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하순에 아내와 함께 고향인 홍성에 갔다.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강의와 출판사와 약속한 원고 집필 때문에 바빠서 벼르기만 하고 가지 못하다가 겨우 시간을 내어 갔다. 먼저 부모님 산소에 성묘를 하고, 누님 댁과 외종형 댁을 방문한 뒤에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친구와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에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잘 가꿔 놓은 정원의 나무와 꽃들을 둘러보았다. 마당가와 마당과 이어진 야트막한 언덕에는 여러 가지 과일나무와 정원수, 꽃들이 자라고 있는데, 주인 내외의 성품처럼 정갈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많은 나무와 꽃 중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마당가에 활짝 피어 있는 능소화(凌霄花)였다. 능소화는 마당가에 세워놓은 사람 키 정도의 통나무를 이리저리 감으며 타고 올라간 줄기의 마디마디에서 뻗어 나온 꽃대에 다닥다닥 붙어 피어 있었다. 나팔꽃과 비슷한 깔때기 모양의 주황색 통꽃이 100여 송이 피어 있는데, 아주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꽃이 하도 예뻐 만져보려고 손을 대니, ‘내 몸에는 어느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다.’는 듯이 톡 떨어져 버렸다. 그 밑을 보니, 시들지 않고 싱싱한 꽃들이 수없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능소화를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으나,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에 고등학교 선배님 댁 바깥 정원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능소화의 예쁜 모습에 마음이 끌려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 보관하기도 하고, 꽃말과 전설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능소화가 아주 좋아졌다. 내가 친구에게 능소화를 언제 심었는가 물으니, 10여 년 전에 아는 사람의 집에 피어 있는 능소화가 예뻐서 뿌리를 조금 얻어다가 심은 것이 이렇게 자랐다고 하였다. 나는 친구와 함께 능소화의 특성, 꽃말과 전설 등을 이야기하였다. 

   능소화는 쌍떡잎 통꽃식물목 능소화과에 속하는 낙엽성 덩굴나무인데, 높이는 10m정도이며, 잎은 깃모양 겹잎이다. 여름에 깔때기 모양의 주황색 꽃이 피고, 열매는 네모진 삭과(蒴果, 익으면 과피(果皮)가 말라 쪼개지면서 씨를 퍼뜨리는, 여러 개의 씨방으로 된 열매)로 가을에 익는다. ‘금등화(金藤花)’, ‘자위(紫葳)’, ‘능소화나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 분포하는데, 옆에서 보면  트럼펫을 닮아서 외국에서는 ‘Chinese trumpet creeper’라고 부르기도 한다.

   능소화는 바람이 불면 마치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너울너울 흔들거린다. 옛사람들도 이 꽃을 예사로 보지 않고 무척 사랑했던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여 년 전에 널리 전해 오는 시를 모은, 동양 최초의 시집인 <시경(詩經)> 속에도 능소화 그림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원수로 길렀는데, 양반집 마당에만 심었고, 상민의 집에서는 심지 않았다. 이 꽃을 상민의 집에서 심으면 양반들한테 불려가 벌을 받았다. 그래서 ‘양반꽃’이라고도 한다. 

   능소화는 분위기가 동양적이라 사찰꽃(절꽃)이라고도 한다. 꽃가루에 독이 있어 유독식물로 알려져 있으며, 꽃속에 생기는 꿀이 눈에 들어가면 실명(失明)한다는 말이 전해 오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내한성(耐寒性)이 약하여 중부 이북보다는 중남부 지방의 건조하지 않은 양지바른 곳에 잘 자라며, 해안 지방에 주로 서식한다. 공해에도 강하고, 뱀의 근접을 막아준다고 하여 별장 및 개인주택 조경에 많이 심는다. 

   꽃에는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꽃말’이 전해 온다. 장미는 사랑․아름다움, 백합은 순결, 월계수는 영광, 클로버는 행운을 나타낸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이다. 이것은 능소화에서 느껴지는 화려함과 기개, 싱싱한 채 떨어져 시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존심 등을 감안하여 붙인 꽃말이라 하겠다. 화려함과 기개를 느끼게 하는 능소화에는 슬픈 전설들이 전해 온다. 하나는 임금을 기다리다 죽은 궁녀의 넋이 능소화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소화’라는 궁녀가 임금의 눈에 띄어 성은(聖恩)을 입고, 빈(嬪)에 봉해졌다. 그녀는 궁궐 안에 마련된 처소에서 지내면서 임금님이 다시 찾아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녀는 매일 담장 밑을 서성이기도 하고, 담장너머를 바라보며 임금을 기다렸다. 그러나 임금은 그녀의 처소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림에 지쳐서 병이 들어 죽었다. 시녀들은 ‘나는 담장 밑에 묻혀 임금이 오기를 기다리겠다.’는 그녀의 뜻을 따라 시신을 궁궐 담 밑에 묻어 주었다. 이듬해 여름에 그녀의 무덤에서 풀이 자라 꽃이 피었는데, 담장을 휘어 감고 밖을 내다보는 듯하였다. 그래서 이 꽃 이름을 ‘능소화’라고 하였다 한다.

