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아름다운 바위(Üç Güzeller) 
 

  위르귑에서 아바노스 쪽으로 가는 길가에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우리도 차를 세우고 능선 쪽으로 올라가니, 능선 바로 아래에 버섯 모양의 큰 바위 세 개가 서 있다. 바위 둘은 마주 보고 서 있고, 하나는 떨어져 있다. 마주 보고 서 있는 바위 중 아래쪽에 있는 바위는 여자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고, 위쪽에 있는 바위는 남자처럼 보이는데, 여자 바위를 내려다보고 있다. 함께 간 G 교수는 이 바위에 얽힌 전설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옛날에 한 처녀가 한 총각을 몹시 사랑하여 결혼하려고 하였다. 처녀의 아버지는 딸이 그 총각과 혼인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다른 남자와 혼인시키려 하였다. 총각은 그 처녀가 자기의 아기를 임신한 것을 알고 쫓아가 처녀의 아버지에게 그 처녀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지 말고, 자기와 혼인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아버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저 앞에 서 있는 세 바위는 이런 사연을 안고 있는 바위라고 한다. 이것은 세 바위의 형상을 보고, 터키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고 바위를 다시 보니, 그런 사연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언덕의 이름을 G 교수는 터키어로 세 아름다운 것(Üç Güzeller)’이라고 하였다. 자연물은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무덤덤하게 보일 수도 있고, 더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는 것 같다.

     데브렌트 계곡(Devrent Vadisi)


  윌귑에서 아바노스로 가는 길가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도 많은 차들이 서 있다. 능선 위쪽에 많은 바위들이 서 있는데, 보는 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보이므로 그 이름도 여러 가지 일 것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름이 있으니, 낙타처럼 보이는 낙타바위가 있다. 그 옆에는 손가락을 편 것처럼 보이는 손가락바위’, 성모 마리아의 모습처럼 보이는 성모 마리아바위가 있다. 펭귄의 모습을 한 팽귄바위도 보였다. 낙타바위 뒤쪽을 올라가니 기묘한 형상의 바위가 많았다. 자연의 섭리로 만들어진 바위의 모습이 참으로 다양하고 멋이 있었다.

데린쿠유 지하도시(Derinkuyu Yeraltı Sehri)

  카파도키아에는 36개가 넘는 지하도시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그 규모를 보면 데린쿠유가 가장 크고, 카이막클르 지하도시(Kaymaklı Yeraltı Şehri)가 그 다음이다. 데린쿠유는 괴레메에서 남쪽 니데 방향으로 20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카이막클르에서 10km 쯤을 니데 방향으로 더 가야 한다.

  이곳은 1960년대에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인근 마을의 농부가 기르는 닭이 조그만 구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당국에 신고한 것이 발단이 되어 고고학박물관 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1965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맨 처음에 이곳에는 히타이트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원시 히타이트인들이 지하 1층을 저장고로 이용하며 살았는데, 그 이후에 다른 종족들이 와서 살면서 지하 8층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서기 67세기경에 기독교인들이 아랍 부족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은신하면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비밀 장소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데린쿠유는는 지하 7층까지 있고, 그 깊이는 85m나 된다고 한다. 수용 인원은 5,000명 정도라고 한다. 데린쿠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인데, 직경이 1m쯤 되는 구멍이 수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구멍을 통하여 모든 층에서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구멍은 환기통의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이곳에는 교회는 물론 성경학교와 수도원이 있었고, 부엌과 식당, 침실, 응접실, 포도주 창고 등이 주로 1층과 2층에 있었다. 무기 저장고와 은신처, 그리고 다른 곳과 연결된 터널은 3층과 4층에 있었다. 터널은 대규모 침입이 있을 경우에 대피하기 위한 것이었을 터인데, 카이막클르와도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통로에는 출입문을 막을 수 있는 둥근 돌이 있다. 이 돌은 장정 4~5명이 함께 밀어야 움직일 수 있는데, 이 돌은 홈에 꼭 맞도록 되어 있어서 밖에서는 열 수 없다. 필요할 때에는 이 돌로 통로를 막아 밖에서 쳐들어오는 적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피신할 때 이용하는 비밀 통로도 있다.

카이막클르 지하도시(Kaymaklı Yeraltı Şehri )


  카이막클르 지하도시는 괴레메에서 남쪽 니데 방향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괴레메 야외 박물관을 나온 우리는 카이막클르 지하도시로 향했다.

  카이막클르 지하도시는 깊이 55m, 지하 8층으로 각 층 수용 인원이 200명이라고 한다. 지하 구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비잔틴 시대라고 한다. 아래로 깊이 들어갈수록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지하에는 교회, , 거실, 부엌, 외양간 등이 좁은 터널과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암반을 파서 만든 절구, 와인을 만들기 위한 석조(石槽)도 있었다. 절구는 한국의 절구 모양과 비슷하여 흥미로웠다.

