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머니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 곁을 떠나신 지 19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추도예배를 드리고, 잠시 어머니 생전의 일을 회고하였다. 어머니 생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 중에서 어머니를 서운하게 해 드린 일이 선하게 떠오른다.

  내가 아홉 살이던 1950년에는 6․25 전쟁이 일어났고, 열두 살 위의 형이 의용군으로 끌려가 소식이 끊겼다. 몸이 약하셨던 아버지는 큰아들을 잃은 충격이 겹쳐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마흔세 살에 큰아들을 잃고 홀로 되셔서 6남매를 데리고 넉넉지 못한 살림을 꾸려가야 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고단한 나날을 보내셨을 것이다.

  그 해에 어머니는 지인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약 2km 떨어진 교회의 예배와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다니셨다. 천막을 치고 시작한 예배당 건축을 위해 흙벽돌 찍는 일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교회 일을 앞장서서 하셨다.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어머니에게 성령님이 함께 하셨다.

  친척들은 어머니가 예수에 미쳤다며 비웃고, 빈정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날에는 가정예배를 드렸다. 어머니는 농사일과 길쌈을 열심히 하고, 삯바느질도 하면서 살림을 꾸리셨다. 몇 년 뒤에 누님 두 분은 결혼을 하고, 셋째 누님은 취직하였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휴학하고 취직하였다가 복학하여 친척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무렵 어머니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충서지방 감리사의 파송을 받아 농촌의 개척교회 담임 전도사가 되어 막내딸만 데리고 부임하셨다. 어머니는 교회 일을 충실히 하는 한편, 성경학교에 다니시며 신학공부도 열심히 하셨다. 그 교회가 부흥되자 또 다른 개척교회로 옮겨가서 교회 부흥에 힘쓰셨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어머니는 나에게 신학대학에 가서 공부한 뒤에 목사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목회자로 고생하시는 모습을 익히 보아왔기에 싫다고 하였다. 그리고 평신도로 교회를 잘 받들면 되지 않느냐고 하였다. 이 말은 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어머니는 이 말을 잊지 않으셨다,

  서울교육대학에 진학한 나는 졸업과 동시에 서울의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야간대학에 편입학하여 학부 과정을 마친 뒤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밟던 중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몇 년이 지난 뒤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자, 졸업생과 재학생이 주관하여 박사학위 영득 축하회를 열어주었다. 축하회장에서 어머니는 많은 친척과 친지로부터 축하를 받으시며 기뻐하셨다. 그 때 한 분이 어머니께 소감을 묻자, ‘아들이 문학박사 아닌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다. 신학박사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드러난 말이었다.

  교수가 된 나는 강의와 연구, 학생 지도, 외부 강의와 글쓰기, 방송 출연 등으로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무렵에 나는 ‘시간은 돈’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힘주어 말하곤 하였다. 그것은 생활 체험에서 나온 절실한 말이었다. 교회에서는 집사, 교회학교 교사, 권사의 직분을 맡았으나, 열심히 일하지는 못하였다.

  어느 날, 담임목사님께서 나를 장로로 추천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장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강하게 사양하였다. 그러자 목사님은 어머니가 ‘아들이 장로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다고 하시면서,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소원을 이뤄드리라고 설득하셨다. 그 이듬해에 나는 장로가 되었다. 그때 어머니는 여든아홉 살, 나는 쉰다섯 살이었다. 장로취임식에 참석하신 어머니는 정말 기뻐하셨다. 그 날에 만족해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께서 평생의 소원으로 삼고 기도하셨던 소원을 온전히 이루어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죄송스럽다. 그러나 한 가지는 이루어 드린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죄송스러운 마음을 눌러두려고 한다. 어머니의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한다. 어머니,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곧 뒤 따라 가서 뵙겠습니다. <기독교연합신문 1613호, 2022.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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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TV의 역사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이성계와 이방원이 불화하는 것을 보다가 문득 「살곶이다리 전설」이 떠올랐다. 이 다리에는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킨 뒤에 왕위에 오른 이방원(태종)에 대한 이성계(태조)의 미움과 분노, 용서와 화해와 얽힌 전설이 전해 온다. 서울시 성동구 성동교 동쪽 중랑천에 있는 이 다리를 다시 찾았다.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 3번 출구로 나가 50미터쯤 직진한 뒤 왼쪽으로 조금 가니 이 다리가 보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향처(鄕妻)인 한씨에게서 방우·방과·방의·방간·방원·방연 여섯 아들을 두고, 경처(京妻)인 강씨에게서 방번·방석 두 아들을 두었다. 왕위에 오른 태조는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를 제쳐 두고, 강씨 소생의 여덟째 왕자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래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특히 왕조 창업에 공이 큰 다섯째 왕자 방원은 세자 책봉뿐만 아니라, 방석의 보도를 책임지고 있는 정도전과 남은·심효생 등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것에 큰 불만을 품었다.

