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13일에 중앙아나톨리아의 서남쪽 내륙 평야 지대에 위치한 콘야에 갔다. 나와 아내는 아침 7시에 숙소 앞에서 양 선생, 충남대학교 교환학생으로 온 두 여학생과 함께 서비스 버스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갔다.

  콘야는 전에는 이코니움(이고니온)이라고 하였는데, 그리스와 로마 제국 당시에는 루가오니아의 수도였다. 신약 성서에 따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 여행을 왔던 곳이다. 두 사람은 이곳에 와서 유대교의 회당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설교하였는데,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 무리들이 두 사도를 돌로 치려고 위협하여 할 수 없이 몸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한다(사도행전 14:1~6). 이곳은 디모데가 복음을 전하며 신앙생활을 잘하여 칭찬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나중에 로마의 지배를 받았는데, 서기 235년에 초대교회 교회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곳은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수도가 되어 11세기에 크게 번영하였다. 이 때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지금 남아 있는 많은 역사적인 경관들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메블라나 박물관과 미나레 신학교가 가장 유명하다.

   콘야는 매우 아름다우며, 비옥하고 풍부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버시디아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강물로 비옥해진 넓은 평야에서 밀아마 등의 곡식과 체리, 살구 등의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여기서 생산되는 밀은 터키 전체 국민의 1년 양식이 되고도 남는다고 한다. 이 말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 지방의 넓은 평야에서 나는 곡식의 양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콘야는 학자이자 시인인 메블라나 젤라레딘 루미(Mevlana Celalleddin Rumi, 1207~1273)13세기에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수피즘(Sufism)을 창단한 곳이다. 그리고 수피즘의 상징으로 꼽히는 명상(冥想)의 춤 세마(Sema)’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오전 830분에 출발한 버스는 괴레메, 네브세히르, 악사라이 등을 경유하여 1250분에 콘야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앙카라 대학에 객원교수로 와 있는 김 교수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어서 반갑게 만났다.

   우리는 돌무쉬(한국의 마을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와서 메르트 군이 알려준 하지 쉬크류(Hacı Sükrü)’ 식당을 찾아갔다. 콘야의 전통음식인 프른 케밥(Fırın Kebabı)’을 그 식당을 가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몇 번씩 물어서 찾아갔다. 그 식당은 3대째 이어하는 프른 케밥 전문점이었다. 한쪽 벽에 역대 주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실내에는 터키 전통 농기구와 악기, 생활 용품 등으로 장식을 하였는데, 알맞게 배치되어 고풍스럽게 느껴졌다.

   음식 이름의 프른(Fırın)오븐을 뜻하는 말이다. 주문한 음식은 얇게 썰어 오븐에서 잘 익힌 양고기를 보쉬피데(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불에 구은 빵의 일종)를에 싸서 접시에 놓았다. 먹기 전에 사진을 찍으면서 보니, 서울의 원할머니 보쌈이 연상되었다. 고기 맛은 부드럽고 연하며 고소하였다. 양고기 냄새를 싫어하는 아내는 양고기 냄새가 나지 않아 좋다면서 맛있게 먹었다. 1인분은 150g15리라인데, 양도 적당하고, 값도 크게 비싸지 않아 좋았다. 일행 여섯 명이 모두 맛있게 먹었다며 만족해하였다. 그 식당을 꼭 찾아가라던 메르트 군의 말을 따르기를 잘한 것 같다.


   우리는 메르트 군이 인터넷으로 예약해 놓은 메블라나 호텔로 갔다. 21실에 숙박료는 55리라라고 하였다. 우리는 방을 배정받은 뒤에 가방을 내려놓고, 시내 관광을 하였다.

메블라나 박물관(Mevlana Müzesi)

   메블라나 박물관은 이슬람의 신비주의 종파인 메블라나 교단을 창시한 메블라나 젤라레딘 루미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이다. 6,500의 부지 안에 자미와 수행 장소 등이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원래 궁전의 장미 정원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왕이 메블라나의 아버지 바하틴 벨레디에게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한다.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탑은 1396년에 세워진 것이다.