  위 이야기에서 능소화는 임금님의 방문을 간절히 기다리다 죽은 궁녀 소화의 넋이 변하여 핀 꽃인데, 담장에 피어 임금이 오는가를 살피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이 꽃에는 오직 한 분이신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간절한 소원과 기대가 담겨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기생 능소화가 죽어 이 꽃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어느 고을에 덕망 있는 벼슬아치가 일찍 아내를 여의고 딸과 함께 살았다. 그는 상대편 당파의 세력에 밀려 급히 몸을 피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딸과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젊은 선비를 데리고 급히 몸을 피하다가 갈림길에 이르렀다. 그는 젊은이와 딸의 손을 모아잡고, 부부의 인연을 맺을 것을 서약하게 한 뒤에 젊은이를 다른 길로 가게 하였다. 그는 딸과 함께 이리저리 떠돌던 중에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딸은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돈을 받아다가 약을 썼으나, 아버지는 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그녀는 기녀(妓女)가 되었는데, 인물이 예쁘고, 글을 잘하며 가야금에 능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많은 남성들이 유혹하였지만, 정절을 지켰다. 한 선비가 그녀의 청초한 모습을 보고, ‘차가운 기운이 서린 꽃’이란 뜻으로 ‘얼음 릉(凌)’ 자, ‘하늘 기운 소(霄)’ 자를 써서 ‘능소화’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몇 년 후 능소화의 아버지가 속했던 당파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젊은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고, 능소화가 기생 노릇을 하고 있는 고을 원으로 오게 되었다. 능소화의 소문을 들은 원님이 그녀를 찾아가는데, 귀에 익은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 원님이 능소화를 만나보니, 자기와 정혼한 여인이었다. 능소화가 겪은 일을 들은 원님은 지난 일을 다 잊고, 부부의 연을 이어가자고 하였다. 그녀는 서방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기꺼이 따르겠다면서, 며칠간의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원님은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 날에 능소화를 찾아갔다. 그녀는 준비해 두었던 비상(砒霜)을 먹고 죽어가면서, “자신을 정갈하게 지키지 못한 제가 어찌 서방님과 혼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간의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는 마음만으로도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후 그 여인의 무덤에서 덩굴진 줄기가 솟아났고, 퍼져가는 줄기 끝마다 주황빛 꽃들이 피어났다. 품위와 기개가 느껴지고, 활짝 피었는가 싶으면 이내 지고 마는 그 꽃을 사람들은 ‘능소화’라고 불렀다.

   당파 싸움이 한창이던 때를 배경으로 꾸며진 이 이야기에는 한 여인의 지고(至高)한 사랑과 기품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는 살았을 때에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 소원과 관련이 있는 식물이나 동물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많이 전해 온다. 그 중 꽃과 관련된 이야기를 ‘꽃유래담’ 또는 ‘꽃전설’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국인의 환생(還生)에 관한 의식을 바탕으로 꾸며진 것이다.
 
   능소화는 개화 기간이 80일 정도 이어지는데, 색상이 화려하고 기품이 있으며, 젊고 생기가 있다. 많은 꽃들이 다투어 피는 따뜻한 봄을 다 보내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灼熱)할 때에야 자태를 뽐내는데, 아름다움과 도도함이 있다. 손을 대면 떨어지고 말아 마음에 맞지 않는 누구의 손길도 허락하지 않는 절개가 있다. 시들지 않고 떨어져 지는 순간까지도 활짝 피었을 때의 싱싱함을 유지하다가 그 모습 그대로 땅에 떨어져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 자존심이 있다. 통나무나 담장을 타고 올라가 밖을 살피는 조심성이 있다. 능소화의 이러한 특성이 어디서 유래되었는가는 위의 전설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능소화를 보고 있노라면, 옛날 선비와 같이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품위와 한번 뜻을 세우면 어떠한 시련이 와도 굽히지 않는 기개가 느껴진다. 많은 남성의 유혹이 있어도 임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정절을 지키는 명기(名妓)의 결연함을 생각하게 한다. 능소화 전설은 이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해 준다.

    얼마 전에 아는 분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분은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아는 분들의 면회를 일체 사양하였다고 한다. 아는 분들에게 쇠잔(衰殘)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건강할 때 만났던 모습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내가 능소화를 보면서 그 분을 떠올린 것은 그 분이 떠날 때의 마음이 시들기 전에 지는 능소화의 본성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친구에게 그 분의 이야기를 하면서 능소화처럼 품위와 기개를 지니고 살다가 홀연히 떠났으면 좋겠다고 하니, 그 친구 역시 동감이라고 하였다. 나이가 더 들더라도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면서 남에게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훌쩍 떠났으면 좋겠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나 보다.

* 이 글은 <충청문학> 19, 서울 : 충청문인협회, 2008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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