  태조 7년(1398) 태조의 병이 위중하자 왕자들이 모두 궁중에 모이게 되었다. 이를 기회로 방원은 정도전 등이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한다고 트집을 잡아 먼저 이들을 습격하여 죽였다. 그리고 세자 방석은 변란의 책임을 물어 귀양 보내는 도중에 죽이고, 세자의 동복형인 방번도 죽였다. 방원은 둘째형인 방과가 세자가 되도록 하였다. 사랑하던 강씨 소생의 왕자와 총신을 잃은 태조는 정사에 뜻을 잃었다. 그래서 왕위를 세자(정종)에게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갔다.

  정종 2년(1400) 태조의 넷째왕자 방간이 왕위에 뜻을 두고, 바로 밑의 동생인 방원을 시기하고 의심하였다. 박포의 충동질에 넘어간 방간이 군사를 동원하여 방원을 치려 하니, 방원도 군사를 일으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방간은 패하여 귀양을 갔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난이 끝난 뒤에 정종은 상왕(태조)의 허락을 얻어 방원을 세자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이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 성석린을 보내어 태조를 한양으로 모셔 왔다.

  그런데 태조는 태종 2년(1402)에 다시 함흥으로 가서는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이에 태종은 태조가 노여움을 풀고 한양으로 돌아오도록 하려고 여러 번 차사를 보냈다. 태조는 태종의 편이 되어 자기를 설득하러 오는 차사를 모두 죽이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 일로 한 번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하였다. 태종이 함흥에 차사로 갈 사람을 찾을 때 판중추부사 박순(朴淳)이 자청하였다. 그는 새끼 달린 말을 타고 가서는 일부러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 놓고 어미 말을 타고 갔다. 그러자 새끼 말이 어미를 부르고, 어미 말은 뒤를 돌아보며 머뭇거렸다. 말의 행동을 괴이히 여긴 태조가 그에게 연유를 물으니, 그는 어미 말과 새끼 말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여 그런다고 하였다. 태조는 그의 숨은 뜻을 알아차렸지만,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사귄 옛 친구로서 머물러 있게 하였다.

  태조가 박순과 장기를 두고 있을 때 쥐가 지붕 밑에서 새끼를 안고 떨어졌다. 쥐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서로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이를 본 박순이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아뢰니,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박순이 떠나니, 옆의 신하들이 그를 죽일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태조는 그가 용흥강을 이미 건넜으리라고 생각하고, 그가 강을 건넜으면 쫓지 말라고 하였다. 박순이 중도에 병이 나서 지체하다가 겨우 강에 도착하여 배에 올랐을 때 사자가 와서 그의 허리를 베었다.

  박순의 죽음을 애석히 여긴 태조는 그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양으로 돌아오기로 하였다(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참조). 태종은 뚝섬에 큰 차일을 치고 태조를 맞이하기로 하였다. 태종은 하륜의 말을 듣고 차일의 기둥을 큰 것으로 세웠다. 가까이에 온 태조는 면복(冕服) 차림으로 서성이는 태종을 보자, 분노가 다시 치밀어 얼른 활시위를 당겼다. 태종이 재빨리 기둥 뒤로 몸을 피하니, 화살이 기둥에 꽂혔다. 태조는 천하 명궁인 자기의 화살을 피한 것은 천명(天命)이라면서 노기를 풀었다(이규태의 600년 서울》 참조). 환영 잔치를 할 때 태종은 하륜의 말에 따라 잔을 중궁에게 주어 올리게 하였다. 이를 본 태조는 소매 속에서 작은 철퇴를 내어 보이며, 태종이 가까이 오면 내리칠 생각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최상수, 한국민간전설집》 참조).

