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와서 한국어와 한국문학, 한국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이곳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틈이 나는 대로 여러 곳을 여행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만난 일은 잊을 수 없다.
지난해 6월 서울장위교회 교우들과 함께 터키의 에게해 연안에 있는 작은 도시 셀축(Selçuk)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안내자가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여 크게 기뻐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식당은 터키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한국의 비빔밥을 만들어 주었다. 며칠 동안 터키 음식만 먹어 한국 음식이 그립던 차에 비빔밥을 먹으니 아주 맛있었다. 점심 식사 후에 에페스(성경에 나오는 에베소) 유적을 돌아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빨리 차에 오르라는 안내자의 독촉이 있어서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식당 밖으로 나왔다. 버스에 오르려고 하는데, 한 터키 노인이 다가와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였다. 나는 시간에 쫓기기는 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얼른 한국어와 터키어로 인사를 하고, 말을 주고받았다.
그 분은 한국어도 영어도 잘 못하셔서 터키어로 대화를 해야 하는데, 나의 터키어 실력이 엉망이니, 난감하였다. 서로 아는 단어를 총동원하여 대화를 시도하였다. 한국어, 영어, 터키어 단어를 섞어가며 말하여 그 분이 말하려는 뜻을 대강 짐작하였다.
“나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터키 군인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목숨을 걸고 싸우며 지킨 한국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당시에는 한국의 상황이 매우 처참하였는데, 60여 년이 지난 오늘 전쟁의 상처를 씻고 발전한 한국이 매우 자랑스럽다. 한국인들이 보고 싶어서 한국인이 많이 오는 한국음식점 앞에 왔다. 한국인을 만나니 참 기쁘다.”
그 분은 이렇게 말하면서 한국전쟁 당시에 한국에서 찍은 자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군복을 입은 한 젊은이가 서 있는데, 정말 미남으로 의젓하고, 듬직해 보였다. 그 분의 얼굴과 사진을 다시 보니, 그 분의 옛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그 분은 한국에 있을 때의 일을 조금 이야기하였다. 그 때 배운 민요 <아리랑>도 안다고 하였다. 우리가 불러 보라고 하니 큰 소리로 부르는데, 음정과 박자를 맞춰 아주 잘 불렀다. 우리들이 <아리랑>을 함께 부르니, 그 분은 신명이 나서 더 힘껏 불렀다. 우리는 그 분과 함께 <아리랑>에 이어 <도라지 타령>도 불렀다. 그 분은 흥이 나서 가볍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 분의 표정엔 흥분과 기쁨, 흐뭇함과 감동이 교차되어 나타났다. 내가 그 당시에 터키 군인들이 불러서 한때 한국에서 유행하였던 터키 민요 <위스크다르>를 시작하니, 그 분은 그 노래를 어찌 아느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큰 소리로 불렀다. 나는 그 노래를 어렸을 때 많이 들었는데, 처음 부분만 알고 중간 이후는 잘 몰라 함께 부르지는 못하고, 손뼉을 치며 흥을 돋우었다. 식당 앞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구경하였다.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고 나서 “한국인은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와준 터키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하는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 분은 만나서 반가웠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내게 작게 접은 종이쪽지를 주었다.
버스에 올라 그 분이 내게 준 종이쪽지를 펴 보았다. 그것은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서툰 글씨로 써서 복사한, 명함 두 배 크기의 종이였다. 거기에는 ‘두르무쉬 알리 지빌(Durmuş Ali Civil)’이라는 자기의 이름과 ‘Belediye Huzur Evi Md. Selçuk İzmir’라는 집 주소가 씌어 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보며 나이 들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일을 생각하며 한국인을 만나보고 싶어 한국음식점 앞으로 나온 그 분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후 일정에 쫓겨 그분과 시간을 더 나누지 못하고 작별한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우리를 만난 기쁨과 바로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을 얼굴 가득 보이며 우리가 탄 버스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서 있던 그 분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린다.
서기 1950년 6월 25일에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고, 대한민국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였다. 이 때 우리를 도와주어 나라를 지키게 한 것은 유엔군이었다. 유엔군을 파견한 나라는 16개국인데, 그 중에 미국,영국,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군인을 보내준 나라가 터키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군인의 수는 15,090명이다. 그 중 741명이 전사하였고, 2,068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407명이 실종되었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모두 3,216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터키 문화원 자료 참조). 한국과 터키의 거리는 약 8,000km로 아주 먼 나라이다. 먼 곳에서 한국을 도와준 터키는 정말 고마운 나라이다.
한민족과 터키 민족(한자어로 돌궐족)은 아주 먼 옛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웃하여 살던 민족이다. 삼국 시대만 하여도 돌궐족은 고구려와 이웃하여 살면서 중국이 침략할 때에는 서로 돕던 민족이다. 그 후 돌궐족은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일부는 중국의 신강 지방에 정착하고, 일부는 이동을 계속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지금의 터키)에 자리 잡았다. 먼 옛날에 이웃하여 서로 도우며 살던 한민족과 터키 민족이 현대에는 대한민국과 터키공화국을 세우고 살고 있다. 한국에 전쟁이 일어나자 터키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도와주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말이 빈 말이 아닌 것 같다.
나는 터키에 와서 지내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분들이나, 그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가 알고 싶고, 그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참전용사회관을 방문하고,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만났으며, 참전용사 자손들도 만나 보았다. 참전용사 중에는 한국의 초청으로 한국에 다녀온 분들도 있고, 한국에 가보지 못한 분들도 계셨지만, 전쟁 당시의 참혹하였던 모습과 함께 한국의 발전상을 아는 대로 이야기하였다. 그분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한국의 눈부신 발전에 놀라움과 함께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 참전용사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감사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손들에게 한국은 형제의 나라임을 강조한다고 하였다. 그분들은 한국인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그 분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나는 얼마 전에 셀축에서 아리랑을 함께 부르던 어르신께 우리 일행과 함께 찍은 사진을 인화하여 그 분이 적어준 주소로 우송하였다. 그 분은 그 사진을 보며, 우리와 함께 부르던 한국민요 <아리랑>과 <도라지 타령>, 한국에서 부르던 터키 민요 <위스크다르>를 다시 흥얼거리며 한국을 마음속에 떠올릴 것이다. 그분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면서 한국에 대한 좋은 소식을 많이 들으시기를 기원한다.
