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

   얼마 전 친구들과 서울특별시 강동구와 경기도 하남시에 자리 잡고 있는 일자산(一字山)에 갔다. 일자산은 경사나 굴곡이 심하지 않은 산등성이가 ()’ 자처럼 이어져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자산에는 고려 말의 대학자였던 이집(李集, 1327~1387) 선생이 1368(공민왕 17)에 신돈(辛旽)의 비행을 비판하고, ()를 피하기 위해 숨어서 지냈다는 둔굴(遁窟)’이 있다. 이집 선생은 이 일을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호를 둔촌(遁村)’이라고 하였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遁村洞)의 동명(洞名)은 이집 선생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일자산의 산길을 걸을 때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개암나무였다. 개암나무는 개암을 담은 파란 주머니를 다닥다닥 달고서 뽐내며 서 있었다. 요즈음 자주 가는 대모산에서 보지 못하던 개암나무가 몇 그루씩 무리를 지어 서 있는 것을 보니 무척 반가웠다. 함께 걷던 친구에게 이게 무슨 나무인지 아느냐고 물으니, 잘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개암나무와 그 열매 개암에 관해 간단히 말한 뒤에 조금 떨어져 걸으면서 개암과 관련된 일들을 생각하였다.

 

   개암은 모양은 도토리 비슷하며, 껍데기는 노르스름하고 속살은 젖빛이다. 맛은 밤 맛과 비슷하나 더 고소하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마을의 뒷산에 개암나무가 유난히 많았다. 그래서 가을에 나무를 하러 산에 가서 나무에 달려 있는 개암을 따기도 하고, 땅에 떨어져 낙엽 속에 있는 개암을 줍기도 하였다. 그 때 겉껍질을 이로 물어 깬 뒤에 속껍질을 벗기고 먹던 개암의 고소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개암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 들은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옛날에 한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개암 하나를 줍자 이것은 아버지께 드려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하나를 줍자 이것은 어머니께 드려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또 하나를 줍자 그제야 이것은 내가 먹어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비를 피하려고 산속의 오두막집에 들어갔는데, 비가 그치지 않았다. 날이 저물자 도깨비들이 몰려와 방망이 하나를 세워놓고, “밥 나와라!” 하면 밥이 나오고, “고기 나와라!” 하면 고기가 나왔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 잔치를 하였다. 다락에 숨어 있던 그는 배가 고파 개암을 먹으려고 이로 겉껍질을 깨무니, ‘-’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놀란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놓아둔 채 도망하였다. 그가 도깨비방망이를 가지고 와서 금 나와라!” 하면 금이 나오고, “은 나와라!” 하면 은이 나왔다. 그래서 그는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웃마을의 한 젊은이가 일부러 도깨비가 나온다는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는 개암을 줍자 이것은 내가 먹어야지.” 하면서 주머니에 넣고, 그 다음에는 이것은 내 색시 주어야지.” 하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처럼 그는 자기와 자기 아내 몫부터 챙기고, 부모는 뒷전이었다. 그가 외딴집에 들어가 있으니, 도깨비들이 몰려왔다. 그가 개암을 깨물자 도깨비들은 다락으로 올라와 지난번에 가져간 방망이를 내놓으라며 때렸다. 그래서 그 사람은 도깨비한테 매만 실컷 맞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은 도깨비도 도와주지만, 자기만 아는 욕심쟁이는 벌을 받는다는 교훈적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산에서 나무하다가 개암을 줍게 되면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어른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마음을 다짐하곤 하였다. 그 후 나는 개암하면 고소한 맛과 더불어 도깨비방망이이야기가 떠오르곤 하였다.

