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례(喪葬禮)는 사람의 죽음을 맞아, 주검[屍]을 절차에 맞게 처리하고, 근친(近親)들이 슬픔으로 근신(謹愼)하는 기간의 의식 절차를 정한 예절이다. 상장례는 한국인의 생사관(生死觀)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상장례의 절차는 대개 다음의 네 단계로 진행된다.

        초종(初終)
 
  부모의 병이 위독하여 운명할 기미가 보이면, 부모가 쓰던 방으로 모시고 집 안팎을 조용하게 하고, 부모의 손을 잡고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보는데, 이를 임종(臨終)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임종을 못 보는 것을 큰 불효로 여긴다. 임종할 방으로 모신 부모는 동쪽으로 머리를 두게 하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힌다. 혹 유언이 있으면, 이를 머리맡에 앉아 받아 적는다. 마지막 숨이 단절되는 것을 분명히 알기 위해 솜을 입 위에 놓고 숨이 그치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는데, 이를 속광(屬 )이라고 한다. 사망이 확인되면, 모여 앉았던 자손들이 애곡벽용(哀哭 踊, 소리를 질러 비통하게 곡을 하고 가슴을 치며 발을 구름.)한다.
 
  임종 직후에는 밖에 나가서 떠나는 영혼을 부르는 초혼(招魂)을 한다. {예서(禮書)}에는 "죽은 사람의 웃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옷깃을,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 북쪽을 향해 흔들면서, 남자는 관직명이나 자(字)를, 여자는 이름을 부른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죽은 사람의 와이셔츠나 속적삼을 들고 마당에 서서 지붕을 보고, "서울특별시 ㅇㅇ구 ㅇㅇ동 ㅇㅇㅇ번지 ㅇㅇㅇ(亡人의 이름) 복 복 복!" 하고 부른다. 그 옷은 지붕 위에 얹어 두었다가 나중에 내려서 시체의 가슴 위에 얹는다. 이를 초혼(招魂) 또는 고복(皐復)이라고 한다.
 
  육체를 벗어나 떠나가는 영혼을 불러 재생시키려는 초혼 의례는 영육(靈肉) 분리(分離)의 이원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떠나는 영혼을 붙잡기 위해서는 그 영혼과 일생을 같이 한 육신이 나가서 불러야 하겠지만, 그럴 수 없으므로 그 사람이 입었던 옷, 그 중에서도 가슴에 직접 닿았던 속적삼을 들고서 가지 말라고 부른다. 이것은 망인(亡人)의 몸에 닿았던 옷은 일정 기간 망인과 영적(靈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믿는 전염주술(傳染呪術)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육신을 벗어난 영혼은 저승사자의 호송을 받아 저승으로 간다고 한다. 그래서 망인의 영혼을 저승까지 데리고 갈 저승사자에게 인정을 쓰는 뜻에서 사자상(使者床)을 차려 후히 대접한다. 사자상은 저승사자가 세 명이라는 생각에서 밥 세 그릇과 반찬, 돈, 짚신 세 켤레 등을 멍석이나 푼주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상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이 때, 상주들은 재배하고 곡을 한다. 사자상은 {예서}에 없는 일이라 하여 하지 않는 집도 있었으나, 하는 집이 더 많았다. 요즈음에도 상장례를 장례예식장에서 하거나, 교회식으로 하지 않는 집에서는 대개 하고 있다.
 
  초혼과 사자상 차리기가 끝나면, 시신이 굳기 전에 반듯이 놓고 간단하게 묶어 놓는데, 이를 수시(收屍), 또는 소렴(小殮)이라 한다. 수시는 나무토막 또는 베개처럼 묶은 짚 뭉치 세 개 위에 칠성판을 놓은 다음, 그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두 손을 배 위로 모아 흉사(凶事) 때에 공수(拱手)하는 것처럼 포개고, 허리까지 묶는다. 그리고 다리를 곧게 하여 엄지발가락을 끈 또는 붕대나 백지로 매고, 시체의 몇 곳을 묶는다. 그런 다음에 홑이불을 덮고, 그 앞에 병풍을 쳐 놓는다.
 
  병풍 앞에 상을 놓고, 혼백을 만들어 놓는다. 혼백은 백지를 접어 5색실로 묶어 상자에 넣어 만들었으나, 요즈음에는 망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혼백이나 사진 앞에는 주과포혜(酒果脯醯)를 차려 놓고, 향불을 피운다.
 
  친족들은 일을 분담하여 장례 준비를 하는 한편, 상사(喪事)를 여러 사람에게 알린다. 가까운 친척에게는 직접 사람을 보내 알리나,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구에게는 부고장을 보냈다. 요즈음에는 전화나 전보를 이용하여 알리고, 신문에 게재하여 알리기도 한다.
 
  그 다음에 습렴(襲殮)을 한다. 습(襲)은 시체를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 입히는 것이고, 소렴(小殮)은 시체를 임시로 묶는 것이고, 대렴(大殮)은 시체를 단단히 묶고 관에 넣는 것이다. 전에는 운명한 날에 습하고, 그 다음날에 소렴, 그 다음날에 대렴을 하기도 하였으나, 요즈음에는 이를 한 번에 하는데, 이를 '습렴한다' 또는 약하여 '염한다'고 한다.
 
  염할 때, 전에는 미지근한 물에 향나무를 깎아 넣은 향수(香水)로 전신을 씻겼다. 그러나 근래에는 향수를 솜에다 찍어서 시체를 씻기거나, 알코올을 묻힌 솜으로 얼굴 손등 발등을 문지르는 정도로 그치기도 한다. 그리고 머리를 빗기고, 손톱 발톱을 깎는다. 깎은 손톱 발톱과 머리카락은 베헝겊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에 넣는데, 이 주머니를 조발낭(爪髮囊)이라고 한다. 조발낭은 대개 5개를 만들어 1개에는 머리카락을, 나머지 4개에는 좌우 손가락·발가락에서 자른 손톱과 발톱을 각각 1개씩 넣어 습의(襲衣) 소매나 버선 등에 넣거나, 관 귀퉁이에 넣는다. 이것은 죽은 사람의 몸의 일부였던 머리카락이나 손톱·발톱을 시신과 함께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과 이것을 함부로 다루면 죽은 사람이나 그 가족에게 큰 화가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 역시 전염주술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 다음에 수의(壽衣)를 입힌다. 전에는 소렴에 입히는 염의(殮衣)가 따로 있었으나, 요즈음에는 염의를 쓰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수의로는 남자의 경우, 적삼·고의·두루마기·도포를 입히고, 버선을 신기고, 행전과 대님을 친다. 손에는 주머니 모양의 악수(幄手)를 끼고, 얼굴에는 면건(面巾)을 덮는다. 옷을 입힐 때에는 모두 포개어 한 번에 입히는데, 이불을 덮고 홑이불의 네 귀를 사방에서 잡아서 시신이 보이지 않도록 한다. 
  습이 끝나면 반함(飯含)이라 하여 물에 불린 쌀을 버드나무 수저로 세 번 입에 떠 넣는다. 쌀을 넣을 때에는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가운데에 모두 세 번을 넣는데, 첫 번 숟가락을 넣으면서 '백 석이요.' 하고, 그 다음에는 '천 석이요.', '만 석이요.' 한다. 다음에는 동전이나 주옥(珠玉)을 입에 물리기도 한다. 이것은 저승에 가서 먹고 쓸 양식과 용돈이라고 한다.
  반함할 때 버드나무 수저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간에는 생생력(生生力)을 지녔다고 생각되는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는 의식이 있었다. 버드나무는 물가에서 살고, 이른봄에 싹이 돋으며, 번식력이 강하여 매우 잘 자라므로 신성시하였다. 이런 버드나무로 수저를 만들어 반함하는 것은 죽은 사람이 저 세상에 가서 재생하여 잘 살라는 뜻에서일 것이다.   
 
  반함에 이어 교포(絞布, 시체를 묶는 베)로 시체를 묶는다. 묶을 때에는 세로로 묶은 위에 가로로 묶는다. 가로의 매수는 시체의 크기에 따라 다섯 매 또는 일곱 매로 묶는데, 매듭을 짓지 않고 틀어서 끼운다.
  그 다음에 입관(入棺)을 한다. 어깨나 허리 다리 등이 있는 빈 곳은 짚이나 종이 또는 헌 옷으로 채우는데, 이를 보공(補空)이라 한다. 보공하여 시체가 흔들리지 않게 한 뒤, 그 위에 다른 홑이불인 천금(天衾)을 덮고 관 뚜껑을 덮은 다음, 나무못을 친다. 입관하면 다시는 망인을 볼 수 없으므로, 자녀들은 슬피 운다. 혹 멀리 나가 돌아오지 않은 자녀가 있을 때에는 망인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볼 수 있도록 입관을 늦추기도 한다.
 
  입관이 끝나면, 널 위에 남자는 '某官(無官이면 學生)ㅇㅇㅇ公ㅇㅇ之柩'라 쓰고, 여자는 '某封(無封이면 孺人) ㅇㅇㅇ氏ㅇㅇ之柩'라 쓴다. 그리고 짚과 종이를 섞어서 외로 꼰 밧줄로 관을 묶는다.
 
