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말의 힘에 대해 실험한 결과를 적은 글을 읽었다. 국립국어연구원에서 발행한쉼표, 마침표(20149)에 실린 글인데,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 학생들과 함께 실험한 내용이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서울성수고등학교 권정은 선생님은 교실에 두 개의 유리병에 밥을 넣어놓고, 한쪽 에는 감사합니다.’, 다른 한쪽에는 짜증나!’를 써 놓았다. 두 개의 유리병을 교실 뒤에 놓고 학생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한쪽 병에는 고마워’, ‘사랑해’, ‘감사해등의 긍정적인 말을 하고, 다른 한쪽 병에는 미워’, ‘싫어’, ‘짜증나등의 부정적인 말을 하게 하였다. 3주 후에 그 결과를 본 선생님과 학생들은 모두 놀랐다. ‘감사합니다를 써 놓은 병의 밥에는 구수한 냄새가 나는 누룩곰팡이가 피어 있고, ‘짜증나를 써 놓은 병의 밥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나는 시커먼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이 실험 결과는 한국교육방송(EBS)이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소개하였는데, 학생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정화여자상업고등학교 국어과 교사인 최태림 선생님은 말의 힘을 믿지 않는 학생들에게 직접 실험을 하여서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바나나 두 개를 골라 똑같은 모양의 플라스틱 통에 넣었다. 하나에는 예쁜아 사랑해’, 다른 하나에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써서 붙였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예쁜아 사랑해가 적힌 바나나에는 사랑의 말을, ‘쓰레기 같은 놈이 적힌 바나나에는 나쁜 말을 해 주었다. 열흘 후에 보니, ‘쓰레기 같은 놈이 적힌 바나나는 완전히 검은색으로 썩어 있는 반면, ‘예쁜아 사랑해가 적힌 바나나는 본연의 노란색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끼리 하는 말에는 힘이 있어 그 영향이 크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재배하는 농작물이나 화초, 사육하는 가축이나 애완동물과 대화하며 칭찬의 말을 하면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도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널리 알려진 일이 아닌가. 그러나 말의 힘이 무생물인 밥이나 바나나에도 미친다는 사실은 얼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실험 과정을 자세히 읽었다. 최 선생은 실험 대상으로 삼은 바나나를 고를 때 같은 송이에 붙은 것으로, 모양·익은 정도·껍질에 생긴 점의 개수까지 비슷한 것을 골랐다고 한다. 실험할 때에는 조건을 똑같이 하기 위해서 하루는 예쁜아 사랑해에게 먼저 말을 걸고, 다음 날에는 쓰레기 같은 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고 한다. ()를 재가면서 똑같은 시간 동안 말을 하였고, 채광 조건이나 바람, 습도도 똑같이 맞추었다고 한다. 이렇게 엄정한 조건 아래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정성을 다해 실험한 결과라면 믿지 않을 수 없다. 말의 힘을 믿지 않던 학생들도 실험이 끝난 뒤에는 말의 힘을 믿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리고 전학을 가는 학생에게 반 학생 전원이 다른 학교에 가서도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격려의 말을 써서 주었다고 한다.

 

   이 실험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생각하니, 말의 힘이 무생물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무생물에게까지 미치는 말의 힘이 감성을 지닌 사람에게는 더 큰 힘을 발휘할 것 아닌가! 옛사람들은 말에는 신령스런 힘이 있다.’언령관(言靈觀)’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관념이 마음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좋은 말만 골라서 하고, 상스러운 말이나 욕,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삼가도록 가르쳤다. , 자기가 이루고 싶은 일을 말로 표현하고,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의 말을 하고, 덕담(德談)을 나누는 것도 이런 관념이 마음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말한 것은 이루어진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좋은 말은 입에 올리되 좋지 않은 말은 입에 올리지 말라는 경계의 뜻도 담고 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긍정적인 말을 하면 긍정적인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면, 그런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이 고마우면 비지 사러 갔다가 두부 사온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속담도 있다. 이런 속담은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속담들이다. ‘말이 마음이고, 마음이 말이다.’라는 말도 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좋은 말을 하면, 상대방도 나를 좋게 말할 것이다.

