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수록된 도미 설화가  충남 보령, 경남 진해 등지에서 어떻게 변이되어 전해 오는가를 현지 조사를 통해 고찰한 것으로, 고문화(古文化) 49호(서울 : 한국 대학박물관협회, 1996)에 수록된 논문임. 


 

 

청람어문학 제20호(청원 : 청람어문학회, 1998)에 수록한 논문임.




  서해안 최북단의 섬인 백령도 지역에 전해 오는 '심청전설'을 조사 연구한 논문으로, 한국민속학보 7호(서울 : 한국민속학회, 1996)에 수록되어 있음.

백령도 지역의 '심청전설' 연구





  내가 와 있는 카이세리(Kayceri)는 터키 중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인구 약 100만 명의 상업 도시이다. 지금의 수도인 앙카라에서는 약 300Km, 옛 수도인 이스탄불에서는 약 750km 떨어져 있다. 카이세리시의 남쪽에는 해발 3917m인 터키에서 세 번째로 높은 에르지예스산이 있는데, 산봉우리에는 여름에도 눈이 쌓여 있다. 내가 객원교수로 와 있는 에르지예스대학교(Erciyes University)는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에르지예스대학교는 1978년에 설립되었는데, 현재 18개의 단과대학과 6개의 전문대학, 6개의 직업전문대학이 있고,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이 있다. 전체 학생은 45,000여 명이고, 전체 교직원은 약 5,000명이다. 문과대학에는 한국어문학과를 비롯하여 영어영문학과, 중국어문학과, 러시아어문학과, 일본어문학과, 인도어문학과 등의 외국어문학과가 있다.

  대학 캠퍼스는 에르지예스산의 북쪽 산기슭의 넓은 평원에 자리 잡고 있다. 학교 부지에는 수많은 대학 건물과 종합병원, 초·중·고등학교와 유치원, 그리고 10여 동의 교수 아파트가 있다. 내가 사는 ‘빌름 시테시(과학단지)’는 외국인을 위해 지은 2층 건물 9동이 모여 있는 곳이다. 건물 한 동은 한 층에 세 세대씩 여섯 세대가 살도록 되어 있다. 이런 많은 건물들이 널찍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다. 학교 안에는 나무와 잔디를 잘 가꾼 넓은 녹지대도 있고, 제대로 가꾸지 않아 잡초가 우거진 넓은 빈터도 많이 있다. 평일에는 시내버스가 학교 안으로 난 길을 따라 운행하고 있다. 학교 부지는 아주 넓어서 학교 안을 한 바퀴 돌려면 걸어서 몇 시간을 걸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다니기 좋은 조용한 길을 산책 코스로 정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아내와 함께 1시간 이상 걷는다.

  나와 아내가 산책할 때 마주치는 학생 중에는 미소를 보내며 눈인사를 하거나 목례를 하는 학생이 많다. 어떤 학생은 반갑게 인사를 하며 터키어 또는 영어로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내가 서툰 터키어나 영어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주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한다. 어떤 학생은 자기 할아버지가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었다고 하면서 한국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어떤 학생은 휴대전화나 사진기를 들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한다. 함께 포즈를 취하여 사진을 찍으면 아주 기뻐하면서 고맙다고 인사한다.

  한 번은 학교 안에서 산책하고 있는데, 차도 건너편 길로 오던 중년 남자가 길을 건너와서 터키어로 몽골인이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니, 중국인이냐고 묻는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 ‘비즈 아르카다쉬(우리는 형제)’라고 하면서 악수를 청한다. 악수를 하고 나니, 뭐라고 말을 더 하는데, 내가 “튀륵체 빌미요름(터키어를 모릅니다.)”이라고 하니, 아쉬운듯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카이세리 시내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어떤 사람은 미소하며 목례를 건넨다. 어떤 사람은 터키어 또는 영어로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어김없이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묻는다. ‘귀네 코레(남한)’라고 하면, 아주 오랜 친구를 만난 듯이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좋은 나라에서 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유심히 쳐다보고는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댄다. 그들이 터키어로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우리들이 일본인일 것이라거나 중국인일 것이라고 수군거린다. 이곳 사람들은 한국인을 많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와 외모가 비슷한 일본인 또는 중국인이라 추정하는 것 같다. 길에서 만난 어린아이들도 우리를 유심히 본다. 아이들 눈에도 우리가 이상하게 생긴 모양이다. 이런 일은 시내에 나갈 때마다 자주 겪는데, 우리 부부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한 번은 시내에서 교복차림의 중·고등학교 학생을 만났는데, 터키어와 영어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친근감을 나타냈다. 그리고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관광지로 이름난 카파도키아, 안탈랴에서 만난 청년들 역시 먼저 인사를 청하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부부의 얼굴이 터키 사람들의 사진기에 담긴 것이 여러 번이다. 이들은 이 사진을 꺼내 보면서 우리들의 얼굴이 한국인의 표준 얼굴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이 생각을 하니, 우리 부부의 인물이 더 예쁘고 멋지지 못한 것이 아쉽다.

