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야기에 나타난 도깨비의 모습은 다양한데, 얼굴 생김은 괴물형이고 머리에는 뿔이 하나 돋아 있다. 눈과 코와 입이 특히 크고, 큰 송곳니 두 개가 빠져 나왔으며, 수염은 붉은 색이고, 몸에는 털이 숭숭 돋아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동물의 모습, 선비나 농부 또는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신이한 모자나 감투를 쓰거나 등거리를 입어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도깨비는 어둡고 조용한 곳의 동굴이나 빈 집, 빈 절, 우물, 옛 성, 계곡, 고목 나무, 공동묘지 등에 자주 나타난다. 도깨비가 나타나는 시간은 주로 밤인데, 동이 트거나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 또는 닭 우는 소리가 나면 사라진다.
 
    도깨비는 타고난 장난꾸러기이다. 그래서 남의 제사 음식을 먹어치우는가 하면, 하룻밤 사이에 잔칫집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또 남의 집 쇠솥 뚜껑을 종이처럼 꾸겨서 솥 안에 넣어 넣어놓기도 한다.  도깨비는 고지식하고, 생각하는 바가 단순하며 건망증이 심하다. 도깨비의 모습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살펴본다. 

   옛날에 한 농사꾼이 열심히 일하며 돈이 생기면 항아리에 넣곤 하였다. 몇 년 뒤에는 모은 돈이 꽤 많았다. 그는 밤이면 벽장에 감춰둔 항아리를 꺼내어 돈을 세어보곤 하였다.  어느 날, 그가 돈을 세고 있는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한 남자가 자기는 건너 마을에 사는 김 서방인데, 돈 한 냥만 꿔 주면 다음 날 밤에 갚겠다고 하였다. 그는 방바닥에 돈이 있었으므로 거절하지 못하고 김 서방에게 한 냥을 꾸어주었다.
   이튿날 밤, 김 서방은 전날 밤에 꾼 돈이라면서 그에게 한 냥을 주었다. 그 다음 날 밤에도, 또 그 다음 날 밤에도 김 서방은 꾼 돈이라면서 한 냥을 가져왔다. 이 일이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김 서방이 도깨비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돈으로 좋은 논을 샀다.
    어느 날, 김 서방이 전과 같이  돈 한 냥을 주고 가자 그는 혼잣말로, 돈 한 냥을 꾸어갔으니 이자를 열 배로 쳐도 한 냥씩 열흘만 갚으면 되는데, 몇 년 동안 갚는 것을 보면 김 서방의 건망증도 보통이 아니라고 하였다. 잠시 후, 다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김 서방이 창문 앞에 서서, 자기가 건망증이 심하여 돈을 매일 갚았으니, 이자를 열 배로 쳐서 열 냥만 받고, 나머지 돈은 돌려 달라고 하였다. 그가 논을 샀기 때문에 돈이 없으니, 논을 떠갈 테면 떠가라고 하였다.
   그날 밤, 도깨비들이 떼로 몰려와 그 논을 떠가려고 네 귀퉁이 말뚝을 박고 별 짓을 다 해 보았으나, 논을 떠 갈 수는 없었다. 동이 터 오자, 화가 난 도깨비들은 논에 돌멩이를 잔뜩 던져놓고 가 버렸다. 이를 본 그가 "논에 돌멩이 넣으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아나보군. 쇠똥이라면 몰라도 돌멩이는 무섭지 않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날 아침에 그가 논에 가 보니, 돌멩이는 하나도 없고 쇠똥이 가득하였다. 그 후 그는 부자가 되었다.

   위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부자가 된 것은 도깨비의 건망증과 단순한 사고 방식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주인공이 부지런하고, 근검·절약하며 저축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 도깨비는 주인공이 부지런하고, 근검·절약하며 저축을 많이 하는 사람이기에 자기의 건망증과 단순 사고를 빙자하여 그를 도와 부자가 되게 해 준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땅은 도깨비도 못 떠간다는 말이 나왔다.

    옛날에 한 남자가 내에서 게를 잡고 있었다. 그 때 한 남자가 와서 메밀묵을 먹고 싶으니, 메밀묵 한 동고리를 쒀다 주면 게를 많이 잡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는 내일 메밀묵을 한 동고리 쑤어다 줄 터이니, 오늘 게를 많이 잡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 남자는 자기가 내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게를 몰아줄 터이니, 뒤따라오면서 게를 주워담으라고 하였다. 그가 그의 뒤를 따라가니, 쇠똥 같은 것이 떠내려왔다. 그가 이상히 여겨 주워 보니, 모두 큰 게였다. 그는 그날 게를 많이 잡았다.
   이튿날, 그가 다시 게를 잡고 있는데, 그 남자가 와서 묵을 쑤어 왔느냐고 물었다. 그가 오늘 하루 더 게를 많이 잡게 해 주면 내일은 꼭 묵을 쑤어다 주겠다고 하였다. 그 남자가 대답하고 내를 거슬러 올라간 뒤에 게가 둥둥 떠내려 왔다. 그가 기뻐하며 게를 집에 바구니에 가득 담아 가지고 와서 보니 모두 쇠똥이었다.

   위 이야기에서 그 남자가 도깨비인 것을 안 주인공은 그 남자와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이용만 하려고 하다가 도깨비에게 골탕을 먹고 말았다. 이것은 도깨비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 의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골탕을 먹이거나 벌을 준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도깨비는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는 요술 방망이를 가지고 다니므로, 그것을 얻기만 하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옛날에 한 나무꾼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가 낙엽을 긁고 있는데, 개암 하나가 눈에 띄였다. 그는 그것을 아버지를 드리겠다며 주머니에 넣고, 다시 나오자 어머니를 드리겠다며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개암이 보이자 아내를 주겠다고 하고, 그 다음에 자기 것이라고 하며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나무를 해 가지고 오다가 날이 저물어 빈 집으로 들어갔다. 밤중에 도깨비들이 떼를 지어 들어오므로, 그는 무서워서 다락에 숨었다. 그가 다락 문틈으로 내다보니, 도깨비들이 이상한 방망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밥 나와라 똑딱!" 하면 밥이 나오고, "술 나와라 똑딱!" 하면 술이 나왔다. 도깨비들은 그 음식과 술을 배불리 먹은 뒤에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배가 고픈 그는 주머니에 넣어둔 개암 하나를 꺼내어 깨물었다. 개암 껍질 깨지는 소리가 크게 나니, 도깨비들은 천둥 소리라며 몹시 당황하였다. 그가 다시 개암을 깨무니, 도깨비들은 하느님이 노하셔서 천둥치는 것이라며 방망이를 그대로 두고 황급히 도망하였다. 그가 그 방망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두드리며 금과 은과 돈을 비롯하여 필요한 것을 나오라고 하니, 그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그는 큰 부자가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욕심쟁이 부자가 그를 찾아와 부자가 된 연유를 물었다. 그의 말을 들은 부자는 도깨비를 만나 방망이를 얻을 욕심에서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부자는 개암 하나가 나오자 "이것은 내가 먹어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고, 그 다음에는 아내와 아이를 주겠다고 하고, 그 다음에야 아버지와 어머니께 드리겠다며 주머니에 넣었다. 부자가 날이 저문 뒤에 빈 집 다락에 숨어 있으니, 도깨비들이 와서 방망이를 두드리며 술과 음식을 나오게 한 뒤에 실컷 먹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그 때, 부자가 개암을 내어 깨무니, 도깨비들은 다락으로 올라와 부자를 끌어낸 뒤,  지난번에 속아서 빼앗긴 방망이를 내놓으라며 그를 때렸다. 그래서 부자는 도깨비한테 매만 맞고 돌아왔다.

