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제2의 김연아를 꿈꾸던 피겨 선수가 신병(神病, 무당이나 박수가 될 사람이 걸리는 병. 의약으로는 낫지 않으며 무당이 되어야만 낫는다고 함.)을 앓고,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이를 보니, 무속 조사를 할 때 만났던 무당들이 겪은 신병 체험담이 떠올랐다. 신병을 앓고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된 사람은 다양한데, 이름을 날리던 연예인도 있고, 교회에 다니던 사람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병을 앓으며 신내림 체험을 하고, 내림굿을 하여 무당이 되었다는 것이다.

   흔히 무당이라고 부르는 무(巫)는 신병이라는 종교체험을 통하여 신의 영력(靈力)을 획득하여 신과 교통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신의 영력에 의해 인간의 길흉화복을 굿으로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며, 민간의 종교적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무는 대부분 신병을 앓다가 신내림 체험을 하고, 내림굿을 하여 된 강신무(降神巫)이다. 사제자의 신분을 타고나는 세습무(世襲巫)는 전에는 많았으나, 요즈음에는 거의 없다.

   신병은 대개 건강, 애정의 결핍, 경제적 어려움, 가족의 죽음, 스트레스 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그 중에서도 친가나 외가, 또는 매우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에 무속신앙이 깊은 인물이 있는 사람에게 잘 찾아온다고 한다. 신병은 사람에 따라 그 증세가 다르다. 대개는 며칠씩 음식을 먹지 못하고, 몸이(대개는 몸의 한쪽이) 아파 움직이지 못하고, 며칠 또는 몇 달씩 누워 있으며, 꿈 또는 환상 속에서 신을 만난다. 이들의 병은 약으로는 고치지 못하고, 장기간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내림굿을 하여 신을 받아 모시고 무당이 되면 씻은 듯이 낫는다.

   내림굿을 할 때 내린 신을 ‘몸주’라고 한다. 무당은 몸주의 모습을 그린 무신도를 걸어놓고 그 앞에 신단을 꾸민다. 그리고 매일 새벽에 신단에 청수를 떠다 놓고 기도한다. 내림굿을 주관해 준 무당을 신어머니 또는 신아버지로 모시고, 무당으로서의 생활태도와 굿을 배운다. 점을 하고 굿을 하면서 무당 노릇을 하면 몸이 아프지 않으나, 그만두면 또다시 신병을 앓아 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한 번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된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그만둘 수가 없다.

   오래 전에 한국관광교육원에서 무속에 관한 강의를 할 때의 일이다. 무속 조사할 때 만났던 무당의 신병 체험담을 들려주었다. 그 때 한 여성 수강생이 자기 친구 중에 몇 년째 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서,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하나는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 나가 예수를 믿고, 성령님의 권능으로 신을 떨쳐버리는 길이다. 큰 힘을 가진 신으로 잡신을 물리쳐야 하니, 성령의 은사가 있는 목사님을 만나면 무당이 되지 않고도 평안해질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무당을 전도하여 주님의 품으로 인도한 목사님 이야기를 하였다. 그 수강생은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친구에게 권면하겠노라고 하였다.

   한국인은 무당이 아니어도 마음 바탕에 무속적 심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극심한 고통과 좌절감,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면, 무속신이 내리는 신병을 앓게 된다. 그 사람은 내림굿을 하고 무당이 되라는 말을 듣지만, 이를 회피하려고 무던히 애쓴다. 그러다가 신병의 고통을 이길 수 없어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된다. 기독교에서는 무속신을 잡귀․잡신으로 취급하고, 미신 또는 우상숭배라고 하여 업신여기거나 아주 더럽게 생각하여 돌아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태도를 견지하고서는 전도하기 어렵다. 신병을 앓는 사람이나 이미 무당이 된 사람이 겪는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권능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주님의 품안으로 들어와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무당에게 전도하여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한 임종원 목사님의 저서 《무당을 사랑한 목사》는 많은 깨우침을 줄 것이다.                                                                                                                  <기독교연합신문 1629호, 2022. 6. 26>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사 아내의 길  (0) 2022.08.29
딸을 위한 기도  (0) 2022.07.28
청와대에 다녀와서  (0) 2022.05.30
전도에 힘쓰는 택시기사  (0) 2022.05.26
돌잡이는 미신인가  (0) 2022.04.22

