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경에 있는 대학의 초빙교수로 와서 북경 생활을 시작할 때의 일이다. 학교안의 작은 아파트에 가방을 풀고 나니, 학술대회에 참가하거나 관광을 왔을 때와는 달리 모든 문제를 안내자 없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걱정이 앞섰다. 큰 문제는 학과 교수나 조교에게 말하여 해결한다지만, 작은 문제는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낯설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하다 못해 막막하였다. 그렇다고 방안에만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아내와 함께 용기를 내어 바깥출입을 시작하였다. 먼저 학교 안을 거닐어 숙소의 위치를 확인한 뒤에 교문 밖으로 나가서 학교 둘레의 지리를 익혔다. 그 다음에는 이곳 교수님들이 알려준 대로 가까운 공원, 쇼핑센터를 걸어서 갔다 오기도 하고,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사먹기도 하였다. 좀 먼 곳을 갈 때에도 처음에는 택시를 타고 다녔으나, 뒤에는 지도를 보고 대강의 방향을 살핀 뒤에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다. 이렇게 생활하는 동안 나는 문화의 차이를 느꼈다. 

  거리에 나가서 제일 먼저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자전거의 행렬이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보다는 덜하지만, 차도 양편의 자전거 전용도로에는 자전거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자전거를 탄 사람이 자전거 전용도로를 가득 메우며 달렸다. 자전거 행렬을 보고 있으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큰 힘이 느껴졌다. 그 힘은 내게로 밀려와 작은 충격과 전율을 안겨 주었다. 저 힘이 바로 중국을 움직이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서민들은 자전거를 유용한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지금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전거를 집에 두고 승용차나 버스를 이용한다면, 교통 혼잡으로 시내는 마비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전거는 대도시의 교통 혼잡을 덜어주는 데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기름진 음식을 먹는 데도 비만으로 보기 흉한 사람이 적은 것은 녹차를 많이 마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전거를 많이 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도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자전거 도로를 많이 만들어 출퇴근 때에 이용하게 함으로써 교통의 혼잡을 덜고, 유류를 절약하며, 대기 오염을 막고, 운동량을 늘려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게 하였으면 좋겠다.
 
   좁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또는 넓지 않은 인도를 걸을 때 나는 습관적으로 왼편으로 걷거나 비켜서곤 하였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 역시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거나 비켜섰다. 그래서 길싸움을 하느라고 서로 길을 막아서는 사람처럼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닌 적이 몇 번 있다. 그 때마다 나는 속으로 “여기 사람들은 왜 좌측통행을 하지 않지? 일본 사람들은 잘 하던데.”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곳은 ‘우측통행’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 때 나와 마주쳤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우측통행’도 모르는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옷차림이 매우 검박(儉朴)하다. 9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거리에서 넥타이를 맨 남자,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를 만난 적이 그리 많지 않다. 강의를 하는 교수들 역시 편한 복장이고, 대학생들의 옷차림 역시 수수하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의 깔끔하면서도 다양한 옷차림과 차이가 있다. 2년 전 9월에 일본 후쿠오카에 갔을 때 더운 날씨인데도 정장을 한 사람, 양복의 윗저고리는 입지 않았더라도 와이셔츠 차림에 넥타이를 맨 사람이 많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은 겉으로 꾸미기보다는 내실을, 형식이나 명분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중국 사람들의 의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양력 10월 1일은 국경절인데, 국경절 휴일이 며칠이냐고 물으니, 3일 또는 5일, 또는 7일로 대답이 각각 달랐다. 대학의 경우 7일을 쉬는 대학도 있고, 9일을 쉬는 대학도 있었다. 내가 있는 학교를 보니, 10월 1일부터 7일까지 쉬고, 토요일과 일요일인 8일과 9일에 강의를 하였다. 휴일이 닷새인데, 이틀을 앞당겨 7일을 연이어 쉬었기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에 강의를 하는 것이라 하였다. 7일까지 쉰 은행이 8일과 9일에 영업을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국경절이나 춘절(음력 설)에 쉬는 기간은 단위 기관마다 실정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용하여 연휴를 만들어 쉬고 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중국인들의 실용적인 사고의 표현이라 하겠다.
학교 안에서 대학생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기숙사에서 강의실로, 식당으로 옮겨갈 때에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으며 담소하는 것, 이성의 친구와 손을 잡거나 허리를 껴안고 다니는 것은 한국 학생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한적한 그늘 밑의 벤치에 앉아 있는 학생들의 모습은 아주 달랐다. 이른 아침, 낮, 오후를 가릴 것 없이 한국 학생들처럼 몇 사람씩 모여 앉아 담소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개는 혼자, 또는 두세 명이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 책을 읽거나 무엇을 쓰고, 영어 회화 연습을 한다. 식당이나 샤워장 앞에 줄을 서 있는 경우에도 앞뒤 사람과 담소하지 않고 각자 무엇을 읽거나 외우고 있다. 한국 학생들이 친구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여서, 또는 공부한다고 티내지 않으려고 시험 시간 직전이 아니면 남이 보는 데서 무엇을 읽거나 외우지 않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중국에서 한국에 유학 온 대학원생이 한국과 중국의 대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칼로 두부 자르기식’과 ‘스폰지식’이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한국 학생은 실컷 놀다가도 시험 때가 되거나 과제를 할 때에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밤을 새워 공부한다. 그러나 중국 학생은 조각나는 시간까지 활용하면서 꾸준히 공부한다고 한다. 대학생들의 공부하는 태도로 어떤 것이 좋을까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곳에서는 자동차도, 사람도 교통 신호를 엄수하기보다는 눈치껏 움직이는 것 같다. 길을 건너려고 신호를 기다리고 서 있으면, 보행자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는데도 사람들이 건너간다.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려 건너가려고 하면, 우회전하는 차가 길을 건너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 유턴하는 차와 좌회전하는 차가 밀고 오기도 하고, 자전거가 달려오기도 한다. 그래서 길을 건너려면 겁부터 났다. 차들도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 눈치를 보며 진행한다. 운전자나 보행자 모두 기 싸움에서 이기지 않으면 자기가 가려는 방향으로 갈 수 없는 것 같다.   

   이곳에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동차가 경적을 울려댄다. 앞서가는 자동차나 사람에게 경고의 뜻으로 울리는 경우에도 필요 이상으로 자주, 길게 울린다. 앞의 버스가 손님을 내리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 차가 움직일 때까지 경적을 울린다. 주택가나 학교 안에서도 걷다가 경음기 소리 때문에 깜짝 놀라는 일이 많다. 숙소 안에서도 경음기 소리에 짜증이 나기 일쑤이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 앞에 육교가 있는데, 얼마 전에 육교의 바닥면을 뜯어내고 다시 입히는 공사를 하였다. 공사가 끝난 다음날에 그 육교를 올라가며 보니, 육교 바닥이 광고판이나 되는 듯이 명함 크기의 광고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글자가 작아 허리를 굽히고 자세히 보거나 앉아서 살펴보기 전에는 광고 내용을 볼 수 없는 데도 새로 만든 육교 바닥에 셀 수 없이 많은 광고 스티커를 붙이는 것은 정말 광고의 효과가 있기 때문일까?