   이곳은 메블라나 루우미가 메불라나 교단을 창시하던 때부터 1923년까지 메블라나 교단에서 사원으로 사용하였다. 1923년 터키에서 종교의 세속화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왕정(王政)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메블레나 교단은 크게 위축되어 교단은 해체되고, 메블라나 사원은 폐쇄되었다. 1927년에 사원으로 쓰였던 장소만 박물관으로 문을 열어 메블라나의 생활상과 교리를 보여주는 박물관이 되었다.

   이곳의 중심은 탑 바로 아래에 있는 성인들의 묘소이다. 여러 묘 중에서 관이 가장 큰 것은 루미의 묘로, 유해는 관 아래의 땅에 매장되어 있다. 여러 관들은 각각의 지위를 나타내는 커다란 터번을 올려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 박물관에는 메블라나 루미의 소지품, 세밀화(細密畵)가 그려진 코란, 의상, 신비스런 악기, 그리고 손으로 만든 양탄자, 비문, 문서, 예술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터키 신비주의 이슬람 문화를 접할 수 있다.

알랏딘 자미(Alaaddin Camii)

   메블라나 박물관에서 나온 우리는 시내를 구경하며 천천히 걸어서 셀리미예 자미와 알랏딘 자미를 비롯한 여러 자미와 박물관을 찾아갔다. 터키어를 잘하는 양 선생이 길을 물으며 앞서 갔으므로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면 되었다.

  메블라나 박물관 바로 옆에는 셀리미예 자미(Selimiye Camii)가 있다. 이 자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리미예 2(재위 기간 1566~1574)가 건축하였다. 이 자미는 오스만 제국의 건축술의 진수를 볼 수 있는 자미로 꼽힌다. 자미 안에 들어가니 건물이 높고 창이 많아서 그런지 햇빛이 들어와 밝고 환하였다. 자미 안 분위기는 웅장하고 경건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구석에는 이슬람식 큰절을 하고 기도하는 사람도 보였다. 자미 밖으로 나오니 마당에 셀 수 없이 많은 기러기들이 떼지어 와서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고 있었다. 아주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알랏딘 자미는 알랏딘 언덕(Alaeddin Tepesi)’에 자리 잡고 있다. 알랏딘 언덕은 콘야에서 사람이 제일 먼저 살기 시작한 곳으로,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이코니온 성이 있었다. 지금은 공원이 되어 버린 이곳에 알랏딘 자미가 있는데, 셀주크 터키인들에 의해 지어진 가장 오래된 자미이다. 이 자미의 건축은 루크네딘 마수드의 통치 기간(1116~1156)에 시작하여 1221년 술탄 알랏딘 카이쿠바드 1세 때에 완성되었다. 완성한 술탄의 이름을 따라 알랏딘 자미로 불린다.

   이 자미의 천장을 받치고 있는 돌기둥은 42개인데, 대부분 로마 시대나 비잔틴 시대의 신전이나 교회 등의 건축물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자미의 내부에는 아무런 치장이 없음은 물론, 뒤에 지어진 사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색도 없다. 그래서 오히려 엄숙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하다. 이 자미는 기도 장소로서의 위엄을 갖추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곳에는 셀축 터키의 술탄 8명의 관이 보관되어 있다.

   알랏딘 자미를 보고 나온 우리는 카라타이 박물관(Karatay Muzesi)으로 갔다. 이 박물관은 13세기 중반에 셀주크 시대의 고관인 카라타이가 지은 신학교인데, 지금은 도자기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시하고 있는 것들은 셀주크 시대의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인제 미나레 박물관(İnce Minare Müzesi)은 카라타이 신학교와 비슷한 시기에 고관이었던 히사프 아타에 의해 지어진 신학교이다. 인제 미나레는 가는 첨탑이란 뜻이다. 첨탑이 번개를 맞아 부러져서 전체 길이의 3분의 1정도만 남아 있다. 정문 앞면에 장식된 기하학적인 문양은 셀주크 미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지금은 셀주크와 오스만 시대의 석조, 목조 작품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메블라나(Mevlana)와 신비의 춤 세마(Sema)