  지표면과 연결되는 통풍구도 있는데, 이것은 굴뚝의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바위로 만든 원반형의 회전문도 몇 군데에 있다. 이것은 여닫이식으로 안에서 굴려 구멍을 막으면 밖에서는 열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적이 침입했을 때 통로를 막는 데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곳의 지하 통로는 좁아서 허리를 굽히거나 쪼그려 앉아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곳도 있다. 나는 이곳을 지나다가 세 차례나 머리를 바위에 부딪쳤다. 두 번은 가볍게 부딪혀 조금 아팠지만 한 번은 소리가 날만큼 세게 부딪혔다. 그래서 운동모자를 쓰고 있었는데도 상처가 나서 피가 조금 났다. 나는 아픔을 참으며 속으로 입장료를 15리라씩이나 받으면서 안전모 하나도 준비하지 않고 손님을 맞는 이곳의 관광 서비스의 수준을 탓하였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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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파도키아(Kappadokya)는 아나톨리아 반도 중부에 위치한 네브셰히르(Nevşehir), 카이세리(Kayseri), 니데(Niğde)를 잇는 지역의 이름이다. ‘훌륭한 말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은 기원전에 이 지역에 있던 카파도키아 왕국(B.C 257~64)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이 지역은 약 6천만 년 전에 에르지예스산(Erciyes Dağı, 해발 3,916m)과 하산산(Hasan Dağı)의 화산 폭발로 분출된 용암이 굳어 형성된 응희암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풍화작용으로 기이한 지형과 바위 모양을 갖게 되었다. 바위와 흙은 붉은 녹빛, 황토색, 밤색 등을 띠고 있고, 수없이 많은 원뿔 모양의 돌기둥은 온갖 모양을 갖추어 아름답고 기이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이 지역으로 피신하여 살기 시작하여 약 250년 동안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이곳의 바위와 흙이 굴을 파기에 쉬운 점을 이용하여 기도처, 교회, 학교, 지하도시를 만들어 살면서 신앙을 지켰다. 그들은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을 교회 안의 벽에 그려 넣었다. A.D 313년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정한 뒤에는 은신처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하자 초대교회의 신앙을 따르던 수도사들이 이곳으로 와서 수도원을 건설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 후 이슬람교인들이 아나톨리아반도를 점령하자 기독교인들은 다시 이곳으로 와서 생활하였다. 유네스코(UNESCO)에서는 이 지역을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카파도키아 지역의 볼거리는 아주 많은데,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볼거리가 많이 몰려 있는 곳은 괴레메, 위치사르, 젤베 부근인데, 이곳에는 기암괴석과 동굴교회, 지하도시 등이 특히 볼 만하다. 나는 카이세리에 3년 가까이 있는 동안 카파도키아의 여러 관광지를 여러 번 갔다. 어떤 곳은 서너 번이나 갔고, 어떤 곳은 한 번밖에 못 가보았다. 시간과 여건이 맞지 않아 가보지 못한 곳도 있다.

  괴레메(Göreme) 야외 박물관

  괴레메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은둔생활을 시작한 곳이라고 한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교회가 타락하였을 때에는 초기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이 수도생활을 하던 곳이리라. 이슬람이 이 땅을 지배한 뒤에는 이슬람을 피하여 이곳에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이곳에는 5~12세기에 박해를 피해 온 기독교인들이 만든 30여 개의 석굴 교회가 모여 있는 괴레메 야외박물관이 있다.

  나는 이곳에 2009104일에 G 교수와 함께 왔고, 2011320일에 SK건설의 이 부장과 다시 왔다. 카이세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투판베일리(Tufanbeyili)SK건설이 화력발전소 건설 공사를 맡아서 하는데, 이 부장은 토목 담당 기술자로 이곳에 왔다. 이 부장과 함께 왔을 때의 일이다.

  괴레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상가에 가니 기념품 가게와 식당이 즐비하였다. 우리가 그곳을 지나자 상인들은 일본말로 인사를 하고, 물건을 사라고 하였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 금방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기념품을 싸게 드립니다. 들어오세요.” 하고 인사를 하였다.

  그곳에는 큰 식당은 없고, 몇 가지 터키 음식을 파는 간이식당이 있었다. 우리는 한 집으로 들어가 괴즐레메(Gözleme)를 한 개씩 사서 먹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아저씨는 한국어를 제법 하였다. 한국어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하니, 한국인이 많이 오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배웠다고 하였다.

  점식 식사를 마친 우리는 괴레메 야외박물관에 가서 지하교회를 보았다. 교회의 입구는 눈에 잘 띄지 않게 되어 있지만, 안에 있는 프레스코화는 아주 선명하다.


  입장권을 사서 내고 들어가니, 안내원이 음성안내기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10리라를 내고 한국어 음성안내기를 빌렸다. 음성안내기를 목에 걸고 현장에 가서 해당 번호를 눌러 그 동굴과 교회의 연혁, 교회 벽면에 그린 예수님과 마리아의 모습을 비롯한 성화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음성안내기가 있으니, 따로 가이드가 없어도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성 바실교회(Basil Kilisesi)이다. 이 교회는 11세기에 이루어진 곳이라고 한다. 성모자(聖母子)의 상을 비롯하여 성 디미트리우스, 말을 탄 성 요한, 성 테오도르 등이 묘사되어 있었다. 성 요한은 카파도키아의 수호(守護) 성인(聖人)이다.

  사과교회(Elmalı Kilise)4개의 기둥으로 지탱되는 돌, 옆면을 고정시키는 기둥이 있었다. 이것은 아야소피아의 건축 방식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벽에는 붉은 흙으로 그린 십자가의 기하학적 문양(紋樣), 그 위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었다. 중앙 돔에는 파란색을 배경으로 한 예수가, 아치에는 사도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 교회를 사과교회라고 한 것은 이 근처에 사과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하기도 하고, 천사 가브리엘이 가지고 있는 지구가 사과 모양이어서 붙여졌다고 하기도 한다.

  성 바르바라교회(Barbara Kilise)에는 돔과 두 개의 기둥, 십자형의 본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르바라 성녀는 306124일에 이교도였던 아버지 디오스크로스의 손에 목이 잘려 죽은 여인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여행을 간 동안 기독교를 믿는 청년을 만나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배교할 것을 명하였다. 그녀가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자, 아버지는 그녀를 관청에 신고하였다. 관청에서는 그녀를 잡아다가 고문을 하면서 배교할 것을 강요하였지만, 그녀는 끝내 듯을 굽히지 않았다. 이를 본 아버지가 그녀를 도끼로 목을 잘라 죽였다고 한다. 이 교회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바르바라 성녀를 기념하는 교회이다. 입구 맞은편 벽에 성 바르바라가 그려져 있다. 다른 벽에는 당시 소아시아반도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황토를 재료로 바탕색 없이 바위 위에 직접 십자가와 포도송이 , 물고기, 새 무늬 등이 그려져 있다.

