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령포와 장릉을 탐방한 뒤에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에 있는 주천(酒泉)을 찾았다. 이곳은 전에 전설을 조사하러 갔던 곳이다. 함께 간 아내는 ‘술이 나오는 샘’이라는 뜻을 지닌 ‘주천’이 면 이름, 기관이나 학교 이름에 들어간 것이 특이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천이라는 지명은 언제부터 썼으며, 술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물었다.

  주천 고을의 이름은 고구려 때에는 ‘주연(酒淵, 술이 괴는 못)’이었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 때 ‘주천(酒泉, 술 나오는 샘)’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고려사》 참조). 이 둘은 못[淵]과 샘[泉]으로, 환기(喚起)하는 대상에 차이를 보이지만, 술이 나오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로 보아 술과 관련되는 이름이 이 지역의 이름이 된 것은 고구려 때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명이 전설과 함께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으니 참으로 특이한 일이다.

  예전에 서쪽 개울가에 술이 나오는 돌구유가 있었다. 그런데 고을 관원이 술을 받으러 다니는 것을 귀찮게 여겨 관청의 뜰로 옮겨 가려고 하였다. 그때 갑자기 천둥과 함께 벼락이 쳐서 구유를 세 개로 쪼개놓았다. 그 중 하나는 이곳에 남고, 하나는 연못으로 잠기고, 하나는 간 곳을 모른다고 한다. 이곳을 찾은 조선 전기의 학자 강희맹(1424~1483)과 성임(1421~1484)은 이 내용을 시로 표현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원주목 고적). 이 기록은 ‘주천 전설’이 조선 전기부터 전해 왔음을 말해 준다.

  최근까지 민간에 전해 오는 이야기는 이와 좀 다르다. 옛날에 주천에서 술이 나왔다. 그런데 이 샘물은 양반이 떠먹으면 약주가 되고, 상민이 떠먹으면 탁주가 되었다. 그 샘물은 상민이 양반의 의관을 하고 가도 탁주가 되고, 그 반대로 양반이 상민의 복장을 하고 가도 약주가 되었다. 어느 때, 이 고을에서 농사짓던 한 젊은이가 서울로 가서 과거를 보아 급제하고 돌아왔다. 그는 양반이 되었으므로, 약주가 나올 것을 기대하고 그 샘물을 떴다. 그런데 역시 탁주였으므로, 화가 나서 그 샘에다 돌을 처넣었다. 그 뒤로는 그 샘에서 술이 나오지 아니하였다고 한다(최상수, 한국민간설집, 통문관, 1958). 지금 술샘이 있던 자리에 세워놓은 표지석에 적힌 내용도 이와 비슷하다.

  옛날에는 술이 나오는 샘이 정말 있었을까, 이런 전설이 어떻게 하여 생겼을까? 나는 「주천 전설」은 지리적 특성과 인문사회적 상황이 상호작용하여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주천 인근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술샘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술샘이 있던 자리에는 이를 소개하는 표지석이 서 있다. 그 아래에는 주천강이 흐르고 있다. 강변을 낀 산자락에는 ‘주천강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술샘은 망산의 벼랑바위 밑에 있고, 아래쪽 너럭바위 밑에는 연못이 있고, 주천강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동서로는 영월에서 원주 쪽으로, 남북으로는 제천에서 평창 쪽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그러므로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던 옛날에는 걸어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 아주 많았을 것이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그늘에서 쉬어 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은 석회암이 많은 곳이어서 석회암층을 흘러나오는 물이 언뜻 술맛을 느끼게 하였던 것이다. 갈증을 풀어주는 시원한 물에서 술맛이 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사람들은 이곳에서 물을 마시면서 술을 마실 때 느끼던 시원함과 쾌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이런 일과 연관 지어 이곳 샘의 이름을 ‘술못[酒淵]’ 또는 ‘술샘[酒泉]’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긴 특이한 이름이 고을의 이름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석회암층에서 흘러나와 술맛을 느끼게 하는 물은 땅속 물길의 변화에 따라 수질이 조금씩 변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맑은 물이 흐르기도 하고, 조금 흐린 물이 나오기도 하였을 것이다. 강희맹이 주천에 와서 보고 지은 시에서 ‘맑은 술 흐린 술이 저절로 나와’라고 한 것은 이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실에 문학적 형상력이 작용하여 「주천 전설」이 형성되었고, 오랜 동안 민간에 전해 오면서 변화를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주천의 술맛을 느끼게 하는 물이 물길의 변화에 따라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는 것은 자연현상이다. 이 전설을 전파·전승해 온 서민들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양반이 뜨면 약주가 되고, 상민이 뜨면 탁주가 된다고 하여 신분제와 연결시켜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신분제가 동요하던 조선 후기 서민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 화가 난 젊은이가 샘에 돌을 처넣은 것은 사회가 변화하였는데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신분제에 대한 불만과 저항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물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된다. 이에 더하여 물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정화력,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재생력, 홍수 때에 보이는 것과 같은 무서운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물이 지닌 이러한 큰 힘을 경험하며 살아온 옛사람들은 물을 매우 신성하게 여겼다. 그런데 원초적 사유 면에서 볼 때에 물과 술은 동격이다. 신에게 기도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에 정화수 또는 술을 올리는 것은 이런 의식의 표현이다.

