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7일부터 29일까지 북측 금강산 해금강 호텔에서 열린 전국 국·공립대학 교수협의회 제3차 임시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북쪽에 가서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을 둘러보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관광버스를 타고 강원도 고성군 간성에 있는 금강산콘도로 가서 '현대금강산' 직원들에게 신분증을 보이고 금강산 관광증을 받은 뒤에 다시 버스를 타고 통일전망대 아래에 있는 출입국 검사소로 가서 소지품 검사를 받고, 신분증과 관광증을 제시하여 확인 받으면서 출국 신고를 하였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현대금강산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나온 사람은 국·공립대학 교수협의회 회원 80명을 비롯하여 600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19개 조로 나누어 버스에 타고 3시 50분에 출발하였다. 

   남쪽 통문(通門)을 지나 금강산 임시도로를 천천히 달려 북쪽으로 가면서 보니, 왼쪽에는 군인들이 금강산으로 통하는 고속화도로 공사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강원도 양양과 함경남도 안변을 잇는 동해북부선 철로 기반공사를 하고 있었다. 비포장 도로를 달려 조금 가니 군사분계선임을 나타내는 녹슨 팻말이 외롭게 서 있었다. 그 팻말을 지나 북으로 달리면서 '지금은 50년 동안 넘지 못하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가는 역사적 순간이구나!', '지척(咫尺)인 이 곳을 왕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우리는 북측 통문을 통과하여 북으로 달렸다. 비포장 도로이다 보니, 천천히 달리건만 앞차가 일으킨 흙먼지 때문에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장전항 가까이 오니, 현대에서 건설하였다는 포장도로가 나왔고, 조금 더 가서 작은 고개를 넘으니 장전항이 보였다. 항구의 왼편에는 온갖 모양의 바위들이 멋스럽게 솟아 있는 산이 있는데, 불쑥 튀어나온 넓고 큰 바위에 붉은 글씨로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이라고 쓰여 있었다. 글자의 크기가 가로 1m, 세로 1.5m나 되는 데다가 바위의 모양이나 위치가 시선을 끌기 좋은 곳이어서 항구로 가는 동안은 물론, 항구에 도착한 뒤에도 잘 보였다. 바위에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은 이곳 외에도 여러 곳에 있었는데, 하나같이 크고 잘 생긴 바위에 큰 글씨로 썼기 때문에 멀리서도 잘 보였다. 한국에서 그런 일을 하였다면 자연을 훼손하였다고 지탄받을 일인데, 이곳 사람들은 이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오후 5시에 장전항의 넓은 마당에 도착한 우리는 북측 출입국관리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휴대품을 검사 받고, 관광증에 도장을 받았다. 활에 화살을 장전한 것과 같다고 하여 장전항이라고도 하고, 고성항이라고도 한다는 항구를 바라보니, 삼면으로 산들이 큰 원을 그리며 둘러싸고 있고, 한쪽만 바다로 열려 있는데, 거기에 방파제를 쌓았으므로 잔잔한 호수처럼 보였다. 천혜(天惠)의 항구라고 하는 말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넓은 마당 끝에 '호텔 해금강'이라고 쓴 6층 건물이 있는데, 자세히 보니 밑바닥이 편평한 배 위에 지은 건물이었다.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 보니, 방이 깨끗하고 아담하였다.

   숙소에 짐을 두고 나온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8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온정각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해금강 호텔로 돌아와 전국 국·공립대학 교수협의회 총회를 하였다. 오후 8시에 시작한 총회는 활동 상황 보고, 협의 안건 처리, 연구 주제 발표 등으로 10시 30분까지 진행되었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차고 진지하게 진행하였다.     

