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명당(明堂)에 집을 짓고 살거나,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발복(發福)하여 잘 된다는 의식이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좋은 집터를 골라 집을 짓고 살고, 부모님의 상을 당하면 명당 자리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곤 하였다. 또 집터나 조상의 묏자리를 보고 길흉(吉凶)을 점쳐서 이사를 하거나 이장(移葬)하기도 하였다. 우리 속담에 '잘 되면 제 복, 못되면 조상의 묏자리 탓'이란 말이 있다. 요즈음 가까운 사람과 주고받는 말 중에 "누구는 조상 묏자리 잘 써서 출세하였고, 누구는 할아버지 묘를 잘못 이장하여 망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요즈음에도 민간에서는 집터나 묏자리를 보아 그 집에 사는 사람이나 후손의 운명을 알아보는 '풍수점(風水占)'을 치기도 한다.

  풍수지리설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신라 말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깊이 연구되고, 민간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확산되어 민간에 넓고 깊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풍수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양택풍수(陽宅風水)와 음택풍수(陰宅風水)

  풍수에는 한 나라의 도읍이나 대궐, 마을이나 집터를 어디에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그 나라나 마을, 집안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믿는 양택풍수와 선대(先代)의 묏자리를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자손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믿는 음택풍수가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가 송악산 기슭에 집을 지을 때 지나던 중이 조금 옮겨 지으면 그 집에서 왕이 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중의 말대로 상량(上樑)까지 한 집을 뜯어 옮겨 지었다. 그 중은 신라 말에 풍수 연구로 이름을 떨친 도선(道詵, 596∼667) 대사였는데, 그 뒤에 그 집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태어났다고 한다. 고려 중기 묘청은 송악은 지기(地氣)가 쇠하였으니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야 나라가 융성할 수 있다면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遷都)하기 전에 도읍할 자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양(漢陽)이 풍수지리로 보아 가장 좋은 곳이라는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말을 듣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의 자리를 선정하여 건축할 때에도 풍수지리설을 깊이 고려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모두 양택풍수와 관련된 것이다. 요즈음에도 유명 인사 누구의 집은 자리와 향(向)이 좋아 잘 되는데, 누구의 집은 자리와 향이 좋지 않아 궂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이것은 양택풍수에 관한 의식의 현대인의 마음속에도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누구네 집은 조상의 묘를 잘 써서 잘 되는데, 누구네 집은 묏자리를 잘못 써서 망했다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많이 들었다. 묏자리에는 자손이 우연히 잘되어 부자도 되고, 출세도 하는 명당자리가 있다고 한다. 명당자리에는 먼 훗날에 자손들이 발복(發福)하는 자리도 있고, 당대에 발복하는 자리도 있으며, 묘를 쓰자마자 금시 발복하는 자리도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아들이 죽거나 집안이 망하고 손이 끊어지는 나쁜 자리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손에게 화가 미치는 나쁜 자리를 피하고, 자손이 발복하는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명당을 얻기 위해 스스로 풍수지리를 공부하기도 하고, 풍수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식견을 갖춘 지관(地官)을 찾기도 하였으며, 선행(善行)을 하면서 기원하기도 하였다.

  이번에 퇴임한 김 대통령은 몇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苦杯)를 마신 뒤에 다시 도전하여 1997년 12월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 대통령이 선거에서 당선한 직후에 '몇 번씩 낙선하던 분이 당선된 것은 선대 묘를 명당(明堂)으로 이장(移葬)하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김 대통령 선대 묘를 둘러보려고 모여들어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되었었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한 야당의 총재가 선대 묘를 명당 자리로 옮겼다는 소문이 퍼져 그 곳 역시 한동안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몇 년 전에는 명당의 지기(地氣)를 억제하기 위해 남의 묘에 쇠붙이를 묻어 두었다가 그 일이 탄로나 벌을 받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의 풍수(風水)에 관한 의식이 요즈음에도 매우 강함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풍수설(風水說)의 핵심

  '풍수(風水)'는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뜻의 '장풍득수(藏風得水)'를 줄인 말로, '감여(堪輿)', '지리(地理)', '지술(地術)' 또는 '풍수지리(風水地理)'라고 한다. 생기(生氣)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추게 되기 때문에 바람을 막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 데서 생기가 응결(凝結)한다는 뜻에서 풍수라는 말이 생겼다. 풍수설은 산수(山水)가 신비로운 생기(生氣)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생활의 배후에서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좌우한다고 믿고, 거기에 인간과 사령(死靈)을 일치·조화시킴으로써 인간 생활에 복리(福利)를 추구하려는 하나의 민간신앙이다. 그런데 이것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원용한 생기론(生氣論)과 감응론(感應論)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주에는 인간과 만물의 운명을 지배하는 생기가 있는데, 생기는 바람·구름·비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주류는 땅속에 흘러들어서 대지의 만물을 길러주고 있다. 땅의 생육력(生育力)은 토양 자체가 아니라 땅속을 흐르는 생기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생기는 사람의 몸속에서 피가 핏줄을 따라 흐르듯이 땅속에서 지맥(地脈)을 따라 흐르고 있는데, 그것에 의해 사물이 생겨난다. 생기가 흐르다가 멈추는 곳이 명당(明堂)인데, 그 위에 집을 지으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생기에 감응(感應)되어 발복하고, 조상의 뼈를 묻으면 생기가 그 뼈에 작용하여 그 뼈와 관계가 깊은 자손에게 감응하여 자손이 발복한다. 이것이 생기론과 감응론의 요지이다.

  생기론과 감응론을 바탕으로 한 풍수설은 산·물·방위·사람을 구성 요소로 하여 간룡법(看龍法), 장풍법(藏風法), 득수법(得水法), 정혈법(定穴法), 좌향론(坐向論), 형국론(形局論) 등에 구체화되고, 체계화되었다. 

  풍수설의 안목으로 서울의 경복궁과 성문의 이름을 보면, 매우 재미있다. 경복궁은 북한산에서 뻗어 내려온 북악(北岳)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낙산을 좌청룡(左靑龍)·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목멱산(남산)을 내안산(內案山)·관악산(冠岳山)을 외안산(外案山)으로 하고, 청계천이 동으로 흘러 한강에 합류하여 유유히 흐르고 있어 풍수설의 요건을 잘 갖췄다고 한다. 그런데 한양에도 풍수적인 결함이 두 가지나 있어서 이를 비보(裨補)하였다. 

  첫째, 동쪽인 진방(震方)의 청룡(靑龍)에 허점이 있다. 서쪽의 백호는 인왕산에서 사직동으로 뻗은 내백호(內白虎)와 안산에서 만리동을 거쳐 효창공원까지 뻗은 외백호(外白虎)의 두 겹으로 되어 있어 장풍(藏風) 하기에 충분하지만, 동쪽의 청룡은 한 겹뿐인데, 그것도 동문 근처에서 끊어져 있고, 이 문에서 망우리에 이르는 사이에는 평야가 있어 장풍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인위적으로 보완하기 위하여 동문의 이름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였다. 풍수설에서 '인(仁)'은 '목(木)'에 속하고, 목은 동쪽을 뜻하므로 '흥인'은 바로 동쪽을 반기는 뜻이 된다. '지(之)' 자는 산맥이 구불구불한 모양을 형상적으로 표시하는 문자이므로, 동쪽의 허한 것을 보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동문은 이름을 '興仁之門'의 넉 자로 하고, 산을 쌓아 비보(裨補)하는 대신 반월형의 석축의 울을 쌓아서 외풍(外風)이 들어오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으려 하였다. 

  둘째, 남쪽인 곤방(坤方)에 있는 관악산이 음양설(陰陽說)로 보아 화기(火氣)가 왕성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남문의 현판 '崇禮門'을 세로로 붙였다. 풍수설의 오행을 보면, '예(禮)'는 불에 속하고, 불은 남쪽을 의미한다. '숭(崇)' 자의 예서(隸書)는 불꽃이 일어나는 형상이므로, '숭례(崇禮)'는 '염화(炎火)'의 뜻으로 불이 타오른다는 풍수문자가 된다. 그런데 그 글자를 세로로 쓰면 불이 붙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써서 걸었는데, 이것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마주 대하게 하여 불로써 불을 제압하여 불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조선 고종 때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重建)하고,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뜰에 해태의 형상 둘을 만들어 세웠다. 이것을 두고, 민간에서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전한다. 해태는 수신(水神)을 상징하므로, 물로서 불을 제압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없으므로, 민간에서 풍수와 관련지어 전해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풍수와 관련된 지명(地名)

  우리 나라에는 풍수와 관련된 지명이나 설화가 많이 있다. 이것은 풍수신앙이 넓고 깊게 퍼짐에 따라 일어난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겠다.