  입관이 끝나면 복인(服人)들은 상복(喪服)을 입고, 2m 정도로 자른 빨간 천 온 폭에 흰 분가루를 접착제에 개어 붓으로 널에 쓴 것과 같이 쓴 명정(銘旌)을 영좌(靈座) 오른쪽에 걸쳐놓고, 제수를 차린 다음, 성복제(成服祭)를 지낸다. 기독교식으로 하는 가정에서는 입관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정식으로 조객을 맞이한다.
 
  조객의 경우, 전에는 자기 집을 떠나 상가에 오기까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예의로 생각하였으나, 요즈음에는 이러한 생각이 많이 약화되었다. 전에는 조객이 영좌 앞에 분향(焚香)하고, 곡(哭)을 한 다음 재배하고, 상주에게 절하면서 "상사 말씀 무른 말씁입니까." 또는, "갑자기 변고를 당하여 망극하십니다." 하고 조의를 표하면, 상주는 곡하면서 맞절을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상주도, 조객도 곡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치장(治葬)

  주검(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에는 시신을 땅 위에 버리는 풍장(風葬), 땅 속에 묻거나 돌 등으로 덮는 매장(埋葬), 불에 태우는 화장(火葬), 물 속에 버리는 수장(水葬) 등의 방법이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대개 매장을 하고, 일부에서 화장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가장 많이 행해지고 있는 매장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전에는 장기(葬期)와 장일(葬日)이 사회 계층에 따라 달랐으나, 요즈음에는 3일장 (또는  5일장)이 일반적이다. 장일(葬日)이 되면 장지(葬地)를 선정하여 매장한다. 장지 선정은 대개 지관(地官)에게 부탁하고, 지관은 풍수설(風水說)에 맞추어 좋은 자리를 고른다. 풍수설에 따르면,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생기(生氣)가 지맥(地脈)을 따라 흐르다가 멈추는 곳이 좋은 자리 즉 명당(明堂)인데, 그 곳에 죽은 사람을 매장하면, 생기가 망인의 뼈에 작용하여 자손이 발복(發福)한다고 한다.

    장지가 선정되면 산역(山役)을 하는데,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장지 위쪽에서 북쪽을 향해 제물을 차리고 산신제(山神祭)를 지낸다. 산역은 먼저 묘역(墓域) 주변을 표시하고, 그 중앙에 외광(外壙)과 내광(內壙)을 판다. 외광은 너비 2m에 길이 3m 정도, 깊이 1m 이상을 판다. 내광은 외광의 중앙에 너비 50cm에 길이는 망인의 키보다 20cm 정도 길게, 깊이는 50cm 정도 파고 곱게 다듬는다.

    집에서 장지로 떠나기에 앞서 발인제(發靷祭)를 지낸다. 기독교식으로 하는 가정에서는 발인 예배를 드린다. 지방에 따라 행상 도중에 상여(또는 영구차)를 세워 놓고 노전제(路奠祭)를 지내기도 한다.

  장지에 도착하면 하관(下棺) 시간에 맞춰 시신을 광내(壙內)에 모신다. 명정을 걷고, 관묶음을 풀고, 관까지 매장할 때에는 들 끈으로 관을 들고, 관을 벗길 때에는 뚜껑을 열고 시신만을 들 끈으로 들어 내광에 반듯하게 모신다. 광중(壙中) 안의 빈 곳을 흙으로 채우고, 횡대(橫帶)로 덮는다. 주상(主喪)이 청색 홍색의 천을 횡대 위에 올려 드리면, 시신의 가슴 부위에 청색 폐백을, 다리 부위에 홍색 폐백을 횡대를 들고 얹는다.

  그 다음 고운 흙으로 외광을 채우고, 시신의 발치에 지석(誌石)을 놓고 흙으로 덮는다. 기독교식으로 하는 가정에서는 하관 예배를 드린다.

    광내가 메워지면 평토제(平土祭)를 지낸다. 지방에 따라서는 봉분(封墳)을 만든 뒤 평토제를 지내기도 한다. 평토제를 지내고 나서 상주는 혼백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다.

                  흉제(凶祭)

  치장이 끝난 뒤 길제(吉祭)까지의 제사를 흉제라고 한다. 시체를 매장하고, 신주(神主)나 혼백만을 모시고 지내는 첫제사로 반혼제(返魂祭)를 지내는데, 초우제(初虞祭)를 겸하기도 한다. 우제(虞祭)는 시체를 보내고 영혼을 맞이하여 지내는 제사인데, 초우제(初虞祭), 재우제(再虞祭), 삼우제(三虞祭)가 있다. 초우제는 장일(葬日)에 집에 돌아와 지내는 제사인데, 전에는 장지가 멀어서 당일 영좌(靈座)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면 주막에서라도 지냈다. 재우제는 초우제를 지낸 뒤 처음 맞는 유일(柔日, 일진에 乙 丁 己 辛 癸가 드는 날)에 지낸다. 삼우제는 재우제 뒤의 첫 강일(剛日, 일진에 甲 丙 戊 庚 壬이 드는 날)에 지낸다.

  초상 후 3개월이 지난 다음에 맞는 강일을 택하여 아침에 졸곡제(卒哭祭)를 지낸다. 초상 1주년이 되는 날 올리는 제사를 소상(小喪)이라 한다. 2주년이 되는 날을 대상(大祥)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고, 탈상(脫喪)한다. 대상 후 100일 되는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조상의 신주를 고쳐 쓰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길제(吉祭)라 한다.

  위에 적은 것이 상장례의 대강인데, 이것은 지방에 따라, 씨족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상장례는 좀 까다로운 편인데, 이것은 모두 망인을 보내는 지극한 정성과 효심, 민간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상례가 오늘날에는 변하여 그 절차와 복식(服飾), 행사(行祀) 등이 많이 간소해지고, 상기(喪期)도 크게 단축되었다. 사회의 변화와 함께 상례가 간소해지고, 축소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에 따라 고인을 애도하는 마음과 정성·효심마저도 간소해지고 작아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한국민속촌에 가면 초가집 앞 가늘게 높이 자란 소나무에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다.'는 뜻의 한자어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쓴 천이 걸려 있고, 그 위에 가로로 묶은 막대기에 오쟁이, 바람개비, 남자 성기 모양의 나무, 수수 이삭, 곡식을 넣은 주머니 등이 매달려 있다. 그 앞에 적어 놓은 설명문에는 풍농( 農)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 볏가릿대[禾竿]라고 적혀 있다. 이곳을 지나는 관람객 중에는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유심히 살펴보고, 설명문을 읽어본 뒤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고, 안내자나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게 무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외국인 중에는 이를 아주 신기하게 여겨 안내자에게 설명을 부탁하기도 한다. 


  볏가릿대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이나 보름날에 세웠다가 음력 2월 초하룻날 내린다. 2월 초하루는 '머슴날'이라 하여 농사가 시작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바탕 놀 수 있는 농부들의 명절이다. 볏가릿대는 농가에서 개인적으로 세우기도 하지만,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워 풍농을 기원한다. 볏가릿대 세우기는 충청남도 서산·당진·태안 지역을 비롯한 충청 서북 지역과 전라도 진도·해남 일부 지역, 그리고 경상도 일부 지역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 널리 행하여 졌으나, 일제 시대부터 급속히 소멸되어 요즈음에는 일부 지방에서만 행해지고 있다. 볏가릿대의 형태는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충남 서산의 볏가릿대

