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하순에 아내와 함께 고향인 홍성에 갔다.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강의와 출판사와 약속한 원고 집필 때문에 바빠서 벼르기만 하고 가지 못하다가 겨우 시간을 내어 갔다. 먼저 부모님 산소에 성묘를 하고, 누님 댁과 외종형 댁을 방문한 뒤에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친구와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에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잘 가꿔 놓은 정원의 나무와 꽃들을 둘러보았다. 마당가와 마당과 이어진 야트막한 언덕에는 여러 가지 과일나무와 정원수, 꽃들이 자라고 있는데, 주인 내외의 성품처럼 정갈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많은 나무와 꽃 중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마당가에 활짝 피어 있는 능소화(凌霄花)였다. 능소화는 마당가에 세워놓은 사람 키 정도의 통나무를 이리저리 감으며 타고 올라간 줄기의 마디마디에서 뻗어 나온 꽃대에 다닥다닥 붙어 피어 있었다. 나팔꽃과 비슷한 깔때기 모양의 주황색 통꽃이 100여 송이 피어 있는데, 아주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꽃이 하도 예뻐 만져보려고 손을 대니, ‘내 몸에는 어느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다.’는 듯이 톡 떨어져 버렸다. 그 밑을 보니, 시들지 않고 싱싱한 꽃들이 수없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능소화를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으나,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에 고등학교 선배님 댁 바깥 정원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능소화의 예쁜 모습에 마음이 끌려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 보관하기도 하고, 꽃말과 전설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능소화가 아주 좋아졌다. 내가 친구에게 능소화를 언제 심었는가 물으니, 10여 년 전에 아는 사람의 집에 피어 있는 능소화가 예뻐서 뿌리를 조금 얻어다가 심은 것이 이렇게 자랐다고 하였다. 나는 친구와 함께 능소화의 특성, 꽃말과 전설 등을 이야기하였다. 

   능소화는 쌍떡잎 통꽃식물목 능소화과에 속하는 낙엽성 덩굴나무인데, 높이는 10m정도이며, 잎은 깃모양 겹잎이다. 여름에 깔때기 모양의 주황색 꽃이 피고, 열매는 네모진 삭과(蒴果, 익으면 과피(果皮)가 말라 쪼개지면서 씨를 퍼뜨리는, 여러 개의 씨방으로 된 열매)로 가을에 익는다. ‘금등화(金藤花)’, ‘자위(紫葳)’, ‘능소화나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 분포하는데, 옆에서 보면  트럼펫을 닮아서 외국에서는 ‘Chinese trumpet creeper’라고 부르기도 한다.

   능소화는 바람이 불면 마치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너울너울 흔들거린다. 옛사람들도 이 꽃을 예사로 보지 않고 무척 사랑했던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여 년 전에 널리 전해 오는 시를 모은, 동양 최초의 시집인 <시경(詩經)> 속에도 능소화 그림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원수로 길렀는데, 양반집 마당에만 심었고, 상민의 집에서는 심지 않았다. 이 꽃을 상민의 집에서 심으면 양반들한테 불려가 벌을 받았다. 그래서 ‘양반꽃’이라고도 한다. 

   능소화는 분위기가 동양적이라 사찰꽃(절꽃)이라고도 한다. 꽃가루에 독이 있어 유독식물로 알려져 있으며, 꽃속에 생기는 꿀이 눈에 들어가면 실명(失明)한다는 말이 전해 오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내한성(耐寒性)이 약하여 중부 이북보다는 중남부 지방의 건조하지 않은 양지바른 곳에 잘 자라며, 해안 지방에 주로 서식한다. 공해에도 강하고, 뱀의 근접을 막아준다고 하여 별장 및 개인주택 조경에 많이 심는다. 

   꽃에는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꽃말’이 전해 온다. 장미는 사랑․아름다움, 백합은 순결, 월계수는 영광, 클로버는 행운을 나타낸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이다. 이것은 능소화에서 느껴지는 화려함과 기개, 싱싱한 채 떨어져 시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존심 등을 감안하여 붙인 꽃말이라 하겠다. 화려함과 기개를 느끼게 하는 능소화에는 슬픈 전설들이 전해 온다. 하나는 임금을 기다리다 죽은 궁녀의 넋이 능소화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소화’라는 궁녀가 임금의 눈에 띄어 성은(聖恩)을 입고, 빈(嬪)에 봉해졌다. 그녀는 궁궐 안에 마련된 처소에서 지내면서 임금님이 다시 찾아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녀는 매일 담장 밑을 서성이기도 하고, 담장너머를 바라보며 임금을 기다렸다. 그러나 임금은 그녀의 처소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림에 지쳐서 병이 들어 죽었다. 시녀들은 ‘나는 담장 밑에 묻혀 임금이 오기를 기다리겠다.’는 그녀의 뜻을 따라 시신을 궁궐 담 밑에 묻어 주었다. 이듬해 여름에 그녀의 무덤에서 풀이 자라 꽃이 피었는데, 담장을 휘어 감고 밖을 내다보는 듯하였다. 그래서 이 꽃 이름을 ‘능소화’라고 하였다 한다.