내가 카이세리에 와서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한국어과의 괵셀 교수, 양민지 교수와 대형 수퍼마켓에 가서 아내가 물건 고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 옆에서 한국말로 “교수님, 안녕하세요?” 하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한국인이라고는 나와 아내, 그리고 함께 온 양 교수 세 사람밖에 없는 카이세리 시내의 슈퍼마켓에서 한국말로 인사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 자세히 보니, 한국어과 4학년 여학생이었다. 여동생과 함께 부모님을 따라 쇼핑하러 왔는데, 중학생인 여동생이 “저기 외국인 있다!” 하고 놀라면서 말하기에 얼른 쳐다보니, 내가 서 있어서 달려와 인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 여학생 동생의 눈에는 내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던 것 같다.

  하루는 우리 과의 괵셀 교수와 함께 갔던 전기기구 파는 가게를 다시 갈 일이 있어서 시내에 갔다. 괵셀 교수한테 대강의 위치를 설명 들었으므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 사람에게 그 상점의 명함을 보이면서 위치를 물었으나 다 모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찾는 일을 포기하려고 하다가 마지막으로 한 젊은이에게 길을 물었다. 그 젊은이는 영어로 설명을 하더니, 자기가 안내할 터이니 따라 오라고 하였다. 그는 자기가 가던 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안내하여 그 가게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지금도 그 청년의 친절을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다.

  터키에는 이름을 알 수 없거나 먹어보지 않은 과일이나 견과류, 로쿰(젤리 같은 단음식), 과자류, 간단한 음식류 등을 많이 판다. 아주 먹음직스러워 사고 싶으나 맛이 어떨지 몰라 선뜻 사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가 진열장 앞에서 망설이고 있으면, 주인이 웃으며 인사를 하고, 얼른 꺼내어 맛을 보라고 한다. 우리가 맛을 보는 동안에 주인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고, 한국인이라고 하면 아주 반가워한다. 맛을 본 뒤에는 사지 않을 수 없어서 아주 시거나 짠 것이 아니면 사곤 하였다. 맛을 보게 하는 것이 상품을 팔기 위한 상술이기도 하겠지만, 터키인이 외국인을 대하는 친절한 마음인 것 같아 흐뭇하였다.

  터키인은 외국인을 좋아하고, 친절하게 대한다. 그 중에서도 한국인을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그것은 터키 민족이 한국 민족과 먼 옛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친하게 지내던 민족이기도 하고, 60여 년 전 한국 전쟁 때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인을 보내 도와준 나라로 형제의 나라, 전쟁의 폐허를 딛고 짧은 기간에 경제를 일으킨 특별한 나라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인연을 중시하는 터키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터키에 오기 전까지 ‘터키는 자연 경관이 빼어난 곳이 많고, 역사 유적과 기독교 성지(聖地)가 많은 나라’라는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앞으로 여행할 나라로 꼽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내가 뜻하지 않게 터키에 와서 1년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나는 대학교수로 30여 년 간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한 뒤에 제자 교수의 권유로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해외 대학에 개설된 한국어문학과에 파견하는 객원교수 초빙 공고를 보았다. 객원교수를 파견할 여러 나라 중 터키가 가장 마음에 들어 응모하였더니, 다행히 선발되었다. 그래서 터키의 중부 지역 카이세리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오게 되었다.

