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의림지(義林池)

   지난 4월 9일에 아내, 김 교수 내외와 함께 충북 제천시 모산동에 있는 의림지(義林池)를 다시 찾았다. 의림지 입구에 들어서니, 의림지 상징 캐릭터인 ‘물의 요정 방울이’가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는다. 그 옆에는 제천시 상징 캐릭터인 ‘박달 신선과 금봉 선녀’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 캐릭터를 보는 순간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가 떠올랐다. 나는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의림지 제방을 걷기 시작하였다.

 

   의림지는 용두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막아 만든 저수지로, 김제의 벽골제(碧骨堤)․밀양의 수산제(守山堤)와 함께 고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 온다. 제천을 고구려 때에는 ‘奈吐(내토)’라 하고, 통일신라 때에는 ‘奈堤(내제)’라 하였다. 이 말은 ‘큰 제방(둑)’이란 말로, 의림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충청남․북도를 호서(湖西)라고 한다. 이것은 의림지의 서쪽이라는 말로(<<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16권 참조), 의림지가 충청도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을 붙이는 기준이 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것은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던 시대에 넓은 제천 평야에 물을 공급하여 농사를 짓게 한 의림지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말해 준다.

 

   의림지의 축조(築造) 연대에 관하여는 삼한시대 축조설,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쌓았다는 설, 조선시대 현감 박의림이 쌓았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지명 분석에 근거하여 삼한시대 축조설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의림제(義林堤)」 항에는 정인지가 두 차례나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항일운동기인 1914~1918년에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고 한다. 지금 보는 모습은 1972년 장마에 무너진 둑을 복구한 것이다.

 

   나는 의림지 둑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걸으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잘 다듬어진 흙길을 지난 뒤에 나무판으로 만든 계단을 올라 호수의 서쪽으로 가니,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 나왔다. 그 산의 소나무 숲에서 세 줄기의 폭포수가 바위를 타고 흘러내린다.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흘러내린 폭포수는 잔잔한 수면에 파문(波紋)을 일으키며 원래 있던 저수지의 물과 뒤섞인다. 폭포 앞의 저수지에 설치한 분수에서는 힘차게 솟아오르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큰 물줄기 세 개와 여러 개의 작은 물줄기가 떨어지며 예쁜 파문을 일으킨다. 참으로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의림지는 둘레가 1.8km이고, 수심은 약 8m가 된다. 제방에는 오래된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어 ‘제림(堤林)’이 되었다. 제림은 초록빛을 띤 잔잔한 물결과 어우러져서 아름답고 그윽한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 제방을 따라 걷다 보니, 1948년에 세운 경호루(鏡湖樓)와 순조 7년(1807)에 세운 영호정(映湖亭)이 있다. 물과 숲이 어우러진 곳에 서 있는 누각과 정자는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고 멋진 경관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곳은 명승지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어 2006년 12월 4일에 국가명승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나는 영호정을 지나 동쪽 둑길을 걸으며 아내에게 안내문에 간단히 씌어 있는 의림지 전설 세 가지를 이야기하였다. 옛날 의림지가 생기기 전에 이곳에 부자가 살았다. 어느 날, 스님이 와서 시주를 청하자 인색한 부잣집 영감은 쌀 대신 두엄을 퍼서 주었다. 이를 본 그 집 며느리가 몰래 쌀독에서 쌀을 퍼다 스님에게 주면서, 시아버지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 스님은 며느리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비가 내리거든 속히 산 위로 피하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다. 얼마 뒤 장대비가 내리는 것을 본 며느리는 스님의 말이 생각나서 급히 산으로 달렸다. 그때 천둥 번개와 함께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얼떨결에 뒤를 돌아보니, 자기 집이 벼락에 무너지고, 그 자리에 물이 고였다. 그 때 물이 고인 집터가 의림지이며,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禁忌)를 어겼기 때문에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의림지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 전국에 널리 퍼져 있는 「장자못 전설」을 끌어다가 꾸민 이야기이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옛날에 의림지 동편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그 집 앞에는 집의 반대 방향으로 머리를 둔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그 집 며느리는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 접대에 힘이 들어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어느 날, 시주를 받으러 온 스님이 며느리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다. 그녀는 손님이 많아 고되어 못살겠다고 하였다. 스님은 손님이 끊어지게 하려면 집 앞에 있는 거북바위의 꼬리가 집 쪽으로 향하도록 돌려놓으라고 하였다. 그녀가 어른들 몰래 하인을 시켜 거북바위의 방향을 틀어놓은 뒤로 손님이 끊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그 집이 망하고, 그 집터에 물이 괴어 의림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풍수설화의 ‘거북 모티프’를 받아들여 의림지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이다.

 

   위의 두 이야기처럼 의림지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이 저수지의 영검성을 설명하는 이야기도 있다. 옛날에 의림지에 사는 큰 이무기가 이웃 마을에 나타나서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일이 일어나곤 하였다. 조선 선조 때에 제천에 장사인 어(魚) 씨 오형제가 살았다. 어느 날, 이들이 의림지 이쪽에서 놀다가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데, 불이 없었다. 그때 의림지 건너편 산기슭에 나무꾼이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를 본 맏형이 담뱃대에 담배를 담아 상투머리에 꽂고 헤엄쳐 건너갔다. 그가 담뱃대에 불을 붙여 다시 머리에 꽃은 뒤에 헤엄쳐 건너올 때 물속에서 커다란 이무기가 솟아올라 그를 쫓아왔다. 그가 요리조리 피하며 헤엄쳐서 뭍으로 올라오자, 이무기는 꼬리로 그를 쳤다. 그는 잽싸게 몸을 피한 뒤에 동생들과 힘을 합하여 이무기를 죽였다. 그 뒤로 이무기가 가축이나 사람을 해치는 일이 없어졌다. 이를 노래한 김이만(金履萬)의 「어장사 참사가(魚壯士斬蛇歌)」가 전해지고 있다(제천시홈페이지 참조). 이것은 의림지의 영검성을 드러내려고 ‘사신(蛇神) 모티프’를 받아들여 꾸민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전설 시대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수지의 동북쪽 끝에 이르니, 고목 곁의 큰 바위 위에 ‘우륵정(于勒亭)’이 있고, 동쪽으로 난 도로 건너편의 산기슭에는 ‘우륵샘’이 있다. 이 지역에는 옛날부터 “신라 진흥왕(534~576) 때에 우륵(于勒)이 돌봉재[石峯]에 살면서 제비바위[燕子岩]에 와서 가야금을 탔다. 유적으로는 우륵당 옛터와 우륵정이 있었다.”는 말이 전해 왔다. 그래서 “우륵정은 의림지 동북쪽 벼랑에 있다.”고 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우륵정을 세우고, 약수가 나오는 우륵샘을 정비하였다. 부드럽고 순한 우륵샘물을 마셔 갈증을 풀고 우륵정에 올랐다. 의림지의 전경을 살펴본 뒤에 눈을 감으니, 바람 소리와 함께 옛 악성(樂聖) 우륵의 탄금(彈琴)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의림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농경문화의 역사와 전설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러한 곳을 사랑하는 아내, 학문과 인품을 존중하여 아끼는 제자 김 교수 내외와 함께 걸을 수 있어서 매우 즐겁고 흐뭇하였다. 제천 10경 중 제1경으로 꼽는 의림지의 진면목이 그윽하고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관광 명소가 되었으면 좋겠다.(2019.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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