  뱀의 교회(Yılanlı Kilise)에는 성 요한과 성 테오도르가 말을 타고 악마의 상징인 뱀을 죽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노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 성 엘레니가 십자가를 잡고 있는 그림이 있다. 입구 왼쪽 벽에는 남녀의 생식기를 함께 가지고 있는 성인 오노폴리오스가 그려져 있다. 이 성인은 원래 아름다운 여자였는데, 수도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남자들이 계속 괴롭히자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이처럼 추한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13세기에 그려졌다고 한다.

  샌들교회(Çanklı Kilise)는 바닥에 새겨진 발 모양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초기 기독교인이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의 발모양을 복사하여 가지고 와서 여기에 새겼을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상당히 큰 동굴도 있는데, 이곳은 예전에 식당으로 쓰이던 곳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식량 저장고와 부엌이 있고, 30여 명이 앉아 식사할 수 있도록 돌을 파서 만든 식탁과 의자가 있다.

  위에 적은 것 외에도 여러 교회와 시설물들이 있고, 각각의 특색이 있었다. 이곳에서 생활하며 예배를 드리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찬찬히 둘러보았다.

  파샤바으(Paşabağı)


  괴레메와 아바노스 길에서 젤베 쪽으로 1km쯤 가서 젤베 계곡에 들어가기 전에 있는 넓은 공간이다. 언덕길을 내려가니, 큰 버섯 모양의 특이한 바위들이 셋씩 넷씩 짝을 지어 우뚝우뚝 서서 우리를 반긴다. 이들 바위는 높이가 각각 다른데, 평균 30m쯤 되어 보인다. 바위는 아래 부분과 버섯의 갓 부분의 색깔이 다르다. 갓 부분은 딱딱한 현무암이고, 아래는 부드러운 응회암이어서 침식 속도가 달라 생긴 것이라 한다. 이런 모양의 바위를 요정의 굴뚝이라고 하기도 한다.

  버섯바위 뒤쪽에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보니, 원뿔 모양의 바위들이 연이어 서 있기도 하고, 몇 개씩 짝을 지어 서 있기도 하다. 바위들은 혼자서 혹은 무리를 지어 서로의 모습을 뽐내고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원뿔 모양의 높은 바위에는 몇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아래로 난 넓은 구멍으로 들어가니, 위로 통하는 통로가 있고, 통로는 위쪽의 방과 같은 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옛날에 수도사가 거처하며 수도하던 곳이리라.

  언덕 위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5명이 즐겁게 이야기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가자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서툰 터키어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아주 반가워하면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아내와 양 선생이 학생들과 함께 서서 포즈를 취한 뒤에 이 부장은 그들의 사진기로, 나는 내 사진기로 사진을 찍었다. 이 부장한테 사진기를 받아 찍힌 모습을 확인한 학생들은 아주 기뻐하며 앞서 내려갔다.

  언덕을 내려가니, 상인들이 줄을 지어 서서 손님을 부른다. 주차장 가까이서 과일과 포도주를 파는 남자가 한국어로 인사하였다. 그리고는 과일의 생즙을 만드는 기구를 가리키며 맛있어요를 강조하는 듯이 쥑인다-’를 연발하였다. 내가 석류 주스를 만들어 달라고 하니, 석류를 즙틀에 넣어 짜 준다. 약간 시면서 달콤한 맛이 아주 좋았다. 내가 그 남자에게 맛있다는 뜻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보이니, 그는 신이 나서 또 쥑인다를 외쳤다. 나는 터키어를 잘하는 양 선생에게 그것은 좋지 않은 표현이니 쓰지 말고, ‘맛이 좋아요.’라고 하라고 가르쳐 주라고 하였다. 양 선생의 말을 들은 그는 쥑인다대신에 맛있어요를 외쳤다. 양 선생이 그 말을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물으니, 한국인 관광가이드한테 배웠다고 하였다. 한국인은 외국인에게 가르쳐 주는 한국어 한 마디가 한국어의 품위를 높일 수도 있고,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들이 서서 석류주스를 마시고 있을 때 한국인 단체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언덕에서 내려왔다.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을 보고는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때 한국인들이 응원하던 박자와 가락으로 북을 치면서 대한민국을 외쳤다. 한국인에게 친근감을 들어내어 물건을 많이 팔아보겠다는 상술(商術)이지만, 한국인인 나로서는 그리 싫지 않았다.

    젤베(Zelve) 야외 박물관

   파샤바으에서 조금 걸어가니, 젤베 야외박물관이 나왔다. 이곳에도 여러 교회와 수도원이 있는데, 대개 성상(聖像) 파괴가 성행하던 8~9세기경에 지어졌고, 동굴은 그 당시 은신처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서기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노스 왕은 수도를 비잔티움(이스탄불)으로 옮기고,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그 후로 카파도키아에는 많은 교회와 수도원들이 생겨 기독교가 크게 발전하였다. 로마제국을 계승한 비잔틴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는데, 서기 726년에 레오 3세는 예수와 성인(聖人)의 성화상(聖畵像, icon)을 우상(偶像)으로 간주하여 엄금하였다. 이 시기를 성상화 파괴의 시기라고 하는데, 843년까지 지속되다가 황후 테오도라에 의해 성화상 숭배의 금지가 해제되었다. 그 후에는 성화상이 자유스럽게 그려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사슴의 교회’, ‘포도 교회’, ‘물고기 교회등으로 불리는 석굴교회가 있다. 교회 안에는 비둘기, 물고기, 공작, 종려나무 등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의 상징으로, 각각 평화, 예수, 부활, 영생을 상징한다.

  방앗간이라는 표지판이 있는 석굴에 들어가니, 커다란 맷돌이 있다. 맷돌의 모양이나 크기는 한국의 연자방아를 연상하게 해 주었다.


