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월에 정년(定年)을 맞아 44년 간 근무하던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초․중등학교 교사로 14년, 대학 교수로 30년을 근무한 교단을 떠나게 되니 여러 가지 감회가 떠오른다. 그동안 많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나누었는데, 이제 떠나야 한다니 참으로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이 든다. 44년 근무하는 동안 나와 학연을 맺은 사람이 아주 많은데, 이들 중 나를 참 스승으로 생각한다는 많이 있다. 이것을 보며 나는 참으로 제자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고, 자랑스럽다. 

   제자들 중 몇몇이 나의 정년을 아쉬워하면서도, 축하하고 기념하려는 뜻에서 정년 기념 문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제자, 동료, 친구, 선배, 스승, 친족 등에게 나와의 관계나 교유(交遊)한 내용을 중심으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에 따라 93명이 글을 써 주었는데, 이를 <푸른 향기 길게 드리우니>라는 책으로 묶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최근에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한 것도 있고, 아주 오래 전의 일을 소재로 한 것도 있다. 나와 생활하면서 기쁘고 즐거웠던 일을 적기도 하고, 섭섭하고 아쉬웠던 일을 적기도 하였다. 그 중에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도 있지만, 까맣게 잊어버린 내용도 들어 있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90여 명의 마음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의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이었다. 원만한 보습이 보이는가 하면 모난 모습도 보였다. 다른 사람에게 기쁘고 보람을 느끼게 한 모습이 있는가 하면, 마음을 아프게 한 나쁜 모습도 보였다. 그 중에는 다른 사람을 섭섭하게 하거나 마음 아프게 하여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일도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하면서 용서를 빈다.

   아내는 ‘돈을 꿔서 승용차를 산 이야기’를 썼다. 혼인한 뒤에 야간대학과 대학원 학생 노릇을 7년이나 하고, 시간 강사 노릇을 하다가 전임 교수가 된 이듬해에 돈을 꿔 오라고 하여 승용차를 사겠다는 가장(家長)의 처신을 보면서 아내는 정말 난감하였을 것이다. 철없는 사람, 셈속 모르는 책상물림이라고 서운해 하면서 한탄하였을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단돈 1만원도 꾸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내가 돈을 꿀 데가 없다고 거절하였으면 나는 승용차를 살 수 없었을 터인데, 긴 토를 달지 않고 내 말을 따라준 아내가 고맙다. 이렇게 하여 구입한 승용차는 설화와 민속 자료 수집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내는 집안일과 아이들 교육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나를 보면서 ‘한 지붕 밑에서 숨 쉬고 있는 것으로 안도하였다.’고 하였다. 이 말은 참으로 미움과 한숨을 거친 뒤에 정리한 사려(思慮) 깊은 말이다. 부족함이 많은 남편의 모습을 보여 부끄러울 뿐이다. 

  아들과 딸의 글을 보니 내가 강조하며 실천하던 음식 골고루 먹기, 아침 체조, 일기 검사, 규칙 지키기 등이 무척 힘들고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서운 아빠, 인정머리 없는 아빠라면서 원망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장성한 뒤에 생각해 보니, 아빠가 강조하던 것들이 건강 증진, 편식 안 하기, 바르고 예쁜 글씨 쓰기, 기초적인 문장력 훈련에 크게 도움이 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귀찮고, 힘들고, 원망스러웠던 일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는 삼남매가 고맙고 자랑스럽다.

  여동생은 <오빠의 눈>이란 제목으로 내가 엄격하고 무섭게 대하던 일, 까다로운 규칙을 정해 놓고 지키라고 하던 일을 적었다. 오빠가 무섭고, 섭섭하고, 힘들었다고 하면서도 아버지 노릇을 겸한 오빠의 역할을 하느라고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존경한다고 하니, 고맙기 그지없다.

   처남과 처제는 내가 자기들에게 본을 보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는 아내가 처가에 가서 내 험담이나 불평․불만을 말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의 좋은 면만을 기억해 주는 처남․처제와 나의 나쁜 점을 친정에 가서 말하지 않은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제자들의 글에 나타난 내 모습은 다양하다. 나한테 논문 지도를 받은 사람은 논문 지도의 철저함과 엄격함을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나는 논문 초고에 붉은 색 펜으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수정하도록 지시하는 글을 써서 주고, 만나서 일일이 설명하면서 수정하게 하곤 하였다. 제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빗대어 ‘피바다를 건너야 논문이 통과된다.’는 말이 퍼졌고, 이 말은 여러해 동안 선후배간에 대물림을 하였다고 한다. 피바다를 거친 사람들은 내가 지도하느라고 써준 초고를 ‘가보(家寶)’로 삼겠다고 하면서, 자기들도 제자들의 작문이나 논문을 지도할 때 귀감(龜鑑)으로 삼겠다고 한다. 논문 지도 과정에서 깊은 생각 없이 던진 내 말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혀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긍정적인 면만을 말하며 좋게 말해 주니 정말 고맙다. 논문 지도 과정에서 섭섭한 말을 들었던 사람은 속히 잊고 상처가 아물기를 바란다.