  충남 서산 지방에는 요즈음에도 볏가릿대를 세우는 마을이 여럿 있다. 그 중 2002년 음력 정월 대보름(양력 2월 26일)에 세웠다가 음력 2월 초하룻날(양력 3월 14일)에 철거한 서산시 지곡면 장현 2리의 볏가릿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회관 옆의 밭가에 볏가릿대를 세웠다. 볏가릿대는 긴 대나무로 장대를 만들고, 장대 끝에 두 줌 정도의 수수목을 묶고, 그 아래에 벼·팥·조·수수 등의 곡식을 백지로 싸서 묶었다. 그리고 그 아래 부분에 짚으로 꼰 동아줄 세 가닥을 묶은 뒤에 장대를 세우고, 동아줄 세 가닥을 잡아당겨 땅에 박은 말뚝에 묶어 고정하였다. 
  볏가릿대는 음력 2월 1일에 내렸다. 이날 정오 무렵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회관 앞에 모여 한바탕 풍물놀이를 한 뒤에 볏가릿대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제물은 볏가릿대 앞에 자리를 깔고 상 두 개를 놓은 뒤에 한 상에는 돼지머리와 사과·배·귤·과줄·약과·두부 등을 진설하고, 다른 한 상에는 쌀과 팥을 넣어 찐 떡시루와 촛대를 올려놓았다. 제물 진설이 끝나자 도포를 입고 두건을 쓴 3명의 제관(祭官)이 차례로 술잔을 부어 올리고 절을 한 뒤에 역시 도포를 입고 두건을 쓴 축관(祝官)이 풍농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을 읽은 뒤에 축문을 불에 태웠다. 제관들이 음복(飮福)을 하고 옆으로 비켜서자,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만 원 짜리 지폐를 한 장 또는 두세 장씩을 돼지 입에 끼운 다음 절을 하였다.   
  제사를 마치고 땅에 고정했던 동아줄을 풀어 볏가릿대를 눕혔다. 볏가릿대를 고정하였던 동아줄은 서려서 짚으로 만든 섬에 넣었다. 종이에 싼 곡식을 차례로 풀어 싹이 텄는가를 본 뒤에 다시 싸서 동아줄을 서려 넣은 섬 안에 넣었다. 곡식의 싹이 텄으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그리고 곡식이 가득 든 섬을 묶듯이 새끼줄로 묶었다. 그 섬을 한 사람이 지게에 얹어 짊어지고 앞을 서니, 제복을 입은 제관들이 그 뒤를 따르고, 그 뒤에 풍물패가 풍물을 울리며 따라갔다. 그 뒤에 마을 사람들이 줄을 지어 따랐다. 섬을 진 사람은 자기 집으로 가서 곳간에 섬을 내려놓았다. 뒤따라온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축하의 말을 하고 마을회관으로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푸짐하게 차린 음식과 술을 나눠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볏가릿대 세우기는 농사철이 되기 전에 미리 농사 짓는 것을 가장하여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의례(農耕儀禮)로, 가농작(假農作) 또는 내농작(內農作)이라고도 한다. 서산 지방에서 볏가릿대에 매달았던 곡식 봉지를 섬에 넣어 지고 가서 곳간에 둔 것은 곡식을 추수한 것을 의미한다. 제사의 규모나 절차를 보면, 볏가릿대를 세울 때에는 간단히 제를 올리지만, 볏가릿대를 내릴 때에는 먼저보다 규모가 큰 제사를 올린다. 이것은 곡식을 추수한 뒤에 추수 감사의 뜻으로 큰 규모의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주술적인 힘을 지닌 볏가릿대 

  볏가릿대를 세워 풍농을 기원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볏가릿대의 상징적인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하늘로 곧게 선 장대는 신목(神木)으로, 천상의 신이 지상을 오르내리는 통로(通路)의 의미를 지닌다. 볏가릿대는 대나무나 소나무를 사용하는데, 대나무는 휘어지지 않고 곧게 뻗어 올라가므로 마을의 운수가 대나무와 같이 곧게 뻗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용한다고 한다. 소나무는 솔잎처럼 푸르고 곧은 절개를 닮으라는 의미에서 사용한다고 한다. 짚은 땅에서 자란 다산(多産)의 식물로, 우리의 주식(主食)이 되는 벼를 타작하고 남은 줄기여서 신성(神聖)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짚이 쭉쭉 뻗치도록 꼰 동아줄 세 가닥 역시 신성의 의미를 지닌다.
 
  신이 오르내리는 통로로 신성의 의미를 지닌 장대에 벼, 수수, 조, 팥 등을 백지에 싸서 매다는 것은 그와 같은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원하는 모방주술(模倣呪術)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모방주술 심리에서 보면, 생생력(生生力, 또는 생산력)을 지닌 최고의 존재인 달이 새해 들어 처음 뜨는 정월 대보름날 볏가릿대를 세워 풍년을 기원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정월 대보름에 볏가릿대를 세우는 것이다.

  용인 민속촌에 세운 볏가릿대에 매달은 짚으로 만든 오쟁이나 수수 이삭, 곡식을 넣은 주머니 등은 곡식 농사가 잘 되기를 비는 뜻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바람개비나 남자 성기 모양의 나무를 매단 것은 무슨 의미일까? 바람개비는 바람을 조절하여 제 때에 비가 내리고, 햇볕이 쬐기를 비는 뜻을 담은 것이고, 남자의 성기는 생산력을 지닌 성기처럼 농작물이 번성하고 열매를 맺어 풍년이 들기를 비는 마음에서 매달은 것이라 하겠다. 이런 것을 매다는 것 역시 이들이 주술적인 힘을 발휘하여 풍년이 들게 할 것이라고 믿는 심리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볏가릿대는 풍농을 기원하는 농경의례이므로, 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어떤 마을에서는 우물가에 볏가릿대를 세운다. 마을회관 옆에 볏가릿대를 세운 서산시 지곡면 장현 2리에서는 2월 초하룻날 제사를 지내기 직전에 맑은 물을 그릇에 담아놓고 풍물을 울리면서 "뚫어라, 뚫어라! 물구녕만 뚫어라!" 하고 고사소리를 하였다. 이것은 일 년 내내 물 걱정 없이 농사 지을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볏가릿대에 대한 기원

  조선 후기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시골 민가에서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들고, 그 안에 벼·기장·피·조의 이삭을 넣어서 싸고, 또 장대 위에 매달아 집 곁에 세우고, 새끼를 내려뜨려 고정시킨다. 이것을 화적(禾積, 볏가리 또는 낟가리)이라 하는데, 풍년을 비는 것이다. 아이들이 새벽에 일어나 이 화적을 둘러싸고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면서 풍년이 들라는 기원을 하다가 해가 뜨면 그만 둔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볏가릿대를 세우는 풍속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조선 후기에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동국세시기}에는 "대궐 안에서 경작(耕作)하고 수확하는 모양을 본떠서 좌우로 편을 갈라 승부를 겨루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도 풍년을 비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것 역시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에 농사짓는 일을 흉내내어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농경의례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9년 조에 "민간에서 매년 상원(정월 대보름)에 농잠상(農蠶狀)을 만들어 놓고, 풍년의 징조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풍농을 기원하는  가농작(假農作)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뒤에 농사를 권장하는 정책에 따라 궁중의 의식이 되어 매우 다양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런 궁중의 의식은 그 폐해가 노출되어 뒤에 없어졌지만, 민간으로 전파되어 전국적으로 행하여 졌을 것이다. 그래서 {동국세시기}와 {경도잡지(京都雜志)}와 같은 문헌에 기록되고, 단원 김홍도의 [경직도(耕織圖)]에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풍속이 일본에도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볏가릿대가 일본에 영향을 끼친 것이라 하겠다. 

  새 해 들어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에 농사의 핵심 절차를 미리 행하여 풍농을 기원하는 농경의례인 볏가릿대 세우기는, 비슷한 행위를 하면 그와 비슷한 결과가 온다고 믿는 모방 주술 원리를 바탕에 깔고 행하여지는 민속이다. 이것은 주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풍농을 기원하는 농사꾼의 간절한 마음은 확인할 수 있다. 농사꾼들은 풍농을 기원하는 볏가릿대 세우기를 통하여 마을 사람들끼리 지연(地緣) 공동체의 의식을 다지고, 따뜻한 정을 나누면서 새해 농사에 전념할 것을 다짐하곤 하였다. 그러고 보면, 볏가릿대 세우기는 농촌 사람들의 축제의 한 마당이라 하겠다

  성기신앙에는 모형 성기를 바치는 성기봉납(性器奉納) 신앙, 성기 모양의 바위를 신체(神體)로 받들어 모시는 성기암(性器岩) 신앙, 성행위 모방 신앙 등이 있다. 성기봉납 신앙은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성기암 신앙과 성행위 모방 신앙을 살펴보고, 다른 나라의 성기신앙을 살펴본 뒤에 성기신앙의 유래와 의미를 알아 보려고 한다.   

            풍요와 기자의 대상이 되는 성기암(性器岩)

  민간에서는 성기 모양의 바위는 마을에 풍년을 가져다주고, 아들 못 낳는 여인에게 아들을 낳게 해 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는 성기암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제의를 올리거나, 개인적으로 아들 낳기를 빈다.

  서울 서대문구 인왕산 맞은편의 안산에는 남근석인 '까진바위'가 있다. 까진바위는 안산의 등줄기에 위치해서 이화여대 쪽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높이가 2미터 가량 된다. 이 바위에 아들 낳기를 비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인왕산 국사당 건너편에 높이 10여 미터의 돌출한 화강암이 산중턱에 있다. 이 바위를 '선바위' 또는 '선바위 석부처님'이라고 한다. 이 바위에 아들 낳기를 빌거나, 아이가 잘 자라기를 비는 기도를 드리면 뜻을 이룬다고 한다.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승안리 용추 계곡에 미륵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아들 낳기를 비는 여인과 현대 의학으로 고치기 어려운 병·정신 이상 등을 치유하기 위해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 1동에서 관악사로 올라가는 기슭에 자리잡은 삼막사 뒤쪽의 칠성각 옆에 자연 형태의 남근석과 여근석이 약 2미터 간격으로 있다. 남근석의 높이는 약 1.5미터, 여근석은 약 1.1미터이다. 이 바위를 만지면서 자식의 점지를 빌고, 출산과 일가의 번영, 무병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에도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에는 인근 사람들이 몰려와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가천 마을의 바닷가에 자연적으로 된 '수미륵'과 '암미륵'이 있다. 수미륵은 남자의 성기가 발기한 모양과 비슷하고, 암미륵은 여자가 잉태하여 배가 부른 모양과 비슷하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3일에 미륵제를 지내고 있다.

