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십이지(十二支)에 따라 띠동물을 정하고, 그 동물을 그 해의 수호 동물로 생각한다. 그리고 띠동물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따져서 그 해의 운수를 점치기도 하고, 그 해에 태어난 사람의 운명과 관련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띠동물은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보통 때에는 가볍게 생각하다가도 해가 바뀌는 정초와 어린아이가 출생하였을 때, 혼인을 앞둔 젊은이가 궁합을 볼 때에는 이를 매우 중시한다.
단기 4332년(서기 1999년)은 기묘년(己卯年)으로 토끼해이다. 토끼는 십이지 중 넷째 지지(地支)인 묘(卯)로, 방위로는 동쪽, 시간으로는 오전 5∼7시, 띠로는 토끼, 달로는 음력 2월, 음양으로는 음(陰), 오행(五行)으로는 목(木), 색으로는 청(靑)에 해당한다. 토끼는 한국인의 정서 속에 친근하고 사랑스런 동물이다. 작고 귀여운 생김새와 놀란 듯한 표정에서 약하고 선한 동물로, 예민하고 재빠른 동작에서 영특한 동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토끼띠인 사람은 치밀하고 명석하며, 외길을 가는 학자나 교직자가 많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면서 계수나무 아래에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약 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의 모습을 상상하였다. 그래서 토끼는 장수(長壽)의 상징, 달의 정령(精靈)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토끼를 주인공으로 하는 판소리 <토별가(兎鼈歌)>에서 토끼는 묘방(卯方)인 동쪽을 맡은 방위신(方位神)으로, 양의 세계인 해에서 양기(陽氣)를 받아먹고, 음(陰)의 세계인 달에서 장생약(長生藥)인 음약(陰藥)을 받아먹는다. 그래서 음양 기운이 간에 들었으므로, 토끼의 간이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신령스런 약이라 하였다. 판소리계 소설 <토끼전>의 용왕이 화공(畵工)을 불러 토끼 화상을 그리는 대목에서는 토끼가 사는 공간을 신비화하여 표현하였다. 그리고 토끼를 달동물 또는 선계(仙界)의 신성동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토끼가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 벽화의 달 그림에 두꺼비와 함께 토끼가 등장하고, <삼국사기>에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토끼는 삼국 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듯하다. 그러는 동안에 토끼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사람들에게 흥미와 교훈을 주기도 하고, 사람의 행동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옛날이야기에 나타난 토끼의 모습은 어떠한가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토끼는 용기와 지혜로 위기를 극복하였다. <토기의 간> 이야기를 보면, 거북이의 꾀임에 빠져 용궁에 간 토끼는 용왕의 병에 자기의 간이 약이라고 하여서 자기를 데려왔다는 말을 듣고,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토끼는 어떻게든지 살아나가야 한다는 마음에서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산 속 샘가에 간을 빼어 두고 왔으니, 가서 가져오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용궁을 빠져 나왔다. <호랑이와 토끼> 이야기에서 토끼는 호랑이에게 잡혀 죽게 되자, 꾀를 내어 호랑이에게 참새 고기를 많이 먹게 해 줄 터이니, 참새 고기를 먹고도 배가 차지 않으면, 그 때 자기를 잡아먹으라고 한다. 호랑이가 좋다고 하자, 토끼는 호랑이를 대밭으로 데리고 가서 눈을 감고 앉아 있으라고 한 뒤 대밭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였다. 토끼가 호랑이에게 다시 잡히자, 토끼는 지난번의 실수를 사과하고, 물고기를 실컷 먹게 해 줄 터이니, 물고기를 먹은 뒤에 자기를 잡아먹으라고 한다. 호랑이가 좋다고 하자, 토끼는 호랑이를 연못으로 데리고 가서 꼬리를 물에 넣고 있으라고 한 뒤 시간을 끌어 호랑이의 꼬리가 얼어붙게 한 뒤 달아났다. 두 이야기에서 토끼는 용기와 지혜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둘째, 토끼는 사태를 직시하는 지혜와 판단 능력을 지니고 있다. <토끼의 재판>에서는 나그네가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구해주었는데, 그 호랑이가 나그네를 잡아먹으려고 한다. 나그네는 하도 기가 막혀 어쩔 줄을 모르다가, 다른 이에게 물어본 후 잡아먹으라고 한다. 나그네와 호랑이는 황소와 소나무, 토끼를 만나 지금까지의 일을 이야기하고,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황소는 사람들이 죽도록 일을 시킨 뒤에 잡아먹는 것을 들어, 소나무는 사람들이 베어다가 땔감으로 쓰는 것을 들어 사람의 그릇됨을 말하고, 호랑이에게 나그네를 잡아먹으라고 한다. 그러나 토끼는 처음에 어떤 상황이었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하여 호랑이로 하여금 다시 함정에 들어가게 한 후 나그네에게 어서 길을 떠나라고 한다. 토끼는 사태를 직시하는 지혜와 판단력이 있었으므로, 나그네를 구해주고, 자기를 구해준 은인을 잡아먹으려한 호랑이를 다시 함정에 빠뜨려 죽게 하였다.