  나는 강의 시간이나 학생들과 대화하는 중에 어휘 사용과 발음 등 언어 습관에 관해 많은 말을 하였다. 나는 내 전공이 아니면서도 현장 상황에서 직접 지도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는 생각에서 바로 지적하곤 하였다. 지적 받은 사람은 무안해 하였고,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마워하면서 고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니, 정말 고맙다.

  나는 제자들의 학교생활이나 일상생활에 관한 것을 많이 지적하였다, 그런데 지적을 받은 제자들이 고맙게 여기고 습관화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한다. 나는 강의할 때 요지를 잘 정리하여서 쉽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논지(論旨)를 전개하면서 내용 이해에 필요한 예화(例話)를 많이 인용하곤 하였다. 이를 제자들은 잊지 않고 있으며, 본을 받아 교단에서 학생을 지도할 때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제자들 중 현직 교사가 많은 관계로 나를 이해하고, 좋게 평가해 주는 것 같아 고맙기 그지없다.

  나는 교회 장로인데, 신앙생활 면에서 부족함이 많다. 목사님이나 다른 교우들이 기대하는 바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여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목사님이나 동료 장로는 정년퇴임 후에 잘 하라는 말로 감싸면서 격려해 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나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칭찬․격려․축하․감사의 말 속에 담긴 부족한 나의 모습을 보았고, 이해와 용서의 마음을 읽었다. 뒤늦게나마 여러 사람의 마음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된 것을 감사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적해 준 나의 부족한 모습, 모난 모습, 불성실한 모습 들을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몇 년 후, 오늘 이후에 만난 사람들이 나에 관한 글을 쓴다면, 나에 대한 이해, 용서의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칭찬과 격려․축하․축복의 말을 적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일 것이다. 

  * 이 글은 <청하문학> 제7호, 서울 : 문예운동사, 2008에 실렸음.



   ‘빗물을 받아먹고 사는 나라’ 이야기는 먼 옛날의 이야기이거나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미개한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옛날의 일이라면 그 때는 다 그랬을 것이고, 미개한 나라 이야기라면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일 터이니 색다른 이야기일 것도 없다. 그러나 옛날의 이야기도, 미개한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문명이 발달한 나라의 현재의 이야기라면 흥미와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해 여름에 뉴질랜드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 일행을 안내한 B씨는 13년 전에 이곳으로 이민을 왔는데, ‘빗물을 받아먹고 사는 나라’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민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름 있는 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빗물을 받아먹고 사는 나라’는 지상의 낙원과 다름없을 것이니 그곳에 가서 살겠다는 생각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하였다. 그의 이민 결심의 동기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매우 단순하고 낭만적이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그는 뉴질랜드에 와서 맨 먼저 우산 장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1년 중 우기(雨期)가 6개월이나 되니, 한국에서 품질 좋은 우산을 들여와 팔면 많은 이익이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우산은 전혀 팔리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고 그대로 비를 맞고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아차!’ 하고 후회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의 딱한 사정을 안 한국인교회 교인들이 그를 돕는 뜻에서 우산을 팔아 주어서 자금의 일부를 회수하였지만 큰 손해를 보았다. 그 후 그는 그곳의 기후와 풍토,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살폈다고 한다.

   나는 그 곳 사람들이 정말로 빗물을 받아먹고 사는가 궁금하여서 그런 집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차가 도심을 벗어나 교외로 가니, 넓은 초원에서 소․말․양 들이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고, 사람이 사는 집들이 뜨문뜨문 보였다. 초원 가운데로 나 있는 도로 옆에 있는 휴게소에 들르니, 바로 옆에 빗물을 받아먹는 집이 있었다. 그 집은 골이 진 슬레이트(slate) 모양의 자재로 지붕을 덮었는데, 추녀 끝에는 지붕에 내린 빗물을 받는 물받이가 있고, 그 물을 한 곳으로 모으는 홈통이 땅위에 있는 통에 연결되어 있었다. 물을 받는 통은 지름이 4~5m쯤 되어 보이는 둥근 모양의 큰 통인데, 뚜껑이 덮여 있다. 통의 위쪽에는 통에 넘치는 물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통의 아래쪽에는 물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수도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 집에서는 그 통에 저장된 물을 식수로 사용함은 물론 허드렛물로도 쓴다. 통에 저장한 물을 다 쓸 무렵이면 또 비가 내리므로 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뉴질랜드에는 이런 집이 아주 많다고 하였다. 