   콘야는 13세기에 메블라나 젤라레딘 루미가 창단한 신비주의 종파인 수피즘의 상징으로 꼽히는 명상(冥想)의 춤 세마(Sema)’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세마가 유명한 고장답게 기념품 상점에는 세마의 춤 동작을 표현한 크고 작은 도자기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다. 세마의 춤 동작은 이 지역 광고에도 수없이 보이고, 가로등 아래에도 조명 장치를 하여 매달았다. 이를 보면 도시 전체가 세마의 신비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호텔 직원에게 세마를 언제, 어디서 볼 수 있는가를 물으니, 메블라나 문화회관에서 매주 토요일 730분에 공연한다고 하였다. 거리로 나와 크고 깨끗해 보이는 식당으로 가서 콘야의 전통음식이라고 하는 에틀리에메크 피데(Etliekmek Pide, 고기가 있는 피데의 뜻)’를 시켰다. 콘야가 자랑하는 전통음식 두 가지를 다 먹어보고 싶어서였는데, 점심에 먹은 프른 케밥과 마찬가지로 맛이 좋았다. 식사 후에 시내 버스를 타고 메블라나 문화회관으로 갔다. 오후 7시도 못되어 도착하였는데, 문화회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며 몇 시부터 입장하느냐고 물으니, 730분이 되어야 입장시킨다고 하였다.

   세마를 시작한 메블라나 젤라레딘 루미는 1207930일에 지금의 아프카니스탄 발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위대한 이슬람의 신학자였고, 어머니는 지역 지도자의 딸이었다. 루미는 12살 때 몽골의 침략을 피해 고향을 떠났는데, 1228년 셀주크의 술탄 알라딘 카이쿠바드의 초대를 받아 콘야로 왔다. 그는 콘야에서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 지도자를 만나 교류하면서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이란에서 온 방랑자이면서 춤추는 수피신비주의자인 셈스를 만나 삶의 자세가 바뀌었다. 전통적인 신학자, 법률가의 길을 가던 그는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시를 쓰고 춤을 추면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였다.

   루미는 진정한 영적 지도자로서 명상과 기도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슬람 본질에 다가가려 했다. 루미는 다음과 같은 7가지 교훈을 남겼다.

   남에게 친절하고 도움주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라.
   연민과 사랑을 태양처럼하라.
   남의 허물을 덮는 것을 밤처럼 하라.
   분노와 원망을 죽음처럼 하라.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기를 땅처럼 하라.
  
너그러움과 용서를 바다처럼 하라.
  
있는 대로 보고, 보는 대로 행하라.
 
   루미의 사상과 낮은 곳으로 향한 사랑은 유럽 지성세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17세기 화가 렘브란트, 18세기 작곡가 베토벤, 19세기 대문호 괴테 등도 직간접으로 루미 사상에 영향을 받은 유럽 지성들이었다.

   루미가 활동하던 시대에 아랍어로 씌어진 코란은 비아랍권의 서민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이었다. 더욱이 이슬람교에서는 오해와 왜곡을 막기 위해 코란을 다른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에 따라 이슬람교는 아랍 중심의 지배자와 엘리트 계층만을 위한 신앙적 도구로 한정되어 가고 있었다. 루미는 코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도 누구나 일정한 영적 수련을 거치면 신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골똘히 생각하였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세마이다. 그는 독특한 회전 춤을 통해 누구든지 신의 경지를 경험하고, 궁극적으로는 신과 교통하면서 이슬람의 오묘한 진리를 체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세마는 민중들에게 퍼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루미는 관용(寬容)과 상생(相生)의 정신으로 이슬람을 재해석하여 이슬람 신비주의를 이룩하고, 그 안으로 인류를 품으려 하였다. 그는 무슬림이 아닌 사람이나 무신론자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펼쳐 인류 모두가 상호존중과 화해를 통해 함께 사는 진정한 지혜를 제시하였다. 특히 용서와 관용을 강조했다.

   루미의 묘 앞 돌에는 아래의 시구가 적혀 있다.

    오라! 그대가 누구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불을 섬기는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 오라. 우리들의 문은 절망의 문이 아니니, 그저 있는 그대로 오라!…….”