  버스 정류장에 가면 아치 모양의 표지판이 있다. 표지판의 위쪽에는 그 정류장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노선표가 붙어 있어서 이용하기 편리하게 해 놓았다. 그런데, 정류장 이름을 적어놓은 곳에는 대부분 광고지가 붙어 있어서 그 정류장의 이름을 볼 수 없다. 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그게 필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처럼 중국말이 서툴러 물을 수도 없고, 차장들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도 없어서 버스 노선표에 적힌 정류장 이름을 적어가지고 다니면서 길을 익히고, 내릴 곳을 판단해야 하는 사람이나, 길이 선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정류장 이름이 광고지로 덮여 있거나 떨어져 버렸으니, 시설을 해 놓은 취지가 무색해졌다.

   버스 안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 귀가 따가울 만큼 큰 소리로 휴대전화를 받는 사람,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는 사람, 길가다 가래침을 뱉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이런 것은 모두 남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 음식은 기름기가 적고 담백하면서도 맛이 있으며 위생적이라 하여 점점 인기가 높아가고 있다고 한다. 북경 시내에는 한국 요리 전문식당이 많이 있다. 내가 간 식당은 하나같이 손님들이 많아 식사 시간에는 자리 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름 있는 한국 식당에 처음 가서 불고기를 먹을 때의 일이다. 값이 싸고 맛도 좋았는데, 식후에 계산서를 보니, 불고기 1인분 값은 18위앤인데, 젓가락과 물수건 값이 2위앤, 숯불 값이 6위앤, 상추를 추가로 시킨 것이 6위앤이었다. 차나 생수 값을 따로 받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크게 이상하지 않았으나, 밥을 먹는데 필요한 젓가락, 불고기를 굽는데 필요한 불 값을 따로 받는 것은 아주 생소하였다. 한국에서 불고기를 먹을 때 불 값이나 추가로 시킨 김치나 상추의 값을 따로 받지 않는 습관에 젖은 나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동안 나는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충격을 여러 번 받았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응하느냐를 놓고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던 중 30여 년 전에 판소리 감상회에 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박동진 명창이 무대에 나와 허두가를 불렀는데, 관객들이 모두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이를 본 박 명창은 마이크를 빼어 들고서, “아니, 요 잡것들 요렇게 가만히 자빠져 있으려면 뭐 하러 왔당가? 집에서 낮잠이나 자지. 내가 소리를 하면 ‘얼씨구!’, ‘잘한다!’ 하고 추임새를 해야 신명이 나지.” 하면서 관객들을 놀린 뒤에 추임새 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관객들이 추임새를 하자, 박 명창은 신명이 났다. 그래서 그 날 소리판은 소리꾼과 관객이 한 덩어리가 되어 아주 흥겨워졌다. 우리는 서양 음악 연주회에 가서는 정숙하게 앉아 있어야 하고, 판소리 감상회에 가서는 추임새을 해야 한다. 서양 음악 감상회에 가서 ‘얼씨구’ 하고 추임새를 하였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고, 판소리 감상회에 가서 얌전하게 앉았다가는 ‘잡것’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중국의 문화를 한국의 문화의 잣대로 평가하여 이를 폄하하거나 추켜올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것은 판소리 감상회에 간 서양 음악가가 “한국의 음악 청중은 듣는 태도가 나쁘다.”고 불평하였다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나는 이곳 문화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제 이곳에서 생활한 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났다. 이제 이곳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하여 이곳 사람들처럼 큰 두려움 없이 길을 건넌다. 그리고 음식점에 가서도 물 값, 불 값, 젓가락 값을 따로 청구하여도 그러려니 하고 돈을 낸다. 복식으로 된 아파트 복도가 컴컴하여 앞이 안 보이면, 발을 굴러서 소리로 감지하는 전등의 센서를 작동시켜 전등을 켜고 드나드는 일에도 익숙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나도 모르게 이곳 문화에 적응되고 있는 것이리라.

  <수필문학 통권 184호, 서울 : 수필문학사, 2006. 4. 1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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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북경의 중앙민족대학 객원교수로 와서 북경 생활을 시작한 지 18일이 되던 날이다. 점심 식사 후에 향산(香山)에 가려고 아내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향산은 북경 서북의 하이디앤취(海澱區) 서산 기슭에 위치한 삼림공원인데, 북경 중심부에서 약 20km 떨어져 있다. 북경에 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내가 향산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공부한 중국어 교재에 향산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중앙민족대학 정문 건너편에서 904번 시내버스를 타고 서툰 발음으로 두 사람이 ‘시양산’에 간다고 하니, ‘쓰 콰이(3元)’를 내라고 하였다. 버스를 타고 1시간 쯤 가니, 향산이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사람들을 따라가니, 벌써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10원의 입장료를 내고 북문으로 들어서서 사방을 살펴보니, 숲이 우거진 큰 산이 보였다. 넓은 평지만 보이던 북경 시내에 이런 산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울창한 숲이 있는 높은 산이었다. 산기슭에는 작은 호수가 푸른 숲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산 중턱에는 절이 있고, 탑이 보였다. 이곳 사람들의 휴일인 토요일 오후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왔지만, 워낙 산이 넓고 길이 많아 혼잡하지는 않았다.
 
  길을 걷다 보니, 케이블카 타는 곳 표지판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지났다. 산을 걸어 오르기에는 늦은 시간이어서 케이블카를 타려고 승강장으로 갔다. 케이블카 이용 요금은 평일에는 30원이고, 국경절과 공휴일에는 40원인데, ‘단행(單行)’이라고 쓰여 있었다. 주 5일제 근무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나라에서 살아온 나는 토요일이 휴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60원을 냈더니,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 매표원이 80원이라고 하였다. 그제서야 이곳은 토요일도 휴일임을 생각하고 20원을 더 내고 표를 샀다.

   케이블카는 가는 방향으로 두 사람씩 앉게 되어 있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천천히 올라가는 케이블카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발 아래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고, 산의 남쪽에는 사원인 듯한 큰 건물과 탑이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높이 오를수록 산은 험하였고, 뒤편으로는 산줄기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발밑에는 등산로가 보이는데, 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더위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웃옷을 벗어들고 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가는 19분 동안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둘러보며, 중국 산동에 있는 태산에 갔을 때와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에 갔을 때에 이와 비슷한 케이블카를 탔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조금 올라가니, 산 정상이었다. 거기에는 ‘향로봉(香爐峰) 해발 557m’라는 표석이 서 있었다. 산 정상에는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그 형상이 솥과 같고, 운무(雲霧)가 바위 주위를 감돌 때에는 마치 향로가 자색 연기를 내뿜는 듯하다고 한다. 그래서 산봉우리를 향로봉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곳을 ‘귀지앤초우(鬼見愁)’라고도 하는데, 그 까닭은 산이 높아 귀신이 보아도 근심한다는 뜻이라 한다. 