 

   성경에도 말에 관한 가르침이 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은혜가 되게’(에베소서 4:29) 해야 한다. ‘경우에 알맞은 말은 은쟁반에 담긴 금사과’(잠언 25:11)와 같이 아름답고 품격이 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마태복음 15:11) 즉 말이다. 말은 사람을 깨끗하고 품위 있게 하기도 하고, 더럽히기도 한다. 말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마태복음 15:18)이므로, 먼저 마음을 가다듬고 깨끗이 해야 한다. 그래야 덕을 세우는 말, 분위기에 맞는 말, 좋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123절에는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복을 빌어주면 그 말대로 되지만, 저주의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린다고 한다. 이것은 말에 따른 축복과 저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축복을 받으려면,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말하거나 비판하는 말을 하지 말고, 불평의 말, 저주의 말 대신에 축복의 말을 하여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도 나를 위해 복을 빌어 줄 것이다.

 

   사람들은 말로 인하여 칭찬을 받거나 복을 받기도 하지만, 말을 잘못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꼬집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은 독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아 칭찬하고, 축복하는 말은 나에게 복으로 돌아온다. 말이 지닌 힘이 좋은 쪽으로 미치도록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말을 많이 하며 살아야겠다. <2015. 05. 16.>

 

  

 

서울 성동구 응봉동과 금호동에 걸쳐 있는 응봉산은 봄과 희망을 상징하는 개나리꽃의 명소이다. 이른 봄에 개나리가 활짝 피어 온 산을 샛노랗게 물들이는 응봉산은 강남에서 성수대교를 건너 북쪽으로 올 때에는 산의 남쪽을 보여주고, 독서당길을 지날 때에는 북쪽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여준다. 나는 1990년대 중반에 이곳을 지나다가 개나리꽃이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환호(歡呼)하였다. 그 후로 가끔 이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 꽃이 하도 예뻐서 산 밑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 개나리꽃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했던 적도 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응봉산이 보이는 금호동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응봉산은 해발 94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산 이름은 산의 모양이 매의 머리 모양을 닮았으므로, ‘매봉또는 응봉(鷹峯)’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사냥할 때 이곳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기도 해 산 이름을 매봉 또는 응봉이라고 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조선 태조는 즉위 4(1395)에 이곳에 응방(鷹坊)을 설치하고, 매사냥에 쓸 매를 사육하는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태종세종도 이곳에 와서 매사냥을 즐겼다. 조선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이곳에 와서 151회나 매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매사냥터로 이름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응봉산에 개나리를 심은 것은 1980년대 개발 이후 산자락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서울시는 1987년에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조림사업의 일환으로 1만 그루의 개나리를 심었다. 응봉산은 암반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이어서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몹시 메마르다. 개나리는 이런 땅에서 잘 자랄 수 있는 수종(樹種)이어서 심은 것인데, 지금은 봄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는 개나리 명산이 되었다. 응봉산 동쪽에는 석재(石材)를 채취하던 바위 절벽이 있는데, 이곳을 손질하여 인공암반등반시설을 설치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등반 훈련을 하면서 체력 증진에 힘쓴다.

 

서울 성동구에서는 1997년부터 응봉산에 개나리가 활짝 피는 3월 말부터 4월 초순 사이에 개나리축제를 연다. 개나리축제 때에는 어린이 그림그리기대회, 글짓기대회, 사진전시회, 노래자랑, 먹거리장터 등이 열리는데,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봄기운에 마음껏 취하며 즐긴다.

 

