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동구 응봉동에 있는 응봉산은 봄과 희망을 상징하는 개나리꽃의 명소이다. 이른 봄에 개나리가 활짝 피어 온 산을 샛노랗게 물들이는 응봉산은 강남에서 성수대교를 건너 북쪽으로 올 때에는 산의 남쪽을 보여주고, 독서당길을 지날 때에는 북쪽을 가까이에서 보여준다. 나는 1980년대 중반에 이곳을 지나다가 개나리꽃이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환호(歡呼)하였다. 그 후로 가끔 이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꽃이 하도 예뻐서 산 밑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 개나리꽃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했던 적도 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응봉산이 보이는 금호동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금년에는 3월 하순인데 개나리가 만발하였다. 326일에는 아내와 함께, 328일에는 교일산우회 회원들과 함께 개나리가 만발한 응봉산에 올랐다. 온 산이 샛노란 개나리와 막 피어나는 목련, 벚꽃이 어우러져 새 봄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터키에 가 있는 4년 동안 보지 못하였던 개나리꽃들이 나를 반겨주는 듯하였다. 응봉산의 개나리는 새봄의 정취를 마음껏 누리게 해 주고, 내가 다시 한국에 와서 봄을 맞게 된 기쁨을 느끼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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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카이세리 시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4년 간 근무를 마치고 20138월 말에 무사히 귀국하였습니다.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문화 익히기를 좋아하며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터키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학, 한국문화를 강의하며 지낸 4년은 아주 재미있고 유익하였으며, 보람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부족한 나를 선발하여 파견해 준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여러분과 내가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도록 염려하고 도와준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서울 종로 3가에 있는 종로오피스텔 1215호에 연구실을 마련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정다운 얼굴들을 대하기도 하면서 지내려고 합니다.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을 부탁합니다.

 

                                                                  2013 910

                                                                                       최운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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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1000일의 체험>> 출간  (0) 2012.09.30

   터키 중부 도시 카이세리 시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3년 간 근무하면서 겪은 일들을 적은 글을 모아 <<터키 1000일의 체험>>이란 이름으로 2012년 8월 25일에 민속원에서 출간하였습니다.

   <제1장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는 경관이 빼어난 곳, 역사와 문화 유적지, 기독교 성지 등을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사진과 함께 정리하였습니다.

   <제2장 내가 만난 터키 사람들>에서는 터키에서 시민, 학부형, 한국전 참전 용사 등과 만난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정리하였습니다.

   <제3장 한국어문학과 학생들의 이모저모>에서는 3년간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겪은 정겨운 이야기와 대학생들의 생활 모습 들을 생생하게 적었습니다.

   <제4장 터키인의 의례와 생활문화>에서는 터키의 국경일과 기념일, 이슬람 명절, 봄을 맞는 명절, 잡귀를 쫓고 행운을 맞는 풍습, 기본예절, 출생의례와 혼례 등을 정리하고, 터키의 음식문화, 민속놀이 등을 사진과 함께 정리하였습니다.

   <제5장 터키의 문학>에서는 터키의 신화와 전설, 민요, 속담을 살펴보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소개하였습니다.

   이 책은 터키에 관심을 가지고,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터키인의 삶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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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중부 도시 카이세리 시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3년 간 근무하면서 겪은 일들을 적은 글을 모아 <<터키 1000일의 체험>>이란 이름으로 2012년 8월 25일에 민속원에서 출간하였습니다.

       <제1장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는 경관이 빼어난 곳, 역사와 문화 유적지, 기독교 성지 등을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사진과 함께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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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터키의 문학>에서는 터키의 신화와 전설, 민요, 속담을 살펴보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소개하였습니다.

       이 책은 터키에 관심을 가지고,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터키인의 삶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와서 한국어와 한국문학, 한국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이곳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틈이 나는 대로 여러 곳을 여행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만난 일은 잊을 수 없다.