셀축은 이즈미르(İzmir)에서 남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 있는, 인구 약 25,000명의 도시이다. 셀축은 가까이에 에페스(에베소)가 있고, 많은 참배객이 찾아오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곳이어서 고대로부터 역사의 중심지로 이름이 있다. 셀축은 바울 사도가 전도 여행 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고, 성모 마리아의 집과 성 요한 교회 등이 있어서 기독교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다.
셀축은 아야슬룩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평화로운 도시인데, 둘레에 있는 관광 명소를 찾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이곳은 활기가 넘치는 관광 명소라기보다는 관광객이 며칠 동안 머물면서 주변 관광을 하는 베이스 캠프(base camp)로 삼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Efes Arkeoloji Müzesi)
셀축 시내에 있는 이 박물관에는 에페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은 모두 6개인데, 출토 장소와 종류에 따라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다. 제1전시실에는 테라스식 주택에서 캐낸 저울, 장신구, 화장품 상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거기에 거대한 남근을 자랑하는 조각상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그 조각상은 다산(多産)의 신 프리아포스(Priapos)이다. 프리아포스는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그 지역과 농토, 포도밭을 지켜주는 신이다. 과장된 남근은 풍요의 상징이다.
다산의 신 프리아포스
로마 시대의 주화
다른 전시실에는 주화(鑄貨), 장례용품, 조각상 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 전시실은 에로스(Eros)를 묘사한 조각들로 채워져 있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으로, 활과 화살을 가진 나체의 어린이로 나타나는데, 그가 쏜 금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지고, 납화살을 맞으면 증오하게 된다고 한다. 이 전시실에는 에로스의 역할을 드러내는 조각상이 많이 있다. 또, 거대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머리와 팔도 볼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 룸도 있어 소크라테스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 다른 전시실에는 검투사들이 사용하였던 무기와 훈련 방법, 이들이 주로 당했던 부상의 유형 등을 보여 주었다.
사랑의 신 에로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제6전시실의 아르테미스 상이다. 이 전시실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조각상이 양쪽에 하나씩 둘이 있는데, 좀 작은 것은 프리티네이온에서 발견된 것을 옮겨온 것이고, 조금 큰 것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것을 축소하여 복제한 것이다. 여신의 조각상의 좌우에 있는 동물과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은 아나톨리아의 지모신 키벨레를 떠올리게 한다. 여신의 가슴에는 둥근 알 같은 것이 20여개 달려 있다. 이것은 꿀벌의 알 또는 황소의 고환이라고 하는데, 풍요의 상징이다. 배 부분에는 사자, 소, 꿀벌, 장미, 그리핀(griffin, 머리·앞발·날개는 독수리이고, 몸통·뒷발은 사자인 상상의 동물)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풍요를 나타낸 것이다. 나는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고대인들이 사랑, 풍요에 대한 갈망이 매우 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아나톨리아의 지모신 키벨레 여신상
프리티네온에서 발견된 아르테미스 여신상
아르테미스 신전에 있던 아르테미스 여신상
요한 사도 교회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요한 사도를 기리기 위해 세운 교회이다. 요한은 두 차례에 걸쳐 에페스에 왔다. 한번은 서기 37년에서 48년 사이에 어머니를 보살펴 달라는 예수의 부탁을 받은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이곳으로 모시고 와서 살았다.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요한이 자기의 신전에 참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트모스(밧모)섬으로 귀양 보냈다. 요한은 귀양에서 풀려나온 뒤인 서기 95년에 다시 와서 지금 요한 사도 교회가 있는 아야술룩(Ayasuluk) 언덕에서 복음서를 집필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요한 사도 교회는 4세기경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 교회는 6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Emperor Justianus, 재위 A.D. 527-565) 황제가 대대적으로 증축하였다.
이 교회는 가로 110m, 세로 140m 넓이의 땅에 6개의 돔으로 되어 있었다. 교회는 안뜰, 현관, 본당, 부속 예배당, 세례장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본당의 제단에는 복음서의 저자들을 상징하는 4 개의 기둥과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상징하는 3개의 기둥을 세웠다. 교회 안에는 4세기경에 나무로 지은 작은 예배당과 요한 사도의 무덤이 있다. 예전에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목조 건물 안에는 예수, 성모 마리아, 요한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요한 사도 교회는 지진과 약탈 등으로 오랜 세월 폐허로 남아 있다가 100여 년 전에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교회 뒤편에는 교회 평면도와 복원 모형이 있어 당시의 웅장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요한사도교회 입구에 있는 박해의 문
요한사도교회
요한사도교회 복원도
요한 사도 기념교회를 가기 위해서는 ‘박해의 문’을 지나서 올라가야 한다. 박해의 문이 세워진 데에는 깊은 사연이 있다. 기독교가 공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한편으로는 기쁨과 감사의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 친지를 박해하여 죽게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들은 복수를 위해 돌멩이를 들고 원형경기장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그 돌을 던지지 않고, 요한 사도의 무덤 앞에 모아 박해의 문을 세웠다.