   루미의 관용과 상생의 이슬람 정신은 아랍의 경계를 넘어 세계로 퍼져갔고, 다른 종교와 서로 섞이고 공생하면서 오늘날 비아랍 세계에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그의 가르침은 종교를 뛰어넘는 사랑이었고, 인류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다. 1273년 루미가 세상을 떠나자 무슬림뿐만 아니라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40일간이나 되는 장례에 모두 하나같이 애도하고 참여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진정한 지도자의 덕목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말해 준다.

   유네스코는 루미의 탄생 800주년이 되는 2007년에 루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여 그의 높은 정신을 기렸다.

   이슬람의 정통 수니파에서는 세속적인 음악과 춤을 금지한다. 신을 향한 마음이 흐트러지고, 타락과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슬람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음악은 코란을 낭송하는 소리일 것이다.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음악과 춤이 하나의 종교예술로 승화시킨 것이 메블라나 종단의 수피 댄스 곧 세마이다.

   730분이 되니 문화회관 직원이 나와 문을 열어주며 들어가라고 하였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문화회관의 공연장은 넓고 깨끗하였다. 30분을 기다려 8시가 되니, 악단과 노래하는 사람이 나와 의자에 앉았다. 악기는 터키의 전통악기인데, 우리의 대금과 같은 관악기도 있고, 기타와 비슷한 현악기도 있었다.

   잠시 후 흰옷을 입은 위에 검은 겉옷을 걸쳐 입고, 원통형의 흰 모자를 쓴 사람이 혼자 나와 중앙으로 와서 엎드려 절하고, 낮은 음으로 노래를 하였다. 그 뒤에 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줄을 지어 나왔다. 이들을 세마젠(Semazen)’이라고 하는데, 세마를 통해 수도하는 사람들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단순 연희자인지, 세마를 통해 수도하는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다.

   기도와 의식을 마친 세마젠은 한 걸음 걷고는 발을 모아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큰 원을 그리며 돌았다. 그리고는 겉옷을 벗고 음악에 맞춰 몸을 회전하며 춤을 추었다. 하늘을 향해 자기 몸의 축을 세우고, 눈을 지그시 감고 귀와 마음을 열고 알라를 부르며 몸을 빙글빙글 돌린다. 오른손은 하늘을 향하고, 왼손은 땅을 가리킨다. 고개는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였는데, 지구의 자전축(自轉軸)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 돌고, 3명이 돌고, 잠시 후에는 20여 명이 모두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옆으로 움직인다. 한 사람이 돌고, 옆 사람이 돌고, 모두가 도는 군무(群舞)가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엄숙해 지고, 거룩함이 느껴진다. 이런 춤이 계속되는 동안 수도자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신과 소통하는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이 입은 옷과 동작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흰옷은 에고(ego)의 죽음을, 검은 겉옷은 무덤을 상징하고, 원통형의 모자는 자신의 묘비를 상징한다고 한다. 벌린 두 팔은 영적인 합일을 의미한다. 하늘을 향한 오른 팔은 신의 은총을 받는다는 뜻이고, 땅을 향한 왼팔은 신의 은총을 전한다는 뜻이다. 이들은 지구의 회전 방향과 같이 왼쪽으로 돌고 돌면서 신 앞에서 하나가 되고, 모든 사람과 신의 창조물을 사랑으로 포용한다.

   음악은 악기만 연주될 때도 있고,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하는데, 곡들이 모두 경건하고 장중하였다. 모두가 돌며 춤을 추는 회전무가 끝난 뒤에는 다시 큰 원을 그리며 걷고, 그 뒤에는 다시 회전무를 하였다. 나는 신비감이 도는 세마를 보면서 전체를 비디오 카메라에 담았다.
 


   터키 신비주의 명상춤 세마는 20059월에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한국에 이슬람이 들어온 50주년을 기념하여 한터 친선협회 및 한국 이슬람중앙회 주관으로 송파구민회관에서 선보였다.