   향로봉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북경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건물들과 도로, 녹지대 등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게 보였다. 길을 따라 달리는 차들이 열을 지어 움직이는 개미떼의 움직임처럼 보였다. 뒤편을 보니, 첩첩히 싸인 산의 능선들이 겹겹으로 이어져 있었다. 산허리에 감긴 구름 뒤로 또 이어지는 산, 그 뒤에 아득히 보이는 먼 산. 그 동안 중국의 산수화에서 흔히 보던 아름다운 풍경이 실제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보니, 정말 장엄하고도 아름다웠다. 옛사람들이 일찍부터 향산에 맑은 구름이 떠 있는 모습을 ‘서산청운(西山晴雲)’이라고 찬탄하며 연경(燕京, 북경의 옛이름) 팔경(八景)의 하나로 꼽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러 산줄기에는 산행할 수 있는 넓은 길이 나 있고, 봉우리에는 정자가 서 있다. 나는 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을 보면서 아침 일찍 산에 올라 능선에 난 길을 따라 이쪽 봉우리의 정자에 앉아 쉬다가 싫증이 나면 다시 저편 봉우리에 있는 정자로 옮겨가 쉬고, 또 그 다음 정자로 옮겨가 쉬면서 며칠을 지내면 속세를 떠난 신선과 다름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해보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일었지만, 길도 잘 모르는 데다가 그럴 만한 체력이 없으니 어쩌랴. 신선과 같은 생활도 의욕이 왕성하고, 그를 뒷받침할 만한 체력이 있을 때라야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향로봉 표석 앞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나는 한참을 기다려 사진을 찍고 조금 조용한 곳으로 가서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고 쉬었다. 아내는 산 아래에서 사 가지고 온 군고구마를 먹으며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더니, 나에게도 먹어보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에 군고구마를 즐기지 않았지만, 아내가 하도 맛있다고 하기에 받아 먹어보니 질척하면서도 달콤한 것이 정말 맛있었다. 군고구마 장수가 ‘티앤(甛. 달다)’이라고 하면서 봉지에 넣어주던 자신만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향산에서 먹은 군고구마의 맛은 오래오래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케이블카가 운행 마감을 하면 어쩌느냐면서 서둘러 승강장으로 와서 케이블카를 탔다. 올라올 때와 반대 방향으로 앉아 올라갈 때 보지 못한 산의 이모저모를 내려다보니, 정말 좋았다. 보행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내리는 사람을 유심히 보니, 중국 사람도 있지만, 외국인이 많이 눈에 띠었다.
내려오는 케이블카를 타는 승강장에는 ‘표를 사지 않은 손님은 그대로 타고 내려가서 표를 사면 된다.’고 써 있었다. 우리는 그 말의 해석을, 걸어서 올라간 사람이 내려올 때 케이블카를 타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올라올 때 표를 샀으니, 그 표를 보이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내려서 보니, 다시 40원짜리 표를 사서 보여주어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온 뒤에야 ‘단행(單行)’이란 말의 뜻을 바로 알았다. 그러고 보니, 케이블카 탑승 요금은 1인당 왕복 80원이다. 이것은 중국 물가로는 꽤 비싼 요금이다. 이런 요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외국인 관광객이나 주머니 사정이 좋은 중국 사람일 것이다. 케이블카 시설을 해 놓고, 외국 관광객이나 형편이 좋은 내국인들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주면서 주머니를 열게 하는 것은 관광 수입 면에서도 큰 보탬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내가 짧은 시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케이블카의 덕이었다. 나는 케이블카가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관광객과 체력에 자신이 없는 관광객에게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게 해 주고,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여 관광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음을 실감하였다. 나는 케이블카를 타고 중국 산동의 태산을 오를 때와 이탈리아 카프리 섬을 올라갈 때에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이런 경험을 하면서 한국에서 북한산을 비롯한 풍광이 좋은 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것은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반대하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케이블카를 설치하고서도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케이블카 승강장 동편으로 와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안에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향산은 여행사의 관광 상품의 일정에는 들어 있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북경 관광 여행을 한 사람들로부터 향산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런 곳을 와 본 것이 참으로 기쁘고,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향산은 10월 중순에서 11월 초 사이에 단풍이 아름답다고 한다. 우리는 단풍이 아름다울 때, 휴일을 피하여 다시 와서 단풍 구경도 하고, 북경 식물원도 구경하자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였다. 향산의 명물이라는 대추를 한 봉지 사서 들고.

        <문예운동 제89호, 서울 : 문예운동사, 2006. 3. 1.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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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틈이 나면 아내와 함께 아파트 가까이에 있는 대현산에 올라갔다 오곤 한다. 이 산은 우리 집에서 한 시간이면 갔다 올 수 있는 곳으로, 높고 큰 산은 아니지만, 운동 부족인 나에게 운동 공간을 제공해 주고, 아내와 대화할 시간을 마련해 준다. 또, 온갖 나무들과 꽃이 있어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 준다. 봄에는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과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하고, 새들이 분주히 날며 지저귀어 교외로 나가지 않고도 봄의 정취를 맛보게 해 준다. 여름이면 소나무, 은행나무, 팽나무, 단풍나무, 아카시아 등이 해를 가리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가을이면 곱게 물든 단풍나무와 은행나무 잎이 밝은 햇살아래 자태를 뽐낸다. 눈이 내린 날 산에 오르면, 눈꽃이 핀 나무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새로 조성한 넓고 시원스런 대현산 공원이나 응봉산보다 이 산을 즐겨 찾곤 한다.

   우리는 이 산에 아침에 간 적도 있고, 대낮이나 해질 무렵에 간 적도 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몇 곳의 배드민턴장에서 배드민턴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젊은 사람도 있고,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는 부부가 함께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부부가 함께 와서 배드민턴을 하는 사람은 최소한 먹고 입는 일에 궁색한 사람, 뜻하는 일이 잘 안 되어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 일에 쫓기어 시간을 낼 수 없는 사람,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 게으른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고, 공기 맑은 산자락에 와서 땀을 흘리며 운동하니 더욱 건강해 질 것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면 그에 따른 성과도 좋아질 것이요, 가정도 화목해 질 것이니, 더욱 행복해 질 것이다. 