나는 요한 사도 기념교회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에 박해의 문을 지나면서 박해를 받아 죽던 옛 신도들의 처참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돌을 들고 원형경기장으로 달려가던 성난 신도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성난 신도들이 복수를 위해 돌을 던지지 않고 자제한 뒤에 복수의 문을 쌓게 된 힘은 어디서 왔을까?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 친지를 죽인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멈추게 한 것은 바로 요한 사도가 가르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난 신도들이 자제하지 않고 복수의 돌을 던졌다면, 유혈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고, 기독교의 복음은 허구라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사건은 기독교 발전에 큰 변수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요한 사도가 힘주어 가르친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한사도교회의 세례소
요한 사도의 묘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
이오니아인들이 이 지역에 왔을 때, 전부터 살고 있던 렐레기안(Leleggian) 족은 풍요(豊饒)와 자연의 여신 ‘키벨레(Cybele)’를 숭배하였다. 이오니아인들은 선주민들과 평화롭게 융화하면서 이 지역의 토속신앙인 키벨레 신앙을 받아들여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앙을 탄생시켰다. 이것은 사냥과 관계가 깊은 일반적인 그리스 신화 속 여신 아르테미스가 아닌 다산(多産)과 풍요를 상징하는 에페수스(에베소)만의 독특한 아르테미스 신앙이다. 사람들은 이 여신을 모시고 제사하기 위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을 세웠는데,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원근 각지의 주민들은 이 신전에 와서 절하며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이 신전은 B.C. 356년 헤로스트라투스(Herostratus)라는 사람이 불을 질러 불에 탔다. 그런데 그가 신전에 불을 지른 이유는 ‘유명해 지고 싶은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이 신전이 불타던 날 밤에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났다. 전설에 의하면 아르테미스 여신은 이날 밤 알렉산더의 출생을 축하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의 수도에 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신전에 불에 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34년에 이곳에 도착하여 보니, 신전을 다시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알렉산더는 공사비용을 자기가 부담할 터이니 신전을 자기 이름으로 바치게 해 달라고 하였다. 에페수스 사람들은 자기들이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알렉산더 이름으로 바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이 또 다른 신에게 신전을 바친다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닙니다.’ 하는 재치 있는 말로 거절하였다. 신전은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완공되었는데,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크고 웅대하였다. 이 때 지은 신전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가 되었다. 이 신전은 옛날의 웅장한 모습은 볼 수 없고, 기둥 하나만 외롭게 서 있다.
성모 마리아의 집
성모 마리아의 집은 셀축에서 약 11km, 에페스(에베소)의 아래쪽 정문(북쪽문)에서 약 8.5km, 위쪽 정문(남쪽문)에서 약 7km 거리에 있는 뷜뷜산(Bülbül Dağı)에 있다. 이 집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에페스에 정착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A.D. 37-48) 살았던 곳이다.
신약 성경 요한복음(19:26-27)을 보면, 예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 마리아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제자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당부를 받은 요한은 그 때부터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고 한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뒤에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고, 가뭄과 기근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 때 요한은 마리아를 모시고 수리디아 안디옥 즉 지금의 터키 안타키아(안디옥)로 갔다가 에페스(에베소)로 왔다. 에페스에 온 요한은 마리아를 조용한 곳에 집을 짓고 사시게 하였다고 한다.
마리아가 에페스에 온 것은 확실하지만, 그녀가 살던 집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잘 몰랐다. 지금의 ‘마리아의 집’을 발견한 것은 독일인 수녀 캐더린 에머리히(Catherine Emmerich)가 1878년에 펴낸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에 의해서이다. 케더린 수녀는 이 책에서 ‘병상에서 마리아의 환상을 보고, 꿈속에서 살던 집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1891년 이즈미르의 성직자들이 탐사(探査)하여 숲속에서 옛 집터를 발견하였는데, 이 책에 기록된 것과 거의 일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캐더린 수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독일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곳에 있던 집은 6세기경에 지어진 것인데, 일부는 1세기경의 것으로 밝혀졌다. 마리아의 집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성모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 집터를 성지(聖地)로 선포하였다.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이곳을 방문한 뒤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마리아의 집으로 가는 길가의 마리아상
나는 2009년 11월에 승용차를 빌려 타고 이곳에 갔다. 마리아의 집으로 올라가는 꼬불꼬불한 산길의 양편에는 올리브나무와 무화과 나무가 울창하였다. 올라가는 길가에는 성모 마리아의 동상이 에페스 유적지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그 옆에는 마리의 집 방문 시간(08:00-19:00)을 적고, 그 아래에 앞으로 6km를 더 가라는 말을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마리아의 집 입구에는 올리브나무와 키가 큰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기념품 가게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커다란 웅덩이가 보이는데, 옛날 세례를 행하던 곳이다. 깊이가 1.5m쯤 되어 보이는 이 웅덩이는 꽤 넓어서 한꺼번에 50여 명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서 조금 앞으로 가니, 두 길이 있었다. 위로 난 길은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래에 있는 길은 나오는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위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터키에 사는 교민들이 만들어놓은 한글 안내판이 서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마리아의 집 앞에 있는 한글 안내판
마리아의 집 앞의 마리아상
교회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아담하였다. 교회 내부는 사진 촬영을 금하는 곳이므로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옷깃을 단정히 한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 강대상 뒤에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걸려 있다. 은은한 불빛이 비치는 교회 안은 엄숙하고 경건함을 느끼게 하였다.
마리아의 집
마리아의 집 앞에서 촛볼을 켜고 기도하는 사람들
마리아의 집 앞에 있는 소원의 벽
교회 아래에는 성수(聖水)로 알려진 샘터가 있다. 그 옆에는 촛불을 켜놓고 소원을 비는 곳도 있고, 소원을 적은 쪽지를 걸어놓은 '소원의 벽’도 있다. 소원의 벽에는 소원을 적은 종이와 헝겊이 잔뜩 걸려 있다. 그것은 외국인이 걸어놓은 것도 있지만, 무슬림인 터키인들이 걸어 놓은 것이 더 많다고 한다. 무슬림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비는 것은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에 마리아를 ‘선지자 예수(İsa Peygamber)의 어머니(Meryemana)’로 기록하였으므로, 마리아를 ‘거룩한 여인’으로 숭배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외국인인 듯한 사람이 많았지만, 터키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히잡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슬림인 것이 확실한 여인들도 더러 보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이곳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무슬림들도 성지로 받드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누가의 묘
에페스(에베소) 유적지로 들어가는 주차장 옆에 누가의 묘가 있다. 누가의 묘에는 십자가 밑에 황소를 새긴 비석이 있다. 누가의 묘 앞에는 한글로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거기에는 누가의 행적과 누가의 묘 발견 경위 등이 적혀 있다.