  전북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원백 마을 앞에는 높이가 약 1.7미터이고, 둘레가 약 88센티미터인 남근석이 있다. 이 바위는 일명 '자지바위'라고도 하는데, 아기를 갖지 못한 여인이 백설기, 과일 등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린 뒤에 주위를 돌면서 바위를 껴안으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외지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남근석 당산에는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 2구 마을 입구에는 길가에 지름 약 1.5미터의 타원형으로 된 암석이 있는데, 위쪽이 움푹 패여 있고, 그 속에 지름 1미터 정도의 달걀 모양 바위가 볼록하게 솟아 있어서 마치 여성의 성기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바위를 '공알바위' 또는 '용암(龍岩)'이라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평안과 풍농(豊農)을 위해 매해 음력 정월 초이틀 자정에 동제를 지낸다.

  이 외에도 성기암 신앙의 예는 전국에 많아서 이루 다 소개할 수 없다.

                  성행위 모방 신앙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안산 마루에는 '말바위'가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한 여자가 두 다리를 벌려 말바위의 엉덩이 부분에 올라타고서 뛰어 머리 부분으로 가서 목을 끌어안는 동작을 세 번 되풀이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이것은 성행위를 모방한 것이라 하겠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창의문 밖 길가에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를 '붙임바위'라고 한다. 애 없는 여인이 기자(祈子)를 위해 조그만 돌을 손에 쥐고 이 바위에 문질러서 그 돌이 바위에 딱 붙으면 잉태하게 된다고 하여 많은 여인들이 이곳에 와서 돌을 문질렀다고 한다. 이것 역시 성행위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마을과 마을 대항으로 줄다리기를 할 때, 지형에 따라 암 마을에서는 암줄을 마련하고, 수 마을에서는 수줄을 준비하여 정해진 장소로 메고 나와서 이를 결합한 뒤에 줄을 당긴다. 이 때 이긴 마을은 풍년이 든다고 한다. 줄다리기의 줄이 용신(龍神)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면, 줄다리기는 암용과 수용의 성적 결합을 통해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행하는 놀이라 하겠다. .           

              외국의 성기신상

  일본에서는 나무나 돌로 커다랗게 만든 성기를 신사(神社)에 봉안하고, 제의를 올리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고 한다. 이지켄(愛知縣)에 있는 다카다진자(田縣神社)에서 매년 3월 15일에 행하는 풍년제(豊年祭)에는 직경 60Cm, 길이 2m 정도 되는 통나무로 깎은 남근을 여럿이 둘러메고 거리를 돌고 난 뒤에 신전에 봉안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를 올린다. 제의의 목적은 풍농, 가업 번영, 자손 번성 등이다.

  태국에서는 사원(寺院) 앞에 남자 성기 모양의 커다란 통나무를 세워 놓고, 그 앞에 가서 젊은 남녀들이 소원을 빈다. 또, 방콕의 한 불교 사원에도 대형 석제(石製) 남근과 사람 키 정도의 목제(木製) 남근에 붉은 색을 칠해 매달아 놓고 신앙한다. 태국인들은 배를 탈 때 소형의 목제 남근을 허리에 차고 다닌다. 이것은 목제 남근이 귀신을 쫓는 힘을 지니고 있고, 물에 빠졌을 때 상어의 침해를 막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부녀자들은 기자를 위해 소형 남근을 옷 속에 차고 다닌다.
 
  인도에서 인도교도들은 석제 남근을 생산신으로 숭배한다. 또 10월 말부터 11월 초 새달이 떠오를 때에 남근제를 지낸다. 그리고 남녀의 성교 자세를 조각한 '환희천상(歡喜天像)'을 신으로 신앙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농부들이 봄에 밭에 씨앗을 뿌리고, 그날 밤에 밭에 나가 부부 관계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부부의 성행위에 의해 어린아이가 생기듯이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어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성신앙(性神仰)이 농경의례로 바뀐 예는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중국 등지에서도 발견된다.

        성기 신앙의 유래와 의미

  원시인들은 자기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사냥을 하러 나가기 전에 잡으려고 하는 짐승의 모양을 그리거나, 그 형상을 만들어 놓고, 사냥에 성공하기를 간절히 빌면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은 주술(呪術) 심리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술 심리를 지닌 고대인들은 부족의 번성을 간절히 바라면서 아기를 낳아 기르는 여성의 성기와 유방을 매우 존귀하게 여기고, 신성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그 모양을 바위에 새기거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새 생명의 출생과 건강, 부족의 번성을 빌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여성의 성기를 생산의 기능을 지닌 신으로 숭상하는 성신앙(性信仰)이 형성되었다. 그 후, 새로운 생명의 출생은 여성만이 하는 것이 아니고, 남성의 성력(性力)이 작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남성 성기도 신성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뀜에 따라, 성신앙도 여성 성기 위주에서 남성 성기 위주의 신앙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성신앙에 따라 성기를 생명체의 출생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믿게 되었고, 성행위도 쾌락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출생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성한 행위로 믿게 되었다. 따라서 양성(兩性)이 결합하지 못하면, 성적 결핍으로 인해 생명체의 출생 번식이나 풍요가 있을 수 없음은 물론, 재난이 생긴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에서는 상징적인 성적 결합 행위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1세기 경에 매몰된 도시 폼페이의 신전벽의 조각품에 남자의 성기나 여성의 유방, 발기된 남성의 성기를 타고 앉은 여성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성신앙이 오래 전부터 있었음을 말해 준다.

  성기신앙은 세계 각지에 자연스럽게 전해 왔는데, 한국의 경우에는 성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려는 윤리의식 때문에 일찍부터 소멸되어 지금은 일부의 모습만 전해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는 예로부터 나무나 돌로 남녀 성기(性器)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신체(神體)로 상정(想定)하거나, 남녀 성기 모양의 바위 또는 바위에 성기나 성교(性交) 장면을 조각한 것을 신체로 상정하여 제의를 올리는 신앙이 있다. 이를 성기신앙(性器信仰) 또는 성신앙(性信仰)이라고 한다. 이것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전해 오고 있다.   
 
            남근을 제물로 받는 해신(海神)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 2리 신남 마을에서는 매해 음력 정월 보름과 10월 첫 오일(午日)에 나무로 정성껏 깎은 남근(男根)을 해신당(海神堂) 당집 안과 신나무[神樹, 神木]에 제물로 바치고, 마을의 평안과 풍어(豊漁)를 빈다.

  해신당 안에는 중앙의 벽에 젊고 예쁜 해신(海神)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제단 위에는 나무로 실물과 같거나 약간 크게 깎은 남자의 성기 9개를 짚으로 엮어 세워 놓았다. 해신도(海神圖)의 왼쪽 기둥에는 남근 5개를 옆으로 넣고 유리를 끼운 상자가 걸려 있고, 오른쪽 기둥에는 새끼줄에 긴 남근 9개가 걸려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가로지른 나무에도 2개가 걸려 있다.

  해신당 뒤 바다쪽으로 약 10m쯤 떨어진 곳에는 몇 백년 되었음직한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검정 색으로 '海神堂'이라고 세로로 쓴 널빤지가 걸려 있다. 이 나무가 오래 전부터 남근(男根)을 제물로 받던 신나무이다.

  이 마을에 이러한 풍습이 생겨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이 마을에 서로 사랑하여 장차 결혼하기로 약속한 처녀와 총각이 살았다. 하루는 처녀가 해신당 북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돌김을 뜯으러 갔다. 처녀는 김을 뜯는 데에 정신이 팔려 파도가 높아지는 줄도 몰랐다. 총각이 약속한 시간에 처녀를 데리러 가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에 풍랑이 심하여 도저히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처녀는 바다에 빠지지 않으려고 바위를 잡고 애를 쓰다가 힘이 빠져 풍랑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 바위를 '애바위'라고 한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마을 사람들은 고기가 잡히지 않아 생계가 곤란하게 되었다.

  어느 날, 죽은 처녀가 그 총각의 꿈에 나타나 지금 신나무로 받드는 향나무에 자기의 영혼을 모셔달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나무에 처녀의 영혼을 모시고, 위령제(慰靈祭)를 지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냈건만, 여전히 물고기는 잡히지 않고,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젊은이들이 죽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러자 한 어부가 술에 만취하여 이곳에 와서 욕을 하면서, 신나무에다가 오줌을 누고 내려왔다.

  그 다음날, 그 어부가 바다에 나가 그물질을 하였는데, 그 사람은 많은 고기를 잡았다. 그는 만선(滿船)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면서, 자기가 고기를 많이 잡은 것은 간밤에 처녀의 영혼을 모신 신나무에 방뇨를 했기 때문인데, 처녀의 영혼은 제물보다 남자의 성기를 원한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어부는 그 다음날에 몇 가지 제물과 함께 소나무로 깎은 남근을 가지고 가서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그는 그 다음날에도 남달리 많은 고기를 잡았다.

