넴루트산은 터키 남동부에 있는 해발 2,150m의 산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도시 아드야만(Adıyaman)에서 90km, 카흐타(Kahta)에서는 48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 산의 원추형의 산 정상에는 기원전 1세기에 만든 직경 약 150m, 높이 약 50m인 콤마게네왕국 안티오코스왕의 능묘(陵墓)가 있고, 그 앞에 커다란 석상(石像)들이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이 넴루트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터키에는 넴루트산이 또 하나 있는데, 이 산은 동부아나톨리아 지역의 반 호수 근처에 있는 해발 2934m의 산이다.

  해발 2,150m나 되는 넴루트 산의 꼭대기에 큰 능묘와 석상들이 있는 것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다. 이런 일을 한 왕은 어떤 인물일까콤마게네왕국이 있던 이 지역은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와 교역을 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은 기원전 14세기경부터는 히타이트(Hittite)의 지배 아래 있었고, 기원전 546년부터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 뒤에 알렉산더대왕이 이 지역을 정복하여 통치하였는데, 그가 기원전 323년에 요절(夭折)하자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각 지방에 군주를 두고 다스렸는데, 이곳 콤마게네 지방도 그 중 하나였다. 기원전 163년 콤마게네의 군주 사모스는 쇠약해진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이탈하여 콤마게네 왕국을 선포하였다. 사모스의 아들 미트리다데스 1세는 셀레우코스 왕조 최후의 왕인 안티오코스 13세의 딸과 결혼하고, ‘아버지는 페르시아 왕조, 어머니는 알렉산더 대왕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적자에게 안티오코스란 이름을 계승하게 하였다. 그의 아들이 안티오코스 1(재위 B.C. 6931)인데, 콤마게네 왕국은 이 때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안티오코스 1세가 자기의 무덤과 석상을 넴루트산 꼭대기에 만들도록 하였다.

  넴루트 유적은 1881년에 오스만제국이 도로 건설을 하려고 독일인 기술자를 고용해 비용을 계산해 보게 하였는데, 그가 이 산의 정상에서 조각상을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그 후 1953년에 미국 동양연구소가 이곳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고고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정상의 능묘(陵墓)와 석상(石像)

  나는 20106월에 남동부의 아드야만에 있는 넴루트산에 가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아 가지 못하고, 20116월에야 장위교회 성지순례단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나는 621일 아침 730분에 버스를 타고 카파도키아에 있는 아브라샤(Avrasya) 호텔을 출발하여 카흐타(Kahta)로 향하였다.

  우리는 가는 도중에 테킬 계곡을 돌아보고, 카흐타를 시내를 지나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려 오후 5시경에 유프라트 넴루트 호텔(Euphrat Nemrut Hotel)에 도착하였다.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는 호텔의 시설이 좋지 않으니 양해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단층으로 지은 호텔은 지은 지가 오래되어 최신식 시설을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깊은 산속에 있는 호텔답게 아담하고 조용하며 깨끗하였다. 수영장에는 맑은 물이 가득하였지만, 우리 일행은 수영보다는 건물 주변에 붉게 익은 체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체리나무들에 더 마음이 끌렸다. 체리를 따려고 하여도 손이 닿지 않아 애를 쓰자, 관리인은 막대기를 들고 와서 체리를 따주었다. 나무에서 직접 체리를 따서 먹는 맛은 정말 좋았다.

  내일 아침에 넴루트산 정상에 올라 일출을 보려면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하니, 일찍 자라는 가이드의 말을 따라 일찍 자리에 누었다. 그러나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에 잠이 깊이 들지 않고, 시계를 잘못 보는 바람에 잠을 설치고 말았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니, 몹시 피곤하였다. 그러나 넴루트산에서 보는 일출의 장관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새벽 330분에 호텔을 나와 산 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니, 작은 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몇 대의 차에 나눠 타니, 차는 산 정상 쪽으로 난 꼬불꼬불한 길을 곡예를 하듯 달려 올라갔다. 15분쯤 달려 올라간 뒤에 차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두운 데다가 바위 사이로 난 길에 크고 작은 돌들이 많아 조심조심 걸어 올라갔다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시계를 보니, 435분이었다. 길 왼쪽(서쪽)에 안티오코스 능묘와 석상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길 오른쪽(동쪽)으로 올라가니, 평평한 넓은 마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기쁨이 넘쳐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과도 악수를 한 뒤에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 도 있었다. 모두 넴루트산에 와서 일출을 본다는 것이 기쁘고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나와 아내 역시 좀 흥분되고 긴장되었다. 마당에 서서 동쪽 하늘을 보니, 사방은 어둠에 덮여 있고, 해가 뜰 기미는 보이지 않는데, 바람이 차서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언덕 밑으로 와서 바람을 피하며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새벽 5시 정각이 되자 저 멀리 동쪽의 타우르스산맥 너머에서 여명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1분쯤 뒤에 여명이 더 밝아지고, 잠시 후부터 해가 조금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모두 해가 떠오르는 장엄한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의 함성을 질렀다. 이 순간을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해 캠코더의 스윗치를 누르고, 카메라의 샷터를 눌렀다. 나도 해가 떠오르는 장엄한 모습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었다. 가끔씩 카메라의 뷰에서 눈을 떼어 둘러보니, 사방에 겹겹이 뻗혀 있는 산줄기와 산 아래의 평원에 여명이 비치는 광경이 정말 장관이었다. 멀리 터키까지 와서, 2,150m나 되는 높은 넴루트산 정상에서 해가 뜨는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게 된 것이 정말 기쁘고, 흐뭇하며 감사하였다.

  잠시 후에 해가 모습을 모두 드러내면서 능묘와 신상들을 비추기 시작하였다. 나는 어마어마하게 큰 능묘의 모양, 능묘 앞에 있는 제단과 신상(神像), 제단 아래에 놓여 있는 신상의 얼굴을 살펴보면서 사진을 찍었다햇빛이 비스듬히 비치는 능묘의 동쪽 제단에는 왼쪽부터 아폴론, 콤마게네, 제우스, 안티오코스 1, 헤라클레스의 상()이 서 있다. 양쪽 끝에는 사자와 독수리가 대칭으로 2쌍씩 서 있다. 석상의 안쪽에는 안티오코스의 출신 관련 내용과 유언을 새긴 그리스 문자가 새겨져 있다. 석상의 얼굴들은 지진의 충격으로 몸에서 떨어져 그 아래에 있다. 단정한 얼굴과 반쯤 열린 입은 헬레니즘 양식이고, 머리 장식의 장식과 의상은 페르시아 양식이라고 한다.

  여기에 세운 석상을 보면, 아폴론과 제우스는 그리스 로마에서 숭상되던 신이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영웅인데, 신으로 추앙되던 인물이다. ‘콤마게네행운’, ‘풍요의 뜻을 가진 여신이다. 안티오코스 1세는 이러한 신들과 나란히 서 있다. 이것은 안티오코스 1세가 신들과 같은 반열(班列)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석상의 독수리는 태양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창조물로, 신과 인간의 중재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자는 가장 힘센 동물로, 왕국을 보호하는 수호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쪽의 제단과 신상들을 살펴본 뒤에 능묘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서쪽 제단 앞으로 갔다. 서쪽 제단에는 사자와 독수리, 안티오쿠스와 콤마게네, 안티오코스와 아폴로, 안티오코스와 제우스, 안티오코스와 헤라클레스, 아폴로, 콤마게네의 석상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 역시 지진의 충격으로 얼굴 부분이 몸에서 잘려 나와 아래쪽에 놓여 있다. 동쪽과 서쪽의 석상들과 부조를 보면, 동쪽은 안티오코스와 신을 각각 조각하였다. 그런데 서쪽에는 안티오코스와 신을 함께 조각하였다. 이것은 안티오코스왕이 신과 동격(同格)으로, 신들과 교류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커다란 사자 부조의 가슴에 있는 초승달은 콤마게네 왕국의 상징이다. 등 뒤에 있는 3개의 별은 목성, 수성, 화성이라고 한다. 동쪽과 서쪽 제단을 연결하는 북쪽 통로에 세로로 새긴 석판을 늘어놓은 낮은 벽이 있다. 여기에는 페르시아계 부친의 내력을 기술해 놓았다.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이 높은 산에 능묘와 신상을 만들어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콤마게네 사람들은 일찍부터 태양, , , 물을 신성시하여 신으로 받들어 모셨고, 뒤에는 산, 폭풍, 전쟁, 풍요의 신도 숭배하였다. 이들은 신을 경배하기 위해 신전(神殿)을 지었는데, 신들은 다 하늘에 있는 것으로 믿어 하늘에 가장 가까운 산에 신전을 만들었다. 안티오코스 1세가 해발 2,150m나 되는 넴루트 산의 꼭대기에 자신의 무덤과 신상을 만들게 한 것은 자신이 신의 반열에 들고자 하는 뜻에서이고, 그 뜻을 이루려면 하늘 가까운 높은 산에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티오코스 1세는 왕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린 뒤에 신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력과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안티오코스 1세는 자기가 죽은 뒤에 묻힐 무덤을 하늘과 가까운 높은 산에 만들고, 신들과 나란히 서 있거나 신들과 교류하는 신상을 만들어 놓으면 신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안티오코스 1세는 과대망상(誇大妄想)에 빠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의 과대망상 때문에 거대한 공사를 하느라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노역에 시달리고, 재물과 생명을 빼앗겼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런데 그의 과대망상이 낳은 작품이 2천여 년이 지난 뒤에 세계문화유산이 되고, 우리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여 주고 있으니, 아이러닉컬(ironical)하다이 지역에는 다음과 같은 콤마게네왕국과 로마 시대의 유적이 있다.