  이 일이 있은 뒤에 뚝섬을 화살이 꽂힌 벌이란 뜻으로 ‘살꽂이벌’ 또는 ‘전교(箭郊)’라고 하였다. 세종 때에 뚝섬으로 가는 중랑천에 다리를 놓기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년)에 완공했다. 이 다리 이름을 이곳의 지명을 따서 ‘살꽂이다리’, ‘행인이 평지를 밟는 것과 같다’라는 뜻에서 ‘제반교(濟盤橋)’라고 하였다. 그런데 ‘살꽂이다리’는 음이 변하여 ‘살곶이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고종 때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이 다리의 일부를 가져다가 석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여기에 콘크리트 덧칠을 했다고 한다. 1920년대에는 홍수에 다리 일부가 떠내려갔다. 이렇게 수난을 겪던 이 다리는 1972년에 서울시가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그런데 하천의 폭이 넓어져 별개의 콘크리트 교량을 연장하여 세웠다. 보물 제1738호로 지정된 이 다리는 폭 6m·길이는 76m로, 지금까지 전하는 조선 시대 석교 중 가장 길다.

  살곶이다리 이야기에서 태조는 왕조 창업에 공이 큰 다섯째 아들 방원의 공로를 무시하고, 여덟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이 결정은 경처 강씨를 총애하고, 막내아들 방석을 편애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로 골육상쟁이 일어났으니, 그 원인 제공자는 태조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태조는 방원의 무도한 행동만을 문제 삼아 분노를 품었다. 그는 자기의 분노의 결정체인 화살과 철퇴를 방원이 피하는 것을 보면서, 천명이 방원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생각이 분노를 내려놓고 방원을 용서하게 하였다. 그래서 태종의 왕위를 인정하고, 태상왕으로 태종의 효도를 받았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태조의 분노를 용서와 화해로 변화시킨 뜻있는 곳이라 하겠다.(2022.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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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대학원을 다니던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은사이신 K 교수님은 국어학 전공의 학자로서 많은 연구 성과를 내신 분이다. 그런데 틈틈이 수필을 쓰셔서 수필집을 두 권이나 내셨다. K 교수님은 두 번째 수필집에 사인(sign)을 해서 주시면서 농담조로, “내가 수필집을 두 권이나 냈는데, 아무도 나를 수필가라고 하지 않네!”라고 말씀하셨다.

  K 교수님의 이 말씀은 농담조로 하신 말씀이지만,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K 교수님의 수필은 이름난 수필가의 글 못지않게 좋은 글이 많았다. 국어학자로서 명성을 얻으신 분이 좋은 수필을 쓰신 것을 보니, 참으로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그런 분이 ‘구태여 수필가라는 명성까지 얻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 때까지만 하여도 나는 문단의 등단 절차에 관해 잘 몰랐고,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나는 1978년에 대학의 교수가 되어 한국의 고소설, 구비문학, 민속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연구 논문과 저서를 집필하는 일 외에 일반 교양인을 대상으로 한 글을 많이 썼다. 글의 제재는 생활주변에서 취한 것도 있고, 민속과 설화에서 고른 것도 있었다. 나는 그동안 쓴 글 중에서 민속․설화와 관련된 글은 《민속적인 삶의 의미》(계명문화사, 1993. 59편 수록), 생활주변에서 제재를 취한 글은 《가을 햇빛 비치는 창가에서》(한울, 1993. 71편 수록)라는 제목의 수필집으로 출판하였다. 수필집 두 권을 낸 뒤에 ‘나는 수필가인가?’ 하고 자문해 보았다. 그 때 문득 대학원에 다닐 때에 들은 K 교수님 말씀이 떠올랐다.

  내 연구실 옆방에 계신 청하 선생님 연구실로 수필집을 가지고 가서 드리면서 K 교수님의 말씀을 화제에 올렸다. 청하 선생님은 정식으로 문단 데뷔 절차를 밟지 않으면, 훌륭한 학자(또는 명사)의 글로는 인정을 받을 수 있지만, 수필가의 글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다. 청하 선생님은 나에게 수필가로 등단하는 절차를 밟으라고 하시면서 글 두 편을 써오라고 하셨다.