  술맛 나는 물은 자연이 주는 혜택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욕심 때문에 특별히 내리는, 술맛 나는 물을 주는 샘을 파기하여 더 이상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앞의 이야기에서는 술을 받아 옮기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고 술 나오는 돌구유를 관청의 뜰로 옮겨 가려다가 벼락을 맞아 깨뜨리고 말았다. 뒤 이야기에서는 상민이 양반 대접을 받으려다가 여의치 않자 화를 내며 돌을 넣어 주천을 잃고 말았다. 이것은 자연이 내린 징벌로,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빚은 비극이다.

  주천은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길손이 물을 마시고 쉬어가던 쉼터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거기에 인간의 탐욕에 대한 징벌로 술이 나오는 혜택도 없어졌다. 그 결과 지금은 안내표지석만 남아 주천이 있던 자리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주천이라는 지명과 함께 남아 있는 전설은 인간이 탐욕을 버리고 순리를 따를 때 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오만과 탐욕을 자제하지 않으면, 징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2021. 08. 07.)

주천이 있던 자리에 세운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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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란정을 둘러본 뒤에 다시 차를 타고 30분쯤 달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유배되었던 영월 청령포에 도착하였다. 청령포는 영월군청에서 서쪽으로 약 2.3km 떨어진 곳의 서강 건너에 있다.

  청령포 나루의 높은 둑에서 강 건너편을 바라보니, 깨끗한 자갈과 흰 모래밭이 강굽이를 따라 펼쳐져 있다. 그 안으로 울창한 송림이 푸르른 빛을 자랑하고, 그 뒤에는 높은 산봉우리가 버티고 있어 강과 송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서쪽의 산봉우리에서 주먹처럼 불룩 나온 평평한 땅의 북․동․남쪽 삼면은 강으로 둘러싸여 마치 섬과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오갈 수가 없는 곳이다. 이러한 천연 감옥과 같은 입지 조건 때문에 단종의 유배지로 선정되었던 것 같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모래와 자갈길을 조금 걸어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숲속에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단종이 유배되었을 때의 모습을 재현하였다는 어소(御所)가 있다. 거기에는 단종이 머물던 본채(기와집)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초가집)가 있다. 그 앞에 단종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음을 알려주는 단묘유지비각(端廟遺址碑閣)이 있다.

  본채의 방안에는 단종이 신하를 접견하는 모습을 밀랍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그것을 보면서 단종이, 세종의 장자인 문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사랑과 기대를 한껏 받으며 자라던 모습, 12세에 왕위에 오른 뒤에 두려움과 공포에 떨던 모습,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가 노산군으로 감봉되어 17세에 이곳으로 유배되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것은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는 단종의 모습과 오버랩(overlap) 되면서 처연(悽然, 애달프고 구슬픈)한 마음이 들었다. 본채를 나와 영조가 친필로 쓴 단묘재본부유지비(端廟在本府遺址碑), 금표비(禁標碑)를 살펴본 뒤에 소나무 숲으로 발길을 옮겼다.

  송림에 서니, 낙락장송(落落長松)들이 서 있는 모습이 웅장하며 위엄 있게 보였다. 소나무의 품격 있고 멋진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탄의 말이 튀어나왔다. 많은 소나무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송림 중앙의 서편에 있는 ‘관음송(觀音松)’이었다. 안내문에 적힌 것을 보니, 관음송은 높이가 30m이고, 가슴높이 줄기의 둘레가 5m라고 한다. 지상 1.2m 높이에서 갈라진 두 가지의 밑 둘레는 각각 3.3m와 2.95m이다. 나무의 나이는 확실하지 않으나, 단종(1441~1457)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나무의 갈라진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어서 약 600년 정도로 추정한다. ‘관음(觀音)’은 불교에서 세상의 소리를 들어 알 수 있는 보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소나무에 관음송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람들은 이 소나무가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 하여 볼 관(觀), 들었다 하여 소리 음(音) 자를 써 관음송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 나무는 현재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었다.

