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국원(小菊院)은 충남 연기군 동면 합강리에 사는 고향 친구 부인의 당호인데, 지금은 조촐한 음식점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금강과 미호강이 만나는 곳이라 하여 지명이 합강리(合江里)인 이곳에 자리잡은 소국원의 경치는 산과 강이 조화를 이루어 빼어나게 아름답다. 소국원 앞에서 북쪽을 보면, 정북(正北)에 황우산(黃牛山) 주봉이 있고, 좌우로 뻗친 이 산의 줄기가 소국원을 감싸고 있다. 남쪽을 보면 집 앞으로 난 길 아래에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강 건너 정남(正南)으로 부용산(芙蓉山) 주봉이 보이는데, 동서로 뻗친 이 산의 줄기가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그래서 소국원 자리를 멀리서 보면,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풍수를 아는 사람이 이 자리를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한 것은 이 곳의 풍경을 잘 드러낸 말이라 하겠다. 

  이 친구가 이곳에 와서 자리잡은 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과 대전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그는 나이가 들면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조용한 곳에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적당한 곳을 찾다가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이 집을 사서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고향을 떠나 벼슬살이를 하면서 귀거래(歸去來)를 노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이가 많았다. 요즈음에도 나이 들면서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가 많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이가 많다. 그런데, 그는 오래 살던 대전에서 멀지 않고, 고향 홍성과도 그리 멀리 않은 이곳에 와서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으니, 실천력이 있는 사람이고, 복 받은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처음부터 음식점을 하려고 마음먹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얼마 안 되는 밭에 철따라 채소를 가꾸고, 집 둘레에 꽃과 과수를 기르며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부인의 음식 솜씨가 뛰어난 것을 아는 주위 사람들이 그 좋은 솜씨를 묻어두기 아깝다며 권하여 음식점을 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인은 키가 그리 크지 않고, 동그스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균형 잡힌 미인인데, 지성적이면서도 따스한 인상을 준다. 꽃에 비유하면 작은 국화 같다고나 할까. 그의 집에는 '소국원(小菊院)'이라고 붓으로 쓴 액자가 걸려 있는데, 이것은 그와 가깝게 지내는 분이 부인에게 당호를 지어 주면서 써 준 것이다. 부인의 외모와 개성을 잘 드러내는 당호를 지어준 그분의 성찰력과 안목이 대단하다 하겠다. 그들 부부는 음식점을 열기로 한 뒤에 당호를 지어 준 분과 상의하여 '소국원'을 상호로 쓰기로 하였다.
 
  소국원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훈제 오리고기와 민물 새우찌개 두 가지인데, 훈제 오리를 찾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그 곳에서 훈제 오리를 시키면, 부인이 솜씨를 발휘하여 준비한 여러 가지 김치와 나물, 젓갈, 마늘 장아찌, 멸치볶음 등 몇 가지 밑반찬과 그가 직접 가꾼 상추, 쑥갓, 깻잎, 풋고추 등 야채를 정갈하게 담아 내온다. 그리고 맵시 있게 자른 훈제 오리고기를 큰 접시에 담아서, 그가 손수 쑥과 몇 가지 야채를 짜서 만든 소스를 겨자와 함께 가져다 준다. 보기에도 깔금하고 맛깔스러워 입에 침이 솟는다. 예쁘게 썰어 놓은 부추, 배, 양파, 당근 등을 소스에 넣었다가 오리 고기와 함께 상추나 깻잎에 싸서 먹으면 정말 맛이 있다. 오리 고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사람도 맛있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고기를 먹는다. 
 
  소국원은 부부가 직접 운영하는데, 식탁이나 식기 관리, 상차림이 청결하여 위생적이고, 음식 맛이 좋으며, 아주 친절하다. 그는 돈 벌 욕심을 내지 않고, 자기 집을 찾는 손님을 가족처럼 진심으로 대하고, 손님의 건강을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가꾸는 채소에 농약을 쓰지 않는다. 채소에 키토산이 좋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실험을 해 본 뒤에 비싼 키토산을 거름으로 주어 맛좋은 상추와 배추를 가꾼다. 그래서 한 번 다녀간 사람은 다시 그곳을 찾는다. 그곳은 큰 길에서 2km나 떨어진 산속 강변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곳에 오는 손님은 한 번 왔던 사람 아니면, 누구의 소개로 찾아가는 사람뿐이다. 그런데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 것은 친구 내외의 맛과 청결과 친절 덕분일 것이다.     
 
