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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와 있는 카이세리(Kayceri)는 터키 중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인구 약 100만 명의 상업 도시이다. 지금의 수도인 앙카라에서는 약 300Km, 옛 수도인 이스탄불에서는 약 750km 떨어져 있다. 카이세리시의 남쪽에는 해발 3917m인 터키에서 세 번째로 높은 에르지예스산이 있는데, 산봉우리에는 여름에도 눈이 쌓여 있다. 내가 객원교수로 와 있는 에르지예스대학교(Erciyes University)는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에르지예스대학교는 1978년에 설립되었는데, 현재 18개의 단과대학과 6개의 전문대학, 6개의 직업전문대학이 있고,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이 있다. 전체 학생은 45,000여 명이고, 전체 교직원은 약 5,000명이다. 문과대학에는 한국어문학과를 비롯하여 영어영문학과, 중국어문학과, 러시아어문학과, 일본어문학과, 인도어문학과 등의 외국어문학과가 있다.
대학 캠퍼스는 에르지예스산의 북쪽 산기슭의 넓은 평원에 자리 잡고 있다. 학교 부지에는 수많은 대학 건물과 종합병원, 초·중·고등학교와 유치원, 그리고 10여 동의 교수 아파트가 있다. 내가 사는 ‘빌름 시테시(과학단지)’는 외국인을 위해 지은 2층 건물 9동이 모여 있는 곳이다. 건물 한 동은 한 층에 세 세대씩 여섯 세대가 살도록 되어 있다. 이런 많은 건물들이 널찍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다. 학교 안에는 나무와 잔디를 잘 가꾼 넓은 녹지대도 있고, 제대로 가꾸지 않아 잡초가 우거진 넓은 빈터도 많이 있다. 평일에는 시내버스가 학교 안으로 난 길을 따라 운행하고 있다. 학교 부지는 아주 넓어서 학교 안을 한 바퀴 돌려면 걸어서 몇 시간을 걸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다니기 좋은 조용한 길을 산책 코스로 정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아내와 함께 1시간 이상 걷는다.
나와 아내가 산책할 때 마주치는 학생 중에는 미소를 보내며 눈인사를 하거나 목례를 하는 학생이 많다. 어떤 학생은 반갑게 인사를 하며 터키어 또는 영어로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내가 서툰 터키어나 영어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주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한다. 어떤 학생은 자기 할아버지가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었다고 하면서 한국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어떤 학생은 휴대전화나 사진기를 들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한다. 함께 포즈를 취하여 사진을 찍으면 아주 기뻐하면서 고맙다고 인사한다.
한 번은 학교 안에서 산책하고 있는데, 차도 건너편 길로 오던 중년 남자가 길을 건너와서 터키어로 몽골인이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니, 중국인이냐고 묻는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 ‘비즈 아르카다쉬(우리는 형제)’라고 하면서 악수를 청한다. 악수를 하고 나니, 뭐라고 말을 더 하는데, 내가 “튀륵체 빌미요름(터키어를 모릅니다.)”이라고 하니, 아쉬운듯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카이세리 시내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어떤 사람은 미소하며 목례를 건넨다. 어떤 사람은 터키어 또는 영어로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어김없이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묻는다. ‘귀네 코레(남한)’라고 하면, 아주 오랜 친구를 만난 듯이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좋은 나라에서 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유심히 쳐다보고는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댄다. 그들이 터키어로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우리들이 일본인일 것이라거나 중국인일 것이라고 수군거린다. 이곳 사람들은 한국인을 많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와 외모가 비슷한 일본인 또는 중국인이라 추정하는 것 같다. 길에서 만난 어린아이들도 우리를 유심히 본다. 아이들 눈에도 우리가 이상하게 생긴 모양이다. 이런 일은 시내에 나갈 때마다 자주 겪는데, 우리 부부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한 번은 시내에서 교복차림의 중·고등학교 학생을 만났는데, 터키어와 영어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친근감을 나타냈다. 그리고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관광지로 이름난 카파도키아, 안탈랴에서 만난 청년들 역시 먼저 인사를 청하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부부의 얼굴이 터키 사람들의 사진기에 담긴 것이 여러 번이다. 이들은 이 사진을 꺼내 보면서 우리들의 얼굴이 한국인의 표준 얼굴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이 생각을 하니, 우리 부부의 인물이 더 예쁘고 멋지지 못한 것이 아쉽다.