  송림 서편의 산을 오르니, 약 80미터 높이의 절벽을 이룬 큰 바위가 있다. 단종은 자주 이곳에 와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참을 길 없어 울부짖기도 하고, 절망어린 한숨을 짓기도 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노산대’라고 불렀다. 단종은 원호가 박속에 넣어 보낸 채소를 노산대 밑에서 받았을 것이라 한다. 분노와 슬픔이 가라앉은 뒤에는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정순왕후를 그리며 평안을 비는 간절한 마음으로 돌탑을 쌓았다. 이 탑을 ‘망향탑’이라 한다. 이곳에서 생활하던 단종의 동선은 어소와 관음송, 노산대와 망향탑으로 이어진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는 그를 이곳으로 유배하면서, 그와 접촉하는 사람에게는 중벌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단종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단종은 슬픔, 분노, 그리움, 고독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분노에 찬 외침, 고통과 슬픔에 겨운 통곡, 적막과 고독에 지친 몸부림과 한숨을 관음송이 모두 보고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나무를 신령스럽게 여기던 당시 사람들이 단종에 대해 느끼는 연민의 정을 소나무에 투사하여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민중들은 관음송을 신성시하였고, 국가의 재난을 알려주는 신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불그스레한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국가에 재난이 있을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한다.

  단종이 청령포에 있는 동안 영월 호장(戶長, 지방관리) 엄흥도(嚴興道)는 밤마다 지키는 군사들 몰래 헤엄쳐서 강을 건너가 단종을 뵙고, 말동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본인과 가족의 안위를 건 모험적인 행동을 한 것은 외로운 단종을 위로하려는 충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방문은 고독과 슬픔에 지친 단종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 어소 담장 밖에는 어소를 향해 엎드리다시피 길게 뻗어 단종을 향해 90도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엄흥도 소나무’라고 불렀다. 이것 역시 엄흥도의 충심을 기리는 민중들의 절절한 마음을 소나무에 투사한 것이라 하겠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두 달 가까이 지낸 여름에 홍수가 나서 청령포에 물이 찼다. 그래서 단종은 영월 부사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겨 지내게 되었다. 그로부터 두 달쯤 지났을 때에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꾀한 일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단종은 사사(賜死)되었고, 시신은 강가에 버려졌다. 그의 시신에 손을 대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엄명이 있었으므로, 시신에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산에 묻고, 가족과 함께 숨어버렸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중종 때 단종의 묘를 찾으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그때 영월군수 박충원의 꿈에 단종이 나타나 알림으로써 묘를 찾게 되었다. 숙종 때에 노산군은 왕위를 회복하여 묘호(廟號, 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를 ‘단종(端宗)’이라 하였다. 그리고 신주를 종묘에 모시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엄흥도는 충성스럽고 용감한 행동을 인정받아 공조판서로 추증되고,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다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온 나는 청령포에서 약 4km 떨어진 장릉(莊陵)으로 갔다. 장릉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엄홍도가 죽음을 각오하고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경황 중에 묻은 곳 치고는 좋은 자리인 것 같았다. 능침을 둘러싼 소나무가 모두 봉분을 항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져 있어 이채로웠다. 조선 왕릉은 대부분 도성 가까이에 있는데, 장릉은 수 천리 떨어진 영월에 있다는 사실이 단종이 비운의 왕이었음을 말해 준다. 단종을 영월로 떠나보낸 뒤에 64년 동안 남편이 있는 영월 쪽을 향하여 매일 절을 올렸다는 정순왕후는 경기도 남양주의 사릉(思陵)에 누워 있다. 두 사람의 영혼이 구속이 없는 저 세상에서 애틋한 사랑을 이어가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발걸음을 옮겼다. (2021. 7. 31)

나루터 둑에서 바라본 청령포
단종이 머물던 어소의 본채, 단묘재본부유지비가, 엄홍도소나무
신하를 접견하는 단종
관음송
망향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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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의 일이다.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달려 나가니, 아내가 거실에서 손을 흔들고 발을 동동 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라고 물으니, 아내는 손가락으로 거실 바닥을 가리켰다. 탁자에 올려놓은 화분 아래의 마룻바닥에 작은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태를 파악한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몇 겹으로 겹친 휴지로 지렁이를 집어다가 화장실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지렁이는 환형동물(環形動物)로, 몸의 길이는 작은 종류가 2~3mm, 큰 종류는 2m 정도이다. 긴 원통형으로 가늘며, 많은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재생력이 강하여 몸이 반으로 잘라지는 심각한 손상을 겪고도 몸을 복원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다.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지렁이는 3,100여 종이나 된다. 그 중에 한국에 사는 지렁이는 60여 종이라고 한다.