  위 이야기에서 능소화는 임금님의 방문을 간절히 기다리다 죽은 궁녀 소화의 넋이 변하여 핀 꽃인데, 담장에 피어 임금이 오는가를 살피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이 꽃에는 오직 한 분이신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간절한 소원과 기대가 담겨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기생 능소화가 죽어 이 꽃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어느 고을에 덕망 있는 벼슬아치가 일찍 아내를 여의고 딸과 함께 살았다. 그는 상대편 당파의 세력에 밀려 급히 몸을 피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딸과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젊은 선비를 데리고 급히 몸을 피하다가 갈림길에 이르렀다. 그는 젊은이와 딸의 손을 모아잡고, 부부의 인연을 맺을 것을 서약하게 한 뒤에 젊은이를 다른 길로 가게 하였다. 그는 딸과 함께 이리저리 떠돌던 중에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딸은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돈을 받아다가 약을 썼으나, 아버지는 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그녀는 기녀(妓女)가 되었는데, 인물이 예쁘고, 글을 잘하며 가야금에 능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많은 남성들이 유혹하였지만, 정절을 지켰다. 한 선비가 그녀의 청초한 모습을 보고, ‘차가운 기운이 서린 꽃’이란 뜻으로 ‘얼음 릉(凌)’ 자, ‘하늘 기운 소(霄)’ 자를 써서 ‘능소화’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몇 년 후 능소화의 아버지가 속했던 당파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젊은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고, 능소화가 기생 노릇을 하고 있는 고을 원으로 오게 되었다. 능소화의 소문을 들은 원님이 그녀를 찾아가는데, 귀에 익은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 원님이 능소화를 만나보니, 자기와 정혼한 여인이었다. 능소화가 겪은 일을 들은 원님은 지난 일을 다 잊고, 부부의 연을 이어가자고 하였다. 그녀는 서방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기꺼이 따르겠다면서, 며칠간의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원님은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 날에 능소화를 찾아갔다. 그녀는 준비해 두었던 비상(砒霜)을 먹고 죽어가면서, “자신을 정갈하게 지키지 못한 제가 어찌 서방님과 혼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간의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는 마음만으로도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후 그 여인의 무덤에서 덩굴진 줄기가 솟아났고, 퍼져가는 줄기 끝마다 주황빛 꽃들이 피어났다. 품위와 기개가 느껴지고, 활짝 피었는가 싶으면 이내 지고 마는 그 꽃을 사람들은 ‘능소화’라고 불렀다.

   당파 싸움이 한창이던 때를 배경으로 꾸며진 이 이야기에는 한 여인의 지고(至高)한 사랑과 기품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는 살았을 때에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 소원과 관련이 있는 식물이나 동물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많이 전해 온다. 그 중 꽃과 관련된 이야기를 ‘꽃유래담’ 또는 ‘꽃전설’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국인의 환생(還生)에 관한 의식을 바탕으로 꾸며진 것이다.
 
   능소화는 개화 기간이 80일 정도 이어지는데, 색상이 화려하고 기품이 있으며, 젊고 생기가 있다. 많은 꽃들이 다투어 피는 따뜻한 봄을 다 보내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灼熱)할 때에야 자태를 뽐내는데, 아름다움과 도도함이 있다. 손을 대면 떨어지고 말아 마음에 맞지 않는 누구의 손길도 허락하지 않는 절개가 있다. 시들지 않고 떨어져 지는 순간까지도 활짝 피었을 때의 싱싱함을 유지하다가 그 모습 그대로 땅에 떨어져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 자존심이 있다. 통나무나 담장을 타고 올라가 밖을 살피는 조심성이 있다. 능소화의 이러한 특성이 어디서 유래되었는가는 위의 전설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능소화를 보고 있노라면, 옛날 선비와 같이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품위와 한번 뜻을 세우면 어떠한 시련이 와도 굽히지 않는 기개가 느껴진다. 많은 남성의 유혹이 있어도 임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정절을 지키는 명기(名妓)의 결연함을 생각하게 한다. 능소화 전설은 이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해 준다.

    얼마 전에 아는 분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분은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아는 분들의 면회를 일체 사양하였다고 한다. 아는 분들에게 쇠잔(衰殘)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건강할 때 만났던 모습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내가 능소화를 보면서 그 분을 떠올린 것은 그 분이 떠날 때의 마음이 시들기 전에 지는 능소화의 본성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친구에게 그 분의 이야기를 하면서 능소화처럼 품위와 기개를 지니고 살다가 홀연히 떠났으면 좋겠다고 하니, 그 친구 역시 동감이라고 하였다. 나이가 더 들더라도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면서 남에게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훌쩍 떠났으면 좋겠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나 보다.

* 이 글은 <충청문학> 19, 서울 : 충청문인협회, 2008에 실려 있음.


   이번 2월에 정년(定年)을 맞아 44년 간 근무하던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초․중등학교 교사로 14년, 대학 교수로 30년을 근무한 교단을 떠나게 되니 여러 가지 감회가 떠오른다. 그동안 많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나누었는데, 이제 떠나야 한다니 참으로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이 든다. 44년 근무하는 동안 나와 학연을 맺은 사람이 아주 많은데, 이들 중 나를 참 스승으로 생각한다는 많이 있다. 이것을 보며 나는 참으로 제자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고, 자랑스럽다. 

   제자들 중 몇몇이 나의 정년을 아쉬워하면서도, 축하하고 기념하려는 뜻에서 정년 기념 문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제자, 동료, 친구, 선배, 스승, 친족 등에게 나와의 관계나 교유(交遊)한 내용을 중심으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에 따라 93명이 글을 써 주었는데, 이를 <푸른 향기 길게 드리우니>라는 책으로 묶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최근에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한 것도 있고, 아주 오래 전의 일을 소재로 한 것도 있다. 나와 생활하면서 기쁘고 즐거웠던 일을 적기도 하고, 섭섭하고 아쉬웠던 일을 적기도 하였다. 그 중에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도 있지만, 까맣게 잊어버린 내용도 들어 있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90여 명의 마음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의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이었다. 원만한 보습이 보이는가 하면 모난 모습도 보였다. 다른 사람에게 기쁘고 보람을 느끼게 한 모습이 있는가 하면, 마음을 아프게 한 나쁜 모습도 보였다. 그 중에는 다른 사람을 섭섭하게 하거나 마음 아프게 하여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일도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하면서 용서를 빈다.