   둘째 날(9월 28일)은 구룡연(九龍淵)을 가는 날이다. 아침 6시경에 잠이 깨었는데,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에 올라 구룡폭포의 장관(壯觀)과 함께 <나무꾼과 선녀> 전설이 깃들어 있는 팔선담(八仙潭)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좀 흥분이 되었다. 아침 6시 50분경에 해금강호텔 1층 식당에서 한식 뷔페로 아침 식사를 한 후 버스를 타고 온정각으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다시 버스를 타고 구룡연 산행길에 올랐다. 버스는 오른쪽에 있는, 한 마리의 매가 앉은 모습의 응암(鷹岩, 일명 매바위산)과 왼쪽의 너럭바위 위에 집채 같은 달걀 모양의 바위가 놓여 있는 난봉(蘭峰, 일명 달걀바위산)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하였다. 미인송 또는 홍송이라고 부르는 줄기가 약간 붉은 빛을 띤 미끈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선 '술기넘이 고개'를 넘으며 약 6km의 산길을 달린 뒤에 주차장에 닿았다.

   등산로를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니 신계천(神溪川) 맑은 물위에 '기역 자(ㄱ)' 모양으로 놓은 목란다리가 있고, 그 다리를 건너자마자 북측에서 운영하는 식당 '목란관'이 있었다. 목란관을 지나 울창한 나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며 주위를 보니, 오른쪽에는 맑고 깨끗한 계곡 물이 즐겁고 기쁜 듯이 큰 소리를 내며 흐르다가 쪽빛 못[潭]을 이루고 있고, 집채 같은 바위들과 좌우로 늠름한 봉우리들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산굽이를 돌아 오르니, 회상다리가 나왔다. 다시 200m 정도를 오르니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거기서 위쪽을 보니 아름답고 황홀한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을 예로부터 '앙지대(仰止臺)'라고 하였는데, 현재 북한에서는 '회상대(回想臺)'라고 부른다고 한다. 거기서 '거북선 바위'를 보고, 다시 한 구비를 돌아 오르니 '개구리 바위'가 보인다. 또 한 구비를 돌아 오르니, 산삼과 녹용이 녹아 내린다는 '삼록수(三鹿水)'가 흐르고 있었다.

  삼록수를 마시고 만경다리를 건너서 세존봉을 바라보니, 산 중턱에 맨머리로 앉아 있는 사람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옥황상제 바위'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에 하늘의 옥황상제가 금강산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금강산으로 내려와 이곳 저곳 경치를 보다가 세존봉 아래에 왔다. 상제는 구룡연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을 보고 더위를 식히기 위해 목욕을 하였다. 그 때 금강산 산신령이 와서 '사람들이 먹는 신령한 물에서 목욕을 하여 물을 더럽혔으니 천벌을 받아야 한다.'고 꾸짖으며 상제의 관을 가져갔다. 관을 빼앗긴 상제는 다시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맨머리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옥황상제 바위'를 다시 보며, 이런 이야기를 꾸며낸 선인들의 문학적 상상력이 뛰어났음과 금강산 절경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하였음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만경교를 건너 금강문을 빠져 나가니, 왼쪽에 긴 성처럼 생긴 '성벽 바위'가 있는데, 머리는 토끼 같고, 몸통은 거북 같은 '토끼 바위(일명 거북 바위)'가 성벽 바위로 기어오르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달에서 약방아를 찧던 토끼가 금강산의 절경을 보러 왔다가 경치에 취해 돌아갈 시각을 지키지 못하여서 벌을 받아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담겨 있는 바위이다. 

   한 굽이를 꺾어들어 금문교와 백석담을 지나자, 앞이 확 트이면서 '옥류동(玉流洞)'의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이 되어 흘러내린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갓 피어난 연꽃이 하늘로 향한 듯한 천화대(天華臺)와 그 뒤에 둘러서 있는 옥녀봉의 모습이 아름답고, 계곡에는 숫돌처럼 닦이고 닦인 너럭바위가 반원을 그리며 휘어져 내리고, 그 위를 구슬 같은 물살이 흰 비단을 편듯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 넓고 길쭉한 옥류담(玉流潭)이 쪽빛 수정을 녹여 편듯 맑은 물을 담고 있었다. 옥류담의 물 깊이는 5∼6m이고, 넒이는 약 600㎡인데, 금강산의 소(沼)중 가장 큰 소(沼)라고 한다. 그 앞에 '돛대 바위'가 우뚝 서 있었는데, 지금은 홍수에 넘어져 누워  있었다.