   지렁이는 유기물이 많은 흙속에서 산다. 나뭇잎, 동물의 시체나 분변 등 유기물을 먹을 때 많은 양의 흙과 모래, 작은 자갈 따위도 함께 섭취하였다가 내보낸다. 그래서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흙을 부드럽게 만든다. 지렁이의 분변은 그 자체로도 천연비료가 된다. 지렁이가 땅속에 길을 내어 뭉친 흙을 풀어주면, 빗물이 땅 속 깊이 스며들게 되어 식물이 수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지렁이가 많은 땅은 건강한 땅이라고 한다.

   지렁이는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물고기를 잡는 미끼로 사용하기도 하고, 양어용 사료로 이용하기도 한다. 지렁이의 몸에서 나오는 액체는 피부 보습에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이를 원료로 각종 약품을 섞어 립스틱을 만든다. 지렁이를 혐오하는 여성이, 매일 입술에 바르는 립스틱의 원료가 지렁이라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  동의보감에는 지렁이가 찬 성질이 있어 해열에 탁월하다. 이뇨(利尿)를 돕고, 황달을 다스리며, 회충을 박멸하는 데에 효능이 있다고 하였다. 또 어린이의 뇌전증(腦電症)을 치료하는 데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토룡탕은 보양식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렁이는 우리의 속담이나 설화의 제재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 속담 중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 ‘지렁이 갈비다’라는 말이 있다. 앞의 것은 아무리 눌려 지내는 미천한 사람이나, 순하고 좋은 사람이라도 너무 업신여기면 가만있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뒤의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거나, 아주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삼국유사》에는 견훤의 출생담이 실려 있다. 광주 부잣집 딸의 방에 밤마다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찾아오므로, 그 정체를 알려고 옷자락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두었다. 이튿날 아침에 실을 따라가 보니, 담 밑에 사는 커다란 지렁이였다. 그 처녀가 낳은 아이가 견훤이라고 한다. 후백제를 세운 비범한 인물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었다고 하니, 놀랍기 짝이 없다. 이 이야기에는 지렁이를 달의 속성을 지닌 ‘달동물(lunar animal)’, ‘생생력(生生力)을 지닌 신이한 동물’로 보는 의식이 드러난다. 지렁이를 가리키는 한자어는 ‘토룡(土龍)’, 또는 ‘지룡(地龍)’이다. 이 말에는 지렁이를 용으로 보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지렁이 고기 먹고 눈뜬 시어머니>에서는 가난한 며느리가 눈먼 시어머니께 드릴 것이 없어 지렁이를 잡아 국을 끓여 드렸다. 이를 알게 된 시어머니가 놀라면서 눈을 떴다고 한다. <지렁이가 된 며느리>에서는 남편이 준 돈은 자기가 다 써 버리고, 눈먼 시어머니께는 지렁이를 잡아서 드린 며느리가 벼락을 맞아 죽어 지렁이가 되었다고 한다. 두 이야기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드린 것은 똑같은 지렁이다. 그런데 지렁이를 드린 것이 효심의 발로인가 아닌가에 따라 그 결말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나는 아내에게 지렁이는 예로부터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살아왔다. 약용으로도 쓰이고, 농사에 도움을 주는 유익한 동물로, 옛날에는 신이한 동물로 여기기도 하였다. 지렁이가 사는 것으로 보아 우리 집 화분의 흙은 건강한 흙임을 알 수 있다. 매일 바르는 립스틱은 지렁이 추출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지렁이를 보고 뭘 그리 놀라 소리를 질렀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지렁이를 보는 순간 징그럽고, 놀라워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노라고 하였다. 지렁이에 대한 잠재적 혐오감이 폭발한 것이리라.