   뉴질랜드는 공장은 건설하지 않고, 공산품은 외국에서 사다가 쓰면서 자연 환경을 유지 보호하고 있다. 그러니 매연(煤煙) 걱정은 할 필요가 없고, 많은 숲들이 공기를 정화(淨化)해 주니 공기가 맑은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처럼 산성비[酸性雨]가 내리지도 않고,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있으니 황사(黃紗)가 섞인 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은 맑고 깨끗하므로, 빗물을 받아서 먹어도 아무 탈이 없고, 비를 피하기 위해 따로 우산을 쓸 필요도 없다. 자동차의 경우도 비를 맞은 뒤에 마르면 비 맞은 자국이 없고, 세차한 것처럼 깨끗하다. 그러니 따로 세차장에 가서 세차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 곳에는 세차장이 따로 없다. 

   뉴질랜드는 무공해 청정국가(淸淨國家)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산을 보호하기 위해 산을 가로지르는 길을 내지 않으며, 터널을 뚫지 않는다. 교각(橋脚)을 많이 세우면 물의 흐름을 방해하고, 물의 흐름을 방해하면 자연이 변화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강위에 다리를 놓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경우에는 교각의 수를 줄이기 위해 긴 다리 대신 강폭이 좁은 곳에 짧은 다리를 놓는다고 한다. 

  B씨의 말을 들으며 맑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싶어 이민을 결심한 그의 마음을 이해하였고, 이를 실천에 옮긴 그의 의지와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을 보니, 우리나라의 실상이 떠올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1950년대에 나는 여름이면 동네 친구들과 냇가에 나가 놀곤 하였다. 친구들과 함께 미역을 감고, 물장난을 하였으며, 냇바닥의 모래로 이를 닦았다. 목이 마르면 냇물을 그대로 마셨다. 이를 본 어른들 누구도 물이 더러우니 먹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을이면 논바닥에 파놓은 물길을 따라 미꾸라지와 송사리가 몰려다녔고, 이삭이 나온 벼 위에는 ‘메뚜기도 한 철’이란 말처럼 메뚜기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이 날아다녔다. 우리는 그 곳에 있는 미꾸라지와 메뚜기를 잡아 가지고 가서 끓여 먹거나 구워서 먹곤 하였다. 비가 오면 변변한 우산이 없어서 그러기도 하였지만, 비를 맞아도 해롭다는 생각이 없어서 그대로 맞는 것이 예사였다.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공장이나 자동차에서 뿜는 매연과 분진(粉塵)이 공중에 항시 떠 있게 되었다. 농약이나 방부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약품이나 중금속의 사용이 늘고, 축산의 오폐수(汚廢水)와 생활 쓰레기가 늘었다.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가끔씩 황사가 불어온다. 이런 일이 겹치니 공기도, 토양도, 지하수도 나빠졌다. 그래서 맑은 공기를 마시기 어렵게 되었고, 아무 물이나 마실 수도 없게 되었다. 이제 공해(公害) 문제는 우리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1980년대만 하여도 높은 산을 오를 때에 가지고 간 물을 다 마신 뒤에는 계곡에 흐르는 물을 그대로 받아 마셨다. 서울 근교의 도봉산, 수락산, 아차산 등을 오를 때에는 계곡 곳곳에 있는 옹달샘의 물을 마음 놓고 떠서 마셨다. 그러나 지금은 큰 산의 계곡 물도 마실 수 없고, 서울 근교에 있는 산의 옹달샘물도 오염이 되어서 ‘음용 불가(飮用不可)’라고 써 붙인 곳이 늘어가고 있다. 오염된 대기, 살충제의 공중 살포(撒布), 침출수(沈出水)의 혼입(混入) 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높은 산의 계곡 물까지 오염된 현상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가정에서는 수돗물을 믿지 못하니 그대로 마실 수 없어 정수기를 설치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생수를 사서 마셔야 한다. 돈을 아까운 줄 모르고 쓰는 것을 빗대어 ‘돈을 물 쓰듯 한다.’고 하였는데, 물 값이 휘발유 값 못지않게 비싼 시대가 되었으니, 이 말은 이미 옛말이 되었다. 

