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로 알고 쓰기(2)

‘할렐루야’와 ‘아멘’은 필요한 때에만 써야

 

  어느 장로님은 친구를 만나거나 통화할 때 큰소리로 할렐루야!’ 하고 인사한다. 어느 목사님은 새로 나온 교우를 소개할 때 이름을 말하며 일어서게 한 뒤에 환영하는 뜻에서 주보를 들고 큰 소리고 할렐루야를 외치게 한다. 또 부흥회 때 강사 목사님을 소개하면서 환영의 뜻으로 할렐루야!’를 외치게 한다. 이처럼 일부 기독교인들은 '할렐루야'를 인사말이나 구호처럼 쓰고 있다.

  

  할렐루야(Hallellujah)‘Hallellu’찬미하다의 명령형이고, ‘jah’야훼(yahweh)’의 준말로 여호와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면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의 뜻이 된다. 시편에서 많이 쓴 할렐루야는 문맥으로 보아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명령형의 말이다. 할렐루야는 하나님께 하는 찬양이며 인사이지, 사람 사이에 하는 인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랜만에 만난 교우끼리의 인사말로 하는 할렐루야, 새로 나온 교우를 소개하거나 강사 목사님을 소개할 때 쓰는 할렐루야!’는 적절하지 않다. 굳이 이스라엘말로 인사하려면 샬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인사말로 하는 할렐루야는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로 바꿔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느 목사님은 말씀을 선포하면서 방금 한 말을 강조하는 뜻에서 할렐루야라고 말하거나, 그 내용을 확인하는 뜻에서 교우들에게 할렐루야로 화답하게 한다. ‘할렐루야를 말한 내용을 강조하거나 확인하는 구호(口號)’처럼 쓰는 것 역시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없다.

 

  몇 년 전에 장로들이 교육을 받는 자리에 갔을 때의 일이다. 강사 목사님이 출석을 확인하려고 이름을 부르는데 아멘하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었다. 쉬는 시간에 이를 지적하였더니 곱지 않은 반응이 돌아왔다교우 중에는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들으면서 수시로 아멘을 크게 외쳐 둘레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분도 있다. 목사님들 중에는 말씀을 선포하시는 중에 필요 이상으로 아멘을 외치게 하고, ‘아멘소리가 적으면 마치 교우들의 듣는 태도가 나쁜 것처럼 꾸중하시는 분이 계신다. 어느 부흥회에서 강사 목사님이 말씀을 선포하시는 중에 어느 분이 쌀장사를 해 번 돈을 헌금하여 교회를 지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셨다. 목사님은 그 분이 쌀을 사려고 농촌에 가면 쌀값이 내리고, 그 쌀을 팔려고 하면 값이 올라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였다. 그 때 목사님은 흰 손수건을 꺼내들고 쌀값이 올랐습니다’, ‘쌀값이 내렸습니다를 여러 번 되풀이하면서 그 때마다 아멘하고 외치게 하였다.

 

   아멘(amen)확실하다’, ‘확실히’, ‘진실한’, ‘진실’, ‘참으로’, ‘참으로 그렇게 되기 바랍니다.’의 뜻을 가진 말로 알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므로 출석을 부를 때 대신 아멘하거나, 설교 내용의 확인 또는 주의 집중을 위해 아멘하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목사님이나 회중을 대표하는 분의 기도, 목사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이 감동적이면 교우들의 입에서는 저절로 아멘소리가 흘러나올 것이다.  ‘할렐루야아멘은 필요한 때에 적절히 써야 은혜스럽다. 적절하지 않은 경우에 큰 소리로 할렐루야아멘을 외치는 것은 바른 표현이 아닐 뿐더러 믿지 않는 사람이나 초신자들에게 저항감을 줄 수도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참고문헌> 이송관김기창,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 알고 바로 쓰자, 서울 : 예찬사, 2000.

                 리의도,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려면 꼭 알아야 할 것들, 서울 : 설필, 1997.

 

                                                     <기독교타임즈 제443, 2006. 9. 23.>에 수록한 글임.