  위 이야기에서 마음씨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나무꾼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를 얻어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탐욕스런 부자는 도깨비한테 매만 맞았다. 이를 보면, 도깨비는 신통력이 있는 도깨비방망이를 가지고 다니는데,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하며 효성이 지극한 사람에게는 그것을 주어 부자가 되게 해 준다. 그러나 탐욕스런 사람에게는 벌을 내린다. 이 이야기에는 도깨비가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지만,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고 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의식은 <혹부리 영감> 이야기에도 나타난다.     
  신통력을 지닌 도깨비는 무서워하는 것이 없을까?  옛날에 한 젊은 여인이 과부가 되어 몇 년을 살고 보니, 남자 생각이 간절하였다. 어느 날 밤에 한 남자가 그녀의 집에 찾아와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였다. 그녀는 그 남자를 반갑게 맞이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한 뒤에 즐거운 밤을 보냈다. 그 후로 그 남자는 밤마다 찾아와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가진 뒤에 새벽에 돌아가곤 하였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마을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시댁 어른들이 알까보아 겁이 나기도 하고, 그 남자가 사람이 아니라 도깨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남자를 멀리하려고 하였으나,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밤마다 찾아왔다.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 무서워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남자는 개의 피를 무서워한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무서운 것이 무어냐고 물었다. 그녀는 떡을 무서워한다고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이튿날, 그녀는 개를 잡아 개의 피를 대문과 방문을 비롯하여 집안 곳곳에 뿌려 놓았다. 그날 밤에 그 남자는 개의 피를 보고 집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욕을 하면서 떡을 집 안으로 던졌다. 그녀가 돈이라면 몰라도 떡은 무섭지 않다고 하니, 이번에는 돈을 던졌다. 그 후로 그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위 이야기에서 도깨비는 여성을 좋아하고, 개의 피를 무서워한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말의 피를 무서워한다. 이 이야기에서도 도깨비는 단순한 사고 때문에 과부에게 이용당하고 만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깨비는 장난을 좋아하고, 생각이 단순하며 건망증이 심하다, 그러나 신통력을 지니고 있어서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준다. 이것은 민중들이 자기들의 사는 모습과 바람을 도깨비에게 투영한 것이라 하겠다.
                                       <농지개량 제186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8)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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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에는 재미있는 도깨비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온다. 도깨비 이야기에는 도깨비불을 본 이야기, 도깨비와 씨름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도깨비를 만나 소원을 성취하고 부자된 이야기, 거짓말을 했다가 도깨비한테 혼난 이야기 등 많이 있다.
 
  도깨비 이야기는 어른들도 좋아하지만, 어린이들도 매우 좋아한다. 지금까지 나온 360여 권의 전래동화집에 여러 번 수록된 이야기 100화를 뽑아 수록 빈도수를 조사해 보니, <도깨비방망이>, <도깨비감투>, <혹부리영감> 등이 상위권에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어린이들이 도깨비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준다.
 
  도깨비는 신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귀신들과는 달리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도와준다, 도깨비는 거짓말 한 사람, 탐욕스런 사람을 골탕먹이고 벌을 주기도 하지만, 착한 사람을 해치는 일은 없다. 그래서 한국인은 어린 시절에 도깨비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하고, 도깨비와 만나는 꿈을 꾸기도 한다. 한국인과 친근한 도깨비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깨비는 '돗가비', '도채비' '독갑이', '귓것', '망량((魍魎)' 등으로 불리는데, 제주도에서는 '영감'·'참봉'이라고 부른다. 도깨비는 15세기에 쓰여진 《월인석보}나 《석보상절}에는 '돗가비'로 표기되어 있다. 국어학자의 해석에 의하면, 돗가비는 '돗'과 '아비'의 합성어인데, '돗'은 '도섭'을 뜻한다고 한다. '도섭'이란 능청맞고 수선스럽게 변덕을 부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돗가비'는 '돗아비'에 'ㄱ'이 첨가된 것으로, '수선스럽고 능청맞게 변덕을 부리는 아비'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도깨비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어원 해석이어서 흥미롭다.

  도깨비에 관한 문헌 기록으로 오래된 것은 《삼국유사》의<도화녀와 비형랑> 이야기이다. 신라 25대 진지왕의 영혼이 죽은 뒤에 살았을 때 좋아하던 도화(桃花)를 찾아가 7일 간 교혼(交婚)한 뒤에 비형(鼻荊)을 낳았다. 26대 진평왕이 그를 데려다 대궐에서 기르고 집사 벼슬을 주었는데, 그는 밤마다 나가서 도깨비들과 어울려 놀다가 새벽 종소리가 나면 들어오곤 하였다. 진평왕이 이를 알고 비형에게 신원사 북쪽에 있는 내에 다리를 놓으라고 하였다. 비형이 도깨비들을 데리고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놓으니, 이를 '귀교(鬼橋)'라고 하였다. 또, 진평왕이 비형에게 도깨비 중에서 사람으로 출현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고 하니, 비형은 길달(吉達)을 천거하였다. 왕은 길달에게 집사 벼슬을 주었는데, 길달은 충성스럽고 정직하였다. 길달은 흥륜사 남쪽에 문루(門樓)를 세웠는데, 이를 길달문(吉達門)이라 하였다. 뒤에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달아나니, 비형이 다른 도깨비들을 시켜 길달을 잡아 죽였다.
 