   아내는 ‘돈을 꿔서 승용차를 산 이야기’를 썼다. 혼인한 뒤에 야간대학과 대학원 학생 노릇을 7년이나 하고, 시간 강사 노릇을 하다가 전임 교수가 된 이듬해에 돈을 꿔 오라고 하여 승용차를 사겠다는 가장(家長)의 처신을 보면서 아내는 정말 난감하였을 것이다. 철없는 사람, 셈속 모르는 책상물림이라고 서운해 하면서 한탄하였을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단돈 1만원도 꾸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내가 돈을 꿀 데가 없다고 거절하였으면 나는 승용차를 살 수 없었을 터인데, 긴 토를 달지 않고 내 말을 따라준 아내가 고맙다. 이렇게 하여 구입한 승용차는 설화와 민속 자료 수집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내는 집안일과 아이들 교육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나를 보면서 ‘한 지붕 밑에서 숨 쉬고 있는 것으로 안도하였다.’고 하였다. 이 말은 참으로 미움과 한숨을 거친 뒤에 정리한 사려(思慮) 깊은 말이다. 부족함이 많은 남편의 모습을 보여 부끄러울 뿐이다. 

  아들과 딸의 글을 보니 내가 강조하며 실천하던 음식 골고루 먹기, 아침 체조, 일기 검사, 규칙 지키기 등이 무척 힘들고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서운 아빠, 인정머리 없는 아빠라면서 원망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장성한 뒤에 생각해 보니, 아빠가 강조하던 것들이 건강 증진, 편식 안 하기, 바르고 예쁜 글씨 쓰기, 기초적인 문장력 훈련에 크게 도움이 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귀찮고, 힘들고, 원망스러웠던 일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는 삼남매가 고맙고 자랑스럽다.

  여동생은 <오빠의 눈>이란 제목으로 내가 엄격하고 무섭게 대하던 일, 까다로운 규칙을 정해 놓고 지키라고 하던 일을 적었다. 오빠가 무섭고, 섭섭하고, 힘들었다고 하면서도 아버지 노릇을 겸한 오빠의 역할을 하느라고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존경한다고 하니, 고맙기 그지없다.

   처남과 처제는 내가 자기들에게 본을 보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는 아내가 처가에 가서 내 험담이나 불평․불만을 말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의 좋은 면만을 기억해 주는 처남․처제와 나의 나쁜 점을 친정에 가서 말하지 않은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제자들의 글에 나타난 내 모습은 다양하다. 나한테 논문 지도를 받은 사람은 논문 지도의 철저함과 엄격함을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나는 논문 초고에 붉은 색 펜으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수정하도록 지시하는 글을 써서 주고, 만나서 일일이 설명하면서 수정하게 하곤 하였다. 제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빗대어 ‘피바다를 건너야 논문이 통과된다.’는 말이 퍼졌고, 이 말은 여러해 동안 선후배간에 대물림을 하였다고 한다. 피바다를 거친 사람들은 내가 지도하느라고 써준 초고를 ‘가보(家寶)’로 삼겠다고 하면서, 자기들도 제자들의 작문이나 논문을 지도할 때 귀감(龜鑑)으로 삼겠다고 한다. 논문 지도 과정에서 깊은 생각 없이 던진 내 말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혀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긍정적인 면만을 말하며 좋게 말해 주니 정말 고맙다. 논문 지도 과정에서 섭섭한 말을 들었던 사람은 속히 잊고 상처가 아물기를 바란다.

  나는 강의 시간이나 학생들과 대화하는 중에 어휘 사용과 발음 등 언어 습관에 관해 많은 말을 하였다. 나는 내 전공이 아니면서도 현장 상황에서 직접 지도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는 생각에서 바로 지적하곤 하였다. 지적 받은 사람은 무안해 하였고,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마워하면서 고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니, 정말 고맙다.

  나는 제자들의 학교생활이나 일상생활에 관한 것을 많이 지적하였다, 그런데 지적을 받은 제자들이 고맙게 여기고 습관화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한다. 나는 강의할 때 요지를 잘 정리하여서 쉽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논지(論旨)를 전개하면서 내용 이해에 필요한 예화(例話)를 많이 인용하곤 하였다. 이를 제자들은 잊지 않고 있으며, 본을 받아 교단에서 학생을 지도할 때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제자들 중 현직 교사가 많은 관계로 나를 이해하고, 좋게 평가해 주는 것 같아 고맙기 그지없다.

  나는 교회 장로인데, 신앙생활 면에서 부족함이 많다. 목사님이나 다른 교우들이 기대하는 바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여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목사님이나 동료 장로는 정년퇴임 후에 잘 하라는 말로 감싸면서 격려해 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나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칭찬․격려․축하․감사의 말 속에 담긴 부족한 나의 모습을 보았고, 이해와 용서의 마음을 읽었다. 뒤늦게나마 여러 사람의 마음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된 것을 감사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적해 준 나의 부족한 모습, 모난 모습, 불성실한 모습 들을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몇 년 후, 오늘 이후에 만난 사람들이 나에 관한 글을 쓴다면, 나에 대한 이해, 용서의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칭찬과 격려․축하․축복의 말을 적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일 것이다. 

  * 이 글은 <청하문학> 제7호, 서울 : 문예운동사, 2008에 실렸음.



   ‘빗물을 받아먹고 사는 나라’ 이야기는 먼 옛날의 이야기이거나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미개한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옛날의 일이라면 그 때는 다 그랬을 것이고, 미개한 나라 이야기라면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일 터이니 색다른 이야기일 것도 없다. 그러나 옛날의 이야기도, 미개한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문명이 발달한 나라의 현재의 이야기라면 흥미와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해 여름에 뉴질랜드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 일행을 안내한 B씨는 13년 전에 이곳으로 이민을 왔는데, ‘빗물을 받아먹고 사는 나라’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민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름 있는 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빗물을 받아먹고 사는 나라’는 지상의 낙원과 다름없을 것이니 그곳에 가서 살겠다는 생각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하였다. 그의 이민 결심의 동기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매우 단순하고 낭만적이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그는 뉴질랜드에 와서 맨 먼저 우산 장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1년 중 우기(雨期)가 6개월이나 되니, 한국에서 품질 좋은 우산을 들여와 팔면 많은 이익이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우산은 전혀 팔리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고 그대로 비를 맞고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아차!’ 하고 후회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의 딱한 사정을 안 한국인교회 교인들이 그를 돕는 뜻에서 우산을 팔아 주어서 자금의 일부를 회수하였지만 큰 손해를 보았다. 그 후 그는 그곳의 기후와 풍토,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살폈다고 한다.