  공해 문제를 말하다 보니, 어느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그 교수는 1970년대에 공해 문제를 다룬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지금의 공해 정도는 그 때의 기준치를 몇 배 초과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때에 인체에 해롭다고 하던 그 기준대로라면, 지금쯤은 사람들이 다 공해에 찌들어 죽었거나 병이 들고, 기형아(畸形兒)가 많아야 하는데, 그런 심각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들이 나쁜 환경에 적응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해의 정도가 심하여졌어도 지금까지는 인체의 적응력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인체의 적응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공해 문제를 깊이 연구하여 자연 파괴로 인한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지혜가 뛰어난 존재이니,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 불행이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바로 보고, 대비해야 한다. 환경 보호 단체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우리들 각자가 자연 보호와 오염 방지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태안 앞바다의 기름 유출 사고가 우리의 자연을 멍들게 하였다. 그러나 피해를 줄이고 생태계가 속히 복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추운 날씨에도 자원봉사를 한 국민의 노력과 여망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서울의 경우를 보면, 생활오수(生活汚水)를 따로 흐르게 하고 정화하는 노력을 기울여 중랑천이나 탄천에 물고기가 살게 하였고, 청계천에 물고기와 새들이 서식하게 하였다. 서울의 공기도 조금 맑아졌고, 한강물의 탁도(濁度)도 조금 낮아졌다고 한다. 이것은 물이나 토양이 오염되지 않게 하고, 오염된 물은 정화하는 노력을 하면, 생태계가 복원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어서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빗물을 받아먹는 나라’ 이야기가 먼 태평양 가운데의 뉴질랜드 이야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이야기라는 소식이 매스컴을 타고 전해 왔으면 좋겠다. 




   전설 조사를 위해 고향인 홍성에 갔을 때의 일이다. 홍성의 향토사와 민속에 관해 깊이 연구하는 ㅂ선생과 점심 식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 ㅂ선생은 서련(徐憐) 판관의 고향이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라고 하였다. 서련 판관은 제주시 북제주군 구좌읍 동김녕리에 있는 김녕사굴(金寧蛇窟)에 얽힌 전설의 주인공으로, 처녀를 제물로 받는 뱀신을 물리친 영웅적인 인물이다. 나는 이 전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1982년에는 박사학위논문 <심청전 연구>에서 <심청전>의 배경 설화로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설의 주인공인 서련 판관의 고향이 바로 홍성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인물이 바로 홍성 출신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이를 여태까지 모르고 지낸 내가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나는 점심 식사 후 ㅂ선생과 함께 구항으로 가서 서련 판관의 묘를 둘러보고, 그 옆에 있는 연산 서공 련 송덕비(連山徐公憐頌德碑)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송덕비 뒤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물이 얼어 있었다. 송덕비에 적힌 내용은 내가 알고 있던 제주도 지방의 전설 내용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를 간단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서련은 조선 성종 25(1494)년에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외조부 밑에서 자랐는데, 부모가 없어 불쌍하다는 뜻으로 이름을 ‘련(憐)’이라 하였다. 
   그는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나서 18세 때인 중종 6(1511)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19세인 중종 7(1512)년에 제주 판관이 되어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그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방에게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김녕리 석굴에 큰 구렁이가 살고 있는데, 구렁이가 돌풍과 비를 일으키고, 독기를 내뿜어 주민에게 해악을 끼치는 일이 극심합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해마다 봄과 가을에 굴 앞에 15세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굿을 합니다. 그러면 구렁이가 나와서 처녀를 물고 굴속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석굴의 구렁이는 열과 연기를 싫어하므로 기와를 굽지 못하여 백성들의 집은 물론 관아의 건물마저 띠로 지붕을 잇고 있습니다.”

   그는 구렁이를 물리쳐 제주도민이 구렁이에 대한 공포감에서 벗어나고, 해마다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주민들을 독려하여 기와를 구워 지붕을 잇게 하였다. 주민들은 판관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따르면서도 구렁이의 화가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자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구렁이를 아주 없앨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구렁이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 다가오자 그는 전처럼 제사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그는 굴 앞을 파고 숯불을 피워 놓고, 무당에게 풍악을 울리며 굿을 하게 하였다. 얼마 후 구렁이가 나와 처녀를 삼키려고 하였다. 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창으로 구렁이를 찌르니 군졸들도 달려들어 창과 칼로 찔렀다. 구렁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이를 끌어내어 숯불에 태워 죽였다. 이 때 무당이 말하였다.
   “판관님, 어서 말을 타고 관아로 돌아가십시오. 가는 도중에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군졸들과 함께 말을 타고 관아를 향하여 달렸다. 그 때 붉은 기운이 구름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이를 본 군졸이 ‘피구름이 몰려온다!’고 소리쳤다. 이 말을 들은 그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니, 뒤따라오던 붉은 기운이 그를 덮쳤다. 
   관아로 돌아온 그는 이름 모를 병으로 앓다가 1515년에 제주 관사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구렁이 한 마리가 상여에 숨어서 따라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구렁이를 죽이지 않고 그의 유해가 안장된 구항면 지정리 보개산 아래에 조그만 연못을 파고, 살도록 해 주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구렁이의 횡포에 두려움을 느끼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15세 처녀를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였다. 또 구렁이가 뜨거운 열과 연기를 싫어하므로 기와를 굽지 못하여 민가는 물론 관아까지도 기와를 올릴 수 없었다. 이것은 그곳 주민들의 뱀신에 대한 공포심이 극에 달하여 그릇된 신앙 행위를 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곳 사람들은 뱀신을 두려워하고, 이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이를 거스르는 일은 곧 자신의 죽음과 마을의 피해로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련 판관은 이러한 상황에서 뱀신을 물리칠 결심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가 맡은 관아에 속한 주민들을 뱀신의 횡포(橫暴)와 패악(悖惡)에서 구해내겠다는 굳은 의지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 의한 결단이었다. 그의 결단은 뱀을 죽였고, 사신(邪神)을 숭배하는 그릇된 신앙과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습속을 없앴다. 그래서 주민들로 하여금 사신에 대한 공포감에서 벗어나고, 더 이상 사랑하는 딸을 제물로 바치는 일을 하지 않게 해 주었다. 그러나 판관 자신은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가히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하겠다.

