐 쓰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길제(吉祭)라 한다.

  위에 적은 것이 상장례의 대강인데, 이것은 지방에 따라, 씨족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상장례는 좀 까다로운 편인데, 이것은 모두 망인을 보내는 지극한 정성과 효심, 민간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상례가 오늘날에는 변하여 그 절차와 복식(服飾), 행사(行祀) 등이 많이 간소해지고, 상기(喪期)도 크게 단축되었다. 사회의 변화와 함께 상례가 간소해지고, 축소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에 따라 고인을 애도하는 마음과 정성·효심마저도 간소해지고 작아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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