  당호나 상호에 들어가는 '원' 자를 한자로 쓸 경우에는 '원(園)'이나 '원(苑)'을 쓰는 것이 보통인데, '소국원(小菊院)'은 '원(院)' 자를 쓴다. '원(院)'이란 글자에는 '옛날에 관아(官衙)에서 돈 없는 사람을 위해 무료로 운영하던 숙소'의 뜻이 들어 있다. 그는 소국원을 무료로 운영하지는 못하지만, 상호에 담긴 뜻을 살려 친절과 봉사의 정신을 가지고 운영하겠다고 한다.
 
  내가 근무하는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소국원은 15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점심 시간이나 바쁠 때에는 가지 못하지만, 시간이 좀 자유스러운 저녁 시간에는 가끔씩 찾는다. 내가 찾아가면 친구가 달려나와 손을 잡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아주머니가 뒤따라 나와서 공손히 인사하며 나를 맞아준다. 나는 방으로 먼저 들어가지 않고, 집 둘레에 있는 화단의 꽃과 나무, 채소밭을 둘러본다. 친구의 자상한 손길과 땀을 먹으며 자란 꽃과 나무, 채소를 보고 있으면 계절의 변화와 함께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된다. 그는 바쁜 일이 없으면 나와 함께 화단과 채소밭가를 거닐며 그 동안 있었던 일, 다른 친구를 만났던 이야기를 한다. 그럴 때에는 아련한 추억이 되어 버린 어린 시절 고향의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집 둘레를 살펴본 뒤에는 함께 간 사람들과 야외용 식탁 앞의 의자에 앉아 시원한 음료와 맥주를 마시며 주변의 경관을 감상한다. 그 때에는 논문을 쓰다가 풀리지 않아 골똘하던 문제나 무슨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긴박감에서도 해방되고, 힘들고 복잡한 일로 짜증스럽던 감정도 누그러진다. 방으로 들어가 아주머니의 정성과 솜씨가 담긴 김치, 된장찌개, 젓갈, 나물, 장아찌 등을 먹을 때에는 어린 시절에 즐기던 고향의 맛을 느끼게 된다. 친구가 기른 상추, 쑥갓, 시금치, 마늘, 고추 등을 먹을 때에는 어린 시절에 내가 그것을 직접 가꿔서 온 가족이 함께 먹던 일이 생각나기도 한다.

  내가 함께 간 사람들과 어울려 화제의 꽃을 피울 때쯤 친구는 쑥의 효소를 섞어 만든 '쑥술'을 가져와 일행에게 한 잔씩 권하며 잠깐씩 우리의 화제에 끼기도 한다. 일행 중에 처음 간 손님이 있어도, 그의 말과 행동이 소박하고 진실하여 저항감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갔던 사람이 다시 갔을 때에는 그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그의 언행을 보면서, 사람을 대할 때 예의를 지키며 소박하고 진실하게 대하면 곧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곤 한다.

  얼마 전부터 그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 일을 한다. 주방 일을 도와주던 아주머니가 오지 않아 부인 혼자 하는 주방 일을 돕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자꾸 하다 보니 요령도 터득하였고, 일하는 재미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요즈음에는 일하는 아주머니를 승용차로 아침에 모셔오고, 저녁에 모셔다 드리며 받들어 모시느라 속 썩는 것보다 직접 일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 주방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손님이 오면, 앞치마를 벗고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일부러 모른 체하기도 하였는데, 요즈음에는 생각이 바뀌어 주방일과 손님 시중에 재미와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일하니,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원을 다니는 아들과 대학에 다니는 딸도 집에만 오면 주방의 일과 손님 시중에 정성을 다한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그곳을 찾았을 때, 그는 그 동안의 일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은 주로 점잖고 교양 있는 분인데, 내가 이런 손님들을 접대하며 시중 들다 보니, 나도 교양이 높아져서 직장 생활할 때보다 격상된 느낌이야!" 
이 말을 들은 내가 그 동안 수양 많이 했다고 하니,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네. 왜 진작 이런 생활을 찾지 못했나 하는  생각을 해."