누가의 묘는 이오니아식 건축 양식을 따라 16개의 기둥을 세워 16m의 길이로 건축된 건물 옆에 있었다. 지금은 몇 개의 기둥만 보이는데, 원래 이 건물은 로마 시대에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었다. 이후 비잔틴 시대에 그 구조를 변형시켜 서쪽을 입구로 하고, 동쪽을 머리 방향으로 하여 예배 처소로 사용하였다. 1860년 영국의 고고학자 P.J. Wood가 오데이온을 발굴하던 중 귀가 길에 본건물의 일부인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판정하였다. 누가의 묘는 잊혀져 있었는데, 이즈미르에 사는 교우들이 에페스 박물관에 누가의 무덤을 손질해 달라고 청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누가는 헬라인으로 수리아 안디옥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엔자와 어머니 이리스는 로마의 판사 디오도로스 시리누스의 아버지인 푸리스쿠스의 종이었다. 푸리스쿠스는 누가의 아버지가 헌신적으로 일하다가 죽자 그의 가족을 해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였다. 누가는 디오도로스 시리누스의 딸 루불리아를 사랑하였는데, 그녀가 말라리아로 죽었다. 그는 자기의 애인을 앗아간 원수와 싸워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거기서 감리엘이라는 유대인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예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바울의 친구이자 동역자, 개인 의사로 가까이 하면서 바울의 선교를 도왔다.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독교인으로 로마의 원로인 클레멘스 집정관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올리브 나무에 목매달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후 누가의 시신은 요한 사도가 사역하는 에페스에 묻혔다고 한다.
누가의 묘 비석
7인의 잠자는 동굴(Yedi Uyunlar Mağarası)
마리아의 집에서 에페스로 가는 길에서 조금 들어가면 잠자는 7인의 동굴이 있다. 이 동굴에는 아주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A.D. 3세기 중엽 로마 데키우스(Decius) 황제가 기독교를 몹시 탄압하였다. 7인의 기독교인이 박해를 피하여 파나이오르 산(Panayır Dağı) 북동쪽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쉬다가 잠이 들었다. 데키우스 황제의 수하들은 이 동굴을 발견하고, 벽을 쌓아 동굴 입구를 막아버렸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뒤에 이 지역에 지진이 발생하여 동굴 입구를 막았던 벽이 허물어졌다. 그 때 잠들었던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들은 배가 몹시 고팠다. 그 중 한 사람이 마을로 내려가 보니,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먹을 것을 사려고 가게에 들어가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놓았다. 가게 주인은 “이 돈은 옛날에 쓰던 돈으로 지금은 쓰지 않는데, 어찌 이 돈을 내느냐?”고 물었다. 그가 사실대로 말하니, 가게 주인은 지금은 데오도시우스 2세 황제 시대로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데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이를 부활의 증거로 받아들이고, 이곳을 방문하여 ‘부활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7인이 돈독한 신앙을 지키며 살다가 죽자 이 동굴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이곳에 교회를 지었으나 허물어져 지금은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동굴에는 수많은 구덩이가 보이는데, 수도사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이 전설은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제18장 10절 주(註)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무슬림들도 이곳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7인의 잠자는 동굴
7인의 잠자는 동굴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에페스는 이즈미르(İzmir) 주의 셀축(Selçuk) 지역에 있는 고대 도시이다. 터키에서 세 번째 큰 도시인 이즈미르에서 남쪽으로 약 74km, 셀축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있다. 터키에서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성경에 나오는 ‘에베소’가 바로 이곳이다.
에페스는 기원전 6,000년경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청동기 시대 이후로는 히타이트인의 거주지였는데, 그들은 이곳을 ‘아파사르’라 하였다. 에페스는 기원전 1,200년경에 그리스 지역에 살던 이오니아인들이 이곳 해안 지역으로 와서 정착하여 살면서 프리에네, 밀레투스와 함께 건설한 도시이다. 이오니아인들이 이 지역에 왔을 때, 거기에는 렐레기안(Leleggian) 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풍요(豊饒)와 자연의 여신 ‘키벨레(Cybele)'를 숭배하고 있었다. 이오니아인들은 자기들이 전부터 숭배하던 아르테미스 여신에 ‘키벨레(Cybele)’ 신앙을 결합하여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앙을 형성하였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냥과 관계가 깊은 여신 아르테미스가 아니고,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에페스만의 독특한 아르테미스 신앙이다. 사람들은 이 여신을 모시고 제사하기 위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을 세웠는데, 그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였다.
기원전 600년 무렵 에페스에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찾는 신도들과 항구에서 상거래를 하는 상인들이 많이 모였으므로 매우 번화하였고, 그에 따라 도시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리디아(Lydia)의 왕 크로이소스(Croesus)의 공격으로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다. 그래서 아르테미스 신전 남쪽의 내륙 지대로 옮겨 새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 후 에페스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점령할 때까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에 그의 휘하 장군이었던 리시마코스가 이곳을 통치하였다. 그는 인근의 멘데레스 강에서 흘러오는 토사(土砂)가 쌓여 에페스가 항구의 기능을 잃게 되자 주민들을 내륙의 언덕 지대로 이주시켰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에페스 유적이 있는 곳이다. 에페스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크게 발전하여 전성기에는 인구가 25만 명이나 되는 소아시아 지역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뒤에 이곳에 와서 선물을 샀다고 한다. 에페스는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의 신앙이 강한 곳이었지만, 기독교가 전파되어 많은 기독교인이 살았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서 3년 가까이 지내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요한사도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요한복음을 기술하였다.