아르사메이아(Arsameia, Eski kale)

  콤마게네의 수도였던 곳으로, 왕족의 선조 아르사메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스키 갈레(Eski kale)오래된 성채의 뜻으로, 그곳 주민들이 부르는 지명이다. 158m의 땅속으로 가는 터널 입구 위쪽에 헤라클레스와 악수하는 안티오코스 1세의 아름다운 부조가 있다. 안티오코스의 아버지 미트리다테스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예니 칼레(Yeni Kale)

아르사메이아 옆에 보이는 250300m의 험한 바위산의 성채이다. ‘예니 칼레새로운 성채의 뜻이다. 자미, 욕장, 왕궁의 방, 아치식 천장의 홀(hall)이 있는데, 이것은 오스만 시대의 것들이다.

젠데레 다리(Cendere Köprüsü)

젠데레 강의 가장 좁은 곳에 있는 로마 시대의 석교로 길이는 120m쯤 된다. 이 다리에 남아 있는 석판에는 2세기 말의 황제 세프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아내 율리아에게 바친다는 명문(銘文) 있다.

카라쿠쉬(Karakuş)

젠데레 다리 서쪽에 높이 30m의 무덤 있는데, 넴룻산의 무덤처럼 상자 모양이다. 도리스 양식의 기둥이 130m 간격으로 둘러싸고 있다. 동쪽 기둥 위에 2.5m의 독수리(Karakuş)의 상이 있다. 그래서 능 이름을 검은 독수리릉이라고 한다. 미트리다테스 2(재위 B.C. 3120) 왕이 어머니와 딸을 위해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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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안타키아(Antakya)를 밤 11시에 출발한 우리는 2010624일 새벽 440분에 콘야(Konya)의 동남쪽에 있는 에레일리(Ereğli)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리니, 한국어문학과 3학년 메르트 군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메르트 군은 우리를 승용차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메르트 군의 집은 새로 지은 널찍한 아파트였다. 그는 우리를 방으로 안내한 뒤에 버스에서 제대로 자지 못하였을 터이니 좀 자라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침대에 누워 두어 시간을 자고 일어나니, 피로가 좀 가시는 듯하였다.

   830분쯤 자리에서 일어나 메르트 군의 부모님과 인사를 하였다. 메르트 군의 부모님은 아주 반가워하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9시경에 빵과 치즈, 우유와 주스, 과일 등으로 아침 식사를 하였다. 메르트 군은 식사 후에 에레일리-광진구 자매결연 공원을 보고, 자기집 과수원에 가자고 하였다.

   10시경에 우리는 메르트 군이 운전하는 승용차에 그의 어머니와 함께 타고 집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사야할 물건이 있으니, 시장에 잠깐 들르자고 하였다. 우리가 간 곳은 에레일리시에서 가장 큰 시장이라고 하는데, 물건도 많고, 사람도 많았다. 과일과 채소 파는 곳을 둘러보니, 체리, 복숭아, 사과, 살구, 자두, 포도, 바나나, 무화과, 건과, 메론, 수박 등의 과일과 채소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쌓여 있는 상품들을 보니, 카이세리 시내의 시장이나 대형 마켓에서 보던 상품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양도 많고, 빛깔도 좋으며 튼실하여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가격표를 보니 가격 역시 아주 저렴하였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나의 눈을 끄는 것은 흰색 체리였다. 흰색 체리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사진을 찍고, 자세히 보았다. 지금까지 보던 붉은 색 체리와 모양은 똑같은데, 색만 달랐다. 내가 흰색 체리를 처음 본다고 하니, 메르트 군은 이따가 과수원에 가면 흰색과 붉은색 체리가 나무에 달려 있으니, 마음껏 따먹으라고 하였다.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공원으로 갔다. 공원 정문 위에는 에레일리구-광진구 자매공원이라고 왼쪽에는 한글로, 오른쪽에는 터키어로 쓰여 있었다. 한글로 쓴 아랫부분에는 태극기와 광진구의 기가 그려져 있고, 터키어로 쓴 아랫부분에는 터키 국기와 에레일리구의 기가 그려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좀 작은 글씨로 ‘2002. 10. 16’이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그것은 서울특별시의 광진구와 에레일리구가 자매결연을 맺은 날짜인 것 같다.

   공원 안에는 널찍하게 자리 잡은 1층 건물이 있는데, 건물 중앙에 아차산이라는 한글 현판이 걸려 있었다. 건물 안의 넓은 홀은 보통 때에는 레스토랑으로 쓰는데, 결혼식을 하기도 하고, 특별한 행사장으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아차산을 나와 잔디밭 길을 조금 걸어가니, ‘광진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한국식 팔각정이 있었다. ‘광진정에 앉아 공원을 둘러보니, 정말 감개무량하다. 아나톨리아 반도에 자리잡은 터키의 남쪽 지방까지 와서 자매결연을 한 광진구의 의지와 노력이 가상하고 존경스럽다.

   팔각정 앞에는 두 아주머니가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와 같이 굵은 나무로 얇고 판판하게 밀어 쇠솥뚜껑 같은 것에 올려놓아 굽고 있었다. 메르트 군의 아버지는 이것을 사 가지고 와서 에레일리의 전통음식이니 먹어보라고 권하였다. 배가 부르지만, 받아서 먹어보니 맛이 좋았다.

   우리가 공원에 있을 때 한국어문학과 2학년에 다니는 휘세인 군이 오트바이를 타고 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는 우리가 온다는 말을 듣고,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면서 반가워하였다.

   우리는 메르트 군이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그의 집 과수원으로 갔다. 메르트 군의 아버지와 휘세인 군은 각자 오트바이를 타고 뒤따라 왔다. 우리는 작은 언덕을 넘고, 누렇게 익은 밀밭을 지나 과수원에 도착하였다. 길옆에 작은 집이 한 채 있고, 꽤 넓은 밭에 체리, 살구, 사과복숭아호두 등의 나무가 서 있다. 과수원은 공무원을 하시다가 은퇴한 메르트 군의 아버지께서 은퇴한 후를 생각하여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누런 살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살구나무와 먹음직스런 체리를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매달고 있는 체리나무 앞으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메르트 군이 권하는 대로 살구와 체리를 따서 먹었다. 이렇게 열매를 한껏 달고 있는 살구와 체리 나무를 보는 것도 처음이고, 그 열매를 내 손으로 따서 바로 먹는 것도 처음이어서 조금 흥분되었다.