  서울 풍수의 안산(案山)인 목멱산(남산)은 생김새가 누에처럼 생겼다 해서 '잠두봉(蠶頭峰)'이라고도 한다. 도시 풍수에서는 안산을 길러야 그 도시에 불행이 없고 번창한다고 한다. 잠두형은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고 사는 형세이므로, 양안술(養案術)은 누에를 먹이는 뽕나무를 심는 것이다. 그래서 남산의 동쪽에 보이는 당시의 사평리(沙坪里)에 많은 뽕나무를 심고, 여기를 '잠실(蠶室)'이라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잠원동(蠶院洞) 일대를 '잠실'이라고 한다.

  서울 불광동 쪽에서 독립문으로 가는 고개를 '무악(毋岳)재'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 터를 물색할 때 하륜(河崙)이 무악재 남쪽을 적극 주장하는데, 일부에서는 명당이 좁다고 반대하므로 태조 3년(1394년)에 태조가 몸소 무학대사를 데리고 가서 조사하였으므로 '무악재' 또는 '무학현(武學峴)'이라 했다고 한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는 '굴레방다리[靭橋]'가 있고, 서강 쪽에 붕괴된 와우아파트가 있던 '와우산(臥牛山)'이 있으며, 무악재 남쪽에 안산(鞍山)이 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큰 소가 길마는 길마재에다 벗어놓고, 굴레는 굴레방다리에다 벗어놓은 다음, 서강(西江)을 향하여 내려가다가 와우산에 이르러 누웠다고 한다. 그래서 '굴레방다리', '와우산', '길마재[鞍山]'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전남 곡성의 진산(鎭山)은 동락산(動樂山)인데, 봉(鳳)이 날아가는 형상이라고 한다. 봉이 날아가 버리면 곡성은 쇠퇴하게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땅이름으로 묶어 놓았다고 한다. 봉은 오동나무에 깃들이므로 봉이 쉴 수 있게 하기 위해 '오지리(梧枝里)'란 땅이름을, 봉은 대 열매만 먹으므로 남쪽에 '죽곡면(竹谷面)'란 땅이름을 지었다. 또 봉은 고양이를 싫어하므로 서쪽을 '묘산(猫山)'이라 하고, 봉은 메추리를 보면 멈추므로 북쪽에 '순자강(鶉子江)'을 두었다고 한다. 

  풍수와 관련된 땅이름 중에는 예언적인 성격을 띤 것도 있다. 충북 청원군 북일면에는 '비상리(飛上里)'란 마을이 있고, 청주시 강서동에 '비하리(飛下里)'란 마을이 있다. 그런데, 1997년 4월 28일에 개항한 청주 비행장의 이륙장(離陸場)이 설치된 곳이 비상리이고, 착륙장이 설치된 곳이 비하리라고 한다. 인천 국제공항은 서울 도심에서 5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영종도(永宗島)와 이 섬에서 5km 거리인 용유도(龍遊島) 사이를 메워서 만든 공항이다. 영종도의 옛이름은 '제비섬[紫燕島]'였는데, 조선 중기부터 '영종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다. 제비는 비행기, 영종(永宗)은 긴 마루라는 뜻으로 광활하게 뻗는 활주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섬과 방파제로 연결된 용유도는 용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노닌다는 뜻으로 볼 수 있으니, 당초부터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내리는 공항이 들어설 자리를 예견하는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충남 당진군 서해안에 '대호지면(大湖芝面)'이 있고, 그 옆의 석문면에 '교로리(橋路理)'라는 마을이 있다. 이 지역에 1981년부터 대규모 간척사업을 하여 큰 호수와 농지가 생겼다. 충남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雲井里)'의 논과 밭은 삽교천 방조제 공사가 완공됨에 따라 삽교호(揷橋湖)로 변하여 아지랑이와 안개가 자욱한 곳이 되었다. 이것 역시 예언적 성격을 띤 지명이다.       

        풍수와 관련된 설화(說話)

  풍수신앙이 널리 퍼짐에 따라 명당자리를 얻기 위한 노력과 정성, 수단과 방법도 다양하여졌다. 그에 따라 크고 작은 일들이 수없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이 풍수 설화의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풍수 설화에는 유능한 지관(地官)을 만나 명당 자리를 얻은 이야기, 적선(積善)을 하여 좋은 자리를 얻은 이야기 등이 있는가 하면, 남을 속이거나 권력을 이용하여 좋은 자리를 차지한 이야기가 있다. 또 자기 선대의 유골을 명당자리에 몰래 묻은 암장(暗葬), 투장(偸葬) 이야기도 있다.

  풍수 설화 중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가난한 노총각이 '금시발복지지(今時發福之地)'에 아버지를 묻고 집에 오니 비가 내리는데, 청상 과부(靑孀寡婦)가 된 서울 재상가의 딸이 비를 피하기 위해 그 집에 들렀다가 함께 살게 되어 장가도 가고,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장가도 들기 전에 죽은 외아들을 '죽은 아들에게서 손자 보는 묏자리[死子生孫之地]'에 묻고 그 옆에 여막(廬幕)을 지어 놓았는데, 죽은 아들의 영혼이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그 여막에 들른 처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아이로 대를 이었다고 한다. 어떤 나무꾼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드러난 해골을 잘 묻어주고 복을 받아 잘 살았는데, 그 자리가 명당 자리였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한 사람에게 호랑이나 노루가 명당 자리를 잡아 주어 잘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요즈음에도 묏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싸움이 종종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것은 남남끼리 벌이는 싸움보다는 친족간에 벌이는 싸움이 더 많고, 또 심하다고 한다.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수 신앙과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자기 직계 자손에게 궂은 일이 없게 함은 물론, 발복하여 잘 살게 하고자 하는 이기심(利己心)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들이 갈 만한 명당자리는 남아 있을까? 큰 산, 작은 산 가릴 것 없이 산세로 보아 좋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예외 없이 절이 들어서 있고, 명당이라고 할 만한 자리에는 왕릉(王陵)이나 한때 세력을 잡았던 양반들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도 돈 있고, 힘있는 사람은 좋은 자리를 골라 부모의 묘를 쓰고, 치산을 한다. 이런 판에 서민들이 명당 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국가에서는 묏자리가 차지하는 면적이 점점 늘어서 효율적인 국토의 이용과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화장(火葬) 후 납골(納骨)을 권장하고 있다. 우리 서민들은 과학적인 근거가 희박한 명당 관념에서 벗어나 국가 시책에 호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점(占)의 종류와 방법·점괘(占卦)

  한국인 중에는 요즈음에도 신년 초가 되면 그 해의 운세를 알아보기 위하여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보기도 하고, 점쟁이를 찾아가 일생의 운세와 함께 그해의 신수를 보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들은 신년 초가 아니더라도 일이 있을 때마다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하는데, 그 경우는 아주 다양하다. 점쟁이를 찾아가 앞일을 알아보는 것을 '점친다', '점본다', '문복(問卜)한다'고 하는데, 이를 '점복(占卜)'이라고 하기도 한다. 

        점복의 종류와 방법

  점복(占卜)이란 인간의 생활에 따르는 모든 조짐을 신비적인 방법으로 미리 알아내어 인간의 생활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한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활에 따르는 모든 조짐'이라고 할 때의 '조짐'은 한 개인이나 가족 또는 집단의 과거, 현재, 미래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대한 조짐을 말한다. 이러한 조짐을 미리 알아보는 방법으로 점복을 한다. 요즈음에 주로 행해지는 점복에는 신점(神占), 역리(易理)에 의한 점, 상점(相占), 몽점(夢占), 풍수점(風水占) 등이 있다. . 