  이 이야기에서 도깨비는 밤에만 활동하는 야행성(夜行性)이 있고,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완성하거나 문루를 세울 수 있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지왕의 혼령과 과부 도화 사이에서 난 비형은 인간과 신의 양면성을 지닌 신이한 존재로, 도깨비들을 통솔하고,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도깨비의 형상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성현(1436∼1509)이 쓴 《용재총화 》에는 "허리 위는 보이지 않고 허리 아래만 보이는데, 종이 옷을 둘렀고, 다리는 살이 없이 바짝 말랐는데, 검은 칠을 한 것 같다."고 하였다. 유몽인(1558∼1623)이 쓴 《어우야담 》에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내는 도깨비의 장난에 시달리던 사람이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니, 놀랄 것이라고 하면서 그려 주었는데, 무서워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깨비가 스스로 그린 모습은 머리가 두 개, 눈이 네 개이고, 높은 뿔에 입을 벌리고 이빨을 드러냈는데, 코와 입이 터져 있고, 입과 눈동자는 모두 시뻘겋더라고 하였다. 이런 모습은 삼국 시대 이래로 전해 오는 귀면와(鬼面瓦)의 모습과 비슷하다.
 
  지금 생존해 있는 어르신들 중에는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사람이 많이 있다. 도깨비불은 흐린 날이나 보슬비가 내리는 밤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서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자란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있는데, 궂은 날 밤이면 들판 건너 산밑에서 도깨비불이 노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어느 여름밤에 들녘 끝자락에서 불빛이 사뭇 움직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도깨비불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도깨비와 씨름하였다는 사람도 여럿 만나보았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에 어떤 사람이 장에 갔다가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해가 진 뒤에 집에 오게 되었다. 그가 마을 가까이에 있는 상엿집 근처에 왔을 때, 숲 속에서 한 장정이 나와서 씨름을 하자고 하였다. 그가 "이 밤중에 무슨 씨름이냐?"고 핀잔을 하고 지나쳐 오려고 하니까, 그 장정이 길을 막으며, "나와 씨름을 하여 이기면 집에 갈 수 있지만, 지면 집에 못 간다."고 하였다. 씨름을 시작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보았지만, 생각처럼 쉽게 이길 수가 없었다. 그가 잘 쓰는 왼다리감기 기술을 거니, 장정이 넘어졌다. 그가 손을 털고 오려고 하니, 장정은 한 판 더 하자고 하였다. 그는 다시 있는 힘과 기술을 다해 그를 메치고 오려고 하니, 장정은 한 번만 더 하자고 하였다. 집으로 오려고 하는데 또 씨름을 하자고 하므로 그는 그를 다시 업어 메친 뒤에 허리띠를 끌러 옆에 있는 밤나무에 묶어놓고 집으로 왔다. 이튿날 아침에 그가 허리띠를 찾으러 그 곳에 가보니, 허리띠로 밤나무에 묶어 놓은 것은 쓰다 버린 빗자루였다.   

    위 이야기에서 남자가 씨름을 한 장정은 도깨비이고, 그 본체는 빗자루이다. 그는 밤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상엿집 근처에서 도깨비를 만났다. 다른 이야기에서도 도깨비를 만나는 시간은 해진 뒤이고, 만나는 공간은 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고개, 서낭당 앞 등 다양하다. 도깨비의 본체로는 부지깽이, 절구공이, 키로 나타나기도 한다. 씨름을 하다 보니, 도깨비는 다리가 하나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과 도깨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있는데, 조선 연산군 때 김안로가 쓴 《용천담적기》에는 좀 색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한 선비가 해진 뒤에 거리에 나섰다가 한 여인을 만났는데, 달빛에 비친 여인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가 여인에게 다가가 말을 거니, 여인이 상냥하게 받아주었다. 그는 여인을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갔다. 여인의 집은 골목길을 돌아 개천가에 있었는데, 흰 담장이 둘러있는 저택이었다. 방안에 들어가 보니, 단정한 병풍과 서화가 눈부시게 아름답고, 수놓은 자리와 꽃방석, 화장대와 화로 등이 세간에서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옷을 벗어 횃대에 걸고, 금침에 들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새벽녘에 천둥소리가 요란하여 잠을 깨어 보니, 호화저택은 간 곳이 없고 돌다리 아래에서 흙덩이를 베고, 가마니때기를 덮고 누워 있는데, 악취가 진동하였다. 옷을 찾으니, 돌 틈에 끼어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선비를 홀린 여인은 도깨비인데, 남성을 홀린 것으로 보아 암도깨비였던 것 같다.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도깨비 이야기는 대부분 여인이 남성인 도깨비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돈도 얻어 잘사는 숫도깨비 이야기이다. 그런데, 위 이야기는 암도깨비 이야기여서 흥미롭다.
 
  도깨비의 성정, 신이한 능력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으로 미루고, 도깨비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관해서만 잠깐 생각해 보자.
 
  도깨비의 정체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도깨비는 한국인이 오래 전부터 내면 깊숙이 간직해 온 자신감과 열등감, 바라는 것과 한스러움 등의 복합심리가 만들어낸 관념적 형상이다. 그래서 도깨비에는 한국인의 꿈과 낭만, 생활의 멋과 지혜, 경험을 통해서 얻은 교훈, 가치관 등이 복합되어 있다. 도깨비는 풍농(풍農)과 풍어(豊漁)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신앙되기도 한다. 도깨비는 먹고 마시고 춤추며 질펀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고, 가난하지만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노총각이나 과부의 애인 노릇을 하기도 하며, 재물을 가져다주거나 명당 자리를 잡아 주어 잘 살게 해 준다. 신이한 능력을 발휘하여 다리를 놓아주거나 보(洑)를 막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사람, 의리 없는 사람, 탐욕스런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 이러한 도깨비의 성정은 한국인의 내면의식을 형상화한 것이라 하겠다.
          <농지개량 제185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7)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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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네뛰기는 예로부터 단오절에 널리 행하던 민속놀이다. 그네뛰기는 남성놀이인 씨름과는 달리 여성들 사이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마을 어귀나 동네 마당의 큰 느티나무나 버드나무 가지에 줄을 매고 하였다. 그네를 매기에 적당한 나무가 없을 때에는 넓은 마당에 긴 통나무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가로질러 묶은 통나무에 그네를 매었는데, 이를 '땅그네'라고 하였다. 그네뛰기는 4월 초파일 전후에 시작하여 오월 단오까지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하는 그네뛰기는 긴장감과 박진감이 넘치므로, 재미와 함께 체력을 단련할 수 있는 놀이이다. 그네를 허공 높이 구르기 위해서는 온몸의 탄력을 이용하여야 하는데, 특히 팔 다리의 힘이 뛰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그네뛰기를 통하여 팔다리의 힘을 기르고, 온몸의 순발력과 민첩성을 기를 수 있다.
 