셋째, 토끼는 약한 자를 도와주는 착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까치와 호랑이> 이야기에서 까치는 "새끼 한 마리를 주지 않으면 둥우리로 올라가서 새끼들을 한꺼번에 모두 잡아먹겠다."고 협박하는 호랑이에게 매일 새끼 한 마리씩을 주었다. 뒤늦게 이를 안 토끼는 까치에게 "호랑이는 나무에 오르지 못하니 염려하지 말고 새끼를 주지 말라."고 한다. 토끼는 이 일로 인하여 호랑이에게 잡혀 죽게 되었지만, 꾀를 써서 그 위기를 벗어났다. 자기의 지식과 지혜를 이용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동료를 도와준 토끼의 행동은 지식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가를 일깨워준다.
넷째, 토끼는 게으름쟁이를 깨우치게 하였다. <토끼와 개미> 이야기에서는 개미가 토끼의 등에 붙어서 피를 빨아먹으며 놀기만 하니, 토끼는 개미에게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것을 줄 터이니 내려오라고 한다. 개미가 내려오자, 토끼는 밥 덩어리를 나뭇잎에 붙여 가지고 끌면서 뒷걸음질친다. 개미는 맛있는 밥을 먹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기어갔지만, 뒷걸음질하는 토끼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개미는 하루 종일 먹을 것을 따라다녔으나 먹지 못하고, 배고픔으로 허리가 잘록해진 뒤에 마음을 고쳐먹고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다섯째, 토끼는 잔꾀를 부리거나 경망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경계한다. <토끼와 두꺼비> 이야기에서 토끼와 두꺼비는 잘 포장된 떡 한 그릇을 얻고, 어떻게 하면 떡을 더 많이 먹을 수 있을까를 궁리한다. 걸음이 빠른 토끼는 꾀를 내어 "떡그릇을 산꼭대기로 가지고 올라가 굴려서 네가 주은 것은 네가 먹고, 내가 주은 것은 내가 먹기로 하자."고 한다. 토끼는 구르는 떡 그릇만 보고 따라갔다가 떡을 먹지 못하고, 두꺼비는 뒤따라가면서 그릇 밖으로 튕겨나오는 떡을 널름널름 주워 먹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토끼는 제 꾀에 넘어가 떡을 먹지 못하였다. <토끼의 점> 이야기에서 토끼는 호랑이를 따라 빈 집에 들어간다. 그 때 집안에 숨어 있던 포수가 화승총을 쏘니, 방안에 있던 솜에 불이 붙었다. 총에 맞은 호랑이는 불에 타 죽고, 노루는 뛰어나가다가 다리가 째져 죽었다. 이를 본 토끼는 놀라서 죽었다. 이 이야기에서 토끼는 자신의 경망스러움 때문에 놀라서 죽고 말았다.
위에 적은 것은 우리 조상들이 마음 속에 길러온 토끼의 모습이다. 이를 통해 우리 조상들은 삶의 지혜를 일깨우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 왔을 것이다. 이러한 토끼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가를 일깨워 준다. 우리는 지금 한국 전쟁 이후 가장 큰 국난이라고 하는 경제 위기에 처해 있고, 여기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서 절망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토끼가 용궁에 잡혀갔을 때나 호랑이에게 잡혔을 때 보여준 용기와 지혜를 배우고, 사태를 직시하는 판단력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남을 돕고, 게으른 자를 일깨워 주는 착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토끼가 호랑이를 물리친 것처럼 호랑이해에 발생한 위기를 토끼해에 모두 물리치고,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토끼는 제 꾀에 넘어가 손해를 보기도 하고,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하며, 자기의 경망성 때문에 제풀에 죽기도 한다. 이것은 토끼의 속성에 빗대어 행동을 신중히 할 것을 일깨워 준다. 우리는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힘쓰되 자기를 과신하거나, 경망스럽게 행동하지는 말아야겠다. 이것이 토끼해를 맞는 우리들이 토끼 이야기에서 배워야 할 점이다.
<농지개량 제180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2)에 수록하였음.>
'자료실 > 한국민속 관련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을 가져다주는 두꺼비 (0) | 2011.07.18 |
---|---|
파옥초(破屋草)라 불리는 부추 (0) | 2011.07.18 |
점을 치는 마음 (0) | 2011.07.18 |
운명의 네 기둥--사주(四柱) (0) | 2011.07.18 |
꿈보다 해몽(解夢)을 잘해야 (0) | 2011.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