   살구는 신맛이 별로 없고 달콤하였다. 한국에서 살구 하면 신맛이 떠올라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데, 여기 살구는 시지 않아 여러 개를 따서 먹었다. 체리는 약간 신맛이 나면서 달고 상큼한 맛을 냈다. 카이세리에서 몇 번 사다 먹던 체리보다 더 맛이 있었다. 터키에서는 체리가 1kg2리라(1,500) 정도 한다. 한국에서는 수입 체리 가격이 1kg18,000원 정도로 비싸서 마음대로 사다 먹지 못하였다. 그런 체리를 잘 익고 맛있게 생긴 것만 골라서, 나무에서 직접 따서 먹을 수 있으니, 참으로 기쁘고 흐뭇하였다.

 

   터키에서는 체리를 키라스(kiras)’비쉬네(vişine)’로 나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나 터키에 와서 사다 먹은 것은 키라스이다. 비쉬네는 키라스와 모양은 같은데, 알이 조금 작고 신맛이 강하다. 그래서 날로 먹는 것보다는 잼이나 주스를 만드는데 주로 쓴다고 한다. 키라스는 검붉은 색도 있고, 흰 색도 있다. 지금까지 체리라고 하면 검붉은 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 오기 며칠 전에야 흰색 키라스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흰색 키라스는 오늘 아침에 시장에서 처음 보았고, 나무에 매달린 것은 이 과수원에 와서 처음 보았다.

   나무의 줄기나 잎을 보니, 키라스와 비쉬네가 똑같아 보였다. 그러나 메르트 군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키라스와 비쉬네는 열매도, 줄기와 잎도 조금씩 달랐다. 키라스 나무 중에서도 흰색 키라스는 잎눈에 흰빛이 보였다. 키라스의 씨를 심으면 싹이 터서 자라 비쉬네의 묘목이 되는데, 여기에 키라스나무 가지를 잘라 접을 붙인다. 그러면 접붙인 가지에 의해 붉은 색 또는 흰색의 키라스 나무가 된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접붙인 가지가 자라는 것을 보니, 내가 어렸을 때 고욤나무 묘목에 감나무 가지를 잘라 접을 붙여 굵고 맛있는 감이 열리는 감나무가 되게 하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처음에는 키라스와 비쉬네를 구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메르트 군의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두 나무의 열매, 줄기와 잎을 비교하여 둘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키라스나무 중에서는 붉은색 키라스 나무인지 흰색 키라스나무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과수원집은 침대를 놓은 방 하나와 농기구, 거름흙, 비료 등을 보관하는 헛간이 있었다. 집앞에는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화덕이 있었다. 메르트 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침에 시장에 들러 사가지고 온 양고기와 채소를 넣고 맛있는 요리를 하였다. 그 요리를 사 가지고 온 식빵과 함께 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음식을 먹은 후에 차를 끓여 마셨다. 차를 마신 뒤에 메르트 군의 아버지는 터키의 전통술인 라크를 권하였다. 라크는 40%나 되는 독한 술이므로 사양하다가 맛을 보기로 하고 작은 잔에 반쯤 받았다. 거기에 물을 타니, 우유처럼 색이 변하였다. 맛은 진한 향이 있어 감미로우면서도 상큼하였다.

   잠시 후에 메르트 군이 바알라마(bağlama, 기타처럼 생긴 터키의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자, 메르트 군의 어머니가 일어나 춤을 추었다. 잠시 후에 아버지도 일어나서 어머니와 함께 춤을 추었다. 잠시 후에는 휘세인 군이 일어나 함께 춤을 추면서 분위기를 북돋았다. 이런 모습을 보니, 야외에 소풍 나온 기분이었다. 노래 부르고 춤추기를 좋아한다는 터키 사람들의 흥취를 직접 볼 수 있어 좋았다.

   우리는 살구와 붉은색, 흰색 키라스를 각각 운반용 물통에 하나 가득 따서 차에 싣고 메르트 군의 집으로 왔다. 메르트 군의 어머니는 가지고 온 살구와 체리를 씻어 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메르트, 휘세인 군과 함께 시내 구경을 하고, 다음 날 카이세리로 돌아갈 버스표를 예매하였다.

   오늘은 메르트 군의 부모님과 하루를 지내면서 터키 중산층의 삶의 일면을 볼 수 있어서 참으로 좋았다. 처음으로 살구와 키라스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를 가까이서 보고, 한국에서는 비싸서 자주 사먹지 못하던 키라스를 마음껏 따먹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메르트 군과 그 부모님의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에 감사한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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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탈회윅은 콘야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있는 신석기 시대 유적지이다. 이곳은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트가 1961~1965년에 걸쳐 발굴하였다. 그는 발굴 결과 이곳을 포함하는 아나톨리아 지방이 신석기 시대 선진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콘야의 메블라나 호텔에서 숙박한 우리는 호텔 사장의 소개로 승용차를 몰고온 사람에게 90리라(7만원)를 주기로 하고, 그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차탈회윅으로 갔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보니, 길가에 안내판이 서 있고, 그 옆에는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던 집을 재현해 놓은 초가집과 전시관이 있다. 그 위쪽 언덕에 발굴 현장이 있는데, 높은 지붕으로 덮은 곳도 있고, 덮지 않은 곳도 있다. 아직도 발굴이 끝나지 않은 곳도 있다. 그곳의 관리인 남자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 전시실로 안내하여 이곳의 개황을 설명하였다. 그런 뒤에 당시 사람들이 살던 집을 재현해 놓은 곳으로 안내하여 살던 집의 구조와 생활 모습 등을 설명하였다.

이곳은 기원전 7,000년경에 형성된 마을인데,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기원전 6,700년경, 그리고 가장 후기의 건축물은 기원전 5650년경의 것으로 추정한다. 이 시대 사람들은 흙벽돌로 지은 집을 짓고 살았는데, 지붕에서 나무 사다리를 타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집안에는 벽난로와 화덕이 있고, 바닥보다 조금 높은 단은 앉거나 잠을 잘 때, 또는 일을 할 때 사용하였다. 곡식과 과일 나무를 재배하였고, 집짐승도 길렀던 흔적도 남아 있다.

이곳에의 면적은 13ha 정도인데, 5,000~10,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흙벽돌집을 이어서 짓고 살았다. 집은 100년 정도 살고는 허물어 메우고, 그 위에 새로 집을 지어 살았다. 이런 일이 1,000년 정도 반복되다 보니, 집터는 다른 곳보다 20m 정도 높아져 언덕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발굴된 것 중에는 진귀한 것들이 많은데, 모두 앙카라에 있는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으로 가져갔고, 여기에는 사진만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된 사진 중에는 여러 사람이 사슴과 물소를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 춤추는 장면, 머리를 마주대고 있는 표범을 그린 벽화 등이 아주 선명하였다. 조각품 중에는 유난히 큰 유방과 배를 드러내고 앉아 있는 여신상이 눈에 띄었다. 이 신상은 아주 특이하여 앙카라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에서 본 기억이 또렷하다. 짐승의 모양으로 다듬은 돌과 여인의 상반신 모양으로 다듬은 돌로 나의 관심을 끌었다.

 

 

  사람의 무덤에서 뼈도 발굴되었는데,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옛사람들이 무덤을 대지어머니(지모신)의 태()로 보고, 죽은 사람이 대지어머니의 태속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믿음에서 생긴 매장(埋葬)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발굴의 현장에는 마을의 형태와 구조, 옛날 집들의 위치와 구조, 신전의 위치와 구조, 무덤 등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사진과 설명이 게시되어 있었다. 안내원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여러 가지 출토품이 나온 곳도 말해 주었다.
 


  나는 이곳을 떠나면서 신석기 시대에 왜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을까를 생각하였다. 인류문명의 발상지는 물이 있는 강가로 기후가 따뜻한 곳이다. 물과 기후 가 맞아 식량 문제가 해결된 뒤에는 희소가치(稀少價値)가 있는 물자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에 모여 살았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예리코를 들 수 있다. 사람들이 곡물을 식량으로 섭취하게 되자, 체액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소금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소금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예리코에 기원전 7,000년경에 성곽도시가 형성되었다.

차탈회윅에는 어떤 물자가 있었기에 도시가 형성되었을까 궁금하였다. 나중에 안 일인데, 차탈회윅은 흑요석이 많이 나는 곳이다. 흑요석은 예리한 날을 만드는 데에 아주 귀중했다. 그래서 차탈휘익에는 예리코와 유사한 교역중심지가 생긴 것이다.

