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파도키아(Kappadokya)는 아나톨리아 반도 중부에 위치한 네브셰히르(Nevşehir), 카이세리(Kayseri), 니데(Niğde)를 잇는 지역의 이름이다. ‘훌륭한 말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은 기원전에 이 지역에 있던 카파도키아 왕국(B.C 257~64)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이 지역은 약 6천만 년 전에 에르지예스산(Erciyes Dağı, 해발 3,916m)과 하산산(Hasan Dağı)의 화산 폭발로 분출된 용암이 굳어 형성된 응희암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풍화작용으로 기이한 지형과 바위 모양을 갖게 되었다. 바위와 흙은 붉은 녹빛, 황토색, 밤색 등을 띠고 있고, 수없이 많은 원뿔 모양의 돌기둥은 온갖 모양을 갖추어 아름답고 기이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이 지역으로 피신하여 살기 시작하여 약 250년 동안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이곳의 바위와 흙이 굴을 파기에 쉬운 점을 이용하여 기도처, 교회, 학교, 지하도시를 만들어 살면서 신앙을 지켰다. 그들은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을 교회 안의 벽에 그려 넣었다. A.D 313년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정한 뒤에는 은신처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하자 초대교회의 신앙을 따르던 수도사들이 이곳으로 와서 수도원을 건설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 후 이슬람교인들이 아나톨리아반도를 점령하자 기독교인들은 다시 이곳으로 와서 생활하였다. 유네스코(UNESCO)에서는 이 지역을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카파도키아 지역의 볼거리는 아주 많은데,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볼거리가 많이 몰려 있는 곳은 괴레메, 위치사르, 젤베 부근인데, 이곳에는 기암괴석과 동굴교회, 지하도시 등이 특히 볼 만하다. 나는 카이세리에 3년 가까이 있는 동안 카파도키아의 여러 관광지를 여러 번 갔다. 어떤 곳은 서너 번이나 갔고, 어떤 곳은 한 번밖에 못 가보았다. 시간과 여건이 맞지 않아 가보지 못한 곳도 있다.

  괴레메(Göreme) 야외 박물관

  괴레메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은둔생활을 시작한 곳이라고 한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교회가 타락하였을 때에는 초기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이 수도생활을 하던 곳이리라. 이슬람이 이 땅을 지배한 뒤에는 이슬람을 피하여 이곳에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이곳에는 5~12세기에 박해를 피해 온 기독교인들이 만든 30여 개의 석굴 교회가 모여 있는 괴레메 야외박물관이 있다.

  나는 이곳에 2009104일에 G 교수와 함께 왔고, 2011320일에 SK건설의 이 부장과 다시 왔다. 카이세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투판베일리(Tufanbeyili)SK건설이 화력발전소 건설 공사를 맡아서 하는데, 이 부장은 토목 담당 기술자로 이곳에 왔다. 이 부장과 함께 왔을 때의 일이다.

  괴레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상가에 가니 기념품 가게와 식당이 즐비하였다. 우리가 그곳을 지나자 상인들은 일본말로 인사를 하고, 물건을 사라고 하였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 금방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기념품을 싸게 드립니다. 들어오세요.” 하고 인사를 하였다.

  그곳에는 큰 식당은 없고, 몇 가지 터키 음식을 파는 간이식당이 있었다. 우리는 한 집으로 들어가 괴즐레메(Gözleme)를 한 개씩 사서 먹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아저씨는 한국어를 제법 하였다. 한국어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하니, 한국인이 많이 오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배웠다고 하였다.

  점식 식사를 마친 우리는 괴레메 야외박물관에 가서 지하교회를 보았다. 교회의 입구는 눈에 잘 띄지 않게 되어 있지만, 안에 있는 프레스코화는 아주 선명하다.


  입장권을 사서 내고 들어가니, 안내원이 음성안내기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10리라를 내고 한국어 음성안내기를 빌렸다. 음성안내기를 목에 걸고 현장에 가서 해당 번호를 눌러 그 동굴과 교회의 연혁, 교회 벽면에 그린 예수님과 마리아의 모습을 비롯한 성화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음성안내기가 있으니, 따로 가이드가 없어도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성 바실교회(Basil Kilisesi)이다. 이 교회는 11세기에 이루어진 곳이라고 한다. 성모자(聖母子)의 상을 비롯하여 성 디미트리우스, 말을 탄 성 요한, 성 테오도르 등이 묘사되어 있었다. 성 요한은 카파도키아의 수호(守護) 성인(聖人)이다.

  사과교회(Elmalı Kilise)4개의 기둥으로 지탱되는 돌, 옆면을 고정시키는 기둥이 있었다. 이것은 아야소피아의 건축 방식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벽에는 붉은 흙으로 그린 십자가의 기하학적 문양(紋樣), 그 위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었다. 중앙 돔에는 파란색을 배경으로 한 예수가, 아치에는 사도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 교회를 사과교회라고 한 것은 이 근처에 사과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하기도 하고, 천사 가브리엘이 가지고 있는 지구가 사과 모양이어서 붙여졌다고 하기도 한다.