  어부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남근을 깎아 향나무 앞에 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를 지낸 사람은 모두 고기를 많이 잡았다. 마을 사람들은 제각기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는 함께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동제(洞祭)로 지내기로 하고, 정월 보름날과 시월 첫 오일(午日)에 동제를 지낸다. <1994년 8월 20일에 이 마을의 이장 김진철(남, 48세, 어업) 씨에게 들은 이야기임.>

  바다의 상징적인 성(性)은 여성이라 할 수 있다. 바다의 신이 된 신남 마을 처녀가 성적으로 결핍된 상태에서는 그 마을 사람들이 평안과 풍요를 누릴 수 없다. 해신(海神)이 성적인 충족을 얻어야만 마을의 평안과 풍어(豊漁)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남근을 깎아 해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전설과 목제(木製) 남근(男根)을 바치는 습속은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안인진 2리의 '해랑당(海娘堂)'에도 전해 왔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 바닷가 안인진 마을에 한 어부가 과년한 딸과 함께 살았다. 어느 날, 그 처녀는 바닷가에 나갔다가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 청년을 사모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그녀는 그 청년을 만나 청혼을 하리라 굳게 마음먹고, 그 청년이 있는 곳으로 갔는데, 그 청년은 벌써 고깃배를 타고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바다로 나간 뒤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청년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자, 처녀는 마침내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 처녀가 죽은 후 이 마을에는 고기가 전혀 잡히지 않을 뿐더러 연달아  재앙이 생기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 사람의 꿈에 그 처녀가 나타나서 말하였다.

  "나는 시집도 못 가고 죽어 이렇게 원혼(寃魂)이 되었소. 내일부터라도 이 마을 높은 곳에다 나를 위하여 사당을 짓고, 남자의 신(腎)을 만들어 걸어 주시오. 그러면 고기도 많이 잡히게 될 것이오."

  마을 사람들은 그 처녀가 말하던 대로 사당을 짓고, 오리목나무로 남자의 신을 만들어 걸어 놓고 빌었다. 그랬더니, 과연 그 이튿날부터는 고기가 많이 잡히므로, 어촌 사람들이 그것을 많이 만들어 걸게 되었다고 한다.

  안인진 해랑당에는 1940년대까지 남근을 깎아 바치고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가 행하여졌다고 한다. 지금은 그런 민속이 없어졌는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에 이 마을 이장인 이천오(李千五)의 부인에게 해랑신이 덮쳐 미쳐가지고 밤낮으로 해랑당에 오르내리며, "내가 시집을 갈 터이니, 김대부신(金大夫神)과 혼인 시켜 달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믿지 않자, 이장 부인의 병세는 악화되어 사경(死境)에 이르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동네 노인들이 상의한 끝에 '김대부지신위(金大夫之神位)'라 쓴 위패(位牌)를 만들어 놓고 '해랑신(海娘神)'과 혼인하는 제를 지내니, 이장 부인의 병이 나았다.

  해랑신이 혼인을 하자 마을 사람들은 남근을 바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울진에서 온 큰 배의 선주(船主)가 고기를 많이 잡아가지고 가다가 해랑당에 소를 잡아 제를 지내며 남근을 깎아 달아맸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제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다 고꾸라져 피를 쏟고 즉사해 버렸다. 그것은 남편이 있는 해랑신에게 간음을 시킨 죄로 신벌(神罰)을 맞은 것이라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는 남근을 바칠 수가 없게 되어 현재는 제만 지내고 있다.<김태곤, 한국민간신앙연구. 서울 : 집문당,1983, 157쪽 참조>

  이 이야기는 해랑당에 남근을 깎아 바치는 민속이 없어진 내력을 아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해랑당에 목제 남근을 바친 것은 이들이 성기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중지한 것은 이 마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성기에 대한 신앙심이 약화된 때문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강화된 미신타파 운동과 폭넓게 자리잡게 된 합리적 사고방식, 그리고 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숨기려는 유교적인 체면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에 따라 남근을 깎아 바치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가장 심각하게 고민한 사람이 그 마을의 이장과 그 부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그것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그래서 해랑신을 김대부신과 혼인시키고, 남근 바치는 일을 중지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해랑당에 목제 남근을 바치는 일은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현재 경기 지역에서 동신으로 신앙되고 있는 부군당(府君堂)의 네 벽에 목제 남근 여러 개를 걸어 신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조선 후기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전한다. 또 193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의  조선의 무격(朝鮮の巫覡) 부록 사진에도 '부근당새물(付根堂賽物)'이란 설명으로 목제 남근과 짚신의 사진이 있다. 이것은 이규경의 기록을 실증해 주는 동시에 1930년대까지도 부군당에 남근이 바쳐졌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2년 정축 8월 병진 조에 '부근(付根)'이란 명칭으로 부군당에 대한 기록이 있고,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부군당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이로 보아 부군당 신앙이 조선 중기 이전부터 문제시 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용인 한국 민속촌의 동헌 뒤에 가면, 관원들이 부임하면 임기 중의 평안과 승차되어 떠나게 되기를 빌었다는 부군당이 있다. 당집 안에는 신령의 그림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 길이가 약 50센티미터, 둘레가 약 30센티미터 되는 남근 모양의 자연석이 대나무 통에 고정되어 있다. 이것은 전에 부군당에 돌로 된 남근석을 바치던 습속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이제 남근을 제물로 바치는 습속은 신남의 해신당 한 곳만 남게 되었다. 이 마을 사람들의 일부는 이것을 마을의 자랑거리로 삼아 신남 마을과 신남 해수욕장을 널리 알리려 하고 있다.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을 찾는다고 한다.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재단하려는 독단에서 벗어나, 성을 출생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고, 성기신앙을 지녔던 옛사람의 의식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면, 신나무에 매달아 놓은 남근을 가져가는 일도 없을 것이요, 성을 쾌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데서 생기는 여러 가지 사회 문제와 성범죄도 없어질 것이다. 


 

  민속놀이는 대체로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벌어지는 계절성을 지니며, 특정 지역을 바탕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것은 민속놀이가 전승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발생하고, 전승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안동 지방에서 행해지는 놋다리밟기, 경남 창녕군 영산 지방에서 전승되는 쇠머리대기,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와 도서 지방에 널리 분포 전승되는 강강술래를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안동놋다리밟기

  경북 안동 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는 놋다리밟기는 대보름날 저녁에서부터 수일 간 수백 명의 여성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논다. 그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의 답교놀이가 변형, 발전했다는 가설이 설득력이 있다. 기록으로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상원(上元) 조에 처음 보인다.
   
      유래

  이 놀이와 관련된 두 가지 전설이 안동 지방에 전승하고 있어 그 유래를 짐작하게 한다.

  첫째, 공민왕의 소야천 나루 건너기와 관련된 전설이다.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왕후와 공주를 데리고 조령(鳥嶺)을 넘어 안동 가까이에 이르러 소야천 나루를 건너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녀자들이 달려와 허리를 굽혀 왕후와 공주가 등을 밟고 건너게 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놋다리밟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둘째, 공민왕 위무(慰撫) 전설이다. 공민왕이 공주를 데리고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물렀는데, 난이 평정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백성들이 왕 일행을 위무하기 위해 이 놀이를 놀았다 한다.

  이 놀이와 유사한 놀이로서, 의성의 '기와밟기'와 군위 지방의 '지애밟기' 및 영양의 '등다리밟기'가 있다. 명칭이 다소 다르긴 해도, 놀이 형태는 아주 비슷하다.

      놀이의 특색

  첫째, 이 놀이는 신앙성이 없고 승부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둘째, 여성들만의 놀이이기 때문에 남성들의 참여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셋째, 노래가 수반되기 때문에 부드럽고 정서적인 놀이라 할 수 있다.
  넷째, 다른 지방의 놋다리와는 달리 원형(圓形)의 '웅굴놋다리'로 가장행렬을 할 때 둥글게 원을 지어 거리를 누빈다.
  다섯째, 안동의 차전놀이처럼 동부 서부로 나누어 '꼬께싸움'을 벌인다.

        놀이의 구성과 내용

  이 놀이는 크게 구분하여 '둥둥데미-실감기-놋다리-꼬께싸움'으로 나눌 수 있으나, 놀이의 주된 내용은 세 번째의 '놋다리'이다.

1) 둥둥데미

  동서부의 부녀자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노래를 제창하며 넓은 벌판에 도달하면 놀이가 시작된다. 각기 손을 잡고 원형으로 앉으면 선두부터 서서히 일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잡은 손을 타넘고 '둥둥데미 노래'를 부른다.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어화유리 둥둥데미/ 둥둥데미 어화유리
저 달 봤나 난도 봤다/저 달 봤나 난도 봤다
저 달 봤나 난도 봤다(이하 생략)

2) 실감기

  둥둥데미 노래가 끝나면 와문(渦紋)처럼 겹겹이 원을 짓고 실감기 노래에 맞추어 다시 원을 푼다.