   교회와 방앗간 옆쪽 방향으로 가니, 앞면의 기둥이 잘 다듬어진 석굴교회가 있다. 그 옆에는 이슬람교 사원의 미나레(첨탑)와 비슷한 구조물도 서 있다. 이것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이곳에 있는 석굴교회와 방앗간 등은 기독교인들이 떠난 뒤에 이 지역 사람들이 와서 주거용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곳 바위산의 바위에는 많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수많은 비둘기들이 바위구멍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전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비둘기를 통신용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식용으로 잡아서 고기를 먹기도 하였으며, 노른자와 흰자는 염료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또 배설물은 모아서 거름으로 썼다고 한다. 지금도 수많은 비둘기들이 살고 있는데. 비둘기의 배설물이 바위를 상하게 하여 이곳의 지형이 바뀌지 않을까 걱정된다.

  계곡 위쪽을 보니 바위들만 있을 뿐 물도 없고, 풀과 나무도 없다. 그러나 낮은 곳과 계곡 쪽에는 듬성듬성 나무가 서 있고, 열매도 열려 있다. 바위산의 아래쪽에 있는 나무들과 떼를 지어 나는 비둘기 떼들이 이곳 역시 생물이 살 수 있는 곳임을 말해 주는 듯하다.

     에센 테페(Esen Tepe)

  괴레메 야외박물관을 지나 능선에 올라 차를 세우고 조금 걸어 올라가니, 계곡 아래쪽이 환하게 보이는 전망대가 있었다. 함께 간 G 교수는 이곳을 파노라마(panorama)’라고 한다고 하면서, 한국어로 무어라고 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전망대(展望臺)’ 또는 조망대(眺望臺)’라고 하면 좋을 것이라 하면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계곡 아래를 보니 하얀색과 밤색의 바위들이 연이어 있는데, 자세히 보니 바위들의 모양이 각각 달랐다. 원뿔 모양의 바위, 버섯 모양의 바위들이 줄지어 서있는데, 이쪽을 보기도 하고, 저쪽을 보기도 한다. 바위들이 작은 성채를 이룬 듯한 곳에는 성을 지키는 병사도 있고, 성안에서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이는 듯하다. 아내는 이를 보면서 동화 속의 나라와 같다고 하였다.

  바위들이 있는 계곡에서 눈을 들어 다른 쪽을 보니, 능선 아래의 길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마을들이 멀리 보인다. 조금 전에 보고 온 파샤바으의 요정의 굴뚝과 괴레메의 모습도 멀리 보인다. 위쪽으로 보니 큰 바위 요새인 위츠히사르(Uçhisar)가 보인다.

  계곡 아래의 경치를 보는 데에 정신을 집중하였다가 위를 보니, 야외에 좌판을 벌여놓고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몇 있다. 음악을 틀어놓아 관광지의 기분을 돋우었다. 가게 옆에는 가지에 하얀 천과 종이를 잔뜩 매달고 있는 큰 나무가 있었다. G 교수는 그 나무를 소원을 비는 나무라고 하였다. 터키 사람들은 흰 천이나 종이를 나뭇가지에 매달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이한 능력을 지녔다고 믿는 존재의 상징물 옆에 있는 나무에 소원을 빈다. 에페수스에 갔을 때 보니, 소원을 비는 나무가 마리아의 집 앞에도 있고, 잠자는 7인의 동굴 옆에도 있었다.

  이곳에는 바로 옆에 성인(聖人)의 상징물도 없고, 신성시하는 건물이나 구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능선에 외따로 서 있는 나무에 소원을 비는 이유가 무엇일까? 능선 바로 아래에 있는 형형색색의 바위를 신성시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2009103일에 왔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여 2011320일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다시 와서 보니, 처음 왔을 때와 같은 감동은 느낄 수 없었지만, 산 아래의 하얀 바위들이 펼치는 아름다운 모습은 다시 보아도 정말 장관이었다. 눈이 섞인 비가 내려 오래 있지 못하고 바로 차에 올랐다.

     위츠히사르(Uçhisar)

  위츠히사르는 네브셰히르에서 8km, 위르귑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있다. 네브셰히르위르귑 도로에서 왼쪽으로 1km쯤 벗어난 곳에 있다. 조금 전에 본 조망대에서 언덕길을 따라 1km쯤 올라가니, 위츠히사르가 나왔다. 위츠히사르는 뾰족한 성채의 뜻을 지닌 말이다. 커다란 바위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바위산들이 모여 튼튼한 요새와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이곳에는 중앙의 요새를 중심으로 집을 짓고 살아 한 마을을 이루었다. 그런데 인구가 증가하고, 침식작용으로 위험을 느낀 사람들이 아래쪽으로 내려와서 살았기 때문에 중앙의 요새가 보존되었다.

  이곳에는 바위 밖으로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 구멍과 연결된 작은 통로를 통해 안쪽의 넓은 공간으로 들어간다. 입장료를 내고 토산품 가게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방과 저장고가 있다.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니 위층에도 역시 넓은 방이 있다.

  계단을 밟고 맨 꼭대기까지 오르니, 작은 동산의 정상에 오른 느낌이다. 국기 게양대에는 터키 국기가 펄럭인다. 이곳에서는 괴레메 계곡 전체를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마을 쪽을 보니, 수영장이 있는 큰 집이 있는가 하면, 작은 집들도 많았다. 이곳 사람들은 펜션을 짓고 관광객을 상대로 숙박업을 하는데, 이 지역의 펜션은 경관이 좋아 인기가 있다고 한다.

  서쪽 하늘에는 서산으로 지는 해가 구름에 싸인 채 마지막 빛을 발하는 장엄한 광경이 보였다. 잠시 후 동쪽 하늘을 보니 둥근 달이 떠 있다. 나와 아내는 둥근달을 보고서 그날이 추석인 것을 떠올렸다. 아내는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들도 저 달을 보겠지.” 하고 말했다. 나는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맞장구쳤다.