에페스 항구에 토사가 계속 쌓이자 역대 통치자들은 준설공사를 하고, 강의 물줄기를 돌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토사의 유입은 막지 못하고 개펄과 습지만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습지가 많아지니 모기가 기승을 부리어 말라리아가 널리 퍼졌다. 기독교인이 늘어감에 따라 아르테미스 신전을 찾는 신도들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신전의 재정 상태도 나빠졌다. 7세기 무렵에는 강에서 유입되는 토사가 바다를 메움에 따라 에페스는 항구도시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그에 따라 에페스는 급속도로 쇠락하면서 도시의 중심을 아야술룩 언덕 지금의 셀축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하여 찬란하였던 당시의 문화를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에페스 유적 관람은 북문 매표소로 들어가 남문까지 올라가면서 보아도 좋고, 남문 매표소로 들어가 북문까지 내려가면서 보아도 좋다. 에페스 유적을 본 뒤에 성모 마리아의 집에 가려면 남문 매표소로 들어가 북문 매표소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 나는 2009년 11월과 2011년 6월에 이곳을 찾았는데, 두 번 다 남문 매표소로 들어가 북문까지 내려가면서 관람하였다. 내가 본 순서대로 기억에 남는 곳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문 매표소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는 것은 한글로 ‘에베소의 역사’를 적은 안내판이었다. 먼 나라 터키에서 ‘삼성’ 로고가 그려진 한글 안내판을 보니,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였다.
바리우스 목욕탕(Varius Bath)
에페스에 들어서면 목욕탕이 제일 먼저 방문객을 맞는데, 이것은 다른 고대 도시의 경우와 같다. 먼 길을 여행하는 동안에 묻은 먼지와 병균을 씻고, 피곤한 몸을 쉬게 하려는 뜻에서일 것이다. 목욕탕에서는 아는 사람들을 만나 때를 씻고, 맛사지도 받으면서 사교(社交)를 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1926년에 발굴된 이 목욕탕은 A.D. 1세기에 건립된 목욕탕으로 내부에 냉탕, 온탕, 미온탕, 탈의실, 사우나 등의 시설과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이 욕장은 한국의 온돌처럼 바닥 아래로 온기가 통하도록 되어 있다.
위층 아고라(Upper Agora)
'아고라'는 넓은 마당을 뜻하는 말이다. 아고라에서는 정치적 회의나 종교 의식을 치르기도 하고, 상품을 거래하기도 하였다. 에페스에는 남문 쪽과 북문 쪽에 아고라가 있다. 남문 쪽의 아고라는 폭이 약 73m, 길이가 약 160m인데, 주로 시청에서 주관하는 모임이나 행사가 열렸다. 북문 가까이에 있는 아고라는 상품 거래를 주로 하던 곳으로 남문 쪽 아고라보다 그 규모가 크다.
남문 쪽에 있는 위층 아고라 앞에는 토관(土管)들을 쌓아 놓았다. 이 토관들은 이곳에서 캐낸 것으로, 당시에 도시 전체에 물을 공급하던 수도관이라고 한다. 에페스가 건설되던 B.C. 280년경에 사용하던 것이니, 이 토관들은 2,000년이 된 것이다. 2,000여 년 전에 이런 토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실리카(Basilica)
'바실리카'는 로마 시대에 법정, 교회 따위로 쓴 장방형(長方形)의 회당(會堂)을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시 청사에서 바리우스 목욕탕까지 뻗어 있는 약 165m의 길을 말한다. 아우쿠스투스 황제 때 건립되었는데, 길 양쪽으로 이오니아식 기둥 위에 황소 머리 모양의 조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기둥과 기단(基壇) 부분만 남아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없다.
소극장
산언덕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소극장이 있다. 1,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극장은 A.D. 2세기에 귀족 베디우스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인 플라비아 파피아나 세웠다. 소극장은 지붕을 덮었었기 때문에 극장 안에 물이 빠져나갈 배수로(排水路)가 없다.
이곳에서는 음악회나 시 낭송회 등이 열렸고, 원로회의 같은 정치적 회합도 열렸다. 모든 시민이 참가하는 대규모 회의는 북쪽에 있는 대극장에서 열리고, 이곳에서는 소규모의 공연과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시 청사(Town Hall)
소극장 옆에 에페스 시청 건물이 있다. 3세기에 완공되었는데, 중앙의 광장을 중심으로 도리아식 회랑(回廊)이 있었다. 광장의 중앙에 성화(聖火)가 있었는데, 에페스의 번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1년 내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타오르는 불은 번영을 상징한다고 여겼으므로, 신전의 사제나 도시의 원로가 관리하였다고 한다.
1956년에 이곳을 발굴하다가 두 개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발굴하였는데, 여신상은 현재 셀축에 있는 에페스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쿠레테스 거리(Curetes Street)
셀수스 도서관에서 헤라클레스 문까지 뻗어 있는 대로를 말한다. ‘쿠레테스’는 원래 아르테미스와 아폴로를 낳은 레나 여신을 도왔던 반신반인(半神半人)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에페스에서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업무를 맡아보는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를 거리의 이름에 붙인 것이다.