  신점(神占)은 신이 내린 무(巫)가 신의 영력(靈力)을 이용하여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세습무(世襲巫)인 '단골'은 신점을 하지 못한다. 앞일을 알고 싶은 사람이 무당을 찾아가면, 무당은 손님의 생년월일시를 물은 다음, 자기의 몸주신을 부르는 주문(呪文)을 외우면서 신을 청하고, 사주를 말하면서 그 사람의 앞일을 알려 달라고 한다. 신이 무당의 청을 받아들여 그 사람에게 맞는 점사(占辭)를 알려주면, 무당은 그 점사를 손님에게 풀어서 설명한다. 무당이 신을 청하여 점사를 얻는 방법은 무당에 따라 다르다. 어떤 무당은 주문(呪文)을 외우며 방울을 흔들어 신을 부른 뒤에 신의 계시를 받아 점괘(占卦)를 말하고, 어떤 무당은 주문을 외우며 엽전 7개를 두 손안에 넣고 흔든 뒤에 엽전을 점상(占床) 위에 뿌려 엽전이 앉는 모양을 보고 점괘를 말한다. 어떤 무당은 점상 위의 쌀을 이용하여 점을 하고, 어떤 무당은 알이 큰 염주를 돌리며 신을 불러 신의 계시를 받기도 한다. 신점을 하는 무당들은 사람의 출생과 성장·혼인·자녀·부귀·건강과 질병·수명 등 인간의 모든 일이 신의 뜻에 따라 정해지고, 그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점복을 통하여 신의 뜻을 알아보고, 그에 맞는 대책을 강구해 준다. 점을 치러 온 손님에게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 신의 뜻에 감사하고 근신(勤愼)하면서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라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 '부적'을 써 주기도 하고, '비손'이나 '굿'을 하게 하여 질병과 재난을 물리치고, 복을 받게 해 준다. 

  역리(易理)에 의한 점은 역학(易學)에 관한 이론을 학습한 사람이 역리를 풀어서 하는 점이다. 역리를 학습한 사람을 흔히 '철학가(哲學家)', '역학가(易學家)', '역술인(易術人)'이라고 하는데, 이들 중에는 집안기도·산기도 등을 통하여 강신(降神) 체험을 한 사람도 있고, 강신 체험 없이 학습과 연구를 통하여 역리를 깨우친 사람도 있다. 강신 체험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학습한 역학의 이론 위에 신의 계시가 겹침으로써 점사의 적중률이 높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사람의 운명은 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정해지는 네 기둥, 즉 사주(四柱)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주를 역리로 풀어서 정해진 운명을 미리 알아 좋은 일이 예정되어 있을 때에는 그에 순응하여 맞아들이고, 질병·재난이 있을 때에는 부적·독경(讀經)·비손·굿 등을 통하여 이를 예방하거나 물리쳐야 한다고 한다.

  상점(相占)에는 얼굴의 형상을 주로 보는 관상(觀相), 손의 모양과 손금을 주로 보는 수상(手相) 등이 있다. 상점은 관상과 수상을 공부한 사람이 보는데, 이들은 관상이나 수상뿐만 아니라 역리(易理)도 함께 공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상점과 역리점을 겸하는 것이 보통이다. 상점은 오랜 동안 사람의 관상과 수상을 보아서 얻은 경험과 통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적중률이 높다고 한다.

  몽점(夢占)은 해몽(解夢)을 통해 조짐을 알아보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꿈을 꾼 사람이나 가족이 꿈을 풀이하기도 하지만, 전문적인 해몽가에게 해몽을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해몽가는 신점을 하는 무당이나 역리점을 하는 역학가, 상점을 하는 관상가 등이 겸하는 경우가 많다.

  풍수점은 풍수설을 연구한 사람이 집터나 조상의 묏자리를 보고 점을 치는 것이다. 풍수설을 연구한 사람은 집터나 조상의 묏자리가 그 사람과 맞으면 발복(發福)하여 모든 일이 잘 되지만, 맞지 않을 때에는 재난을 당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 사람과 맞지 않은 집터에서 이사를 하거나, 조상의 묏자리를 옮겨야 재난을 물리침은 물론, 복을 받아 잘 살 수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점복자가 대나 뼈로 만든 산가지를 넣은 산통(算筒)에서 산가지를 뽑은 뒤에 산가지에 적인 점괘를 읽어 점을 치는 산통점(算筒占), 점괘의 여섯 가지 획을 이용하여 하는 육효점(六爻占), 새에게 점괘를 적은 종이를 물게 하여 점을 치는 새점 등이 있다. 요즈음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컴퓨터를 이용한 컴퓨터점이 있다. 그러나 요즈음에도 널리 행해지고 있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점이다. 

        점을 치는 마음

  한국인들이 점복자를 찾아가 문복하는 이유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장사·사업·이사·매매·취업·소송·입학·선거 출마 등을 하려고 할 때 그 일의 잘되고 못됨, 이로움과 해로움 등을 미리 알아보기 위해 점을 한다. 혼인을 하려고 할 때에는 배우자의 선택·택일(擇日) 등을 잘 하기 위하여 점을 하고, 개인의 이름·상호(商號) 등을 새로 짓거나 이의 좋고 나쁨을 알아보기 위하여 점을 한다. 병이나 재난이 있을 때에는 그 원인과 처리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실물(失物)·가출자·도망자 등이 있을 때에는 그 행방을 알아보기 위하여 점쟁이를 찾는다. 또 자녀의 출산·건강·입학·입대, 선거 출마 등에 관한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집터나 묘지를 새로 선택하거나 이의 좋고 나쁨을 알아보기 위하여 점쟁이를 찾기도 한다.

  사람은 앞일을 알지 못하므로, 앞일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 궁금증은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가 어려우면 더해진다. 외환 위기와 함께 다가온 경제적 불황으로 실업자가 늘기 시작하던 1997년부터 1999초에 점복자를 찾는 사람이 무척 많았었다고 한다. 북한 핵 문제로 인한 불안이 높아가고, 경기가 좋지 않은 요즈음에도 점복자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을 때 잠복자를 찾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하는 것을 말해 준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점을 치는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 점을 하는 점복자나 점복자를 찾아가 문복(問卜)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식은 사람의 출생·건강·부귀·자녀·배우자·원만한 인간 관계 등 삶에 필요한 모든 사항들이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되거나, 우주 운행의 이치에 따라 태어날 때 이미 정해 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다.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신의 탓으로 돌리거나, 사주 팔자를 지나치게 믿지 말아야 한다.

        점복에 대한 현대인의 자세

  운명은 자기의 성격, 의지, 노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점을 하지 않는 것이 현대인이 취해야 할 가장 좋은 태도이다. 그러나 앞일이 궁금하여 점을 하였을 경우에는 그 점괘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 그 점괘를 '자성예언(自成豫言)'의 자료로 삼아 그 일의 성취를 스스로 예언을 한 뒤에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게 마련이다. 나쁜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경우에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면 된다.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면, 실수를 막을 수 있을 것이고, 좋지 않은 일이 있을지라도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이야기 중에 점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부지런히 일하여 살림 형편이 좋아진 중년의 농부가 이름 있는 점쟁이를 찾아가 많은 돈을 내놓고 점을 해 달라고 하였다. 점쟁이는 그에게 '지금처럼 살면 노년에는 누워서 먹을 팔자'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점괘를 잘못 받아들여 '나는 누워서 먹을 팔자이니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놀기만 하였다. 농사철이 되어도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므로, 아내가 나서서 농사일을 하였으나 일이 잘 되지 않았다. 몇 년을 그렇게 살고 보니, 그 사람은 살림이 어려워져 끼니를 걱정하게 되었다. 크게 깨달은 그는 다시 부지런히 일하여 살림을 일으킨 뒤에 편안한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금년 가을에 시집갈 것'이라는 점괘를 받은 노처녀가 있다면, 그 처녀는 그 날부터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서 친구나 동창 모임에도 빠지지 말고 나가고, 남의 혼인 예식에도 열심히 다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의 소개로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복잡한 전철이나 만원 버스 안에서 발을 밟거나 어깨를 부딪혀 얼굴을 붉히던 사람이 좋은 인연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서 점괘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면 그 점괘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운명은 불변의 것이 아니라 성공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운명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사람만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가택(家宅)의 요소마다 신이 존재하면서 집안을 보살펴 준다고 믿고 그 신에게 정기적, 또는 필요에 따라 의례를 행하며 신앙하여 왔다. 이를 가신 신앙(家神信仰)이라고 한다. 가택 신앙, 가정 신앙, 집안 신앙이라고 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가신(家神)이라는 용어가 일제 강점기에 사용하던 일본식의 용어라 하여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집안 신앙이나 가정 신앙이라 할 경우, 집안에 존재하는 가신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신앙하는 종교 전반을 포함하는 뜻으로 확대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가신(家神)은 가택신(家宅神)의 준말로 볼 수 있고, 집신은 가(家) 대신 집으로 쓴 것인데 익숙하지 않은 데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종전의 용어대로 가신 신앙이란 말을 많이 쓴다.  가신은 집안 곳곳에 존재하므로, 가신 신앙은 다신 신앙(多神信仰)이다. 가신에는 성주·조상·조왕·삼신·터주·업·철륭·우물신·우마신 등이 있다.