   제주도 사람들은 굴 옆에 서련 판관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 그의 용기와 애민정신을 잊지 않고 기리고 있다. 제주도의 향토 자료에는 서련의 영웅적인 행적을 싣고 있으며, 교육 현장에서는 이를 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1972년에는 제12회 제주도 한라문화제에서 서련 판관이 구렁이를 제치하는 모습을 재현한 ‘사굴 처녀제’가 민속놀이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5년 동안 ‘사굴 처녀제’는 한라문화제에 찬조 출연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또 제주도에서는 서련을 추모하여 우수공무원을 선발하여 시상하였는데, 수상자가 수상식장에 들어갈 때에는 판관 복장에 조랑말을 타고 들어갔다고 한다. 이것은 공무원들이 서련 판관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이어받는다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북제주군 노인대학장인 김군천 씨는 김녕사굴을 30년 넘게 관리하면서 매년 정초와 추석에는 추모제를 지내고, 서련 판관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추모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서련 판관은 제주도에서는 영웅적인 인물, 공무원의 표상으로 추앙하면서 그의 용기와 결단,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그의 출신 지역인 홍성에서는 그의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나 역시 그 동안 모르고 지냈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홍성 지역 사람들은 뱀신을 물리친 영웅적인 인물이 이 지역 출신임을 널리 알려야 한다. 그리고 서련 판관의 출신 지역 사람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 한편, 그의 용기와 희생정신을 기리고 본받아야 하겠다. 

* 이 글은 충청문학 18, 서울 : 충청문인협회, 2007에 수록되어 있음.



   지난 해 9월 북경에 있는 J대학교 초빙교수로 가 있을 때의 일이다. 북경에 있는 동안 백두산과 연변 지역을 다시 가보고 싶어서 여행사에 연락을 해보니, 시기적으로 늦은 때라 손님을 모으지 않는다고 하였다.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한국에 있을 때 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준 이 선생이 연길에 오면 안내해 줄 터이니 오라는 이메일(e-mail)을 보내왔다. 기쁜 마음으로 4박 5일 일정의 여행을 계획하고, 이 선생 남편의 친구가 운영하는 여행사를 통해 밤 8시에 출발하는 항공권을 예약하였다.

  오후 4시에 아내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길 설고,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에 와서 우리 둘이 여행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매우 긴장되었다. 택시 기사에게 서툰 중국어로 수도공항을 가자고 말하고서 혹 다른 곳으로 가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길이 막혀 비행기 시간에 늦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였다. 공항에 도착하여 중국어 단어를 꿰맞추고, 손짓으로 물어 항공권 발급 장소를 찾아가서 탑승권을 받고, 탑승 수속을 마친 뒤에야 긴장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국내 항공기를 타고 두 시간쯤 비행하여 연길 공항에 도착하니, 이 선생이 남편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선생의 시누이 남 선생의 아파트에서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환담하였다. 연길에 온 둘째 날에는 이 선생 내외와 함께 택시를 전세 내어 타고 도문, 훈춘 지역을 둘러보았다. 
 