   내가 터키에 간다고 하니, 잘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우 걱정을 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라는 사람도 있었다. 걱정하는 이유는 이슬람 국가에 가서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은근히 겁이 나기도 하였다.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안전을 염려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고등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이슬람교는 ‘한 손에 코란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선택을 강요하며 선교(宣敎)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은 뒤부터 이슬람교는 ‘무서운 종교’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미국의 9․11 테러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자살폭탄 테러의 배후에 이슬람교도가 있다는 뉴스를 여러 번 접하였다. 또, 몇 년 전에는 이슬람교도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가 살해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러한 일로 이슬람교도는 종교가 다른 사람을 해치기도 하는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식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구의 98%가 이슬람교도인 터키에 간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터키를 소개한 책을 읽으면서 터키는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보장한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세 번째로 많은 군인을 파견한 나라,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고 한국인에게 매우 친절한 나라,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며, 한국인과 정서면에서 통하는 점이 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서울에 있는 터기문화원에 가서 젊은 터키인 교사한테 터키어를 배우면서 터키 사람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이슬람 국가에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터키 카이세리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은 한국어문학과 학과장인 터키인 G 교수이다. 나는 G 교수를 비롯한 여러 교수와 학생들을 접하면서 터키에 대하여 조금씩 알게 되었다. 터키는 이슬람교의 수니파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종교의 세속화(世俗化) 운동을 한 나라여서 중동 이슬람 국가의 분위기와는 좀 다르다고 한다. 터키에 와서 보고 들은 것 중에서 다음의 몇 가지 일은 나의 이슬람에 대한 생각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내가 터키에 온 것은 2009년 9월 15일인데, 그 때는 라마단 기간이었다.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은 금식(禁食)하는 달로,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지 않는다. 한 달 동안 금식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몸으로 느끼고,  신앙심을 키우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금식하여 절약한 비용은 가난한 사람에게 직접 주거나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 해가 있는 동안에는 금식을 하고, 해가 진 후 저녁 식사를 할 때에는 가난한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한다. G 교수에게 물으니, 아침 5시 전에 아침을 먹고, 저녁 7시 30분경에 자미나 TV에서 금식 해제 신호가 울리면 그 때서야 저녁을 먹는다고 한다. 무려 14시간 30분 동안을 물도 마시지 않고 견디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울까! 기독교에서도 금식을 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데, 물은 마시면서 한다. 자기의 뜻을 펴기 위해 단식(斷食) 투쟁을 하는 사람도 물은 마시면서 한다. 그런데 이슬람교의 금식 시간에는 물도 마지지 못하게 한다니, 참으로 가혹하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식사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참기 어려워 쩔쩔매곤 하는데,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참을까! 이것은 깊은 신앙심과 인내심을 갖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어린이나 노약자, 임신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도들이 금식에 참여한다고 하니, 이들의 신앙심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터키에서 살면서 이슬람교와 관련된 큰 명절을 두 번 지냈다. 한 번은 금식 기간이 끝난 다음날부터 3일 간 이어지는 ‘라마단 바이람(금식 명절)’이다. 이때에는 가족과 친지가 서로 만나 금식 기간을 잘 넘겼는가, 건강을 해치지는 않았는가를 확인하면서 명절 음식과 함께 단 것을 나누어 먹는다. 그래서 이를 ‘셰케르 바이람(설탕 명절)’이라고도 한다. 또 한 번은 라마단 바이람이 끝난 뒤 두 달쯤 되는 때에 4일 간 쉬는 ‘쿠루반 바이람(희생 명절)’이다. 코란에 보면, 알라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한다. 아브라함은 알라의 뜻에 순종하여 아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죽여 제물로 바치려고 한다. 그의 믿음을 확인한 알라께서는 아들 대신 양으로 제사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구약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같다. 희생 명절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셰케르 바이람을 지내고 한 달 뒤에 성지순례를 떠난 사람은 마호메트(Mahomet)의 탄생지인 메카(Mecca)에서 쿠루반 바이람을 맞이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 집에서 명절을 맞는다. 희생 명절에는 각 가정에서 양이나 소를 잡는다. 가족이 많지 않은 집에서는 양을 잡고, 가족이 많은 집에서는 소를 잡는다. 친척이나 이웃이 뜻을 모아 소를 잡기도 한다. 그래서 희생명절에는 온 나라에서 수많은 양과 소가 제물로 목숨을 잃는다. 각 가정에는 메카를 향하여 절하고 기도하는 곳이 있는데, 대개 벽에 코란의 구절을 써 붙인다. 양이나 소를 잡을 준비가 되면 가족 모두 또는 가족 대표가 그 자리에서 또는 집안의 기도처로 가서 기도하고, 양이나 소를 잡는다. 양이나 소를 잡은 후에 다시 예배를 드린다. 잡은 양이나 소의 고기 중 3분의 1은 가족, 3분의 1은 친척 몫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불우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 불우한 사람은 희생명절에 양을 잡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기 둘레에 양을 잡지 못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구호 단체나 기관에 의뢰하여 고기를 나누어 준다고 한다. 셰케르 바이람과 쿠루반 바이람에는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만나서 명절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객지에서 살던 사람은 거의 다 고향을 찾는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교통의 혼잡이 극심하고, 교통사고도 많이 난다. 한국의 설과 추석에 귀성객으로 교통의 혼잡을 이루는 것과 다름없는 현상이다. 
  