  그날 밤은 괴레메에 있는 마론 펜션에서 숙박하였다. 펜션의 안주인은 한국인인데, 터키에 여행 왔다가 터키 남자를 만나 혼인하고, 펜션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 집 주인 내외는 G 교수가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 주인의 부탁으로 한국어문학과 학생들을 소개하여 아르바이트를 하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안주인은 요즈음에 세계 경제위기의 여파로 한국인이 많이 오지 않아 적적하였는데, 귀한 손님이 왔다면서 아주 반가워하였다. 저녁상을 차려 내왔는데, 상위에는 두부찌개가 있고, 옆에 송편과 호박전이 있었다. 우리는 터키에 와서 추석을 보내면서 송편과 호박전을 먹게 된 것이 신기하고 기뻐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씩 하였다. 아내가 여기서 두부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물으니, 한국에서 가져온 콩을 믹서로 갈고, 소금물에 무엇을 섞은 것을 간수 대용으로 써서 만들었다고 하였다. 두부가 잘되지 않아 맛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맛이 꽤 좋았다. 멀고 먼 터키에서 두부를 넣은 된장찌개를 먹고, 추석 음식으로 송편과 호박전을 먹은 일은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괴레메에는 한국인 자매가 와서 운영하는 파라다이스 펜션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여의치 못하여 만나지는 못하였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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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사람들은 아침에 만나면, “메르하바(Merhaba)!” 또는 귀나이든(Günaydın)!” 하고 인사한다. 우리말로 안녕하십니까!”의 뜻이다. 저녁에 만나면 이이 악샴나르(İye akşamlar)!” 하고 인사한다. 이 말을 한 뒤에는 그동안 잘 지냈는가를 묻고, 가족의 안부를 묻는다.

   며칠 동안 헤어졌던 가족이나 친척, 친구를 만나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서로 끌어안고 왼쪽 뺨과 오른쪽 뺨을 댄다. 어떤 사람들은 끌어안고 이마를 마주 댄다. 이마를 마주 대며 인사를 하는 사람은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서로 끌어안고 뺨을 맞대는 인사는 만났을 때에는 반가운 마음을, 작별을 할 때에는 아쉬운 마음을 표한다.

   터키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 통성명을 한 뒤에도 역시 끌어안고 뺨을 맞댄다.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과 끌어안고 뺨을 맞대는 인사법에 익숙하지 않다. 이를 알아서인지 나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터키 사람들은 대개 악수만 하고 만다. 그런데 처음 인사를 나눈 사람이 갑자기 끌어안는 바람에 당황한 적도 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학교 식당에 가니 교직원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학교 식당이 여러 곳이어서 교직원들이 나뉘어서 갔는데도 줄을 서는 것을 보니, 교직원수가 많기는 많은가보다. 차례대로 서서 앞의 사람이 하는 대로 흰 종이 한 장을 식판에 깔고, 숟가락과 칼과 포크를 담은 종이 봉지와 물컵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음식을 담은 접시 세 개를 받아 올려놓은 뒤에 들고 자리로 왔다. 앉아서 식판에 깐 종이를 보니 터키 글자로 모양을 내어 아피옛 올순(Afiyet olsun)!”이라고 쓴 것이 보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G 교수에게 물으니, “당신의 건강을 빕니다!”라는 뜻인데, 터키 사람들은 식사 전후에 이 인사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나에게 아피옛 올순!”이라고 말하였다. 나도 얼결에 아피옛 올순!”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건강을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 우리말의 맛있게 잡수세요!”보다 좋은 것 같다. 그래서 그 후로는 식사할 때에 앞이나 옆에 앉은 터키 사람에게 아피옛 올순!”이라고 인사를 한다. 그러면 내 말을 들은 사람들도 답례로 같은 말을 한다.

   터키에 처음 와서 모든 것이 생소할 때에 한국어문학과의 G 교수가 세심하게 배려해 주고, 이것저것 챙겨 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터키어를 전공하면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이곳 대학에 와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한국어문학과 전임강사 발령을 받아 함께 근무하는 양 선생의 도움도 매우 크다. 내가 터키어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도 이 두 분의 덕이다. 그래서 두 분께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뜻에서 기회가 되면 식사 대접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 번은 두 분을 우리 숙소로 초대하여 한식으로 식사 대접을 하였다. 그 때 G 교수가 아내에게 엘리니제 사을륵(Elinize sağlık)!” 하고 인사하였다. “당신 손에 건강이 있기를!”의 뜻을 담은 말이라고 하였다. 함께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은 뒤에 내가 식대를 계산하였더니, “케세니제 베레켓(Kesenize bereket)!” 하고 인사하였다. “당신 지갑에 복이 있기를!”의 뜻이라고 한다. 터키 사람들은 앞으로의 계획이나 희망 섞인 말을 하면 그 말을 받아서 인샬라(İnşallah)!”라고 말한다. “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나는 터키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런 인사말을 여러 번 들었다. 처음에는 어색하였으나 자꾸 들으니 익숙해져서 지금은 나도 자주 쓰는 편이다.

   터키 사람들이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인사로 하는 말이나 행동은 우리와 많이 다르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 감사하는 마음, 작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는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 만날 때와 헤어질 때의 인사말은 우리말로 바로 바꿀 수 있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말로 바로 바꿀 수 없는 말도 있다. 특히 식사 전후에 하는 인사말이라든지 희망이나 계획을 말할 때 하는 인사치레는 상대방의 건강과 일의 성사를 신에게 맡기고 기원한다는 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말들이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그 이전부터 쓰던 말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말은 우리말에 없기 때문에 직역하여 말하기 어렵다. 이런 인사말을 들을 때면 터키 사람들이 우리보다 인사말을 아주 잘 만들어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내가 만난 터키 사람들>에 실려 있음.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는 기독교 교회가 참으로 많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교회를 볼 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생긴 교회는 어디에 있는, 어느 교회일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터키에 와서 여행 안내서를 보던 중 ‘터키 안타키야(Antakya)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세계 최초의 교회’라는 글을 읽었다. 그래서 얼른 지도를 펴고 안타키아를 찾아보니, 터키의 남동쪽 해안 끝에 있다. 학생들에게 물으니, 버스를 타고 12~13 시간 걸려야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주말을 이용하여 갔다 오기에는 먼 곳이어서 방학에 가기로 하고 미뤄 두었다.