       지난해 6월 서울장위교회 교우들과 함께 터키의 에게해 연안에 있는 작은 도시 셀축(Selçuk)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안내자가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여 크게 기뻐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식당은 터키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한국의 비빔밥을 만들어 주었다. 며칠 동안 터키 음식만 먹어 한국 음식이 그립던 차에 비빔밥을 먹으니 아주 맛있었다. 점심 식사 후에 에페스(성경에 나오는 에베소) 유적을 돌아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빨리 차에 오르라는 안내자의 독촉이 있어서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식당 밖으로 나왔다. 버스에 오르려고 하는데, 한 터키 노인이 다가와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였다. 나는 시간에 쫓기기는 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얼른 한국어와 터키어로 인사를 하고, 말을 주고받았다.

       그 분은 한국어도 영어도 잘 못하셔서 터키어로 대화를 해야 하는데, 나의 터키어 실력이 엉망이니, 난감하였다. 서로 아는 단어를 총동원하여 대화를 시도하였다. 한국어, 영어, 터키어 단어를 섞어가며 말하여 그 분이 말하려는 뜻을 대강 짐작하였다.

    나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터키 군인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목숨을 걸고 싸우며 지킨 한국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당시에는 한국의 상황이 매우 처참하였는데, 60여 년이 지난 오늘 전쟁의 상처를 씻고 발전한 한국이 매우 자랑스럽다. 한국인들이 보고 싶어서 한국인이 많이 오는 한국음식점 앞에 왔다. 한국인을 만나니 참 기쁘다.”

    그 분은 이렇게 말하면서 한국전쟁 당시에 한국에서 찍은 자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군복을 입은 한 젊은이가 서 있는데, 정말 미남으로 의젓하고, 듬직해 보였다. 그 분의 얼굴과 사진을 다시 보니, 그 분의 옛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그 분은 한국에 있을 때의 일을 조금 이야기하였다. 그 때 배운 민요 <아리랑>도 안다고 하였다. 우리가 불러 보라고 하니 큰 소리로 부르는데, 음정과 박자를 맞춰 아주 잘 불렀다. 우리들이 <아리랑>을 함께 부르니, 그 분은 신명이 나서 더 힘껏 불렀다. 우리는 그 분과 함께 <아리랑>에 이어 <도라지 타령>도 불렀다. 그 분은 흥이 나서 가볍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 분의 표정엔 흥분과 기쁨, 흐뭇함과 감동이 교차되어 나타났다. 내가 그 당시에 터키 군인들이 불러서 한때 한국에서 유행하였던 터키 민요 <위스크다르>를 시작하니, 그 분은 그 노래를 어찌 아느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큰 소리로 불렀다. 나는 그 노래를 어렸을 때 많이 들었는데, 처음 부분만 알고 중간 이후는 잘 몰라 함께 부르지는 못하고, 손뼉을 치며 흥을 돋우었다. 식당 앞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구경하였다.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고 나서 한국인은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와준 터키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하는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 분은 만나서 반가웠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내게 작게 접은 종이쪽지를 주었다.

        버스에 올라 그 분이 내게 준 종이쪽지를 펴 보았다. 그것은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서툰 글씨로 써서 복사한, 명함 두 배 크기의 종이였다. 거기에는 두르무쉬 알리 지빌(Durmuş Ali Civil)’이라는 자기의 이름과 ‘Belediye Huzur Evi Md. Selçuk İzmir’라는 집 주소가 씌어 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보며 나이 들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일을 생각하며 한국인을 만나보고 싶어 한국음식점 앞으로 나온 그 분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후 일정에 쫓겨 그분과 시간을 더 나누지 못하고 작별한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우리를 만난 기쁨과 바로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을 얼굴 가득 보이며 우리가 탄 버스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서 있던 그 분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린다.

        서기 1950625일에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고, 대한민국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였다. 이 때 우리를 도와주어 나라를 지키게 한 것은 유엔군이었다. 유엔군을 파견한 나라는 16개국인데, 그 중에 미국,영국,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군인을 보내준 나라가 터키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군인의 수는 15,090명이다. 그 중 741명이 전사하였고, 2,068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407명이 실종되었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모두 3,216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터키 문화원 자료 참조). 한국과 터키의 거리는 약 8,000km로 아주 먼 나라이다. 먼 곳에서 한국을 도와준 터키는 정말 고마운 나라이다.