  녹음이 우거진 나무 사이에서 예쁘고 화려한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성이 그네에 올라 하늘 높이 몸을 날려 오가는 모습은 새장에 갇혀있던 새가 풀려나 하늘 높이 나는 것처럼 활기가 넘치면서도 아름답다. 단오에 그네뛰기 하던 모습을 민요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오월이라 단옷날은 천중가절(天中佳節) 아니냐./ 수양청청 버들 숲에 꾀꼬리는 노래하네.//
(후렴)후여넝층 버들가지 저 가지를 툭툭 차자.
후여넝출 버들가지 청실홍실 그네 매고/ 임과 나와 올려 뛰니 떨어질까 염려로다.//
한 번 굴러 잎이 솟고 두 번 굴러 뒷이 솟아/ 허공중층 높이 뜨니 청산녹수 얼른얼른.//
어찌 보면 훨씬 멀고 얼른 보면 가까운 듯/ 올라갔다 내려온 양 신선선녀 하강일세.//
난초 같은 고운 머리 금박댕기 너울너울/ 오이씨 같은 두 발길로 반공 중에 노닌다.//
요문갑사 다홍치마 자락 들어 꽃을 매고/ 초록적삼 반호장에 자색 고름도 너울너울.//

    이 민요에는 그네뛰기의 정경은 물론 그 멋과 흥취가 잘 드러나 있다. 민요를 이야기하다 보니,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니 구름 속에 나부낀다.……한 번 구르니 나무 끝이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고 노래한 가곡 [그네]의 노랫말이 떠오른다. 이 노랫말에도 그네 뛰는 모습과 함께 그 멋과 흥취가 드러나는데, 예로부터 불러오던 민요의 내용과 통하는 점이 있어 매우 흥미롭다.
 
  중국의 경우, 그네뛰기는 북방 유목민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옛 문헌인 {형초세시기(荊礎歲時記)}에 "북방 민족이 한식날 그네뛰기를 하여 가볍고 날랜 몸가짐을 익혔다. 그 후 이것을 중국 여자들이 배웠다.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나무 가지를 가로질러 맨 다음, 거기에 물감들인 줄을 매달고 선비와 부인들이 줄 위에 앉거나 서서 밀고 잡아당기며 놀았다. 이 놀이를 추천(추韆)이라고 일컬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아 중국의 그네뛰기는 북방에서 시작되어 점차 남쪽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설에는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북방의 융적(戎狄, 북방에 사는 異民族)을 친 후부터 그들의 놀이인 그네뛰기가 중국에 전해져 청명절을 전후하여 성행하였다고 한다. 당 나라 현종은 이 날 궁정에 그네를 매고 궁녀들에게 그네뛰기를 하게 하였는데. 이 놀이를 '반선녀(半仙女) 놀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그네뛰기가 중국에서 전래한 것인지, 아니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네뛰기에 관한 기록은 고려 때부터 보인다. 중국 문헌 {송사(宋史)}에는 고려 현종 때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곽원(郭元)이 "고려에는 단오일에 그네뛰기를 한다."고 하였다. 그네뛰기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 우리 나라 최초의 문헌은 {고려사(高麗史)}인데, "단오절에 최충헌이 그네뛰기를 백정동궁(栢井洞宮)에서 베풀고, 문무(文武) 4품 이상을 초청하여 연회하기를 사흘 동안 하였다."는 기록과 최이(崔怡)가 "5월에 여러 관원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할 때 그네를 매고 무늬 놓은 비단과 채색 꽃으로 꾸몄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우왕이 "거리를 순행하고, 수창궁으로 가서 그네뛰기를 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로 보아 고려 시대에는 그네뛰기가 널리 성행하였고, 매우 호사스러웠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쓰여진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단오 날에 여염집 부녀자들 사이에 그네뛰기가 성행하였다."고 하였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항간에서는 단오절에 남자와 여자들이 그네뛰기를 많이 한다."고 하였다. {송경지(松京誌)}에는 "5월 5일 단오절이 되면 여염집 여자들은 그네뛰기를 하고, 남자들은 씨름을 한다."고 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제주도에는 매년 8월 보름에 다른 놀이와 함께 그네뛰기를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하였다. {개성지(開城誌)}에는 "5월 5일에 여자들은 성장을 하고 경덕궁에 모여 그네를 뛰고, 남자들은 만월대에 모여 씨름을 한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조선 시대에도 그네뛰기가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네뛰기에는 한 사람이 뛰는 '외그네뛰기'와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뛰는 '쌍그네뛰기'가 있다. 그네뛰기 대회를 할 때에는 누가 더 높이 오르는가를 겨루는데, 높이를 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네 앞 적당히 떨어진 곳에 긴 장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방울을 매단 다음, 그네가 앞으로 높이 솟아오를 때 장대에 매달린 방울을 발로 차서 방울을 울리는데, 정한 횟수를 오가면서 울리는 방울 소리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승부를 가리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그네의 발판에 긴 줄자를 매달아 그네가 높이 올라갔을 때 그 높이를 재는 방법이다. 그네뛰기 대회를 할 때에는 푸짐한 상품도 주어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그네뛰기는 20세기초까지 전국 각지에서 널리 행해졌는데, 서울을 비롯하여 개성, 평양, 사리원, 수원, 남원, 김천 등에서는 대대적으로 행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당시에 우리 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일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국가가 총동원을 해야하는 때에 그네뛰기와 같은 한가한 민속놀이를 할 수 없다 하여 이를 금하였다. 그래서 한 동안 널리 행해지지 않다가 8·15광복 후부터 다시 전국에서 이 놀이가 부활하였다. 서울에서는 남산과 장충단 공원, 사직공원에서 그네뛰기 대회가 민간 단체의 주관으로 크게 열렸다. 1956년에는 이승만 대통령 82회 탄신 축하 기념 행사로 창경궁에서 그네뛰기 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이 때 일반은 개인전을, 여자 중·고생은 단체전을 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최근에 와서는 다양한 운동경기와 여가 선용 방법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그네뛰기는 전처럼 널리 행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은 주부클럽연합회에서 신사임당 기념행사의 하나로 1970년부터 매년 5월에 하는 그네뛰기 대회와 밀양의 '아랑제(阿娘祭)'와 남원의 '춘향제(春香祭)' 때에 그네뛰기 대회가 열리고 있는 정도이다. 