내가 카이세리에 와서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한국어과의 괵셀 교수, 양민지 교수와 대형 수퍼마켓에 가서 아내가 물건 고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 옆에서 한국말로 “교수님, 안녕하세요?” 하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한국인이라고는 나와 아내, 그리고 함께 온 양 교수 세 사람밖에 없는 카이세리 시내의 슈퍼마켓에서 한국말로 인사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 자세히 보니, 한국어과 4학년 여학생이었다. 여동생과 함께 부모님을 따라 쇼핑하러 왔는데, 중학생인 여동생이 “저기 외국인 있다!” 하고 놀라면서 말하기에 얼른 쳐다보니, 내가 서 있어서 달려와 인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 여학생 동생의 눈에는 내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던 것 같다.
하루는 우리 과의 괵셀 교수와 함께 갔던 전기기구 파는 가게를 다시 갈 일이 있어서 시내에 갔다. 괵셀 교수한테 대강의 위치를 설명 들었으므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 사람에게 그 상점의 명함을 보이면서 위치를 물었으나 다 모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찾는 일을 포기하려고 하다가 마지막으로 한 젊은이에게 길을 물었다. 그 젊은이는 영어로 설명을 하더니, 자기가 안내할 터이니 따라 오라고 하였다. 그는 자기가 가던 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안내하여 그 가게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지금도 그 청년의 친절을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다.
터키에는 이름을 알 수 없거나 먹어보지 않은 과일이나 견과류, 로쿰(젤리 같은 단음식), 과자류, 간단한 음식류 등을 많이 판다. 아주 먹음직스러워 사고 싶으나 맛이 어떨지 몰라 선뜻 사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가 진열장 앞에서 망설이고 있으면, 주인이 웃으며 인사를 하고, 얼른 꺼내어 맛을 보라고 한다. 우리가 맛을 보는 동안에 주인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고, 한국인이라고 하면 아주 반가워한다. 맛을 본 뒤에는 사지 않을 수 없어서 아주 시거나 짠 것이 아니면 사곤 하였다. 맛을 보게 하는 것이 상품을 팔기 위한 상술이기도 하겠지만, 터키인이 외국인을 대하는 친절한 마음인 것 같아 흐뭇하였다.
터키인은 외국인을 좋아하고, 친절하게 대한다. 그 중에서도 한국인을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그것은 터키 민족이 한국 민족과 먼 옛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친하게 지내던 민족이기도 하고, 60여 년 전 한국 전쟁 때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인을 보내 도와준 나라로 형제의 나라, 전쟁의 폐허를 딛고 짧은 기간에 경제를 일으킨 특별한 나라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인연을 중시하는 터키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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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하순에 아내와 함께 고향인 홍성에 갔다.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강의와 출판사와 약속한 원고 집필 때문에 바빠서 벼르기만 하고 가지 못하다가 겨우 시간을 내어 갔다. 먼저 부모님 산소에 성묘를 하고, 누님 댁과 외종형 댁을 방문한 뒤에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친구와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에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잘 가꿔 놓은 정원의 나무와 꽃들을 둘러보았다. 마당가와 마당과 이어진 야트막한 언덕에는 여러 가지 과일나무와 정원수, 꽃들이 자라고 있는데, 주인 내외의 성품처럼 정갈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많은 나무와 꽃 중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마당가에 활짝 피어 있는 능소화(凌霄花)였다. 능소화는 마당가에 세워놓은 사람 키 정도의 통나무를 이리저리 감으며 타고 올라간 줄기의 마디마디에서 뻗어 나온 꽃대에 다닥다닥 붙어 피어 있었다. 나팔꽃과 비슷한 깔때기 모양의 주황색 통꽃이 100여 송이 피어 있는데, 아주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꽃이 하도 예뻐 만져보려고 손을 대니, ‘내 몸에는 어느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다.’는 듯이 톡 떨어져 버렸다. 그 밑을 보니, 시들지 않고 싱싱한 꽃들이 수없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능소화를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으나,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에 고등학교 선배님 댁 바깥 정원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능소화의 예쁜 모습에 마음이 끌려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 보관하기도 하고, 꽃말과 전설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능소화가 아주 좋아졌다. 내가 친구에게 능소화를 언제 심었는가 물으니, 10여 년 전에 아는 사람의 집에 피어 있는 능소화가 예뻐서 뿌리를 조금 얻어다가 심은 것이 이렇게 자랐다고 하였다. 나는 친구와 함께 능소화의 특성, 꽃말과 전설 등을 이야기하였다.