       한민족과 터키 민족(한자어로 돌궐족)은 아주 먼 옛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웃하여 살던 민족이다. 삼국 시대만 하여도 돌궐족은 고구려와 이웃하여 살면서 중국이 침략할 때에는 서로 돕던 민족이다. 그 후 돌궐족은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일부는 중국의 신강 지방에 정착하고, 일부는 이동을 계속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지금의 터키)에 자리 잡았다. 먼 옛날에 이웃하여 서로 도우며 살던 한민족과 터키 민족이 현대에는 대한민국과 터키공화국을 세우고 살고 있다. 한국에 전쟁이 일어나자 터키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도와주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말이 빈 말이 아닌 것 같다.

       나는 터키에 와서 지내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분들이나, 그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가 알고 싶고, 그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참전용사회관을 방문하고,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만났으며, 참전용사 자손들도 만나 보았다. 참전용사 중에는 한국의 초청으로 한국에 다녀온 분들도 있고, 한국에 가보지 못한 분들도 계셨지만, 전쟁 당시의 참혹하였던 모습과 함께 한국의 발전상을 아는 대로 이야기하였다. 그분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한국의 눈부신 발전에 놀라움과 함께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 참전용사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감사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손들에게 한국은 형제의 나라임을 강조한다고 하였다. 그분들은 한국인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그 분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나는 얼마 전에 셀축에서 아리랑을 함께 부르던 어르신께 우리 일행과 함께 찍은 사진을 인화하여 그 분이 적어준 주소로 우송하였다. 그 분은 그 사진을 보며, 우리와 함께 부르던 한국민요 <아리랑><도라지 타령>, 한국에서 부르던 터키 민요 <위스크다르>를 다시 흥얼거리며 한국을 마음속에 떠올릴 것이다. 그분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면서 한국에 대한 좋은 소식을 많이 들으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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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셀축은 이즈미르(İzmir)에서 남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 있는, 인구 약 25,000명의 도시이다. 셀축은 가까이에 에페스(에베소)가 있고, 많은 참배객이 찾아오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곳이어서 고대로부터 역사의 중심지로 이름이 있다. 셀축은 바울 사도가 전도 여행 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고, 성모 마리아의 집과 성 요한 교회 등이 있어서 기독교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다.

       셀축은 아야슬룩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평화로운 도시인데, 둘레에 있는 관광 명소를 찾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이곳은 활기가 넘치는 관광 명소라기보다는 관광객이 며칠 동안 머물면서 주변 관광을 하는 베이스 캠프(base camp)로 삼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Efes Arkeoloji Müzesi)

       셀축 시내에 있는 이 박물관에는 에페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은 모두 6개인데, 출토 장소와 종류에 따라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다1전시실에는 테라스식 주택에서 캐낸 저울, 장신구, 화장품 상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거기에 거대한 남근을 자랑하는 조각상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그 조각상은 다산(多産)의 신 프리아포스(Priapos)이다. 프리아포스는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그 지역과 농토, 포도밭을 지켜주는 신이다. 과장된 남근은 풍요의 상징이다.

    다산의 신 프리아포스

    로마 시대의 주화

       다른 전시실에는 주화(鑄貨), 장례용품, 조각상 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 전시실은 에로스(Eros)를 묘사한 조각들로 채워져 있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으로, 활과 화살을 가진 나체의 어린이로 나타나는데, 그가 쏜 금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지고, 납화살을 맞으면 증오하게 된다고 한다. 이 전시실에는 에로스의 역할을 드러내는 조각상이 많이 있다. , 거대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머리와 팔도 볼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 룸도 있어 소크라테스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 다른 전시실에는 검투사들이 사용하였던 무기와 훈련 방법, 이들이 주로 당했던 부상의 유형 등을 보여 주었다.