   나의 둘레에는 탁구를 하는 사람, 테니스를 하는 사람, 배드민턴을 하는 사람, 골프를 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나에게 적어도 한 가지 운동을 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나이 들기 전에 논문 한 편이라도 더 쓰고, 저서 한 권이라도 더 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뒤로 미루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나이를 먹고 말았다. 이곳으로 이사 온 뒤에는 거리가 멀어진 데다가 더 바빠졌고, 많이 걸으면 무릎이 아프곤 하여 북한산에 가는 일이 시들해졌다. 대현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 것 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나의 운동 부족을 걱정하던 아내가 함께 탁구를 하자고 하였다. 이 제안을 받은 것이 2002년 봄이었는데, 그 해는 작은 아들을 장가보내는 일, 회갑 전까지 내겠다고 벼르던 저서의 집필,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추진하는 회갑기념 논문집 두 권에 실을 논문 두 편을 쓰는 일, 95세가 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는 일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일은 염두에 둘 수 없었다. 

   2003년 1월에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는 어머니를 여읜 허전함, 그 동안 쌓인 피로와 체력 소모 때문이었는지 기침을 하고, 만성 피로와 함께 무력감에 빠졌다.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받고, 약을 먹어 기침은 멎었으나, 만성 피로와 무력감은 낫지 않았다. 전부터 다니던 한의원을 찾아가니, 한의사는 내게 보약을 먹은 뒤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일주일에 두세 번씩 땀이 날 정도의 운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나 역시 그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아내의 권유대로 탁구를 하기로 하였다.

 
   2003년 2월에 나는 아내와 함께 탁구장에 갔다. 젊었을 때 탁구를 좀 하기는 하였으나, 기본자세를 익힌 적도 없고, 흥미 위주의 마구잡이식 경기를 한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나의 탁구 실력은 형편없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치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나보다 실력이 좋은 아내가 상대하여 주며 격려해 주는 바람에 용기를 내어 탁구대 앞에 서서 치기 시작하였다. 

   며칠 뒤에 나는 아내의 권유대로 정식으로 회원 등록을 하고, 하루에 20분씩 지도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사용하던 쉐이크핸드 라켓을 라운드형으로 바꾸고 기본자세부터 새로 익혔다. 지도를 맡은 분은 80년대에 국가대표 선수를 지낸 여선생인데, 기본자세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코치한테 렛슨을 받기 전과 후에는 아내와 연습을 하였다. 일주일에 두 번을 가겠다고 하였지만, 한 번밖에 못가는 때도 있었고, 아예 못가는 주도 있었다. 나와 아내의 건강 형편 때문에 몇 달씩 거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정이 허락되는 대로 탁구장에 가서 열심히 연습하였다. 그렇게 2년을 지내고 보니, 기본자세도 어느 정도 몸에 익었고, 상대방의 자세에 따른 공의 움직임과 방향을 조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내와 아주 재미있게 게임을 하기도 하고, 가끔씩 교회에 가서 교인들과 게임을 하기도 한다. 


    아내는 35년 동안 교사로 있다가 1998년에 명예퇴직을 하고, 바로 탁구를 시작하였다. 운동 부족을 자각하고 있던 아내는 퇴직 직전부터 수영을 시작하였는데, 수영장 물의 소독약 때문인지 눈병이 생기곤 하여 그만두고, 구민체육관 탁구 교실에 등록하여 탁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일주일에 세 번씩 체육관에 가서 잠깐씩 렛슨을 받고, 회원들과 연습하기를 5년 가까이 하였다. 늦게 배운 탓에 실력이 죽죽 늘지는 않았지만, 공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다. 내가 탁구를 시작한 지 1년쯤 되었을 무렵에 나는 아내에게 게임을 하자고 하였다. 젊었을 때 내가 이기곤 하였으므로, 게임을 하면 크게 지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여서 몇 점을 접어주어야 게임이 되는 형편이었다. 정식으로 배우면서 연습한 연조는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절실히 느꼈다. 

   내가 탁구를 시작한 지 2년이 된 지금은 아내와 게임을 하면, 막상막하(莫上莫下)의 열전을 벌일 때도 있다. 이기면 기뻐하고, 지면 약이 올라 더 하자고 조르기도 한다. 이기고 지는 것은 그날의 건강 상태와 관련이 있어 건강 상태가 좋은 날은 이기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몇 게임을 더 하여도 지고 만다. 게임을 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고, 피로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면, 피로가 풀리고 온 몸이 가벼워진다.

   탁구는 과격하지 않으면서 운동량이 많다. 적당히 숨이 차고, 땀이 흐르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아내는 골밀도가 낮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무척 걱정을 하였는데, 탁구를 시작한 뒤에 골밀도가 높아져서 정상이 되었다고 하여 아주 기뻐하고 있다. 탁구는 좁은 공간을 차지하는 실내운동이므로, 테니스나 골프처럼 날씨의 제약 없이 할 수 있고, 경비가 많이 들지도 않아서 좋다. 탁구를 부부가 함께 하니, 함께 즐길 수 있어서 좋고, 다른 한 쪽을 기다리며 불평할 일이 없어 좋다. 운동 후에는 함께 외식을 하거나, 음료수를 마시며 대화할 수 있어서 좋다. 또 본인은 물론 상대방의 건강 상태를 알 수 있어서 좋다. 우리 부부는 뒤늦게나마 탁구를 시작한 것을 참으로 다행으로 여기며, 탁월한 선택을 하였다고 자부한다. 둘레 사람들도 보기에 좋다면서 부러워한다.

  나는 틈이 나는 대로 아내와 함께 대현산을 찾고, 탁구를 하며 건강을 지켜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몇 주 전부터 아내가 허리의 통증 때문에 탁구는 물론, 대현산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내가 속히 완쾌되어 함께 탁구도 하고, 대현산도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열심히 아내의 수발을 들고 있다.       
     
  <수필문학 > 통권 제172호, 2005년 3월호에 수록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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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강의실에서의 일이다. 강의실 앞쪽은 몇 가지 시청각 기자재가 자리잡고 있어서 수강생 60명이 모두 들어오면 통로가 없을 정도로 비좁은 방인데, 수강생 중 몇 명이 교육실습을 나간 관계로 강의실 앞쪽과 뒷쪽에 빈 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한 여학생이 강의용 의자를 강의실 뒷벽에 붙이고 뒷문 쪽에 앉아 있는데, 늦게 들어오는 학생이 뒷문을 여니 문이 의자에 걸려 다 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딪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본 나는 큰 소리로 '뒷문 앞에 앉은 학생은 출입에 방해가 되니, 옮겨 앉아요.' 하고 말한 뒤에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출석 부르는 동안에도 몇 학생이 문 부딪는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출석을 다 부른 뒤에 그 여학생을 보니, 여전히 그 자리에 않아 있었다.