  청하 선생님은 그 전에도 나에게 수필을 쓰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등단 절차를 밟기 전에도 《시와 시론》 52호(1993)에 <나의 호>라는 글을 실어 주셨다. 나의 글 솜씨를 좋게 보아 주신 덕이리라. 다른 지면에도 글을 쓰라고 하셔서 발표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청하 선생님께서 등단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수필 두 편을 써오라고 하신 것은 나의 글쓰기 실력을 인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뻤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고서도 연구 논문을 쓰느라 수필을 쓸 겨를이 없었다. 몇 달을 지낸 뒤에야 <개와 오륜>, <법 없어도 살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을 청하 선생님께 드렸다. 내 글을 받으신 청하 선생님은 《시와 시론》 심사위원들과 검토하신 뒤에 등단 작품으로 인정하고, 김병권 선생님의 추천사와 함께 《시와 시론》에 실어 주셨다. 그래서 나는 1995년에 발행하는 《시와 시론》(통권 52호)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시와 시론》은 나를 수필가로 인정해 준 종합문예지이다. 문예지 추천은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면, ‘운전면허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운전면허증을 가졌기에 전국 어디든지 차를 몰고 갈 수 있는 것처럼, 나에게 수필가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공인해 준 것이다. 나는 《시와 시론》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한 뒤에 한국수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등 문학단체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러자 한국문인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등단한 뒤에도 연구 논문이나 저서 집필에 힘쓰면서 틈틈이 수필을 썼다. 신문이나 잡지사의 청탁을 받고 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와 시론》에도 몇 차례 발표하였다. 이러한 글들은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에 손질하여 수필집 《능소화처럼》(보고사, 2015)에 실어 출간하였다. 그 뒤에 쓴 글들은 수필집 《새로운 보금자리에서》(학연제, 2021)에 실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문인은 신문이나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는 절차를 밟아서 정식 문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므로 등단한 신문이나 문예지는 그 문인에게 어머니의 태와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종합문예지인 《시와 시론》은 내 수필문학의 어머니와 다름없다. 《시와 시론》이 없어지지 않고, 《문예운동》으로 이름을 바꾸어 주옥같은 글들을 실어내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럽고 자랑스럽다. 《문예운동》이 민족문학의 정통성을 추구하는 문예지로 크게 발전할 것이라 믿는다.

  나를 수필가로 등단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좋은 글을 쓰도록 자극을 주고, 발표 지면을 허락해 주신 청하 선생님께 감사한다. 또 추천사를 써 주신 김병권 선생님께 감사한다. 내 문학의 어머니와 같은 《문예운동》의 무궁한 발전과 두 분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문예운동》 150호, 서울: 문예운동사, 202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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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말경에 아내와 함께 영주 부석사를 찾았다. 무량수전을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 올라가니, 이 절을 창건한 의상 대사(625~702)의 상을 모신 조사당(祖師堂)이 있었다. 국보 19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목조건물이다.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에 다시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신종 4년(1201)에 단청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보면, 조사당이 세워진 때는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조사당의 처마 밑에는 손가락 굵기의 줄기 몇 개가 곧추선 선비화(禪扉花)가 있다. 이 나무는 부석사를 창건한 신라의 의상 대사(625~702)가 방문 앞 추녀 밑에 꽂아 둔 지팡이에서 뿌리가 생기고, 가지와 잎이 나서 꽃을 피우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한다. 의상 대사가 “내가 간 뒤에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줄로 알아라.”라고 한 말이 실현된 것이다. 이 나무는 처마 밑에 있어 비와 이슬을 맞지 않으면서 천 년의 세월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1690~1756) 선생은 《택리지》(「卜居總論 山水」)에 선비화를 두고, “지팡이에 싹이 터서 자란 이 나무는 햇빛과 달빛은 받을 수 있으나 비와 이슬에는 젖지 않는다. 지붕 밑에서 자라고 있으나 지붕은 뚫지 아니한다. 키는 한 길 남짓하지만, 천년 세월을 지나도 한결같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어서 광해군 때 경상감사 정조(鄭造)가 지팡이를 만들겠다며 이 나무를 잘라간 일을 이야기하였다. 이 나무는 곧 두 줄기가 다시 뻗어나서 전과 같이 자랐지만, 정조는 인조 계해년에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어서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이 나무를 두고 지은 시를 소개하였다. “옥을 뽑은 듯 정정하게 절 문에 의지했는데(擢玉亭亭倚寺門), 스님의 말은 지팡이가 신령스러운 나무로 화했다 한다(僧言錫杖化靈根). 지팡이 머리에 스스로 조계수가 있는가(杖頭自有曺溪水). 하늘이 내리는 비와 이슬의 은혜를 힘입지 않는구나(不借乾坤雨露恩). 이 글은 선비화가 의상대사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자란 나무이고, 비와 이슬의 은혜 없이 자라고 있는 신령스러운 나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신이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사물을 접촉하거나 먹으면, 신이한 힘이 자기에게 전이된다고 믿는 주술적(呪術的)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신이한 물건을 접촉하거나 몸에 지니기도 하고, 그 일부를 먹기도 하였다. 부적이나 주물(呪物)을 몸에 지니기, 돌미륵의 코를 갈아 먹기, 특정 식물의 줄기나 잎을 따다가 끓여 먹기 등은 이러한 주술적 심성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의식을 가졌기에 신이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선비화의 잎을 따거나 줄기를 잘라가는 일이 빈번해 졌다. 이를 막기 위해 절에서는 오래 전부터 선비화 둘레에 철망을 둘러 이 나무를 보호하고 있다. 지금도 이 나무는 너비 3m, 폭 1.4m, 높이 2m 가량의 촘촘한 스테인리스 철망 안에 갇혀 있다.