    그의 화단에는 국화가 많이 있는데, 잔뿌리와 줄기를 잘라 여기저기에 심고 있다. 상호가 소국원이니, 소국이 만발한 집을 만들겠다는 생각에서다. 가을이 되면 색색의 예쁜 국화꽃이 소국원을 감싸며 아름다움을 자랑할 것이다. 무럭무럭 자라는 국화처럼 그의 행복도 무럭무럭 자라 활짝 피기를 간절히 바란다. 
                  <충청문학(서울 : 충청문인협회, 2000. 8)에 수록한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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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서울에 있는 어느 학회에서 주관하는 강습회에 가서 오전 강의를 하였는데, 마침 거기에 고향 후배가 있어 나이 든 수강생 몇 사람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우리는 조용한 방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는데,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입시 제도와 학교 교육이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랐다. 그 중 한 분이 최근에 자기가 사는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이라면서 딸의 담임 교사 뺨을 때린 젊은 어머니 이야기를 하였다. 

  서울 시내 아파트 밀집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의 5학년 담임 여교사가 3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에 당번 역할을 잘못한 여자 어린이를 불러 꾸중을 하였다. 그 어린이는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식식거리고 앉아 있었으나, 선생님은 모른 체 1시간 수업을 진행하였다.
   
  점심 시간이 되었다. 그 학교에서는 점심 시간에 반별로 학교 급식실에서 밥과 반찬을 타다가 나누어 먹는데, 담임 선생님의 밥은 당번 어린이가 타다 드리게 되어 있었다. 그 어린이는 선생님의 밥을 타다 드리면서, 선생님 밥그릇에 침을 뱉었다. 이를 본 한 어린이가 이 사실을 선생님께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화가 치밀어 올라 그 어린이를 불러 뺨을 때렸다. 그 어린이는 밥을 먹지 않고,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친 채 울면서 집으로 갔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교실 문이 열리더니, 성난 그 아이의 어머니가 달려 들어와 "네가 뭔데 내 딸의 뺨을 때려? 너 좀 맞아 보아라." 하고는 선생님의 뺨을 때렸다. 반 어린이들 앞에서 뺨을 맞은 선생님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일은 반 아이들의 입을 통해 그날로 그 반 학부모에게 알려졌고, 2∼3일 뒤에는 그 아파트 주민의 대부분이 알게 되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저 여자가 담임 선생님 뺨을 때린 무서운 여자'라고 수군대며 그녀를 멀리 하였다. 그녀와 가깝게 지내던 이웃들도 그녀를 건성으로 대할 뿐 전처럼 가까이하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 있어서는 아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은 나는 기가 막혀 한동안 할말을 찾지 못하고 앉아 있었고, 우리 나라의 교육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아찔함을 느꼈다.
 