   응봉산은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마주 보이는 산이어서 거실에서 산빛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알 수 있다. 2014년은 터키에서 4년을 보내고 돌아온 후 처음 맞는 봄이어서 화신(花信)을 전해 주는 응봉산의 개나리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여 가끔씩 응봉산을 바라보곤 하였다. 320일 아침, 거실에서 응봉산을 바라보니, 나뭇가지에서 노란색이 조금 보이는 듯하였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보니, 개나리의 가지마다 노란 꽃망울이 맺혀 있다.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 노란빛은 조금씩 짙어졌다. 꽃샘추위에 잔뜩 움츠리고 있던 꽃망울들이 예쁜 미소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며칠 후 아내와 함께 응봉산에 가니, 온 산이 샛노란 개나리와 막 피어나는 목련, 벚꽃이 어우러져 새 봄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터키에 가 있는 동안 봄이면 개나리가 활짝 핀 응봉산의 모습을 떠올리며 보고 싶어 하였는데, 4년 동안 보지 못하였던 꽃들이 나를 반겨준다. 응봉산의 개나리는 새봄의 정취를 마음껏 느끼게 해 주고, 한국에 와서 다시 봄을 맞게 된 기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응봉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 올라 북서쪽을 보니, 대현산과 금호산이 보이고, 그 뒤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남쪽으로는 바로 앞에 서울숲이 있고, 그 옆으로는 중랑천과 한강 본류의 시원한 물줄기가 자연스레 만나는 모습이 보인다. 한강 건너로는 무역센터, 잠실주경기장, 역삼동 스타빌딩, 압구정동 아파트 등의 건물이 보인다. 그 뒤로 관악산, 청계산, 우면산이 눈에 들어온다. 성수대교와 영동대교, 동호대교, 강변북로와 동부간선도로, 성수교와 두무개길을 연결하는 입체도로에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다.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와 힘차게 달리는 차들을 보니, 활기가 넘쳐나 역동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팔각정에서 보는 서울의 경관은 정말 멋지고 아름답다. 응봉산을 남서울 조망의 명소, 별자리 관찰의 명소로 꼽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집으로 오기 위해 독서당길 위로 난 육교를 건너 우리 아파트 뒤쪽에 있는 대현산으로 향했다. 대현산으로 올라가는 길옆과 대현산공원에도 개나리꽃과 벚꽃을 비롯한 여러 꽃들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는다. 대현산을 거쳐 집으로 와서 거실에서 다시 응봉산을 건너다보았다. 응봉산의 개나리꽃들이 자기들의 예쁜 모습이 변하기 전에 다시 오라고 한다. 작은아들과 손녀들이 오면 이들과 함께 다시 가야겠다. 꽃이 지기 전에 애들이 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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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은 여러 봉우리와 바위들이 조화를 이루어 경관이 빼어나므로, ‘경기의 소금강이라는 별명이 붙은 산이다. 특히 진달래가 피는 4월과 단풍이 드는 10월은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10월의 마지막 날 교일산우회 남부모임 회원들과 함께 단풍이 곱게 물든 모습을 보기 위해 다시 소요산을 찾았다. 전철 1호선 소요산역에서 내려 소요산으로 가는 길은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붐볐다.

 

   소요산에는 신라의 고승(高僧)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와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搖石公主)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두 사람의 사랑과 소요산과의 인연을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한 문헌을 참조하여 본다.

 

   신라 태종무열왕 때 고승으로 이름을 떨친 원효대사는 속성(俗姓)이 설()씨이다. 수도에 전념하던 원효대사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게 하겠는가(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하고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이 노래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태종무열왕은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현인(賢人)을 낳고자 하는구나. 현인을 얻는 것은 나라의 큰 이득이다.” 하고, 관리를 시켜 대사를 찾아 홀로 된 요석공주가 살고 있는 요석궁(搖石宮)으로 모시고 가라고 하였다. 관리가 대사를 찾아다니는데, 그때 마침 다리를 건너던 대사가 미끄러져 물에 빠졌다. 관리는 대사를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갈아입게 하였다. 대사는 요석궁에서 며칠을 묵은 후에 떠났다. 얼마 후 요석공주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설총(薛聰)이라 하였는데, 이 아이는 자라서 당대의 석학(碩學)이 되었다. 파계승(破戒僧)이 된 원효대사는 속인(俗人)의 옷을 입고 전국을 떠돌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중생(衆生)을 교화(敎化)다가 소요산에 와서 머물며 수행(修行)에 전념하였다. 대사가 소요산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요석공주는 설총을 데리고 이곳으로 와서 별궁을 짓고 살면서 수도하는 원효대사를 향해 매일 절을 올리곤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이곳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깃든 곳이기에, 입구에 이를 형상화한 연리지문(連理枝門)’을 소요산 상징 아치(arch)로 세워 놓았다. 연리지(連理枝)는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것을 말하는데, 화목한 부부나 남녀 사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아치의 왼쪽 원효목(元曉木)은 원각(圓覺)의 도를 깨우치기 위해 수도하는 원효대사를 형상화한 것이고, 오른쪽 요석목((搖石木)은 지순한 사랑을 품은 요석공주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소요산을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와 연관 짓고, 이를 연리지문으로 형상화한 것은 아주 좋은 착상(着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 연리지처럼 서로 화목하게 마음을 나누며 살았으면 좋겠다.