   성주신

  성주신은 그 집안의 으뜸 신으로, 집안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관장한다. 집안의 으뜸 신답게 그 자리도 그 집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집의 모양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개 마루의 대들보 밑이나 상기둥의 윗부분과 같은 집안의 중심부가 성주신의 자리다.

  성주신을 상징하는 신체(神體)는 대청의 대들보 밑이나 상기둥의 윗부분에 백지, 또는 무명을 접어서 실타래로 묶거나 한지를 반구형(半球形)이 되게 만들어 붙인다. 한지를 직사각형으로 접어 붙인 다음 실타래나 띠풀로 매고, 대청 한 편에는 성주단지나 성주독을 놓기도 한다. 

  성주신의 신체를 봉안하는 것은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한 뒤에 성주맞이굿을 하고 봉안하기도 하고, 대주(大主, 남자주인)의 나이가 7 또는 3이 드는 해에 봉안하기도 한다. 성주단지나 성주독에는 쌀이나 다른 곡식을 담는데, 이것은 농경 문화의 반영이다. 이 단지의 쌀은 주로 음력 10월 가을 추수 때 갈아넣는다. 이 속에 넣었던 곡물은 집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밥을 지어 가족들만 먹는다. 그 곡물을 복이 담긴 신성물(神聖物)로 여겨 이를 내보내는 것은 복을 내보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신제는 설날·추석과 같은 명절에도 지내지만, 예전에는 특히 햇곡을 천신(薦新)하는 음력 10월 상달에 가신 단지에 들어있는 곡물을 갈면서 크게 고사를 지냈다.

                      충북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 박씨 댁 성주

 

                   충남 홍성군 갈산면 기산리 김씨 댁 성주

 

     경북 안동시 이천동 조씨 댁 성주

      조상신
  조상신은 후손을 보살펴 주는 신으로 자리는 안방의 윗목 벽 밑인데, 대체로 신체가 없다. 신체가 없이 모시는 가신을 '건궁'이라 하는데, 조상신은 건궁으로 모시는 경우가 흔하다. 조상신이 제석신(帝釋神)·세존단지 등 불교적인 명칭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각 가정에서는 명절이나 기일(忌日)에 돌아가신 조상께 제사를 지내므로, 가신을 모시지 않는 가정에도 조상신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가신으로서의 조상과 제사를 받는 조상과는 차이가 있다. 유교식 제사를 받는 조상은 서열이 명확하다. 종가(宗家)의 경우에는 집에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고, 5대 이상의 조상에게는 음력 10월에 묘에 가서 시향(時享)을 올린다. 그러나 가신으로 모시는 조상은 서열이 확연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가신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조상은 가족들에게 현몽(現夢)하거나, 현몽하기 전에 우환이 있다든지 혹은 좋지 않은 일이 계속되어 그 일로 점복자를 찾아가 점을 하고, 점사(占辭)에 따라 모셔지게 된다.

  조상신으로는 주로 한(恨)이 많거나 무언가 색다르게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 들어앉는다. 이들은 아주 윗대 조상부터 최근에 세상을 떠난 조상에 이르기까지 가정마다 다르다.

      조왕신
  조왕신(王神)은 부엌에 있는 신으로, 그 자리는 부뚜막이다. 삼신과 더불어 육아(育兒)를 담당한다. 간혹 재산신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는 부엌에 불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불은 재산을 상징한다. 그래서 화재가 난 꿈을 꾸면 재산이 생기는 것으로 여긴다. 새로 이사간 집에 성냥이나 양초를 가지고 가는 것도 불이 타듯 재산이 불어나라는 의미가 있다. 예전에 불씨를 꺼뜨리는 며느리는 집안을 망하게 할 것이라 하여 쫓아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불과 재산을 직접적으로 관련시키는 의식 때문일 것이다.

  조왕의 신체로는 '조왕중발'이라 하여 사기 종지에 정화수(井華水)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신체가 없는 건궁 조왕도 흔하다. 조왕중발의 물을 매일 아침 갈아 올리고, 별식이 나도 올리는 것으로 신앙 의례를 표현한다. 부뚜막은 조왕신의 자리여서 주부들이 부엌에서 일할 때 아무리 피곤해도 부뚜막에는 걸터앉지 않는다. 꼭 앉아야 한다면 바닥에 나무토막 따위를 깔고 앉는 것이 고작이었다.
 

  조왕신은 섣달 그믐 무렵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를 찾아가서 지난 일 년 간의 일을 고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 때 각별히 말조심을 한다. 때로는 부뚜막에 엿을 붙여두기도 한다. 혹 하늘에 가더라도 옥황상제에게 좋지 않은 말을 전하지 말아달라고 미리 입을 막는 것이다. 


  조왕신이 자녀들을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에 경북 안동에서는 평소 조왕을 모시지 않는 가정에서도 아들이 군대에 가거나, 그밖에 자녀들에게 커다란 변화가 생기면 조왕을 모셔 정화수를 올리며 기도한다. 그러다가 아들이 무사하게 제대를 하게 되면 조왕중발을 거둔다. 매우 실리적이고 공리적(功利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공리성은 조왕신에 대한 신앙 뿐 아니라 우리의 민간신앙 전반에 걸쳐 공통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부뚜막 위 작은 선반에 정화수를 떠 놓는다. (왼쪽 사진은 온양민속박물관, 오른쪽 사진은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것임)


        삼신
   삼신[胎神, 産神]은 자녀의 출생·육아·성장 등을 관장하는 신(神)이다. 그 자리는 안방 아랫목이다. 신체는 삼신자루라 하여 한지로 만든 자루 속에 쌀을 넣어 아랫목 구석의 벽에 높직이 달아 매 놓는다. 또는 쌀을 바가지나 동이에 담고, 시렁을 만들어 거기에 얹어놓기도 한다. 이를 각기 삼신바가지 또는 삼신동이라고 한다.

  삼신은 일반적으로 '삼신할머니'로 통칭되고 있으나, 지역에 따라서 달리 부르기도 한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삼신을 '지앙'이라 하고, 경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는 '세존할매'라 일컫는다. 집안에 따라서는 삼신할머니와 삼신할아버지 부부를 상정(想定)하기도 한다.

  삼신의 점지를 받아 아이가 태어나면 일곱 살 때까지 보호를 받는다. 그 후부터의 수명은 칠성신이 관장한다. 삼신은 아이를 관장하는 가신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으면 삼신상을 차린다. 유달리 깨끗한 신이라고 생각하여 정화수만을 올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쌀밥과 미역국, 그리고 물을 떠올린다. 또 설·정월 대보름·추석·동지 등 주요 명절에도 삼신제를 지낸다. 다른 가신과 마찬가지로 새 밥을 올리는데, 특히 삼신에게는 비린 음식을 올리지 않는다.

  삼신은 그 가계(家系)의 여자 조상이 좌정(坐定)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때에는 현몽, 또는 점사에 따라 삼신을 모신다. 삼신은 아이 갖기를 빌며 모시는 것이 보통이지만, 아이가 있더라도 섬기는 예가 있다. 

  삼신바가지 혹은 삼신단지에 담긴 쌀은 일 년에 한 번씩 햇곡이 나면 갈아넣는다. 묵은 쌀은 집안 식구끼리만 먹으며 절대 남에게 주지 않는 것은 다른 가신과 마찬가지다.

        터주신
  터주는 지신(地神)이라고도 하는데 집터를 맡아보며 집안의 액운을 걷어주고, 재복(財福)을 주는 신이다. 가정에 따라서는 터주대감, 또는 터대감이라고도 한다. 터주를 상징하는 신체는 집의 뒤뜰 장독대 옆에 '터주가리'를 만들어 신체로 모신다. 터주가리는 서너 되들이 옹기나 질그릇 단지에 벼(요즈음에는 주로 쌀)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을 원추형으로 덮는다. 이 터주가리에 담았던 곡물은 해마다 추수 때에 갈아넣는다. 묵은 곡식은 집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가족들이 먹으며 복을 빈다. 가을에 햅쌀로 갈아넣을 때 메를 지어 올리는 경우도 있다.