   셋째 날에는 이 선생의 안내로 백두산에 가기로 하였는데, 마침 휴일이어서 초등학교 4학년인 이 선생의 딸도 함께 가기로 하였다. 우리 일행 네 사람은 새벽 5시에 집을 나와 승용차를 타고 백두산으로 향하였다. 이 선생 남편의 주선으로 중국 교포 A씨가 개인 사업을 하는 동생의 차를 가지고 왔다. 그는 운전도 잘 하고, 이야기도 잘하였다. 나는 앞자리에 앉아 그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화제가 자동차에 미치자, 그는 현대자동차 중국 공장에서 만든 소나타와 엘란트라가 중국에서 매우 인기가 높다고 하였다. 우리가 타고 가는 차 역시 현대에서 만든 엘란트라였다. 나는 1990년에 중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의 차가 한 대로 없는 것을 보고 아쉬워하였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 후 15년 동안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실감하였다.

   백두산을 가는 길은 잘 포장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길에서 80km 정도로 달릴 수 있었다. 전날 밤부터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가끔씩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곤 하였다. 안도(安圖)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잠시 쉰 뒤에 다시 달렸다. 오전 9시 40분경에 백두산 산문(山門)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먼저 온 자동차와 사람들로 붐볐다. 이 선생이 입장권을 사 왔는데, 표가 여러 장이었다. 받아서 보니, 1인당 입장료가 60원, 상해 보험료가 5원, 그리고 차량 통행료와 주차료가 있었다. 조금 더 차를 타고 올라가니, 넓은 주차장이 나왔다. 그곳에 타고 온 차를 세우고, 천지를 왕복하는 전용 짚차의 승차권을 사서 타고 가야 한다고 하였다. 매표소 앞에 가서 상황을 알아보니, 차들이 모두 산에 올라갔기 때문에 2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기사 A씨는 조금 전에 만났던 공안원과 이야기한 뒤에 공안원의 차를 타라고 하였다. 우리는 한 시라도 빨리 천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 차를 탔다.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기상대쪽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은 소형차 두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인데 굴곡이 심하였다. 1990년에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괭이와 삽을 가지고 도로 공사를 하던 길인데, 이제는 완전히 포장 되었다. 우리를 태운 차량의 기사는 아주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그런데 굴곡이 심한 길을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앞자리에 앉은 나는 차가 옆으로 미끄러질 것만 같아 조마조마하였다. 불안한 마음을 억제하며 차창 밖을 보니,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산들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차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나무와 풀의 키가 작아졌다. 한참을 오르니, 우리는 구름과 안개 속에 싸이게 되었다.

   기상대 앞쪽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니, 구름과 안개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천지의 모습을 볼 수 없겠다는 생각에 실망스러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숨이 차서 쉬어가면서 10분쯤 걸어 봉우리 끝에 섰다. 그러나 천지는 운무(雲霧)에 싸인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몇 년을 별러서 아내와 함께 이곳에 왔는데, 천지의 모습을 볼 수 없다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천지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전에 왔을 때 보았던 천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한국인 단체관광객인데, 모두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발길을 돌렸다. 아내에게 그만 내려가자고 하니, 아내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하였다. 우리는 이슬비를 피하려고 찢어진 우의(雨衣) 자락을 당기며 기다렸다. 잠시 후, 햇빛이 비치는 것 같아 크게 기뻐하며 기다렸지만, 천지 위를 덮은 운무는 변함이 없었다. 단체관광객 몇 팀이 실망을 안고 발길을 돌리는 것을 본 뒤에야 우리도 발길을 돌렸다. 여기까지 와서 천지를 보지 못하고 간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고 아쉽다 못하여 속이 상하였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인 것을 어쩌겠는가! 우리는 참으로 참 복이 없구나!’ 하며 다시 차를 타고 내려왔다.

   우리는 장백폭포 뒤쪽으로 걸어서 올라가면 천지의 물에 손을 담글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의 승용차로 바꿔 타고 장백폭포 쪽으로 올라갔다. 날씨는 구름이 많이 걷혀 파란 하늘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다시 입장권을 사서 폭포 쪽으로 올라가니 폭포 아래에서 뜨거운 온천물이 솟아 흐르고 있는데, 섭씨 83도나 된다고 하였다. 장엄한 폭포를 보고 탄성을 연발하다가 위에서 내려다보지 못한 천지의 물을 손으로 만져보겠다는 생각으로 폭포 뒤쪽으로 난 계단 길을 한 시간쯤 걸어 올라갔다. 수천 개가 되는 듯한 계단을 올라가니, 평평한 길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니,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천지가 보였다. 천지 둘레의 산봉우리는 아직도 안개와 구름이 감싸고 있었으나, 호수 위에는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물가에 이르러 보니, 둘레가 4~5km쯤 되어 보이는 넓고 푸른 천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름 덮인 험한 산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는 파란 호수는 정말 아름다웠다. 해발 2,000m가 훨씬 넘는 높은 산 위의 험한 산봉우리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스러웠다. 조물주가 만들어 깊은 산속에 숨겨놓은 비경(秘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가에는 콩알 만한 작은 돌과 모래가 곱게 밀려오는 작은 파도를 맞이하였다가 밀어 보내곤 하였다. 나는 메고 있던 가방과 사진기를 뒤로 젖히고, 물에 손을 담갔다. 그리던 천지의 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니, 태고의 비밀을 간직한 비경을 보았다는 벅찬 감격과 함께 자연의 신비감이 온몸에 느껴졌다. 마음이 평안해지고, 산봉우리에서 천지를 내려다보지 못하여 섭섭했던 마음도 풀렸다. 아내 역시 아주 감격스러워하면서 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 하고, 물을 튕겨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작은 돌을 골라 깨끗이 씻어 주머니에 넣었다.