  학교 교육에서 선생님은 자애로우면서도 엄격함이 있어야 하고, 학생은 선생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 그래야 선생님의 권위도 서고, 학습 지도의 성과와 아울러 인성 지도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그 학생이 믿고 따르지 않아 교사로서의 권위가 서지 않는데, 그 학생을 불러 꾸중을 하였으니, 그 꾸중이 아이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결과 아이는 선생님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학생의 반감은 마침내 선생님의 밥에 침을 뱉는 행위로 나타났고, 이를 참지 못한 선생님은 학생의 뺨을 때린 것이다. 이 때, 선생님이 조금 더 자애로운 마음으로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고, 화를 자제한 후 다른 방법으로 아이의 잘못을 일깨워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식식거리고 앉아 있다가 선생님의 밥에 침을 뱉은 아이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아이는 자기만 위해 주는 가정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잘된 것은 자기의 공이고, 잘못된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버릇이 형성된 아이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라고 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수할 방도를 찾다가 선생님의 밥에 침을 뱉은 것이리라. 이 아이에게 이러한 성격과 행동 양식을 지니도록 한 것은 어머니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 학생의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자기 아이를 잘못 가르치고 있고, 자기 아이의 장래를 그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어머니가 '미운 자식 떡 한 개 더 주고, 고운 자식 매 한 대 더 때린다.'는 속담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자녀 교육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어머니는 자기 아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 주는 것이 아이를 위하는 것인 줄 잘못 알고 있는데, 이것은 아이의 기를 꺾지 않고, 개성을 살릴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자녀에게 적극성과 자제력을 길러주지 못하고, 자녀로 하여금 자기를 과대평가 하게 만들어 '공주병' 또는 '왕자병'에 들게 하는 부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이런 병에 걸린 아이는 자라면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좌절감과 고통을 겪어야만 이 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머니는 자기 딸을 제일로 인정해 주지 않는 선생님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나서 후련함을 느꼈을 것이다. 속상해 하는 딸의 화를 대신 풀어주었으니, 딸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에 만족감을 느끼고, 자기 딸에게 체면이 섰다고 우쭐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의 일이고, 그 뒤에는 그 어머니가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이라 하여 도덕 군자일 수 없는데, 선생님이 그 아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 속에 인성 지도를 포기해야 할 아이로 자리잡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다. 그 어머니는 담임을 바꿔 달라고 요구하거나, 이참에 그 선생님을 그 학교에서, 또는 교육계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온갖 지혜를 다 짜낼 것이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아니 되는 일이다. 그 일은 그 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선생님의 입을 통해 다른 학교 선생님들께도 알려질 것이니, 그 일을 아는 선생님 누가 그 아이를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정말 딱한 일이다. 
 
  그 어머니는 반 학생의 학부모나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어머니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될 것이다. 반 학생들의 학부모나 이웃들로서는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딸의 담임 교사 뺨을 때리는 거친 성격의 소유자에게 마음을 열고 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같은 반 학부모나 이웃들로부터 선생님의 권위와 학교 교육의 효과를 실추시킨 인물로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 둘레에는 이 어머니와 같은 젊은 어머니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젊은 어머니들은 자기의 자녀 사랑 방법, 자녀 교육 방법이 옳았는가를 다시 생각하고, 지금처럼 자녀를 키웠을 때, 그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자랄 것인가를 생각하여 바르게 행동하여야 한다. 학교 선생님을 공교육의 주체로 인정하고, 자기 자녀만을 감싸며 사랑해 주는 도구적인 인물이기를 기대하지 않는 현명함이 있어야 한다. '문제 학생 뒤에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의 의미도 되새겨 봄직하다..
 
  요즈음에는 학교 교육이 흔들리고, 교실이 붕괴되고 있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높다. 그런데도 정치 지도자들은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인 교육을 경제 논리로 풀려 하고 있고, 사회에는 교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으니, 정말 답답한 일이다. 어린이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기르려면, 교실을 바로 세워야 한다. 훌륭한 자질을 가진 젊은이가 교직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교사를 우대하고, 교사의 권위를 세워 주어야 한다. 자녀의 바른 성장을 위해,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자기 아이만을 위하는 마음을 자제할 줄 하는 현명한 어머니가 많아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수필문학 제120호(서울 : 수필문학사, 2000. 6)에 수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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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가까운 집안 형님의 생일에 초대받아 갔다. 그 형님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혼인을 하여 아이를 하나 또는 둘씩 두었다. 그 날 저녁에는 4남매의 가족이 모두 모였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할 큰아들의 아이부터 나이 차가 별로 없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일곱이나 모였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은 한데 어울려 재미있게 놀기도 하고, 싸움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아이들이 노는 모양을 보면서,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녀 교육 방법과 분위기에 따라 아이들의 말과 행동이 다름을 보았다. 그러나 일곱 아이들 모두 열차나 식당에서 본 적이 있는, 버릇없는 아이들의 노는 모습과 달랐다.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부모의 교육을 받고 자란 4남매라서 자녀 교육을 바로 하고 있는 것 같아 흐뭇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그들 4남매와 한 자리에 앉아 자녀 교육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아이들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지만, 해도 좋은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가르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사랑의 매를 아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는 옛날이야기 [회초리 맞는 아들]이 생각났다.
 