  성 바르바라교회(Barbara Kilise)에는 돔과 두 개의 기둥, 십자형의 본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르바라 성녀는 306124일에 이교도였던 아버지 디오스크로스의 손에 목이 잘려 죽은 여인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여행을 간 동안 기독교를 믿는 청년을 만나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배교할 것을 명하였다. 그녀가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자, 아버지는 그녀를 관청에 신고하였다. 관청에서는 그녀를 잡아다가 고문을 하면서 배교할 것을 강요하였지만, 그녀는 끝내 듯을 굽히지 않았다. 이를 본 아버지가 그녀를 도끼로 목을 잘라 죽였다고 한다. 이 교회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바르바라 성녀를 기념하는 교회이다. 입구 맞은편 벽에 성 바르바라가 그려져 있다. 다른 벽에는 당시 소아시아반도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황토를 재료로 바탕색 없이 바위 위에 직접 십자가와 포도송이 , 물고기, 새 무늬 등이 그려져 있다.

  뱀의 교회(Yılanlı Kilise)에는 성 요한과 성 테오도르가 말을 타고 악마의 상징인 뱀을 죽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노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 성 엘레니가 십자가를 잡고 있는 그림이 있다. 입구 왼쪽 벽에는 남녀의 생식기를 함께 가지고 있는 성인 오노폴리오스가 그려져 있다. 이 성인은 원래 아름다운 여자였는데, 수도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남자들이 계속 괴롭히자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이처럼 추한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13세기에 그려졌다고 한다.

  샌들교회(Çanklı Kilise)는 바닥에 새겨진 발 모양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초기 기독교인이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의 발모양을 복사하여 가지고 와서 여기에 새겼을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상당히 큰 동굴도 있는데, 이곳은 예전에 식당으로 쓰이던 곳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식량 저장고와 부엌이 있고, 30여 명이 앉아 식사할 수 있도록 돌을 파서 만든 식탁과 의자가 있다.

  위에 적은 것 외에도 여러 교회와 시설물들이 있고, 각각의 특색이 있었다. 이곳에서 생활하며 예배를 드리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찬찬히 둘러보았다.

  파샤바으(Paşabağı)


  괴레메와 아바노스 길에서 젤베 쪽으로 1km쯤 가서 젤베 계곡에 들어가기 전에 있는 넓은 공간이다. 언덕길을 내려가니, 큰 버섯 모양의 특이한 바위들이 셋씩 넷씩 짝을 지어 우뚝우뚝 서서 우리를 반긴다. 이들 바위는 높이가 각각 다른데, 평균 30m쯤 되어 보인다. 바위는 아래 부분과 버섯의 갓 부분의 색깔이 다르다. 갓 부분은 딱딱한 현무암이고, 아래는 부드러운 응회암이어서 침식 속도가 달라 생긴 것이라 한다. 이런 모양의 바위를 요정의 굴뚝이라고 하기도 한다.

  버섯바위 뒤쪽에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보니, 원뿔 모양의 바위들이 연이어 서 있기도 하고, 몇 개씩 짝을 지어 서 있기도 하다. 바위들은 혼자서 혹은 무리를 지어 서로의 모습을 뽐내고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원뿔 모양의 높은 바위에는 몇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아래로 난 넓은 구멍으로 들어가니, 위로 통하는 통로가 있고, 통로는 위쪽의 방과 같은 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옛날에 수도사가 거처하며 수도하던 곳이리라.

  언덕 위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5명이 즐겁게 이야기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가자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서툰 터키어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아주 반가워하면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아내와 양 선생이 학생들과 함께 서서 포즈를 취한 뒤에 이 부장은 그들의 사진기로, 나는 내 사진기로 사진을 찍었다. 이 부장한테 사진기를 받아 찍힌 모습을 확인한 학생들은 아주 기뻐하며 앞서 내려갔다.