  터주신에 대한 제의는 특별히 지신제(地神祭)를 올리는 경우가 있고, 정초나 그 밖의 명절에 떡을 한 접시 올리고, 별식(別食)이 있을 때에 한 그릇 올린다. 이것은 다른 가신에 대한 의례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업신(神)
  업신은 광이나 곳간과 같은 은밀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재복(財福)을 준다는 가신이다. 업·업왕신·업왕·업위신이라고도 하지만, 민간에서는 '업'이라는 말과 함께 '지킴이·집지킴이' 등으로 부른다.

  업신의 대상으로 구렁이·족제비·두꺼비 그리고 사람을 들고 있다. 업이 그 집을 나가면 패가망신(敗家亡身)하거나,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고 한다.

  업신은 대체로 신체가 봉안되지 않고 건궁으로 모시지만, 다른 가신과는 달리 업구렁이라든가 업족제비·업두꺼비와 같은 동물을 업신으로 상정한다. 또 사람에게 붙어 다닌다는 인업을 업신으로 삼기도 한다. 인업은 사람에게 붙어 다니면서 그 사람에게 복을 주는 신으로, 형상은 그 사람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인업과 인업을 달고 있는 사람과는 별개의 존재인데도, 그 사람 자신이 인업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업의 자리는 광·곳간과 같이 재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는 바로 업신이 재복신임을 말해준다. 업신을 대접하는 의례는 정기적으로 지내거나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지낸다. 정기 의례는 설날·추석·동지 등 주로 큰 명절에 다른 가신과 함께 올리고, 그밖에 사람 눈에 띄었을 때에는 단독으로 올리기도 한다. 업신이 눈에 띄는 것을 예사롭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단지
  경북 안동·예천·풍기·상주 등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용단지를 섬긴다. 특히 안동 지역에서는 용단지 신앙이 가장 보편적인 가신 신앙이다.

  용단지는 신체(神體)의 모양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 용신(龍神)은 바람과 비·물 등을 관장하고 있는 신으로, 하늘과 땅을 오가는 전능한 신인데, 가신으로 모실 때에는 농경신·재산신의 성격을 띤다. 재산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는 업신 또는 터주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안동 사람들은 용단지를 터주신이라고도 하고, 업신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후자의 경우가 더 많다.

  용단지는 용이 드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데, 용이 든다는 말은 재산이 들고 가정을 잘 수호해 준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그 자리는 곡물이 드나드는 부엌·고방, 또는 돈궤를 두는 다락 등이다. 용단지에는 쌀이나 다른 곡식의 나락을 담아둔다.

   용단지를 위하는 까닭은 농경신인 용신을 받듦으로써 집안의 평안과 농사의 풍작을 빌고, 집과 재물을 보살펴주기를 기원하기 위해서다. 가신은 저마다 고유의 기능이 있지만, 다른 가신의 기능이 뒤섞여 있다. 가신은 대체적으로 농경신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용단지는 보다 농경성이 강하다.

        기타 가신
  위에서 설명한 가신 외에도 여러 가신이 있다. 호남에서는 터주신으로 섬기지만, 장독신의 성격도 지니고 있는 '철륭'을 비롯하여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 물을 마르지 않게 하는 '우물신', 소와 말을 지켜주는 '우마신(牛馬神)'을 섬긴다. 또 대문에는 '문신(門神)'이 있어 액살(厄煞)이 접근하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 변소에는 '측간신(厠間神)'이 있어 항시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가신은 대체로 집안의 평안을 돌보는 착한 신이지만, 측간신은 좀 사악한 성정이 있다 하여 우리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믿는다. 충남에서는 '왕신단지'라는 사나운 가신을 모시기도 한다.

  가신은 생업과 관련된 직능신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생성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인삼 농사를 하는 경북 풍기 지역에서는 생업과 관련된 인삼신(人蔘神)을 상정하여 인삼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가신 신앙은 흔히 여성 신앙이라고도 한다. 전 시대(全時代)에 걸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시대부터 근대 초기까지도 여성은 대체로 유교적인 이념에 묶여 사회적인 제약이 많았다. 이는 가신 신앙이 여성 신앙화 할 수 있는 한 요소가 되기도 했다.

  가신 신앙에는 현실적인 고난과 결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생존적 욕구, 나아가서 인간답게 살려는 욕구가 투영되어 있다. 전통 사회에서 가신 신앙은 여성들의 힘든 삶을 극복하는 심리적 기제의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여성들은 가신 신앙을 통해 현실에서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최운식 외, 한국 민속학 개론(서울:민속원, 2004)

 

 

     무속(巫俗)과 무교(巫敎
  무속(巫俗)은 민간 층에서 무(巫)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 현상으로, 민간신앙의 한 형태인데, 무교(巫敎)라고 하기도 한다. '무속'이란 말은 이를 민속의 하나로 보는 용어이고, 무교(巫敎)는 이를 종교의 하나로 보는 용어이다. 

  무속을 종교로 보는 견해가 적절한가는 무속이 종교의 기본 요건을 갖추었는가를 따져 보면 알 수 있다. 종교의 기본 요건은 교리(敎理), 사제자(司祭者), 신도(信徒)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는 불교의 교리를 적은 불경이 있고, 사제자인 승려가 있으며, 이를 믿고 따르는 많은 신도들이 있다. 기독교 역시 교리를 적은 성경이 있고, 사제자인 천주교의 신부나 개신교의 목사가 있고, 많은 기독교 신자가 있다. 이슬람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무속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무속의 사제자는 우리가 흔히 '무당'이라고 하는 '무(巫)'인데, 현재 우리 나라에는 약 10만여 명의 무가 있다. 이들 무당에게는 1년에 한 번 정도 굿을 하고, 수시로 연락하며, 그들의 말을 믿고 따르면서 유대(紐帶)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당들은 이런 사람을 '단골손님' 또는 '신도'라고 한다. 단골손님의 수는 무당의 영적(靈的) 능력에 따라 다른데, 많으면 수백에서 수천 명, 적어도 수십 명의 단골손님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므로, 무속의 신도는 대단히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교리는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관습(慣習) 또는 구전(口傳)으로 전해 오고 있다. 그래서 종교의 요건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 종교와 같은 체제를 갖춘 종교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민속학자들은 '무교'라 하지 않고 '무속'이라는 명칭을 흔히 쓴다.

        무(巫)의 성격과 구분
  흔히 '무당'이라고 부르는 무(巫)는 '신병(神病)'이라는 종교 체험을 통하여 신의 영력(靈力)을 흭득하여 신과 교통하는 신권자(神權者)로, 신의 영력에 의해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굿으로 조절하는 능력을 가진, 민간 층의 종교적 지도자이다. 이들이 겪는 신병은 며칠씩 음식을 먹지 못하고, 몸이 (대개는 몸의 한쪽이) 아파 움직이지 못하고 며칠 또는 몇 달씩 누워 있으며, 꿈 또는 환상 속에서 신을 만난다. 이들의 병은 약으로는 고치지 못하고, 내림굿을 하여 신을 받아 모시고 무당이 되면 씻은 듯이 낫는다. 

  무는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사제자의 역할, 신도들의 병을 고치는 의사의 역할, 점으로 앞일을 알아맞히는 점복(占卜) 예언자(豫言者)의 역할을 하는 외에 예능 오락적인 기능을 하기도 한다. 앞의 세 가지는 모든 종교의 사제자가 갖는 기능이다. 그런데 뒤의 예능 오락적 기능은 한국 무당만이 지니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굿 구경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굿이 신과 인간을 즐겁게 하는 내용이 많음을 말해 준다. 

  한국의 무는 ①무당형, ②단골형, ③심방형, ④명두형으로 구분한다. 무당형은 타고난 무당이 아니라 사는 동안에 신병을 앓다가 강신(降神) 체험을 하고, 내림굿을 통하여 된 무당이다. 주로 중부 이북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노래와 춤을 배워 정통 굿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몸주로 모신 신의 영력에 의해 점복도 한다. 이들이 무당 노릇을 하다가 그만두면 또다시 신병을 앓아 고통을 받게 되므로, 한 번 강신하여 무당이 된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그만둘 수가 없다. 