   옛날에 한 효자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는 가난하였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께서 글을 읽지 않는다고 꾸중하시면 더욱 열심히 공부하였다. 어머니는 조금만 잘못하여도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렸는데, 어머니가 아무리 힘껏 때려도 그는 아픔을 참고 울지 않았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그는 예절 바르고 착한 청년이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작은 잘못을 하였는데, 어머니는 꾸중을 하시며 회초리를 꺾어 오라고 하셨다. 그가 회초리를 한 줌 마련해 오자, 어머니는 그를 목침 위에 세우고 종아리를 때렸다. 그런데 전에는 그날보다 더 아프게 때려도 울지 않고 잘못했다고 하던 그가 자꾸 울었다. 어머니가 이상히 여겨 우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에는 어머니께서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면 무척 아팠습니다. 그래도 저는 어머니께서 저의 잘못을 일깨워주시고, 저를 옳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시는 것이니까 울 것 없다고 생각해서 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머니께서 힘껏 때리시는데도 아프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어머니께서 기운이 줄어서 그런 것이니, 그게 슬퍼서 웁니다."
 
   이 이야기에는 자식 잘 되라고 때리는 어머니의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마음, 그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바르게 자란 아들의 착한 마음이 들어 있어 훈훈함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이야기는 부모님의 매는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랑의 매'이니, 자녀는 이를 달게 받고, 부모의 뜻을 잘 받들 것을 일깨워준다.

   얼마 전에는 18세 소녀가 술을 먹고 새벽 1시에 집에 오자, 아버지가 딸을 꾸짖으며 뺨을 몇 대 때렸는데, 딸이 아버지를 폭력배로 몰아 경찰에 신고한 일이 있었다. 신고를 받고 달려간 경찰관은 아버지가 상습적으로 자녀를 때리는 사람인가를 알아보았는데, 그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열 여덟 살 먹은 딸이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는 것을 본 아버지가 딸을 꾸짖고, 딸의 태도가 곱지 않을 때 화를 내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딸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아버지를 자녀를 괴롭히는 폭력배로 몰아 경찰에 신고하였다. 딸이 아버지를 고발한 것은 아버지한테서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1970년대부터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가족 계획 운동을 하였다. 그 후 사회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젊은 아빠와 엄마들이 여러 자녀를 길러 공부시키는 데 따른 어려움을 자각하고, 자녀에게 매이지 않고 부부 중심의 여가 생활을 하는 것이 좋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요즈음은 자녀를 하나 또는 둘만 낳는 가정이 늘어가고 있다. 젊은 아빠와 엄마는 자녀를 하나나 둘을 낳는 대신 누구보다도 잘 키우겠다면서 아이에게 사랑을 쏟으며 시중 들기에 온 힘을 기울인다. 아이가 해 달라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면서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부모의 태도가 이러하니, 아이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가는 사람이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왕자나 공주인 양 착각한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왕자 병', '공주 병' 환자가 된다. 이런 아이들은 자라면서 조금만 힘들어도 좌절하거나, 포기한다. 선생님의 꾸중을 들었다 하여, 또는 학교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 하여 자살하는 청소년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이를 곱게만 길러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길러주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사람들이 있는 열차나 식당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자녀들을 꾸짖기는커녕 흐뭇한 표정으로 보는 젊은 엄마들의 모습을 보면,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아이의 장래가 걱정스럽기도 하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 교실에서 장난을 하다가 화분을 깨뜨린 아이를 꾸짖을 때, "화분 값 물어내면 되지 뭘 그래요?" 하고 대드는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선생님이 반 아이와 싸워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입혔으므로, 그 아이의 어머니를 만나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상의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어머니는 다친 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내비치기거나 위로의 말을 하기는커녕 치료비를 물어주면 되지 무얼 걱정하느냐고 하면서 자기 아이가 싸움에 이긴 것만을 만족스럽게 여겼다. 이 일을 보고 선생님은 할 말을 잃었었다고 한다.       