   2010년 봄 학기 강의가 끝난 6월 하순에 우리 부부는 양 교수, 김 교수와 함께 밤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10여 시간을 달려 이른 아침에 이스켄데룬(Iskenderun)에 도착하였다. 이스켄데룬은 옛날에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지난 것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버스 터미널로 마중 나온 2학년 학생 일카이 양을 만나 그곳에서 하루를 지내며 이스켄데룬 시내와 박물관을 구경하고, 지중해 바닷가에 난 길을 따라 산책하였다. 지중해의 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 하고,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바닷가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감상하였다.

  그 다음날 오전 10시쯤 일카이 양 언니의 약혼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안타키아로 향하였다. 이스켄데룬에서 안타키아는 차로 3시간 쯤 걸린다. 좀 가파른 산길을 달리며 보니, 길 양편 산에 올리브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더 남쪽으로 가니,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밭에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시리아와의 국경에 쳐 놓은 철조망을 지나 달리니, 옥수수밭과 목화밭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올리브나무가 숲을 이루고, 끝없이 펼쳐지는 농토를 가진 터키가 부럽다.

   안타키아(Antakya)는 터키의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인구는 약 20만 2천명이라고 한다. 안타키아는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이다. 옛 이름이 ‘하타이(Hatay)’여서 지금도 하타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은 두 군데이다. 하나는 비시디아 안디옥인데, 터키 내륙 지방에 있는 지금의 얄바치(Yalvaç)로, 아피욘카라히사르(Afyonkarahisar)와 콘야(Konya)의 중간쯤에 있다. 다른 하나는 수리디아 안디옥으로 지금의 안타키야이다.

   이곳은 기원전 2,000년경까지 시리아의 아무트 왕국이 통치하였다. 기원전 17세기경에는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았는데, 히타이트가 망한 뒤에는 앗시리아와 페르시아가 다스렸다. 기원전 333년 이 곳에 왔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물맛에 감동하여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무장(武將)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Seleukos I Nikator, B.C. 304~280 재위)가 이곳을 지배하였다. 그는 이곳에 안티오키아 왕국을 건설하고, 안타키아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 안티오코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안티오케이아로 명명하였다. 이곳은 물이 풍부한 다프네(하르비예)에 가깝고, 오론테스(Orontes, 아시) 강을 끼고 있어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소왕국의 난립과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1세기 중반에 로마에 병합되었다. 그 후 시저에 의해 재건되어 상업, 교육, 문화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안디옥은 예수의 수제자로 로마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베드로가 포교(布敎)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바울 사도와 바나바가 와서 생활하고, 선교 여행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A.D 252~300년에 10여 차례의 기독교 공의회가 열렸다. 이곳은 신약성경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고향이다. 요한 사도의 수제자인 폴리갑도 이곳 출신이다. 그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 감독으로 있다가 순교하였다. 카파도키아에서 중세 수도원 운동을 이끌던 시몬 성인도 이곳 출신이다. 이처럼 이곳은 기독교 포교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으로, 기독교에서 예루살렘, 로마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이다.

   오후 1시 40분경에 도심에서 북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교회에 도착하였다. 이 동굴교회는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지(聖地)로 선포된 곳이다.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에는 세계 각지에서 순례단이 찾아와 미사가 행해진다고 한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는 기독교 발달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라 생각되어 꼭 가보려고 하였던 곳이어서 이곳에 도착하니, 좀 긴장되기도 하고 흥분도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러나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교인들의 박해가 매우 심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던 베드로 사도는 배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그를 따르던 신도 중 일부가 이곳으로 와서 이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 사도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베드로’란 이름은 예수로부터 받은 것인데, 교회의 초석으로 ‘바위’를 뜻하는 말이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바위 안에 세워지고, 그 뒤를 이어 많은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스테반의 순교 이후에 더욱 심해진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 일부 사람들은 페니기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으로 가서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다가 후에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예수를 받아들였다(사도행전 11 : 19).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이곳에 온 바나바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울 사도의 고향 다소(Tarsus)로 가서 바울을 데리고 와 이 교회에서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당시에 예수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을 ‘크리스쳔(Christian)’이라 불렀다(사도행전 11 : 22~26). 이렇게 보면,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다. 그리고 이 교회의 신도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진 사람들이다.

   나는 조금 긴장되고 흥분된 마음으로 교회를 살폈다. 교회는 하비브 낫자르산 기슭의 큰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 안에 있었다. 교회 안은 100㎡ 쯤 되어 보이는 직사각형의 방인데, 전면의 중앙에는 돌로 쌓은 단이 있고, 그 가운데에 돌로 된 제단이 있다. 제단 앞의 벽 위쪽에는 천국의 열쇠와 두루마리 성서를 든 베드로 사도의 상이 있다. 제단 오른 쪽에는 병을 낫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하는 약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성수(聖水)라고 한다. 제단 왼쪽에는 도피처로 사용하였던 터널이 있다. 지금 있는 석조 제단은 12~13세기의 것이고, 모자이크 바닥은 4~5세기 것이라고 한다. 나는 교회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성수를 한 모금 마시면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건한 생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 때 서양 사람으로 보이는 남녀 30여 명이 들어와 둘러서자 안내자가 이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설명이 끝나자 일행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무어라고 하니, 모두 손을 잡고 찬송을 하였다. 찬송이 끝나자 그 사람이 대표로 기도하였다. 일행 모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는데,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진지하고 경건하였다. 기도가 끝난 뒤에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이탈리아에서 성지순례를 왔다고 하였다.