  집실로 감아라
  당대실로 감아라(이하 생략)

3) 놋다리

  놋다리에서는 놀이꾼들이 큰 원을 이루고 구경꾼들이 원의 주위에 무리 지어 모이면 놀이가 시작된다. 놀이꾼들은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힌다. 그러면 어린 공주가 양곁에 선 시녀의 손을 잡고 원형의 사람다리[人橋] 위를 한 바퀴 돈다. 이 때 구경꾼들과 놀이꾼들은 놋다리 노래를 제창한다.

  어느 윤에 놋다리로 청계산에 놋다릴세
  이 터전이 뉘 터이로 나라임의 옥터일세
  이 기와가 뉘 기와로 나라임의 옥기왈세
  그 어디서 손이 왔노 경상도서 손이 왔네
  무슨 꼭께 싸여 왔노 어깨꼭께 싸여 왔네
  멧대간을 밟아 왔노 쉰대간을 밟아 왔네(이하 생략)

4) 꼬께싸움

  놋다리가 끝나면 꼬께싸움이 벌어진다. 꼬께란 안동 지방의 방언으로 두 사람이 서로 손목을 잡아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 꼬께 위에 공주를 태운 다음 동서부의 공주가 싸운다. 격렬한 싸움으로 한쪽 공주가 땅에 떨어질 때까지 싸운다. 승리한 쪽은 행렬을 정비하여 의기양양하게 돌아가고, 진 쪽은 길을 뺏기지 않으려고 길을 막는다.

                              쇠머리대기

  경남 창녕군 영산 지방에서 전승되는 민속놀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목우전(木牛戰)', '목우희(木牛戱)'나 '무소 싸음'으로 불리며, '목우 붙인다', '쇠머리 댄다'고도 한다. 본디 정월 대보름에 행해졌으나, 현재는 3월 1일 거행하는 3·1문화재의 한 레퍼토리로 놀고 있다.

      유래

  쇠머리대기의 유래는 영산 지방의 지세와 관련된 풍수신앙으로 설명한다. 옛날 옛 고을 동헌의 자리가 축좌(丑坐)이기 때문에 나무쇠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부근 영취산과 함박산의 형세가 영산읍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의 소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기 때문에 두 산의 산살(山煞)을 풀어주기 위해 나무 소를 만들어 싸움을 시켰다는 것이다.

  또 안동 지방의 동채싸움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으로 보아 쇠머리대기와 차전놀이가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아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쇠머리대기의 특징은 소싸움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농우(農牛)의 중요성과 신성(神性)을 되새기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테면 경기 지방의 소먹이놀이와 견줄 수 있는 민속놀이다.

    놀이의 구성

편제

  쇠머리대기는 두 패로 갈리고 이것을 각각 동부, 서부로 부른다. 동서의 구별은 지난날의 성을 중심으로 해서 성내에 위치한 성내리와 교리가 동부가 되고, 성밖에 있는 서리와 동리가 서부가 된다.
  다음에는 양군에서 각기 대장, 중장, 소장의 장군을 선출하여 지휘하게 한다. 장군들은 읍민의 중의에 따라 신망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전법

  싸움 방법은 단조롭다고 할만큼 간단하고 소박하다. 청장년들이 어깨에 맨 나무 쇠를 어르고 다니다가 세차게 맞부딪친다. 그러다가 상대방의 나무 쇠를 올라타 아래쪽에 깔리게 하거나 밀어내는 쪽이 이긴다.

놀이의 내용

  마산 등지에서 온 10여 개의 풍물패가 먼저 놀이 분위기를 돋운다. 양군이 진군할 때는 맨 앞쪽에 마을 수호신의 상징인 서낭대를 앞세우고, 그 뒤를 이어 총사령기를 비롯하여 대장기·중장기·소장기·동방청제장군기·서부호기·동부호기·필승기·농기 등이 늘어선다. 그 외에도 마을의 서낭대·영기 등 백여 기의 깃발이 늘어선다.

  본 놀이인 쇠머리대기 싸움에 앞서 진잡이 놀이가 벌어진다. 진잡이는 양편의 장군들(모두 6명)이 말을 타고 상대편의 진을 돌파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과감한 돌파와 저지로 많은 부상자를 내기도 한다.

  앞놀이가 끝나는 저녁 무렵에 본놀이인 쇠머리대기가 시작된다. 수많은 장정들이 나무쇠를 어깨에 둘러메고 나무쇠 위에는 장군 셋이 올라탄다. 이 때 대장·중장·소장의 장군들은 구 군복을 입고 칼을 들어 지휘한다. 풍물패의 풍물 소리가 울리고 양군은 '오왜 증산이야' 노래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접근한다. 나무쇠를 서로 부딪히면서 상대편의 나무쇠 위에 올려놓으려고 일대 공방을 벌인다. 치열한 접전 끝에 한쪽이 뒤로 물러나거나 밑으로 깔리게 되면 승부가 판가름난다.

                        강강술래

  강강술래는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와 도서 지방에 널리 분포·전승되어 오는 집단놀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로 8월 한가위에 행해지나, 지역에 따라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기도 한다.

      유래

  강강술래는 이순신 장군의 전술과 결부된 설이 있으나,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보면, 고대 농경 시대의 파종 및 수확 때의 공동 축제에서 노래 부르며 춤을 추던 놀이 형태가 계속 이어져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전술로 이용되어 그 이름을 널리 전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강강술래는 우리 나라 여성 놀이의 대표적인 놀이이며, 여성의 정서가 넘친 율동적인 놀이로, 한가위 밝은 달 아래 펼치는 원무(圓舞)는 약동하는 생명력을 표상한다.

놀이의 구성

  강강술래는 여러 가지 놀이로 구성되어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14가지 놀이로 진행된다.

  1) 늦은 강강술래      2) 중강강술래     3) 잦은 강강술래          4) 남생아 놀아라     5) 고사리 꺾자     6) 청어 엮자          
    7) 청어풀기            8) 지와 밟기        9) 덕설몰이               10) 덕석풀기          11) 쥔새끼놀이    12) 문열어라               13) 가마등              14) 도굿대당기기


  이 외에도 수건 찾기, 품고동, 봉사놀이 등이 추가될 경우도 있으며, 또 놀이 분위기와 놀이자의 뜻에 따라 새로운 레퍼토리를 추가하기도 있다.

      놀이의 내용

1) 늦은 강강술래

  한가위 둥근 달이 동천에 떠오르면 넓은 들에 여성들이 모여 목청 좋은 선소리꾼이 느릿한 진양조로 매김 소리를 하면 다른 여성들은 손에 손을 잡고 원무를 추면서 뒷소리로 '강강술래' 하고 받는다. 강강술래 중 가장 아름답고 여성적인 멋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2) 중강강술래

  선소리꾼이 흥겨운 중중모리가락으로 매기면 이에 맞추어 동작이 조금 빨라지며 어깨놀림이 가볍게 시작된다.

3) 잦은 강강술래

  선소리꾼의 자진모리가락에 맞추어 양팔을 쭉 뻗치고 뛰며 돈다. 원이 커지고 발놀림이 빨라져 흥이 절정에 오른다.

4) 남생아 놀아라

  잦은 강강술래를 하다가 지치면 선소리꾼이 중중모리가락의 '남생아 놀아라'를 부른다. 다른 사람들은 이를 되받으며 발걸음을 늦추고 놀이꾼 중 재주가 있는 사람이 원 안으로 들어가 갖가지 춤을 춘다.

5) 고사리 꺾자

  선소리꾼이 '고사리 대사리 꺾자'를 부르면 다른 사람들은 '유자콩콩 재미나 넘자'로 받아 부르면서 원무 형태 그대로 앉아 어깨만 들썩인다. 그러다 선두가 일어나 왼쪽으로 돌아 다음 사람과 맞잡은 팔 위를 넘으며 다음 사람도 선두를 따라 꺾어나간다.

6) 청어 엮자

  '고사리 꺾자'가 끝날 때 선소리꾼이 '청청 청어 영자 위도 군산 청어영자'를 매긴다. 놀이꾼들은 이 소리를 되받으며 멈춰 선 채 어깨만 들썩인다. 그러면 선두가 둘째 사람과 셋째 사람의 맞은 팔 밑으로 꿰어가서 고사리 꺾자와 같이 차례로 꿰어 가는데, 이 때 오른손은 왼쪽 어깨 위에 감기게 되어 마치 청어를 엮은 모습이 비슷하게 된다.

7) 청어풀기

  청어 엮자가 끝나면 선두가 엮을 때와는 반대 방향으로 꿰어간다. 그러면 어깨가 풀려 원대형으로 돌아간다.

8) 지와 밟기

  선소리꾼이 '어디골 지완가'를 부르면 놀이꾼들은 '장자골 지와세'를 부르며 일렬로 늘어선다. 선소리꾼이 '봅자 봅자 지와를 봅자'를 선창하면 일제히 허리를 굽혀 뒷사람이 앞사람의 어깨를 밟고 지나간다. 이 때 양쪽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아준다. 어깨를 밟고 지나간 사람은 다시 엎드려 다른 사람이 지나가도록 한다.