   나는 그 곳 사람들이 정말로 빗물을 받아먹고 사는가 궁금하여서 그런 집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차가 도심을 벗어나 교외로 가니, 넓은 초원에서 소․말․양 들이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고, 사람이 사는 집들이 뜨문뜨문 보였다. 초원 가운데로 나 있는 도로 옆에 있는 휴게소에 들르니, 바로 옆에 빗물을 받아먹는 집이 있었다. 그 집은 골이 진 슬레이트(slate) 모양의 자재로 지붕을 덮었는데, 추녀 끝에는 지붕에 내린 빗물을 받는 물받이가 있고, 그 물을 한 곳으로 모으는 홈통이 땅위에 있는 통에 연결되어 있었다. 물을 받는 통은 지름이 4~5m쯤 되어 보이는 둥근 모양의 큰 통인데, 뚜껑이 덮여 있다. 통의 위쪽에는 통에 넘치는 물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통의 아래쪽에는 물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수도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 집에서는 그 통에 저장된 물을 식수로 사용함은 물론 허드렛물로도 쓴다. 통에 저장한 물을 다 쓸 무렵이면 또 비가 내리므로 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뉴질랜드에는 이런 집이 아주 많다고 하였다. 

   뉴질랜드는 공장은 건설하지 않고, 공산품은 외국에서 사다가 쓰면서 자연 환경을 유지 보호하고 있다. 그러니 매연(煤煙) 걱정은 할 필요가 없고, 많은 숲들이 공기를 정화(淨化)해 주니 공기가 맑은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처럼 산성비[酸性雨]가 내리지도 않고,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있으니 황사(黃紗)가 섞인 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은 맑고 깨끗하므로, 빗물을 받아서 먹어도 아무 탈이 없고, 비를 피하기 위해 따로 우산을 쓸 필요도 없다. 자동차의 경우도 비를 맞은 뒤에 마르면 비 맞은 자국이 없고, 세차한 것처럼 깨끗하다. 그러니 따로 세차장에 가서 세차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 곳에는 세차장이 따로 없다. 

   뉴질랜드는 무공해 청정국가(淸淨國家)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산을 보호하기 위해 산을 가로지르는 길을 내지 않으며, 터널을 뚫지 않는다. 교각(橋脚)을 많이 세우면 물의 흐름을 방해하고, 물의 흐름을 방해하면 자연이 변화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강위에 다리를 놓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경우에는 교각의 수를 줄이기 위해 긴 다리 대신 강폭이 좁은 곳에 짧은 다리를 놓는다고 한다. 

  B씨의 말을 들으며 맑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싶어 이민을 결심한 그의 마음을 이해하였고, 이를 실천에 옮긴 그의 의지와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을 보니, 우리나라의 실상이 떠올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1950년대에 나는 여름이면 동네 친구들과 냇가에 나가 놀곤 하였다. 친구들과 함께 미역을 감고, 물장난을 하였으며, 냇바닥의 모래로 이를 닦았다. 목이 마르면 냇물을 그대로 마셨다. 이를 본 어른들 누구도 물이 더러우니 먹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을이면 논바닥에 파놓은 물길을 따라 미꾸라지와 송사리가 몰려다녔고, 이삭이 나온 벼 위에는 ‘메뚜기도 한 철’이란 말처럼 메뚜기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이 날아다녔다. 우리는 그 곳에 있는 미꾸라지와 메뚜기를 잡아 가지고 가서 끓여 먹거나 구워서 먹곤 하였다. 비가 오면 변변한 우산이 없어서 그러기도 하였지만, 비를 맞아도 해롭다는 생각이 없어서 그대로 맞는 것이 예사였다.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공장이나 자동차에서 뿜는 매연과 분진(粉塵)이 공중에 항시 떠 있게 되었다. 농약이나 방부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약품이나 중금속의 사용이 늘고, 축산의 오폐수(汚廢水)와 생활 쓰레기가 늘었다.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가끔씩 황사가 불어온다. 이런 일이 겹치니 공기도, 토양도, 지하수도 나빠졌다. 그래서 맑은 공기를 마시기 어렵게 되었고, 아무 물이나 마실 수도 없게 되었다. 이제 공해(公害) 문제는 우리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1980년대만 하여도 높은 산을 오를 때에 가지고 간 물을 다 마신 뒤에는 계곡에 흐르는 물을 그대로 받아 마셨다. 서울 근교의 도봉산, 수락산, 아차산 등을 오를 때에는 계곡 곳곳에 있는 옹달샘의 물을 마음 놓고 떠서 마셨다. 그러나 지금은 큰 산의 계곡 물도 마실 수 없고, 서울 근교에 있는 산의 옹달샘물도 오염이 되어서 ‘음용 불가(飮用不可)’라고 써 붙인 곳이 늘어가고 있다. 오염된 대기, 살충제의 공중 살포(撒布), 침출수(沈出水)의 혼입(混入) 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높은 산의 계곡 물까지 오염된 현상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가정에서는 수돗물을 믿지 못하니 그대로 마실 수 없어 정수기를 설치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생수를 사서 마셔야 한다. 돈을 아까운 줄 모르고 쓰는 것을 빗대어 ‘돈을 물 쓰듯 한다.’고 하였는데, 물 값이 휘발유 값 못지않게 비싼 시대가 되었으니, 이 말은 이미 옛말이 되었다. 