   나는 아내에게 셋째 아이가 어렸을 때에 토룡탕을 끓여 먹인 일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지난 일을 이야기하였다. 셋째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감기만 걸리면 편도선이 붓고, 체온이 40도 가까이 올라 고통을 겪느라 학교에 가지 못하였다. 셋째 아이가 결석하게 된 까닭을 안 담임선생님이 지렁이를 끓여서 국물을 먹이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한 번은 낚시점에 가서 지렁이를 사다가, 한번은 화단과 화분에서 지렁이를 잡아서 약탕관에 넣고 끓여서 먹였다. 그 뒤로 셋째 아이는 신통하게도 편도선이 부어 고생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때는 아이를 낫게 하려는 일념에서 징그럽고 싫은 것도 참고 그 일을 하였다고 한다. 아이를 위하는 엄마의 마음이 징그럽고 혐오스런 일도 거뜬히 하게 하였나 보다.

   어제 아내와 함께 집에서 가까운 공원에 갔다. 소나기가 내린 뒤라서 그런지, 커다란 지렁이 몇 마리가 포장된 길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렁이가 비오는 날에 지상으로 올라오는 이유는, 피부로 숨을 쉬는 지렁이가 물에 찬 구멍에서 숨을 쉬기 위해 밖으로 나오거나, 짝짓기를 위해서라고 한다. 나는 저 지렁이가 ‘숨쉬기 좋은 곳을 찾아 나온 것일까, 짝짓기를 위해서 나온 것일까?’, ‘지렁이는 우리 집 화분에서 왜 마루로 나왔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그대로 지나쳤다.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하니, 지렁이가 넓은 포장도로를 무사히 건너 흙이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햇볕에 말라 죽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뭇가지로 젓가락을 만들어 지렁이를 집어다가 흙이 있는 곳에 놓아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도 하다. 《주간 한국문학신문》 549, 2022.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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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하순에 아내·김 교수 부부와 함께 영월 지역을 탐방하였다. 영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단종의 원한이 서려 있는 청령포와 장릉(莊陵)이다. 두 곳을 찾기에 앞서 강원도와 경계인 충북 제천시(송학면 장곡리 산 14-2)에 있는 관란정(觀瀾亭)을 찾았다. 관란정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元昊) 선생의 충정(忠情, 충성스럽고 참된 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승용차를 타고 중앙고속도를 달리다가 신림 요금소(Tol Gate)에서 빠져 나가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20분쯤 달리니, 관란정 안내 표지판이 나왔다. 차에서 내려 비탈진 산길을 걸어 올라가니, 그리 높지 않은 산등성이의 자연암반 위에 동향으로 지은 관란정이 서 있다.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고, 모로단청(부재의 두 끝 부분에만 하는 단청)을 하였다. 바로 앞에 있는 비각 안에는 관란 선생을 기리는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눈을 들어 앞을 보니, 나지막한 산들이 멀리까지 펼쳐 있고, 그 뒤를 큰 산들이 에워싸고 있다. 산 아래에는 주천강과 평창강이 합수한 서강이 산들을 에둘러 흐르고 있다.

   원호 선생은 1397년(태조 5)에 원주에서 별장 원헌(元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자허(子虛), 호는 무항(霧巷)·관란(觀瀾)이다. 그는 열다섯 살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였고, 한시와 산문을 좋아하였다. 세종 4년(1422)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종3품 벼슬)이 되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원주로 내려가 숨어 지냈다.

   그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降封, 작위나 작품의 등급이 낮아짐)되어 영월에 유배당하자, 지금 관란정이 있는 산등성이에 단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눈물을 흘리며 영월을 향해 절을 올렸다. 그리고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박통에 담아 영월로 흐르는 서강에 띄워 보냈다. 청령포에 있던 단종은 노산대 아래에서 떠내려 온 박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깊고 절절한 충정을 아는 서강물이 이를 고이 품어 어린 단종에게 전해 주었나 보다. 어린 왕과 충신이 애틋한 정을 나누는 장면을 그려보니, 눈물이 날 만큼 가엾고 애처롭다. 사실을 따지자면, 서강물이 박통을 품고 수십 리를 흘러가서 단종에게 온전히 전해 주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민중은 그의 충정이 물길을 따라 무난히 전해 졌다고 이야기해 왔다. 이것은 그의 충정과 이를 기리는 민중의 마음이 전적으로 공감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는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마치고, 원주로 돌아가 치악산 아래 초막에서 지냈다. 그의 충절에 탄복한 세조가 각별한 마음으로 호조참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사관(史官)으로 있던 손자 숙강(叔康)이 직필로 화를 당하자, 그는 자신이 저술한 책과 상소문을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책을 읽어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말 것을 엄하게 경계하였다. 그는 단종의 장릉이 자기 집의 동쪽에 있음을 생각하여 앉을 때에는 항상 동쪽을 향해 앉았고, 누울 때에도 항상 머리를 동쪽으로 두었다고 한다. 이것은 단종에 대한 그의 충절이 매우 깊고 절절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일화이다.