   우리말 바로 알고 쓰기(2)  

              ‘형제’, ‘자매’의 잘못 사용

 

  어느 교회의 주보를 보니, 교회 소식 난에 00 형제 군 입대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을 본 나는 형제면 나이 차이가 있을 터인데, 어떻게 되어서 함께 입대하게 되었을까 궁금하였다. 그러다가 함께 입대하는 형제는 쌍둥이거나 아니면 형이 입영 연기를 받았다가 동생과 함께 입대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군에 입대하는 청년은 한 사람이었다.

 

  어느 주일 예배의 광고 시간에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00 자매님이 우리 교회에 새로 나오셨습니다. 잠깐 일어나시지요.” 이 말을 들은 나는 언니와 동생 두 사람이 일어설 것이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는데,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형제자매는 우리가 흔히 쓰는 쉬운 말이다. 그런데 의미의 전달과 수용에서 차이를 보였다. 이것은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코드(code)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을 보면, ‘형제(兄弟)’란 말은 형과 아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형과 아우 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복수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 ‘자매(姉妹)’는 여자끼리의 언니와 아우를 가리키는 말로, 역시 복수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교우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도 남자일 경우는 형제, 여자일 경우에는 자매란 말을 많이 쓴다. 기독교인은 모두 주님의 사랑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 할 수 있으므로, 교우들의 관계를 말할 때 형제 또는 자매라고 하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남자 교우 또는 여자 교우 한 명을 형제 또는 자매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교회에서 형제와 자매를 잘못 쓰게 된 원인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교 초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교우들의 관계를 말할 때나 남자 또는 여자 교우 한 명을 가리킬 때에 브라더(brother)’시스터(sister)’로 표현하였다.

 

  ‘brother’를 영영사전에서 찾아보면, ‘one of the sons of the same parents(같은 부모의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 또는 ‘one of the sons of only the same mother or father(어머니 또는 아버지가 같은 아들들 중의 하나)’로 풀이되어 있다. ‘sister'’brother'와 성별만 다를 뿐 같은 뜻의 말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영어의 ‘brother’‘sister’ 우리말의 형제자매처럼 형(언니)과 아우를 가리키는 복수 개념의 말이 아니다. 그런데 ‘brother’‘sister’형제자매로 번역하여 쓰면서, 두 나라 말의 차이점을 망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앞에 적은 ‘000 형제’, ‘000 자매는 연령을 고려하여 ‘000 (, )’ 또는 ‘000 (, )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일 경우에는 직분에 맞는 칭호를 붙이는 것이 좋겠다. 청년회 예배 중에 ‘000 형제(자매)가 기도해 주시겠습니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름 뒤에 회원이나 ()’, ‘()’을 붙여 부르는 것이 좋겠다.

<참고문헌> 이송관김기창,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 알고 바로 쓰자, 서울 : 예찬사, 2000.

                 리의도,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려면 꼭 알아야 할 것들, 서울 : 설필, 1997.

<기독교타임즈 제442, 2006. 9. 16.> 에 수록한 글임.

*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잘못 쓰는 말이 여럿 있다. 이를 바로잡으려는 뜻에서 <기독교타임즈>에 10회에 걸쳐 실었던 글을 옮겨 놓았다.

 

우리말 바로 알고 쓰기(1)  

     ‘당신’, ‘축복’은 하나님께서 섭섭해 하실 말

 

  얼마 전의 일이다. 주일 11시 예배 시간에 내가 잘 아는 목사님께서 축복기도를 하시는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하나님,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00교회 성도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들은 300여 명의 예배 참석자들은 모두 목사님의 기도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종인 네가 정성으로 기도하니 들어주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밖에는 표현을 못하니?’ 하고 섭섭해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섭섭해 하셨을까?

 

  <표준 국어대사전>에서 당신이란 말을 찾아보면, ‘듣는 이를 가리키는 2인칭 대명사. 부부 사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2인칭 대명사. 맞서 싸울 때 상대편을 낮잡아 이르는 2인칭 대명사.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나 나온 바 있는 사람을 아주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였다. ①~③2인칭으로, 아주 높임의 뜻이 없고, 그저 하오체의 말투에서 쓰는 경우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부르는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실 대상으로, 인칭을 따진다면 2인칭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예사높임의 뜻을 가진 당신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는 아주높임의 뜻이 있으나, 3인칭에 주로 쓴다. “할아버지께서는 생전에 당신의 장서를 소중히 다루셨다.”와 같은 경우에 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고, 대화의 상대이므로 3인칭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당신께서 사랑하시는당신하나님께서로 써야 한다.