    그네는 지방에 따라 '근데, 군데, 근듸, 군듸, 근의, 군의, 구리'라고 하는데, 한자로는 '추천( 韆)'이라고 한다. 고려 때 지어진 경기체가 [한림별곡]에는 "홍(紅)실로 홍(紅)글위 매요이다"라 하여 그네를 '글위'라 하였다. 그네를 조선 정조 때 이성지(李成之)가 지은 {재물보(才物譜)}에는 '근의'라 하였고, 숙종 때 신이행(愼以行)·김경준(金敬俊)이 지은 {역어유해(譯語類解)}에는 '그릐'라 하였다. 고소설 {춘향전]에서는 "이애 향단아 근듸 바람이 독하기로 정신이 어찔하다. 근듸줄 부뜰어라."라 하였다. 이로 보아 그네는 시대에 따라,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원래는 '근의'였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그네는 '끈(繩)의 놀이(戱)'를 뜻하는 말이라 하겠다.

  그네뛰기는 단오에, [놋다리밟기]나 [강강술래]는 추석에 널리 행해온 여성의 민속놀이인데, 외출이 자유스럽지 못하던 조선 시대의 여성들도 이 날만은 자유롭게 외출하여 친구·친척·친지들과 함께 이들 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즐기곤 하였다. 그 중 그네뛰기는 녹음방초(綠陰芳草)가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에 여성들이 자연 속에서 하루를 즐기면서 체력단련도 할 수 있었으니, 민속적으로나 정서 함양·체력 단련 면에서 큰 의의를 지니는 놀이이다. '그네를 뛰면 여름에 모기에 물리지 않으며 더위도 타지 않는다.'는 말이 예로부터 전해 오는데, 이 말에는 그네뛰기를 하여 체력을 기르면, 여름을 탈없이 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네뛰기를 전처럼 널리 행하여 우리의 전통적 민속놀이를 계승하면서 체력도 기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농지개량 제184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6)에 수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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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동창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 갔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학교에 오가면서 건너다니던 냇가에 이르니, 친구들과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하고 노래를 부르며 두꺼비집짓기 놀이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 우리는 두꺼비집을 다 지은 뒤에 두꺼비를 잡아다가 각기 지은 집에 넣고, 누구의 집에 든 두꺼비가 나오지 않고 오래 있는가 내기를 하기도 하였다. 우리 둘레에 많이 있어 친근하게 느껴졌던 두꺼비는 민속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난 해 봄에는 정읍 지역의 민속을 조사하던 중에 정읍시 북면 마정리에 갔었다. 승용차를 타고 정읍에서 칠보 가는 길로 10분쯤 달리니, 4차선 도로변의 언덕에 두꺼비가 앉아 있는 형상의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는 가로(길이) 1m 90cm, 가로 90cm, 두께 70cm, 땅에서 입까지의 높이 80 cm, 땅에서 궁둥이까지의 높이 50cm 가량 되는 자연석이다. 이 바위가 있는 곳은 풍수지리상으로 아름다운 매화꽃잎이 떨어지는 연못의 형상을 지닌 '매화낙지(梅花落地)'라고 전해 온다. 그래서 자연마을 이름을 '매타실(梅墮實)' 또는 '연지동(蓮池洞)'이라고 한다. 이 바위는 원래 칠보산 용추봉에 있었는데, 천지조화의 힘을 얻어 풍광이 좋은 이곳으로 왔다고 전해 온다. 그런데 이 바위의 꼬리 부분이 향하는 마을은 풍년이 들고, 좋은 일이 겹쳐 일어나지만, 머리가 향하는 마을은 여자들이 바람난다고 전해 온다. 두꺼비 바위가 있는 곳에서 건너다 보이는 마을은 북면 월천동, 연지동과 평촌, 태인면 태남리 장재울 등 네 마을인데, 전에는 이 마을 사람들이 몰래 두꺼비 바위의 꼬리 부분이 자기 마을을 향하도록 돌려놓곤 하였다고 한다. 그 일로 이웃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는 일이 있어서 몇 년 전에 북면 태곡리에 사는 정종구(남, 57세, 농업) 씨 등 몇 명이 두꺼비 바위의 머리 부분을 마을이 없는 부분으로 향하게 한 뒤에 시멘트로 고정해 놓았다고 한다.

  지난 1995년 10월에는 경남 진해시 용원동 녹산공단 조성 공사장에서 공사를 하던 중에 땅 속에 묻혀 있던 두꺼비 모양의 바위가 모습을 드러낸 일이 있다. 가로 10m, 세로 8m, 높이 10m 가량의 이 바위는 두꺼비가 용원 앞 바다를 향해 뛰려고 움츠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바위가 발견되자 용원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가 마을의 수호신이므로 훼손하지 말고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신문 기사를 보고 이곳을 찾아갔을 때는 바위를 깨는 작업이 진행되어 몇 조각으로 깨진 뒤였는데,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바위를 깨는 작업을 맡은 중장비 기사의 꿈에 두꺼비가 나타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갈 터이니 며칠 만 기다려 달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듣지 않고 공사를 강행한 기사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마을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은 사람이 있었다고도 하였다. 

  나는 이런 일을 보며 두꺼비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 민속에서 두꺼비는 족제비, 구렁이 등과 함께 집 지킴이 또는 재물을 관장하는 신을 상징한다. 지킴이란 한 집안이나 어떤 장소를 지키고 있는 신령한 동물 또는 물건을 말한다. 이 지킴이는 가신(家神) 또는 수호신의 성격을 띠는데, 재복(財福)을 관장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두꺼비나 족제비, 구렁이는 부잣집에 꾄다고 전해 온다.

  무당의 굿거리 중 대감거리에서 부르는 <대감타령>에, "부자 되게 도와주마. 장자(長者) 되게도 도와주마. 곳간도 채우고, 단지도 채워서 멍의 노적 쌓아놓을 적에 노적 더미에 꽃이 피고, 금구렁이 굽을 치고, 업두꺼비 새끼치고, 금족제비 터를 잡아 밑의 노적 싹이 나고" 하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는 두꺼비가 재복을 관장하는 업신으로 나타난다.