  9) 덕설몰이

  선소리꾼이 중중모리가락으로 '몰자 몰자 덕석을 몰자'를 선창하면 놀이꾼들은 모두 일어선다. 선두는 왼쪽으로 원을 그리며 돌면 다른 놀이꾼들은 차례로 멍석을 말듯 돌돌 말아간다.

10) 덕석풀기

  다시 선소리꾼이 '풀자 풀자 덕석을 풀자'를 선창하면, 다른 놀이꾼들은 이를 되받으며 덕설몰이의 반대로 풀어간다.

11) 쥔새끼놀이

  선소리꾼이 '쥔쥔새끼 찔룩찔룩 가사리 고부야'를 노래하면 놀이꾼들은 이를 되받으며 일렬로 선다. 이 때 선소리꾼이 '쥔새끼 잡세-'를 외치면 일제히 앞사람의 허리를 잡는다. 선두는 재빨리 되돌아 맨 끝의 사람을 잡으려 쫓는다. 힘들여 끝 사람을 잡으면 잡힌 사람을 맨 앞에 세우고, 잡는 데 공헌한 선두를 목마 태워 행진한다.

12) 문열어라

  선소리꾼이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 주소'를 선창하면, 맨 앞사람 둘이 마주 보며 손을 맞잡아 들고 문을 만든다. 이 문을 놀이꾼들이 허리를 잡은 채 노래하며 꿰어간다.

13) 가마등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손목을 잡아 우물 정(井)자 형을 만들면 이 위에 한 사람이 타고 앉아 마당을 돌아다닌다. 편을 갈라 일정한 거리까지 갔다오는 경주를 벌이기도 한다.

14) 도굿대당기기

  놀이꾼을 두 편을 갈라 중앙에 도굿대(절구공이)를 옆으로 놓고 양편에서 힘센 사람이 나와 양끝을 잡는다. 양편의 놀이꾼들은 절구공이를 중심으로 종대로 늘어서서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맨 앞사람은 절구공이에 발을 버티고 양손을 잡는다. 서로 손이 잡히면 끌어당기기 시작하는데, 만약 앞사람의 손이 빠져 엉덩방아를 찧으면 진다.





  민속놀이는 우리 민족의 공동생활 속에서 형성되어 생활을 통하여 전승되어 오는 놀이이다. 민속놀이에는 싸움을 뜻하는 경쟁성(競爭性), 흥을 뜻하는 유희성(遊戱性), 즐김을 나타내는 오락성(娛樂性),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성(藝術性) 등이 복합적으로 녹아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유희와 놀이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재미있고, 즐겁기 때문이다. 놀이의 즐거움을 통하여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정신적 고통을 잊어버리고, 생업에 종사하는 동안 지쳐 있던 육체적 피로를 풀어내기도 한다. 놀이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무목적(無目的)의 활동으로, 즐거움과 흥겨움을 동반하는 가장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 활동이다. 육체적 정신적 활동을 전제로 하는 민속놀이를 통하여 한국인은 정서적 공감과 정신적 만족감을 얻어 왔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민속놀이 중 지금도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그네뛰기, 줄다리기 등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보려고 한다. 

                        윷놀이

  윷놀이는 정월의 대표적인 놀이로,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 놀이는 신라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중국에는 저포(樗蒲)가 있다.    윷놀이의 기원에 관하여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설이 전해 온다.

  ① 부여 시대에 다섯 가지 가축을 다섯 마을에 나누어주고, 그 가축들을 경쟁적으로 번식시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서 연유하여 도는 돼지[豚], 개는 개[犬], 걸은 양(羊), 윷은 소[牛], 모는 말[馬]에 비유하기도 한다.
  ② 삼국 시대에 생겼다고 하는 민간 전설이 있다. 그래서 신라 시대에 궁녀들이 새해 초에 즐기던 놀이라고 하기도 하고, 백제의 관직명인 저가(猪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대사(大使)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고구려의 오가(五加, 동·서·남·북·중앙)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③옛날 어느 장수가 적과 대진 중 적군의 야습을 경계하여 진중의 병사들의 잠을 막기 위하여 이 놀이를 창안하였다고 한다.

  윷판의 유래에 관하여는 상대(上代) 오가(五加)의 출진도(出陣圖)에서 나왔다는 설, 부여의 관직을 모의한 사출도(四出圖)에서 나왔다는 설, 조선 선조 때 김문표(金文豹, 1568∼1608)가 말한 사도설(柶圖說) 등이 있다. 사도설에서는 윷을 사(柶)라 하고, 윷판은 천체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중앙에 있는 것은 북극성이고, 둘레에 있는 것은 28숙(宿)의 별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네 행로(行路)는 동지(冬至), 하지(夏至), 춘분(春分), 추분(秋分)에 비유한다. 일본에는 한국의 윷놀이와 비슷한 '우쯔무끼사이(府向采)'가 있는데, 이것은 8세기경에 한국에서 건너가 15세기까지 전승되다가 최근에는 쇠퇴하였다.

  윷에는 장작윷, 밤윷 등이 있다. 장작윷은 박달나무, 통싸리나무, 밤나무 등을 길이 15∼20 센티미터, 지름 3∼5 센티미터 크기로 만든 것인데, 서울을 비롯한 중부 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다. 밤윷은 밤알 크기의 나무 조각 4개를 조그만 밥공기 등에 담아 내젓다가 바닥에 내던져 노는 것인데, 주로 남부 지방에 분포되었었다. 북부 지방에서는 콩으로 만든 콩윷, 팥으로 만든 팥윷을 놀기도 하였다.

  놀이 방법으로는 말판쓰기, 덕대놀이, 모다먹기 등이 있다. 윷을 세 번 던져 각기 나온 결과를 그에 따른 점사(占辭)로 풀어 윷점을 치기도 하였다. 윷점에 관하여는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와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도 도 도 : 아견자모(兒見慈母, 어린아이가 자애스런 어머니를 만나다.)
  도 도 개 : 서입창중(鼠入倉中, 쥐가 곳간에 들어가다.)
  도 도 걸 : 혼야득촉(昏夜得燭, 어둔 밤에 촛불을 얻다.)
  도 도 모(윷) : 창승우춘(蒼蠅遇春, 쇠파리가 봄을 만나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윷점의 점사는 긍정적인 내용이 많다. 이것은 정초에 재미로 하는 윷점이 이를 행하는 사람에게 한 해 동안 희망을 갖고 노력하며 살도록 권장하는 기능을 하였음을 말해 준다. 

  요즈음에는 각 가정에서 정초에 윷놀이가 많이 행해지고 있고, 마을이나 기관, 친목 단체가 주관하는 윷놀이 대회가 성행한다.

                  널뛰기

  널뛰기는 음력 정초, 5월 단오, 8월 한가위 등에 주로 부녀자들 사이에서 행하여지던 놀이이다. 이것은 고려 이전부터 전해 온 듯하다. 조선 시대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널뛰기를 "항간의 부녀자들이 긴 널조각을 짚단 위에 가로로 놓고, 양쪽 끝에 갈라서서 굴러 뛰기를 하는데, 몇 자 높이까지 올라간다. 그 때 패물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다. 지쳐 떨어져 나가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이것을 '초판희(超板戱)'라고 한다."고 적어 놓았다.   

  일본 오끼나와(琉球)에는 널뛰기와 비슷한 '板舞'가 행해지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긴 널판을 상하로 움직이는 유희는 지구상에 한국의 널뛰기와 일본의 판무밖에는 없다. 널뛰기를 시이소우와 관련시키면 세계성을 띤 놀이라고 할 수도 있다.

  널뛰기는 그네뛰기와 함께 몸을 활달하게 움직이는 놀이로, 조선 시대 여인들에게 활달한 자기 발견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널뛰기의 유래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속설(俗說)이 전해 온다.

  ① 죄를 짓고 옥 속에 갇힌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은 죄수의 아내가 다른 죄수의 아내와 공모하여 널을 뛰면서 담장너머로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② 부녀자들이 널뛰기를 하면서 담 밖의 세상 풍경과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③ 처녀 시절에 널뛰기를 하지 않으면 시집가서 아기를 낳지 못한다.
  ④ 정초에 널뛰기를 하면 일 년 중 가시에 찔리지 않는다(경기도 용인).

  위에 적은 네 가지 중 어느 것이 타당성이 높고, 어느 것이 타당성이 낮은지는 말하기 어렵다. 이들 중에는 운동이 부족한 부녀자들의 건강과 관련된 것도 있어 흥미롭다.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우리 나라에서 겨울철(농한기) 북서풍이 불 때에 행해지는 대표적인 놀이이다. 이것은 세계 곳곳에서, 예로부터, 성별, 신분의 구별 없이 즐겨 오는 놀이이다.