   아이를 잘 기르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노력해서 얻는 마음을 기르고, 어려움을 참는 연습을 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도 좋은 일, 바른 것과 그른 것을 제대로 아는 판단력을 길러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사랑의 매를 들기도 해야 한다. 아이들은 사랑의 매를 맞으며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게 될 것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기를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한테 매맞을 것을 생각하여 하고 싶은 일을 참는 자제력과 인내심도 기를 것이다.     

   요즈음 청소년들은 남을 배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면 이를 참지 못하고 반발한다. 이러한 경향은 자기 부모에게도 그대로 작용하여 부모의 꾸지람이나 바른 훈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태도로 나타난다. 청소년들이 이런 태도를 갖게 된 것은 자녀들의 기를 살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떠받들기만 하고 바로 가르치지 않고,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가르쳐 온 부모와 이를 부추겨 온 사회의 탓이다.

   언제까지나 이대로 둘 수는 없다. 이제부터라도 가정 교육, 학교 교육을 철저히 하고, 필요할 경우 '사랑의 매'를 들어 청소년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 불교 제533호(서울 : 월간불교, 2000. 3)에 수록한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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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산동성에 있는 태산에 오른 감동을 소재로 한 글임.

                                태산(泰山)에 올라  

   지난 7월 17일에는 <1930년대 항일문학 연구>를 주제로 한 제5회 국제문학 심포지엄이 중국 길림성 연길 시에서 열렸다. 나는 여기에 참가하여 <근대민요에 나타난 항일의식>을 발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심포지엄을 마친 뒤에 항공편으로 북경으로 가서 하루를 쉰 뒤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제남을 거쳐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로 갔다. 곡부에서 하루를 묵으며 공자의 무덤이 있는 공림(孔林), 공자의 사당이 있는 공묘(孔廟), 공자의 후손들이 업무를 처리하였다는 공부(孔府)를 본 우리 일행 13명은 이튿날 아침 버스를 타고 태산으로 향했다.

  내가 태산이란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하는 양사언의 시조를 배우던 초등학교 시절이다. 태산은 중국에 있는 산 이름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크고 높은 산을 상징하는 말'로 더 많이 쓰고 있다. 태산이 들어가는 말로는 '티끌 모아 태산', '갈수록 태산',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등이 있는데, 여기서의 태산 역시 '크고 높은 산'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는 우리 나라가 중국과 수교하기 직전인 1990년 여름에 북경의 자금성, 만리장성, 서안, 상해, 소주를 돌아보고, 연길을 거처 백두산에 가 보았다. 그 무렵에 나는 말로만 듣던 태산이 중국 산동성 태안 시(泰安市)에 있는 산으로, 공자의 고향인 곡부의 북쪽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때 나는 도대체 태산이 어떤 산이기에 우리 나라 사람들까지 태산을 노래하고, 속담에까지 인용하여 썼을까, 공자의 고향과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궁금하였다. 그래서 태산을 한 번 가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기회가 없어 가지 못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태산을 올라갈 수 있다고 하니 정말 기쁘고, 약간 긴장되기도 하였다.

  중국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방(五方)에 있는 여러 산 중 큰산을 하나씩 뽑아 오악(五嶽)으로 꼽고 있다. 동악은 산동성에 있는 태산, 서악은 협서성에 있는 화산(華山), 남악은 호남성에 있는 형산(衡山), 북악은 산서성에 있는 항산(恒山)이고, 중앙은 직예성에 있는 숭산(崇山)이다. 이 산들은 중국의 오방을 대표하는 산인데, 그 중 동쪽에 있는 태산을 가장 신성시하여 역대 제왕들이 이곳에 와서 천제(天祭)를 지내곤 하였다고 한다. 