  단골형은 혈통을 따라 대대로 사제권(司祭權)이 계승되어 인위적으로 된 세습무(世襲巫)이다. 주로 호남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단골들은 사제권에 의한 일정 지역의 관할권을 계승해 왔다. 단골의 관할 지역을 '단골판'이라 한다. 사제권은 아버지에서 큰아들로 계승되지만, 실제 단골 노릇은 그 아내가 한다. 그래서 굿의 진행이나 가무(歌舞)는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계승된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친정어머니한테 노래와 춤을 배우고, 시집와서 시어머니를 따라 굿을 익히므로 굿은 잘 진행한다. 그러나 영력(靈力)이 약하여 점복은 하지 않는다. 이들은 무업(巫業)을 그만두어도 병이 나서 앓는 일이 없으므로, 무업을 그만두고, 자기가 단골이라는 사실을 속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최근에는 단골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심방형은 단골형과 같이 무의 사제권이 혈통을 따라 대대로 계승되는 세습무이다. 이들은 무속에서 제도화된 일면을 보이면서, 영력을 중시하여 구체적인 신관(神觀)이 확립되어 있다. 이들은 가무로 굿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무구(巫具)를 이용하여 점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주로 제주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명두형은 죽은 아이의 영혼이 강신(降神)하여 된 점복 전문의 점장이로, 가무(歌舞)에 의한 정통굿의 주관은 불가능한 무이다. 이들을 '명도', '명두'라고도 하고, '태주'라고 하기도 한다. 
요즈음에는 무당형의 무 중에 죽은 아이의 영혼이 내린 사람이 많아 ①의 무당형이 ④의 명두형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무는 대개 무당형이다. 그런데 그 숫자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친목단체인 경신연합회에 가입한 회원이 전국 151,236명이고, 서울에만 37,500명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세(勢)를 짐작할 수 있다.  
   
        무속의 신과 제의의 종류
  무속에서 신앙되는 신은 성주신·조상신·조왕신·삼신·업신과 같은 가신(家神), 산신·서낭신·당신·부군신과 같은 동신(洞神), 천신·칠성신·시준신·제석신·용신·장군신·군웅신·신장신·손님신·창부신 같은 외계신(外界神) 등 민간신앙에서 신앙되는 모든 신들이다.

  한국 전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무속 제의인 굿은 그 목적에 따라 무신제(巫神祭), 가제(家祭), 동제(洞祭)로 나눌 수 있다. 무신제는 무당 자신의 굿으로, 신이 내릴 때 하는 강신제(降神祭, 내림굿·신굿·명두굿이라고도 함)와 무의 영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봄·가을에 주기적으로 하는 축신제(祝神祭, 꽂맞이굿·단풍맞이굿·진적굿·대택굿이라고도 함)가 있다.

  가제는 각 가정에서 가족의 안녕과 행운을 위해서 하는 제의로, 생전 제의(生前祭儀)와 사후 제의(死後祭儀)가 있다. 생전 제의는 주기적으로 하는 주기제(週期祭)와 수시로 하는 수시제(隨時祭)로 구분된다. 생전 제의로는 아들 낳기를 빌거나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비는 기자(祈子)·육아 기원(育兒祈願) 제의, 병 낫기를 기원하는 치병 기원(治病祈願) 제의, 혼인 축원 제의, 가옥 신축(또는 이사) 제의, 행운(幸運)·기풍(祈豊) 제의, 해상 안전·풍어(豊漁) 기원 제의 등이 있다. 사후 제의로는 장례를 치른 뒤에 하는 상가 정화 (喪家淨化) 제의,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는 망인 천도(亡人遷度) 제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영혼을 건져 저승으로 보내는 익사자 천도(溺死者遷度) 제의 등이 있다.

  동제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동신(洞神)에게 해가 바뀔 때마다 봄·가을에 날을 잡아 올리는 주기적 제의이다. 내륙 지방에서는 제액(除厄)·기풍(祈豊) 제의가, 해안 지역에서는 제액·풍어 제의가 행하여진다.

        무속 제의의 구성
  무속 제의는 언어 위주의 '비손'과 행동 위주의 '굿'이 있다. 먼저, 비손의 절차를 간단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비손'은 제의를 올릴 사람이 무당을 찾아가 점을 치거나 상담하여 제일(祭日)을 잡는다. 날이 잡히면 제주(祭主, 제의를 올릴 사람)는 1∼3일 전에 출입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부정(不淨)을 가리며, 음식을 가려먹고 언행을 삼간다. 제일이 되면 무당의 말에 따라 제물을 장만하여 간단한 제상을 차린다. 무당은 밤이 되면 정결한 옷을 입고 제상 앞에 앉아 부정을 친다. 그런 뒤에 제상으로 신을 청하여 모셔놓고, 제주의 소원을 비는 축원(祝願)을 한다. 축원이 끝나면 소지(燒紙, 종이를 태우며 소원을 비는 것)를 올리고, 밖으로 나가 뒤풀이를 하여 모여든 잡귀를 돌려보낸다. 이렇게 하여 비손이 끝난 뒤에도 제주는 3∼7일 간 출입이나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삼가며 근신한다. 이것이 비손의 전 과정인데, 비손은 노래나 춤 없이 무당이 신과 마주 앉아 언어 위주의 축원으로 진행하므로 '앉은 굿'이라고 하기도 한다. 

  '굿' 역시 제의를 올릴 사람이 무당을 찾아가 점을 치거나 상담하여 제일(祭日)을 잡는다. 날이 잡히면 제주(祭主, 제의를 올릴 사람)는 1∼3일 전에 출입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부정(不淨)을 가리며, 음식을 가려먹고 언행을 삼간다. 제일이 되면 무당의 말에 따라 제물을 장만하여 제상을 차린다. 무당은 밤이 되면 정결한 옷을 입고 제상 앞에 앉아 장고를 치며 부정굿 무가를 부르며 소지를 올리고 사방에 부정물을 뿌려 부정을 쳐낸다. 그 다음에는 각 신을 개별적으로 초청하여 그 신을 대접하면서 소원을 빈다. 소원을 빌 때에는 비손과는 달리 무당이 해당 신의 의복을 의미하는 무복(巫服)을 입고, 서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신의 동작을 흉내내기도 한다. 그러다가 신이 몸에 실리면, 무당은 신성(神聖)으로 몰입되어 자기를 잃고 신으로 화하여 황홀경(
惚境)에서 신의 말인 '공수'를 내린다. 이렇게 무당이 신과 하나가 된 뒤에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제주의 소원을 축원한다. 축원이 끝나면 소지(燒紙, 종이를 태우며 소원을 비는 것)를 올리고, 밖으로 나가 뒤풀이를 하여 모여든 잡귀를 돌려보낸다. 이렇게 하여 굿이 끝난 뒤에도 제주는 3∼7일 간 출입이나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삼가며 근신한다. 그래서 굿은 '춤'과 '모의 동작', '공수'로 행동 위주의 형식이 된다. 이것은 강신무가 행하는 굿의 구성인데, 세습무의 굿은 '공수'가 없다. 그래서 공수 없이 무당이 신을 향해 일방적으로 기원하기만 한다.    

  이러한 무속 제의는 인간 존재의 영구 지속 욕구를 실현시키는 수단으로 행해진다. 이것은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보고, 영원한 존재가 미분적(未分的) 순환을 계속하며 지속된다는 '원본사고(原本思考)'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무속의 신관(神觀), 우주관, 영혼관, 내세관 역시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무속의 신관(神觀)
  무속의 신관은 다신적(多神的) 자연신관(自然神觀)이라 할 수 있다. 무속의 신은 자연신·인간신 모두 인격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분담된 직능 분야에 관해서는 무한한 능력을 지닌 전능한 존재자이며, 공포의 대상이 된다.

  무속의 신도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인은 인간의 삶과 죽음, 흥망(興亡), 화복(禍福), 질병 등의 운명 일체가 신의 의사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고, 신에게 발원(發願)하여 복을 얻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 발원의 방법이 정신적이기보다는 물질적이어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의 양과 질에 비례하는 신의 보살핌이 있다고 믿는 공리적(功利的) 신앙이다. 또 현실에서 복을 받으려는 현실기복(現實祈福) 신앙이다. 