이 거리는 에페스의 중심 거리로, 양편에는 기둥으로 이어진 회랑(回廊)들이 있었고, 회랑 뒤에는 향료와 비단을 파는 상점들과 주택들이 즐비하였다. 줄지어 있는 원형 기둥 사이사이에 에페스 중요 인물들의 석상이 있다. 히드리아누스 신전, 공중화장실, 스콜라스티카 욕장(浴場), 트리아누스 샘 등도 이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도미티아누스 신전(Temple of Domitianus)
이 신전은 A.D. 1세기에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A.D. 81~96)에게 바친 신전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유능하였으나 독재 경향이 강하고, 남을 시기하고 의심하여 유력한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그는 ‘제2의 네로’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포악한 정치를 하고,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그는 요한사도를 파트모스(밧모) 섬으로 귀양 보냈으며,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기 조카를 처형하였다. 그는 후일 가신들에게 피살당하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기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도록 강요하였으므로, 그의 측근들이 이 신전을 지어 바쳤다. 이 신전은 가로 50m, 세로 100m의 큰 규모인데, 입구에는 7m의 황제 동상이 있었다. 황제가 죽자 신전은 바로 파괴되었다. 황제의 동상은 일부가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기를 신으로 받들어 모신 신전이 완성되자 신전 앞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참배(參拜)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신전 앞을 지나면서도 참배하지 않았다. 황제는 길 가는 사람들을 데려다 참배하게 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게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도 이곳에 끌려와 참배를 강요당하였다. 요한이 끝내 참배하지 않자 요한을 기름 가마에 밀어 넣었다. 요한이 하나님의 섭리로 죽지 않자, 파트모스(밧모)섬으로 귀양 보냈다.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뒤에 에페스로 돌아왔다.
멤니우스 기념묘(Tomb of Memnius)
헤라클레스의 문을 지나기 전에 있는 유적으로, 멤니우스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멤니우스는 로마 집정관 술라(Sulla)의 손자로, 에페스의 발전에 큰 공이 있는 인물이다.
헤라클레스 문(Gate of Heracles)
쿠레테스 거리가 시작되는 곳에 사자 가죽을 어깨에 두른 남자를 새긴 기둥 2개가 있다. 이것이 헤라클레스의 문인데, 부조(浮彫)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영웅인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상징인 사자의 가죽을 어깨에 두르고 있는 형상이다. 원래 6개의 기둥에 아치가 있는 2층 문이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2개 밖에 없다. 이 문은 다른 문과 달리 폭이 좁은데, 이것은 수레의 통행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다. 이 문을 지나면 대리석 도로가 나온다. 이 문 앞에 서면 도시가 한눈에 보인다.
트라이아누스 분수(Fountain of Trajanus)
A.D. 102~114년에 로마 트라이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분수이다. 높이가 12m로 2층으로 된 이곳에 실제보다 3배쯤 더 크게 만든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석상(石像)이 있었는데, 석상의 발끝에서 물이 흘렀다고 한다. 지금은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없고, 연못이 있었던 곳은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비너스, 세턴, 바커스 등의 신과 황실 가족의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스콜라스티카 목욕탕(Scholastica's Bath)
하드리아누스 신전 뒤에 있는 큰 규모의 목욕탕이다. 이 3층 건물인 이 목욕탕은 2세기에 지어졌는데, 4세기까지 여러 번 수리되었다. 4세기에 스콜라스티카란 여인이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증축하였다. 이 목욕탕의 이름 ‘스콜라스티카’는 이곳의 수리를 담당하였던 여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목욕탕에는 냉탕과 온탕 시설이 있었다. 공중탕과 함께 개인탕도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Temple of Hadrianus)
A.D. 138년에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신전이다. 이 신전은 에페스에서 셀수스 도서관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건축물이다. 이 신전은 도서관에 비하여 규모는 작지만, 코린트식 기둥과 아치의 조각이 아주 정교하여 인상적인 신전이다.
건물 현관 입구에 4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가운데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다. 현관을 들어서면 정면 아치에는 행운의 여신 티케가 조각되어 있고, 그 안쪽에는 양팔을 벌린 메두사가 조각되어 있다. 그 아래에는 왼쪽부터 아테나 여신, 셀레나 신, 아폴로 신, 에페스를 건설한 안드로클루스, 헤랄테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 데오도시우스 황제, 아르테미스 여신, 데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조각되어 있다. 신전 벽에는 에페스의 기원 전설이 새겨져 있다.
이오니아를 다스리던 안드로클루스(Androclus)는 북쪽에 사는 도리아인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떠나기에 앞서 델피(Delphi) 신전에 가서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지 신탁을 내려 달라고 하였다. 그는 ‘물고기, 불, 멧돼지’의 도움을 받아 새 도시를 건설하라는 신탁을 받았다. 그는 백성들을 이끌고 터기의 서해안으로 왔다. 그가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굽고 있는데, 살아있던 물고기가 그릇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숯불을 뒤엎었다. 이 때문에 근처 숲에 불이 나게 되었다. 그 때 숲에 숨어 있던 멧돼지가 놀라 뛰어나와 해변을 가로질러 도망갔다. 안드로클루스는 이 멧돼지를 뒤쫓아 가서 잡았다. 그는 멧돼지를 잡은 곳에 터를 잡고, 에페스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맞은편에는 고급 주택의 터가 있다. 이곳은 고관들과 귀족들이 살았던 곳으로, 바닥을 모자이크화, 프레스코화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7세기 무렵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공중화장실(Roman Man's Toilet)
하드리안 신전 왼쪽에 50여 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이 있다. 중앙에 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있고, 그 둘레에 대리석 변기와 작은 수로가 있다. 화장실 바닥은 모자이크가 있고, 수로에는 깨끗한 물이 흐르도록 설계되었다.
자기 집에 화장실이 있을 터인데, 공중화장실을 지어놓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공중화장실은 외출하여 거리에 나온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겠지만, 당시에 여유 있는 사람들이 사교의 장으로 활용한 공간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유곽(House of Love)
고대의 매춘업소로 추정되는 유곽이 쿠레테스 거리와 대리석 거리가 만나는 모서리에 있다. 이 건물은 다수의 작은 방들이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데, 4세기 무렵에 지어졌다. 매춘부들이 일을 하던 유곽에는 창문이 없었다. 당시의 방은 벽감(벽에 우묵하게 파놓은 부분) 위에 촛불을 두어 실내를 밝혔으며, 이 건물 바닥에는 사계절을 알리는 모자이크 들이 남아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살롱에는 비너스 조각이 있었다.