  공해 문제를 말하다 보니, 어느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그 교수는 1970년대에 공해 문제를 다룬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지금의 공해 정도는 그 때의 기준치를 몇 배 초과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때에 인체에 해롭다고 하던 그 기준대로라면, 지금쯤은 사람들이 다 공해에 찌들어 죽었거나 병이 들고, 기형아(畸形兒)가 많아야 하는데, 그런 심각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들이 나쁜 환경에 적응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해의 정도가 심하여졌어도 지금까지는 인체의 적응력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인체의 적응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공해 문제를 깊이 연구하여 자연 파괴로 인한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지혜가 뛰어난 존재이니,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 불행이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바로 보고, 대비해야 한다. 환경 보호 단체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우리들 각자가 자연 보호와 오염 방지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태안 앞바다의 기름 유출 사고가 우리의 자연을 멍들게 하였다. 그러나 피해를 줄이고 생태계가 속히 복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추운 날씨에도 자원봉사를 한 국민의 노력과 여망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서울의 경우를 보면, 생활오수(生活汚水)를 따로 흐르게 하고 정화하는 노력을 기울여 중랑천이나 탄천에 물고기가 살게 하였고, 청계천에 물고기와 새들이 서식하게 하였다. 서울의 공기도 조금 맑아졌고, 한강물의 탁도(濁度)도 조금 낮아졌다고 한다. 이것은 물이나 토양이 오염되지 않게 하고, 오염된 물은 정화하는 노력을 하면, 생태계가 복원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어서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빗물을 받아먹는 나라’ 이야기가 먼 태평양 가운데의 뉴질랜드 이야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이야기라는 소식이 매스컴을 타고 전해 왔으면 좋겠다. 




   전설 조사를 위해 고향인 홍성에 갔을 때의 일이다. 홍성의 향토사와 민속에 관해 깊이 연구하는 ㅂ선생과 점심 식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 ㅂ선생은 서련(徐憐) 판관의 고향이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라고 하였다. 서련 판관은 제주시 북제주군 구좌읍 동김녕리에 있는 김녕사굴(金寧蛇窟)에 얽힌 전설의 주인공으로, 처녀를 제물로 받는 뱀신을 물리친 영웅적인 인물이다. 나는 이 전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1982년에는 박사학위논문 <심청전 연구>에서 <심청전>의 배경 설화로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설의 주인공인 서련 판관의 고향이 바로 홍성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인물이 바로 홍성 출신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이를 여태까지 모르고 지낸 내가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나는 점심 식사 후 ㅂ선생과 함께 구항으로 가서 서련 판관의 묘를 둘러보고, 그 옆에 있는 연산 서공 련 송덕비(連山徐公憐頌德碑)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송덕비 뒤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물이 얼어 있었다. 송덕비에 적힌 내용은 내가 알고 있던 제주도 지방의 전설 내용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를 간단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서련은 조선 성종 25(1494)년에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외조부 밑에서 자랐는데, 부모가 없어 불쌍하다는 뜻으로 이름을 ‘련(憐)’이라 하였다. 
   그는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나서 18세 때인 중종 6(1511)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19세인 중종 7(1512)년에 제주 판관이 되어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그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방에게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김녕리 석굴에 큰 구렁이가 살고 있는데, 구렁이가 돌풍과 비를 일으키고, 독기를 내뿜어 주민에게 해악을 끼치는 일이 극심합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해마다 봄과 가을에 굴 앞에 15세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굿을 합니다. 그러면 구렁이가 나와서 처녀를 물고 굴속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석굴의 구렁이는 열과 연기를 싫어하므로 기와를 굽지 못하여 백성들의 집은 물론 관아의 건물마저 띠로 지붕을 잇고 있습니다.”

   그는 구렁이를 물리쳐 제주도민이 구렁이에 대한 공포감에서 벗어나고, 해마다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주민들을 독려하여 기와를 구워 지붕을 잇게 하였다. 주민들은 판관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따르면서도 구렁이의 화가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자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구렁이를 아주 없앨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구렁이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 다가오자 그는 전처럼 제사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그는 굴 앞을 파고 숯불을 피워 놓고, 무당에게 풍악을 울리며 굿을 하게 하였다. 얼마 후 구렁이가 나와 처녀를 삼키려고 하였다. 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창으로 구렁이를 찌르니 군졸들도 달려들어 창과 칼로 찔렀다. 구렁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이를 끌어내어 숯불에 태워 죽였다. 이 때 무당이 말하였다.
   “판관님, 어서 말을 타고 관아로 돌아가십시오. 가는 도중에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군졸들과 함께 말을 타고 관아를 향하여 달렸다. 그 때 붉은 기운이 구름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이를 본 군졸이 ‘피구름이 몰려온다!’고 소리쳤다. 이 말을 들은 그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니, 뒤따라오던 붉은 기운이 그를 덮쳤다. 
   관아로 돌아온 그는 이름 모를 병으로 앓다가 1515년에 제주 관사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구렁이 한 마리가 상여에 숨어서 따라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구렁이를 죽이지 않고 그의 유해가 안장된 구항면 지정리 보개산 아래에 조그만 연못을 파고, 살도록 해 주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구렁이의 횡포에 두려움을 느끼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15세 처녀를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였다. 또 구렁이가 뜨거운 열과 연기를 싫어하므로 기와를 굽지 못하여 민가는 물론 관아까지도 기와를 올릴 수 없었다. 이것은 그곳 주민들의 뱀신에 대한 공포심이 극에 달하여 그릇된 신앙 행위를 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곳 사람들은 뱀신을 두려워하고, 이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이를 거스르는 일은 곧 자신의 죽음과 마을의 피해로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련 판관은 이러한 상황에서 뱀신을 물리칠 결심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가 맡은 관아에 속한 주민들을 뱀신의 횡포(橫暴)와 패악(悖惡)에서 구해내겠다는 굳은 의지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 의한 결단이었다. 그의 결단은 뱀을 죽였고, 사신(邪神)을 숭배하는 그릇된 신앙과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습속을 없앴다. 그래서 주민들로 하여금 사신에 대한 공포감에서 벗어나고, 더 이상 사랑하는 딸을 제물로 바치는 일을 하지 않게 해 주었다. 그러나 판관 자신은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가히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하겠다.