 

  축복(祝福)행복을 빎’, ‘신의 은혜를 빎의 뜻을 지닌 명사인데, 뒤에 하다가 붙으면 동사가 된다. 한자어인 축복의 한자는 빌 축()’ 자와 복 복()’ 자로, 복을 빈다는 말이다. 복을 빌 때 복을 내려달라고 비는 것은 사람이고, 복을 내려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께 복을 빌어달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므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복을 내려’로 고쳐 써야 한다. 개역개정판 성경 《창세기》 123절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라고 되어 있는 것은 좋은 참고가 된다.

 

  처음에 인용한 축복기도를 해주신 목사님은 외국에 가서 여러 해 신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신학대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목회활동도 하시는 분이다. 이 목사님의 언어 습관은 어려서부터 입에 익은 것이다. 지금도 여러 목사님이나 장로님, 교회학교 교사, 많은 신도들이 이런 말을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실정이다. 기도할 때 말을 다듬어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섭섭해 하실 표현을 쓰면서 그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이송관김기창,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 알고 바로 쓰자, 서울 : 예찬사, 2000.   리의도,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려면 꼭 알아야 할 것들, 서울 : 설필, 1997.

<기독교타임즈 제441호, 2006. 9. 9.> 에 수록한 글임.

   며칠 전 교일산우회 남부모임 회원 7명은 서울시 동작구 현충로 210에 자리한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이날 현충원을 찾은 것은 순국선열(殉國先烈)과 호국영령(護國英靈)이 영면(永眠)해 계신 국립현충원에 참배(參拜)하면서 이 분들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뜻을 기리고, 묘역 전체를 한 바퀴 돌면 산행(山行)의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아주 오래 전에 다녀온 후 최근에는 가지 못하였으므로 조금 죄송스런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현충원 정문 안 종합민원실 뒤편의 쉼터에서 만난 우리는 계레얼마당을 지나 현충문 앞으로 갔다. 우리는 현충문 왼쪽에 있는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과 오른쪽에 있는 육탄 10용사비를 살펴보았다. 그 옆에 있는 호국종(護國鐘)을 살펴본 뒤에 장병묘역(將兵墓域)으로 갔다. 장병묘역에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숨진 많은 장병들의 계급과 이름이 적힌 비석이 가지런히 서 있었다. 1번 묘역을 지나 2번 묘역에 가니, 장병들의 비석 앞에 채명신 장군의 묘비가 보였다.

 

   채명신 장군은 516군사정변에 가담하였으나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군으로 돌아가 군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던 중 19658월부터 38개월 간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근무하면서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부하 장교와 병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유별하여 많은 장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채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의 10월유신에 반대하였으므로, 대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하였다. 그 뒤에 스페인그리스브라질 대사를 지냈다. 채 장군은 장군묘역에 묻힐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급은 다르지만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했던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장병 묘역에 안장되었다. 채 장군은 살아서는 전쟁영웅, 죽어서는 참군인으로 추앙받는 분이다. 우리는 채명신 장군의 묘비 앞에 일렬로 서서 거수경례로 추모의 뜻을 표하였다.

 

