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일산우회 남부모임 회원들과 함께 2014418일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에 갔다. 서삼릉은 조선 제11대 중종(中宗)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를 모신 희릉(禧陵), 12대 인종(仁宗)과 그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를 모신 효릉(孝陵), 25대 철종(哲宗)과 그의 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강씨를 모신 예릉(睿陵)이 있는 곳이다. 대궐의 서쪽에 있는 세 능이라 하여 서삼릉(西三陵)’이라 한다.

 

  나는 회원 8명과 오전 10시에 지하철 3호선 삼송역에서 만나 41번 마을버스를 타고 15분쯤 달려 농협대학교 정문 앞을 지나서 버스 종점인 서삼릉 입구에서 내렸다. 바로 옆에 서삼릉 600m라고 쓰인 표지판이 서 있다. 서삼릉으로 걸어가면서 보니, 양옆에 허브 농장과 한국마사회 종마(種馬) 목장이 있다. 목장 앞에는 말들이 뛰어다닐 수 있는 널찍한 초지(草地)가 있다. 꽃잎이 떨어지면서 잎이 돋아나고 있는 벚나무길을 지나 서삼릉 출입문 앞에 오니 활짝 핀 조팝나무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정문 앞에서 문화재 해설사를 만나 인사한 뒤에 함께 희릉으로 향했다. 회릉 앞에서 해설사한테 중종이 연산군을 쫓아낸 반정공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는 과정, 반정 공신들의 주청으로 정비(正妃)인 단경황후(端敬王后)를 폐위하고 제1계비인 장경왕후 윤씨를 맞아들인 일,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별세하여 이곳에 묻힌 일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능제(陵制)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희릉은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이 없고 난간(欄干石)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조선 전기의 능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봉분에는 곡장(曲墻)이 둘러 있고,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봉분을 호위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과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양(石羊), 석호(石虎) 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원(陵園) 아래에는 부속건물인 정자각(丁字閣), 비각(碑刻),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瘞坎), 능 출입시 참배하는 곳인 배위(拜位), 홍살문이 있다.

 

 

   희릉을 둘러본 우리는 예릉(睿陵)으로 가서 해설사로부터 초야에 묻혀 지내던 강화도령이 조선 제25대 철종으로 등극(登極)한 일과 재위 기간에 안동 김씨의 세도(勢道)로 국정을 바로잡지 못한 일, 철인왕후 김씨가 책봉되어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고 홀로 지내다가 이곳에 안장된 일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능제는 봉분을 난간석으로 연결한 쌍릉(雙陵)이다. 봉분 앞의 시설물은 희릉과 비슷하였다. 우리는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봉분까지 올라가 여러 가지 설명을 듣고 질문하여 궁금한 것을 알았다.

 

   왕릉에서 쓰는 말이나 시설물의 명칭은 전부터 알고 있는 것도 있지만, 잘 모르는 것도 있었다. 나는 예릉을 보면서 들은 해설사의 설명과 능 앞에 세워놓은 안내문을 참고로 하여 이를 대강 정리해 보았다.

   봉분(封墳)은 능()의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능침(陵寢)이라고도 한다. 봉분에는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삼면으로 둘러놓은 담장이 있는데, 이를 곡장(曲墻)이라고 한다. 곡장은 무덤의 기운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데, 8마리의 석수(石獸)가 곡장을 향해 서 있다. 석수는 산양과 호랑이인데, 산양은 중국에서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하는 짐승이었으므로 지하의 사기(邪氣)를 막으라는 뜻에서 세운 것이고, 호랑이는 지상의 사기를 막으라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왕릉의 봉분 앞에는 직사각형의 돌이 놓여 있는데, 이를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한다. 일반인의 묘에서는 상석(床石)이라고 하여 제물을 차려놓은 곳이지만, 왕릉은 정자각에서 제를 올리므로, 혼령이 앉아 노는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혼유석은 북 모양의 돌 4개로 고였는데, 이를 고석(鼓石) 또는 북석이라고 한다. 고석은 귀면(鬼面)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담고 있다.

 

 