    사랑의 신 에로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제6전시실의 아르테미스 상이다. 이 전시실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조각상이 양쪽에 하나씩 둘이 있는데, 좀 작은 것은 프리티네이온에서 발견된 것을 옮겨온 것이고, 조금 큰 것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것을 축소하여 복제한 것이다. 여신의 조각상의 좌우에 있는 동물과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은 아나톨리아의 지모신 키벨레를 떠올리게 한다. 여신의 가슴에는 둥근 알 같은 것이 20여개 달려 있다. 이것은 꿀벌의 알 또는 황소의 고환이라고 하는데, 풍요의 상징이다. 배 부분에는 사자, , 꿀벌, 장미, 그리핀(griffin, 머리·앞발·날개는 독수리이고, 몸통·뒷발은 사자인 상상의 동물)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풍요를 나타낸 것이다. 나는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고대인들이 사랑, 풍요에 대한 갈망이 매우 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아나톨리아의 지모신 키벨레 여신상

    프리티네온에서 발견된 아르테미스 여신상  

                           아르테미스 신전에 있던 아르테미스 여신상

    요한 사도 교회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요한 사도를 기리기 위해 세운 교회이다. 요한은 두 차례에 걸쳐 에페스에 왔다. 한번은 서기 37년에서 48년 사이에 어머니를 보살펴 달라는 예수의 부탁을 받은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이곳으로 모시고 와서 살았다.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요한이 자기의 신전에 참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트모스(밧모)섬으로 귀양 보냈다. 요한은 귀양에서 풀려나온 뒤인 서기 95년에 다시 와서 지금 요한 사도 교회가 있는 아야술룩(Ayasuluk) 언덕에서 복음서를 집필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요한 사도 교회는 4세기경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 교회는 6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Emperor Justianus, 재위 A.D. 527-565) 황제가 대대적으로 증축하였다.

       이 교회는 가로 110m, 세로 140m 넓이의 땅에 6개의 돔으로 되어 있었다. 교회는 안뜰, 현관, 본당, 부속 예배당, 세례장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본당의 제단에는 복음서의 저자들을 상징하는 4 개의 기둥과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상징하는 3개의 기둥을 세웠다. 교회 안에는 4세기경에 나무로 지은 작은 예배당과 요한 사도의 무덤이 있다. 예전에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목조 건물 안에는 예수, 성모 마리아, 요한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요한 사도 교회는 지진과 약탈 등으로 오랜 세월 폐허로 남아 있다가 100여 년 전에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교회 뒤편에는 교회 평면도와 복원 모형이 있어 당시의 웅장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요한사도교회 입구에 있는 박해의 문 

    요한사도교회

                                   요한사도교회 복원도

      요한 사도 기념교회를 가기 위해서는 박해의 문을 지나서 올라가야 한다. 박해의 문이 세워진 데에는 깊은 사연이 있다. 기독교가 공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한편으로는 기쁨과 감사의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 친지를 박해하여 죽게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들은 복수를 위해 돌멩이를 들고 원형경기장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그 돌을 던지지 않고, 요한 사도의 무덤 앞에 모아 박해의 문을 세웠다.

       나는 요한 사도 기념교회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에 박해의 문을 지나면서 박해를 받아 죽던 옛 신도들의 처참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돌을 들고 원형경기장으로 달려가던 성난 신도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성난 신도들이 복수를 위해 돌을 던지지 않고 자제한 뒤에 복수의 문을 쌓게 된 힘은 어디서 왔을까?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 친지를 죽인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멈추게 한 것은 바로 요한 사도가 가르친 사랑때문이었을 것이다. 성난 신도들이 자제하지 않고 복수의 돌을 던졌다면, 유혈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고, 기독교의 복음은 허구라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사건은 기독교 발전에 큰 변수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요한 사도가 힘주어 가르친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한사도교회의 세례소

                                    요한 사도의 묘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

      
    이오니아인들이 이 지역에 왔을 때, 전부터 살고 있던 렐레기안(Leleggian) 족은 풍요(豊饒)와 자연의 여신 키벨레(Cybele)’를 숭배하였다. 이오니아인들은 선주민들과 평화롭게 융화하면서 이 지역의 토속신앙인 키벨레 신앙을 받아들여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신앙을 탄생시켰다. 이것은 사냥과 관계가 깊은 일반적인 그리스 신화 속 여신 아르테미스가 아닌 다산(多産)과 풍요를 상징하는 에페수스(에베소)만의 독특한 아르테미스 신앙이다. 사람들은 이 여신을 모시고 제사하기 위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을 세웠는데,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원근 각지의 주민들은 이 신전에 와서 절하며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이 신전은 B.C. 356년 헤로스트라투스(Herostratus)라는 사람이 불을 질러 불에 탔다. 그런데 그가 신전에 불을 지른 이유는 유명해 지고 싶은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이 신전이 불타던 날 밤에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났다. 전설에 의하면 아르테미스 여신은 이날 밤 알렉산더의 출생을 축하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의 수도에 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신전에 불에 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34년에 이곳에 도착하여 보니, 신전을 다시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알렉산더는 공사비용을 자기가 부담할 터이니 신전을 자기 이름으로 바치게 해 달라고 하였다. 에페수스 사람들은 자기들이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알렉산더 이름으로 바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이 또 다른 신에게 신전을 바친다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닙니다.’ 하는 재치 있는 말로 거절하였다. 신전은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완공되었는데,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크고 웅대하였다. 이 때 지은 신전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가 되었다. 이 신전은 옛날의 웅장한 모습은 볼 수 없고, 기둥 하나만 외롭게 서 있다.

