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교일산우회 남부모임 회원 7명은 서울시 동작구 현충로 210에 자리한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이날 현충원을 찾은 것은 순국선열(殉國先烈)과 호국영령(護國英靈)이 영면(永眠)해 계신 국립현충원에 참배(參拜)하면서 이 분들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뜻을 기리고, 묘역 전체를 한 바퀴 돌면 산행(山行)의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아주 오래 전에 다녀온 후 최근에는 가지 못하였으므로 조금 죄송스런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현충원 정문 안 종합민원실 뒤편의 쉼터에서 만난 우리는 계레얼마당을 지나 현충문 앞으로 갔다. 우리는 현충문 왼쪽에 있는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과 오른쪽에 있는 육탄 10용사비를 살펴보았다. 그 옆에 있는 호국종(護國鐘)을 살펴본 뒤에 장병묘역(將兵墓域)으로 갔다. 장병묘역에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숨진 많은 장병들의 계급과 이름이 적힌 비석이 가지런히 서 있었다. 1번 묘역을 지나 2번 묘역에 가니, 장병들의 비석 앞에 채명신 장군의 묘비가 보였다.

 

   채명신 장군은 516군사정변에 가담하였으나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군으로 돌아가 군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던 중 19658월부터 38개월 간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근무하면서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부하 장교와 병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유별하여 많은 장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채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의 10월유신에 반대하였으므로, 대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하였다. 그 뒤에 스페인그리스브라질 대사를 지냈다. 채 장군은 장군묘역에 묻힐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급은 다르지만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했던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장병 묘역에 안장되었다. 채 장군은 살아서는 전쟁영웅, 죽어서는 참군인으로 추앙받는 분이다. 우리는 채명신 장군의 묘비 앞에 일렬로 서서 거수경례로 추모의 뜻을 표하였다.

 

   우리는 경찰충혼탑, 임정묘역(臨政墓域), 대한독립군무명용사 위령탑(慰靈塔)을 지나 장군묘역을 둘러보고, 맨 위쪽에 자리 잡은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171114일 경북 선산에서 출생했다. 1963년 대한민국 5대 대통령에 취임해 연이어 9대 대통령까지 역임하는 동안 수차례에 걸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산업입국(産業立國)을 다졌다. 그리고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한 새마을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여 가난을 극복하고, ‘하면 된다는 국민적 자신감을 일깨웠다. 그래서 우리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여 대한민국 선진화의 기반을 구축했다. 또 오늘날 우리 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율곡계획을 집념 있게 추진하여 국방력 증강 및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791026일 서거하여 113일 국장(國葬)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봉분 옆에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봉분이 있었다. 19251129일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이 된 후 각종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앞장섰다. 1974815일 광복절 기념식 중 북한의 사주(使嗾)를 받은 괴한의 저격(狙擊)으로 서거(逝去)하여 819일 국민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나라를 위한 공로는 인정하지 않고 독재자로만 보는 시각이 만연(蔓延)해 있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우리는 내려오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192416일 전남 신안 하의도에서 출생하여 1961년 민의원,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7813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세 번의 대통령 선거 패배를 딛고 1997년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어 1998225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오랜 기간의 정치적 역경(逆境)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이 땅에 정착시킨다는 일념으로 헌신했다. 취임 후 1997년부터 시작된 외환위기(外換危機)의 극복을 위해 금융기업공공노동 4대 분야 개혁을 단행하고, 정보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국민기초생활보장과 자율적 문화정책을 통해 우리나라를 복지, 문화국가가 되게 했다. 20006월에는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켰으며, 그해 12월에는 민주주의, 인권, 평화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9818일 서거하여 823일 국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나는 김 대통령 묘소에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김 대통령이 많은 실적을 남겼지만, 도를 넘은 햇볕정책으로 우리 사회에 많은 부작용을 남겨 놓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우리는 김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묘소에 참배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875326일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서재필 박사와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사상을 전파하고, 민족계몽에 앞장섰다. 19193·1운동 이후에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 외교활동을 펼치던 중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1948년 제헌국회의장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 대통령은 해방 직후의 혼돈(混沌)을 극복하고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졌다. 6·25전쟁의 국난을 극복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반공 포로를 석방하였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미동맹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4·19민주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下野)한 뒤 하와이에서 생활하다 1965719일 서거하였다. 같은 해 7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대통령은 국립묘지에 최초로 안장된 국가원수(國家元首)이다. 이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는 이 대통령과 합장되었다. 190061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한 프란체스카 여사는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나 1934108일 뉴욕시에서 결혼하고, 1948년 영부인이 되었다. 1992319일 이화장에서 향년(享年) 93세로 서거하여 323일 가족장으로 이곳에 합장되었다. 이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이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과 국가의 기틀을 다진 공()은 속으로 묻히고, 독재자로만 매도(罵倒)되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나는 이어지는 장병 묘역을 지나 정문 쪽으로 내려오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였다. 하나는 우리 모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지녔던 애국 충정(忠情)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에 계신 세 분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고 있다. 세 분 대통령은 재직 시에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다. 잘한 일만을 확대하여 잘못한 일을 덮으려는 것도, 잘못한 일만을 확대하여 잘한 일을 폄훼(貶毁)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 생각한다. ()은 공대로 인정하고 치하하면서 과()는 과대로 지적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나는 터키에 있을 때 전 국민이 아타튀르크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추앙(推仰)하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부러워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온 국민이 추앙하는 대통령이 속히 나오기를 바라는데, 이 마음이 지나친 사치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201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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