 

   연리지문을 조금 지나 자재암(自在庵) 쪽으로 올라가니, 요석공원이 있고, 통행로 건너편에 '요석궁터' 표석이 있다. 나는 요석공원과 요석궁터 앞에 서서 파계(破戒)하여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던 원효의 모습, 며칠 동안 꽃피웠던 아름다운 사랑과 그 열매인 아들 설총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수도에만 전념하는 대사를 멀리서 바라보며 매일 예배(禮拜)를 올리는 요석공주의 단풍잎보다 더 곱고 예쁜 사랑을 떠올려 보았다. 이러한 공주의 지성과 사랑을 기리는 뜻에서 맨 오른쪽에 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을 공주봉(公主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봉우리 이름을 원효대사가 지었다고 전해 오기도 하는데, 후세 사람들이 붙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주문을 지나 자재암으로 가려면 해탈문(解脫門)을 지나야 하는데, 108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나는 108계단을 오르면서 벗어나야 할 108번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사람은 눈, , , , , (마음)의 여섯 감각기관이 사물을 접할 때 좋다/ 나쁘다/ 그저 그렇다는 세 가지가 서로 같지 않아 18가지 번뇌를 일으킨다. 괴로움/ 즐거움/ 그저 그런 것과 관련지어 18가지 번뇌가 일어난다. 이들을 합친 36가지 번뇌가 다시 각각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 때문에 108가지 번뇌가 된다. 이러한 세속(世俗)의 백팔번뇌(百八煩惱)에서 벗어나야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나는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으며 108계단을 오르고, 해탈문을 지났다.

 

   해탈문을 지나니, 절벽위에 원효대(元曉臺)’가 있다. 옛날에 원효대사가 도를 깨치지 못해 자살을 하려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하는 순간 문득 도를 깨우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원효대에서 아래쪽을 보니, 단풍이 물들어가는 산자락의 모습이 장관이다. 고개를 돌려 산 쪽을 바라보니, 산줄기를 따라 잘 자란 나무들이 가을 옷으로 갈아입고 자태를 뽐내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나는 이곳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오랜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도를 닦고, 절박한 마음으로 큰 깨우침을 구하던 원효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세상에서 벗어남을 뜻하는 속리교(俗離橋)을 지나고, 극락교(極樂橋)를 지나 자재암에 이르렀다. 자재암은 원효대사가 초가를 짓고 수도하던 곳에 선덕여왕 14(645)에 세운 절인데, 고려 광종 25(974)에 각규대사가 중창하였다. 고려 의종 7(1153)에 불에 탔는데, 이듬해에 다시 지었다. 조선 고종 9(1872)에 다시 지었는데, 순종 원년에 불에 타고, 그 후 다시 지었으나 625전쟁 때 불에 탔다. 지금 있는 대웅전은 1961년에 다시 지은 것이고,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寮舍)1971년에, 포교당과 원효대는 1974년에, 삼성각은 1977년에 지은 것이다. 우리는 자재암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뒤에 원효약수에서 물을 마시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자재암 뒤에 만들어놓은 계단을 밟고 힘겹게 오르니, 해발 440m에 위치한 하백운대가 나왔다. 그곳에서 땀을 식히고, 백형이 가지고 온 찐 고구마로 시장요기를 하고, 다시 30분가량을 걸어 해발 510m에 위치한 중백운대에 도착하였다. 소요산은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해발 560.5m), 나한대((해발 571m), 의상대(해발 587m), 공주봉(해발 526m) 6개의 봉우리가 말발굽모양으로 능선을 이루고 있는데, 거기서는 산봉우리들이 모두 보여 소요산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중백운대에서 상백운대쪽으로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선녀탕길을 따라 내려왔다. 상백운대까지 가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과로할 것 같아 자제하였다. 하산길은 가파르고 바위가 많아 지팡이를 짚고 조심조심 발을 옮겨야 했다. 그래서 매우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이날 우리가 택하여 걸은 등산코스는 일흔 살이 넘은 우리들이 걷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길이었다. 소요산 등산 안내서에 소요시간이 1시간 30분으로 적혀 있는 것을 그대로 믿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인데, 체력 면에서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는 소요산에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숨결을 느끼며 걷는 길은 매우 뜻 깊고, 즐거웠다. 함께 한 회원들의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었기 바란다. (2014.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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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은 서울교육대학을 졸업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024일에는 서울교대 1회 동기생 52 명이 모여 졸업 50주년 기념행사를 하였다. 아침에 모교와 총동창회를 방문 한 후 포천으로 이동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산정호수 둘레길을 걸은 뒤에 시내로 돌아와 모교 총장과 동창회장, 은사님을 모시고 간단한 기념식을 한 뒤에 저녁식사를 하는 순서로 진행한 조촐한 행사였다.