    성모 마리아의 집

       성모 마리아의 집은 셀축에서 약 11km, 에페스(에베소)의 아래쪽 정문(북쪽문)에서 약 8.5km, 위쪽 정문(남쪽문)에서 약 7km 거리에 있는 뷜뷜산(Bülbül Dağı)에 있다. 이 집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에페스에 정착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A.D. 37-48) 살았던 곳이다.

       신약 성경 요한복음(19:26-27)을 보면, 예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 마리아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제자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당부를 받은 요한은 그 때부터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고 한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뒤에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고, 가뭄과 기근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 때 요한은 마리아를 모시고 수리디아 안디옥 즉 지금의 터키 안타키아(안디옥)로 갔다가 에페스(에베소)로 왔다. 에페스에 온 요한은 마리아를 조용한 곳에 집을 짓고 사시게 하였다고 한다.

       마리아가 에페스에 온 것은 확실하지만, 그녀가 살던 집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잘 몰랐다. 지금의 마리아의 집을 발견한 것은 독일인 수녀 캐더린 에머리히(Catherine Emmerich)1878년에 펴낸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에 의해서이다. 케더린 수녀는 이 책에서 병상에서 마리아의 환상을 보고, 꿈속에서 살던 집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1891년 이즈미르의 성직자들이 탐사(探査)하여 숲속에서 옛 집터를 발견하였는데, 이 책에 기록된 것과 거의 일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캐더린 수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독일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곳에 있던 집은 6세기경에 지어진 것인데, 일부는 1세기경의 것으로 밝혀졌다. 마리아의 집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성모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 집터를 성지(聖地)로 선포하였다.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이곳을 방문한 뒤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마리아의 집으로 가는 길가의 마리아상

       나는 200911월에 승용차를 빌려 타고 이곳에 갔다. 마리아의 집으로 올라가는 꼬불꼬불한 산길의 양편에는 올리브나무와 무화과 나무가 울창하였다. 올라가는 길가에는 성모 마리아의 동상이 에페스 유적지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그 옆에는 마리의 집 방문 시간(08:00-19:00)을 적고, 그 아래에 앞으로 6km를 더 가라는 말을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마리아의 집 입구에는 올리브나무와 키가 큰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기념품 가게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커다란 웅덩이가 보이는데, 옛날 세례를 행하던 곳이다. 깊이가 1.5m쯤 되어 보이는 이 웅덩이는 꽤 넓어서 한꺼번에 50여 명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서 조금 앞으로 가니, 두 길이 있었다. 위로 난 길은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래에 있는 길은 나오는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위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터키에 사는 교민들이 만들어놓은 한글 안내판이 서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마리아의 집 앞에 있는 한글 안내판

                                     마리아의 집 앞의 마리아상

    교회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아담하였다. 교회 내부는 사진 촬영을 금하는 곳이므로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옷깃을 단정히 한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 강대상 뒤에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걸려 있다. 은은한 불빛이 비치는 교회 안은 엄숙하고 경건함을 느끼게 하였다.