  선비화는 낙엽관목으로, ‘골담초(骨擔草)’라고도 한다. 뿌리가 생약으로 뼈를 다스린다는 뜻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한국과 중국 등의 아시아가 원산지여서 우리나라의 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이다. 뿌리혹박테리아를 가진 콩과 식물이라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이는 몇 개의 줄기가 모여서 곧추서 있고, 가시가 있으며 껍질은 어두운 녹색이다. 4~5월에 나비 모양의 꽃이 노랗게 피어 붉게 변한다. 열매는 원주형으로 9~10월에 익는다. 관상용으로 재배하고, 뿌리와 꽃은 약재(해수, 대하, 고혈압, 타박상, 신경통 등)로 쓰인다. 꽃말은 겸손, 청초, 관심이다. 의상 대사는 우리나라에 많이 자라고 있는 골담초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다녔던 모양이다.

  지팡이의 주된 기능은 노약자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걷거나 서 있을 때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보조기구이다. 시각장애인의 흰 지팡이는 혼자 걸을 때 더듬이 역할을 하여 보행의 안전을 기하게 한다. 지팡이가 보행의 보조기구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지니는 경우도 있다. 유목민의 목자에게는 양떼를 인도할 때 쓰는 도구이고, 마법사에게는 마법을 행할 때 꼭 있어야 하는 소품이다. 장로나 족장, 스님, 도인과 같은 사람에게는 권위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특히 스님의 지팡이는 주장자(拄杖子)라고도 한다. 주장자는 걸을 때에 도움을 주는 도구이면서, 법문(法問, 불법에 대하여 묻고 대답함)․좌선(坐禪, 고요히 앉아서 참선함)․경책(警策, 주의가 산만하거나 조는 사람을 깨우침)을 할 때에도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장자는 스님과 희로애락을 같이하면서 도의 길을 함께 하는 도반(道伴)이다. 그러므로 주장자는 스님의 사상과 감정이 응집되어 있는, 분신과 같은 존재이다. 또, 높은 도의 경지에 이른 스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따라서 선비화는 도가 깊고 법력이 높은 의상대사의 도력(道力)과 높은 정신이 깃들어 있는 신령스런 나무이다.

  《구약》 「민수기」에는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지도자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선비화와 아론의 지팡이 이야기는 신라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이고, 사제자인 두 사람의 지팡이에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웠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난 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낸 것이고, 의상 대사의 지팡이에서 싹이 난 것은 의상 대사의 법력이 깊고 높았음을 드러낸다.

  유명 인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싹이 나서 자란 나무는 선비화 외에도 많이 있다. 강원도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 주목은 신라 시대 자장 율사가, 경기도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고 한다. 전남 순천 송광사 천자암의 쌍향수(곱향나무)는 고려 시대 보조국사 지눌 스님, 전남 장성 백양사 이팝나무는 고려 때 각진 국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라고 한다.