   동굴교회에서 나와 왼쪽 산 능선을 따라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우뚝우뚝 솟은 큰 바위가 여럿 있다. 거기에 베드로와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데, 크게 파손되어 있어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 위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저승의 강’의 사공인 ‘키론의 상(像)’이라고 한다. 이 상(像)은 기원전 2세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코스 4세 때에 역병(疫病)을 가라앉히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훼손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었다. 키론의 상 옆에 자연동굴이 하나 있는데, 전에 교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곳을 보니, 카파도키아에 있는 지하 동굴교회가 떠올랐다.

   다시 성 베드로 동굴교회 앞으로 온 나는 교회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세운 세계 최초의 교회, ‘크리스쳔’이라는 말이 처음 생긴 교회를 와 보았다는 감격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기념품 가게로 가서 3리라(한화 2,300원 정도)를 주고 성 베드로 동굴교회 사진을 넣고 구워 만든 도자기판 하나를 샀다. 손바닥 반 정토 크기의 이 도자기는 장식용으로 장식장에 넣어 두든지, 서진(書鎭, 책장이나 종이쪽이 바람에 날리지 아니하도록 눌러두는 물건)으로 쓰면서 이곳에 왔던 일을 오래오래 기억해야겠다.  <성동문단 제11호(성동문인협회, 20011>에도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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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을 아쉬운 마음으로 보내고, 희망과 기대 속에 2009년을 맞이하였다.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햇수를 세었는데, 12간지(干支)에 열두 동물을 배치시켜 그 해를 그 동물의 특성과 관련지어 생각해 왔다. 이에 따르면 2008년은 무자년(戊子年)으로 쥐해이고, 2009년은 기축년(己丑年)으로 소해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구려 유리왕 조를 보면, 3~4세기 경에 쟁기를 만들어 논밭을 갈고, 수레를 만들어 탔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지증왕 조에는 소를 농사에 이용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소는 2000여 년 전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 생활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소에 대한 의식이 어떠하였는가를 생각하면서, 소해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소는 첫째,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참고 견디며 자기의 있는 힘을 다하여 일한다. <소가 된 게으름쟁이> 이야기를 보면, 일하기 싫어하는 젊은이에게 소머리 탈을 씌우자 소가 되었다. 그는 소가 되어 쉴 새 없이 일을 하다가 먹으면 죽는다고 한 무를 먹었더니, 다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부지런히 일을 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소는 게으른 사람을 깨우쳐 부지런한 사람이 되게 한다. 우리 속담에는 ‘종은 믿고 살지 못해도 소는 믿고 산다.’, ‘아내에게 한 말은 나도 소에게 한 말은 안 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소의 변함없는 마음과 성실성을 말해 주는 말이다.
   
  둘째, 소는 충직하고 의리가 있다. 경북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 문수마을에 전해 오는 「의우총(義牛塚) 전설」을 보면, 김기년이라는 농부가 산 밑에 있는 밭에서 일을 하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소를 물려고 하였다. 그가 소를 구하기 위해 작대기를 들고 호랑이한테 덤비니, 호랑이는 소를 놔두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을 본 소가 호랑이와 싸워 물리치고, 주인을 구하였다. 그는 호랑이한테 물린 상처 때문에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 소는 주인이 살았을 때에는 전과 다름없이 일을 하였는데, 주인이 죽자 무덤 옆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 소를 아버지의 무덤 옆에 묻었다고 한다. 서기 1630년에 선산 부사로 부임한 조찬한(趙纘韓)은 이 이야기를 듣고 「의우기(義牛記)」를 짓고, 화공을 시켜 8폭의 ‘의우도(義牛圖)」를 그리게 하여 지금까지 전해 온다. 구미 지역에는 ‘먼 곳으로 팔려간 소가 자기를 길러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집으로 달려와 울부짖다가 뒤따라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이것은 소가 충직하고 의리가 있음을 말해 준다.

  셋째, 소는 자기의 모든 것을 주는 희생적인 삶을 산다. 소는 살았을 때에는 사람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젖을 주고, 죽어서는 고기와 뼈와 가죽을 유용하게 이용하게 해 준다.

  넷째, 소는 부의 징표(徵表)가 된다. 소는 경제적 가치가 매우 높았으므로 소를 기르는 일은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되었고, 부의 척도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사람들은 소가 살았을 때에는 생구(生口)라 하여 가족처럼 대하였다. 죽은 뒤에는 소고기를 최고의 식품으로 여겼다. 그래서 일상의 식생활에서는 최고의 손님을 접대할 때 쓰고, 의례에서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썼다.

  2008년은 쥐해였다. 쥐는 아주 부지런하고, 먹을 것을 깊은 곳에 저장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또 땅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차리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쥐해를 맞이할 때 쥐처럼 부지런히 일하면서 저축하고, 앞일을 예견하여 대비하며 한 해를 살 것을 결심하고 다짐하였다. 우리는 연초의 다짐대로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하며 저축하는 생활하였다. 그러나 앞일을 예견하고, 이에 맞는 대응책을 세우는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미국에서 시작한 경제위기에 발목이 잡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의 경제위기가 세계로 퍼질 것을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 위기는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위기는 좌절이나 파멸의 늪에 빠지는 계기가 되기도 되지만, 잘 극복하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위기 극복의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이기지 못할 시련은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

  새해에는 소처럼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마을을 가지고 살면서 인연을 맺은 사람과 의리를 지키는 생활을 해야겠다. 이렇게 생활하면 새해에는 반드시 어려움을 극복하고,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홍성신문 2009. 1. 5.>에 실려 있음.