   지난 5월 10일은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고, 청와대가 74년 만에 완전 개방되어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역사적인 날이다. 해당 부서에서는 5월 10일부터 청와대를 개방한다고 하면서 청와대에 가고 싶은 사람은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추첨하여 당첨 여부를 통보해 준다고 하였다. 나는 인터넷으로 신청하는 일이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당첨되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신청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터넷 활용을 잘 하는 지인의 딸이 지인과 함께 우리 부부도 신청한 것이 당첨되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개방 셋째 날인 5월 12일에 청와대를 관람하는 행운을 얻었다. 행운권이나 복권처럼 많은 사람 중에서 뽑히는 행운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며 이들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나에게는 뜻밖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청와대는 고려 숙종 때 남경의 이궁(離宮, 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물던 별궁 )이 있던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여기에 조선총독 관저를 짓고 관저로 사용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지(Hodge, J. R.) 중장이 관저로 사용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관저로 사용하면서 ‘경무대(景武臺)’라고 하였다. 4․19 혁명 직후에 윤보선 대통령이 입주하면서 관저 이름을 ‘청와대(靑瓦臺)’로 바꾸었다. 이것은 대리석으로 지은 본관의 지붕을 ‘청기와’로 이은 데서 연유된 것이다. 그 뒤에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이 입주하여 지내면서 청와대는 대한민국 통치 권력의 핵심부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청와대는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금단(禁斷)의 구역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오전 10시에 청와대 영빈문 앞에 가니, 많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 모여 있었다. 우리는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안내원에게 스마트폰에 저장된 입장허가서를 보였다. 안내원은 이를 전산시스템에 접속하여 확인하고는 들어가서 자유롭게 관람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들어갈 때 받은 청와대 관람 안내도를 보면서, 경내에 난 도로를 따라 영빈관·대정원·소정원·본관·관저·침류각·상춘재·춘추관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북악산 자락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청와대는 참으로 아늑하고 평온한 곳으로, 가히 ‘복지(福地, 집터의 운이 좋아 운수가 트일 땅)’라고 할 만하였다. 청와대 뒤에 있는 암벽에 300~400년 전 새긴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새긴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오래 전부터 좋은 자리로 꼽혀 왔던 것 같다. 입지조건이 좋은 곳에 세워진 건물들은 잘 관리된 숲, 정원수와 꽃, 잔디 등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웅장하면서도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넓고 조용하며 아름다운 이곳을 거닐다 보니, 세상과 동떨어진 산중 선계(仙界), 깊은 산사(山寺), 또는 구중궁궐(九重宮闕)과 같은 별세계에 온 듯하였다.