   우리는 경찰충혼탑, 임정묘역(臨政墓域), 대한독립군무명용사 위령탑(慰靈塔)을 지나 장군묘역을 둘러보고, 맨 위쪽에 자리 잡은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171114일 경북 선산에서 출생했다. 1963년 대한민국 5대 대통령에 취임해 연이어 9대 대통령까지 역임하는 동안 수차례에 걸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산업입국(産業立國)을 다졌다. 그리고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한 새마을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여 가난을 극복하고, ‘하면 된다는 국민적 자신감을 일깨웠다. 그래서 우리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여 대한민국 선진화의 기반을 구축했다. 또 오늘날 우리 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율곡계획을 집념 있게 추진하여 국방력 증강 및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791026일 서거하여 113일 국장(國葬)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봉분 옆에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봉분이 있었다. 19251129일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이 된 후 각종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앞장섰다. 1974815일 광복절 기념식 중 북한의 사주(使嗾)를 받은 괴한의 저격(狙擊)으로 서거(逝去)하여 819일 국민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나라를 위한 공로는 인정하지 않고 독재자로만 보는 시각이 만연(蔓延)해 있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우리는 내려오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192416일 전남 신안 하의도에서 출생하여 1961년 민의원,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7813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세 번의 대통령 선거 패배를 딛고 1997년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어 1998225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오랜 기간의 정치적 역경(逆境)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이 땅에 정착시킨다는 일념으로 헌신했다. 취임 후 1997년부터 시작된 외환위기(外換危機)의 극복을 위해 금융기업공공노동 4대 분야 개혁을 단행하고, 정보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국민기초생활보장과 자율적 문화정책을 통해 우리나라를 복지, 문화국가가 되게 했다. 20006월에는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켰으며, 그해 12월에는 민주주의, 인권, 평화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9818일 서거하여 823일 국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나는 김 대통령 묘소에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김 대통령이 많은 실적을 남겼지만, 도를 넘은 햇볕정책으로 우리 사회에 많은 부작용을 남겨 놓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우리는 김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묘소에 참배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875326일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서재필 박사와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사상을 전파하고, 민족계몽에 앞장섰다. 19193·1운동 이후에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 외교활동을 펼치던 중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1948년 제헌국회의장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 대통령은 해방 직후의 혼돈(混沌)을 극복하고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졌다. 6·25전쟁의 국난을 극복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반공 포로를 석방하였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미동맹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4·19민주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下野)한 뒤 하와이에서 생활하다 1965719일 서거하였다. 같은 해 7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대통령은 국립묘지에 최초로 안장된 국가원수(國家元首)이다. 이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는 이 대통령과 합장되었다. 190061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한 프란체스카 여사는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나 1934108일 뉴욕시에서 결혼하고, 1948년 영부인이 되었다. 1992319일 이화장에서 향년(享年) 93세로 서거하여 323일 가족장으로 이곳에 합장되었다. 이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이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과 국가의 기틀을 다진 공()은 속으로 묻히고, 독재자로만 매도(罵倒)되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나는 이어지는 장병 묘역을 지나 정문 쪽으로 내려오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였다. 하나는 우리 모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지녔던 애국 충정(忠情)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에 계신 세 분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고 있다. 세 분 대통령은 재직 시에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다. 잘한 일만을 확대하여 잘못한 일을 덮으려는 것도, 잘못한 일만을 확대하여 잘한 일을 폄훼(貶毁)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 생각한다. ()은 공대로 인정하고 치하하면서 과()는 과대로 지적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나는 터키에 있을 때 전 국민이 아타튀르크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추앙(推仰)하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부러워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온 국민이 추앙하는 대통령이 속히 나오기를 바라는데, 이 마음이 지나친 사치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2014718)

'알림, 생활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교대와 맺은 인연  (0) 2015.01.15
개암  (0) 2015.01.05
딸의 출국  (0) 2014.08.18
구곡폭포와 문배마을  (0) 2014.08.04
정년퇴임 교장의 밭농사  (0) 2014.07.23

  지난주에 한 아파트 단지의 뒷동에 살던 딸이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지난 1월에 미국 LA로 직장을 옮긴 사위를 뒤따라갔으니 잘 된 일이다. 그런데도 딸을 떠나보낸 나와 아내의 마음은 세상이 텅 빈 것 같고, 허전하다. 3년 전 같은 아파트 앞 동에 살던 큰 아들네 가족이 직장 근처로 이사를 갔을 때에도 그랬는데, 이번에는 그 정도가 더한 것 같다. 마음이 여린 아내는 아파트 뒤쪽 베란다에서 딸이 살던 아파트를 내려다보면서도 눈물을 글썽이고, 딸이나 외손자손녀 이야기만 나오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딸은 1996년에 결혼하여 서울에서 2년 간 신혼생활을 한 뒤에 한국 기업의 주재원으로 미국에 가서 4년여를 지낸 뒤에 200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때 우리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자리를 잡아 지금까지 살았다. 딸은 12년을 사는 동안 두 차례 이사를 하였으나,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의 이사여서 늘 우리 곁에 있었다. 그 동안에 미국에 가기 전에 낳은 외손녀는 고등하교 2학년 학생이 되었고, 미국에 있을 때 낳은 외손자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사위는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여러 차례 승진을 하였다. 그러나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한 채 50세 가까이 되자 자원하여 명예퇴직을 하였다. 퇴직한 후에 두 번이나 새로운 회사에 취업하여 몇 달씩 근무하였으나 그의 능력이나 뜻을 펼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던 중 중소기업의 미국법인 장으로 선발되었다.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 미국 유학을 하였고, 전에 미국 주재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발탁된 것 같다. 나이 50이 넘어 새로운 직장을 잡은 것도 다행스런 일인데, 자녀들의 학업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미국 LA의 법인장이 되었으니, 참으로 잘 된 일이다. 이 일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한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위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라 믿고 감사한다.