   정조 때 그의 후손 원경적이 그에게 시호(諡號, 죽은 뒤에 조정에서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이는 이름)를 내려줄 것을 조정에 청했다. 왕은 이를 받아들여 이조판서를 증직(贈職,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함.)하고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은 청렴결백하고 절의를 지킨다는 뜻이고, ‘간’은 정직하고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절의를 높이고 기림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도록 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그의 후손과 유학자들은 그의 충의를 기리고자 1845년(헌종 11) 이곳에 비석과 정자를 세우고, 그의 호를 따서 ‘관란정’이라 하였다. 정자 앞에 있는 유허비는 정조 8년에 대학자인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세웠다. 자연석 위에 세운 비석에는 일반적인 비문과 달리 붉은색 글씨로 새겼다. 관란정은 1941년에 개축하였으며 1970년, 2013년에 보수하였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를 무렵에는 단종의 숙부들(모두 7명)이 매우 강성하였다. 당시에 집현전에 근무하던 그는 <탄세사(歎世詞)>를 지어 앞날에 대한 불안과 걱정, 자기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냈다. “마음은 어둡고 침침하며 구름은 하늘을 가득히 덮었구나(懷黯黯兮雲五光).”는 불안한 당시의 상황을 드러낸다. 그는 백이(伯夷)·숙제(叔弟)의 절의를 따르는 사람이 없음을 탄식하며, “세상사람 모두 다 의를 저버리고 녹을 따르나(世皆忘義洵祿兮), 나는 홀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노닐겠다(我獨潔身而徜徉).”라고 하여 혼자서라도 절의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 시의 원문과 번역문이 관란정 앞 오른 쪽에 세운 ‘관란 원호 선생 유고비’(2014년 건립)에 적혀 있다.

   관란정 왼편에는 한국문인협회 여강시가회에서 세운(2017년 건립) 시비가 있다. 거기에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가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아 거슬러 흐르고저 나도 울어 보내도다.”라는 시조가 씌어 있다. 밤 새워 흐르는 여울물 소리가 슬픈 것은 임이 울어 보내기 때문이다. 여울물이 거꾸로 흐른다면 나의 충심을 실어 보낼 수 있겠다고 하였다. 이 시를 읽으니, 어린 임금을 유배지로 압송하는 임무를 맡았던 의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시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안 같도다. 울어 밤길 예놋다(가도다).”가 떠오른다. 두 작품은 단종에 대한 충정을 여울물에 투사하여 절실하게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관란정을 찬찬히 살펴보고 산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관란 선생의 행적을 생각하니, 그의 충성스런 마음과 절의가 새삼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는 순리에 따라 즉위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 상식이 통하는 나라에서 충성을 다하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위를 찬탈하는 수양대군을 본 그는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기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절의를 지킨 원천석(제자인 태종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고 숨어 지냈음.)의 후손답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많은 선비의 사표가 되었다. 요즈음에도 관란 선생처럼 충의를 지키는 사람이 있을까? 명리를 위해 양심과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 출세를 위해 삶의 행로를 손바닥 뒤집듯 하는 사람, 당리당략에 따라 행동하며 남의 탓하기를 일삼는 사람 들이 권력을 잡고 큰소리치는 세태를 보니, 관란 선생의 절의가 더욱 소중하고 두텁게 느껴진다. (2021. 05. 30.)

관란정
관란정과 유허비(각) 
관란 원호 선생 유고비 앞면(시의 원문)
관란 원호 선생 유고비 뒷면(시의 번역문)
한국문인협회 여강시가회에서 세운 원호 선생 시비
관란정 앞에서 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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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집 《새로운 보금자리에서》가 도서출판 '학연제'에서 나왔다.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머리말의 일부와 글의 차례를 적는다.

   수필은 마음의 행로(行路)를 진솔하게 쓰는 글이다. 마음이 걷는 길에는 기쁘고 즐거운 일, 슬프고 괴로운 일, 힘들고 어려운 일 등 다양한 일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를 제대로 적으려면 사물에 대한 관찰력과 감성, 지적 능력과 자기를 성찰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문장력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점에 유의하면서 글을 써 왔다.