   봉분의 좌우측에 하나씩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이 있는데, 이것은 망주석(望柱石)이다. 혼유석 앞에는 석등(石燈)이 있는데, 이를 장명등(長明燈)이라고 한다. 이것은 돌아가신 분의 장생발복(長生發福)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예릉의 장명등은 문인석과 무인석보다 더 앞으로 나가 있어 다른 왕릉과 다르다. 이것은 예릉이 풍수지리설로 볼 때 배의 형국이어서 장명등을 앞으로 내어 돗대의 역할을 하면서 균형을 잡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혼유석 앞 장명등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이 서 있다. 문인석은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서 있고, 무인석(武人石)은 두 손으로 장검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로 서 있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왕릉에만 있는데, 문인석이 봉분 가까이 있다. 이것은 문()을 무()보다 중히 여기는 의식의 소산이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각각 석마(石馬)를 데리고 있다. 임금을 모시고 어디든지 갈 준비를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봉분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이곳은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황릉(皇陵)은 일자(一字) 모양으로 침전을 조성하고, 왕릉은 정자(丁字) 모양의 정자각을 조성하였다. 정자각 오른쪽에 비각(碑閣)이 있는데, 비석이나 신도비(神道碑)를 안치하였다. 신도비는 능 주인의 생전의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이다. 정자각을 오르는 계단은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동계(東階)는 왕, 제관(祭官)이 오르내리는 계단으로 오른 발을 먼저 내딛는다. 서계(西階)는 축관이 축문을 태우기 위해 오르내리는 계단으로, 왼 발을 먼저 내딛는다. 정자각 서쪽에는 제향을 올린 후에 축문(祝文)을 태우는 곳이 있는데, 이를 예감(瘱坎)이라고 한다. 정자각과 봉분 사이에 작은 골을 만들고 다리를 놓았는데, 이를 신교(神橋)라고 한다.

 

   왕릉 앞에는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있다.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 놓았는데, 홍문(紅門) 또는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한다. 홍살문 옆에 한 평 정도의 땅에 돌을 깔아놓은 곳이 있는데, 이곳은 왕이나 제관이 절을 하는 곳으로, 능을 향하여 4배를 하였다. 이곳을 판위(版位) 또는 어배석(御拜石), 망릉위(望陵位)라고도 한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곧은길을 참도(參道)라 하는데, 좀 높은 길은 신도(神道)로 신위를 모신 제관이 가는 길이고, 좀 낮은 길은 어도(御道)로 임금이 들어가는 길이다. 철종의 능에는 참도가 셋인데, 뒤에 철종을 황제로 추존하였기 때문에 황릉(皇陵)의 능제를 따른 것이다. 가운데 높은 길은 신도이고, 오른쪽은 황제가, 왼쪽은 황태자가 들어가는 길이라고 한다. 참도에는 박석(薄石, 얇고 넓은 돌)을 깔아놓았는데, 울통불퉁하다. 이것은 길 바닥이 울통불퉁하니 조심하여 걷도록 하려는 뜻과 함께 겉면을 곱게 갈아 바닥에 깔면 햇빛이 반사하여 왕의 눈을 피로하게 함으로 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참으로 세심한 배려라 하겠다.

 

 

   왕릉 앞에는 금천(禁川)이라고 하는 작은 내가 있는데, 그 위에 놓은 작은 다리를 금천교(禁川橋)라고 한다. 이 다리를 중심으로 외부 공간은 속세이고, 내부 공간은 선왕의 영혼이 머무는 성역(聖域)임을 표시한다.

 

   왕릉 둘레에는 소나무, 오리나무 등을 심었는데, 두 종류의 나무를 심은 데에는 나름의 뜻이 있었다. 소나무는 상록수로 절개(節槪), 장수(長壽), 번영(繁榮)의 상징적 의미와 함께 소나무가 벌레들이 싫어하는 피톤치드를 발생하여 벌레들을 막음으로써 시신이 깨끗이 썩도록 하려는 실용적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오리나무는 습기를 좋아하므로 습기를 잘 빨아들여 땅이 습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들의 왕릉에 대한 배려가 매우 세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희릉과 의릉을 관람한 뒤에는 조선 영조(英祖)의 아들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제1자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의 묘소인 의령원(懿寧園), 조선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17821786)의 묘인 효창원(孝昌園)을 관람하였다. 의령원은 서대문구 북아현동 중앙여고 안에 있던 것을 1949년에 옮긴 것이고, 효창원은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서삼릉에는 조선 12대 인종(仁宗)과 그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의 능인 효릉(孝陵)이 있는데, 이곳은 비공개 지역이어서 관람하지 못했다. 조선 제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묘소인 소경원(昭慶園) 역시 비공개 지역이어서 보지 못하였다.

 

   이곳에는 폐비 윤씨의 묘, 후궁들의 묘, 왕자와 공주의 묘가 있고, 태실(胎室)도 있다. 태실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한 곳에 있어야 잘 관리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이곳으로 모은 것이다. 왕자의 태실은 왕자가 태어났을 때 전국에서 좋은 자리를 골라 묻은 것인데, 일제는 명당(明堂)에 묻혀 있는 태()의 후손 중에 큰 인물이 나지 못하게 하고, 태와 함께 묻은 귀중품을 발굴하려는 속셈에서 이러한 만행(蠻行)을 저질렀다. 이 때 비석도 훼손하고, 일본의 연호를 새겨 넣기도 하였다. 이러한 아픈 역사의 현장을 보고 싶었는데, 비공개 지역이어서 보지 못하였다. 후일을 기약하고 아쉬운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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