 

   오전 9시가 가까워지자 모교 교정에 동기생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약속한 9시 가 되자 50여 명이 모여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동안 자주 만난 사람도 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도 있었고,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사람은 이름과 기억 속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며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동기생들의 얼굴을 보니, 젊고 예쁘며, 늠름하고 패기 있던 모습은 원숙하고 품위 있는 노인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대학본부 건물 앞에 가니, 중앙현관 위에 교대 1회 졸업 50주년 기념 모교 방문 환영현판이 걸려 있었다.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는 모교와 총동창회의 따뜻한 마음이 고마웠다. 7층 회의실로 가니, 총장 이하 보직교수들이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총장의 환영 인사에 이어 모교의 변화발전의 모습과 현재의 상황을 동영상과 파워포인트로 브리핑(briefing)해 주었다. 행당동 캠퍼스에서 시작한 모교가 서초동 한복판에 자리 잡아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니, 자랑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뿌듯하였다. 행당동 캠퍼스는 지금의 캠퍼스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행당동 캠퍼스의 사진을 볼 때 더욱 정겹게 느껴지고, 감회가 새로운 것은 50여 년 전에 젊은 우리들의 꿈을 길러준 정겨운 공간이었기 때문이리라.

 

   모교와 총동창회 방문을 마친 우리는 중앙현관 앞에서 방문 기념사진을 찍은 후에 대학 내의 시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전세 버스를 타고 포천 산정호수로 향하였다. 버스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정다운 대화를 하였는데,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 다른 자리에 있을 때에는 자리를 바꿔 앉으면서 이야기하였다.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동안 지낸 일과 현재의 일들이 꼬리를 물고 화제로 이어졌다.

 

   포천에 도착하여 맛이 좋기로 유명한 식당으로 들어가 갈비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남암순 동기회장과 금년에 팔순을 맞은 이배춘 회원의 건배사는 졸업 50주년을 맞은 회원들의 건강과 평안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앞으로 더욱 도타운 정을 나누며 건강하게 지내자는 내용이어서, 모든 회원들의 공감을 얻었다. 오랜만에 와서 먹는 포천 이동갈비의 맛도 좋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동기생들과 자유롭게 자리를 옮겨가며 나누는 정담은 더욱 맛깔스럽고 즐거웠다.

 

   점심 식사 후에 2014년도 하반기 정기총회를 가졌다. 총회를 마친 뒤에는 산정호수 둘레길을 걸었다. 그런데 남은 일정에 맞추느라 걷는 거리를 단축하는 바람에 정다운 친구와 단풍이 든 산정호수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걷는 즐거운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을 안고 버스에 올랐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정창덕 회원의 진행으로 앞에서부터 차례로 졸업 50주년을 맞는 감회를 말하기도 하고, 자기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저녁 630분에 서초동 음식점의 넓은 방에 자리 잡은 우리는 간단한 기념식을 하였다. 기념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동기회 회장의 개회사, 모교 총장과 총동창회장의 인사에 이어 재학시절에 우리를 가르쳐 주신 박붕배최병록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서울교육대학교 교가를 제창하였다. 이 자리에서 동기생들은 졸업 50주년을 기념하면서 뜻을 모아 모교 발전기금과 장학기금을 총장과 총동창회장께 전달하였다. 남암순 회장은 개회사에서 우리를 올곧은 교육자로 길러주신 모교 은사님들의 노고에 대한 감사와 치하의 말씀을 올리고, 훌륭한 교사에 대한 꿈과 열정을 담고 생활하던 재학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감회, 40여 년 간 교단을 지키며 교육의 현장에서 겪은 기쁨과 보람, 힘들고 슬펐던 일들을 진솔하게 표현하여 모두의 공감을 얻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운 마음을 표현한 뒤에 유명(幽明)을 달리한 동기생들에 대한 아픔을 말할 때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동기생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심언녕 회원의 지휘로 <서울교대 교가>를 제창할 때에는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식장에 들어갈 때 받은 악보를 보고서 교가를 까맣게 잊고 지낸 나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하였다. 악보를 보니, 다행스럽게도 교가의 가사와 멜로디가 떠올라 반주를 들으며 심 회원의 지휘에 따라 교가를 부를 수 있었다. 나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서울교대와 교가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 것임을 생각하니, 서울교대와의 인연의 끈이 매우 질긴 것임을 느꼈다.