능소화는 쌍떡잎 통꽃식물목 능소화과에 속하는 낙엽성 덩굴나무인데, 높이는 10m정도이며, 잎은 깃모양 겹잎이다. 여름에 깔때기 모양의 주황색 꽃이 피고, 열매는 네모진 삭과(蒴果, 익으면 과피(果皮)가 말라 쪼개지면서 씨를 퍼뜨리는, 여러 개의 씨방으로 된 열매)로 가을에 익는다. ‘금등화(金藤花)’, ‘자위(紫葳)’, ‘능소화나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 분포하는데, 옆에서 보면 트럼펫을 닮아서 외국에서는 ‘Chinese trumpet creeper’라고 부르기도 한다.
능소화는 바람이 불면 마치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너울너울 흔들거린다. 옛사람들도 이 꽃을 예사로 보지 않고 무척 사랑했던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여 년 전에 널리 전해 오는 시를 모은, 동양 최초의 시집인 <시경(詩經)> 속에도 능소화 그림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원수로 길렀는데, 양반집 마당에만 심었고, 상민의 집에서는 심지 않았다. 이 꽃을 상민의 집에서 심으면 양반들한테 불려가 벌을 받았다. 그래서 ‘양반꽃’이라고도 한다.
능소화는 분위기가 동양적이라 사찰꽃(절꽃)이라고도 한다. 꽃가루에 독이 있어 유독식물로 알려져 있으며, 꽃속에 생기는 꿀이 눈에 들어가면 실명(失明)한다는 말이 전해 오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내한성(耐寒性)이 약하여 중부 이북보다는 중남부 지방의 건조하지 않은 양지바른 곳에 잘 자라며, 해안 지방에 주로 서식한다. 공해에도 강하고, 뱀의 근접을 막아준다고 하여 별장 및 개인주택 조경에 많이 심는다.
꽃에는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꽃말’이 전해 온다. 장미는 사랑․아름다움, 백합은 순결, 월계수는 영광, 클로버는 행운을 나타낸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이다. 이것은 능소화에서 느껴지는 화려함과 기개, 싱싱한 채 떨어져 시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존심 등을 감안하여 붙인 꽃말이라 하겠다. 화려함과 기개를 느끼게 하는 능소화에는 슬픈 전설들이 전해 온다. 하나는 임금을 기다리다 죽은 궁녀의 넋이 능소화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소화’라는 궁녀가 임금의 눈에 띄어 성은(聖恩)을 입고, 빈(嬪)에 봉해졌다. 그녀는 궁궐 안에 마련된 처소에서 지내면서 임금님이 다시 찾아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녀는 매일 담장 밑을 서성이기도 하고, 담장너머를 바라보며 임금을 기다렸다. 그러나 임금은 그녀의 처소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림에 지쳐서 병이 들어 죽었다. 시녀들은 ‘나는 담장 밑에 묻혀 임금이 오기를 기다리겠다.’는 그녀의 뜻을 따라 시신을 궁궐 담 밑에 묻어 주었다. 이듬해 여름에 그녀의 무덤에서 풀이 자라 꽃이 피었는데, 담장을 휘어 감고 밖을 내다보는 듯하였다. 그래서 이 꽃 이름을 ‘능소화’라고 하였다 한다.