   나는 그 여학생의 태도를 의아해 하면서, "출입에 방해가 되니 옮겨 앉으라는데 왜 그대로 앉아 있는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하고 말한 뒤에, 전체 학생을 향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강조하는 말을 하였다. 그러느라고 몇 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여학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학생이 출입에 방해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담당 교수가 옮겨 앉으라고 세 번씩이나 말을 하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성을 높여 옮겨 앉으라고 세 번을 말하였는데도 옮겨 앉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면서 옆 자리로 옮겨 앉고, 의자를 안쪽으로 당겨 놓으라고 하자, 그제서야 옆의 책상으로 옮겨 앉았다.

   나는 그 학생이 옮겨 앉는 것을 보면서, 어째서 저런 행동을 할까? 요즈음 학생들은 형제자매가 하나 또는 둘인 집에서, 부모님이 자기만을 위해 주는 분위기에서 자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기르지 못한 데다가 남의 말을 간섭으로 생각하고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때문이 아닐까? 요즈음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공주병과 왕자병 중증 환자라고 하니, 그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기대하는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나는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강의를 진행하였다.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에 온 뒤에는 다른 일을 하느라고 조금 전의 일을 잊고 있었는데, 그 여학생이 찾아와 강의실에서의 일을 사과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뒤에 앉은 까닭이 실은 남을 위한 배려였다고 하였다.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진심을 말하는 그 여학생을 보면서,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학생'이라고 꾸짖은 나 역시 학생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하다고 사과하였다. 이어서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생활할 것을 당부하자, 그 학생은 가벼운 표정으로 연구실을 나갔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나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 관하여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이나 자기만이 옳다는 독선적인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얌체 같은 짓을 하지 않음은 물론, 질서를 잘 지키며,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또, 남을 골탕먹이고,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많은 사회는 질서가 잘 지켜지는 밝고 명랑한 사회가 될 것이 아닌가?     
 
   승용차를 운전하다 보면, 과속으로 달리기, 급히 차로 바꾸기, 불법으로 끼어들기 등 교통 법규를 어기는 차량들이 많다. 또, 혼잡한 교차로에서 서로 먼저 가려고 찻머리를 들이미는 바람에 차들이 뒤엉켜 혼잡을 가속시키는 경우가 많다. 주차장에 가 보면, 옆 차선에 걸쳐서 세운 차가 있어 뒤에 오는 차량 역시 옆 차선에 걸쳐 세우게 되어 결국은 한 대 또는 두 대를 세울 수 없게 하는 경우가 있다. 또, 진출로에 차를 세워 다른 차량의 통행에 불편을 주는 경우도 있다. 운전자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조금만 유의하면, 교통 질서·주차 질서가 확립되어 좀더 나은 환경에서 운전하고 주차할 수 있을 터인데, 나만을 생각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많은 불편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몇 년 전에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일본 사람들이 인도를 걷는 것을 보니, 여러 사람이 걸을 때에는 반드시 종대(縱隊)로 걸었다. 그래서 뒷사람이 앞질러 가거나 반대편으로 가는 사람이 통행하는 데에 불편을 느끼지 않게 하였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지닌 남을 배려하는 예절이기도 하고, 좁은 인도를 효율적으로 통행하는 지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건물의 복도나 좁은 인도를 걸을 때 횡대(橫隊)로 걷는다. 그래서 뒷사람이 앞질러 갈 수도 없고,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이 비켜가기도 불편하다. 통행 방법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일본 문화는 '종대 문화'이고, 한국 문화는 '횡대 문화'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남을 배려하도록 가르치고 훈련을 하였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생긴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어려서부터, 생활을 통하여 기르도록 해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은 세수수건을 쓸 때에도 다른 식구를 배려하여 한쪽 자락만 쓰라고 하였고, 상위에 놓은 생선을 먹을 때에도 다른 사람을 생각해 한쪽 부위만 먹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복도를 지나다닐 때에는 좌측 통행을 하고, 줄을 서서 다니라고 가르치고 훈련을 하였다. 그런데 요즈음 어른들은 자녀들에게 이런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자기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가르친다. 그래서 왕자병과 공주병에 걸린 아이들을 길러내고 있다. 이렇게 자란 어린이는 어른이 된 뒤에도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는 질서를 무시하는 행동을 쉽게 하게 되고, 심할 때에는 범죄 행위도 서슴지 않게 된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가정에서 부모가 가르침은 물론이고, 유치원·초·중·고교에서 교육과정에 넣어서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 그래서 남의 처지나 형편을 헤아려 행동하는 사람,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은 사회는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 질서가 잘 지켜지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런 사회가 구현(具現)되기를 기대한다.   

                <조선문학 통권 152(서울 : 조선문학사, 2004. 1)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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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27일부터 29일까지 북측 금강산 해금강 호텔에서 열린 전국 국·공립대학 교수협의회 제3차 임시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북쪽에 가서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을 둘러보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관광버스를 타고 강원도 고성군 간성에 있는 금강산콘도로 가서 '현대금강산' 직원들에게 신분증을 보이고 금강산 관광증을 받은 뒤에 다시 버스를 타고 통일전망대 아래에 있는 출입국 검사소로 가서 소지품 검사를 받고, 신분증과 관광증을 제시하여 확인 받으면서 출국 신고를 하였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현대금강산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나온 사람은 국·공립대학 교수협의회 회원 80명을 비롯하여 600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19개 조로 나누어 버스에 타고 3시 50분에 출발하였다. 

   남쪽 통문(通門)을 지나 금강산 임시도로를 천천히 달려 북쪽으로 가면서 보니, 왼쪽에는 군인들이 금강산으로 통하는 고속화도로 공사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강원도 양양과 함경남도 안변을 잇는 동해북부선 철로 기반공사를 하고 있었다. 비포장 도로를 달려 조금 가니 군사분계선임을 나타내는 녹슨 팻말이 외롭게 서 있었다. 그 팻말을 지나 북으로 달리면서 '지금은 50년 동안 넘지 못하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가는 역사적 순간이구나!', '지척(咫尺)인 이 곳을 왕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우리는 북측 통문을 통과하여 북으로 달렸다. 비포장 도로이다 보니, 천천히 달리건만 앞차가 일으킨 흙먼지 때문에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장전항 가까이 오니, 현대에서 건설하였다는 포장도로가 나왔고, 조금 더 가서 작은 고개를 넘으니 장전항이 보였다. 항구의 왼편에는 온갖 모양의 바위들이 멋스럽게 솟아 있는 산이 있는데, 불쑥 튀어나온 넓고 큰 바위에 붉은 글씨로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이라고 쓰여 있었다. 글자의 크기가 가로 1m, 세로 1.5m나 되는 데다가 바위의 모양이나 위치가 시선을 끌기 좋은 곳이어서 항구로 가는 동안은 물론, 항구에 도착한 뒤에도 잘 보였다. 바위에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은 이곳 외에도 여러 곳에 있었는데, 하나같이 크고 잘 생긴 바위에 큰 글씨로 썼기 때문에 멀리서도 잘 보였다. 한국에서 그런 일을 하였다면 자연을 훼손하였다고 지탄받을 일인데, 이곳 사람들은 이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오후 5시에 장전항의 넓은 마당에 도착한 우리는 북측 출입국관리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휴대품을 검사 받고, 관광증에 도장을 받았다. 활에 화살을 장전한 것과 같다고 하여 장전항이라고도 하고, 고성항이라고도 한다는 항구를 바라보니, 삼면으로 산들이 큰 원을 그리며 둘러싸고 있고, 한쪽만 바다로 열려 있는데, 거기에 방파제를 쌓았으므로 잔잔한 호수처럼 보였다. 천혜(天惠)의 항구라고 하는 말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넓은 마당 끝에 '호텔 해금강'이라고 쓴 6층 건물이 있는데, 자세히 보니 밑바닥이 편평한 배 위에 지은 건물이었다.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 보니, 방이 깨끗하고 아담하였다.