  언덕을 내려가니, 상인들이 줄을 지어 서서 손님을 부른다. 주차장 가까이서 과일과 포도주를 파는 남자가 한국어로 인사하였다. 그리고는 과일의 생즙을 만드는 기구를 가리키며 맛있어요를 강조하는 듯이 쥑인다-’를 연발하였다. 내가 석류 주스를 만들어 달라고 하니, 석류를 즙틀에 넣어 짜 준다. 약간 시면서 달콤한 맛이 아주 좋았다. 내가 그 남자에게 맛있다는 뜻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보이니, 그는 신이 나서 또 쥑인다를 외쳤다. 나는 터키어를 잘하는 양 선생에게 그것은 좋지 않은 표현이니 쓰지 말고, ‘맛이 좋아요.’라고 하라고 가르쳐 주라고 하였다. 양 선생의 말을 들은 그는 쥑인다대신에 맛있어요를 외쳤다. 양 선생이 그 말을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물으니, 한국인 관광가이드한테 배웠다고 하였다. 한국인은 외국인에게 가르쳐 주는 한국어 한 마디가 한국어의 품위를 높일 수도 있고,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들이 서서 석류주스를 마시고 있을 때 한국인 단체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언덕에서 내려왔다.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을 보고는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때 한국인들이 응원하던 박자와 가락으로 북을 치면서 대한민국을 외쳤다. 한국인에게 친근감을 들어내어 물건을 많이 팔아보겠다는 상술(商術)이지만, 한국인인 나로서는 그리 싫지 않았다.

    젤베(Zelve) 야외 박물관

   파샤바으에서 조금 걸어가니, 젤베 야외박물관이 나왔다. 이곳에도 여러 교회와 수도원이 있는데, 대개 성상(聖像) 파괴가 성행하던 8~9세기경에 지어졌고, 동굴은 그 당시 은신처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서기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노스 왕은 수도를 비잔티움(이스탄불)으로 옮기고,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그 후로 카파도키아에는 많은 교회와 수도원들이 생겨 기독교가 크게 발전하였다. 로마제국을 계승한 비잔틴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는데, 서기 726년에 레오 3세는 예수와 성인(聖人)의 성화상(聖畵像, icon)을 우상(偶像)으로 간주하여 엄금하였다. 이 시기를 성상화 파괴의 시기라고 하는데, 843년까지 지속되다가 황후 테오도라에 의해 성화상 숭배의 금지가 해제되었다. 그 후에는 성화상이 자유스럽게 그려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사슴의 교회’, ‘포도 교회’, ‘물고기 교회등으로 불리는 석굴교회가 있다. 교회 안에는 비둘기, 물고기, 공작, 종려나무 등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의 상징으로, 각각 평화, 예수, 부활, 영생을 상징한다.

  방앗간이라는 표지판이 있는 석굴에 들어가니, 커다란 맷돌이 있다. 맷돌의 모양이나 크기는 한국의 연자방아를 연상하게 해 주었다.


   교회와 방앗간 옆쪽 방향으로 가니, 앞면의 기둥이 잘 다듬어진 석굴교회가 있다. 그 옆에는 이슬람교 사원의 미나레(첨탑)와 비슷한 구조물도 서 있다. 이것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이곳에 있는 석굴교회와 방앗간 등은 기독교인들이 떠난 뒤에 이 지역 사람들이 와서 주거용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곳 바위산의 바위에는 많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수많은 비둘기들이 바위구멍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전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비둘기를 통신용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식용으로 잡아서 고기를 먹기도 하였으며, 노른자와 흰자는 염료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또 배설물은 모아서 거름으로 썼다고 한다. 지금도 수많은 비둘기들이 살고 있는데. 비둘기의 배설물이 바위를 상하게 하여 이곳의 지형이 바뀌지 않을까 걱정된다.

  계곡 위쪽을 보니 바위들만 있을 뿐 물도 없고, 풀과 나무도 없다. 그러나 낮은 곳과 계곡 쪽에는 듬성듬성 나무가 서 있고, 열매도 열려 있다. 바위산의 아래쪽에 있는 나무들과 떼를 지어 나는 비둘기 떼들이 이곳 역시 생물이 살 수 있는 곳임을 말해 주는 듯하다.

     에센 테페(Esen Tepe)

  괴레메 야외박물관을 지나 능선에 올라 차를 세우고 조금 걸어 올라가니, 계곡 아래쪽이 환하게 보이는 전망대가 있었다. 함께 간 G 교수는 이곳을 파노라마(panorama)’라고 한다고 하면서, 한국어로 무어라고 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전망대(展望臺)’ 또는 조망대(眺望臺)’라고 하면 좋을 것이라 하면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계곡 아래를 보니 하얀색과 밤색의 바위들이 연이어 있는데, 자세히 보니 바위들의 모양이 각각 달랐다. 원뿔 모양의 바위, 버섯 모양의 바위들이 줄지어 서있는데, 이쪽을 보기도 하고, 저쪽을 보기도 한다. 바위들이 작은 성채를 이룬 듯한 곳에는 성을 지키는 병사도 있고, 성안에서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이는 듯하다. 아내는 이를 보면서 동화 속의 나라와 같다고 하였다.

  바위들이 있는 계곡에서 눈을 들어 다른 쪽을 보니, 능선 아래의 길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마을들이 멀리 보인다. 조금 전에 보고 온 파샤바으의 요정의 굴뚝과 괴레메의 모습도 멀리 보인다. 위쪽으로 보니 큰 바위 요새인 위츠히사르(Uçhisar)가 보인다.