위 이야기에서 능소화는 임금님의 방문을 간절히 기다리다 죽은 궁녀 소화의 넋이 변하여 핀 꽃인데, 담장에 피어 임금이 오는가를 살피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이 꽃에는 오직 한 분이신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간절한 소원과 기대가 담겨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기생 능소화가 죽어 이 꽃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어느 고을에 덕망 있는 벼슬아치가 일찍 아내를 여의고 딸과 함께 살았다. 그는 상대편 당파의 세력에 밀려 급히 몸을 피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딸과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젊은 선비를 데리고 급히 몸을 피하다가 갈림길에 이르렀다. 그는 젊은이와 딸의 손을 모아잡고, 부부의 인연을 맺을 것을 서약하게 한 뒤에 젊은이를 다른 길로 가게 하였다. 그는 딸과 함께 이리저리 떠돌던 중에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딸은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돈을 받아다가 약을 썼으나, 아버지는 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그녀는 기녀(妓女)가 되었는데, 인물이 예쁘고, 글을 잘하며 가야금에 능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많은 남성들이 유혹하였지만, 정절을 지켰다. 한 선비가 그녀의 청초한 모습을 보고, ‘차가운 기운이 서린 꽃’이란 뜻으로 ‘얼음 릉(凌)’ 자, ‘하늘 기운 소(霄)’ 자를 써서 ‘능소화’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몇 년 후 능소화의 아버지가 속했던 당파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젊은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고, 능소화가 기생 노릇을 하고 있는 고을 원으로 오게 되었다. 능소화의 소문을 들은 원님이 그녀를 찾아가는데, 귀에 익은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 원님이 능소화를 만나보니, 자기와 정혼한 여인이었다. 능소화가 겪은 일을 들은 원님은 지난 일을 다 잊고, 부부의 연을 이어가자고 하였다. 그녀는 서방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기꺼이 따르겠다면서, 며칠간의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원님은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 날에 능소화를 찾아갔다. 그녀는 준비해 두었던 비상(砒霜)을 먹고 죽어가면서, “자신을 정갈하게 지키지 못한 제가 어찌 서방님과 혼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간의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는 마음만으로도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후 그 여인의 무덤에서 덩굴진 줄기가 솟아났고, 퍼져가는 줄기 끝마다 주황빛 꽃들이 피어났다. 품위와 기개가 느껴지고, 활짝 피었는가 싶으면 이내 지고 마는 그 꽃을 사람들은 ‘능소화’라고 불렀다.
당파 싸움이 한창이던 때를 배경으로 꾸며진 이 이야기에는 한 여인의 지고(至高)한 사랑과 기품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는 살았을 때에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 소원과 관련이 있는 식물이나 동물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많이 전해 온다. 그 중 꽃과 관련된 이야기를 ‘꽃유래담’ 또는 ‘꽃전설’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국인의 환생(還生)에 관한 의식을 바탕으로 꾸며진 것이다.
능소화는 개화 기간이 80일 정도 이어지는데, 색상이 화려하고 기품이 있으며, 젊고 생기가 있다. 많은 꽃들이 다투어 피는 따뜻한 봄을 다 보내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灼熱)할 때에야 자태를 뽐내는데, 아름다움과 도도함이 있다. 손을 대면 떨어지고 말아 마음에 맞지 않는 누구의 손길도 허락하지 않는 절개가 있다. 시들지 않고 떨어져 지는 순간까지도 활짝 피었을 때의 싱싱함을 유지하다가 그 모습 그대로 땅에 떨어져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 자존심이 있다. 통나무나 담장을 타고 올라가 밖을 살피는 조심성이 있다. 능소화의 이러한 특성이 어디서 유래되었는가는 위의 전설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능소화를 보고 있노라면, 옛날 선비와 같이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품위와 한번 뜻을 세우면 어떠한 시련이 와도 굽히지 않는 기개가 느껴진다. 많은 남성의 유혹이 있어도 임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정절을 지키는 명기(名妓)의 결연함을 생각하게 한다. 능소화 전설은 이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해 준다.
얼마 전에 아는 분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분은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아는 분들의 면회를 일체 사양하였다고 한다. 아는 분들에게 쇠잔(衰殘)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건강할 때 만났던 모습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내가 능소화를 보면서 그 분을 떠올린 것은 그 분이 떠날 때의 마음이 시들기 전에 지는 능소화의 본성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친구에게 그 분의 이야기를 하면서 능소화처럼 품위와 기개를 지니고 살다가 홀연히 떠났으면 좋겠다고 하니, 그 친구 역시 동감이라고 하였다. 나이가 더 들더라도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면서 남에게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훌쩍 떠났으면 좋겠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나 보다.
* 이 글은 <충청문학> 19, 서울 : 충청문인협회, 2008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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