  부석사의 선비화는 의상 대사가 짚고 다니던 골담초 지팡이에 뿌리가 생기고, 가지와 잎이 나서 꽃을 피우며 천 년을 살고 있는 신령스런 나무이다. 이 나무는 의상 대사의 깊은 도와 법력이 깃들어 있는 신령스런 나무임을 드러내면서 부석사가 신성한 사찰임을 강조한다. 선비화는 한국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골담초이다. 이것은 일반 민중과 친숙한 골담초에 신이성을 부여한 것으로, 민중들에게 의상 대사를 추앙하면서 불심을 돈독히 할 것을 권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22. 01. 01.)

부석사 조사당 오른쪽 추녀밑 스테인리스 철망 안에 있는 선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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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전쯤에 도로교통공단에서 보낸 운전면허 갱신 통지서를 받았다. 1979년 2월에 2종보통 운전면허증을 받은 뒤에 몇 차례 갱신을 하였다. 2종 면허 갱신 주기가 전에는 10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2016년 11월에는 70세가 넘은 관계로 5년짜리 면허증을 받았다. 면허증을 꺼내어 보니, 유효기간이 금년 12월 31일까지이다. 통지서에는 ‘고령운전자 면허 갱신’이라는 말과 함께 준비물이 씌어 있다. 지난번까지와는 달리 ‘치매검사 결과지’, ‘건강검진 결과지’, ‘교통안전교육 이수증’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이 세 서류는 고령운전자 면허 갱신 여부를 판정하는 데에 필요한 서류인 것 같다.

  통지서에 적힌 치매안심센터로 전화를 하니, 집에서 가까운 치매안심센터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래서 성동구 보건소 치매안심센터에 전화를 하니, 검사예약이 많아 금년 내에 검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금년 내에 운전면허 갱신 신청을 해야 한다고 사정을 하여 3주 후에 검사를 받기로 예약을 하였다. 예약 당일에 성동구 성수동의 공공복합청사 5층에 있는 치매안심센터에 갔다. 치매검사를 받으러 오는 분들이 많았다. 이를 보면서 치매에 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내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진단검사 대상이 되어 운전면허 갱신을 하지 못함을 물론, 감별검사를 받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였다.

  검사실에 들어가니, 검사원(임상심리사?)은 생년월일과 주소, 학력을 물었다. 그리고 ‘오늘은 몇 월 며칠인가요?’, ‘이곳은 어디인가요?’ 등을 묻고 답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 긴 문장 따라 말하기, 조금 전에 말한 문장을 기억하여 말하기, 과일과 채소의 이름 말하기, 섞인 그림 찾기 등의 검사를 하였다. 기억력, 주의집중력, 언어능력, 계산능력, 시공간 감각 등을 알아보는 기초검사였다. 약 30분 동안 테스트한 뒤에 검사원은 ‘양호’ 판정을 하였다. 검사실 밖으로 나오니, 한 남자 어른이 선별검사를 통과하지 못하여 진단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함께 온 부인과 함께 풀이 죽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두 분의 모습을 보는 본 순간 나는 가슴이 짠하였다. 다른 방에서 검사를 하고 ‘양호’ 판정을 받은 아내와 함께 치매검사 결과지를 받아 들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왔다.

  고령자 교통안전교육을 받기 위해 컴퓨터를 켜고, 강남운전면허시험장에 교육 예약을 하였다. 그런데 거리가 멀고, 시간도 맞지 않아 온라인 교육이 있는가 살펴보니, 도로교통공단 이러닝센터에서 하는 온라인 교육이 있었다. 그래서 교육장 예약을 취소하고, 온라인 교육을 신청하였다. 신청 즉시 시작할 수 있어서 교통법규와 안전 문제, 상황별 안전운전기법, 음주 및 약물 복용 직후 운전의 위험성 등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매우 유익한 내용을 짜임새 있고, 알기 쉽게 강의하였다. 밤 9시경에 시작하여 꼬박 두 시간 가량 수강하였다. 강의가 끝난 뒤에 교육이수증을 출력하여 인쇄하였다.