   이 책에 실은 글은 필자가 생활 주변에서 글감을 취하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을 진솔하게 서술한 글도 있고, 칼럼의 성격을 띤 글도 있다. 또 필자가 만났거나 찾아가 본 대상의 특징과 감회를 적은 글도 있고, 역사와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을 탐방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본 글도 있다.

   필자는 금년에 한국 나이로 팔순이 되었다. 팔순이 되었다 하여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어떤 일에 집착하는 마음이 줄어들었고, 매사에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 책에 실린 글에도 조금씩 나타나 있다.

   앞으로도 수필 쓰는 일을 계속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쓴 글보다 더 잘 써서 독자들에게 지적 만족과 함께 감동을 주고 싶다. 쓴 글은 컴퓨터에 저장해 두고 가끔씩 꺼내어 읽고 다듬어서 5년 뒤에 회혼(回婚)을 기념하는 수필집으로 발간하였으면 좋겠다.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건강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차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은행에 담긴 정 11

쌀에 담긴 따스한 마음 18

정겨운 참새 23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28

합죽선의 멋과 아름다움 33

제자를 잘 둔 제자 39

성묘와 이장 43

스님이 된 제자 상봉 49

잘한 일 두 가지 55

전업주부 체험 61

첫눈을 맞으며 67

하나님의 계획 72

 

  원칙 지키기와 융통성

원칙 지키기와 융통성 81

세면대 마개와 물컵 86

뿌리 깊은 나무 91

이 또한 지나가리라 97

개망초의 누명 101

가장 좋아하는 떡 107

영화 「사랑의 선물」을 보고 114

구정이 아니라 ‘설․설날’ 119

연하장의 진화 124

양사언 어머니의 지혜와 희생 129

   

   응봉산 개나리

‘3’을 좋아하는 까닭 135

호칭어 바로 알고 쓰기 141

응봉산 개나리 146

인왕산 숲길을 걸으며 152

사랑을 이루게 한 노래 158

수종사의 다향 164

자연과 과학이 아우른 호명호수 170

기지시줄다리기와 용 176

위대한 신의 예술품 182

요세미티 공원의 증기기관차 191

   

   독산성의 세마전술

효성 어린 면천두견주 199

독산성의 세마전술 206

정릉에 얽힌 사랑과 미움 212

양녕대군의 처신 218

천 년 세월의 농다리 224

‘생거진천’의 유래 231

전설이 숨 쉬는 의림지 237

우애 깊은 형제 이야기의 현장 244

풀이 나지 않는 무덤 250

무덤이 둘인 공양왕 256

   지난해부터 코로나 19의 창궐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고 있으므로,관광명소나 유적지 중에서 사람이 비교적 적게 모이는 곳을 골라 탐방하고 있다.지난3월10일에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16대 인조와 인열왕후의 무덤)을 둘러본 뒤에 파주시 파평면 화석정로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을 찾았다.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기의 문신 길재(吉再)가 조선 개국 후에 벼슬을 버리고 와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를 추모하여 이곳에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폐허가 되었던 이곳에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5대조인 이명신(李明晨) 선생이 세종 25(1443)년에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 성종 9(1478)년에 이숙함(李淑瑊) 선생이 화석정(花石亭)이라 명명하였다. 이 정자를 율곡 선생이 중수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시를 지으며 학문을 논하고, ()를 연구하였다. 그 때에 중국의 칙사 황홍헌(黃洪憲)이 율곡 선생을 찾아와 경관이 빼어난 이 정자에서 시를 읊으며 놀았다고 한다.

   화석정은 임진강가 절벽 위에 장단 쪽을 향하여 서 있다. 정자에서는 바로 밑을 흐르는 임진강을 볼 수 있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전에는 화석정 주변에 느티나무가 울창하였고, 그 아래 임진강에는 밤낮으로 배들이 오락가락 하였으며, 밤에는 고기 잡는 배의 등불이 호화찬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밑에 도로가 나 있고, 그 아래에 철조망이 임진강을 가로막고 있다. 정자 주변에는 느티나무 몇 그루만이 서 있어 옛날의 정취는 느낄 수 없다.

   정자에는 화석정중건상량문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 중에는 율곡 선생이 여덟 살 때(1543) 지었다는 화석정시도 결려 있다. 이 시는 정자 옆에 세워놓은 돌비석에도 번역문과 함께 적혀 있다.