   옥류동 물길을 따라 왼쪽 모롱이를 도니, 쌍둥이 소(沼)가 맑고 고운 물을 담고 있었다. 이곳이 '연주담'인데, 아래에 있는 소가 위에 있는 소보다 커 보였다. 연주담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니, 휴식처가 나왔다. 거기 서서 건너편을 보니, 하늘에 닿은 듯한 산봉우리가 있는데, '세존봉'이라고 한다. 세존봉 중턱에서 아래로 뻗은 바위벽을 타고 흰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곳이 구룡폭포, 십이폭포, 옥영폭포와 함께 금강산 4대 폭포로 꼽히는 '비봉폭포(飛鳳瀑布)'인데, 수직 높이가 139m이고, 폭포 길이가 166m라고 한다. 세존봉에서 샘솟아 기화요초(琪花瑤草)를 씻어내리며 벼랑을 따라 내려가기도 하고, 절벽이 안으로 오므라드는 데를 만나면 갈래갈래 갈라져 실을 드리운 듯하다가 '봉황담'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봉폭포와 직각을 이루는 봉황담 위쪽에 '무봉폭포(舞鳳瀑布)'가 있다. 이 폭포는 길이는 약 20m밖에 되지 않으나, 수량이 풍부하고, '기역 자(ㄱ)' 모양으로 꺾이며 물보라를 뿌리는 모습이 봉황이 춤을 추는 듯하다고 하여 '무봉폭포'라고 하였다 한다.

  무봉폭포 휴식장에서 250m 정도를 굽이돌아 오르면, '무룡교(舞龍橋)'가 나온다. 무룡교를 건너니 서북쪽 옥녀봉 계곡에서 은실과 같이 곱게 흐르는 '은사류(銀絲流)'가 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니, 구슬을 엮어 발을 드리운 듯한, 길이 10m 정도의 '수렴폭포(水簾瀑布)'가 보였다. 거기서 구룡연 쪽을 향해 서서 보니, 마치 수십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처럼 결이 가로로 평평하게 난 돌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다. 이 바위를 예로부터 '책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주렴폭포에서 150m정도 오르니, 갑자기 계곡을 뒤흔드는 굉음(轟音)이 들리고, 그 소리를 뒤쫓아 큰 물줄기가 무서운 속도로 내리쏟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이 구룡폭포이다. 폭포의 위와 아래, 좌와 우 모두가 한 장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졌는데, 쉼 없이 내리쏟는 물이 아래에 큰 확을 파 놓았으니, 그 곳이 '구룡연(九龍淵)'이다. 수직 깊이가 13m나 되는 구룡연에서 솟구친 폭포수는 다시 곡선을 이루며 내달려 아래의 못을 출렁인다. 구룡폭포는 비로봉에서 시작한 물이 굽이 잦은 '구담곡(九潭曲, 일명 아홉소골)'을 지나, '상팔담(上八潭)'을 흐르는 동안 수량이 더욱 늘어 웅대하고 아름다운 폭포가 되었는데, 만물상과 더불어 금강산의 절승(絶勝)으로 꼽힌다. 구룡폭포의 수직 높이는 74m이고, 구룡연까지의 폭포 길이는 84m, 아랫못까지의 폭포 길이는 120m라고 한다. '구룡연'·'구룡폭포'는 아홉 용이 아홉 가지 재주를 부린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데, 벼락치는 듯한 물소리와 소용돌이치는 시퍼런 물의 움직임을 용의 조화라고 생각하였음 직하다.