  충북 청원군 오창에는 처녀를 구한 두꺼비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에 한 처녀가 끼니때마다 찾아오는 두꺼비에게 자기의 밥을 한 숟가락씩 덜어주곤 하였다. 얼마 지나자 그 두꺼비는 커다랗게 자랐다. 그 마을에서는 일년에 한 번씩 당집에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해에 두꺼비를 기른 처녀가 제물로 뽑혔다. 제물로 바쳐진 처녀가 밤에 당집에 들어가 보니, 두꺼비가 먼저 와 있었다. 한밤중에 천장에서 지네가 파란 불꽃을 뿜으며 처녀를 잡아먹으려 하자 두꺼비가 빨간 불을 토하며 지네와 싸웠다. 밤새도록 싸움을 한 두꺼비는 지네를 죽여 처녀를 구한 뒤에 기운이 다하여 죽었다. <지네장터> 설화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는데, 이 이야기에서 두꺼비는 의리가 있고, 희생 정신이 강한 동물로 나타난다.
 
  두꺼비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는 <나이 자랑> 이야기도 있다. 옛날에 노루가 잔치를 베풀고, 여러 짐승을 초대하였다. 잔치에 초대받은 짐승 중 여우와 토끼, 두꺼비가 서로 어른이라면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였다. 먼저, 여우가 나이 많음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는 천지개벽할 때 하늘에 별을 붙였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토끼는, 여우가 별을 붙이기 위해 딛고 올라간 사다리를 만든 나무가 바로 자기가 심은 나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두꺼비가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 여우와 토끼가 왜 우느냐고 묻자 두꺼비는, 토끼가 심었다는 그 나무로 망치를 만들다가 죽은 손자 녀석이 생각나서 운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여우와 토끼는 상좌를 두꺼비에게 양보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두꺼비는 의뭉스럽고, 지혜가 많은 동물로 나타난다.   

    평남 강서 고분의 천장에 있는 일월화(日月畵)의 달 속에는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두꺼비를 달의 정령으로 보는 의식의 표현이라 하겠다. 중국 신화에는 천하 제일의 궁사(弓師) 예(羿)가 서왕모로부터 불사약을 얻어다 놓았는데, 아내인 항아(姮娥)가 이를 남편 몰래 먹고, 남편의 활에 맞아 죽을 것이 두려워 달로 도망가서 미운 두꺼비로 변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우리 나라에 전해지면서 두꺼비가 달의 정령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경남 양산 통도사에 있는 자장율사의 사리탑 전설도 두꺼비와 관련이 있다. 자장율사의 사리를 보러 온 조정의 사신이 사리탑의 돌 뚜껑을 열게 하고 보니, 그 곳에 커다란 두꺼비가 앉아 있고, 그 뚜껑의 안쪽에는 뒷날 아무개 성을 가진 사람이 이것을 열 것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 아무개 성이 바로 그 사신의 성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두꺼비를 신령스러운 동물, 영혼의 표상으로 생각하는 의식의 표현이라 하겠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애장왕 10년 6월에 벽사(碧寺)의 두꺼비가 뱀을 잡아먹었는데, 그 해 왕의 숙부 언승(彦昇)과 아우 이찬 제옹(悌邕)이 군사를 이끌고 대궐로 들어와 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고 한다. 또 백제 의자왕 20년 4월에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는데, 그 해에 백제가 망했다고 한다. 이들 이야기에서 두꺼비는 국가에 변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알려준 동물이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에는 술이 나오는 술샘, 즉 주천(酒泉)이 있었다고 한다. 이 샘에서는 전에 술이 나왔는데, 양반이 오면 약주가, 상사람이 오면 막걸리가 나왔다고 한다. 어떤 상사람이 양반 차림으로 가서 물을 뜨니 막걸리이므로 샘물마저 사람 차별한다고 화가 나서 개를 잡아넣은 후로 술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 곳을 가보니, 주천의 전설을 적은 비석이 서 있고, 그 옆에는 돌로 만든 두꺼비의 입에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두꺼비의 입에서 물이 흐르도록 한 것은 두꺼비가 물의 저장 및 조절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의식의 표현이다.   
 
  전기를 사용하는 가정에는 전기의 사용량과 전압이 적정량을 초과할 때 퓨즈가 끊어지게 함으로써 안전을 도모하는 장치가 있는데, 이를 '두꺼비집'이라고 한다. 전에 연탄불을 피울 적에 사용하던 철판 덮개를 '두꺼비'라고 하였다. 전기 안전장치나 연탄 덮개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두꺼비가 불을 조절한다는 의식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있는 두꺼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를 보면, 정읍에서 두꺼비 바위의 꼬리가 자기 마을로 오게 하려고 애쓰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 녹산공단 조성 공사 중에 나타난 두꺼비 바위를 보존해야 한다던 마을 사람들의 주장을 알 것 같다. 두꺼비 이야기를 많이 하였으니, 자녀 갖기를 원하는 분들께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낳아 잘 기르라는 덕담 한 마디를 하고 끝을 맺어야겠다. 

  <농지개량 제183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5)에 수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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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에 갔다온 아내의 장바구니에 오이 몇 개와 부추 한 단이 들어 있다. 오이소박이김치를 담그려고 사왔다고 한다. 오이는 한겨울에도 사다가 먹었지만, 부추는 오랜만에 보는 것이어서 퍽 싱그럽게 보였고, 새 봄이 왔음을 실감하게 하였다.

  부추를 보니, 신혼 초의 일이 떠올랐다. 아내와 대화하던 중에 '부추'에 관해 말하게 되었는데, 내가 '졸'이라고 하니 아내는 '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잎과 줄기의 모양을 말한 뒤에 오이소박이김치를 넣을 때 오이 속에 넣는 채소를 말한다고 긴 설명을 하자, 아내는 크게 웃으며 '부추'를 말하느냐고 하였다. 그리고는 충청도 사투리로 말하니, 어찌 알겠느냐고 하면서 나를 '촌놈'이라는 뜻으로 놀렸다. 나는 '졸'이 표준어이고, '부추'가 사투리라고 우기다가 국어사전을 찾아 확인한 뒤에야 충청도에서 자란 내가 '부추'란 말을 몰랐던 것을 인정하였다.

  부추는 지방에 따라 '졸', '솔' 또는 '정구지'라고 하기도 한다. 한방에서는 '남자의 양기를 북돋우는 풀'이라 하여 '기양초(起陽草)'라고도 한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이를 '파옥초(破屋草)'라고도 하는데,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전에 어느 농부가 하루 종일 들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 이웃 사람의 생일 잔치에 갔다. 이웃사람 몇 명을 초대한 그 집에서는 다른 때보다 몇 가지 음식을 더 장만하여 술을 대접하였다. 술과 음식을 맛있게 먹은 농부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그날 밤 그의 아내는 크게 만족하였다. 아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남편에게 물었다.