차탈회윅을 떠난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비잔틴 시대의 교회가 있다는 실레(Sille) 마을을 찾아갔다. 20분쯤 달려 실레 마을에 갔는데, 교회는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진만 찍고 돌아섰다. 공사를 하고 있는 교회의 뒷편 언덕에도 비잔틴 시대의 교회가 있었다고 하기에 살펴보니, 벽만 남아 있었다. 공사를 하고 있는 교회 앞쪽에는 바위산이 있는데, 옛날에 동굴에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가보니, 카파도키아에 많이 있는 석굴교회와 비슷하였다.

우리는 오는 길에 로마 시대부터 있던 공동목욕탕을 수리하여 지금도 쓰고 있다는 목욕탕 앞에 쉬면서 사진을 찍고, 콘야 시내로 들어왔다. 승용차 기사는 우리를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 주었다. 우리는 터미널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330분에 출발하는 카이세리행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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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313일에 중앙아나톨리아의 서남쪽 내륙 평야 지대에 위치한 콘야에 갔다. 나와 아내는 아침 7시에 숙소 앞에서 양 선생, 충남대학교 교환학생으로 온 두 여학생과 함께 서비스 버스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갔다.

  콘야는 전에는 이코니움(이고니온)이라고 하였는데, 그리스와 로마 제국 당시에는 루가오니아의 수도였다. 신약 성서에 따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 여행을 왔던 곳이다. 두 사람은 이곳에 와서 유대교의 회당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설교하였는데,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 무리들이 두 사도를 돌로 치려고 위협하여 할 수 없이 몸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한다(사도행전 14:1~6). 이곳은 디모데가 복음을 전하며 신앙생활을 잘하여 칭찬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나중에 로마의 지배를 받았는데, 서기 235년에 초대교회 교회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곳은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수도가 되어 11세기에 크게 번영하였다. 이 때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지금 남아 있는 많은 역사적인 경관들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메블라나 박물관과 미나레 신학교가 가장 유명하다.

   콘야는 매우 아름다우며, 비옥하고 풍부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버시디아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강물로 비옥해진 넓은 평야에서 밀아마 등의 곡식과 체리, 살구 등의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여기서 생산되는 밀은 터키 전체 국민의 1년 양식이 되고도 남는다고 한다. 이 말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 지방의 넓은 평야에서 나는 곡식의 양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콘야는 학자이자 시인인 메블라나 젤라레딘 루미(Mevlana Celalleddin Rumi, 1207~1273)13세기에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수피즘(Sufism)을 창단한 곳이다. 그리고 수피즘의 상징으로 꼽히는 명상(冥想)의 춤 세마(Sema)’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오전 830분에 출발한 버스는 괴레메, 네브세히르, 악사라이 등을 경유하여 1250분에 콘야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앙카라 대학에 객원교수로 와 있는 김 교수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어서 반갑게 만났다.

   우리는 돌무쉬(한국의 마을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와서 메르트 군이 알려준 하지 쉬크류(Hacı Sükrü)’ 식당을 찾아갔다. 콘야의 전통음식인 프른 케밥(Fırın Kebabı)’을 그 식당을 가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몇 번씩 물어서 찾아갔다. 그 식당은 3대째 이어하는 프른 케밥 전문점이었다. 한쪽 벽에 역대 주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실내에는 터키 전통 농기구와 악기, 생활 용품 등으로 장식을 하였는데, 알맞게 배치되어 고풍스럽게 느껴졌다.

   음식 이름의 프른(Fırın)오븐을 뜻하는 말이다. 주문한 음식은 얇게 썰어 오븐에서 잘 익힌 양고기를 보쉬피데(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불에 구은 빵의 일종)를에 싸서 접시에 놓았다. 먹기 전에 사진을 찍으면서 보니, 서울의 원할머니 보쌈이 연상되었다. 고기 맛은 부드럽고 연하며 고소하였다. 양고기 냄새를 싫어하는 아내는 양고기 냄새가 나지 않아 좋다면서 맛있게 먹었다. 1인분은 150g15리라인데, 양도 적당하고, 값도 크게 비싸지 않아 좋았다. 일행 여섯 명이 모두 맛있게 먹었다며 만족해하였다. 그 식당을 꼭 찾아가라던 메르트 군의 말을 따르기를 잘한 것 같다.


   우리는 메르트 군이 인터넷으로 예약해 놓은 메블라나 호텔로 갔다. 21실에 숙박료는 55리라라고 하였다. 우리는 방을 배정받은 뒤에 가방을 내려놓고, 시내 관광을 하였다.

메블라나 박물관(Mevlana Müzesi)

   메블라나 박물관은 이슬람의 신비주의 종파인 메블라나 교단을 창시한 메블라나 젤라레딘 루미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이다. 6,500의 부지 안에 자미와 수행 장소 등이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원래 궁전의 장미 정원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왕이 메블라나의 아버지 바하틴 벨레디에게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한다.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탑은 1396년에 세워진 것이다.

   이곳은 메블라나 루우미가 메불라나 교단을 창시하던 때부터 1923년까지 메블라나 교단에서 사원으로 사용하였다. 1923년 터키에서 종교의 세속화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왕정(王政)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메블레나 교단은 크게 위축되어 교단은 해체되고, 메블라나 사원은 폐쇄되었다. 1927년에 사원으로 쓰였던 장소만 박물관으로 문을 열어 메블라나의 생활상과 교리를 보여주는 박물관이 되었다.

   이곳의 중심은 탑 바로 아래에 있는 성인들의 묘소이다. 여러 묘 중에서 관이 가장 큰 것은 루미의 묘로, 유해는 관 아래의 땅에 매장되어 있다. 여러 관들은 각각의 지위를 나타내는 커다란 터번을 올려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 박물관에는 메블라나 루미의 소지품, 세밀화(細密畵)가 그려진 코란, 의상, 신비스런 악기, 그리고 손으로 만든 양탄자, 비문, 문서, 예술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터키 신비주의 이슬람 문화를 접할 수 있다.

알랏딘 자미(Alaaddin Camii)

   메블라나 박물관에서 나온 우리는 시내를 구경하며 천천히 걸어서 셀리미예 자미와 알랏딘 자미를 비롯한 여러 자미와 박물관을 찾아갔다. 터키어를 잘하는 양 선생이 길을 물으며 앞서 갔으므로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면 되었다.

  메블라나 박물관 바로 옆에는 셀리미예 자미(Selimiye Camii)가 있다. 이 자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리미예 2(재위 기간 1566~1574)가 건축하였다. 이 자미는 오스만 제국의 건축술의 진수를 볼 수 있는 자미로 꼽힌다. 자미 안에 들어가니 건물이 높고 창이 많아서 그런지 햇빛이 들어와 밝고 환하였다. 자미 안 분위기는 웅장하고 경건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구석에는 이슬람식 큰절을 하고 기도하는 사람도 보였다. 자미 밖으로 나오니 마당에 셀 수 없이 많은 기러기들이 떼지어 와서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고 있었다. 아주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알랏딘 자미는 알랏딘 언덕(Alaeddin Tepesi)’에 자리 잡고 있다. 알랏딘 언덕은 콘야에서 사람이 제일 먼저 살기 시작한 곳으로,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이코니온 성이 있었다. 지금은 공원이 되어 버린 이곳에 알랏딘 자미가 있는데, 셀주크 터키인들에 의해 지어진 가장 오래된 자미이다. 이 자미의 건축은 루크네딘 마수드의 통치 기간(1116~1156)에 시작하여 1221년 술탄 알랏딘 카이쿠바드 1세 때에 완성되었다. 완성한 술탄의 이름을 따라 알랏딘 자미로 불린다.

   이 자미의 천장을 받치고 있는 돌기둥은 42개인데, 대부분 로마 시대나 비잔틴 시대의 신전이나 교회 등의 건축물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자미의 내부에는 아무런 치장이 없음은 물론, 뒤에 지어진 사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색도 없다. 그래서 오히려 엄숙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하다. 이 자미는 기도 장소로서의 위엄을 갖추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곳에는 셀축 터키의 술탄 8명의 관이 보관되어 있다.