   제주도 사람들은 굴 옆에 서련 판관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 그의 용기와 애민정신을 잊지 않고 기리고 있다. 제주도의 향토 자료에는 서련의 영웅적인 행적을 싣고 있으며, 교육 현장에서는 이를 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1972년에는 제12회 제주도 한라문화제에서 서련 판관이 구렁이를 제치하는 모습을 재현한 ‘사굴 처녀제’가 민속놀이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5년 동안 ‘사굴 처녀제’는 한라문화제에 찬조 출연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또 제주도에서는 서련을 추모하여 우수공무원을 선발하여 시상하였는데, 수상자가 수상식장에 들어갈 때에는 판관 복장에 조랑말을 타고 들어갔다고 한다. 이것은 공무원들이 서련 판관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이어받는다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북제주군 노인대학장인 김군천 씨는 김녕사굴을 30년 넘게 관리하면서 매년 정초와 추석에는 추모제를 지내고, 서련 판관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추모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서련 판관은 제주도에서는 영웅적인 인물, 공무원의 표상으로 추앙하면서 그의 용기와 결단,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그의 출신 지역인 홍성에서는 그의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나 역시 그 동안 모르고 지냈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홍성 지역 사람들은 뱀신을 물리친 영웅적인 인물이 이 지역 출신임을 널리 알려야 한다. 그리고 서련 판관의 출신 지역 사람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 한편, 그의 용기와 희생정신을 기리고 본받아야 하겠다. 

* 이 글은 충청문학 18, 서울 : 충청문인협회, 2007에 수록되어 있음.



   지난 해 9월 북경에 있는 J대학교 초빙교수로 가 있을 때의 일이다. 북경에 있는 동안 백두산과 연변 지역을 다시 가보고 싶어서 여행사에 연락을 해보니, 시기적으로 늦은 때라 손님을 모으지 않는다고 하였다.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한국에 있을 때 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준 이 선생이 연길에 오면 안내해 줄 터이니 오라는 이메일(e-mail)을 보내왔다. 기쁜 마음으로 4박 5일 일정의 여행을 계획하고, 이 선생 남편의 친구가 운영하는 여행사를 통해 밤 8시에 출발하는 항공권을 예약하였다.

  오후 4시에 아내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길 설고,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에 와서 우리 둘이 여행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매우 긴장되었다. 택시 기사에게 서툰 중국어로 수도공항을 가자고 말하고서 혹 다른 곳으로 가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길이 막혀 비행기 시간에 늦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였다. 공항에 도착하여 중국어 단어를 꿰맞추고, 손짓으로 물어 항공권 발급 장소를 찾아가서 탑승권을 받고, 탑승 수속을 마친 뒤에야 긴장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국내 항공기를 타고 두 시간쯤 비행하여 연길 공항에 도착하니, 이 선생이 남편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선생의 시누이 남 선생의 아파트에서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환담하였다. 연길에 온 둘째 날에는 이 선생 내외와 함께 택시를 전세 내어 타고 도문, 훈춘 지역을 둘러보았다. 
 
   셋째 날에는 이 선생의 안내로 백두산에 가기로 하였는데, 마침 휴일이어서 초등학교 4학년인 이 선생의 딸도 함께 가기로 하였다. 우리 일행 네 사람은 새벽 5시에 집을 나와 승용차를 타고 백두산으로 향하였다. 이 선생 남편의 주선으로 중국 교포 A씨가 개인 사업을 하는 동생의 차를 가지고 왔다. 그는 운전도 잘 하고, 이야기도 잘하였다. 나는 앞자리에 앉아 그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화제가 자동차에 미치자, 그는 현대자동차 중국 공장에서 만든 소나타와 엘란트라가 중국에서 매우 인기가 높다고 하였다. 우리가 타고 가는 차 역시 현대에서 만든 엘란트라였다. 나는 1990년에 중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의 차가 한 대로 없는 것을 보고 아쉬워하였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 후 15년 동안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실감하였다.

   백두산을 가는 길은 잘 포장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길에서 80km 정도로 달릴 수 있었다. 전날 밤부터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가끔씩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곤 하였다. 안도(安圖)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잠시 쉰 뒤에 다시 달렸다. 오전 9시 40분경에 백두산 산문(山門)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먼저 온 자동차와 사람들로 붐볐다. 이 선생이 입장권을 사 왔는데, 표가 여러 장이었다. 받아서 보니, 1인당 입장료가 60원, 상해 보험료가 5원, 그리고 차량 통행료와 주차료가 있었다. 조금 더 차를 타고 올라가니, 넓은 주차장이 나왔다. 그곳에 타고 온 차를 세우고, 천지를 왕복하는 전용 짚차의 승차권을 사서 타고 가야 한다고 하였다. 매표소 앞에 가서 상황을 알아보니, 차들이 모두 산에 올라갔기 때문에 2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기사 A씨는 조금 전에 만났던 공안원과 이야기한 뒤에 공안원의 차를 타라고 하였다. 우리는 한 시라도 빨리 천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 차를 탔다.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기상대쪽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은 소형차 두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인데 굴곡이 심하였다. 1990년에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괭이와 삽을 가지고 도로 공사를 하던 길인데, 이제는 완전히 포장 되었다. 우리를 태운 차량의 기사는 아주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그런데 굴곡이 심한 길을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앞자리에 앉은 나는 차가 옆으로 미끄러질 것만 같아 조마조마하였다. 불안한 마음을 억제하며 차창 밖을 보니,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산들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차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나무와 풀의 키가 작아졌다. 한참을 오르니, 우리는 구름과 안개 속에 싸이게 되었다.