  건강검진 결과지는 가지고 가지 않아도 인테넷으로 검색하여 확인한 뒤에 발급해 준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면허 발급 업무를 하는 분들께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건강검진센터에 가서 작년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왔다. 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기본검사 항목을 보니, 시력은 좌우 1.0과 1.5, 청력은 좌우 정상이라고 적혀 있다. 2종보통 면허는 좌우 둘 중 하나의 시력이 0.5 이상(1종면허는 한쪽이 0.8 이상, 다른 한쪽 0.5이상)이면 된다고 하고, 청력은 정상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나는 성동경찰서 민원실로 가서 적성검사원서를 작성하고, 3주에 걸쳐 준비한 세 가지 서류와 사진을 수수료(13,000원)와 함께 제출하였다. 민원실 면허 담당자는 서류를 살펴보고 접수한 뒤에 접수증을 주면서, 2주 뒤에 면허증을 찾으러 오라고 하였다. 세 가지 서류를 준비하여 접수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하여 가벼운 발걸음으로 민원실을 나왔다.

  그동안 나는 75세가 넘었지만, 운전에 필요한 시력과 청력·기억력·주의집중력·언어능력·계산능력·시공간 감각, 교통법규 기억 등에 문제가 없다고 자신하며 지내왔다. 그래서 운전면허 갱신 통지서를 받던 날에는 모든 사람에게 치매검사 결과지, 건강검진 결과지, 교통안전교육 이수증을 제출하라는 것이 지나친 부담을 주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면허 갱신을 하기 위해 치매검사를 받고, 시력과 청력 및 건강상태를 확인하면서 이는 유익할 뿐더러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 교통안전교육을 받으면서 교통안전에 대한 주의와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령운전자의 면허를 갱신할 때 세 가지 서류를 제출하도록 한 것은 잘한 일이라 하겠다.

  접수증에 적힌 날짜 며칠 전에 면허증이 발급되었으니 찾으러 오라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그래서 그 다음날 성동경찰서 민원실에 가서 새로 발급된 면허증을 받았다. 앞으로 3년 동안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고령자의 운전면허증은 건강하다는 증명서와도 같다. 내 또래의 지인 중에는 운전면허증을 반납한 사람이 여럿 있다 그런가 하면, 나이가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데도 운전을 하면서 즐겁게 지내는 분도 있다. 그 분은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제 나의 바람은 3년 뒤에도, 그 다음 3년 뒤에도 운전면허증을 받아 운전하는 것이다. 안전운전을 하면서 건강에 유의하면 이런 바람도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2021. 11. 25.) <성광일보, 2022. 2.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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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서 휴전선까지 동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7번 국도는 주변의 풍광이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다. 속초에서 이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약 20km를 가면 송지호가 있다. 송지호를 조금 지나 왼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1.5km 쯤 들어가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 1리에 자리 잡고 있는 왕곡(旺谷)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오음산을 비롯한 다섯 개의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고, 송지호에 의해 분리되어 있어 동해안가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6․25전쟁 때에도 대부분의 집들이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고택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전통마을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어 국가 민속 문화재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이 마을은 고려 말 두문동 72현의 한 분인 함부열(咸傅烈)이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인근 간성 지역에 낙향하였고, 그의 손자 함영근이 이 마을에 와서 살면서 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마을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지금 이 마을에는 양근 함씨 및 강릉 김씨를 비롯하여 다양한 성씨 1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고려 왕조에 대한 충심과 절의로 시작된 이 마을이 6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입지 조건과 주변의 바다와 호수, 논과 밭 등 생존에 필요한 요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는 19세기 전후에 건립된 북방식 전통 한옥과 초가집 50여 채가 원형을 간직한 채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가옥은 안방․사랑방․마루․부엌이 한 건물에 있고, 부엌에 외양간이 붙어 있는 겹집구조로, 강원 북부 지방의 고유 가옥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눈이 지붕 위에 쌓이지 않고 최대한 흘러내리도록 지붕을 최대한 낮게 드리웠다. 굴뚝은 진흙과 기와를 한 켜씩 쌓아올리고, 맨 위에 항아리를 엎어놓았다. 이것은 굴뚝을 통해 나온 불길이 초가에 옮겨 붙지 않게 하는 한편, 항아리 안에서 열기를 집 내부로 다시 들여보내려는 뜻에서 나온 지혜로운 조치라 하겠다.