  연은 기원 전 400년대에 그리스의 알타스(Altas)가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기원 전 200년경 한신(韓信)이 적의 형편을 탐지(探知)하기 위해 연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 초(楚) 나라 항우(項羽)와 싸울 때 소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연에 바구니를 매달고, 그 안에 피리 잘 부는 군사를 태워 이것을 초 나라 군사의 머리 위에 뜨게 하고, 초가(楚歌)를 불게 하여 초나라 군사의 전의(戰意)를 상실하게 하였다 한다.

  일본에서는 전쟁 때 연을 이용하였고, 집을 지을 때 벽돌 등을 연에 매달아 올렸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성안의 군사를 정벌할 때 무서운 동물 모양의 연을 만들어 띄워 성안의 군사를 놀라게 하여 사기를 꺾은 뒤에 성을 함락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연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김유신전(金庾信傳)에 보인다. 서기 647년에 진덕 여왕이 선덕 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대신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왕으로서는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명활성(明活城)에 진을 치고, 왕의 군사는 월성(月城)에 진을 치고 10여 일 동안 공방전(攻防戰)을 벌였으나, 승패가 나지 아니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큰 별똥이 월성 안에 떨어졌다. 비담 등이 별이 떨어지는 곳에 흉사(凶事)가 있을 것이라고 하니, 군사들이 크게 환호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대경실색(大驚失色)하였다. 이 때 김유신 장군이 왕을 안심시킨 후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큰 연에 매달고 불을 붙여 띄워 마치 별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 같이 하였다. 그리고는 "떨어졌던 별이 어제 밤에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내고, 별이 떨어진 곳에 가서 백마를 잡아 제사를 지낸 후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워 난을 평정하였다고 한다.

  연을 전쟁에 이용한 것은 최영 장군과 이순신 장군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최영 장군은 탐라국의 목호(牧胡, 목축하는 몽고인)의 난을 평정할 때(1374), 군사를 연에 매달아 병선(兵船)에서 절벽 위로 상륙시켰다 한다. 또 불덩이를 매단 연을 성안으로 날려보내어 불타게 하고, 성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섬과 육지를 연락하는 통신 수단으로, 또는 작전 지시의 방편으로 연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연날리기가 민간에 널리 보급되어 성행하였다. 특히 영조는 연날리기를 즐겨 구경하고, 장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음력 정월 보름이면 서울 광교와 수표교에서 연날리기 전국 대회가 벌어지곤 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연은 방패연, 가오리연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창작 연이 있다.

  연날리기는 높이 띄우기, 손놀림에 따라 연을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돌리기 급전(急轉) 급강하(急降下) 급상승(急上昇) 등 다양한 공중 곡예(曲藝)를 하는 재주 부리기, 연실의 질기고 약함 연의 조종 기술에 따라 연줄을 끊어 먹는 연싸움이 있다. 연 싸움에서 진 편은 이긴 편을 위하여 멀고 먼 하늘로 좋은 소식을 전하러 연을 날려보낸 것으로 여겨, 이긴 편이 진 편에게 한턱을 냈다. 얼레 하나에 얼마나 많은 연을 매달아 띄울 수 있는가를 겨루기도 하였다.

  민간에는 겨울 동안 날리던 연을 음력 정월 보름에 연 바탕에 액을 멀리 보내고 복을 맞이한다는 뜻의 '송액영복(送厄迎福)'의 축원문을 쓰고, 연 날리는 사람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써서 날려보내면 모든 액과 나쁜 운수가 일소된다고 믿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복된 새해를 맞으려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연날리기가 많은 사람들이 즐겨하는 놀이였던만큼 연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전해 온다. 그 중 재미있는 것 두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숙종 때 두 대감이 정월 보름이면 '연 끊어 먹기'를 하였다. 어느 해 정월 보름에 두 대감이 연날리기를 하는데, 돌연 연 하나가 와서 두 대감의 연줄을 끊었다. 두 대감이 알아보니 10세 소년이었는데, 그 소년은 비범한 아이였다. 그 후 두 대감은 정월 보름이면 소년과 함께 연 끊어 먹기를 하곤 하였다. 소년이 자라 장원급제하고, 대감이 되니, 해마다 세 대감이 연 끊어 먹기를 하였다고 한다.

  한 소년이 연날리기를 하다가 연줄이 끊어져 날아갔다. 그가 정신없이 연을 따라어느 마을로 가니, 연이 어느 집 옆에 있는 대밭의 대나무에 걸렸다. 그가 대밭 가까이 가니, 대밭에서 어떤 남녀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여인이 혼인날이 며칠 안 남았으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하니, 남자가 첫날밤에 신방에 든 신랑을 죽이고 함께 도망가자고 하였다. 그는 형의 혼인날이 그 여자의 혼인날과 같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떼를 써서 형이 장가갈 때 후행(後行)으로 따라갔다. 그는 신방 마루 밑에 숨어 있다가 첫날밤에 신랑을 죽이러 온 중을 보고, 소리쳐서 형을 깨워 구해 냈다고 한다. 연과 관련된 이 이야기는 '신방 엿보기' 풍습이 생긴 유래담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네뛰기

  그네뛰기는 씨름과 더불어 음력 5월 단오에 행해지던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북방 유목민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놀이는 중국 춘추 시대의 제(濟) 나라를 거쳐 한(漢) 나라, 당(唐) 나라 이후 궁정(宮廷)과 민가에서 성행하였다.

  우리 나라의 경우, 그네뛰기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 처음 나타나는데, 고려 시대에 왕궁을 중심으로 한 귀족 사회에서 성행하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 신흥 사대부들이 지은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에도 그네뛰기에 관한 것이 나온다. 그네뛰기는 조선 시대에 일반에게 보급되면서 단오놀이로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상류층의 여인들에게는 억제되었다.

  그네의 명칭으로는 '그네', '근데', '근듸', '군듸', '군의', '그리', '구리' 등이 있다. {악장가사(樂章歌詞)}의 [한림별곡]에는 '글위', {역어유해(譯語類解)}에는 '그릐', {동문유해(東文類解)}에는 '그리'로 표기되어 있다. 어원은 '근의'인데, 이 말은 '끈의 희(戱)'에서 온 말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그네는 온 몸의 탄력을 이용해야 하며, 팔과 다리의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널뛰기와 함께 과거 여성 체육의 쌍벽을 이루었고, 맵시 있는 여성의 놀이로 꼽혔다.

  그네와 관련되어 전해 오는 말에는 '그네를 뛰면 발에 무좀이 생기지 않는다.', '그네를 뛰면 여름에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 '그네를 뛰면 더위를 타지 않는다.' 등이 있다.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예로부터 널리 행하여졌는데, 기록상으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제주도에서 조리희(照里戱)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맨 처음이다. 중부 이남 지방에서 정월 대보름, 단오일, 팔월 한가위 등에 주로 행하여졌으나, 정월 보름이 가장 많았다. 지금까지 줄다리기가 큰 행사로 거행되는 마을은 경북 의성, 경남 영산, 전남 장흥, 충남 당진 등인데, 이들 지역에서는 그 지역에서 편리한 시기에 줄다리기를 한다.   

  줄다리기는 동남아시아 일대, 주로 해안과 평야 지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농경(農耕)과 어로(漁撈)를 주로 하는 생활권에 많았다.

  줄다리기에 사용하는 줄은 짚, 또는 짚과 칡을 섞어 만든다. 줄다리기는 암수줄다리기와 외줄다리기가 있다. 암수줄다리기는 암줄과 수줄을 연결하여 당기는 것인데,  암줄과 수줄을 연결할 때에는 비녀목을 사용한다. 마을의 동부와 서부, 또는 남과 북, 내의 이쪽과 저쪽이 한 편이 되어 당기는데, 남성적인 지형의 마을에서 수줄을 만들고, 여성적인 지형의 마을에서 암줄을 만든다. 이 때, 줄다리기에서 이긴 마을은 풍년이 들고, 진 마을은 흉년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줄다리기에서 이기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줄다리기를 마친 후에 줄은 썰어서 자기 논에 뿌리면 풍년이 든다 하여 썰어서 나누어 갖는다. 

  외줄다리기는 하나의 줄을 만들어 가운데에 표시를 하고, 편을 갈라 한쪽씩 잡고 당긴다. 외줄다리기는 한 마을에서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힘을 겨루는 것이 보통인데, 여자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남녀가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는 마을에서는 늘 여자 편이 이긴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이들과 총각은 여자 편이 되기 때문에 성년 남자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줄을 당겨도 여자 편을 이길 수 없다고 한다. 줄다리기를 마친 줄은 그 마을의 수호신인 당신(堂神)에게 감아 주는 마을도 있다.       

  줄다리기가 널리 행해지던 정월 대보름날은 새해 들어 보름달을 처음 맞는 날로, 풍요(豊饒)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줄다리기할 때의 줄은 용(龍)을, 줄다리기는 용신의 성행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줄다리기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특별한 날에, 기후를 조절하는 신이한 능력을 지닌 용신(龍神)을 자극하여 풍년이 들게 하려는 제의적 성격을 띤 놀이라 하겠다. 울산, 진주 등지에서는 가물 때 기우제(祈雨祭)에서 줄다리기를 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물을 주관하는 용신을 자극하여 비를 내리게 하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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