   세마는 920분이 되어서 끝났다. 밖으로 나오니 마음이 가볍고 경쾌하였다.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와서 보니, 문화회관 앞 가로등 밑에 세마의 동작을 나타내는 조명등이 나란히 걸려 있다. 조명등의 세마 동작은 하늘과 땅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콘야는 2011624일에 장위교회 목사님을 비롯한 교우 20여 명과 함께 다시 방문하였다. 여행 일정 상 시간이 없어서 여러 곳을 보지 못하고 메블라나 박물관과 알랏딘 자미를 관람하였다. 이 날은 더운 날씨여서 알라딘 자미를 관람하고 나와서 알랏딘 언덕의 휴게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었다. 커다란 크리스탈 용기에 세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가득 담아 주었다. 한 그릇에 4리라로 다른 곳보다 조금 비싸기는 하였지만, 터키 아이스크림의 참맛을 즐기며 땀을 식힐 수 있어 좋았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는 기독교 교회가 참으로 많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교회를 볼 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생긴 교회는 어디에 있는, 어느 교회일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터키에 와서 여행 안내서를 보던 중 ‘터키 안타키야(Antakya)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세계 최초의 교회’라는 글을 읽었다. 그래서 얼른 지도를 펴고 안타키아를 찾아보니, 터키의 남동쪽 해안 끝에 있다. 학생들에게 물으니, 버스를 타고 12~13 시간 걸려야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주말을 이용하여 갔다 오기에는 먼 곳이어서 방학에 가기로 하고 미뤄 두었다.

   2010년 봄 학기 강의가 끝난 6월 하순에 우리 부부는 양 교수, 김 교수와 함께 밤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10여 시간을 달려 이른 아침에 이스켄데룬(Iskenderun)에 도착하였다. 이스켄데룬은 옛날에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지난 것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버스 터미널로 마중 나온 2학년 학생 일카이 양을 만나 그곳에서 하루를 지내며 이스켄데룬 시내와 박물관을 구경하고, 지중해 바닷가에 난 길을 따라 산책하였다. 지중해의 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 하고,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바닷가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감상하였다.

  그 다음날 오전 10시쯤 일카이 양 언니의 약혼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안타키아로 향하였다. 이스켄데룬에서 안타키아는 차로 3시간 쯤 걸린다. 좀 가파른 산길을 달리며 보니, 길 양편 산에 올리브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더 남쪽으로 가니,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밭에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시리아와의 국경에 쳐 놓은 철조망을 지나 달리니, 옥수수밭과 목화밭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올리브나무가 숲을 이루고, 끝없이 펼쳐지는 농토를 가진 터키가 부럽다.

   안타키아(Antakya)는 터키의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인구는 약 20만 2천명이라고 한다. 안타키아는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이다. 옛 이름이 ‘하타이(Hatay)’여서 지금도 하타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은 두 군데이다. 하나는 비시디아 안디옥인데, 터키 내륙 지방에 있는 지금의 얄바치(Yalvaç)로, 아피욘카라히사르(Afyonkarahisar)와 콘야(Konya)의 중간쯤에 있다. 다른 하나는 수리디아 안디옥으로 지금의 안타키야이다.

   이곳은 기원전 2,000년경까지 시리아의 아무트 왕국이 통치하였다. 기원전 17세기경에는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았는데, 히타이트가 망한 뒤에는 앗시리아와 페르시아가 다스렸다. 기원전 333년 이 곳에 왔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물맛에 감동하여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무장(武將)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Seleukos I Nikator, B.C. 304~280 재위)가 이곳을 지배하였다. 그는 이곳에 안티오키아 왕국을 건설하고, 안타키아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 안티오코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안티오케이아로 명명하였다. 이곳은 물이 풍부한 다프네(하르비예)에 가깝고, 오론테스(Orontes, 아시) 강을 끼고 있어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소왕국의 난립과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1세기 중반에 로마에 병합되었다. 그 후 시저에 의해 재건되어 상업, 교육, 문화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안디옥은 예수의 수제자로 로마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베드로가 포교(布敎)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바울 사도와 바나바가 와서 생활하고, 선교 여행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A.D 252~300년에 10여 차례의 기독교 공의회가 열렸다. 이곳은 신약성경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고향이다. 요한 사도의 수제자인 폴리갑도 이곳 출신이다. 그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 감독으로 있다가 순교하였다. 카파도키아에서 중세 수도원 운동을 이끌던 시몬 성인도 이곳 출신이다. 이처럼 이곳은 기독교 포교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으로, 기독교에서 예루살렘, 로마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이다.