  폭포 옆 너럭바위에는 불심을 드러낸 '彌勒佛'이란 큰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天丈白練 萬斛眞珠(천 길 흰 비단이 내려 드리운 듯하고, 만 섬 진주알이 쏟아지는 듯하다.)"라는 신라 문장가 최치원(857∼?)의 시 <구룡폭포>가 새겨져 있다. 구룡폭포의 절경(絶境)을 잘 드러낸 이 시구는 최치원의 시적 혜안(慧眼)을 느끼게 하였다.

   관폭정(觀瀑亭, 구룡각이라고도 함)에서 구룡폭포의 장관을 보며 땀을 식힌 나는 다시 조금 내려와 연담교(淵潭橋)를 건너 '구룡대(九龍臺)'로 향하였다. 급경사 쇠사다리[鐵梯] 14개, 370여 계단을 오르느라니, 숨이 차고, 땀이 비오듯 하였다. 약 700m를 걸어올라 해발 약 880m의 구룡대에 이르니, 150여 미터가 되는 낭떠러지 아래에 삼각추(三角錐) 같은 삿갓봉을 휘돌아 흐르는 물줄기가 보였다. 맑고 깨끗한 물은 넓고 큰 바위로 된 물길을 따라 휘돌아 흐르며 못[潭]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흐르고 있었다. 푸르다 못해 쪽빛으로 보이는 못은 여덟 개나 되는데, 지세(地勢)에 따라 몇 미터 또는 몇십 미터 간격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금강산에는 팔담(八潭)이 두 곳이 있는데, 이곳의 팔담을 구룡폭포 위에 있다 하여 상팔담(上八潭)이라 하고, 내금강의 만폭동 구역에 있는 팔담을 내팔담(內八潭)이라고 한다. 

   구룡폭포 위에 솟은 산봉우리와 능선 아래의 깊은 골짜기를 흐르는 물줄기와 팔담은 급경사의 계곡 양편에 솟은 각양각색의 바위들과 조화를 이루어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을 바라보고 있느라니까, 골짜기 아래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마치 신비한 음악인 듯하다. 이곳은 신이 깊은 산속에 비밀스럽게 감추어 놓은 비경(秘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안개와 구름이 감돌아 온갖 조화를 부린다면, 더 더욱 신비감을 줄 터이니, 이곳을 배경으로 <나무꾼과 선녀> 전설이 꾸며져 전해 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상팔담과 둘레의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던 나는 그만 내려가라는 조장의 말을 듣고서야 하산길을 서둘렀다. 내려오다가 목란관에서 맛있게 먹은 평양 냉면의 국물은 산행 뒤에 오는 갈증을 풀어주었다.

  오후에는 삼일포를 둘러본 뒤에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관람하였다. 셋째날인 9월 29일에는 오전에 만물상(萬物相)을 구경하고, 점심을 먹은 뒤에 출입국 수속을 하고 통일전망대로 돌아와 해산하였다.

  전국 국·공립대학교 교수협의회 총회 참석을 위한 2박 3일 간의 여행 중에 각 회원 대학교 교수협의회의 활동 상황을 알 수 있었고, 회원들의 총회에 임하는 진지한 태도와 각자의 학교에서 학교 발전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좋았다. 거기에 육로로 그리던 금강산에 올라 '신이 만든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경관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뜻 있는 일이라 하겠다. 신의 예술품이라고 극찬하는 금강산에 가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우리 둘레에 많이 있다. 내 아내 역시 금강산을 가보고 싶어하는데, 지금까지 갈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어서 속히 남북통일이 되어 우리가 설악산이나 지리산 또는 한라산을 찾아가는 것처럼 금강산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통일이 되기 전이라도 북에 달러로 지불하는 관광비가 너무 비싸다든가, 그 돈이 핵무기 개발이나 군비 확충에 쓰이는 것 같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등의 뒷말이 없도록 하고, 복잡한 절차를 간소화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금강산을 찾을 수 있도록 하였으면 좋겠다. 

    <수필문학 통권 158호(서울 : 수필문학사, 2003. 11), 131~137쪽에 수록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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