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월에 정년(定年)을 맞아 44년 간 근무하던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초․중등학교 교사로 14년, 대학 교수로 30년을 근무한 교단을 떠나게 되니 여러 가지 감회가 떠오른다. 그동안 많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나누었는데, 이제 떠나야 한다니 참으로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이 든다. 44년 근무하는 동안 나와 학연을 맺은 사람이 아주 많은데, 이들 중 나를 참 스승으로 생각한다는 많이 있다. 이것을 보며 나는 참으로 제자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고, 자랑스럽다. 

   제자들 중 몇몇이 나의 정년을 아쉬워하면서도, 축하하고 기념하려는 뜻에서 정년 기념 문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제자, 동료, 친구, 선배, 스승, 친족 등에게 나와의 관계나 교유(交遊)한 내용을 중심으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에 따라 93명이 글을 써 주었는데, 이를 <푸른 향기 길게 드리우니>라는 책으로 묶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최근에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한 것도 있고, 아주 오래 전의 일을 소재로 한 것도 있다. 나와 생활하면서 기쁘고 즐거웠던 일을 적기도 하고, 섭섭하고 아쉬웠던 일을 적기도 하였다. 그 중에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도 있지만, 까맣게 잊어버린 내용도 들어 있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90여 명의 마음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의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이었다. 원만한 보습이 보이는가 하면 모난 모습도 보였다. 다른 사람에게 기쁘고 보람을 느끼게 한 모습이 있는가 하면, 마음을 아프게 한 나쁜 모습도 보였다. 그 중에는 다른 사람을 섭섭하게 하거나 마음 아프게 하여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일도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하면서 용서를 빈다.

   아내는 ‘돈을 꿔서 승용차를 산 이야기’를 썼다. 혼인한 뒤에 야간대학과 대학원 학생 노릇을 7년이나 하고, 시간 강사 노릇을 하다가 전임 교수가 된 이듬해에 돈을 꿔 오라고 하여 승용차를 사겠다는 가장(家長)의 처신을 보면서 아내는 정말 난감하였을 것이다. 철없는 사람, 셈속 모르는 책상물림이라고 서운해 하면서 한탄하였을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단돈 1만원도 꾸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내가 돈을 꿀 데가 없다고 거절하였으면 나는 승용차를 살 수 없었을 터인데, 긴 토를 달지 않고 내 말을 따라준 아내가 고맙다. 이렇게 하여 구입한 승용차는 설화와 민속 자료 수집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내는 집안일과 아이들 교육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나를 보면서 ‘한 지붕 밑에서 숨 쉬고 있는 것으로 안도하였다.’고 하였다. 이 말은 참으로 미움과 한숨을 거친 뒤에 정리한 사려(思慮) 깊은 말이다. 부족함이 많은 남편의 모습을 보여 부끄러울 뿐이다. 

  아들과 딸의 글을 보니 내가 강조하며 실천하던 음식 골고루 먹기, 아침 체조, 일기 검사, 규칙 지키기 등이 무척 힘들고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서운 아빠, 인정머리 없는 아빠라면서 원망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장성한 뒤에 생각해 보니, 아빠가 강조하던 것들이 건강 증진, 편식 안 하기, 바르고 예쁜 글씨 쓰기, 기초적인 문장력 훈련에 크게 도움이 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귀찮고, 힘들고, 원망스러웠던 일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는 삼남매가 고맙고 자랑스럽다.

  여동생은 <오빠의 눈>이란 제목으로 내가 엄격하고 무섭게 대하던 일, 까다로운 규칙을 정해 놓고 지키라고 하던 일을 적었다. 오빠가 무섭고, 섭섭하고, 힘들었다고 하면서도 아버지 노릇을 겸한 오빠의 역할을 하느라고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존경한다고 하니, 고맙기 그지없다.

   처남과 처제는 내가 자기들에게 본을 보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는 아내가 처가에 가서 내 험담이나 불평․불만을 말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의 좋은 면만을 기억해 주는 처남․처제와 나의 나쁜 점을 친정에 가서 말하지 않은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제자들의 글에 나타난 내 모습은 다양하다. 나한테 논문 지도를 받은 사람은 논문 지도의 철저함과 엄격함을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나는 논문 초고에 붉은 색 펜으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수정하도록 지시하는 글을 써서 주고, 만나서 일일이 설명하면서 수정하게 하곤 하였다. 제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빗대어 ‘피바다를 건너야 논문이 통과된다.’는 말이 퍼졌고, 이 말은 여러해 동안 선후배간에 대물림을 하였다고 한다. 피바다를 거친 사람들은 내가 지도하느라고 써준 초고를 ‘가보(家寶)’로 삼겠다고 하면서, 자기들도 제자들의 작문이나 논문을 지도할 때 귀감(龜鑑)으로 삼겠다고 한다. 논문 지도 과정에서 깊은 생각 없이 던진 내 말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혀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긍정적인 면만을 말하며 좋게 말해 주니 정말 고맙다. 논문 지도 과정에서 섭섭한 말을 들었던 사람은 속히 잊고 상처가 아물기를 바란다.

  나는 강의 시간이나 학생들과 대화하는 중에 어휘 사용과 발음 등 언어 습관에 관해 많은 말을 하였다. 나는 내 전공이 아니면서도 현장 상황에서 직접 지도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는 생각에서 바로 지적하곤 하였다. 지적 받은 사람은 무안해 하였고,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마워하면서 고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니, 정말 고맙다.

  나는 제자들의 학교생활이나 일상생활에 관한 것을 많이 지적하였다, 그런데 지적을 받은 제자들이 고맙게 여기고 습관화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한다. 나는 강의할 때 요지를 잘 정리하여서 쉽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논지(論旨)를 전개하면서 내용 이해에 필요한 예화(例話)를 많이 인용하곤 하였다. 이를 제자들은 잊지 않고 있으며, 본을 받아 교단에서 학생을 지도할 때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제자들 중 현직 교사가 많은 관계로 나를 이해하고, 좋게 평가해 주는 것 같아 고맙기 그지없다.

  나는 교회 장로인데, 신앙생활 면에서 부족함이 많다. 목사님이나 다른 교우들이 기대하는 바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여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목사님이나 동료 장로는 정년퇴임 후에 잘 하라는 말로 감싸면서 격려해 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나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칭찬․격려․축하․감사의 말 속에 담긴 부족한 나의 모습을 보았고, 이해와 용서의 마음을 읽었다. 뒤늦게나마 여러 사람의 마음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된 것을 감사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적해 준 나의 부족한 모습, 모난 모습, 불성실한 모습 들을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몇 년 후, 오늘 이후에 만난 사람들이 나에 관한 글을 쓴다면, 나에 대한 이해, 용서의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칭찬과 격려․축하․축복의 말을 적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일 것이다. 

  * 이 글은 <청하문학> 제7호, 서울 : 문예운동사, 2008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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