 

   나는 부모님의 묘를 서울 가까운 곳으로 이장(移葬)하기 전까지 충남 홍성에 있는 선산(先山)에 벌초를 하러 다녔다. 벌초를 하러 가면, 선영(先塋) 가까운 산길 좌우에 늘어서 있는 개암나무가 나를 맞아주곤 하였다. 나는 개암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개암나무를 볼 때마다 옛일이 생각나서 반가운 마음으로 만져보곤 하였다. 그러나 개암이 여물지 않아 맛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워하곤 하였다. 개암이 익을 무렵에 다시 성묘를 갔으면 부모님도 찾아뵙고, 개암 맛도 볼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하여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작년에 김 교수 내외와 함께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있는 김유정 문학촌에 갔을 때의 일이다. 김유정의 생가와 전시관, 동상(銅像), 디딜방아 등을 관람하고, 안내표지판을 보면서 금병산 실레이야기길을 따라 걸었다. 그 때 길 옆 산언덕에 개암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개암나무들은 키가 크고, 아주 튼튼해 보였다. 개암나무가 자생한 것인지, 정성들여 재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 내가 국내에서 본 개암나무 중 가장 크고, 개암도 많이 열렸다. 얼마 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 연암(燕巖) 물레방아공원에 갔었는데, 그곳에서도 개암이 열린 개암나무 여러 그루를 보았다. 연암 박지원이 1792년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설치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공원에서 개암나무를 보니 무척 반가웠다. 나는 국내 여러 곳에서 개암나무를 보면서 터키 흑해 연안에서 보던 개암나무숲과 맛있게 먹던 개암을 생각하였다.

 

   나는 터키 카이세리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서 객원교수로 2009년부터 4년 동안 근무하였다. 그곳에 간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슈퍼마켓의 견과류 코너에서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함께 간 그곳의 G 교수에게 물으니, 영어로는 헤즐럿(hazelnut), 터키어로는 픈득(fındık)이라고 하였다. 헤즐럿은 우리말로 개암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다가 먹어보니, 정말 고소하고 맛이 좋았다. 어렸을 때 고향의 뒷산에서 주워 먹던 개암의 맛이 연상되었다.

 

   개암에 대한 기록을 보면, 동의보감(東醫寶鑑)에 기력을 높여주며, ()과 위()를 튼튼하게 해 준다고 적혀 있다. 이것을 보면,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개암의 효능을 알았던 것 같다. 요즈음에는 개암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그 장점이 널리 알려졌다. 개암에는 지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단순불포화지방이어서 몸에 좋고, 항암물질인 택솔(taxsol)이 들어 있어 항암 작용을 한다고 한다. 또 개암에는 칼슘과 철분도 많이 들어 있어 골다공증(骨多孔症) 예방에도 도움을 주고, 콜레스톨 수치를 낮춰주며, 암세포 활동을 억제해 준다고 한다. 비타민 E가 많이 들어 있어 심장질환 및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 등의 대사성 질환의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개암은 향()이 좋고 고소한 맛이 있어 커피와 초콜릿, 과자를 만드는 데에도 많이 넣고 있다. 얼굴과 피부에 영양을 공급해 주기 때문에 화장품으로도 이용하고 있다.

 

   터키 속담에 한 줌의 픈득(개암)이 평생의 건강을 지켜준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을 보면, 터키 사람들도 일찍부터 개암의 효능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개암은 터키미국이탈리아스페인 등에서 생산되는데, 터키의 흑해 지방에서 전 세계 소비량의 70%를 생산한다고 한다. 나는 터키에 있는 4년 동안 개암을 떨어지지 않게 사다 놓고 먹었다. 내가 개암을 좋아하니, 나와 인연이 있는 터키 사람들과 터키를 오가는 한국 사람이 개암을 사다 주곤 한다. 그래서 터키에서 돌아온 지 1년이 넘은 지금까지 계속하여 개암을 먹고 있다.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개암을 아느냐고 물으면 잘 모른다고 한다. ‘헤즐럿을 아느냐고 하면, “헤즐럿 커피요?” 하고 반문한다. 커피에 헤즐럿 향을 가미한 헤즐럿 커피는 마셔보았지만, 견과(堅果)인 헤즐럿 즉, 개암을 통째로 먹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묻는 것이리라. 요즈음에는 터키에서 수입한 개암을 남대문시장에서 판다고 한다. 개암은 예로부터 국내 여러 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니,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아 재배하지 못하는 식물은 아닐 것이다. 건강에 좋은 견과류이니 수입해 오는 것도 좋지만, 국내에서 재배하여 많이 생산되었으면 좋겠다.

                                                   <청하문학 13, 서울 : 문예운동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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