 林亭秋已晩  숲 속 정자엔 가을이 이미 깊어
  騷客意無窮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멀리 보이는 강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이 시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시인의 정취를 잘 드러낸다. 율곡 선생이 여덟 살 때 이런 시를 지었다니, 어린 시절부터 시적 감각이 뛰어났음을 알 것 같다.

    율곡 선생은 틈이 날 때마다 정자의 마루와 기둥을 기름걸레로 닦도록 하였다. 율곡이 세상을 떠난 지 8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북쪽으로 피난하던 중 임진강가에 이르렀다. 그런데 폭풍우가 심해 앞을 볼 수 없었다. 그 때 임금을 모시던 이항복이,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고 한 율곡 선생의 봉서 생각이 났다. 그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다. 기름을 잘 먹은 화석정에 불이 붙자, 불길이 솟아올라 나루 근처가 대낮같이 밝혀졌다. 그 불빛 덕에 선조가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율곡의 예지(叡智,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지혜롭고 밝은 마음)가 잘 드러난다. 나는 이 이야기의 현장을 보고 싶어 전에 찾아왔던 이곳을 오늘 다시 찾아왔다. 정자 앞에 잠시 눈을 감고 서서,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도성을 버리고 파천(播遷)하는 임금과 수행하는 신하들의 마음은 몹시 급하고 당황하여 허둥지둥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런데 임진강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거기에 더하여 폭풍우가 겹쳐 좌우를 분간할 수 없으니,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이 때 율곡 선생이 임종 무렵에 남긴 봉서대로, 그가 사랑하며 아끼던 화석정에 불을 질러 파천길을 밝히게 하였다고 한다. 율곡 선생은 자신의 사후에 임금이 이 길로 파천할 것을 예측하고, 정자의 마루와 기둥에 기름칠을 하고, 불을 지르라고 하는 봉서를 남겼던 것이다. 율곡 선생의 충성된 마음과 신묘한 예지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명나라와 일본의 움직임을 살핀 율곡 선생은, 일찍이 경연에서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을 비롯한 신하들이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禍端, 화를 일으킬 실마리)을 키우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하였으므로 국론으로 채택되지 못하였다(󰡔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16권 선조 15 9 1일조). 10만 양병을 주장한 율곡의 의견을 국론으로 채택하여 대비하였더라면, 국토가 왜병에게 유린되고, 수많은 백성이 도륙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이 허둥지둥 파천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군무를 총괄한 유성룡은 율곡의 의견을 반대하고 무시하였던 일을 후회하며 이이는 선견지명(先見之明,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앞을 내다보고 아는 지혜)이 있고 충근(忠勤, 충성스럽고 부지런함)한 절의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때늦은 후회인 것이다.

   당시에 율곡의 의견에 반대한 이유는 평화로운 때에 백성들에게 전쟁에 대한 불안을 주고, 생업에 종사할 장정을 차출하여 훈련을 하는 것은 생산력을 축소하는 것으로 매우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이 대목은 요즈음 우리가 처한 상황과 겹쳐 보인다. 625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은 정전 상태에서 북의 위협을 안고 살고 있다. 북은 남을 무력으로 적화통일 하겠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핵을 개발하여 핵보유국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부 국민은 북이 한반도비핵화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북이 설마 같은 민족인 우리에게 핵무기를 사용하겠어? 미국에 대한 협상력을 기르려는 것이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929 남북합의서를 들먹이며 북한에 대한 경계를 풀어 놓았다.

   미국과 중국이 세계질서를 재편하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고, 북은 남침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국제정세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북의 야욕이 어떠한가를 주시하면서 국가 안보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 그런데도 국가 안보를 소홀히 하고 있고, 북의 비위를 맞추려고 눈치를 살피고 있다. 경계태세를 늦추고 있고, 한미연합훈련마저 탁상훈련으로 대체하고 있다. 안보 태세를 강화하라는 국민의 목소리는 마이동풍(馬耳東風, 동풍이 말의 귀를 스쳐 간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아니하고 지나쳐 흘려버림), 우이독경(牛耳讀經, 쇠귀에 경 읽기라는 뜻으로,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 주어도 알아듣지 못함을 이르는 말)과 같이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다. 율곡 선생의 양병설을 무시하였다가 임진왜란이라는 처참한 일을 당한 조선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역사는 자기 성찰의 거울이고, 희망의 미래는 여는 열쇠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던 화석정은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1673)년에 율곡 선생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복원하였다. 그러나 1950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건물의 정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다. 화석정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다. 화석정이 불에 타는 것과 같은 국가적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였다. (성동문학 21, 성동문인협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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