대리석 거리에는 유곽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는데, 대리석판에 머리를 단장한 여인의 얼굴, 하트 모양, 조그만 동그라미와 발 모양을 음각하였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광고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곽의 안내판에 발을 그려놓은 것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대리석에 그려진 발보다 작은 사람 즉, 미성년자는 들어올 수 없음을 알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곳을 찾은 남자들은 손과 발을 씻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위생에 신경을 썼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에페스의 유곽은 항구와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러므로 오랜 기간을 바다에서 보낸 뱃사람이나 상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매춘은 지극히 정상적인 직업의 하나로 여겼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당시 에페스의 도시 규모에 비하여 유곽 건물이 아주 작은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고 한다.
셀수스 도서관(Library of Celsus)
셀수스 도서관은 대리석 거리의 끝에 위치한 아름다운 건물로, 에페스의 상징과 같은 건축물이다. 이 도서관은 2세기 중반에 로마의 아시아 주 총독이었던 셀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아들이 지은 것이다.
2세기 초반에 로마 황제는 셀수스 폴레마이누스(Celsus Polemaeanus)를 소아시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소아시아 주의 수도였던 에페스로 부임하여 임무를 마친 뒤에 70세에 이곳에서 죽었다. 그 후에 로마의 집정관이 된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아쿠일라(Tiberius Julius Aquila)가 에페스에서 사망한 자기 아버지를 추모하는 뜻에서 이 도서관을 건립했다. 셀수스는 이 도서관 서쪽에 묻혔다.
이 도서관에는 모두 12,000여 권의 두루마리 문서가 소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뭄(베르가마)의 도서관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도서관 내부를 보면, 외벽과 내벽 사이에 1m 가량의 틈을 두어 통풍이 되게 함으로써 책들이 극심한 온도와 습도의 변화에도 손상되지 않도록 했다. 이 도서관은 정교한 건축 기법을 적용하여 실제 규모보다 더 크게 보이도록 하였다. 전물 정면 하단은 볼록한 구조로 되어 있어 본관을 더 높게 보이도록 했고, 기둥과 기둥머리들도 끝부분보다 가운데를 더 크게 만들었다.
건물 정면 1층 벽에는 4명의 여인의 석상이 있는데, 이들은 각기 지혜, 덕성, 학문, 지식을 상징한다. 지금 이곳에 있는 석상은 모두 모조품이다. 이 도서관은 오스트리아 고고학연구소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는데, 그 때 진품은 오스트리아로 가져갔다. 그래서 진품은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에페수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업 아고라(Commerical Agora)
대리석 거리 오른편에 위치한 가로 세로 110m의 넓은 터로 된 이 아고라는 기원전 3세기경에 설치되었다. 두 줄의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뒤에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던 것 같다. 이 아고라는 에페스의 중앙시장 역할을 하였다. 항구와 가까운 곳에 조성되어 있어서 유럽과 지중해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들이 식료품, 향료, 금은보석, 도자기, 고급 옷감 등 온갖 상품을 거래하였다. 이곳에서는 물건뿐만 아니라 잡혀온 노예들까지 거래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커다란 시장이 형성되면서 온갖 물자는 물론 각처에서 각종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어 매우 번화하였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 와서 27개월을 지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시장에서 천막을 만들어 팔면서 복음을 전파하였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 모여 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합당한 행동과 처신을 가르쳤다.
대리석 거리(Marble Street)
대극장에서 셀수스 도서관까지 대리석으로 된 길을 말한다. 원래는 아르테미스 신전까지 길이 뻗어 있었다고 한다. 길 아래에는 대형 수로(水路)가 있었다. 이 길 바닥에 여인의 모습과 왼발이 새겨진 돌이 있는데, 이는 유곽을 광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대극장(Great Theatre)
피온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지은 이 극장은 원래 리시마쿠스(Lysimachus) 황제 때 건설되었다. 지금 있는 극장은 A.D. 41년에서 117년 사이에 로마인들에 의해 개축된 것이다. 대극장은 지름 154m, 높이 38m의 반원형 구조로 되어 있다. 극장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약 18m 높이의 무대 정면 건물은 3층으로 되어 있고, 각종 부조(浮彫)와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지름이 약 40m인 무대가 있는데, 정교한 음향적 구조로 되어 있다. 관중석은 무대에서 멀어질수록 아래쪽 좌석보다 경사가 더 급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것은 보다 나은 시야 확보와 음향 효과를 위한 것이었다. 이 극장의 최대 수용인원은 약 25,000명이다. 고대 극장은 전체 주민의 10%가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규모로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고고학자들은 에페스의 전체 인구가 이 원형극장 수용인원의 10배인 250,000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극장에서는 민회(民會)를 열기도 하고, 연극을 비롯한 문화 예술 공연을 하였다. 로마 시대 말기에는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도 벌어졌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절에는 기독교인들이 사자와 결투를 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19:21~41)에는 바울 사도가 에페스에서 전도할 때 이곳 대극장에서 일어난 소동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이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모형을 만들어 팔아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바울의 선교로 기독교인이 늘어감에 따라 아르테미스 여신에 대한 신앙심이 약해지고, 여신의 모형도 잘 안 팔리는 것에 앙심을 품고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그러자 그의 말에 끌린 사람들이 바울과 함께 전도하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서 대극장으로 끌고 갔다. 바울이 군중 속에 들어가려고 하니, 제자들이 말렸다. 바울을 아는 몇몇 고관들도 바울에게 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다. 바울은 극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시민들이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곳도 이곳 대극장이다.
객석 위쪽에 오르니, 대극장에서 항구까지 나 있는 아르카디안 거리와 멀리 항구 목욕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음향 효과가 매우 좋아서 현재 터키에서 1년에 한번 특별 공연을 한다고 한다.