                                               마리아의 집

    마리아의 집 앞에서 촛볼을 켜고 기도하는 사람들

                                  마리아의 집 앞에 있는 소원의 벽

       교회 아래에는 성수(聖水)로 알려진 샘터가 있다. 그 옆에는 촛불을 켜놓고 소원을 비는 곳도 있고, 소원을 적은 쪽지를 걸어놓은 '소원의 벽도 있다. 소원의 벽에는 소원을 적은 종이와 헝겊이 잔뜩 걸려 있다. 그것은 외국인이 걸어놓은 것도 있지만, 무슬림인 터키인들이 걸어 놓은 것이 더 많다고 한다. 무슬림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비는 것은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에 마리아를 선지자 예수(İsa Peygamber)의 어머니(Meryemana)’로 기록하였으므로, 마리아를 거룩한 여인으로 숭배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외국인인 듯한 사람이 많았지만, 터키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히잡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슬림인 것이 확실한 여인들도 더러 보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이곳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무슬림들도 성지로 받드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누가의 묘

       에페스(에베소) 유적지로 들어가는 주차장 옆에 누가의 묘가 있다. 누가의 묘에는 십자가 밑에 황소를 새긴 비석이 있다. 누가의 묘 앞에는 한글로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거기에는 누가의 행적과 누가의 묘 발견 경위 등이 적혀 있다.

       누가의 묘는 이오니아식 건축 양식을 따라 16개의 기둥을 세워 16m의 길이로 건축된 건물 옆에 있었다. 지금은 몇 개의 기둥만 보이는데, 원래 이 건물은 로마 시대에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었다. 이후 비잔틴 시대에 그 구조를 변형시켜 서쪽을 입구로 하고, 동쪽을 머리 방향으로 하여 예배 처소로 사용하였다. 1860년 영국의 고고학자 P.J. Wood가 오데이온을 발굴하던 중 귀가 길에 본건물의 일부인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판정하였다. 누가의 묘는 잊혀져 있었는데, 이즈미르에 사는 교우들이 에페스 박물관에 누가의 무덤을 손질해 달라고 청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누가는 헬라인으로 수리아 안디옥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엔자와 어머니 이리스는 로마의 판사 디오도로스 시리누스의 아버지인 푸리스쿠스의 종이었다. 푸리스쿠스는 누가의 아버지가 헌신적으로 일하다가 죽자 그의 가족을 해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였다. 누가는 디오도로스 시리누스의 딸 루불리아를 사랑하였는데, 그녀가 말라리아로 죽었다. 그는 자기의 애인을 앗아간 원수와 싸워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거기서 감리엘이라는 유대인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예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바울의 친구이자 동역자, 개인 의사로 가까이 하면서 바울의 선교를 도왔다.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독교인으로 로마의 원로인 클레멘스 집정관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올리브 나무에 목매달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후 누가의 시신은 요한 사도가 사역하는 에페스에 묻혔다고 한다.

                                       누가의 묘 비석

    7인의 잠자는 동굴(Yedi Uyunlar Mağarası)

       마리아의 집에서 에페스로 가는 길에서 조금 들어가면 잠자는 7인의 동굴이 있다. 이 동굴에는 아주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A.D. 3세기 중엽 로마 데키우스(Decius) 황제가 기독교를 몹시 탄압하였다. 7인의 기독교인이 박해를 피하여 파나이오르 산(Panayır Dağı) 북동쪽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쉬다가 잠이 들었다. 데키우스 황제의 수하들은 이 동굴을 발견하고, 벽을 쌓아 동굴 입구를 막아버렸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뒤에 이 지역에 지진이 발생하여 동굴 입구를 막았던 벽이 허물어졌다. 그 때 잠들었던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들은 배가 몹시 고팠다. 그 중 한 사람이 마을로 내려가 보니,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먹을 것을 사려고 가게에 들어가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놓았다. 가게 주인은 이 돈은 옛날에 쓰던 돈으로 지금은 쓰지 않는데, 어찌 이 돈을 내느냐?”고 물었다. 그가 사실대로 말하니, 가게 주인은 지금은 데오도시우스 2세 황제 시대로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데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이를 부활의 증거로 받아들이고, 이곳을 방문하여 부활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7인이 돈독한 신앙을 지키며 살다가 죽자 이 동굴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이곳에 교회를 지었으나 허물어져 지금은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동굴에는 수많은 구덩이가 보이는데, 수도사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이 전설은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1810절 주()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무슬림들도 이곳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7인의 잠자는 동굴

    7인의 잠자는 동굴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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