   기상대 앞쪽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니, 구름과 안개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천지의 모습을 볼 수 없겠다는 생각에 실망스러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숨이 차서 쉬어가면서 10분쯤 걸어 봉우리 끝에 섰다. 그러나 천지는 운무(雲霧)에 싸인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몇 년을 별러서 아내와 함께 이곳에 왔는데, 천지의 모습을 볼 수 없다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천지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전에 왔을 때 보았던 천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한국인 단체관광객인데, 모두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발길을 돌렸다. 아내에게 그만 내려가자고 하니, 아내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하였다. 우리는 이슬비를 피하려고 찢어진 우의(雨衣) 자락을 당기며 기다렸다. 잠시 후, 햇빛이 비치는 것 같아 크게 기뻐하며 기다렸지만, 천지 위를 덮은 운무는 변함이 없었다. 단체관광객 몇 팀이 실망을 안고 발길을 돌리는 것을 본 뒤에야 우리도 발길을 돌렸다. 여기까지 와서 천지를 보지 못하고 간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고 아쉽다 못하여 속이 상하였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인 것을 어쩌겠는가! 우리는 참으로 참 복이 없구나!’ 하며 다시 차를 타고 내려왔다.

   우리는 장백폭포 뒤쪽으로 걸어서 올라가면 천지의 물에 손을 담글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의 승용차로 바꿔 타고 장백폭포 쪽으로 올라갔다. 날씨는 구름이 많이 걷혀 파란 하늘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다시 입장권을 사서 폭포 쪽으로 올라가니 폭포 아래에서 뜨거운 온천물이 솟아 흐르고 있는데, 섭씨 83도나 된다고 하였다. 장엄한 폭포를 보고 탄성을 연발하다가 위에서 내려다보지 못한 천지의 물을 손으로 만져보겠다는 생각으로 폭포 뒤쪽으로 난 계단 길을 한 시간쯤 걸어 올라갔다. 수천 개가 되는 듯한 계단을 올라가니, 평평한 길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니,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천지가 보였다. 천지 둘레의 산봉우리는 아직도 안개와 구름이 감싸고 있었으나, 호수 위에는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물가에 이르러 보니, 둘레가 4~5km쯤 되어 보이는 넓고 푸른 천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름 덮인 험한 산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는 파란 호수는 정말 아름다웠다. 해발 2,000m가 훨씬 넘는 높은 산 위의 험한 산봉우리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스러웠다. 조물주가 만들어 깊은 산속에 숨겨놓은 비경(秘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가에는 콩알 만한 작은 돌과 모래가 곱게 밀려오는 작은 파도를 맞이하였다가 밀어 보내곤 하였다. 나는 메고 있던 가방과 사진기를 뒤로 젖히고, 물에 손을 담갔다. 그리던 천지의 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니, 태고의 비밀을 간직한 비경을 보았다는 벅찬 감격과 함께 자연의 신비감이 온몸에 느껴졌다. 마음이 평안해지고, 산봉우리에서 천지를 내려다보지 못하여 섭섭했던 마음도 풀렸다. 아내 역시 아주 감격스러워하면서 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 하고, 물을 튕겨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작은 돌을 골라 깨끗이 씻어 주머니에 넣었다.

   단체로 온 관광객들이 시간에 쫓겨 서둘러 내려가고 나니, 넓은 천지에 우리 일행 5명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천지 둘레의 아름다운 경관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맑고 파란 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천지 표석 앞과 백두산 괴물의 형상 앞에서도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서 있는 맞은편에는 산봉우리에서 내려오는 계단이 보였다. 함께 간 A씨의 말에 의하면, 그 길이 북한 사람들이 천지로 내려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나는 비디오카메라를 줌으로 당기며 그 곳을 살펴보았으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아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쪽의 상황과는 판이하였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리지 않았다면, 저 길로 천지를 왔을 터인데, 제3국인 중국 땅으로 와서 건너다보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천지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연길로 돌아갈 시간을 계산하고는 통일이 된 뒤에 저 편의 길로 다시 천지를 보러 오리라 다짐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폭포 아래로 내려와서 온천수에 삶은 계란을 사서 시장 요기를 하고 온천장으로 들어갔다. 전에 왔을 때는 천으로 사방을 둘러친 노천 온천장이었는데, 지금은 제대로 시설을 갖춘 온천장이 있었다. 실내 온천장 밖에는 자연스레 흐르는 물을 받아놓은 노천탕이 있었다. 나는 노천탕으로 가서 몸을 담그고 앉아서 자연의 오묘함을 새삼 느꼈다. 천지의 모습을 본 감동과 온천수의 따스함이 나의 마음을 뿌듯하게 하면서 편안함을 주었다. 그리고 잠을 설치고 새벽부터 일어나 차를 타고 와서 힘든 산길을 왕복하느라고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오후 8시경에 숙소로 돌아와서 서울에 있는 아들과 딸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의 감격과 기쁨을 이야기하였다. 그 다음날은 연변 지역 동표들이 추석을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연길 시내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 다음날은 용정(龍井) 지역을 둘러본 뒤에 북경행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 두 사람의 마음에는 백두산 천지를 본 감격과 기쁨, 숙소를 제공하고 불편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면서 여러 곳을 안내해 준 이 선생과 그 가족의 따스한 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 글은 <충청문학 제17호, 서울 : 충청문인협회, 2006>에 실려 있음.
       