2009년 11월에 이곳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나는 이곳의 음향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 궁금해 하면서 이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때 유럽에서 온 것 같은 단체관광객 20여 명이 무대에 서서 손을 잡고 합창한 뒤에 한 남자가 독창을 하였다. 나는 객석 중간쯤에 앉아 이들의 노래 소리를 들었다. 마이크를 쓰지 않는데도 합창 소리는 물론, 독창 소리까지 잘 들리는 것을 확인하고, 음향 효과가 뛰어난 것을 알았다.
2011년 6월에 갔을 때의 일이다. 노래를 잘 부르는 이 사장에게 무대로 내려가 한 곡 부르라고 하고, 장위교회 교우들은 객석 중간 부분에 앉았다. 이 사장은 사양하다가 찬송가 한 곡과 가요 한 곡을 불렀다. 이 사장과 몇 십 미터 떨어져 앉아 있었지만, 이 사장의 곱고 아름다운 노래 소리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일행 중에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 더 듣지 못하고 자리를 뜨게 되어 아쉬웠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습니다.
사르디스는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8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옛 도시로, 지금은 사르트(Sart)로 불린다. 사르디스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데’이고, 구약 성경에 나오는 ‘스바랏(Sepharad)’이다. 사르디스는 트몰루스 산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산줄기 중 헤무르스 강을 끼고 있는 산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던 전략적 요충지로, B.C. 7세기 당시 번성했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다.
사르디스는 B.C. 546년경 페르시아에 정복당하여 지배를 받았다. 페르시아가 알렉산더에게 패한 뒤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B.C. 133년 로마로 넘어갔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대도시권의 중심지이자 로마령 리디아 지방의 사법권 집행의 중심지였다. A.D. 17년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어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번영하여 아나톨리아의 대도시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다. 그 당시에 모직물, 양탄자, 금세공 등의 상공업이 특히 성하였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사르디스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대 교회 가운데 하나에 속하였던 관계로 대교구가 설치되는 등 번성하였다. 그러나 잦은 지진과 터키 및 몽골 민족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지금 볼 수 있는 사르디스 유적은 1910~1914년에 발굴하고 복원한 것이다. 이곳에는 고대 리디아의 성채와 리디아인 무덤이 약 1,000개 정도 남아 있다.
리디아 왕국의 수도인 사르디스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러나 약한 곳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 하였기 때문에 두 번이나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한 번은 기원전 546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시루스) 왕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고, 그 다음은 기원전 218년에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에 의해 함락되었다.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가 쳐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리디아 군사들은 성 밖의 전투에서 패하자 성안으로 들어와 성문을 닫고 수비에 전력을 다하였다. 페르시아군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아크로폴리스를 공격할 방법을 찾지 못해 여러 달 동안 지체하였다. 리디아 군사들은 적군이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안심하면서 긴장을 풀었다. 어느 날, 성 위에서 보초를 서던 리디아 군사 한 명이 깜빡 졸다가 투구를 성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를 본 페르시아 군사들은 얼른 몸을 숨겨 자취를 감추었다. 투구를 떨어뜨린 병사는 적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성이 맞닿아 있는 절벽 사이로 내려와 투구를 주워가지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의 약점을 알아차린 페르시아 군은 그곳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성문을 열어 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요한계시록 3장의 사데교회에 보낸 서신에 “만일 네가 깨어 잊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계 3:3)”는 경고의 말씀은 이 이야기와 관련된 표현이라 하겠다.
사르디스 유적지에 도착해 보니, 산줄기에 끝에 요새벽(要塞壁)의 유적이 남아 있어 아크로폴리스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토물루스 산에서 아크로폴리스로 놓았던 로마풍의 수로교(水路橋)의 잔해 있고, 로마 시대의 극장과 경기장도 있다. 아크로폴리스 서쪽에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높이 서 있는데, 그곳이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이다. 남아 있는 기둥의 높이와 숫자로 보아 이 신전은 규모가 대단히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신전에서는 아르테미스 신은 물론 소아시아 지역에서 풍요의 신으로 믿던 키벨레(Cybele) 신도 모시고 제사하였다고 한다. 이 신전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에 교회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신전 남동쪽 구석에 소규모 교회당을 지어 예배를 드렸다. 지금 신전 옆에 둥근 담과 아치형 창문이 있는 벽돌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4세기경에 세운 교회 건물이다. 유적지에는 로마식 대규모 목욕탕, 체육관, 유대교 회당 등의 흔적도 있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이곳은 당대 최고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도시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규모가 매우 큰 것으로 보아 당시에 아르테미스 신과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신앙이 매우 널리 퍼지고 성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이곳에는 참된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라 하였고,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계 3:4).”이라고 하였다. 로마 시대에 부(富)와 권세(權勢)를 상징하는 옷은 자주색이었으나 사데의 신앙인은 흰옷을 약속 받았다. 그리고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의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계 3:5).”라고 하여 칭찬과 함께 앞으로 받을 상을 말씀하셨다.
사데 지역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세계 최초의 금화(金貨)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B.C. 560년경 크로이소스왕은 엄청난 양의 사금(砂金)을 채취해 최대의 부(富)를 이룬 왕이 되었다. 당시에 순금을 제련하던 도가니가 이곳에서 무려 300여 개 발굴 되었는데, 도가니 밑바닥에는 순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금이 많이 생산되다 보니, 이곳 주민들의 생활도 비교적 넉넉하였다. 그러다 보니,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숭배(偶像崇拜)와 물질문화(物質文化)에 빠져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계 3:1).”라는 책망을 받았다.
내가 사데 유적지에 간 2011년 6월에도 이곳에서는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는 거기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은 ‘사르트(Sart)’라고 한다. 옛날의 영화를 뒤로 하고, 폐허로 남아 있는 사데의 모습을 보고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쓸쓸하였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