   오후 1시 40분경에 도심에서 북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교회에 도착하였다. 이 동굴교회는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지(聖地)로 선포된 곳이다.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에는 세계 각지에서 순례단이 찾아와 미사가 행해진다고 한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는 기독교 발달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라 생각되어 꼭 가보려고 하였던 곳이어서 이곳에 도착하니, 좀 긴장되기도 하고 흥분도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러나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교인들의 박해가 매우 심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던 베드로 사도는 배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그를 따르던 신도 중 일부가 이곳으로 와서 이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 사도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베드로’란 이름은 예수로부터 받은 것인데, 교회의 초석으로 ‘바위’를 뜻하는 말이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바위 안에 세워지고, 그 뒤를 이어 많은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스테반의 순교 이후에 더욱 심해진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 일부 사람들은 페니기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으로 가서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다가 후에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예수를 받아들였다(사도행전 11 : 19).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이곳에 온 바나바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울 사도의 고향 다소(Tarsus)로 가서 바울을 데리고 와 이 교회에서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당시에 예수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을 ‘크리스쳔(Christian)’이라 불렀다(사도행전 11 : 22~26). 이렇게 보면,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다. 그리고 이 교회의 신도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진 사람들이다.

   나는 조금 긴장되고 흥분된 마음으로 교회를 살폈다. 교회는 하비브 낫자르산 기슭의 큰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 안에 있었다. 교회 안은 100㎡ 쯤 되어 보이는 직사각형의 방인데, 전면의 중앙에는 돌로 쌓은 단이 있고, 그 가운데에 돌로 된 제단이 있다. 제단 앞의 벽 위쪽에는 천국의 열쇠와 두루마리 성서를 든 베드로 사도의 상이 있다. 제단 오른 쪽에는 병을 낫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하는 약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성수(聖水)라고 한다. 제단 왼쪽에는 도피처로 사용하였던 터널이 있다. 지금 있는 석조 제단은 12~13세기의 것이고, 모자이크 바닥은 4~5세기 것이라고 한다. 나는 교회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성수를 한 모금 마시면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건한 생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 때 서양 사람으로 보이는 남녀 30여 명이 들어와 둘러서자 안내자가 이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설명이 끝나자 일행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무어라고 하니, 모두 손을 잡고 찬송을 하였다. 찬송이 끝나자 그 사람이 대표로 기도하였다. 일행 모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는데,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진지하고 경건하였다. 기도가 끝난 뒤에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이탈리아에서 성지순례를 왔다고 하였다.

   동굴교회에서 나와 왼쪽 산 능선을 따라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우뚝우뚝 솟은 큰 바위가 여럿 있다. 거기에 베드로와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데, 크게 파손되어 있어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 위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저승의 강’의 사공인 ‘키론의 상(像)’이라고 한다. 이 상(像)은 기원전 2세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코스 4세 때에 역병(疫病)을 가라앉히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훼손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었다. 키론의 상 옆에 자연동굴이 하나 있는데, 전에 교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곳을 보니, 카파도키아에 있는 지하 동굴교회가 떠올랐다.

   다시 성 베드로 동굴교회 앞으로 온 나는 교회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세운 세계 최초의 교회, ‘크리스쳔’이라는 말이 처음 생긴 교회를 와 보았다는 감격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기념품 가게로 가서 3리라(한화 2,300원 정도)를 주고 성 베드로 동굴교회 사진을 넣고 구워 만든 도자기판 하나를 샀다. 손바닥 반 정토 크기의 이 도자기는 장식용으로 장식장에 넣어 두든지, 서진(書鎭, 책장이나 종이쪽이 바람에 날리지 아니하도록 눌러두는 물건)으로 쓰면서 이곳에 왔던 일을 오래오래 기억해야겠다.  <성동문단 제11호(성동문인협회, 20011>에도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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