   알랏딘 자미를 보고 나온 우리는 카라타이 박물관(Karatay Muzesi)으로 갔다. 이 박물관은 13세기 중반에 셀주크 시대의 고관인 카라타이가 지은 신학교인데, 지금은 도자기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시하고 있는 것들은 셀주크 시대의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인제 미나레 박물관(İnce Minare Müzesi)은 카라타이 신학교와 비슷한 시기에 고관이었던 히사프 아타에 의해 지어진 신학교이다. 인제 미나레는 가는 첨탑이란 뜻이다. 첨탑이 번개를 맞아 부러져서 전체 길이의 3분의 1정도만 남아 있다. 정문 앞면에 장식된 기하학적인 문양은 셀주크 미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지금은 셀주크와 오스만 시대의 석조, 목조 작품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메블라나(Mevlana)와 신비의 춤 세마(Sema)

   콘야는 13세기에 메블라나 젤라레딘 루미가 창단한 신비주의 종파인 수피즘의 상징으로 꼽히는 명상(冥想)의 춤 세마(Sema)’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세마가 유명한 고장답게 기념품 상점에는 세마의 춤 동작을 표현한 크고 작은 도자기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다. 세마의 춤 동작은 이 지역 광고에도 수없이 보이고, 가로등 아래에도 조명 장치를 하여 매달았다. 이를 보면 도시 전체가 세마의 신비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호텔 직원에게 세마를 언제, 어디서 볼 수 있는가를 물으니, 메블라나 문화회관에서 매주 토요일 730분에 공연한다고 하였다. 거리로 나와 크고 깨끗해 보이는 식당으로 가서 콘야의 전통음식이라고 하는 에틀리에메크 피데(Etliekmek Pide, 고기가 있는 피데의 뜻)’를 시켰다. 콘야가 자랑하는 전통음식 두 가지를 다 먹어보고 싶어서였는데, 점심에 먹은 프른 케밥과 마찬가지로 맛이 좋았다. 식사 후에 시내 버스를 타고 메블라나 문화회관으로 갔다. 오후 7시도 못되어 도착하였는데, 문화회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며 몇 시부터 입장하느냐고 물으니, 730분이 되어야 입장시킨다고 하였다.

   세마를 시작한 메블라나 젤라레딘 루미는 1207930일에 지금의 아프카니스탄 발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위대한 이슬람의 신학자였고, 어머니는 지역 지도자의 딸이었다. 루미는 12살 때 몽골의 침략을 피해 고향을 떠났는데, 1228년 셀주크의 술탄 알라딘 카이쿠바드의 초대를 받아 콘야로 왔다. 그는 콘야에서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 지도자를 만나 교류하면서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이란에서 온 방랑자이면서 춤추는 수피신비주의자인 셈스를 만나 삶의 자세가 바뀌었다. 전통적인 신학자, 법률가의 길을 가던 그는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시를 쓰고 춤을 추면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였다.

   루미는 진정한 영적 지도자로서 명상과 기도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슬람 본질에 다가가려 했다. 루미는 다음과 같은 7가지 교훈을 남겼다.

   남에게 친절하고 도움주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라.
   연민과 사랑을 태양처럼하라.
   남의 허물을 덮는 것을 밤처럼 하라.
   분노와 원망을 죽음처럼 하라.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기를 땅처럼 하라.
  
너그러움과 용서를 바다처럼 하라.
  
있는 대로 보고, 보는 대로 행하라.
 
   루미의 사상과 낮은 곳으로 향한 사랑은 유럽 지성세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17세기 화가 렘브란트, 18세기 작곡가 베토벤, 19세기 대문호 괴테 등도 직간접으로 루미 사상에 영향을 받은 유럽 지성들이었다.

   루미가 활동하던 시대에 아랍어로 씌어진 코란은 비아랍권의 서민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이었다. 더욱이 이슬람교에서는 오해와 왜곡을 막기 위해 코란을 다른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에 따라 이슬람교는 아랍 중심의 지배자와 엘리트 계층만을 위한 신앙적 도구로 한정되어 가고 있었다. 루미는 코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도 누구나 일정한 영적 수련을 거치면 신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골똘히 생각하였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세마이다. 그는 독특한 회전 춤을 통해 누구든지 신의 경지를 경험하고, 궁극적으로는 신과 교통하면서 이슬람의 오묘한 진리를 체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세마는 민중들에게 퍼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루미는 관용(寬容)과 상생(相生)의 정신으로 이슬람을 재해석하여 이슬람 신비주의를 이룩하고, 그 안으로 인류를 품으려 하였다. 그는 무슬림이 아닌 사람이나 무신론자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펼쳐 인류 모두가 상호존중과 화해를 통해 함께 사는 진정한 지혜를 제시하였다. 특히 용서와 관용을 강조했다.

   루미의 묘 앞 돌에는 아래의 시구가 적혀 있다.

    오라! 그대가 누구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불을 섬기는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 오라. 우리들의 문은 절망의 문이 아니니, 그저 있는 그대로 오라!…….”

   루미의 관용과 상생의 이슬람 정신은 아랍의 경계를 넘어 세계로 퍼져갔고, 다른 종교와 서로 섞이고 공생하면서 오늘날 비아랍 세계에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그의 가르침은 종교를 뛰어넘는 사랑이었고, 인류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다. 1273년 루미가 세상을 떠나자 무슬림뿐만 아니라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40일간이나 되는 장례에 모두 하나같이 애도하고 참여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진정한 지도자의 덕목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말해 준다.

   유네스코는 루미의 탄생 800주년이 되는 2007년에 루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여 그의 높은 정신을 기렸다.

   이슬람의 정통 수니파에서는 세속적인 음악과 춤을 금지한다. 신을 향한 마음이 흐트러지고, 타락과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슬람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음악은 코란을 낭송하는 소리일 것이다.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음악과 춤이 하나의 종교예술로 승화시킨 것이 메블라나 종단의 수피 댄스 곧 세마이다.

   730분이 되니 문화회관 직원이 나와 문을 열어주며 들어가라고 하였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문화회관의 공연장은 넓고 깨끗하였다. 30분을 기다려 8시가 되니, 악단과 노래하는 사람이 나와 의자에 앉았다. 악기는 터키의 전통악기인데, 우리의 대금과 같은 관악기도 있고, 기타와 비슷한 현악기도 있었다.

   잠시 후 흰옷을 입은 위에 검은 겉옷을 걸쳐 입고, 원통형의 흰 모자를 쓴 사람이 혼자 나와 중앙으로 와서 엎드려 절하고, 낮은 음으로 노래를 하였다. 그 뒤에 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줄을 지어 나왔다. 이들을 세마젠(Semazen)’이라고 하는데, 세마를 통해 수도하는 사람들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단순 연희자인지, 세마를 통해 수도하는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다.

   기도와 의식을 마친 세마젠은 한 걸음 걷고는 발을 모아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큰 원을 그리며 돌았다. 그리고는 겉옷을 벗고 음악에 맞춰 몸을 회전하며 춤을 추었다. 하늘을 향해 자기 몸의 축을 세우고, 눈을 지그시 감고 귀와 마음을 열고 알라를 부르며 몸을 빙글빙글 돌린다. 오른손은 하늘을 향하고, 왼손은 땅을 가리킨다. 고개는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였는데, 지구의 자전축(自轉軸)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 돌고, 3명이 돌고, 잠시 후에는 20여 명이 모두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옆으로 움직인다. 한 사람이 돌고, 옆 사람이 돌고, 모두가 도는 군무(群舞)가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엄숙해 지고, 거룩함이 느껴진다. 이런 춤이 계속되는 동안 수도자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신과 소통하는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이 입은 옷과 동작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흰옷은 에고(ego)의 죽음을, 검은 겉옷은 무덤을 상징하고, 원통형의 모자는 자신의 묘비를 상징한다고 한다. 벌린 두 팔은 영적인 합일을 의미한다. 하늘을 향한 오른 팔은 신의 은총을 받는다는 뜻이고, 땅을 향한 왼팔은 신의 은총을 전한다는 뜻이다. 이들은 지구의 회전 방향과 같이 왼쪽으로 돌고 돌면서 신 앞에서 하나가 되고, 모든 사람과 신의 창조물을 사랑으로 포용한다.