   청와대 안에 있는 건물들은 제 각기 특색을 지니면서 웅장하고 장엄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청와대 안의 건물들은 직선거리가 가깝게는 이삼백 미터, 멀게는 오륙백 미터 떨어져 있었다. 역대 대통령이나 보좌관들이 경내에서 길을 따라 이동할 때 자동차나 자전거를 이용하였다는 말이 참인 것 같다. 이러한 건물 배치는 청와대 전체의 구도로 보아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매우 좋은 모습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여러 가지 국사를 처리하는 데에는 불편함도 많았을 것 같다. 특히 대통령의 집무실인 본관과 관저는 비서관이나 행정관들이 업무를 보좌하는 여민관과 직선거리 약 오륙백 미터 떨어져 있어서 걸어서 가면 20분가량 걸릴 터이니, 신속하고 원활한 업무 보좌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국내외 언론사 기자들이 출입하는 프레스센터인 춘추관은 본관과 더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출입을 통제하는 문이 있다. 대통령이 춘추관으로 내려가거나 기자를 안으로 부르지 않으면, 기자는 대통령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대통령은 국민의 입과 귀 역할을 하는 기자를 만날 수 없어 여론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불통의 대통령’이 되기 좋은 조건이다. 대통령이 일반 국민과 접촉하기 어려운 곳에 머문다면, 외톨이가 되어 자기중심의 생각을 갖게 되기 쉽다. 그러면 구중궁궐에서 총신(寵臣)들에 둘러싸여 지내면서 백성들의 삶은 외면하고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던 옛날 왕들처럼 되기 쉬워진다. 그래서 몇 분의 대통령이 ‘구중궁궐에 사는 제왕적 대통령’, ‘불통 대통령’이라는 별칭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김영삼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청와대를 벗어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 중 한 분은 광화문에 집무실을 마련하여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고 선거공약으로 내걸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를 실천한 분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취임한 윤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고 용산에 집무실을, 한남동에 관저를 마련하여 ‘용산 시대’를 열고, 청와대를 개방하였다. 윤 대통령이 넓고 쾌적하며 아름다우면서 권위를 느끼게 하는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데에는 찬반양론이 있었다. 그에 따라 많은 망설임과 고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먼 앞날을 생각하여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고, 국민에게 돌려주기로 하였다. 윤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에 경의를 표하고,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춘추관 앞의 출입문을 나와 삼청동길로 내려오면서 간절히 기도하였다. 청와대를 나와 국민 속으로 힘찬 발걸음을 옮긴 윤 정부가 크게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하며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의 삶이 평안해지게 해주십시오. 청와대가 흉지(凶地)여서 성공한 대통령이 나오지 못하고 퇴임한 뒤에 불행을 겪는다는 풍수설이 없어질 터이니, 앞으로는 퇴임 후에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평안히 사는 대통령이 이어서 나오게 해주십시오. (2022. 05. 14.)

청와대 국민개방 기념행사 안내도
청와대 본관

                                                  대통령 관저--대통령과 그 가족의 거주 공간

상춘재--국내외 귀빈에게 한국의 전통가옥 양식 소개 및 의전 행사, 비공식 희의를 진행하던 곳
녹지원--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춘추관--대통령의 기자회견 및 출입 기자들의&nbsp; 기사 송고실로 사용된 공간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딸을 위한 기도  (0) 2022.07.28
신병을 앓는 이에게 전도를  (0) 2022.06.25
전도에 힘쓰는 택시기사  (0) 2022.05.26
돌잡이는 미신인가  (0) 2022.04.22
사탄으로 몰린 집사  (0) 2022.03.27

   우리 교회에서 나와 같은 선교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김 권사님은 전도를 열심히 하시는 분으로 소문나 있다. 그는 80세가 되었는데도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을 유지하며 개인택시 운전을 한다. 나는 그와 대화하는 중에 그의 독실한 신앙과 전도에 힘쓰는 삶에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하루 생활과 전도에 관해 알아보았다.

   그는 일을 하러 나갈 때에 집에서 기도하고, 운행을 시작할 때 운전석에 앉아서 사고 없이 운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기도하고, 일을 마치면 사고 없이 무사히 일을 끝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귀가한다. 그는 차를 운행할 때 극동방송국의 라디오를 켜고, 찬송과 설교, 기도와 간증을 듣는다. 그는 극동방송의 전파선교사로 전도활동을 하는 중에 방송 PD와 대담방송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승객이 타면 인사를 하고, 행선지를 물은 뒤에 머릿속에 갈 길을 그리며 출발한다. 그는 차가 방향을 잡아 달리기 시작한 뒤에 손님에게 부드러운 말씨로 “교회에 나가십니까?”하고 묻는다. 그리고 대답을 들은 뒤에 그에 맞는 대화를 이어간다. 어떤 손님은 라디오 방송을 듣고 먼저 “교회에 다니는군요. 어느 교회에 다니세요?” 하고 묻기도 한다. 그러면 “예, 저는 장위감리교회 권사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사람에게는 “교회에 나가면, 마음이 평안해 지고, 하는 일이 잘 되며 구원을 받습니다. 저는 교회에 나가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삽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대화가 시작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지내온 일을 말하면서 신앙 간증을 하기도 한다.