  계곡 아래의 경치를 보는 데에 정신을 집중하였다가 위를 보니, 야외에 좌판을 벌여놓고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몇 있다. 음악을 틀어놓아 관광지의 기분을 돋우었다. 가게 옆에는 가지에 하얀 천과 종이를 잔뜩 매달고 있는 큰 나무가 있었다. G 교수는 그 나무를 소원을 비는 나무라고 하였다. 터키 사람들은 흰 천이나 종이를 나뭇가지에 매달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이한 능력을 지녔다고 믿는 존재의 상징물 옆에 있는 나무에 소원을 빈다. 에페수스에 갔을 때 보니, 소원을 비는 나무가 마리아의 집 앞에도 있고, 잠자는 7인의 동굴 옆에도 있었다.

  이곳에는 바로 옆에 성인(聖人)의 상징물도 없고, 신성시하는 건물이나 구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능선에 외따로 서 있는 나무에 소원을 비는 이유가 무엇일까? 능선 바로 아래에 있는 형형색색의 바위를 신성시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2009103일에 왔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여 2011320일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다시 와서 보니, 처음 왔을 때와 같은 감동은 느낄 수 없었지만, 산 아래의 하얀 바위들이 펼치는 아름다운 모습은 다시 보아도 정말 장관이었다. 눈이 섞인 비가 내려 오래 있지 못하고 바로 차에 올랐다.

     위츠히사르(Uçhisar)

  위츠히사르는 네브셰히르에서 8km, 위르귑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있다. 네브셰히르위르귑 도로에서 왼쪽으로 1km쯤 벗어난 곳에 있다. 조금 전에 본 조망대에서 언덕길을 따라 1km쯤 올라가니, 위츠히사르가 나왔다. 위츠히사르는 뾰족한 성채의 뜻을 지닌 말이다. 커다란 바위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바위산들이 모여 튼튼한 요새와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이곳에는 중앙의 요새를 중심으로 집을 짓고 살아 한 마을을 이루었다. 그런데 인구가 증가하고, 침식작용으로 위험을 느낀 사람들이 아래쪽으로 내려와서 살았기 때문에 중앙의 요새가 보존되었다.

  이곳에는 바위 밖으로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 구멍과 연결된 작은 통로를 통해 안쪽의 넓은 공간으로 들어간다. 입장료를 내고 토산품 가게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방과 저장고가 있다.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니 위층에도 역시 넓은 방이 있다.

  계단을 밟고 맨 꼭대기까지 오르니, 작은 동산의 정상에 오른 느낌이다. 국기 게양대에는 터키 국기가 펄럭인다. 이곳에서는 괴레메 계곡 전체를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마을 쪽을 보니, 수영장이 있는 큰 집이 있는가 하면, 작은 집들도 많았다. 이곳 사람들은 펜션을 짓고 관광객을 상대로 숙박업을 하는데, 이 지역의 펜션은 경관이 좋아 인기가 있다고 한다.

  서쪽 하늘에는 서산으로 지는 해가 구름에 싸인 채 마지막 빛을 발하는 장엄한 광경이 보였다. 잠시 후 동쪽 하늘을 보니 둥근 달이 떠 있다. 나와 아내는 둥근달을 보고서 그날이 추석인 것을 떠올렸다. 아내는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들도 저 달을 보겠지.” 하고 말했다. 나는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맞장구쳤다.

  그날 밤은 괴레메에 있는 마론 펜션에서 숙박하였다. 펜션의 안주인은 한국인인데, 터키에 여행 왔다가 터키 남자를 만나 혼인하고, 펜션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 집 주인 내외는 G 교수가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 주인의 부탁으로 한국어문학과 학생들을 소개하여 아르바이트를 하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안주인은 요즈음에 세계 경제위기의 여파로 한국인이 많이 오지 않아 적적하였는데, 귀한 손님이 왔다면서 아주 반가워하였다. 저녁상을 차려 내왔는데, 상위에는 두부찌개가 있고, 옆에 송편과 호박전이 있었다. 우리는 터키에 와서 추석을 보내면서 송편과 호박전을 먹게 된 것이 신기하고 기뻐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씩 하였다. 아내가 여기서 두부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물으니, 한국에서 가져온 콩을 믹서로 갈고, 소금물에 무엇을 섞은 것을 간수 대용으로 써서 만들었다고 하였다. 두부가 잘되지 않아 맛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맛이 꽤 좋았다. 멀고 먼 터키에서 두부를 넣은 된장찌개를 먹고, 추석 음식으로 송편과 호박전을 먹은 일은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괴레메에는 한국인 자매가 와서 운영하는 파라다이스 펜션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여의치 못하여 만나지는 못하였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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