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조사를 위해 고향인 홍성에 갔을 때의 일이다. 홍성의 향토사와 민속에 관해 깊이 연구하는 ㅂ선생과 점심 식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 ㅂ선생은 서련(徐憐) 판관의 고향이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라고 하였다. 서련 판관은 제주시 북제주군 구좌읍 동김녕리에 있는 김녕사굴(金寧蛇窟)에 얽힌 전설의 주인공으로, 처녀를 제물로 받는 뱀신을 물리친 영웅적인 인물이다. 나는 이 전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1982년에는 박사학위논문 <심청전 연구>에서 <심청전>의 배경 설화로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설의 주인공인 서련 판관의 고향이 바로 홍성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인물이 바로 홍성 출신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이를 여태까지 모르고 지낸 내가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나는 점심 식사 후 ㅂ선생과 함께 구항으로 가서 서련 판관의 묘를 둘러보고, 그 옆에 있는 연산 서공 련 송덕비(連山徐公憐頌德碑)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송덕비 뒤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물이 얼어 있었다. 송덕비에 적힌 내용은 내가 알고 있던 제주도 지방의 전설 내용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를 간단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서련은 조선 성종 25(1494)년에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외조부 밑에서 자랐는데, 부모가 없어 불쌍하다는 뜻으로 이름을 ‘련(憐)’이라 하였다. 
   그는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나서 18세 때인 중종 6(1511)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19세인 중종 7(1512)년에 제주 판관이 되어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그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방에게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김녕리 석굴에 큰 구렁이가 살고 있는데, 구렁이가 돌풍과 비를 일으키고, 독기를 내뿜어 주민에게 해악을 끼치는 일이 극심합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해마다 봄과 가을에 굴 앞에 15세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굿을 합니다. 그러면 구렁이가 나와서 처녀를 물고 굴속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석굴의 구렁이는 열과 연기를 싫어하므로 기와를 굽지 못하여 백성들의 집은 물론 관아의 건물마저 띠로 지붕을 잇고 있습니다.”

   그는 구렁이를 물리쳐 제주도민이 구렁이에 대한 공포감에서 벗어나고, 해마다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주민들을 독려하여 기와를 구워 지붕을 잇게 하였다. 주민들은 판관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따르면서도 구렁이의 화가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자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구렁이를 아주 없앨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구렁이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 다가오자 그는 전처럼 제사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그는 굴 앞을 파고 숯불을 피워 놓고, 무당에게 풍악을 울리며 굿을 하게 하였다. 얼마 후 구렁이가 나와 처녀를 삼키려고 하였다. 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창으로 구렁이를 찌르니 군졸들도 달려들어 창과 칼로 찔렀다. 구렁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이를 끌어내어 숯불에 태워 죽였다. 이 때 무당이 말하였다.
   “판관님, 어서 말을 타고 관아로 돌아가십시오. 가는 도중에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군졸들과 함께 말을 타고 관아를 향하여 달렸다. 그 때 붉은 기운이 구름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이를 본 군졸이 ‘피구름이 몰려온다!’고 소리쳤다. 이 말을 들은 그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니, 뒤따라오던 붉은 기운이 그를 덮쳤다. 
   관아로 돌아온 그는 이름 모를 병으로 앓다가 1515년에 제주 관사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구렁이 한 마리가 상여에 숨어서 따라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구렁이를 죽이지 않고 그의 유해가 안장된 구항면 지정리 보개산 아래에 조그만 연못을 파고, 살도록 해 주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구렁이의 횡포에 두려움을 느끼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15세 처녀를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였다. 또 구렁이가 뜨거운 열과 연기를 싫어하므로 기와를 굽지 못하여 민가는 물론 관아까지도 기와를 올릴 수 없었다. 이것은 그곳 주민들의 뱀신에 대한 공포심이 극에 달하여 그릇된 신앙 행위를 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곳 사람들은 뱀신을 두려워하고, 이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이를 거스르는 일은 곧 자신의 죽음과 마을의 피해로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련 판관은 이러한 상황에서 뱀신을 물리칠 결심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가 맡은 관아에 속한 주민들을 뱀신의 횡포(橫暴)와 패악(悖惡)에서 구해내겠다는 굳은 의지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 의한 결단이었다. 그의 결단은 뱀을 죽였고, 사신(邪神)을 숭배하는 그릇된 신앙과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습속을 없앴다. 그래서 주민들로 하여금 사신에 대한 공포감에서 벗어나고, 더 이상 사랑하는 딸을 제물로 바치는 일을 하지 않게 해 주었다. 그러나 판관 자신은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가히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하겠다.

   제주도 사람들은 굴 옆에 서련 판관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 그의 용기와 애민정신을 잊지 않고 기리고 있다. 제주도의 향토 자료에는 서련의 영웅적인 행적을 싣고 있으며, 교육 현장에서는 이를 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1972년에는 제12회 제주도 한라문화제에서 서련 판관이 구렁이를 제치하는 모습을 재현한 ‘사굴 처녀제’가 민속놀이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5년 동안 ‘사굴 처녀제’는 한라문화제에 찬조 출연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또 제주도에서는 서련을 추모하여 우수공무원을 선발하여 시상하였는데, 수상자가 수상식장에 들어갈 때에는 판관 복장에 조랑말을 타고 들어갔다고 한다. 이것은 공무원들이 서련 판관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이어받는다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북제주군 노인대학장인 김군천 씨는 김녕사굴을 30년 넘게 관리하면서 매년 정초와 추석에는 추모제를 지내고, 서련 판관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추모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서련 판관은 제주도에서는 영웅적인 인물, 공무원의 표상으로 추앙하면서 그의 용기와 결단,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그의 출신 지역인 홍성에서는 그의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나 역시 그 동안 모르고 지냈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홍성 지역 사람들은 뱀신을 물리친 영웅적인 인물이 이 지역 출신임을 널리 알려야 한다. 그리고 서련 판관의 출신 지역 사람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 한편, 그의 용기와 희생정신을 기리고 본받아야 하겠다. 

* 이 글은 충청문학 18, 서울 : 충청문인협회, 2007에 수록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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