  2007년은 정해년(丁亥年)으로, 돼지의 해이다. 동양에서는 12지(支)에 동물의 이름을 하나씩 붙여 쓰기도 한다. 이 동물들은 각기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동물의 특성으로 그 해나 그 달, 그 날의 운수를 판단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돼지는 오래 전부터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고, 도읍지를 정해 주거나 왕자를 낳을 여인을 만나게 해 주는 신이한 능력을 가진 동물로 신성시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다음의 두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구려 유리왕 때 하늘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기르던 돼지[郊豕]가 달아났는데, 그 돼지를 찾으러 갔다가 도읍지로 적합한 곳을 발견하고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때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바칠 돼지가 달아났는데, 한 처녀가 그 돼지를 붙잡아 주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미복(微服) 차림으로 그 여자를 찾아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산상왕의 뒤를 이은 동천왕(東川王)이라고 한다.

   돼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비범한 인물인 최치원(崔致遠)을 잉태하게 한 <금돼지>, 머슴살이하는 총각을 장가들게 하였다는 <머슴을 장가보낸 돼지>, 돼지꿈을 꾸었다고 거짓말하는 젊은이의 꿈을 해몽해 준 <돼지꿈의 해몽> 등 많이 있다. 

   돼지는 오늘날에도 무당들의 굿상이나 동제(洞祭)의 제사상, 각종 고사(告祀)의 제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물이다. 전에는 통돼지를 제물로 바쳤으나, 요즈음에는 머리만 바치기도 한다. 제상에 올려놓는 돼지는 웃는 모습이어야 좋다고 하여 입을 벌리고 죽은 것을 골라 올려놓는다. 요즈음에는 제상(祭床)에 놓은 돼지머리의 입에 돈을 끼우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돼지는 잘 먹고 잘 자라며, 한꺼번에 8마리 안팎의 새끼를 낳아 기른다. 그래서 각 가정에서는 돼지를 길러 살림을 일으키는 밑천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돼지는 복스러운 동물, 다산(多産)의 동물로 매우 소중하게 여겨 왔다. 돼지는 한자로 ‘돈(豚)’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말의 ‘돈[金]과 음이 같다. 그래서 돼지를 재물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각 가정에서는 돼지 모양의 저금통을 마련해 놓고, 수시로 돈을 넣어 저금한다.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들을 낮춰서 말할 때 돈아(豚兒)’라고 하였다. 수명이 짧은 집 아이의 이름을 ‘돼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은 돼지가 복스러운 동물로 살림의 밑천이 된다는 의식, 돼지같이 잘 먹고 잘 자라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한국인은 꿈에 돼지를 보면 복이 온다거나 음식을 얻는다고 하고, 돼지를 잡으면 아주 좋다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에도 돼지꿈을 꾼 뒤에 복권을 사거나 경마장을 찾는다고 한다. 윷놀이를 할 때에 도가 나오면 한 밭밖에 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처음에 도가 나오면 ‘살림 밑천’이라고 하면서 ‘개’나 ‘걸’이 나온 것보다 좋아한다. 돼지혈[豚穴]에 묘(墓)를 쓰면 후손이 발복하여 부자가 된다고 한다. 이것 역시 돼지는 복스럽고, 재수가 좋은 동물이라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돼지[亥]에 해당하는 방위와 시각, 날, 달, 해를 보면, 해방(亥方)은 24방위 중 북서북(北西北)이다. 해시(亥時)는 오후 9~11시이고, 해일(亥日)은 일진(日辰)이 돼지에 해당하는 날이다. 해월(亥月)은 월건(月建)이 돼지로 된 달 곧 10월이다. 해년(亥年)은 60갑자 중에서 해(亥)가 든 해이다. 해(亥)가 들어가는 해는 을해(乙亥), 정해(丁亥), 기해(己亥), 신해(辛亥), 계해(癸亥)로 12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온다.

   돼지해에 태어난 사람을 돼지띠라고 하는데, 돼지띠는 일반적으로 음력 1월 1일부터 12월 말일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주(四柱) 명리학(命理學)에서는 절기력으로 한 해를 구분하여 그 해 입춘 시각부터 그 다음 입춘 전 시각 사이에 태어난 사람을 돼지띠라고 한다. 돼지띠는 복이 많아 부자가 되어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믿는다. 돼지띠는 대체적으로 성정이 진솔한데, 남성은 일단 목표를 정하면 그 일을 꾸준히 밀고 나가므로 성공 확률이 높고, 여성은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철저하게 수행하면서도 자상한 엄마로서 가정에도 충실하다고 한다. 이것은 돼지에 대한 여러 의식이 결집된 것이라 하겠다.

   정해년(丁亥年)의 정(丁)은 오행으로 보아 불인데, 불은 붉은 색이다. 그러므로 2007년 정해년은 ‘붉은 돼지해’라고 할 수 있다. 붉은 색은 활활 타는 불꽃의 색으로 귀신이 싫어하는 색이다. 그래서 붉은 색은 축귀(逐鬼)․축사(逐邪)의 뜻을 지니고 있어서 재수가 있는 색, 재물 운이 따르는 색으로 여긴다. 붉은 색에 대한 이런 의식은 중국인도 매우 강하다. 이렇게 볼 때 돼지해인 2007년은 재운(財運)이 따르는 복된 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꿈과 기대를 안고 새해를 맞이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요즈음 일부 역술인이 2007년을 ‘600년에 한 번 오는 황금 돼지해’라고 하고, 일부 상인들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 이를 일부 언론이 여과 없이 보도함에 따라 2007년에 출산을 하겠다고 서두르며, 유아용품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정해년은 ‘붉은 돼지해’이지 ‘황(금)색 돼지해’가 아니다. 황색 돼지해는 황색을 뜻하는 토(土)가 들어간 기해년(己亥年)이어야 한다. 2007년은 ‘600년에 한 번 오는 황금 돼지해’라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이런 말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홍성신문 제1008호, 2007년 1월 1일자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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