   단체로 온 관광객들이 시간에 쫓겨 서둘러 내려가고 나니, 넓은 천지에 우리 일행 5명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천지 둘레의 아름다운 경관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맑고 파란 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천지 표석 앞과 백두산 괴물의 형상 앞에서도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서 있는 맞은편에는 산봉우리에서 내려오는 계단이 보였다. 함께 간 A씨의 말에 의하면, 그 길이 북한 사람들이 천지로 내려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나는 비디오카메라를 줌으로 당기며 그 곳을 살펴보았으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아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쪽의 상황과는 판이하였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리지 않았다면, 저 길로 천지를 왔을 터인데, 제3국인 중국 땅으로 와서 건너다보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천지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연길로 돌아갈 시간을 계산하고는 통일이 된 뒤에 저 편의 길로 다시 천지를 보러 오리라 다짐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폭포 아래로 내려와서 온천수에 삶은 계란을 사서 시장 요기를 하고 온천장으로 들어갔다. 전에 왔을 때는 천으로 사방을 둘러친 노천 온천장이었는데, 지금은 제대로 시설을 갖춘 온천장이 있었다. 실내 온천장 밖에는 자연스레 흐르는 물을 받아놓은 노천탕이 있었다. 나는 노천탕으로 가서 몸을 담그고 앉아서 자연의 오묘함을 새삼 느꼈다. 천지의 모습을 본 감동과 온천수의 따스함이 나의 마음을 뿌듯하게 하면서 편안함을 주었다. 그리고 잠을 설치고 새벽부터 일어나 차를 타고 와서 힘든 산길을 왕복하느라고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오후 8시경에 숙소로 돌아와서 서울에 있는 아들과 딸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의 감격과 기쁨을 이야기하였다. 그 다음날은 연변 지역 동표들이 추석을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연길 시내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 다음날은 용정(龍井) 지역을 둘러본 뒤에 북경행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 두 사람의 마음에는 백두산 천지를 본 감격과 기쁨, 숙소를 제공하고 불편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면서 여러 곳을 안내해 준 이 선생과 그 가족의 따스한 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 글은 <충청문학 제17호, 서울 : 충청문인협회, 2006>에 실려 있음.
       

  2007년은 정해년(丁亥年)으로, 돼지의 해이다. 동양에서는 12지(支)에 동물의 이름을 하나씩 붙여 쓰기도 한다. 이 동물들은 각기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동물의 특성으로 그 해나 그 달, 그 날의 운수를 판단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돼지는 오래 전부터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고, 도읍지를 정해 주거나 왕자를 낳을 여인을 만나게 해 주는 신이한 능력을 가진 동물로 신성시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다음의 두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구려 유리왕 때 하늘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기르던 돼지[郊豕]가 달아났는데, 그 돼지를 찾으러 갔다가 도읍지로 적합한 곳을 발견하고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때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바칠 돼지가 달아났는데, 한 처녀가 그 돼지를 붙잡아 주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미복(微服) 차림으로 그 여자를 찾아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산상왕의 뒤를 이은 동천왕(東川王)이라고 한다.

   돼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비범한 인물인 최치원(崔致遠)을 잉태하게 한 <금돼지>, 머슴살이하는 총각을 장가들게 하였다는 <머슴을 장가보낸 돼지>, 돼지꿈을 꾸었다고 거짓말하는 젊은이의 꿈을 해몽해 준 <돼지꿈의 해몽> 등 많이 있다. 