   음악은 악기만 연주될 때도 있고,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하는데, 곡들이 모두 경건하고 장중하였다. 모두가 돌며 춤을 추는 회전무가 끝난 뒤에는 다시 큰 원을 그리며 걷고, 그 뒤에는 다시 회전무를 하였다. 나는 신비감이 도는 세마를 보면서 전체를 비디오 카메라에 담았다.
 


   터키 신비주의 명상춤 세마는 20059월에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한국에 이슬람이 들어온 50주년을 기념하여 한터 친선협회 및 한국 이슬람중앙회 주관으로 송파구민회관에서 선보였다.

   세마는 920분이 되어서 끝났다. 밖으로 나오니 마음이 가볍고 경쾌하였다.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와서 보니, 문화회관 앞 가로등 밑에 세마의 동작을 나타내는 조명등이 나란히 걸려 있다. 조명등의 세마 동작은 하늘과 땅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콘야는 2011624일에 장위교회 목사님을 비롯한 교우 20여 명과 함께 다시 방문하였다. 여행 일정 상 시간이 없어서 여러 곳을 보지 못하고 메블라나 박물관과 알랏딘 자미를 관람하였다. 이 날은 더운 날씨여서 알라딘 자미를 관람하고 나와서 알랏딘 언덕의 휴게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었다. 커다란 크리스탈 용기에 세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가득 담아 주었다. 한 그릇에 4리라로 다른 곳보다 조금 비싸기는 하였지만, 터키 아이스크림의 참맛을 즐기며 땀을 식힐 수 있어 좋았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니데(Niğde)의 은빛 수도원(Gümüşler Manastır)


   2011220일 일요일은 4학년 메흐멧, 에르딘츠 군과 함께 G 교수가 한국에 가면서 두고 간 승용차를 타고, 니데에 가기로 한 날이다. 아침 일찍부터 눈이 내리므로 못 가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에는 눈이 그치는 듯하였다. 그러더니, 930분쯤에는 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래서 메흐멧에게 니데에 가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자고 전화하고는 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메흐멧이 전화를 걸어 아버지께 전화를 하였더니, 니데에는 눈이 없다고 하니, 그대로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봄눈이니 내리면서 녹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대로 길을 떠났다.

   니데는 카이세리(Kayseri)에서 남서쪽 약 130km, 아다나(Adana)에서는 북서쪽으로 1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아나톨리아 고원에 자리 잡고 있는 인구 약 15만 명의 작은 도시이다. 니데는 인근 지역에서 나는 사과를 비롯한 과일과 곡식 등의 집산지(集散地)이다. 이곳에는 셀주크 왕조 시대의 옛 사원과 묘소가 있고, 옛 성의 일부도 남아 있다. 히타이트 문자로 된 기념비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또 셀축 시대에 기독교 수도사들이 수도하던 수도원이 있다.

  G 교수의 차를 내가 운전하고, 1050분쯤 숙소인 빌림 시테시(Bilim Sitesi)를 떠났다.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는데, 바로 녹아 길에 쌓이지는 않았다. 카이세리 시내를 벗어나니 편도 3차선의 도로에 차가 많지 않아 한적하였다.

  니데 시내 거의 다 가서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서 4~5km를 달리니 건물 56층 높이의 바위산이 길게 뻗쳐 있었다. 나무도 자라지 않는 바위산에는 동굴의 입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많은 자연동굴이 있는 것 같았다.

  산자락의 중간쯤에 가니, 산 밑의 평지에 큰 나무들이 서 있는데, 그 앞에는 목책(木柵)을 둘러놓았다. 그곳이 은빛 수도원(Gümüşler Manastır)’이다. 셀축 시대인 10세기경부터 기독교 수도사들이 수도하던 곳이라고 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3리라를 내고 입장권을 사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10m쯤 들어가니, 건물 안에 있는 마당처럼 된 곳이 있는데, 넓이는 보통 강의실의 서너 배쯤 될 듯하였다. 마당의 사면은 바위가 거의 수직으로 서 있어서 마치 건물의 벽처럼 보였다.


  마당의 안쪽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니, 100여 명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정면 벽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비롯하여 성경의 인물들을 그린 몇 점의 성화가 그려져 있었다. 부분적으로 훼손되기는 하였으나, 그림의 내용은 대강 알 수 있었다.

   교회 옆의 공간에는 바닥에 길쭉한 구덩이와 좁고 깊은 구덩이가 여려 개 파여 있었다. 사람이 누울 만큼 길쭉한 곳은 시신을 놓아두던 곳이고, 큼직한 항아리를 넣을 만큼 깊게 판 구덩이는 죽은 사람의 유품을 놓아두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곳은 수도원 안에 있는 무덤이었던 것 같다.


   광장의 옆면과 앞면에는 위층과 아래층으로 나눠진 동굴이 여러 개 있는데,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동굴에는 수도사들의 숙소로 쓰기 좋은 곳도 있고, 조용히 기도하기 좋은 곳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앉을 수 있는 넓은 공간도 있고, 포도주를 비롯한 식료품을 저장해 두던 곳도 있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마당에 수직으로 뚫려 있는 작은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에 작은 돌을 넣으면, 그 돌이 지하 2층 정도의 깊은 방에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꼬불꼬불한 통로를 지나야 갈 수 있는 지하 2층 깊이의 방에 있는 사람에게 긴급한 사항을 알리는 통신 수단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괴레메 지역에 있는 지하 동굴교회와 지하도시가 떠올랐다. 당시의 수도사들은 지하의 동굴로 들어와서 이곳을 이용하기 좋게 부분적으로 손질하고, 거기에서 생활하면서 수도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불편하고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신앙의 깊이를 더하였을 것이다. 신앙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고 하겠다.

   수도원 밖으로 나와 보니, 수도원의 위쪽과 아래쪽에 절벽을 이룬 바위산이 연이어 있었다. 그 바위산에는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안에 많은 석굴이 있는데, 그곳은 교회와 수도사들의 숙소로 쓰던 곳이라고 한다. 가보고 싶었지만, 진눈깨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서 그만 두었다.

   수도원을 나온 우리는 차를 타고 니데 시내로 들어왔다. 이곳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메흐멧 군은 시내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우리는 니데의 전통음식인 니데 타바(Niğde Tava)’를 시켜 먹었다. 돌로 만든 프라이팬에 닭고기와 당근, 양파, 토마토 등을 넣고, 양념하여 익힌 요리인데 맛이 좋았다.


  오후 3시 경에 나지막한 산의 능선에 쌓은 니데 성에 올라갔다. 옛 성의 일부만 남아 있기는 하였으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서 니데 시내를 내려다보니, 시가지는 작고 아담하였다. 메흐멧이 니데는 작지만 아름다운 도시예요.’ 하던 말이 사실이었다.

  진눈깨비가 그치지 않고 내리므로 빨리 가자고 하니, 메흐멧은 성을 내려가다가 아주 특별한 자미(Cami, 이슬람교 사원)를 보고 가자고 하였다. 성의 바로 아래에 있는 이 자미는 셀축 시대에 지어졌는데, 동쪽으로 나 있는 정문 위의 조각이 일품이라고 하였다. 무엇이 특별하냐고 물으니, 동쪽에서 뜨는 햇빛이 정문 위의 장식에 비치면 예쁜 왕비의 모습이 보인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를 생각하며, 오늘은 날씨도 흐리고, 해가 뜨는 시각도 아니니 이를 볼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디지털 카메라의 샷터를 누른 뒤에 찍힌 영상을 보니, 정문 위에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신기하게 생각하며 다시 찍고 보아도 역시 보였다. 문 위의 조각에 비치는 빛의 굴절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리라. 그러고 보니, 10세기경의 건축과 조각의 수준이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눈이 그치지 않고 내리는데, 날이 저물어 기온이 내려가면 길이 미끄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출발하였다. 여기까지 와서 니데 박물관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낯선 나라에 와서 남의 차를 운전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오후 6시경에 탈라스에 있는 식당 아늘에 가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학교 안에서만 생활하던 나와 아내는 오랜만에 나들이를 하여 기분이 좋았다.

소안르(Soğanlı)

   2011226()에도 G 교수의 승용차를 몰고 나들이를 하였다. 양 선생 남매, 메흐멧과 함께 카이세리에서 50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소안르(Soğanlı)에 갔다. 원래는 폭포가 있는 야흐얄르(Yahyakı)에 갈 예정이었는데, 비가 와서 길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메흐멧의 말에 따라 소안르로 행선지를 바꿨다.