  2007년은 정해년(丁亥年)으로, 돼지의 해이다. 동양에서는 12지(支)에 동물의 이름을 하나씩 붙여 쓰기도 한다. 이 동물들은 각기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동물의 특성으로 그 해나 그 달, 그 날의 운수를 판단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돼지는 오래 전부터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고, 도읍지를 정해 주거나 왕자를 낳을 여인을 만나게 해 주는 신이한 능력을 가진 동물로 신성시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다음의 두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구려 유리왕 때 하늘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기르던 돼지[郊豕]가 달아났는데, 그 돼지를 찾으러 갔다가 도읍지로 적합한 곳을 발견하고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때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바칠 돼지가 달아났는데, 한 처녀가 그 돼지를 붙잡아 주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미복(微服) 차림으로 그 여자를 찾아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산상왕의 뒤를 이은 동천왕(東川王)이라고 한다.

  돼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비범한 인물인 최치원(崔致遠)을 잉태하게 한<금돼지>, 머슴살이하는 총각을 장가들게 하였다는 <머슴을 장가보낸 돼지>, 돼지꿈을 꾸었다고 거짓말하는 젊은이의 꿈을 해몽해 준 <돼지꿈의 해몽> 등 많이 있다.
 
  돼지는 오늘날에도 무당들의 굿상이나 동제(洞祭)의 제사상, 각종 고사(告祀)의 제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물이다. 전에는 통돼지를 제물로 바쳤으나, 요즈음에는 머리만 바치기도 한다. 제상에 올려놓는 돼지는 웃는 모습이어야 좋다고 하여 입을 벌리고 죽은 것을 골라 올려놓는다. 요즈음에는 제상(祭床)에 놓은 돼지머리의 입에 돈을 끼우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돼지는 잘 먹고 잘 자라며, 한꺼번에 8마리 안팎의 새끼를 낳아 기른다. 그래서 각 가정에서는 돼지를 길러 살림을 일으키는 밑천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돼지는 복스러운 동물, 다산(多産)의 동물로 매우 소중하게 여겨 왔다. 돼지는 한자로 ‘돈(豚)’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말의 ‘돈[金]과 음이 같다. 그래서 돼지를 재물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각 가정에서는 돼지 모양의 저금통을 마련해 놓고, 수시로 돈을 넣어 저금한다.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들을 낮춰서 말할 때 ‘돈아(豚兒)’라고 하였다. 수명이 짧은 집 아이의 이름을 ‘돼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은 돼지가 복스러운 동물로 살림의 밑천이 된다는 의식, 돼지같이 잘 먹고 잘 자라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한국인은 꿈에 돼지를 보면 복이 온다거나 음식을 얻는다고 하고, 돼지를 잡으면 아주 좋다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에도 돼지꿈을 꾼 뒤에 복권을 사거나 경마장을 찾는다고 한다. 윷놀이를 할 때에 도가 나오면 한 밭밖에 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처음에 도가 나오면 ‘살림 밑천’이라고 하면서 ‘개’나 ‘걸’이 나온 것보다 좋아한다. 돼지혈[豚穴]에 묘(墓)를 쓰면 후손이 발복하여 부자가 된다고 한다. 이것 역시 돼지는 복스럽고, 재수가 좋은 동물이라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돼지[亥]에 해당하는 방위와 시각․날․달․해를 보면, 해방(亥方)은 24방위 중 북서북(北西北)이다. 해시(亥時)는 오후 9~11시이고, 해일(亥日)은 일진(日辰)이 돼지에 해당하는 날이다. 해월(亥月)은 월건(月建)이 돼지로 된 달 곧 10월이다. 해년(亥年)은 60갑자 중에서 해(亥)가 든 해이다. 해(亥)가 들어가는 해는 을해(乙亥), 정해(丁亥), 기해(己亥), 신해(辛亥), 계해(癸亥)로 12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온다.

  돼지해에 태어난 사람을 돼지띠라고 하는데, 돼지띠는 일반적으로 음력 1월 1일부터 12월 말일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주(四柱) 명리학(命理學)에서는 절기력으로 한 해를 구분하여 그 해 입춘 시각부터 그 다음 입춘 전 시각 사이에 태어난 사람을 돼지띠라고 한다. 
돼지띠는 복이 많아 부자가 되어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믿는다. 돼지띠는 대체적으로 성정이 진솔한데, 남성은 일단 목표를 정하면 그 일을 꾸준히 밀고 나가므로 성공 확률이 높고, 여성은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철저하게 수행하면서도 자상한 엄마로서 가정에도 충실하다고 한다. 이것은 돼지에 대한 여러 의식이 결집된 것이라 하겠다.

  정해년(丁亥年)의 정(丁)은 오행으로 보아 불인데, 불은 붉은 색이다. 그러므로 2007년 정해년은 ‘붉은 돼지해’라고 할 수 있다. 붉은 색은 활활 타는 불꽃의 색으로 귀신이 싫어하는 색이다. 그래서 붉은 색은 축귀(逐鬼), 축사(逐邪)의 뜻을 지니고 있어서 재수가 있는 색, 재물 운이 따르는 색으로 여긴다. 붉은 색에 대한 이런 의식은 중국인도 매우 강하다. 이렇게 볼 때 돼지해인 2007년은 재운(財運)이 따르는 복된 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꿈과 기대를 안고 새해를 맞이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요즈음 일부 역술인이 2007년을 ‘600년에 한 번 오는 황금 돼지해’라고 하고, 일부 상인들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 이를 일부 언론이 여과 없이 보도함에 따라 2007년에 출산을 하겠다고 서두르며, 유아용품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정해년은 ‘붉은 돼지해’이지 ‘황(금)색 돼지해’가 아니다. 황색 돼지해는 황색을 뜻하는 토(土)가 들어간 기해년(己亥年)이어야 한다. 2007년은 ‘600년에 한 번 오는 황금 돼지해’라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이런 말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홍성신문> 제1008호, 2007. 1. 1.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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