   숙소에 짐을 두고 나온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8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온정각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해금강 호텔로 돌아와 전국 국·공립대학 교수협의회 총회를 하였다. 오후 8시에 시작한 총회는 활동 상황 보고, 협의 안건 처리, 연구 주제 발표 등으로 10시 30분까지 진행되었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차고 진지하게 진행하였다.     

   둘째 날(9월 28일)은 구룡연(九龍淵)을 가는 날이다. 아침 6시경에 잠이 깨었는데,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에 올라 구룡폭포의 장관(壯觀)과 함께 <나무꾼과 선녀> 전설이 깃들어 있는 팔선담(八仙潭)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좀 흥분이 되었다. 아침 6시 50분경에 해금강호텔 1층 식당에서 한식 뷔페로 아침 식사를 한 후 버스를 타고 온정각으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다시 버스를 타고 구룡연 산행길에 올랐다. 버스는 오른쪽에 있는, 한 마리의 매가 앉은 모습의 응암(鷹岩, 일명 매바위산)과 왼쪽의 너럭바위 위에 집채 같은 달걀 모양의 바위가 놓여 있는 난봉(蘭峰, 일명 달걀바위산)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하였다. 미인송 또는 홍송이라고 부르는 줄기가 약간 붉은 빛을 띤 미끈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선 '술기넘이 고개'를 넘으며 약 6km의 산길을 달린 뒤에 주차장에 닿았다.

   등산로를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니 신계천(神溪川) 맑은 물위에 '기역 자(ㄱ)' 모양으로 놓은 목란다리가 있고, 그 다리를 건너자마자 북측에서 운영하는 식당 '목란관'이 있었다. 목란관을 지나 울창한 나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며 주위를 보니, 오른쪽에는 맑고 깨끗한 계곡 물이 즐겁고 기쁜 듯이 큰 소리를 내며 흐르다가 쪽빛 못[潭]을 이루고 있고, 집채 같은 바위들과 좌우로 늠름한 봉우리들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산굽이를 돌아 오르니, 회상다리가 나왔다. 다시 200m 정도를 오르니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거기서 위쪽을 보니 아름답고 황홀한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을 예로부터 '앙지대(仰止臺)'라고 하였는데, 현재 북한에서는 '회상대(回想臺)'라고 부른다고 한다. 거기서 '거북선 바위'를 보고, 다시 한 구비를 돌아 오르니 '개구리 바위'가 보인다. 또 한 구비를 돌아 오르니, 산삼과 녹용이 녹아 내린다는 '삼록수(三鹿水)'가 흐르고 있었다.

  삼록수를 마시고 만경다리를 건너서 세존봉을 바라보니, 산 중턱에 맨머리로 앉아 있는 사람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옥황상제 바위'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에 하늘의 옥황상제가 금강산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금강산으로 내려와 이곳 저곳 경치를 보다가 세존봉 아래에 왔다. 상제는 구룡연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을 보고 더위를 식히기 위해 목욕을 하였다. 그 때 금강산 산신령이 와서 '사람들이 먹는 신령한 물에서 목욕을 하여 물을 더럽혔으니 천벌을 받아야 한다.'고 꾸짖으며 상제의 관을 가져갔다. 관을 빼앗긴 상제는 다시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맨머리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옥황상제 바위'를 다시 보며, 이런 이야기를 꾸며낸 선인들의 문학적 상상력이 뛰어났음과 금강산 절경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하였음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만경교를 건너 금강문을 빠져 나가니, 왼쪽에 긴 성처럼 생긴 '성벽 바위'가 있는데, 머리는 토끼 같고, 몸통은 거북 같은 '토끼 바위(일명 거북 바위)'가 성벽 바위로 기어오르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달에서 약방아를 찧던 토끼가 금강산의 절경을 보러 왔다가 경치에 취해 돌아갈 시각을 지키지 못하여서 벌을 받아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담겨 있는 바위이다. 

   한 굽이를 꺾어들어 금문교와 백석담을 지나자, 앞이 확 트이면서 '옥류동(玉流洞)'의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이 되어 흘러내린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갓 피어난 연꽃이 하늘로 향한 듯한 천화대(天華臺)와 그 뒤에 둘러서 있는 옥녀봉의 모습이 아름답고, 계곡에는 숫돌처럼 닦이고 닦인 너럭바위가 반원을 그리며 휘어져 내리고, 그 위를 구슬 같은 물살이 흰 비단을 편듯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 넓고 길쭉한 옥류담(玉流潭)이 쪽빛 수정을 녹여 편듯 맑은 물을 담고 있었다. 옥류담의 물 깊이는 5∼6m이고, 넒이는 약 600㎡인데, 금강산의 소(沼)중 가장 큰 소(沼)라고 한다. 그 앞에 '돛대 바위'가 우뚝 서 있었는데, 지금은 홍수에 넘어져 누워  있었다.

   옥류동 물길을 따라 왼쪽 모롱이를 도니, 쌍둥이 소(沼)가 맑고 고운 물을 담고 있었다. 이곳이 '연주담'인데, 아래에 있는 소가 위에 있는 소보다 커 보였다. 연주담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니, 휴식처가 나왔다. 거기 서서 건너편을 보니, 하늘에 닿은 듯한 산봉우리가 있는데, '세존봉'이라고 한다. 세존봉 중턱에서 아래로 뻗은 바위벽을 타고 흰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곳이 구룡폭포, 십이폭포, 옥영폭포와 함께 금강산 4대 폭포로 꼽히는 '비봉폭포(飛鳳瀑布)'인데, 수직 높이가 139m이고, 폭포 길이가 166m라고 한다. 세존봉에서 샘솟아 기화요초(琪花瑤草)를 씻어내리며 벼랑을 따라 내려가기도 하고, 절벽이 안으로 오므라드는 데를 만나면 갈래갈래 갈라져 실을 드리운 듯하다가 '봉황담'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봉폭포와 직각을 이루는 봉황담 위쪽에 '무봉폭포(舞鳳瀑布)'가 있다. 이 폭포는 길이는 약 20m밖에 되지 않으나, 수량이 풍부하고, '기역 자(ㄱ)' 모양으로 꺾이며 물보라를 뿌리는 모습이 봉황이 춤을 추는 듯하다고 하여 '무봉폭포'라고 하였다 한다.