   시내를 벗어나 산길을 달리면서 좌우를 보니, 산자락에 양들이 찬비를 맞으며 풀을 뜯고 있다. 가을철에 시들어 버린 마른풀을 뜯고 있는 것이리라. 멀리서 보니, 구데기들이 오물거리는 듯하였다. 양 선생은 구데기를 본 적이 없어 그 말이 어떤 상황을 표현하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높은 산길에 오르니, 비는 눈으로 바뀌어 창문에 쌓이곤 하였다. 와이퍼로 눈을 닦아내며 한참을 달리니, 소안르 표지판이 나왔다. 둘레 산의 등성이에는 눈들이 쌓여 있었다. 소안르 가까이 가면서 보니, 산세나 바위들이 괴레메 지역과 비슷하였다. 메흐멧은 괴레메와 같이 화산 폭발에 의해 생긴 화강암이 기묘한 형상을 이루고, 그 안에 여러 모양의 동굴이 생겼다고 하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기가 무섭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소안르 인형을 비롯하여 관광 상품을 팔려는 상인들이었다. 우리가 물건을 사지 않겠다고 하니, 상인들은 금새 어디론가 사라졌다.

   ‘뱀 교회라고 쓴 안내판을 따라 산봉우리를 향하여 조금 올라가니, 넓은 지하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전에 교회로 쓰이던 곳으로, 벽에는 성화가 그려져 있었다. 기독교의 성인과 성모 마리아의 형상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림을 지우려고 한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둘레의 동굴 안에 여러 공간이 있는데, 사람들이 생활하던 주거 공간인 듯하였다.

   그 외에도 교회를 비롯한 여러 명소의 안내판이 있는데, 눈이 쌓인 곳도 있고, 물을 건너야 갈 수 있는 곳도 있었다. 그래서 이곳의 지형적인 특색과 바위의 모양을 살펴보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우리가 차를 타려고 하니, 한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자기네 식당으로 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그 사람의 안내를 받아 카파도키아 레스토랑으로 갔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홀 한쪽에 놓은 장작난로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우리는 난로 가에 앉아 식당 주인이 권하는 대로 소안르 귀베츠(Soğanlı Güveç)’라고 하는 음식을 시켜 맛있게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인제수(incesu)에 있는 대상들의 숙소(Kervansarayı)를 둘러보았다.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묵던 곳이기에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토요일 오후라서 직원들이 없는 관계로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아주 넓게 지은 집의 둘레에 쌓은 담장을 따라 돌아보며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하고, 발길을 돌렸다.

   2월은 이 지방의 우기(雨期)이니 비나 눈이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토요일마다 눈이 내리지 않으면 비가 와서 모처럼 얻은 외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하즈벡타쉬(Hacıbektaş)

   한국어문학과 학과장인 G 교수가 미국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러 가면서 승용차를 써도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2010221일 일요일에 우리 부부는 양 선생, 4학년 무스타파 군, 3학년 잔수 양과 함께 G 교수의 승용차를 타고 하즈백타쉬에 갔다. 무스타파 군은 자기가 운전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였으나, 남의 차를 빌려 다른 사람에게 운전하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내가 하겠다고 하였다. 그 대신 무스타파 군을 운전석 옆자리에 앉히고,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하즈벡타쉬는 이슬람 벡타쉬(Bektaş) 교단의 수피즘 지도자인 하즈벡타쉬(Hacıbektaş A.D. 12481337)가 묻혀 있는 곳이다. 그는 일찍이 여성의 가치를 인정하고 여성의 지위와 명예를 부여하도록 하고, 여성들에게 교육을 받도록 한 이슬람 철학자이다. 그의 사상은 이성, 지식, 사랑, 존경, 평등을 바탕으로 하여 정리되었다.

   1시간쯤 차를 달려 하즈벡타쉬에 도착하였다. 14세기에 지어진 자미를 중심으로 한 단지에는 자미와 박물관, 문화센터가 있고, 그 옆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박물관 안에는 하즈벡타쉬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다. 문화센터에는 하즈벡타쉬를 비롯한 교단 지도자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 옆에는 소원을 비는 나무가 있고, 그 옆에는 금욕주의자들이 생활하던 방과 주방, 게스트하우스 등이 있었다.

   그곳에는 추운 날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관람하였다. 단체로 온 관람객도 있지만, 대개는 가족 단위로 온 관람객이 많았다. 관람하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분위기가 조금은 엄숙하고, 경건하였다. 아마도 신비적이고 금욕적인 수도를 하는 교단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관람을 마친 뒤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식당으로 와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가족끼리 운영하는 식당인 듯 어린 학생이 서빙을 하였다. 주인의 딸인 듯한 여학생에게 수고하였다고 햐면서 팁을 주니 그 학생은 아주 좋아하였다.

   식사 후에 아바노스로 가서 무스타파 군의 사촌이 근무하는 도자기 공장에 가서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의 시범을 보고, 거기에 그림을 그려 넣은 화공들의 작업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무스타파 군이 전에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 터키석을 비롯한 악세사리 판매점에 갔다. 그 곳에서 터키석의 특성과 세공 과정 등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해가 질 무렵에 괴레메로 가서 기묘한 모양의 바위들이 모여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경을 돌아보았다. 작년 10월에 왔었던 곳이고, 시간도 없어 승용차를 타고 몇 군데를 돌아본 뒤에 카이세리로 돌아왔다.

   오늘 여행을 통하여 이슬람 벡타쉬 교단의 수피즘의 존재에 관하여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큰 소득이라 하겠다. 아바노스와 괴레메를 다시 가본 것도 좋았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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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노스(Avanos)

   아바노스는 크즐 으르막(Kızıl Irmak, 붉은강) 옆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붉은 강은 터키 안에서 흐르는 가장 긴 강이다. 아바노스는 붉은강 바닥에서 퍼 올리는 붉은 흙으로 토기를 만드는 곳으로 이름난 곳이다. 만드는 물건은 컵이나 접시, 작은 화분과 같은 생활용품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넣은 장식용 접시 등 아주 다양하다. 시내 한 복판에는 토기의 고장답게 토기를 만드는 기술자의 상을 만들어 세워놓았다.


  나는 201022일에 한국어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무스타파 군과 잔수 양과 함께 하즈벡타쉬에 갔다 오다가 이곳 아바노스에 왔었다. 무스타파 군은 자기의 사촌형이 근무하는 도자기 공장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넓은 판매장과 생산 공장이 함께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이었다.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자가 전기로 돌리는 희전판에 반죽한 흙을 놓고, 손으로 조절하여 접시와 화병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만들은 그릇은 건조시킨 다음에 불에 한 번 굽고, 거기에 그림을 그려 넣은 뒤에 다시 더 높은 온도로 불에 구워 완성한다고 하였다.



  무스타파 군의 사촌형은 우리를 화공(畵工)들이 그림을 그려 넣는 작업장으로 안내하여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화공들은 초보자로부터 수준이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화공은 그림을 그린 뒤에 자기의 사인을 넣어 누가 그렸는가를 알게 하였다. 제품의 판매 가격은 그림을 그린 사람의 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수준 높은 사람이 그린 작품의 경우에도 작은 실수라도 하면 가격을 낮게 책정한다고 하였다. 화공의 작은 실수는 나 같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숙련된 화공이 작은 실수를 하여 가격을 낮게 책정하였다는 장식용 접시 큰 것 4점과 작은 것 3점을 샀다.

  도자기점을 나온 우리는 무스타파 군을 따라 터키석을 비롯한 악세사리 판매점으로 갔다. 그곳은 한국어를 비교적 잘하는 무스타파 군이 한국 관광객 담당 직원으로 아르바이트 하였다는 상점이다. 우리는 그 곳에서 터키석의 특성과 세공 과정 등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아바노스의 도자기 판매점이나 터키석을 비롯한 악세사리 판매점은 한국 관광객의 관광 코스에 들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온 관광객은 터키 도자기나 악세사리를 많이 사 간다고 한다. 나는 이곳이 고향인 무스타파 군과 잔수 양과 함께 왔기 때문에 도자기의 제작 과정, 터키석을 비롯한 악세사리의 품질과 세공 과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도자기를 값싸게 살 수 있었다.