  한국인은 유일신이 아니라 여러 신을 믿는다. 그런데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면서 신에게 많이 바치고, 잘 위하면 큰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신의 감응(感應)을 받아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신의 노여움을 사서 화를 당한다고 믿는다. 또, 점복을 통해 앞일을 미리 알아서 복을 맞이하고 화를 예방하려고 한다. 이것은 모두 무속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무속이 현대 한국인의 의식과 신앙에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지금으로부터 10여 전의 일이다. 은행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기다리는 동안 객장(客場) 안에 준비해 놓은 주간지를 보다가 '성업(盛業) 중인 사혼 예식장(死婚禮式場)'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내용은 서울 우이동 도봉산 기슭에 죽은 처녀와 총각의 혼인을 주선하여 주고, 식을 올리는 사혼예식장이 있는데, 성업 중이라고 하면서 허름한 건물의 사진까지 실려 있었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사혼(死婚)의 민속이 지금도 행하여지고 있음을 알았다. 주간지는 일반 독자들의 흥미 위주로 제작되기 때문에 기사 내용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기도 하고, 과장(誇張)하여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기사는 사혼의 민속이 요즈음에도 행하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어서 나의 흥미를 끌었다. 그 후 사혼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내가 만난 무당 한 사람은 몇 차례 사혼을 주관해 주었다고 하였다.

  사혼은 죽은 사람의 영혼끼리의 혼인을 뜻하는 말로, '명혼(冥婚)'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한국인의 영혼관(靈魂觀)을 바탕으로 하여 생긴 민속이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사고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육신(肉身)과 영혼(靈魂)의 결합으로 본다. 이에 의하면 육신은 형체가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可視的) 존재인데, 얼마 후에는 죽어야 하는 유한(有限)한 존재이다. 영혼은 형체가 없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불가시적(不可視的) 존재인데,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존재이다. 이러한 육신과 영혼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가 삶이고, 육신에서 영혼이 벗어난 상태가 죽음이다. 육신은 이승에서 영혼이 거처하는 집이다.

  영혼은 편의상 생령(生靈)과 사령(死靈)으로 나눌 수 있다. 생령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깃들어 있는 영혼이고, 사령은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사람의 육신을 벗어난 영혼이다. 생령의 존재를 말해 주는 자료로는 [혼(魂)쥐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아내가 낮잠을 자고 있는 남편의 코에서 콩알 만한 하얀 쥐가 들락날락하다가 방바닥으로 내려선 다음,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르며 쥐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다. 얼마 후 남편이 잠에서 깨어나 꿈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쥐의 행동과 일치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아내가 잠자는 남편의 코에서 나온 작은 쥐를 자막대기로 때려서 죽였더니, 남편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려 그 여자는 과부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람의 몸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는데, 그 영혼은 잠잘 때에 잠시 육체를 벗어나 돌아다닐 수 있다는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령은 선령(善靈)과 악령(惡靈)으로 나눌 수 있다. 선령은 수명대로 살다가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 내세(來世)에 가서 평안히 지내는데, 가끔씩 세상에 나와서  자손이나 친척·친지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악령은 비명횡사(非命橫死)한 사람의 영혼으로, 생전의 원한이 남아서 저승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살아있는 사람을 괴롭힌다. [아랑 전설]이나 고소설 [장화홍련전]·[김인향전]에서 사또 앞에 나타나 원한을 풀어줄 것을 청원하는 영혼은 비명에 죽은 원한을 풀지 못하여 저승에도 가지 못하고 떠도는 처녀의 영혼이다.

  악령의 대표적인 예는 시집·장가를 가지 못하고 죽은 '처녀 귀신', '총각 귀신(몽달귀신)'이다. 이들은 젊은 나이에 죽어 시집·장가도 가지 못한 한(恨) 때문에 가족들에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특히 행복하게 사는 옛 친구나 친척에게 나타나 이들을 못살게 군다고 한다. 그래서 전에는 처녀나 총각이 죽으면, 네 갈래 길의 가운데를 파고 이들의 시신을 엎거나 세운 다음, 그 위에 가시를 얹고 흙을 덮어 평평하게 해 놓아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했다고 한다. 이것은 한을 품고 죽은 처녀나 총각의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 떠도는 것을 막기 위해 행한 비정한 매장법(埋葬法)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 하여 이들의 한이 풀리는 것도 아니고, 이들의 떠돌음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이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이들의 영혼을 혼인시키는 사혼이었다.   

  사혼은 전국적으로 행하여 졌는데, 정혼(定婚)하는 과정이나 예식의 진행 절차는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맨 먼저 죽은 처녀나 총각의 가족이나 친척이 중매쟁이이게 적당한 혼처(婚處)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이 때 중매쟁이는 무당인 경우가 흔하다. 부탁 받은 중매쟁이는 이들의 나이를 알아서 궁합을 보아 중매를 서는데, 이들의 나이는 죽은 지 몇 년이 되었건 간에 죽을 때의 나이를 기준으로 한다고 한다. 혼처가 정해지면, 예식을 맡은 무당은 택일(擇日)을 하고, 신랑과 신부의 인형을 준비한다. 신랑과 신부의 인형에는 각각의 사주(四柱)를 써서 가슴에 붙이고 옷을 입힌다. 옷은 그 사람이 살았을 때에 입던 옷이 있으면 그 옷을 가져다 입히고, 없을 때에는 새 옷을 마련하여 입힌다. 준비가 되면 양가의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해원(解寃)굿을 한다. 해원굿이 끝나면 신랑 인형에는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신부 인형에는 원삼 족두리를 입히고 혼인굿을 한다. 혼인굿을 마치면 신방을 차려 이들이 한 이불 속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한 다음, 이들을 한 곳에 묻는다. 이렇게 하여 이들은 총각과 처녀로 죽은 한을 풀고, 저승으로 가서 함께 편안히 거하게 된다. 절에서 스님의 주관으로 하는 경우에는 불교식으로 진행한다.

  사혼에 의해 맺어진 사돈끼리는 아주 사이좋게 지낸다고 한다. 살아 있는 아들과 딸에 의해 맺어진 사돈의 경우에는 아들과 며느리(또는 딸과 사위)가 금실 좋게 살 때에는 사이가 좋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기면 자연히 그 부모들의 관계도 나빠지게 된다. 그러나 사혼에 의해 맺어진 사돈의 경우에는 죽은 아들과 며느리(딸과 사위)의 금실이 나빠져 속을 썩일 일이 없고, 참척(아들과 딸이 앞서 죽음)을 당한 슬픔과 고통을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며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의좋게 지낸다고 한다. 

  몇 년 전에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되어 많은 사람이 불의의 죽음을 당한 일이 있었고, 괌도에서 사고를 당하여 많은 사람이 아까운 목숨을 잃은 불행한 일도 있었다. 두 사고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때 그 비행기에 탔다가 세상을 떠난 처녀와 총각의 영혼을 혼인시킨다는 방송과 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그 기사의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두 사람이 서로 사귀던 사람들이겠거니 하였다. 그러나 그 기사를 자세히 읽어 보니, 두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대한항공 직원의 중매로 사혼을 한 경우도 있고, 혼인을 약속한 사람들이 예식을 올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양가에서 협의하여 사혼예식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보다 몇 년 전에도 겨울 산행을 하다가 눈사태가 나서 죽은 남녀 대학생이 사혼을 하였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었다. 그 때 사혼을 한 젊은이 역시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각각 산행을 하다가 불행을 당한 사람들인데, 어느 친지가 중매를 서서 사혼을 하였다고 한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 전에 100여 명의 어른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자기 둘레에서 사혼하는 것을 보았거나, 들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였더니, 20여 명이 손을 들었다. 이것은 지금도 사혼이 행하여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요즈음에도 사혼이 행하여지고 있는데, 이 일이 눈에 뜨이거나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것은 사혼을 할 때 청첩장을 돌려 널리 알리지 않고, 아주 가까운 친족만 모여 하기 때문이다.

  사혼 민속의 시작은 처녀나 총각 귀신한테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산 자의 이기심(利己心)의 작용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죽은 자의 한을 풀어줌으로써 그들이 더 이상 이승과 저승 사이를 떠돌지 아니하고, 저승으로 가서 편안히 거하게 해 주려는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확연히 구별하기보다는 더불어 사는 우리 민족의 심성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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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은 그리 많지 않지만, 전에는 마을 앞 정나나무 밑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무게가 150근(90Kg) 내외의 둥근 모양의 돌이 놓여 있는 마을이 많이 있었다. 이 돌이 사람들이 '들어올리는 돌'이란 뜻의 '들돌'이다.