 

   딸네 가족이 미국에 가게 되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된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출국을 축하하고, 감사하며 그곳에 가서 잘 살기를 바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섭섭하고 허전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그 동안 가까이 살면서 나눈 정이 깊고, 이번에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말은 아이들 공부가 끝나면 돌아온다지만,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겠다. 작은애가 대학을 마칠 때까지만 계산하여도 10년 넘게 걸릴 것이다. 대학을 마친 큰애가 학업을 계속할지, 직장은 어디서 잡을지도 확실하지 않으니, 돌아올 날을 쉽게 점칠 수 없다. 나와 아내는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 전처럼 가까이 살면서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가까이 사는 동안 우리는 외손녀와 외손자가 하루하루 자라는 과정을 보고, 재롱을 보며 즐거워하였다. 명절 때는 물론 시간이 맞으면 큰아들과 작은아들네 아이들까지 함께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한한 행복을 느꼈다. 딸은 수시로 드나들며 집 안팎의 대소사를 이야기하였다. 나나 아내가 몸이 아플 때에는 문병 와서 위로하였다. 자기 볼 일로 백화점이나 마트에 갔다가도 예쁜 옷이나 신발이 있으면 사다 주었다. 자기 볼일로 어디를 갔다가도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과일이나 음식이 눈에 띄면 사서 들고 왔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안의 소식은 물론, 이웃 동네의 크고 작은 소식도 알려주었다. 딸은 우리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해 주었다.

 

  사위와 딸은 미식가(美食家)에 가까울 정도로 맛에 민감하다. 외손녀 또한 그러하다. 그들은 맛있는 음식점을 가본 다음에는 우리 부부를 데리고 갔다. 그래서 가까운 곳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동네의 좋다는 음식점을 안내하곤 하였다. 음식 값은 우리를 대접하는 뜻에서 그가 내기도 하고, 좋은 곳을 안내받은 턱으로 내가 내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딸네 가족과 정이 깊어졌다. 그런 딸네 가족이 멀리 떠나고 보니, 우리 아파트 단지, 아니 서울이 텅 빈 것 같다.

 

  아내는 경동시장의 과일과 채소의 값이 동네의 마트보다 훨씬 싼 것을 보고, 이것저것 사려다가 나눠줄 딸이 없음을 생각하고 주춤하였다. 시내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도 딸네 가족과 함께 식사하던 생각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예쁜 옷이나 장신구(裝身具) 가게 앞을 지나다가도 이를 사다 주면 좋아할 외손녀가 없음을 생각하고 눈물을 훔쳤다.

 

  나는 아내에게 우리가 미국에 가거나 딸네 가족이 한국에 오면 만날 터이니 너무 아쉬워하거나 허전해 하지 말라고 위로하곤 하였다. 아내는 내 말에 공감하면서도 가슴이 아리고 텅 빈 듯한 것을 어찌 하란 말이냐고 대꾸하며 눈물을 훔치곤 한다. 이를 보는 나의 눈가에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곤 한다. 나는 아내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려고 차에 태워 소요산으로 가서 산길을 걷기도 하고, 신북온천에 가서 쉬기도 하였다. 강원도 고성에 있는 콘도에 가서 쉬면서 온천욕을 하고, 통일전망대와 DMZ박물관을 관람하기도 하였다.

 

  미국에 있는 딸과 외손자손녀와는 자주 카톡, 보이스톡, 영상통화를 한다. 그러는 동안에 가슴이 텅 빈 것 같던 허전함과 아리던 상처는 조금씩 아물고 있다. 이제 그곳 생활에 잘 적응하면서 건강하게 지내기를 기도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주 안부를 전하면서 지내다가 만날 날이 속히 오기를 기다려야겠다.