 

   저녁 식사 시간에는 이봉준 목사가 건배를 제안하였는데, 예배 시간의 축도(祝禱)처럼 지금까지 지낸 일에 대한 감사와 기쁨, 앞날에 대한 기원(祈願)의 내용을 담은 뜻 깊은 건배사여서 공감(共感)이 되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여흥(餘興)의 시간을 가졌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곱고 아름다운 목소리 또는 힘찬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맵시 있는 춤을 추는 남녀 동기들이 있어 모두 칭찬과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어서 오래 계속하고 싶었지만, 9시에 끝내기로 한 식당과의 약속 때문에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서울교대와 맺은 인연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대학입학지원을 할 무렵에 서울교대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고1 때 담임이셨던 정 선생님의 권유와 설득으로 법학과 지망(志望)의 뜻을 접고 서울교대를 지원하여 서울교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인연으로 졸업과 동시에 교사 자격증을 받고 서울시내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 인연이 끈이 되어 같은 학교에 근무하게 된 동기동창생과 연애하여 결혼하였다. 아내와 나는 재학 시절에는 소원(疏遠)하여 겨우 얼굴과 이름을 알고 지낸 정도였으니, 같은 학교로 발령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저 평범한 동기동창생이었을 것이다. 서울교대와 맺은 인연의 끈이 평생 반려(伴侶)를 만나게 해 주었다.

 

   나는 아내의 도움으로 야간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은 후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대학의 교수가 된 뒤에도 서울교대에서 배운 기본적인 지식과 소양은 나의 교수 생활의 기본이 되어 강의와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서울교대와 인연이 있는 선배의 사랑과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교수로 30년을 지내고 정년퇴직한 뒤에 터키에 객원교수로 파견되어 4년 동안 한국어와 한국문학, 한국문화를 가르칠 때에도 서울교대에서 배운 지식과 초등학교 교사 때에 얻은 경험은 큰 힘이 되었다.

 

   서울교대와 맺은 인연의 끈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 평생을 함께 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사회적 성장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퇴직한 후에는 공무원연금을 받으며 교양 있고 수준 높은 동기생들과 교유(交遊)하면서 즐겁고 유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서울교대와 맺은 인연의 끈은 정말 질기고 튼튼하다. 이러한 인연의 끈을 나에게 던져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한다. 오늘따라 교대 진학을 권유해 주신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께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과 함께 그리움이 크게 일어난다. 그러나 이 마음을 전할 길이 없으니, 이런 마음을 지그시 억누르며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2014.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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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암

   얼마 전 친구들과 서울특별시 강동구와 경기도 하남시에 자리 잡고 있는 일자산(一字山)에 갔다. 일자산은 경사나 굴곡이 심하지 않은 산등성이가 ()’ 자처럼 이어져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자산에는 고려 말의 대학자였던 이집(李集, 1327~1387) 선생이 1368(공민왕 17)에 신돈(辛旽)의 비행을 비판하고, ()를 피하기 위해 숨어서 지냈다는 둔굴(遁窟)’이 있다. 이집 선생은 이 일을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호를 둔촌(遁村)’이라고 하였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遁村洞)의 동명(洞名)은 이집 선생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일자산의 산길을 걸을 때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개암나무였다. 개암나무는 개암을 담은 파란 주머니를 다닥다닥 달고서 뽐내며 서 있었다. 요즈음 자주 가는 대모산에서 보지 못하던 개암나무가 몇 그루씩 무리를 지어 서 있는 것을 보니 무척 반가웠다. 함께 걷던 친구에게 이게 무슨 나무인지 아느냐고 물으니, 잘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개암나무와 그 열매 개암에 관해 간단히 말한 뒤에 조금 떨어져 걸으면서 개암과 관련된 일들을 생각하였다.

 