  2011320일의 일이다. 외사촌 동생인 이 부장과 함께 카이막클르 지하도시를 보고 나오니 오후 5시가 넘었다.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10km를 더 가야한다고 하니,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일만 남았다.

  나는 무스타파 군과 아바노스에 오기 전인 2009104일에 G 교수와 괴레메와서 젤베 야외박물관, 카이막클르 지하도시 등을 둘러보고 카이세리로 돌아가는 길에 아바노스에 왔었다. 그 때 항아리 케밥을 맛있게 먹고, 붉은 강가를 산책한 생각이 났다. 지도를 펴보니, 아바노스가 카이세리로 가는 방향에 있었다. 일부러 돌아가는 것도 아니어서 그곳으로 가자고 하였다.

  아바노스에 도착하여 붉은강을 건너기 전에 차를 세우고 길을 물었다. 함께 간 오누르는 내가 말하는 항아리 케밥이 터키어로 무엇인지 몰라 안타까워하다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Testi Kebabi’인 것을 알고 좋아하였다.

  ‘붉은강의 다리를 건너자 아내는 전에 왔던 길이 생각난다고 하였다. 윗층은 호텔이고, 아래층은 식당이었던 그곳을 찾아가 보니, 젤베호텔(Zelve Otel)소프라 식당(Sofra Restaurant)이었다. 안에 들어가니 전에 왔던 일이 생각났다. 식당에 들어가 앉으니, “당신은 전에 항아리 케밥을 먹은 적이 있습니까(Siz Hiç Testi Kebabı Yediniz Mi)?” 하는 문구가 쓰인 종이를 식탁에 깔아 놓았다.


  주문을 받은 종업원은 고기와 양념을 국물과 함께 넣고 진흙으로 봉한 뒤에 아궁이에 넣어 익힌 질그릇 항아리를 가지고 와서 항아리의 목을 쳐 연 다음, 넓고 평평한 질그릇에 쏟았다. 이 그릇을 식지 않게 가열하면서 먹는 쇠고기의 맛은 정말 좋았다. 한국 불고기의 맛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여행사에서는 팩키지 상품으로 카파도키아에 온 광광객들의 식사 일정에 항아리 케밥을 빠뜨리지 않고 넣는다고 한다. 질그릇 하나에 2인분의 케밥이 들어 있는데, 값은 40리라였다.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카이세리로 돌아왔다. 이 부장은 하루 종일 운전하느라 피곤하였을 터인데, 피로한 기색도 없이 우리를 숙소까지 태워다 주었다. 전에 왔던 곳이지만 먼 터키에 와서 이 부장과 함께 한 오늘은 아주 즐겁고 흐뭇하였다.

으흘라라 계곡(Ihlara Vadisi)

  으흘라라는 며칠 전에 갔던 데린쿠유 지하도시에서 서쪽으로 3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계곡이다. 2011522일 일요일에 나는 외사촌동생인 이 부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으흘라라에 갔다. 오전 1025분에 숙소 주차장을 떠나 1250분에 도착하였다.

  언덕 위에 있는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기암괴석(奇巖怪石)이 있는 절벽이 양편에 있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르는 골짜기가 이어지는데, 그 골짜기의 길이가 14km나 된다고 한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계곡의 바닥까지는 수직으로 100m쯤 될 것 같다. 이곳은 비잔틴 시대에 수도사들이 은둔생활을 하던 곳으로, 석굴교회와 주거지가 모여 있다. 벽화를 볼 수 있는 교회만도 30군데가 넘는다고 한다. 세계 영화 애호가의 시선을 집중하였던 미국의 액션 SF 영화 <스타워즈>의 로케이션(location) 현장이기도 하다.

  전망대 주차장에는 차도 몇 대밖에 없고,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겨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계곡의 입구가 어디냐고 물으니 아래로 내려가라고 하였다.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내려가니, 넓은 주차장과 식당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식당으로 가서 닭고기와 양고기 케밥을 시켜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입장료 5리라씩을 내고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보니, 절벽이 양편으로 갈라져 있고, 그 가운데에 멜렌디즈 강이 흐르고 있었다. 물은 넓고 깊은 계곡을 가득 채우고 힘찬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강물 위로는 다리가 놓여 있어 건널 수 있게 해 놓았다. 물 양편에 있는 절벽에는 지하 교회와 주거지가 나왔다.

  다리를 건너 절벽으로 난 길을 조금 가다가 계단을 오르니, 석굴교회가 나왔다. 조금 더 내려가다가 교회 표지판을 보고 올라가 보면 역시 교회가 있고, 벽화가 보였다. 여러 교회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뱀교회(Yılanlı Kilise)는 큰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왼쪽에는 비어있는 무덤이 있다. 여기에는 성 미카엘의 선행과 악행을 저울질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에는 사람의 몸에 뱀들이 얽혀 있는 그림이 있고, 돔 내부에는 예수와 천사들을 그려 놓았다. 남동쪽 벽에는 성모 마리아의 죽음이 그려져 있다. 그 외에도 최후의 만찬,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나무교회(Aǧaç Kilise)는 다른 교회보다 오래된 곳으로, 십자가의 형상을 하고 있다. 문과 마주하는 벽에는 사자 두 마리 사이에 있는 다니엘이 그려 있고, 천장에는 용 그림이 있다.

  그 외의 교회에도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건들을 그린 그림들이 있는데, 일일이 다 적을 수 없다.

  물가로 난 숲길을 따라 걸으며 표지판을 보고 올라가 교회와 주거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내려와 숲길을 걸었다. 3km쯤 내려가서 보니, 강물 위로 다리가 놓여 있고, 건너편에 찻집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미루나무 그늘에 통나무를 깔고 앉아 나와 아우는 커피를, 아내와 양 선생은 터키 차이를 시켰다. 협곡 안에 들어와 절벽의 기암괴석을 앞에 두고, 힘차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커피 맛은 정말 좋았다.

  오리 한 쌍이 새끼를 데리고 와서 손님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먹는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어 각설탕을 던져 주었다. 오리는 반갑게 달려가 부리로 집더니만 이내 던져 버린다.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을 저렇게 빨리 판단하다니 놀랍다.

  차를 마신 우리는 다시 다리를 건너지 않고 강가로 난 길을 따라 출입구 쪽으로 걸어왔다. 강가로 난 길을 따라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은 참으로 여유롭고, 즐거웠다. 우리가 출입구 쪽에 거의 다 왔을 때 한국말 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니 부산에서 왔다고 하였다. 터키의 외딴 곳에 있는 관광지에서 한국 사람을 떼로 만나니 정말 반가웠다.

셀리메(Selime)

  으흘라라 계곡에서 악사라이 방향으로 15분쯤 달리니, 삼각형 모양의 큰 바위산이 오른쪽에 보였다. 바위에는 창문 모양의 구멍이 뚫린 곳이 아주 많다. 네브쉐히르와 위르귑 사이에 있는 위츠히사르와 비슷한 모양의 바위산이다. 이곳이 셀리메 교회(Selime Katedrali)이다.

  

  올라가 보니, 넓은 교회와 기도실로 쓰였을 것과 같은 곳이 있고, 주거공간으로 쓰였을 것 같은 방도 있다. 괴레메에서 보던 지하교회와 비슷하였다. 올라가는 길 왼쪽에 홀로 있는 원뿔 모양의 큰 바위에도 넓은 구멍이 있기에 올라가 보았다. 왼쪽 벽면에는 가로 1m, 세로 60cm쯤 되는 직사각형 안에 염소를 조각해 놓은 것이 보였다. 양 선생과 나는 염소 그림을 새겨놓은 것으로 보아 번제를 드리던 곳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다른 방과는 달리 실내가 검게 그을린 흔적이 있는 것도 이런 생각을 갖게 해 주었다.

  바위산 아래로 난 도로 건너편에는 공동묘지가 있다. 작은 무덤이 있고, 한쪽에 넓고 크게 자리 잡은 무덤이 있다. 안내판에는 셀리메 술탄의 무덤(Selime Sultan Türbesi)’이라고 쓰여 있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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