  태안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로 20분쯤 달리니, 태산 입구 안내 표지판이 나왔다. 버스가 산 속으로 난 길을 달릴 때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과 기묘한 바위, 우뚝우뚝 솟은 산줄기 등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어찌 보면, 설악산 백담사 계곡을 지나는 것 같기도 하고, 한계령을 넘을 때 좌우로 보이던 산과 기암괴석을 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와는 다른 굵은 선과 면을 느끼게 하였다.

  아름다운 산과 계곡을 이지 저리 돌던 버스는 한참만에 도화원(桃花源) 케이블카 승강장 앞에 정차하였다. 케이블카 승강장에 가니, 6인승 케이블카 여러 대가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케이블카 안에서 바라보는 태산의 모습은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조금 오르니, 발 아래에 수십 길이 되는 폭포수가 멋진 자태를 뽐내며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니, 하늘에 오르는 거리라는 뜻의 '천가(天街)'가 있고, 그 위에 남천문(南天門)이 있었다. '천문(天門)'은 하늘에 오르는 문이란 뜻인데, 태산 마루의 남쪽에 있는 문이 남천문이고, 북쪽에 있는 문이 북천문이라고 한다. 수십 계단을 올라 남천문을 지나니, 동북쪽으로 태산의 정상인 옥황정(玉皇頂)이 보이고, 다른 방향은 모두 시야가 탁 트였다.

  옥황정 아래로 난 길을 따라 700미터쯤 걸어가니, 옥황상제의 딸인 태산노모(泰山老母)를 모신 벽하사(碧霞祠)가 있었다. 벽하사를 지나 100미터쯤 올라가니, 크고 웅장한 바위들이 겹겹이 서 있는데, 바위에는 태산에 올라 느낀 감회를 새긴 글귀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 오악 중 태산이 제일이라는 뜻의 '오악독존(五嶽獨存)', 높은 곳에 올라 천지간의 장관을 본다는 뜻의 '등고장관천지간(登高壯觀天地間)',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내려다본다는 뜻의 '앙관부찰(仰觀俯察)' 등의 글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글귀는 내가 느끼는 감회와도 서로 통하였다.

  명승지의 바위에 글귀나 이름을 새기는 것은 우리 나라와 같은데, 우리 나라에서는 대개 검은 색인데 비해 이곳은 모두 빨간색인 점이 인상적이었다. 중국의 크고 작은 도시에 걸린 상호나 간판의 대부분은 빨간색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빨간색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빨간 색을 좋아하는 것은 빨간 색이 귀신을 쫓는 색, 행운을 가져다주는 색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다시 100미터쯤 계단을 오르니 옥황정(玉皇頂) 문이 있는데, 문 아래에는 옥황정 안내문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이곳에 왔던 진시황제가 세웠다는 무자비(無字碑)가 서 있었다. 이곳에 무자비를 세운 까닭은 태산에 오른 벅찬 감회를 글로 다 표현 할 수도 없고, 이곳에 와서 느끼는 다양한 감회를 비석에 새긴 글 때문에 훼손하지 말고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가라는 뜻에서일 것이라 생각한다.

  계단 위에 있는 옥황정 문을 들어가니, 빨간색으로 '태산극정(泰山極頂) 1545미터(米)'라고 쓴 표석(標石)이 나를 맞아주었다. 표석 앞에서 사진을 찍고, 몇 발자국 걸어가니 옥황전(玉皇殿)이 있었다. 옥황전의 중앙에는 구리로 만든 옥황상(玉皇像)이 있고, 좌우에는 시위하는 선인상(仙人像)이 있었다. 중국인들은 전각 밖에서 향불을 사르며 절을 하고, 다시 전각 안의 옥황상 앞으로 가서 절을 하였다. 최고의 신으로 받드는 옥황신에게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이들의 태도는 매우 진지하였다. 외국 관광객들은 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 사진을 찍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 중에도 옥황상 앞에 가서 배례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옥황전에서 나와 사방을 굽어보니, 가히 일망무제(一望無際)라고 할 만하였다. 산 아래에는 높고 낮은 산들이 연이어 있고, 산자락 끝에 넓은 들이 보이기도 하였다. 우뚝 솟은 태산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정말 아름답고 웅장하고 멋이 있어서 과연 천하 장관이라 할 만하였다. 동쪽을 바라보니, 멀리 낮은 산자락이 보였다. 그 곳으로 해가 뜨는 모습은 정말 장엄하고 웅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곳에 서서 사방을 내려다보면서, 중국인들이 태산을 '동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태양이 가장 먼저 떠오른 곳', '천신인 옥황이 거처하는 신산(神山)으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연유를 알 것 같았다.   