   그는 강원도 시골 교회에서 청년회장을 맡아 열심히 교회 일을 하던 중 담임목사님의 추천으로 1969년 서울에 와서 학원 버스를 운전하였다. 그 뒤에 회사에 들어가 근무하다가 1986년에 택시 운전을 시작하였다. 그는 36년간 택시 운전을 하면서 매사에 감사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였다. 그러자 하는 일이 잘 되어 사고 없이 운전을 하였고, 결혼한 뒤에 자녀를 잘 키워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 주었다. 그는 손님에게 오늘까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힘을 얻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손님은 나이보다 젊게 보이고, 행복해 보인다고 한다. 그러면 그는 “예수를 믿으면 젊게 보이고, 행복해 보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런 대화를 하면, 안 믿는 사람도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믿는 사람은 애쓴다면서 격려의 말을 한다. 하는 일이 잘 안 되어 마음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는 힘들 때 기도하면 힘이 난다고 하면서, 강원도 촌놈이 맨몸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어려움을 겪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가 공자나 석가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따져 묻기도 한다. 그러면 그는 공자나 석가는 부활을 하지 못하였는데, 예수는 부활하셨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은 예수뿐이라고 한다.

   한번은 종로에서 타신 중년의 남자 손님에게 전도의 말을 건네자, 그 분은 “왜 예수를 믿으라고 하시오? 예수를 믿으면 좋은 점이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그는 평소에 생각하는 바를 차근차근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주님의 은혜로 잘 살았고, 지금도 건강하여서 평안한 마음으로 운전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한남동에 이르자 그 손님은 내리면서 “나는 00교회 목사입니다. 전도활동을 잘 하십니다.”라고 칭찬하면서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는 목사님인 줄 모르고 전도의 말을 한 자기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쉬는 날인 매주 주일과 수요일에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 외에 교통정리 봉사활동을 하고, 교회 전도대원으로 활동한다. 개인택시 운전자 선교모임 임원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도 한다. 어떤 협박이나 위험이 와도 예수를 믿겠다는 김 권사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도에 힘쓰시는 김 권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앞으로도 오늘처럼 건강하셔서 전도하며 보람 있는 일 많이 하시기를 기도합니다.<기독교연합신문 1625호, 2022. 5. 29>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병을 앓는 이에게 전도를  (0) 2022.06.25
청와대에 다녀와서  (0) 2022.05.30
돌잡이는 미신인가  (0) 2022.04.22
사탄으로 몰린 집사  (0) 2022.03.27
어머니의 소원  (0) 2022.02.27

   보관해 둔 서류를 찾느라고 책장 서랍들을 열어 보았다. 한 서랍에 사진들을 넣어둔 비닐 봉투가 있었다. 그 안에 손자의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아기가 온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고, 돌잡이 사진도 있었다. 돌상 앞에 앉은 손자의 천진스러운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때 문득 서울에 있는 신학대학에 가서 「한국의 전통문화」 강의를 할 때의 일이 떠올랐다.

  일생의례 중 출생의례에 관해 설명하였다. 출생의례 중 지금도 행해지는 것은 돌잡이이다. 돌상에 신성의 의미를 지닌 흰무리떡과 축귀(逐鬼)·축사(逐邪)의 의미를 지닌 수수팥단자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음식과 과일을 차려놓는다. 아기가 앉을 자리 앞의 돌상에 돈···공책··연필··총 등을 놓는다. 요즈음에는 컴퓨터 마우스나 악기 등을 놓기도 한다. 그리고 아기가 맨 먼저 어떤 물건을 잡는가를 보고 아기의 장래를 점친다. 이를 ‘돌잡이[시주(試周), 시아(試兒), 시수(試晬)]라고 한다. 돈이나 쌀을 잡은 아이는 부자가 되고, 실을 잡은 아이는 수명이 길다고 한다. 붓이나 연필을 잡은 아이는 학자가 되고, 활이나 총을 잡은 아이는 장군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설명하자, 한 학생이 질문을 하였다. 그는 “돌잡이는 미신 아닌가요?”라고 물은 뒤에 이것은 없어져야 할 풍습이라고 하였다. 나는 다른 학생들에게 돌잡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다른 학생들은 ‘옛날부터 해 오는 우리의 문화’라고 하였다. 나는 문화는 같은 언어,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 살면서 이루어 놓은 유형 또는 무형의 것이다. 돌잡이는 한국인이 이 땅에 살면서 형성한 문화이다. 그러므로 밑바탕에 한국인의 의식이 깔려 있지만, 종교나 신앙심이 바탕이 된 것은 아니다.

