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4일에 막내아이가 장가를 갔다. 막내가 혼인예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난 뒤에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큰아들 내외와 손녀, 미국에 가서 살고 있는 딸과 외손주가 집에 있어서 잘 몰랐는데, 이들마저 떠나고 나니, 어쩐지 집안이 썰렁하고 허전하였다. 큰아들과 딸은 살림을 난 지가 6∼7년이나 되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늘 함께 지내던 막내가 없으니, 허전할 수밖에 없었다. 막내가 쓰던 방을 들여다보니, 전과 다른 것이 없었고, 4박 5일의 신혼여행을 마치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방문을 닫았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막내아들과 며느리가 집에 오던 날은 큰아들 내외와 손녀까지 와 있어서 집안에 기쁨과 웃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큰아들 내외가 떠나고, 이튿날 막내 내외가 새 보금자리를 찾아 총총히 떠난 뒤에는 집안이 적막하였다.

  며칠 뒤의 어느 날, 내가 학교에 가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니, 막내가 자기 방에 있던 물건을 꺼내어 트럭에 싣고 있었다. 자기가 입던 옷이며 일상용품, 책, 컴퓨터, 장식장 등을 모두 자기의 보금자리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현관 앞에서 잘 가라고 인사한 뒤에 집안으로 들어와 그가 쓰던 방문을 열어보니, 방안이 휑하였다. 서른한 살이 되도록 함께 살던 막내마저 떠났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린 듯하고, 공허한 바람이 휘휘 부는 듯하였다. 감정 면에서 둔한 내가 이럴진대 마음이 여린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하니, 울컥 눈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말없이 그 방 청소를 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충청도 시골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나는 봄에 뒷산에 올라가 나지막한 소나무 포기나 덤불 속에서 산새의 둥지를 찾아내곤 하였다. 둥지에서 꺼낸 산새 알이나 어린 새끼를 집에까지 가지고 왔다가 어른들한테 꾸중을 듣고 다시 가져다 놓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뒤에는 이른봄에 보아둔 산새의 둥지를 가끔씩 찾아보며 산새가 알을 낳아 품는 모습과 새끼를 까서 기르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새끼가 다 자라서 나는 연습을 할 때에는 새끼 새를 잡아보려고 쫓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다 자란 새끼 새가 어디론가 가 버리고, 둥지에 어미 새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둥지에 남아 있는 새가 어미 새가 아니라 새끼 새였는지도 모르지만, 그 때 나는 어미 새라고 생각하면서, '새끼를 떠나보낸 어미 새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생각하며 홀로 안타까워하였다. 그 안타까움은 매우 컸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어린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긴 채 세월의 뒤안길로 잦아들었다. 그 후로 나는 바쁘게 생활하느라고 새끼를 떠나보낸 어미 새의 심정 같은 것은 잊고 살았다. 그런데, 오늘 50여 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나와 내 아내의 지금의 심정이 어릴 때 보았던 새끼를 떠나보낸 어미 새의 심정과 같을 것이라는 연상 작용 때문이다.

  충청도 촌놈인 나는 서울에 와서 직장을 잡고, 1966년에 혼인하여 전세방을 얻어 새 둥지를 틀었다. 부부 교사인 우리는 학교에 근무하는 한편 못다 한 공부를 하면서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아 기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린 새끼를 기르느라 혼신의 노력을 하던 산새처럼 힘들고 고달픈 것도 잊고, 하루하루의 일과에 충실하였다. 우리의 정성과 노력을 아는지 3남매는 무럭무럭 자랐고, 남부럽지 않게 성장하여 우리에게 큰 기쁨과 보람을 안겨 주었다.

  큰아들은 학사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던 1995년에 혼인하여 살림을 났다. 큰아들이 분가하였을 때에도 매우 섭섭하였지만, 그 때만 하여도 내 나이가 지금보다 젊었고,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논문 쓰고 책을 내는 일에 바빴으며, 아직 두 아이가 남았다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큰아들과 며느리를 보면서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은 차츰 수그러들었다.

  그 다음 해에 딸을 시집보내고 나서는 텅 빈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막내아들마저 군에 가 있던 때였으므로 더 그랬던 것 같다. 딸이 쓰던 방문 앞을 지나 서재에 드나들 때에 딸이 쓰던 방에 들어가 남아 있는 딸의 체취를 느껴보기도 하고, 막내가 곧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곤 하였다. 가끔씩 찾아오는 딸과 사위를 대하면서 세월이 흐르니, 섭섭함하고 허전하던 마음도 많이 사그라졌다.

  이제 딸이 시집간 뒤로 6년여를 홀로 남아 함께 살던 막내가 떠나고 보니, 셋 다 자기 둥지를 마련해 떠나보냈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엄습해 오는 섭섭함과 허전함을 주체할 길 없다. 저녁이 되어도 기다릴 사람이 없고, 늦게 왔다고 핀잔할 사람도 없다. 아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놓고 출근을 독촉할 일도 없어졌다. 부모로서 할 일을 다 하였다는 안도감이나 자질구레한 일에서 벗어났다는 해방의 기쁨보다 쓸쓸하고 허전함이 더 큰 것은 무슨 연유일까? 큰아들과 딸을 보냈을 때 섭섭함과 아쉬움을 경험하여 이제는 면역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였는데, 공허감이 더 큰 이유는 무엇일까? 셋 다 떠나보내고 나니, 이제는 자식과도 함께 산다는 기대가 없어졌고, 막내와 함께 산 기간이 위의 두 아이보다 길었으므로 애틋한 정이 더 많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우리 부부가 이제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식물의 일생을 보면, 봄철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 꽃이 지면서 탐스런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은 뒤에는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가 가을 바람에 떨어지고 겨울을 맞는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수없이 보아온 일인데, 근래에 와서 이러한 자연 현상의 오묘함을 새삼 느끼고, 인간의 삶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음을 절실하게 느끼곤 한다. 이 역시 나이가 든 탓이리라.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산새의 삶 역시 그렇다. 다 자란 산새는 어미 품을 떠나 새 둥지를 마련하여 새끼를 치고, 새끼를 길러 다 자란 뒤에는 떠나보낸다. 새끼를 떠나보낸 어미 새는 묵은 둥지를 지키며 힘이 남았을 때에는 다시 알을 낳아 새기를 기르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그 둥지에서 조용히 살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리라. 이 일은 내 고향 뒷산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터인데, 새끼 새를 떠나보내는 어미 새는 새끼 새가 탈없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막내를 떠나보내고 허전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애쓰면서, '현대인은 자식들을 독립시킴과 동시에 부모 스스로가 자식들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고 힘주어 말하던 인구학 전공 동료 교수의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세 아이를 독립시켰으니, 이제는 내가 독립하여야겠다. 이제 떠난 막내를 끝으로 새 둥지를 마련하여 떠난 세 아이는 모두 내가 밟은 길을 다시 밟을 것이고, 그 길은 자기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이니 이를 따르는 것이 순리이리라. 이제 자기 둥지를 마련하여 자기 삶을 시작한 세 아이가 아무 탈없이, 뜻한 바를 이루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하면서, 아내와 함께 묵은 둥지를 지키려 한다.
<수필문학 통권 143호(서울 : 수필문학사, 2002. 7)에 수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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