  "생일 집에 가서 무얼 먹었기에 오늘 밤 그렇게 힘이 좋았어요?"
  "음, 그 집 음식 중에 부추 무침과 부침이 특히 맛이 있어서 그 걸 안주로 술 몇 잔 먹고 밥을 먹었을 뿐 별다른 것은 없었소."

  이튿날 아침, 농부가 다른 날보다 좀 늦게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와 보니, 아내가 아랫집을 헐고 있었다. 농부가 깜짝 놀라 왜 아랫집을 허느냐고 물으니, 아내가 말했다.

  "부추가 남자에게 그렇게 좋은 채소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 아랫집을 헐고, 그 자리에 당신한테 좋은 부추를 심으려고 헐고 있어요."

  이 이야기는 부추가 양기를 북돋운다는 것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인데, 이러한 연유로 부추를 '집을 헐고 심는 채소'라는 뜻의 '파옥초(破屋草)'라고 한다고 한다. 예로부터 공부하는 선비나 도를 닦는 수도자는 부추를 먹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부추가 양기를 북돋우는 효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추의 원산지는 중국 서북부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자생하고 있다. 부추는 돌보지 않아도 잘 자라기 때문에 '게으름뱅이풀'이라고도 한다. 한자로는 '(구)'라고 하는데, 《설문자해(說文字解)》에는 부추 잎을 여러 번 잘라도 계속 싹이 나오기 때문에 땅(一) 위에 자라는 형상을 따서 (구)라고 하였다 한다. 

  시경(詩經)에 "염소를 바치고, 부추로 제사를 지낸다(獻羔祭)."란 말이 있다. 이것으로써 부추는 오래 전부터 중국에서 먹었고,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문헌으로는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1236),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1433), 훈몽자회(訓蒙字會)(1527) 등의 문헌에 부추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부추는 우리 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부추를 병마나 액을 쫓는 힘이 있다 하여 김치를 담글 뿐만 아니라 각종 찌개나 찬을 만드는 데 양념처럼 몇 가닥씩 집어넣곤 하였다. 이것은 부추가 줄기는 희고, 잎은 파라며, 싹은 노랗고, 뿌리는 붉은 빛을 띠며, 씨앗은 검은 오색 채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추는 겨울에도 죽지 않으며, 뿌리를 찢어 심어도 잘 살고, 몇 번씩 잎과 줄기를 잘라도 바로 싹이 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다섯 가지 색을 지닌 채소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병마나 액을 쫓는 데에 특별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겼으며, 다른 식물에 비해 생명력이 강한 식물을 신성시하였다.   

  부추는 서양 사람에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셰익스피어가 쓴 <한여름밤의 꿈>에서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매혹적인 눈매를 '부추눈매'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푸른 눈으로 쏘아보면, 부추처럼 얼얼해진다는 데서 온 표현이라 생각한다. 이탈리아의 시실리 지방에는 부추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   

  옛날에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어머니가 죽어서 저승에 갔다. 저승을 주관하는 저승 왕이 이승에 있을 때 그녀가 한 일을 적은 문서를 살펴보니, 그녀는 거지에게 부추잎 하나를 준 것밖에는 남에게 베푼 것이 없었으므로 지옥으로 보냈다. 얼마 후 베드로도 죽었는데, 그는 살았을 때 좋은 일을 많이 하였으므로 천당의 문지기가 되었다. 어느 날, 베드로가 귀에 익은 여인의 신음소리를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어머니가 저 아래 지옥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베드로를 본 어머니는 주님께 잘 말씀드려 지옥에서 꺼내 달라고 하였다. 베드로가 주님을 찾아가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해 달라고 하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어머니가 적선한 것은 부추잎 하나뿐이니, 부추잎 하나로 너의 어머니를 끌어올려라."

  부추잎 하나로 어머니를 끌어올릴 수 없음을 안 베드로는 어머니를 보며 슬피 울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연유되어 이탈리아에서는 부추를 '절망 속의 실현할 수 없는 희망'을 뜻하는 말로 쓴다고 한다. 
 
  한방에서는 부추가 마늘·파·양파 등과 같이 온열성(溫熱性)이 있으므로, 따뜻한 기운이 있으면서 솟는 힘이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기(氣)의 운행을 도와주고, 혈(血)이 뭉쳐진 것을 풀어주어 간과 신(腎)을 튼튼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부추는 몸이 냉해 비위(脾胃)의 기능이 저하된 소음인에게 효과가 있다고 한다. 찬 음식을 급히 먹어 체한 경우에는 부추를 된장에 끓여 먹으면 막힌 속이 풀린다고 한다. 부추는 양기를 올리는 꿀과 함께 먹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는 데, 이 역시 부추의 특성과 관련지어 하는 말이다.     

  요즈음에도 한국인은 부추를 나물, 김치, 부침 등으로 많이 먹고 있다. 오이소박이를 담글 때에는 반드시 부추를 썰어 넣는다. 중국 음식점에서는 부추 잡채의 인기가 높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부산대학교 연구팀이 부추김치에 항암 효과가 크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김치가 항암 작용을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김치 중에도 부추 김치가 으뜸이라고 한다. 배추김치의 위암 세포 억제 효과가 70%인데 비하여 부추김치는 85∼94%에 이른다고 한다. 더욱이 배추김치는 익어야 효과가 있는데 비하여 부추김치는 풋김치일 때에도 그 효과가 있다고 한다. 민간이나 한방에서 건강에 좋다고 전해 오는 부추가 항암 효과가 있다고 하니, 건강 증진을 위하여 부추를 많이 먹어야겠다.

    <농지개량 제182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4)에 수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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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 중에는 요즈음에도 신년 초가 되면 그 해의 운세를 알아보기 위하여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보기도 하고, 점쟁이를 찾아가 일생의 운세와 함께 그해의 신수를 보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들은 신년 초가 아니더라도 일이 있을 때마다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하는데, 그 경우는 아주 다양하다. 점쟁이를 찾아가 앞일을 알아보는 것을 '점친다', '점본다', '문복(問卜)한다'고 하는데, 이를 '점복(占卜)'이라고 하기도 한다. 

  점복(占卜)이란 인간의 생활에 따르는 모든 조짐을 신비적인 방법으로 미리 알아내어 인간의 생활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한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활에 따르는 모든 조짐'이라고 할 때의 '조짐'은 한 개인이나 가족 또는 집단의 과거, 현재, 미래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대한 조짐을 말한다. 이러한 조짐을 미리 알아보는 방법으로는 점복을 한다. 요즈음에 주로 행해지는 점복에는 신점(神占), 역리(易理)에 의한 점, 상점(相占), 몽점(夢占), 풍수점(風水占) 등이 있다. . 