   이슬람교도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한다. 해 뜰 무렵, 정오, 오후 4시 경, 해질 무렵, 잠자기 전에 기도를 한다. 마을마다 있는 자미(이슬람사원)에서는 기도 시간을 알리는 방송을 한다. 이를 ‘에잔(ezan)’이라고 하는데, ‘알라는 위대하시다. 모두 자미에 나와서 기도합시다.’는 뜻의 말을 길게 뽑아서 방송한다. 기독교에서 종을 울리는 것과 대조를 보인다. 에잔이 울리면 자기가 있는 곳에서 기도를 한다. 금요일 낮에는 신도들이 자미에 가서 함께 기도한다. 이슬람교인들의 기도 내용은 한국의 기독교인이나 불교 신자들이 기도하는 내용과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이들 역시 서원(誓願) 기도를 한다. 내가 만난 초등학교 교사 한 분은 10년 전에 자가용 승용차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차를 사게 되면 자동차 값의 3분의 1을 이웃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서원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동차를 산 뒤에 약속한 대로 차 값의 3분의 1을 ‘불우한 어린이를 위한 기금’으로 기부하였다고 한다. 쿠루반 바이람에 잡은 소나 양의 고기 3분의 1을 불우한 이웃에게 나눠 주는 것이나 소원을 빌면서 불우한 이웃을 돕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이행하는 것을 보면서, 이슬람교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슬람 교리는 이자를 받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남에게 돈을 빌려 줄 때에 이자를 받지 않는다. 은행에 돈을 맡길 때에도 이자를 받지 않는 예금에 가입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슬람교인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음식점은 물론, 규모가 큰 슈퍼마켓에서도 술을 팔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식을 하여도 술을 마시지 않고, 차나 다른 음료수를 마신다. 한국 사람들처럼 저녁식사 자리에서 반주를 하고, 1차나 2차를 가는 일은 없다. 그래서 시내의 상점이나 식당들도 비교적 이른 시간에 문을 닫으며, 밤늦도록 흥청거리는 일이 없다. 이곳이라고 하여 술이 아예 없고, 모두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술을 파는 슈퍼마켓이나 술집이 따로 있어서 그곳에 가야만 술을 사거나 마실 수 있다. 술집에 가지 않는 사람은 자기 집에서 술을 마신다.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한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돼지를 기르지도 않으므로 이곳에서는 돼지를 볼 수 없다. 한국어 연수나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갔던 학생들 중에는 기숙사에서 주는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돼지고기가 들어 있는 것을 알고는 먹을 수 없어서 밥과 김치만 먹은 날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는 학생에게 한국에서 파는 라면에는 돼지고기 성분이 들어있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그런 줄 알았으면 먹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곳 사람들 중에는 한국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파는 한국 라면은 돼지고기 성분을 빼고 만들은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살인을 금하고, 자살도 죄악시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자살 폭탄 테러(terror)를 하여 많은 사람을 해치는 것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테러 집단이 이슬람교도로 알려진 것은 그들이 이슬람교의 교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서 이슬람교를 빙자(憑藉)한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 학생들은 신앙심이 깊은 학생도 있고, 좀 약한 학생도 있는데, 대체적으로 순박하고, 친절하다. 한국어과 학생들은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다. 카이세리 시내에서 만난 시민들은 아주 친절하고 우호적이다. 내가 아내와 함께 시내에 나가면, 이상하게 보이는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들을 유심히 쳐다본다. 어린이들은 ‘헬로우’ 하고 부르기도 하고, 고등학교 학생들은 짧은 영어로 말을 걸기도 한다. 어른들은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르카다쉬(친구)’라고 하면서 악수를 청한다. 견과류나 빵과 과자 종류를 파는 가게에서는 맛이 어떨지 몰라 선뜻 사지 못하는 우리에게 맛을 보라고 권하고, 열심히 좋은 점을 설명한다.

  터키에서 1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에 이곳에 오기 전에 가졌던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은 없어졌다. 이슬람교도의 독실한 신앙심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이슬람교에 대해 그릇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았다. 이슬람교도 중에 테러 분자가 많다고 알고 있었던 것은 무장 테러 단체들이 이슬람교를 빙자한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종교는 교리(敎理)에 따라 추구하는 지향 가치가 있다. 그것은 교리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지만, 포괄적으로 말하면 ‘선(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선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니, 선교할 때에도 다른 사람의 종교를 인정해 주고, 자기 종교의 좋은 점을 자랑하면서 자기 종교를 믿도록 유도하는 것이 올바른 선교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또, 종교를 정치적 목적이나 주의(主義)․주장(主張)을 실현하는 도구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다른 종교에 대한 비방(誹謗)이나 배척(排斥)도 없어질 것이고, 다른 종교를 그릇되게 인식하거나 편견(偏見)을 갖게 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이 글은 <<성동문학 10>>, 성동문인협회, 2010에 실린 것임.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12월이 되면 여러 가지 감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머나먼 땅 터키에서 연말을 보내는 금년에는 그 감회가 좀 유별나다.