  옥황전 바로 아래에는 동방신(東方神)을 모신 청제궁(靑帝宮)이 있는데, 문 안에 여러 전각들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오방(五方)을 다스리는 신이 있다고 믿어왔는데, 동방은 청제(靑帝), 남방은 적제(赤帝), 서방은 백제(白帝), 북방은 흑제(黑帝), 중앙은 황제(黃帝)가 다스린다고 한다. 청제는 동방신인이이니, 오악(五嶽) 중 동악(東嶽)인 태산에 모신 것이리라. 한국 민속에서 오방을 상징하는 색은 동쪽이 청색, 남쪽이 적색, 서쪽이 백색, 북쪽이 흑색, 중앙이 황색이다. 한국에서는 요즈음에도 장승제를 지내는 마을이 있는데, 오방에 장승을 만들어 세우고 제를 지낸다. 동방의 장승에는 청제장군, 남방은 적제장군, 서방은 백제장군, 북쪽은 흑제장군, 중앙은 황제장군이라고 쓴다. 이러한 것은 중국인의 신관(神觀)이나 색채관(色彩觀)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청제궁 아래에는 공자묘(公子廟)가 있었다. 공자의 상을 모신 이 곳은 몇 년 전에 건립한 것이다. 공자의 좌상(坐像) 아래에 있는 유리함에는 중국인들이 참배하면서 넣은 지전(紙錢)이 수북하였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중국인들이 공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산은 신성시하는 산이니 정상 부에 옥황이나 청제를 모신 옥황전이나 청제궁을 세운 것은 이해가 간다.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을 모신 옥황전이나 청제궁 바로 아래에 공자묘를 세운 것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중국인들이 공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의식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이를 관광상품화 하는 상업성의 발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묘를 지나 다시 남천문으로 내려왔다. 남천문 아래 천가의 왼쪽에는 2층 건물이, 오른쪽에는 3층 건물이 길게 뻗쳐 있는데, 양쪽 건물에는 기념품과 잡화를 파는 가게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두 펼 남짓한 작은 방이 아래 윗층에 연이어 있었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침대와 침구, 텔레비젼 한 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00빈관(賓館)이란 간판이 붙은 이들 방은 우리 나라의 작은 여인숙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곳에서 자고 아침 일찍 옥황정에 올라 해맞이를 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지은 숙소인 것 같다. 천가의 위쪽에 호텔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서민을 위한 숙소인 모양이다. 이 역시 중국인들의 신앙심과 관련이 깊은 것 같다.

  남천문 위와 아래의 길가에는 많은 수의 푸른 색 두꺼운 옷이 길바닥에 널려 있었다. 더워서 땀을 흘리는 판에 같은 모양의 많은 옷을 햇볕에 말리는 이유가 궁금하여 안내자에게 물으니, 이것은 이른 아침에 해맞이를 가는 사람에게 빌려주었던 옷을 말리는 것이라 하였다. 이로 보아 이곳은 일교차(日較差)가 매우 큰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방문 앞에는 옷을 빌려준다는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이것은 이런 옷을 빌려준다는 말인 것 같다.

  천가를 지나 다시 도화원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온 나는 태산 남쪽의 아름다운 풍경과 아스라이 보이는 태안 시를 내려다보면서 태산에서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해 보았다. 나는 오늘 중국인들이 신성시하고, 한국 문학에도 영향을 끼친 태산에 올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고, 중국인들의 태산에 대한 인식과 민간신앙의 현장을 보았다. 이런 산을 올랐다는 벅찬 감회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서울문학 제3호(서울 : 대한출판사, 1999년 겨울)에 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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