  무봉폭포 휴식장에서 250m 정도를 굽이돌아 오르면, '무룡교(舞龍橋)'가 나온다. 무룡교를 건너니 서북쪽 옥녀봉 계곡에서 은실과 같이 곱게 흐르는 '은사류(銀絲流)'가 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니, 구슬을 엮어 발을 드리운 듯한, 길이 10m 정도의 '수렴폭포(水簾瀑布)'가 보였다. 거기서 구룡연 쪽을 향해 서서 보니, 마치 수십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처럼 결이 가로로 평평하게 난 돌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다. 이 바위를 예로부터 '책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주렴폭포에서 150m정도 오르니, 갑자기 계곡을 뒤흔드는 굉음(轟音)이 들리고, 그 소리를 뒤쫓아 큰 물줄기가 무서운 속도로 내리쏟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이 구룡폭포이다. 폭포의 위와 아래, 좌와 우 모두가 한 장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졌는데, 쉼 없이 내리쏟는 물이 아래에 큰 확을 파 놓았으니, 그 곳이 '구룡연(九龍淵)'이다. 수직 깊이가 13m나 되는 구룡연에서 솟구친 폭포수는 다시 곡선을 이루며 내달려 아래의 못을 출렁인다. 구룡폭포는 비로봉에서 시작한 물이 굽이 잦은 '구담곡(九潭曲, 일명 아홉소골)'을 지나, '상팔담(上八潭)'을 흐르는 동안 수량이 더욱 늘어 웅대하고 아름다운 폭포가 되었는데, 만물상과 더불어 금강산의 절승(絶勝)으로 꼽힌다. 구룡폭포의 수직 높이는 74m이고, 구룡연까지의 폭포 길이는 84m, 아랫못까지의 폭포 길이는 120m라고 한다. '구룡연'·'구룡폭포'는 아홉 용이 아홉 가지 재주를 부린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데, 벼락치는 듯한 물소리와 소용돌이치는 시퍼런 물의 움직임을 용의 조화라고 생각하였음 직하다.

  폭포 옆 너럭바위에는 불심을 드러낸 '彌勒佛'이란 큰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天丈白練 萬斛眞珠(천 길 흰 비단이 내려 드리운 듯하고, 만 섬 진주알이 쏟아지는 듯하다.)"라는 신라 문장가 최치원(857∼?)의 시 <구룡폭포>가 새겨져 있다. 구룡폭포의 절경(絶境)을 잘 드러낸 이 시구는 최치원의 시적 혜안(慧眼)을 느끼게 하였다.

   관폭정(觀瀑亭, 구룡각이라고도 함)에서 구룡폭포의 장관을 보며 땀을 식힌 나는 다시 조금 내려와 연담교(淵潭橋)를 건너 '구룡대(九龍臺)'로 향하였다. 급경사 쇠사다리[鐵梯] 14개, 370여 계단을 오르느라니, 숨이 차고, 땀이 비오듯 하였다. 약 700m를 걸어올라 해발 약 880m의 구룡대에 이르니, 150여 미터가 되는 낭떠러지 아래에 삼각추(三角錐) 같은 삿갓봉을 휘돌아 흐르는 물줄기가 보였다. 맑고 깨끗한 물은 넓고 큰 바위로 된 물길을 따라 휘돌아 흐르며 못[潭]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흐르고 있었다. 푸르다 못해 쪽빛으로 보이는 못은 여덟 개나 되는데, 지세(地勢)에 따라 몇 미터 또는 몇십 미터 간격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금강산에는 팔담(八潭)이 두 곳이 있는데, 이곳의 팔담을 구룡폭포 위에 있다 하여 상팔담(上八潭)이라 하고, 내금강의 만폭동 구역에 있는 팔담을 내팔담(內八潭)이라고 한다. 

   구룡폭포 위에 솟은 산봉우리와 능선 아래의 깊은 골짜기를 흐르는 물줄기와 팔담은 급경사의 계곡 양편에 솟은 각양각색의 바위들과 조화를 이루어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을 바라보고 있느라니까, 골짜기 아래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마치 신비한 음악인 듯하다. 이곳은 신이 깊은 산속에 비밀스럽게 감추어 놓은 비경(秘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안개와 구름이 감돌아 온갖 조화를 부린다면, 더 더욱 신비감을 줄 터이니, 이곳을 배경으로 <나무꾼과 선녀> 전설이 꾸며져 전해 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상팔담과 둘레의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던 나는 그만 내려가라는 조장의 말을 듣고서야 하산길을 서둘렀다. 내려오다가 목란관에서 맛있게 먹은 평양 냉면의 국물은 산행 뒤에 오는 갈증을 풀어주었다.

  오후에는 삼일포를 둘러본 뒤에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관람하였다. 셋째날인 9월 29일에는 오전에 만물상(萬物相)을 구경하고, 점심을 먹은 뒤에 출입국 수속을 하고 통일전망대로 돌아와 해산하였다.

  전국 국·공립대학교 교수협의회 총회 참석을 위한 2박 3일 간의 여행 중에 각 회원 대학교 교수협의회의 활동 상황을 알 수 있었고, 회원들의 총회에 임하는 진지한 태도와 각자의 학교에서 학교 발전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좋았다. 거기에 육로로 그리던 금강산에 올라 '신이 만든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경관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뜻 있는 일이라 하겠다. 신의 예술품이라고 극찬하는 금강산에 가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우리 둘레에 많이 있다. 내 아내 역시 금강산을 가보고 싶어하는데, 지금까지 갈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어서 속히 남북통일이 되어 우리가 설악산이나 지리산 또는 한라산을 찾아가는 것처럼 금강산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통일이 되기 전이라도 북에 달러로 지불하는 관광비가 너무 비싸다든가, 그 돈이 핵무기 개발이나 군비 확충에 쓰이는 것 같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등의 뒷말이 없도록 하고, 복잡한 절차를 간소화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금강산을 찾을 수 있도록 하였으면 좋겠다. 

    <수필문학 통권 158호(서울 : 수필문학사, 2003. 11), 131~137쪽에 수록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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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4일에 막내아이가 장가를 갔다. 막내가 혼인예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난 뒤에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큰아들 내외와 손녀, 미국에 가서 살고 있는 딸과 외손주가 집에 있어서 잘 몰랐는데, 이들마저 떠나고 나니, 어쩐지 집안이 썰렁하고 허전하였다. 큰아들과 딸은 살림을 난 지가 6∼7년이나 되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늘 함께 지내던 막내가 없으니, 허전할 수밖에 없었다. 막내가 쓰던 방을 들여다보니, 전과 다른 것이 없었고, 4박 5일의 신혼여행을 마치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방문을 닫았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막내아들과 며느리가 집에 오던 날은 큰아들 내외와 손녀까지 와 있어서 집안에 기쁨과 웃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큰아들 내외가 떠나고, 이튿날 막내 내외가 새 보금자리를 찾아 총총히 떠난 뒤에는 집안이 적막하였다.