 

  며칠 후면 대학의 교수인 큰아들이 연구년을 맞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아들네는 1년 후면 돌아오겠지만, 딸네가 떠난 뒤에 바로 떠난다고 하니, 더욱 허전하다. 남아 있는 작은 아들네 가족과나 자주 만나야 할 터인데, 아들과 며느리가 바쁘고 거리가 머니 자주 만나기도 어려울 듯하다. 텅 빈 것 같은 허전함과 아쉬움을 달래며 지낼 일이 걱정이다.

                                                                            (2014. 6. 20.)

'알림, 생활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암  (0) 2015.01.05
국립서울현충원 참배  (0) 2014.08.27
구곡폭포와 문배마을  (0) 2014.08.04
정년퇴임 교장의 밭농사  (0) 2014.07.23
추임새를 잘 하는 사람  (0) 2014.07.08

   며칠 전에 교일산우회 남부모임 회원 7명과 함께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에 있는 구곡폭포와 문배마을에 갔다. 오전 950분에 상봉역에서 만나 춘천행 열차를 타고 1시간쯤 달려 강촌역에 도착하였다. 강촌역에서 내린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타고 구곡폭포 매표소 앞 주차장으로 갔다. 주차장에서 보니 왼쪽 길은 봉화산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구곡폭포로 가는 길이다. 문배마을은 구곡폭포 입구에서 갈라진다고 하므로 구곡폭포 매표소 쪽으로 갔다.

 

   구곡폭포 매표소 앞에는 길 양쪽에 세운 목조 문기둥에 가로로 걸쳐놓은 현판에 자연이 살아 숨쉬는 구곡폭포 관광지라고 커다랗게 쓴 글자들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매표소에 가니 어르신들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길 양편에는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들이 만들어 주는 그늘을 따라 황토 오솔길을 걸어 올라갔다. 길옆의 계곡에는 물이 조금씩 흐르고, 산에는 여러 모양의 바위들이 멋진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계곡의 물이 많았으면 시원함과 산길의 운치를 느끼게 해주었을 터인데, 초여름의 가뭄이 심한 탓에 물이 거의 말라 아쉽게 느껴졌다.

 

   구곡폭포는 해발 526m의 봉화산 기슭에 있는 높이 50m의 폭포이다. 구곡폭포는 아홉 구비를 돌아서 떨어지는 폭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구곡폭포는 1981213일 춘천시 관광지로 지정되는데, 옛 이름은 문폭(文瀑)’이라고 한다. 회원들과 대화하며 걷다가 길옆에 세워놓은 간판을 보니, 그 내용이 매우 흥미로웠다.

 

봉화산(해발 525.8m)이 품고 있는 생명수가 아홉 골짜기를 휘돌아 내리고, 선녀의 날개옷처럼 하늘거리는 아홉 줄기의 사뿐한 물 내림, 그 조화로운 물소리가 아름답고 단아한 폭포입니다. 폭포에 이르는 황토 오솔길과 시냇물을 벗 삼아 폭포에 이르면 , , , , , , , , 의 쌍기역() 아홉 가지 구곡혼(九曲魂)을 담아가실 수 있습니다.”

 

   쌍기역으로 된 낱말 9개를 제시하고, 이를 구곡혼이라고 한 발상이 매우 흥미로워 각 낱말의 뜻을 생각해 보았다. 각 낱말의 뜻과 나타내려는 의도가 얼른 떠오르는 말도 있지만, 무어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는 말도 있었다. 조금 올라가니, 작은 간판(leaflet)에 낱말 하나를 적고, 그 말이 지닌 의미와 지향점을 짧게 풀이하고, 영어 단어로 적어 놓았다. 이렇게 적은 아홉 개의 작은 간판이 폭포 앞까지 띄엄띄엄 서 있다. 나는 낱말의 뜻과 지향점, 그 말을 번역한 영어 단어가 궁금해 적으면서 올라갔다.

 

(희망은 생명. Dream), (재능은 발견. Talent), (지혜는 쌓음. Wisdom), (용기는 마음. Courage), (전문가는 숙달. Expert), (인맥은 연결고리. Connection), (태도는 됨됨이. Altitude), (맵시와 솜씨는 산뜻함. Freshness),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 End).