  부모나 조부모는 돌을 맞는 아이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궁금하여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돌잡이로 아이의 장래를 점쳤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점치다’는 ‘앞일을 내다보아 미리 판단하다’의 뜻이지, 길흉과 화복을 판단하기 위하여 ‘점괘를 내어 보다’는 뜻은 아니다. 돌잡이의 장래 예측이 맞는다고 하는 것은 아기를 그 방향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붓이나 연필을 잡은 아기에게는 장차 학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권총을 잡은 아기에게는 장차 장군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말을 수없이 반복하며 그 방향으로 키운다. 그러면 아이는 어른들의 말을 유념하며 자랐고, 그에 맞춰 진로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할 때 사범계대학 또는 사관학교에 진학한다. 그래서 교사나 교수 또는 군인 장교가 될 것이니 돌잡이가 맞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점괘를 내어 보거나 신앙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삼아 하는 풍습일 뿐이다. 이런 설명에 많은 학생이 이해하고 공감하였다.

  그 학기 강의가 끝난 뒤에 성적을 제출하기 위해 신학대학 교무처에 들렀다. 교무처 직원은 내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가 매우 좋았다고 하면서, 40여 명의 학생들이 써낸 강의평가서를 주었다. 강의평가서를 보니, 교무처 직원의 말대로 항목별 평가와 특기사항 모두 아주 좋은 평가가 나왔다. 그런데 딱 한 학생이 ‘돌잡이를 미신이 아니라고 하는 교수는 신학대학에 와서 강의할 자격이 없다’라고 하였다. 강의 시간에 질문을 하였던 그 학생일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돌잡이가 전통문화가 된 경위와 의미를 설명하였건만, 이 학생은 수긍하지 않았던 것이다.

  돌잡이는 미신이니 없애야 할 풍습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있는 것은 신앙의 어른들이 잘못 가르친 결과라 생각한다. 어른들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헛된 것을 믿는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된 저급한 문화라고 생각하고, 청소년들이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갖도록 가르친 때문일 것이다. 어른들은 우리의 전통문화는 그 나름의 형성 배경이 있고, 그 안에 한국인의 의식이 스며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우상이나 미신으로 폄하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인으로 신앙을 바르게 지켜 나가되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종교와 문화를 혼동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기독교연합신문 1621호, 2022. 4. 24.>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와대에 다녀와서  (0) 2022.05.30
전도에 힘쓰는 택시기사  (0) 2022.05.26
사탄으로 몰린 집사  (0) 2022.03.27
어머니의 소원  (0) 2022.02.27
살곶이다리  (2) 2022.02.19

  오래 전의 일이다. 백령중·종합고등학교 B교감이 찾아와서, 백령도에 전해오는 ‘심청 전설’과 <심청전>의 관계를 밝혀 달라고 하였다. 그는 <심청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내가 꼭 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전에 이 이야기를 듣고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그와 함께 이 일을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옹진군에 조사비 지원 요청을 하였다.

  이듬해 여름방학에 백령도에 가서 자료 조사를 하던 중 주일을 맞았다. B교감은 백령도에서 가장 큰 J교회의 집사였다. 그런데 그는 J교회가 아닌 군인교회로 나를 인도하였다. J교회 목사님이 몇 주 전 주일예배 설교 중에 “요즈음 우리 교회의 뒷산에 심청각을 짓는다는 말이 돌고 있다. 심청각은 우상의 전당이므로, 그 일을 추진하는 사람은 사탄”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 B집사라는 것은 백령도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를 앉혀놓고 사탄이라고 하는 목사가 주관하는 예배에 나를 데리고 갈 수 없어 군인교회로 간다고 하였다.