  며칠 뒤의 어느 날, 내가 학교에 가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니, 막내가 자기 방에 있던 물건을 꺼내어 트럭에 싣고 있었다. 자기가 입던 옷이며 일상용품, 책, 컴퓨터, 장식장 등을 모두 자기의 보금자리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현관 앞에서 잘 가라고 인사한 뒤에 집안으로 들어와 그가 쓰던 방문을 열어보니, 방안이 휑하였다. 서른한 살이 되도록 함께 살던 막내마저 떠났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린 듯하고, 공허한 바람이 휘휘 부는 듯하였다. 감정 면에서 둔한 내가 이럴진대 마음이 여린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하니, 울컥 눈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말없이 그 방 청소를 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충청도 시골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나는 봄에 뒷산에 올라가 나지막한 소나무 포기나 덤불 속에서 산새의 둥지를 찾아내곤 하였다. 둥지에서 꺼낸 산새 알이나 어린 새끼를 집에까지 가지고 왔다가 어른들한테 꾸중을 듣고 다시 가져다 놓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뒤에는 이른봄에 보아둔 산새의 둥지를 가끔씩 찾아보며 산새가 알을 낳아 품는 모습과 새끼를 까서 기르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새끼가 다 자라서 나는 연습을 할 때에는 새끼 새를 잡아보려고 쫓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다 자란 새끼 새가 어디론가 가 버리고, 둥지에 어미 새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둥지에 남아 있는 새가 어미 새가 아니라 새끼 새였는지도 모르지만, 그 때 나는 어미 새라고 생각하면서, '새끼를 떠나보낸 어미 새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생각하며 홀로 안타까워하였다. 그 안타까움은 매우 컸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어린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긴 채 세월의 뒤안길로 잦아들었다. 그 후로 나는 바쁘게 생활하느라고 새끼를 떠나보낸 어미 새의 심정 같은 것은 잊고 살았다. 그런데, 오늘 50여 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나와 내 아내의 지금의 심정이 어릴 때 보았던 새끼를 떠나보낸 어미 새의 심정과 같을 것이라는 연상 작용 때문이다.

  충청도 촌놈인 나는 서울에 와서 직장을 잡고, 1966년에 혼인하여 전세방을 얻어 새 둥지를 틀었다. 부부 교사인 우리는 학교에 근무하는 한편 못다 한 공부를 하면서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아 기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린 새끼를 기르느라 혼신의 노력을 하던 산새처럼 힘들고 고달픈 것도 잊고, 하루하루의 일과에 충실하였다. 우리의 정성과 노력을 아는지 3남매는 무럭무럭 자랐고, 남부럽지 않게 성장하여 우리에게 큰 기쁨과 보람을 안겨 주었다.

  큰아들은 학사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던 1995년에 혼인하여 살림을 났다. 큰아들이 분가하였을 때에도 매우 섭섭하였지만, 그 때만 하여도 내 나이가 지금보다 젊었고,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논문 쓰고 책을 내는 일에 바빴으며, 아직 두 아이가 남았다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큰아들과 며느리를 보면서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은 차츰 수그러들었다.

  그 다음 해에 딸을 시집보내고 나서는 텅 빈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막내아들마저 군에 가 있던 때였으므로 더 그랬던 것 같다. 딸이 쓰던 방문 앞을 지나 서재에 드나들 때에 딸이 쓰던 방에 들어가 남아 있는 딸의 체취를 느껴보기도 하고, 막내가 곧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곤 하였다. 가끔씩 찾아오는 딸과 사위를 대하면서 세월이 흐르니, 섭섭함하고 허전하던 마음도 많이 사그라졌다.

  이제 딸이 시집간 뒤로 6년여를 홀로 남아 함께 살던 막내가 떠나고 보니, 셋 다 자기 둥지를 마련해 떠나보냈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엄습해 오는 섭섭함과 허전함을 주체할 길 없다. 저녁이 되어도 기다릴 사람이 없고, 늦게 왔다고 핀잔할 사람도 없다. 아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놓고 출근을 독촉할 일도 없어졌다. 부모로서 할 일을 다 하였다는 안도감이나 자질구레한 일에서 벗어났다는 해방의 기쁨보다 쓸쓸하고 허전함이 더 큰 것은 무슨 연유일까? 큰아들과 딸을 보냈을 때 섭섭함과 아쉬움을 경험하여 이제는 면역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였는데, 공허감이 더 큰 이유는 무엇일까? 셋 다 떠나보내고 나니, 이제는 자식과도 함께 산다는 기대가 없어졌고, 막내와 함께 산 기간이 위의 두 아이보다 길었으므로 애틋한 정이 더 많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우리 부부가 이제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식물의 일생을 보면, 봄철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 꽃이 지면서 탐스런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은 뒤에는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가 가을 바람에 떨어지고 겨울을 맞는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수없이 보아온 일인데, 근래에 와서 이러한 자연 현상의 오묘함을 새삼 느끼고, 인간의 삶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음을 절실하게 느끼곤 한다. 이 역시 나이가 든 탓이리라.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산새의 삶 역시 그렇다. 다 자란 산새는 어미 품을 떠나 새 둥지를 마련하여 새끼를 치고, 새끼를 길러 다 자란 뒤에는 떠나보낸다. 새끼를 떠나보낸 어미 새는 묵은 둥지를 지키며 힘이 남았을 때에는 다시 알을 낳아 새기를 기르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그 둥지에서 조용히 살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리라. 이 일은 내 고향 뒷산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터인데, 새끼 새를 떠나보내는 어미 새는 새끼 새가 탈없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막내를 떠나보내고 허전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애쓰면서, '현대인은 자식들을 독립시킴과 동시에 부모 스스로가 자식들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고 힘주어 말하던 인구학 전공 동료 교수의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세 아이를 독립시켰으니, 이제는 내가 독립하여야겠다. 이제 떠난 막내를 끝으로 새 둥지를 마련하여 떠난 세 아이는 모두 내가 밟은 길을 다시 밟을 것이고, 그 길은 자기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이니 이를 따르는 것이 순리이리라. 이제 자기 둥지를 마련하여 자기 삶을 시작한 세 아이가 아무 탈없이, 뜻한 바를 이루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하면서, 아내와 함께 묵은 둥지를 지키려 한다.
<수필문학 통권 143호(서울 : 수필문학사, 2002. 7)에 수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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