   개암은 모양은 도토리 비슷하며, 껍데기는 노르스름하고 속살은 젖빛이다. 맛은 밤 맛과 비슷하나 더 고소하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마을의 뒷산에 개암나무가 유난히 많았다. 그래서 가을에 나무를 하러 산에 가서 나무에 달려 있는 개암을 따기도 하고, 땅에 떨어져 낙엽 속에 있는 개암을 줍기도 하였다. 그 때 겉껍질을 이로 물어 깬 뒤에 속껍질을 벗기고 먹던 개암의 고소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개암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 들은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옛날에 한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개암 하나를 줍자 이것은 아버지께 드려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하나를 줍자 이것은 어머니께 드려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또 하나를 줍자 그제야 이것은 내가 먹어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비를 피하려고 산속의 오두막집에 들어갔는데, 비가 그치지 않았다. 날이 저물자 도깨비들이 몰려와 방망이 하나를 세워놓고, “밥 나와라!” 하면 밥이 나오고, “고기 나와라!” 하면 고기가 나왔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 잔치를 하였다. 다락에 숨어 있던 그는 배가 고파 개암을 먹으려고 이로 겉껍질을 깨무니, ‘-’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놀란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놓아둔 채 도망하였다. 그가 도깨비방망이를 가지고 와서 금 나와라!” 하면 금이 나오고, “은 나와라!” 하면 은이 나왔다. 그래서 그는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웃마을의 한 젊은이가 일부러 도깨비가 나온다는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는 개암을 줍자 이것은 내가 먹어야지.” 하면서 주머니에 넣고, 그 다음에는 이것은 내 색시 주어야지.” 하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처럼 그는 자기와 자기 아내 몫부터 챙기고, 부모는 뒷전이었다. 그가 외딴집에 들어가 있으니, 도깨비들이 몰려왔다. 그가 개암을 깨물자 도깨비들은 다락으로 올라와 지난번에 가져간 방망이를 내놓으라며 때렸다. 그래서 그 사람은 도깨비한테 매만 실컷 맞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은 도깨비도 도와주지만, 자기만 아는 욕심쟁이는 벌을 받는다는 교훈적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산에서 나무하다가 개암을 줍게 되면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어른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마음을 다짐하곤 하였다. 그 후 나는 개암하면 고소한 맛과 더불어 도깨비방망이이야기가 떠오르곤 하였다.

 

   나는 부모님의 묘를 서울 가까운 곳으로 이장(移葬)하기 전까지 충남 홍성에 있는 선산(先山)에 벌초를 하러 다녔다. 벌초를 하러 가면, 선영(先塋) 가까운 산길 좌우에 늘어서 있는 개암나무가 나를 맞아주곤 하였다. 나는 개암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개암나무를 볼 때마다 옛일이 생각나서 반가운 마음으로 만져보곤 하였다. 그러나 개암이 여물지 않아 맛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워하곤 하였다. 개암이 익을 무렵에 다시 성묘를 갔으면 부모님도 찾아뵙고, 개암 맛도 볼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하여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작년에 김 교수 내외와 함께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있는 김유정 문학촌에 갔을 때의 일이다. 김유정의 생가와 전시관, 동상(銅像), 디딜방아 등을 관람하고, 안내표지판을 보면서 금병산 실레이야기길을 따라 걸었다. 그 때 길 옆 산언덕에 개암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개암나무들은 키가 크고, 아주 튼튼해 보였다. 개암나무가 자생한 것인지, 정성들여 재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 내가 국내에서 본 개암나무 중 가장 크고, 개암도 많이 열렸다. 얼마 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 연암(燕巖) 물레방아공원에 갔었는데, 그곳에서도 개암이 열린 개암나무 여러 그루를 보았다. 연암 박지원이 1792년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설치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공원에서 개암나무를 보니 무척 반가웠다. 나는 국내 여러 곳에서 개암나무를 보면서 터키 흑해 연안에서 보던 개암나무숲과 맛있게 먹던 개암을 생각하였다.

 

   나는 터키 카이세리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서 객원교수로 2009년부터 4년 동안 근무하였다. 그곳에 간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슈퍼마켓의 견과류 코너에서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함께 간 그곳의 G 교수에게 물으니, 영어로는 헤즐럿(hazelnut), 터키어로는 픈득(fındık)이라고 하였다. 헤즐럿은 우리말로 개암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다가 먹어보니, 정말 고소하고 맛이 좋았다. 어렸을 때 고향의 뒷산에서 주워 먹던 개암의 맛이 연상되었다.

 

   개암에 대한 기록을 보면, 동의보감(東醫寶鑑)에 기력을 높여주며, ()과 위()를 튼튼하게 해 준다고 적혀 있다. 이것을 보면,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개암의 효능을 알았던 것 같다. 요즈음에는 개암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그 장점이 널리 알려졌다. 개암에는 지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단순불포화지방이어서 몸에 좋고, 항암물질인 택솔(taxsol)이 들어 있어 항암 작용을 한다고 한다. 또 개암에는 칼슘과 철분도 많이 들어 있어 골다공증(骨多孔症) 예방에도 도움을 주고, 콜레스톨 수치를 낮춰주며, 암세포 활동을 억제해 준다고 한다. 비타민 E가 많이 들어 있어 심장질환 및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 등의 대사성 질환의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개암은 향()이 좋고 고소한 맛이 있어 커피와 초콜릿, 과자를 만드는 데에도 많이 넣고 있다. 얼굴과 피부에 영양을 공급해 주기 때문에 화장품으로도 이용하고 있다.