  나는 몇 차례에 걸쳐 백령도와 인근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전설, 민속을 철저히 조사하였다. 그 결과 ‘심청 전설’에 나오는 ‘인당수’는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에, ‘연봉’은 백령도 남쪽에, ‘연화리’는 백령도 서쪽에 실제로 존재하고, 이 지역 조류의 흐름과도 일치한다. 또, 백령도는 중국을 왕래하는 상선들의 중간 기착지였고, 항해의 안전을 위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습속이 남아 있던 지역임을 확인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오래 전부터 ‘심청 전설’이 전해 오는 백령도는 <심청전>의 배경이 된 곳이라고 하였다.

  옹진군에서는 내가 주도하여 제출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심청각 건립을 구체화하였다. 그러자 J교회 목사는 예배 시간에 “심청각은 우상의 집이므로, 짓지 못하도록 막겠다. 만일 우리 교회 뒷산에 심청각을 짓는다면 할복자살하겠다.”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백령도 기독교연합회 이름으로 청와대, 문화공보부, 인천시에 심청각 건립 반대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심청각 건립은 사라져가는 샤머니즘 문화의 정착이고, 허구적인 이야기를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처럼 꾸미는 것이므로 반대한다고 하였다. 진정서를 받은 세 기관에서는 ‘적절히 처리하고 보고하기 바람’이라는 공문을 옹진군청으로 보냈다. 이 공문을 처리해야 하는 옹진군청 문화계장은 답변서를 어떻게 써야 하느냐며 나에게 하소연하였다.

  나는 <심청각이 우상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월간지에 실었다. <심청전>은 조선 후기에 꾸며낸 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이 된 곳에 그 작품의 내용과 관련되는 상징물이나 자료관을 세우고, 그 지역을 홍보하는 것은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에도 흔히 있는 일이다. 남원을 유명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한 것은 <춘향전>이다. 광한루원에는 춘향각이 있고, 그 안에 춘향의 초상화가 있지만, 춘향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심청전>의 배경이 된 백령도에 심청각을 세워 심청의 효행을 기리고, 백령도를 효원의 섬으로 홍보하는 것은 관광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작업의 하나일 뿐이다. 심청각을 우상숭배의 표상이라고 하는 것은 문학이나 문화를 종교와 혼동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옹진군청 문화계장은 이 글을 참고하여 답변서를 써서 보고하였다.

  B교감은 이 글을 백령도에서 발간하는 《백령도지》에 옮겨 실어 많은 백령도 주민이 읽게 하였다. 지역 유지가 된 B교감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존경하는 은사가 추진하는 이 일이 옳다고 여기면서도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들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반대 진정서에 서명을 한 상황이었다. 이들이 문화와 종교를 혼동하지 말라는 내 글을 읽고, 목사를 찾아가 진정서에서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많은 수의 주민이 빠져나가자 탄원서는 힘을 잃고 말았다.

  심청각 건립이 구체화된 뒤에 만난 B교감은 J교회 목사가 육지의 아주 먼 시골 교회로 쫓겨 갔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목사를 그대로 두면 할복자살하거나, 목사의 언행에 실망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길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그대로 두고 보실 수 없어 그가 오래 전에 저지른 잘못을 드러나게 하여 먼 곳으로 가게 만든 것이리라.

  지금 인당수와 연봉바위, 연화리가 보이는 J교회 뒷산 정상에는 심청각이 서 있다. 그 안에는 <심청전> 관련 자료와 작품의 주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판소리 <심청가>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그래서 백령도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심청의 효행을 기리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사탄으로 몰렸던 B집사는 그때 바로 누명을 벗었다. 그리고 백령도 주민의 소원을 풀어준 고마운 분으로 칭송을 받다가 얼마 전에 하나님 품으로 가셨다. 옳고 보람 있는 일을 한 B집사는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취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기독교연합신문 1617호, 2022년 3월 27일자>

인당수와 연봉바위가 보이는 산 위에 세운 심청각
심청각 옆에 세운 효녀 심청상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도에 힘쓰는 택시기사  (0) 2022.05.26
돌잡이는 미신인가  (0) 2022.04.22
어머니의 소원  (0) 2022.02.27
살곶이다리  (2) 2022.02.19
《문예운동》과 나  (0) 2022.02.15

  오늘은 어머니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 곁을 떠나신 지 19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추도예배를 드리고, 잠시 어머니 생전의 일을 회고하였다. 어머니 생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 중에서 어머니를 서운하게 해 드린 일이 선하게 떠오른다.