  전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이나 2월 초하룻날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젊은이가 이 돌을 들어올리면, 그 때부터 그는 어른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어른들의 품앗이에 끼게 됨은 물론, 품값을 받을 때에도 어른의 품값을 받을 수 있었다. 머슴들의 경우에는 들돌을 들어올리면, 어른 몫의 사경(농가에서 머슴에게 주는 일년치 품값)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이가 스물이 채 안 되었어도 들돌을 들어올린 사람은 어른 품값을 받았으나, 스물이 훨씬 넘었어도 들돌을 들지 못한 사람은 반품값밖에는 받지 못하였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자기 마을에서 들돌 들어올리기를 하는 정월 대보름이나 2월 초하루 전에 그 돌을 수없이 들어올려 보며 힘을 길렀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 있는 사람은 그 날 들돌 들기에 나서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거나, 참석은 하여도 들돌 들기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들돌 들기에 성공한 사람은 나이가 적어도 어른 대접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평생 힘쓰는 일과 관련하여서는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농사꾼이나 머슴들의 성년식이었다. 이것은 요즈음 흔히 쓰는 말로 표현하면 성과급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체력을 매우 중요시하는 농경사회의 일면을 짐작하게 해 준다. 
   
  서울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는 들돌이 전시되어 있고, 그 뒤에 그림이 붙어 있다. 그 그림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한 젊은이가 들돌을 들어올리고 있고, 그 옆에는 젊은이의 어머니와 여동생인 듯한 여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 주는 모습이 보인다. 들돌을 들어올리는 젊은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체력 면에서 당당한 어른이 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아마도 젊은이의 애인은 나무 뒤에 숨어서 자기 애인이 그 돌을 들어올리는가를 지켜보며 가슴을 조이다가 성공하는 순간에 벅찬 감격을 느꼈을 것이다.

  세월이 변하면서 농사꾼이나 머슴들의 성년식의 성격을 지닌 들돌 들기 풍습도 사라졌다. 그에 따라 들돌의 의미도 퇴색하여 들돌은 담쌓기나 둑쌓기, 집짓기 등의 공사를 할 때 다른 잡석들과 함께 파묻혀 버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들돌 들기의 의미를 되새기며 '들돌놀이'를 하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들돌이 질병을 물리쳐 준다는 주술적 의미를 지니게 되어 '들돌제'를 지내는 마을도 있다.

  전남 보성군 노동면 거석리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당제를 마치고 들돌놀이를 한다. 이것은 전부터 해 오던 놀이인데, 한 때 중단되었다가 1986년 군민의 날에 재현되었다. 이것은 직경 50cm, 무게 80Kg 정도 되는 돌을 들어 넘기는 놀이인데, 장원으로 뽑힌 사람에게는 상으로 황소를 준다. 놀이가 끝나면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노래부르고 춤을 추면서 마을 사람의 건강과 풍년을 기원한다. 이런 놀이는 전북 부안에도 있다.

  제주도에서는 청년들이 힘을 겨루기 위해서 들어올리는 돌을 '뜽돌'이라고 한다. 이 돌은 동네 어귀에 있어서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올릴 수 있다. 특히 추운 겨울에 젊은이들이 뜽돌이 있는 '뜽돌거리'에 모여 제각기 힘 자랑을 한다. 그 방법에는 두 손으로 잡아 들어올리기, 들고 허리를 펴기, 들고 일어서기, 땅에서 조금만 들기, 돌을 들고 몇 걸음 걷기 등이 있다. 이 중 뜽돌을 들고 가슴과 허리를 완전히 편 채 두 다리를 꿋꿋이 디디는 방식을 제일로 친다. 다른 마을의 청년이 지나다가 뜽돌을 보고 클 경우에는 '이 마을 청년은 힘이 세다.'고 한다. 그러나 작을 경우에는 '이것도 뜽돌이냐!'고 비아냥거리면서 집어던진다. 이를 본 그 마을 청년들은 그에게 뜽돌을 들어보라고 한다. 그가 뜽돌을 들어올리면 괜찮으나, 들어올리지 못하면 그는 마을 청년들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빌거나, 술을 사서 대접하고서야 그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다. 이것은 들돌 들기가 마을 청년들이 신체를 단련하고, 힘을 겨루는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과 마을의 젊은이들이 힘을 드러내 보이는 잣대의 역할도 하였음을 말해 준다.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하대 마을에서는 '들돌제'를 지낸다. 이 마을 어귀에는 고려 때 심었다는 큰 정자나무가 있다. 이 정자나무 밑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 쪽으로 10미터쯤 가면 길 왼쪽에 높이 약 1.2미터, 밑 둘레 약 2미터, 위쪽 둘레 약 1미터쯤 되는 '선돌'이 있고, 50미터쯤 더 들어가면 길 왼쪽에 시멘트로 만든 받침대 위에 힘 센 장정이 들어올릴 수 있는 크기의 둥근 돌이 있는데, 이 돌이 '들돌'이다. 이 마을에서는 이 선돌과 들돌 앞에서 음력 2월 초하룻날 새벽 6시에 마을 공동제의를 올린다. 마을의 평안과 풍년 기원에 목적을 둔 이 제의는, 선돌은 마을을 지켜주는 남성신, 들돌은 여성신을 상징한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2월 초하룻날 새벽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 회관 앞에 용대기를 세운 뒤에 풍물을 치고 한 바탕 논 뒤, 용대기 앞에 흰무리떡과 삼색실과와 포를 놓고 술잔을 올린 뒤에 제관이 재배한다. 그 다음에 용대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며 선돌 앞으로 가서 흰무리떡과 삼색실과와 포를 놓고 술잔을 올린 뒤에 제관이 재배한다. 다시 들돌 앞으로 와서 흰무리떡과 삼색실과와 포를 놓고 술잔을 올린 뒤에 제관이 재배한다. 그 뒤에 그 앞에서 간단히 음복을 하는데, 날씨가 추운 때이므로 가까이에 있는 마을회관으로 와서 음복하기도 한다. 제관은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며, 축문이나 소지(燒紙)는 하지 않는다.

  전에는 정월 대보름날 4∼5미터쯤 되는 나무에 짚을 묶어 세우고, 세 가운데 말뚝을 박고 동아줄로 매어 볏가릿대를 세운 뒤에 풍물패가 집집마다 다니며 걸립을 하여 제의 비용을 마련하였으나, 요즈음은 볏가릿대 세우는 일도, 걸립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이 마을은 모두 40여 호가 되는데, 들돌제에 참여하는 사람은 20명 내외이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들돌제를 지내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을에 큰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전에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 들돌제를 지냈는데, 일제 말기에 이를 못하게 하였으므로 몰래 하느라고 새벽 미명에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새벽에 제를 지낸다고 한다.

  들돌제의 대상신인 선돌과 들돌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선돌과 들돌은 수백 년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선돌의 경우, 이 마을에 아주 힘센 장사(壯士)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장사가 전염병에 걸려 오랫동안 앓다가 완쾌한 후 자기의 힘을 시험해 보기 위해 나무로 만든 신을 신고 이 돌을 들다가 댕기가 발에 밟혀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이 돌에 눌려 죽었다고 한다. 그 이후 죽은 장사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선돌을 위했다고 한다. 

  들돌은 모양이 둥글고 무게가 150근 정도 나가는 돌로서, 옛날에 오봉 마을 청년들과 하대 마을 청년들이 서로 돌 들기 놀이를 할 때, 서로 돌을 들어다가 자기 마을 앞으로 갖다 놓아야 질병이 없어진다 해서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놀이를 하였다. 그런데 하대 마을의 한 힘센 장사가 그 돌을 들어다가 하대 마을에 갖다 놓았다. 그 이후 오봉 마을에서는 이 돌을 들을 만한 장사가 나타나지 않아 지금껏 하대 마을에 있다고 한다. 그 이후 하대에서는 이 선돌과 들돌을 매년 음력 2월 1일 아침에 성의를 다하여 위하고 있다.

  위 이야기는 하대 마을 들돌이 마을 공동제의의 대상신이 된 유래를 설명하고 있어 흥미롭다. 하대 마을의 들돌 역시 전에는 젊은이들이 성년식에 쓰던 들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이 돌이 질병을 물리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믿게 되어 두 마을의 장정들이 그 돌을 자기 마을 앞으로 가져다 놓곤 하였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 돌을 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면, 질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이 돌이 질병을 물리치는 주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아 영속성을 지니고 있고, 특이한 모양이어서 특이성을 지닌 돌을 신성시하였다. 황곡리의 들돌은 암석을 신성시하는 암석 신앙과 질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주술적 심성에 의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마을 젊은이들이 신체를 단련하고, 힘을 겨루는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과 마을의 젊은이들이 힘을 드러내 보이며 화합을 강조하던 들돌 들기 풍습은 사라졌다. 이를 다시 돌이킬 수는 없지만, 들돌놀이나 들돌제가 행해지는 마을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이를 통해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뜻 있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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