  나는 터키 카이세리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 한국어과에 객원교수로 와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12시간을 날아 이스탄불에 도착한 뒤에 다시 국내선으로 바꿔 타고 1시간 30분을 날아야 올 수 있는 이곳 대학에 한국어문학과가 개설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나는 이 대학에 객원교수로 와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하게 된 것에 보람을 느낀다. 우리와 얼굴 모습이 전혀 다른 이곳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면 아주 대견스럽다. 그들이 서툰 한국말로 ‘한국은 크게 발전한 나라입니다’, ‘한국을 좋아합니다.’, ‘한국에 어학연수를 가거나 유학을 가고 싶어요.’, ‘한국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전 세계 유명 자동차회사 제품의 전시장과 같은 터키 거리에서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 마크를 단 차가 달리는 것을 보면 어깨가 으쓱해진다. 한국 자동차나 삼성․LG의 전자제품을 써 보니 정말 좋은 제품이라면서 자랑하는 터키 사람을 만나면,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이국 생활의 외로움도 잊게 된다. TV를 켜면, 터기의 국영방송에서 한국의 드라마가 방송된다. 그 동안 <대장금>을 비롯한 많은 드라마가 방영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온 금년 9월 이후 내가 잠깐씩 본 것만 하여도 <이산>, <해신>이 방송되었고, 요즈음은 <선덕여왕>을 방송한다. 터키어로 더빙(dubbing)하였으므로 대사는 알아듣지 못해도 화면을 보면서 한류의 바람이 이곳까지 온 것을 실감한다. 이러한 뿌듯함이나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이 국력이 신장되고,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인들이 진취적인 기상과 도전 정신을 가지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나라를 이만큼 발전시킨 한국인이 자랑스럽다.

  터키는 국토가 대한민국의 8배쯤 되고, 인구는 약 7,500만 명이다. 땅이 넓은 만큼 지하자원도 풍부하다고 한다. 곡식․채소․과일을 가꾸고, 소와 양 등을 많이 길러 온 국민이 먹을거리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행을 하면서 곡식과 채소밭, 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산 전체를 뒤덮은 올리브나무숲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놀라움과 부러움이 교차한다. 터키는 전 국토가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유적이 많고, 자연 경관이 뛰어난 곳이 많아 세계 여러 나라에서 1년에 1,000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대국이어서 관광 수입이 엄청나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니 이 나라의 넓은 땅과 자원, 역사 유적, 자연환경이 부럽기 만하다.

  터키의 거리에는 가는 곳마다 터키공화국 초대대통령이었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서 있다. 관공서의 사무실이나 학교 강의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집에도 아타튀르크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것은 터키 사람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터키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개혁을 단행하여 터키 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한 그의 공을 기리고 깊이 존경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타튀르크는 세상을 떠난 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국부(國父)로 추앙받으며, 터키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주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정신적 지주로 모시는 대통령이 없는 한국인으로서는 정말 부러운 일이다. 

  터키는 출산율이 높은 편이고, 젊은이들이 많아 국민의 평균 연령이 아주 젊은 나라라고 한다. 출산율이 낮아 인구도 늘지 않고,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이곳에서는 인터넷으로 밖에는 한국의 소식을 접할 길이 없다. 인터넷 신문을 열면, 진보와 보수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바람에 국론이 분열되어 국력을 한 곳으로 모으지 못하고 있다. 국회는 국가의 장래나 국민들의 삶은 뒤로 하고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앞세우면서 입법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아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내놓았다고 한다. 충청권을 비롯하여 온 나라가 세종시 문제로 들끓고 있고, 4대강 문제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토, 자연환경, 자원 등 여러 면에서 부족한 것이 많은 한국이 살 길은 온 국민이 국력을 기르는 일에 뜻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그동안 어렵게 이룩한 경제발전의 기틀이 흔들리고, 국가적 신인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매우 걱정된다.
       
  먼 나라에서 연말을 맞으니,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척, 친구, 친지들이 그리워진다. 한국에서 생활하던 때의 편리함과 편안함도 생각난다. 새해에는 온 국민이 뜻을 모아 여러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소개하는 기사가 넘쳐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머나먼 나라에 와 있는 외로움도 잊고 신바람이 나서 맡은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청원군민신문 제157호, 2009. 12. 25일자 제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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