 

   구곡폭포 가까이 오니, 문배마을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나왔다. 구곡폭포를 보려고 경사가 급한 꼬부랑길 위에 놓은 나무계단을 한참 올라갔다. 수많은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니, 50m 높이의 폭포가 보였다. 그러나 가뭄 탓에 흐르는 물이 적어 폭포로서의 이름값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구곡폭포 입구 갈림길에서 오른쪽 능선 쪽으로 길을 잡아 문배마을로 향했다. 널찍하게 닦아놓은 비탈길과 계단을 40여 분 걸어 올라가니 문배마을이 나왔다. 문배마을은 산 정상처럼 보이는 분지(盆地) 마을인데, 625 전쟁 때 전쟁이 일어난 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66,000넓이의 분지인 이 마을은 2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는데, 이 지역 산간에 자생하는 돌배보다는 크고 과수원 배보다는 작은 문배나무가 있었고, 마을의 생김새가 짐을 가득 실은 배 모양이어서 문배마을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문폭(구곡폭포의 옛이름)’의 뒤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문배(文背)마을이라고 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구한말 춘천 의병장으로 유명한 이 마을의 선비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 18521930) 선생은 그의 문집에서 구곡폭포를 문폭이라 하고, 문배마을에 관하여는 문배의 샘물은 달고, 토지는 비옥하며 둘러친 산으로 하여 마치 큰 배와 같이 생겼다.”고 하였다.

 

   문배마을 어구에는 자연생태 우수마을로 인정한 환경부장관의 인증서(2010. 1. 1.~2012. 12. 31.)를 확대하여 올려놓은 간판이 서 있다. 세움 간판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길옆에 심어놓은 여러 가지 꽃들이 개망초를 비롯한 야생화와 어울려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마을에는 띄엄띄엄 집이 있는데, 모두 식당 간판이 붙어 있다. 각 집에는 주차장은 물론 족구장을 비롯한 작은 운동장과 간이 운동 시설이 보였다. 이로 보아 이곳은 우리처럼 잠깐 왔다가는 손님도 있지만, 단체로 와서 친목 도모와 함께 체력 단련을 하는 손님이 많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형이 서울에서 소개받았고,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만난 서울 손님들이 소개한 신씨네 집을 찾아갔다. 야외에 마련된 넓은 마루에 앉아 닭백숙을 주문하고, 서비스로 주는, 칡가루로 부친 전을 안주로 이 집에서 담갔다는 술을 한 잔씩 마셨다. 우리는 문배마을에서 빚은 술은 문배주라고 하면서 이 술이 그 이름난 문배주와 관계가 있느냐고 물었다. 젊은 주인은 이곳에 오는 손님들이 이 술을 문배주라고 하지만, 이름난 문배주와는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문배주는 원래 평양에서 밀좁쌀수수를 재료로 하여 만들던 술로, 술의 향기가 문배나무의 과일에서 풍기는 향기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86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20006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건배하여 유명해졌다. 우리는 문배마을에 와서 전통의 문배주를 맛볼 수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문배마을에서 빚은 술이 곧 문배주라며 웃었다. 닭백숙을 기다리는 동안 여행, 건강, 사회문제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에서 먹은 맛있는 닭요리와 유익한 대화는 고갯길을 넘어오느라고 쌓인 피로를 말끔히 날려 주었다.

 

 

   가던 길을 되돌아오는 동안 산세(山勢)와 길, 여러 나무와 풀의 어울림을 살펴보았다. 푸른빛을 자랑하는 나무와 하늘을 번갈아 보면서 70이 넘은 나이에 건강한 몸으로 이런 곳에 올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였다. 가뭄으로 물이 적어 구곡폭포의 멋진 모습을 보지 못하고 내려오는 길이 못내 아쉬웠는데, 매표소 가까이에 예쁘게 지어놓은 구곡정(九曲亭)’이 아쉬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2014627)

 

'알림, 생활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립서울현충원 참배  (0) 2014.08.27
딸의 출국  (0) 2014.08.18
정년퇴임 교장의 밭농사  (0) 2014.07.23
추임새를 잘 하는 사람  (0) 2014.07.08
상락아정(常樂我淨)  (1) 2014.06.0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