   예스런 분위기를 간직한 이 마을은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국군 홍보 방송물 《배달의 기수》 등 다수의 반공 영화와 TV 문학관 홍어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2016년에는 독립운동가이면서 시인인 ‘윤동주’와 고종사촌인 ‘송몽규’를 모델로 한 영화 동주가 이 마을에서 촬영되었다. 이 영화를 만든 이준익 감독은 주인공인 ‘동주’와 ‘몽규’가 태어나서 자란 북간도 명동촌 일대와 흡사한 장소를 찾기 위해 사극 세트장부터 한옥촌, 민속마을 등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북방식 한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이곳을 촬영지로 선정하였다고 한다. 하나의 지붕 아래 부엌, 마루, 방들이 존재하는 독특한 가옥 구조는 ‘동주’와 ‘몽규’를 둘러싼 가족관계 및 시대상, 지역적 특색까지 한눈에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는 다른 마을에서는 보기 드문 효자각이 두 개나 있다. 하나는 마을 입구 쪽에 있는 ‘양근 함씨 4세 효자각’(1820년 건립)이다.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몽학교관(蒙學敎官)’을 지내던 함성욱은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부친께 먹여 7일을 더 살 수 있게 하였다. 나라에서 그에게 ‘조봉대부(朝奉大夫, 종사품 하 문관의 품계)’의 칭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인흥과 인홍, 손자 덕우, 증손자 희용도 자기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며칠을 연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각 시묘 3년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보기 드문 효자 집안에 벼슬을 내리고, 이를 기리는 비를 건립하게 하였다.

   다른 하나는 통정대부 돈령부도정을 지낸 함희석(咸熙錫)의 효행을 기리는 ‘강릉 함씨 효자각’(1869년에 건립)으로, 마을 안쪽에 있다. 함희석은 부모가 병환으로 눕게 되자 바다에 헤엄쳐 나가 귀한 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하였다. 그리고 부모가 화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지성으로 부모를 보살피는 등 효성을 다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범의 보호 아래 시묘를 하였다고 한다.

   두 효자비에는 각각 양근 함씨와 강릉 함씨로 다르게 적혀 있다. 강릉 함씨의 원조는 함혁(咸赫)으로, 삼한 초부터 양근(지금의 양평) 지역에 살았다. 그런데 15세손 신(信)이 785년(신라 원성왕 1) 김주원(金周元: 강릉 김씨의 시조)을 따라 강릉에 와서 살게 되어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고 한다(강릉 함씨 관향 유래 족보참조). 그러므로 양근 함씨나 강릉 함씨는 동성동본의 씨족이라 하겠다. 따라서 두 효자각의 효자는 같은 집안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옛사람들은 부모님의 뜻을 살피며 정성으로 봉양하는 외에 조문효도(蚤蚊孝道, 옷을 벗고 누워 자면서 벼룩과 모기에 물려 부모님이 편히 주무시게 하는 효도), 상분(嘗糞, 부모의 병세를 살피려고 그 대변을 맛봄), 단지(斷指,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입에 흘려 넣거나 살을 태워 먹임), 할고(割股, 허벅지 살을 베어 굽거나 삶아서 드림) 등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효도를 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신라 경덕왕 때 향덕(向德)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를 봉양하였다는 삼국사기(신라본기 9 경덕왕조, 권48열전)와 삼국유사(권5 孝善)의 기록을 비롯하여 조선 세종 때 간행된 삼강행실도에 여러 편 기록되어 있다. 단지․할고한 사람은 대부분 자식이지만, 손자나 아내도 있다. 종이 상전을 위해 단지하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단지․할고를 한 경우에는 조정에서 관직, 재물을 내리거나 정려를 세워 표창하였다. 이 마을의 두 효자각 중 ‘양근 함씨 4세 효자각’은 단지한 효자 이야기이다.

   단지는 부모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갸륵한 정신이고, 범할 수 없는 숭고한 정신이라는 점에서 크게 표창하고, 권장해 왔다. 이러한 효자 표창은 효를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단지가 부모님의 병을 고치는 데에 효험이 있는 방법인가를 따져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이것은 합리적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효 윤리를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찍이 이상(1910~1937)은 수필 조춘점묘(早春點描)의 「단지한 처녀」에서 이를 비판적인 안목으로 다루었다.

   왕곡마을에 있는 두 개의 효자각은 그 동안 함씨를 비롯한 인근 지역 주민에게 효행마을에 산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효에 대한 관념이 변화된 오늘날에는 함씨의 단지 효행이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단지가 효험이 없는 불합리한 행위로, 효 이념 강화의 도구로 이용되었던 점은 있다. 그러나 부모님의 은덕을 기리고 효도하는 마음만은 존중하고, 이를 비판과 조롱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2021.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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