 

   터키 속담에 한 줌의 픈득(개암)이 평생의 건강을 지켜준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을 보면, 터키 사람들도 일찍부터 개암의 효능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개암은 터키미국이탈리아스페인 등에서 생산되는데, 터키의 흑해 지방에서 전 세계 소비량의 70%를 생산한다고 한다. 나는 터키에 있는 4년 동안 개암을 떨어지지 않게 사다 놓고 먹었다. 내가 개암을 좋아하니, 나와 인연이 있는 터키 사람들과 터키를 오가는 한국 사람이 개암을 사다 주곤 한다. 그래서 터키에서 돌아온 지 1년이 넘은 지금까지 계속하여 개암을 먹고 있다.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개암을 아느냐고 물으면 잘 모른다고 한다. ‘헤즐럿을 아느냐고 하면, “헤즐럿 커피요?” 하고 반문한다. 커피에 헤즐럿 향을 가미한 헤즐럿 커피는 마셔보았지만, 견과(堅果)인 헤즐럿 즉, 개암을 통째로 먹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묻는 것이리라. 요즈음에는 터키에서 수입한 개암을 남대문시장에서 판다고 한다. 개암은 예로부터 국내 여러 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니,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아 재배하지 못하는 식물은 아닐 것이다. 건강에 좋은 견과류이니 수입해 오는 것도 좋지만, 국내에서 재배하여 많이 생산되었으면 좋겠다.

                                                   <청하문학 13, 서울 : 문예운동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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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 바로 알고 바로 쓰기(10)>

무데뽀, 앗싸리, 부락, 엑기스와 같은 말은 쓰지 말아야

 

  며칠 전에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오가는 것을 들었다. “그렇게 무데뽀로 덤비지 말고 잘 생각해 봐./ 그 사람은 정말 무데뽀.” “그 사람 정말 앗싸리하더라./ 그 일은 질질 끌지 말고 앗싸리하게 거절해.” 이런 대화에 나오는 무데뽀앗싸리는 일본어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말인 줄 알고 쓰고 있다.

 

  ‘무데뽀(むてっぼう)’무철포(無鐵砲)’라는 한자어에서 온 말로, 아무데나 마구 쏘아대는 대포를 뜻한다. 이 말은 그 방향과 시각을 정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마구 쏘아대는 대포처럼 앞뒤 생각 없이 무슨 일을 하거나, 분별없이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 또는 그런 사람을 빗대어 표현하는 말이다. 이에 해당하는 우리말로는 무턱대고/저돌적또는 무모한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위의 대화는 그렇게 무턱대고(저돌적으로) 덤비지 말고 잘 생각해 봐./ 그 사람은 정말 무모한 사람이야.”로 바꿔 쓰는 것이 좋겠다.  ‘앗싸리(あっさり)’담박하게/산뜻하게/시원스럽게의 뜻을 가진 일본어이다. 이에 해당하는 우리말로는 산뜻하게/ 담박하게/ 시원스럽게/ 깨끗하게/ 간단하게가 있다. 그러므로 위의 대화는 그 사람 정말 시원스럽더라./ 그 일은 질질 끌지 말고 깨끗하게 거절해.”로 바꿔 쓰는 것이 좋겠다.

 

   요즈음에도 시골에 가면 자기가 사는 마을을 ‘00부락(部落)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 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격하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부른 이름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부락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마을을 ‘00부락이라고 하는데, 그 마을을 얕잡아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우리는 이러한 뜻을 지닌 부락이라는 말을 버리고 마을/동네로 쓰는 것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인삼 엑기스/매실 엑기스라고 하여 엑기스란 말을 우리말처럼 쓰고 있다. 이 말은 진액/추출액의 뜻을 가지고 있는 영어 엑스트랙트(extract)’에서 나온 말이다. 일본인들은 이 말을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우니까 엑기스라고 줄여서 말하였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가 일상용어처럼 쓰고 있다. 한국인은 어떤 외국어도 자유롭게 발음할 수 있으므로 굳이 일본식 영어를 따라 하지 말고, 영어의 원음 그대로 엑스트랙트라고 하거나 줄여서 엑스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영어의 엑스트랙트나 엑스보다는 같은 뜻을 가진 우리말 농축액/진수/진액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기독교타임즈 제451, 2006.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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