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내와 함께 P 교장의 남편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P 교장은 30여 년 전에 교육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석사논문 지도를 한 여제자이다. 그가 두 학기 강의가 끝난 뒤에 나의 지도를 받겠다고 하여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수강 태도가 좋았고, 내가 지도하는 석사·박사 과정의 재학생과 졸업생의 연구모임인 ‘월곡회’에도 열심히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나는 그가 3년 과정을 마친 뒤에 좋은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삼천포에서 열리는 월곡회 연구 모임에 참석하여 학업을 중단하겠다고 하였다. 깜짝 놀라 그 연유를 물으니,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겠다고 하였다. 나는 근황을 자세히 들은 뒤에 힘주어 말했다. 남편의 병은 쉽게 낫는 병이 아닌 것 같으니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석사학위를 받은 뒤에 승진하려던 계획과 교육계에서 펼치려던 꿈을 접고, 병간호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힘들고 고생스럽겠지만, 병간호와 꿈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병행하기 바란다. 그래야 두 아들도 어려움을 견뎌내는 엄마를 보며 기죽지 않고 힘을 내어 자기 할 일을 할 것이다.
이어서 뇌출혈로 쓰러져 오랜 기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 오랜 기간 앓는 남편을 간호하다가 찌든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예로 들며 설득하였다. 남편의 병에 대한 걱정과 경제적인 어려움, 눈앞에 닥친 모진 현실에 대한 원망과 분노‧회한으로 괴로운 그에게 나의 말이 모질게 들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려 한동안 오열한 뒤에 울음을 그치고, 내 말을 명심하겠다고 하였다. 그 뒤로 그는 29년 동안 투병하는 남편을 간호하면서 온갖 어려움과 고통과 맞서 이겨내고 오늘을 맞이하였다.
나는 빈소의 영정 앞에 서서 고인이 주님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런 뒤에 그의 얼굴을 대하니, 그가 한 말과 글 또는 그와 가까이 지내는 제자들을 통하여 알게 된, 그가 그 동안 겪은 일들이 떠올랐다. 30여 년 전, 그의 남편은 사업에 실패하여 살고 있던 작은 아파트마저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 충격으로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남편은 여러 병원으로 옮겨 다니며 치료를 받은 끝에 회생하였으나 반마비로 겨우 화장실 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재활치료를 받으며 투병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아버지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그는 좁은 단간 방에 남편과 시아버지를 모시고 간호하는 한편, 고등학생‧중학생인 두 아들을 보살피며 학교에 근무하였다.
얼마 뒤에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남편은 재활 치료를 받아 조금씩 회복되었으므로 한동안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집 앞에 나갔다가 계단에서 넘어져 대퇴부 골절로 인공관절 수술을 받고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은 장애등급을 받고 요양원에 장기 입원하였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서는 남편을 잘 돌봐주었다. 그래서 그는 학교에 출근하면서 요양원에 있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였다. 대학원 공부도 계속하여 좋은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현장 연구도 열심히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교감‧교장으로 승진을 하였고, 큰아들이 결혼하는 경사도 있었다.
그는 몇 년 전에 40여 년 봉직하던 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였다. 그는 시간을 내어 성당 어르신대학, 교도소에 가서 노래 부르기와 리크레이션 지도를 하였다. 또 남편이 있는 요양병원을 비롯하여 여러 요양병원에 가서 환우들을 위한 노래 부르기 봉사활동도 아주 열심히 하였다. 그 때 남편을 비롯한 여러 환우들이 기뻐하며 고마워하던 모습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는 온갖 짐을 자기에게 떠넘기고 오랜 동안 요양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남편에 대한 원망과 측은함, 아름다운 추억과 연민의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분출하곤 하였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지쳐 하루하루가 지겹고,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럴 때에는 국내의 성지를 순례하며 신앙의 선배들이 겪은 고난과 믿음을 성찰하고, 피정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며 주님께 의지하였다. 그러는 동안 신앙의 선배들이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남긴 신앙의 메시지를 깨닫기도 하고, 자기의 처지를 신앙의 힘으로 이겨낼 선하고 의로운 용기를 얻기도 하였다.
그는 남편 간호하는 일에서 벗어나 틈틈이 자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요양병원의 요양보호사들이 애써주는 덕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이 커졌다. 그래서 72세 되던 해에 나이를 무릅쓰고 요양보호사를 양성하는 학원에 등록하여 이론 공부와 실습을 마치고, 시험에 통과하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남편이 있는 요양병원에 가서 6개월 동안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남편을 대하는 마음으로 입원해 있는 어르신들을 보살폈다. 병원 규정상 남편을 직접 보살피지는 못하지만 일이 끝난 뒤에 면회할 수는 있었다. 남편은 매일 그를 만나는 것을 기뻐하였고, 건강 상태도 조금 좋아졌다. 그래서 음식을 스스로 섭취하지 못하여 끼웠던 콧줄을 제거할 만큼 몸이 좋아졌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그는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하나님 곁으로 가고 싶다’는 남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묵은 살림살이를 처분하고, 실내 단장을 한 뒤에 남편을 집으로 모셨다. 그가 고생할 것을 염려하여 반대하던 아들들도 아버지의 귀가를 환영하고 아버지 간호를 도왔다. 그는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주변의 일들을 모두 끊고, 오직 남편의 곁에만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편안하고 행복하다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리고 아들들과 며느리, 손자에게 정겨운 인사를 한 뒤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였다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그는 그동안 병수발에 지친 때문인지 작은 체구가 더 왜소해 보였다. 문상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화장기 없는 그의 얼굴을 보니, 한없이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30년 가까이 남편 병 수발을 하고, 70이 넘은 나이에 요양병원에서 간병 체험을 한 뒤에 남편을 집으로 모셔 집에서 죽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 그의 섬김과 희생의 마음은 그 무엇보다 넓고 크게 느껴졌다. 그는 보통 사람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큰일을 한 ‘작은 거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교장을 지낸 서울교대 제1회 동기 두 사람을 만났다. 그가 부장교사일 때와 교감일 때 함께 근무하였다는 두 사람은 그가 학교에 근무할 때의 태도와 생활 모습을 이야기하였다. 또 그곳에서 그와 가깝게 지내는 대학원 제자 두 사람을 만나 그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 섬김과 봉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그가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남편과 자식을 위한 섬김과 희생이 컸음을 느끼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이제 병고에 시달리던 남편은 이를 벗어나 주님 곁에서 편히 쉬면서 그동안 희생과 섬김을 실천한 그에게 감사의 미소를 보낼 것이다. 이제 그가 남편을 보낸 아쉬움과 슬픔, 더 잘 보살피지 못하였다는 회한의 마음을 훌훌 벗고, 마음의 평안과 용기를 회복하여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두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함께 행복을 누리기를 기원한다. (2024.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