  신점은 신이 내린 무당이 신의 영력(靈力)을 이용하여 점을 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무당에 따라 다르다. 어떤 무당은 주문(呪文)을 외우며 방울을 흔들어 신을 부른 뒤에 신의 계시를 받아 점괘를 말하고, 어떤 무당은 주문을 외우며 엽전 7개를 두 손 안에 넣고 흔든 뒤에 엽전을 점상(占床) 위에 뿌려 엽전이 앉는 모양을 보고 점괘를 말한다. 어떤 무당은 점상 위의 쌀을 이용하여 점을 하고, 어떤 무당은 알이 큰 염주를 돌리며 신을 불러 신의 계시를 받기도 한다. 신점을 하는 무당들은 사람의 출생과 성장·혼인·자녀·부귀·건강과 질병·수명 등 인간의 모든 일이 신의 뜻에 따라 정해지고, 그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점복을 통하여 신의 뜻을 알아보고, 신에게 기원하여 질병과 재난을 물리치고, 복을 받게 해 주려고 한다.

  역리에 의한 점은 역학에 관한 이론을 학습한 사람이 역리를 풀어서 하는 점이다. 역리를 학습한 사람을 흔히 '철학가(哲學家)', '역학가(易學家)', '역술인(易術人)'이라고 하는데, 이들 중에는 집안기도·산기도 등을 통하여 강신(降神) 체험을 한 사람도 있고, 강신 체험 없이 학습과 연구를 통하여 역리를 깨우친 사람도 있다. 강신 체험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학습한 역학의 이론 위에 신의 계시가 겹침으로써 점의 적중률이 높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사람의 운명은 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운명을 정하는 네 기둥 즉 사주(四柱)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주를 역리로 풀어서 정해진 운명을 미리 알아 좋은 일이 예정되어 있을 때에는 그에 순응하여 맞아들이고, 질병·재난이 있을 때에는 부적·독경(讀經)·기도·액막이·굿 등을 통하여 이를 예방하거나 물리쳐야 한다고 한다.

  상점에는 얼굴의 형상을 주로 보는 관상(觀相), 손의 모양과 손금을 주로 보는 수상(手相) 등이 있다. 상점은 관상과 수상을 공부한 사람이 보는데, 이들은 관상이나 수상뿐만 아니라 역리(易理)도 함께 공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관상이나 수상은 많은 사람의 관상과 수상을 보아서 얻은 경험과 통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적중률이 높다고 한다.

  몽점은 해몽(解夢)을 통해 조짐을 알아보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꿈을 꾼 사람이나 가족이 꿈을 풀이하기도 하지만, 전문적인 해몽가에게 해몽을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해몽가는 신점을 하는 무당이나 역리점을 하는 역학가, 상점을 하는 관상가 등이 겸하는 경우가 많다.

  풍수점은 풍수설을 연구한 사람이 집터나 조상의 묏자리를 보고, 점을 치는 것이다. 풍수설을 연구한 사람은 집터나 조상의 묏자리가 그 사람과 맞으면 발복하여 모든 일이 잘 되고, 맞지 않을 때에는 재난을 당하게 되는데, 이사를 하거나 묏자리를 옮김으로써 재난을 물리침은 물론, 복을 받아 잘 살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점복자를 찾아가 문복하는 이유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장사·사업·이사·매매·취업·소송 등을 하려고 할 때 그 일의 잘되고 못됨, 이로움과 해로움 등을 미리 알아보기 위해 점을 한다. 혼인을 하려고 할 때에는 배우자의 선택·택일 등을 잘 하기 위하여 점을 하고, 개인의 이름·상호(商號) 등을 새로 짓거나 이의 좋고 나쁨을 알아보기 위하여 점을 한다. 병이나 재난이 있을 때에는 그 원인과 처리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실물(失物)·가출자·도망자 등이 있을 때에는 그 행방을 알아보기 위하여 점쟁이를 찾는다. 또 자녀의 출산·건강·입학·입대 등을 알아보기 위하여, 집터나 묘지를 새로 선택하거나 이의 좋고 나쁨을 알아보기 위하여 점쟁이를 찾기도 한다.

  사람은 앞일을 알지 못하므로, 앞일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 궁금증은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가 어려우면 더해진다. 외환 위기와 함께 다가온 경제적 불황으로 실업자가 늘기 시작한 지난해부터 금년 초에 점복자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를 말해 준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현대인들이 점을 치는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 점을 하는 점복자나 점복자를 찾아가 문복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식은 사람의 출생·건강·부귀·자녀·배우자·원만한 인간 관계 등 삶에 필요한 모든 사항들이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되거나, 우주 운행의 이치에 따라 태어날 때 이미 정해 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다.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신의 탓으로 돌리거나, 사주 팔자를 지나치게 믿지 말아야 한다.

  운명은 자기의 성격, 의지, 노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점을 하지 않는 것이 현대인이 취해야 할 가장 좋은 태도이다. 그러나 앞일이 궁금하여 점을 하였을 경우에는 그 점괘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 그 점괘를 '자성예언(自成豫言)'의 자료로 삼아 그 일의 성취를 스스로 예언을 한 뒤에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게 마련이다. 나쁜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경우에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면 된다.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면, 실수를 막을 수 있을 것이고, 좋지 않은 일이 있을지라도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이야기 중에 점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를 일깨워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부지런히 일하며 살던 중년의 농부가 이름 있는 점쟁이를 찾아가 많은 돈을 내놓고 점을 해 달라고 하였다. 점쟁이는 그에게 '지금처럼 살면 노년에 누워서 먹을 팔자'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그날부터 자기는 누워서 먹을 팔자이니,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놀기만 하였다. 농사철이 되어도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니, 아내가 나서서 농사일을 하였으나, 일이 잘 되지 않았다. 몇 년을 그렇게 살고 보니, 그 사람은 살림이 어려워져 끼니를 걱정하게 되었다. 크게 깨달은 그는 다시 부지런히 일하여 살림을 일으킨 뒤에 편안한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금년 가을에 시집갈 것'이라는 점괘를 받은 노처녀가 있다면, 그 처녀는 그 날부터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서 모임에도 나가고, 남의 혼인 예식에도 다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의 소개로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전철이나 만원 버스 안에서 만난 사람이 좋은 인연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운명은 불변의 것이 아니라 성공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운명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사람만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농지개량 제181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3)에 수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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