  내가 아홉 살이던 1950년에는 6․25 전쟁이 일어났고, 열두 살 위의 형이 의용군으로 끌려가 소식이 끊겼다. 몸이 약하셨던 아버지는 큰아들을 잃은 충격이 겹쳐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마흔세 살에 큰아들을 잃고 홀로 되셔서 6남매를 데리고 넉넉지 못한 살림을 꾸려가야 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고단한 나날을 보내셨을 것이다.

  그 해에 어머니는 지인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약 2km 떨어진 교회의 예배와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다니셨다. 천막을 치고 시작한 예배당 건축을 위해 흙벽돌 찍는 일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교회 일을 앞장서서 하셨다.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어머니에게 성령님이 함께 하셨다.

  친척들은 어머니가 예수에 미쳤다며 비웃고, 빈정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날에는 가정예배를 드렸다. 어머니는 농사일과 길쌈을 열심히 하고, 삯바느질도 하면서 살림을 꾸리셨다. 몇 년 뒤에 누님 두 분은 결혼을 하고, 셋째 누님은 취직하였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휴학하고 취직하였다가 복학하여 친척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무렵 어머니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충서지방 감리사의 파송을 받아 농촌의 개척교회 담임 전도사가 되어 막내딸만 데리고 부임하셨다. 어머니는 교회 일을 충실히 하는 한편, 성경학교에 다니시며 신학공부도 열심히 하셨다. 그 교회가 부흥되자 또 다른 개척교회로 옮겨가서 교회 부흥에 힘쓰셨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어머니는 나에게 신학대학에 가서 공부한 뒤에 목사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목회자로 고생하시는 모습을 익히 보아왔기에 싫다고 하였다. 그리고 평신도로 교회를 잘 받들면 되지 않느냐고 하였다. 이 말은 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어머니는 이 말을 잊지 않으셨다,

  서울교육대학에 진학한 나는 졸업과 동시에 서울의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야간대학에 편입학하여 학부 과정을 마친 뒤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밟던 중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몇 년이 지난 뒤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자, 졸업생과 재학생이 주관하여 박사학위 영득 축하회를 열어주었다. 축하회장에서 어머니는 많은 친척과 친지로부터 축하를 받으시며 기뻐하셨다. 그 때 한 분이 어머니께 소감을 묻자, ‘아들이 문학박사 아닌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다. 신학박사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드러난 말이었다.

  교수가 된 나는 강의와 연구, 학생 지도, 외부 강의와 글쓰기, 방송 출연 등으로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무렵에 나는 ‘시간은 돈’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힘주어 말하곤 하였다. 그것은 생활 체험에서 나온 절실한 말이었다. 교회에서는 집사, 교회학교 교사, 권사의 직분을 맡았으나, 열심히 일하지는 못하였다.

  어느 날, 담임목사님께서 나를 장로로 추천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장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강하게 사양하였다. 그러자 목사님은 어머니가 ‘아들이 장로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다고 하시면서,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소원을 이뤄드리라고 설득하셨다. 그 이듬해에 나는 장로가 되었다. 그때 어머니는 여든아홉 살, 나는 쉰다섯 살이었다. 장로취임식에 참석하신 어머니는 정말 기뻐하셨다. 그 날에 만족해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께서 평생의 소원으로 삼고 기도하셨던 소원을 온전히 이루어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죄송스럽다. 그러나 한 가지는 이루어 드린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죄송스러운 마음을 눌러두려고 한다. 어머니의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한다. 어머니,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곧 뒤 따라 가서 뵙겠습니다. <기독교연합신문 1613호, 2022. 2. 27.>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잡이는 미신인가  (0) 2022.04.22
사탄으로 몰린 집사  (0) 2022.03.27
살곶이다리  (2) 2022.02.19
《문예운동》과 나  (0) 2022.02.15
선비화(禪扉花)  (1) 2022.01.0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