   돼지는 오늘날에도 무당들의 굿상이나 동제(洞祭)의 제사상, 각종 고사(告祀)의 제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물이다. 전에는 통돼지를 제물로 바쳤으나, 요즈음에는 머리만 바치기도 한다. 제상에 올려놓는 돼지는 웃는 모습이어야 좋다고 하여 입을 벌리고 죽은 것을 골라 올려놓는다. 요즈음에는 제상(祭床)에 놓은 돼지머리의 입에 돈을 끼우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돼지는 잘 먹고 잘 자라며, 한꺼번에 8마리 안팎의 새끼를 낳아 기른다. 그래서 각 가정에서는 돼지를 길러 살림을 일으키는 밑천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돼지는 복스러운 동물, 다산(多産)의 동물로 매우 소중하게 여겨 왔다. 돼지는 한자로 ‘돈(豚)’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말의 ‘돈[金]과 음이 같다. 그래서 돼지를 재물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각 가정에서는 돼지 모양의 저금통을 마련해 놓고, 수시로 돈을 넣어 저금한다.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들을 낮춰서 말할 때 돈아(豚兒)’라고 하였다. 수명이 짧은 집 아이의 이름을 ‘돼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은 돼지가 복스러운 동물로 살림의 밑천이 된다는 의식, 돼지같이 잘 먹고 잘 자라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한국인은 꿈에 돼지를 보면 복이 온다거나 음식을 얻는다고 하고, 돼지를 잡으면 아주 좋다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에도 돼지꿈을 꾼 뒤에 복권을 사거나 경마장을 찾는다고 한다. 윷놀이를 할 때에 도가 나오면 한 밭밖에 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처음에 도가 나오면 ‘살림 밑천’이라고 하면서 ‘개’나 ‘걸’이 나온 것보다 좋아한다. 돼지혈[豚穴]에 묘(墓)를 쓰면 후손이 발복하여 부자가 된다고 한다. 이것 역시 돼지는 복스럽고, 재수가 좋은 동물이라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돼지[亥]에 해당하는 방위와 시각, 날, 달, 해를 보면, 해방(亥方)은 24방위 중 북서북(北西北)이다. 해시(亥時)는 오후 9~11시이고, 해일(亥日)은 일진(日辰)이 돼지에 해당하는 날이다. 해월(亥月)은 월건(月建)이 돼지로 된 달 곧 10월이다. 해년(亥年)은 60갑자 중에서 해(亥)가 든 해이다. 해(亥)가 들어가는 해는 을해(乙亥), 정해(丁亥), 기해(己亥), 신해(辛亥), 계해(癸亥)로 12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온다.

   돼지해에 태어난 사람을 돼지띠라고 하는데, 돼지띠는 일반적으로 음력 1월 1일부터 12월 말일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주(四柱) 명리학(命理學)에서는 절기력으로 한 해를 구분하여 그 해 입춘 시각부터 그 다음 입춘 전 시각 사이에 태어난 사람을 돼지띠라고 한다. 돼지띠는 복이 많아 부자가 되어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믿는다. 돼지띠는 대체적으로 성정이 진솔한데, 남성은 일단 목표를 정하면 그 일을 꾸준히 밀고 나가므로 성공 확률이 높고, 여성은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철저하게 수행하면서도 자상한 엄마로서 가정에도 충실하다고 한다. 이것은 돼지에 대한 여러 의식이 결집된 것이라 하겠다.

   정해년(丁亥年)의 정(丁)은 오행으로 보아 불인데, 불은 붉은 색이다. 그러므로 2007년 정해년은 ‘붉은 돼지해’라고 할 수 있다. 붉은 색은 활활 타는 불꽃의 색으로 귀신이 싫어하는 색이다. 그래서 붉은 색은 축귀(逐鬼)․축사(逐邪)의 뜻을 지니고 있어서 재수가 있는 색, 재물 운이 따르는 색으로 여긴다. 붉은 색에 대한 이런 의식은 중국인도 매우 강하다. 이렇게 볼 때 돼지해인 2007년은 재운(財運)이 따르는 복된 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꿈과 기대를 안고 새해를 맞이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요즈음 일부 역술인이 2007년을 ‘600년에 한 번 오는 황금 돼지해’라고 하고, 일부 상인들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 이를 일부 언론이 여과 없이 보도함에 따라 2007년에 출산을 하겠다고 서두르며, 유아용품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정해년은 ‘붉은 돼지해’이지 ‘황(금)색 돼지해’가 아니다. 황색 돼지해는 황색을 뜻하는 토(土)가 들어간 기해년(己亥年)이어야 한다. 2007년은 ‘600년에 한 번 오는 황금 돼지해’라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이런 말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홍성신문 제1008호, 2007년 1월 1일자에 실려 있음.>


   중국 북경에 있는 대학의 초빙교수로 와서 북경 생활을 시작할 때의 일이다. 학교안의 작은 아파트에 가방을 풀고 나니, 학술대회에 참가하거나 관광을 왔을 때와는 달리 모든 문제를 안내자 없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걱정이 앞섰다. 큰 문제는 학과 교수나 조교에게 말하여 해결한다지만, 작은 문제는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낯설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하다 못해 막막하였다. 그렇다고 방안에만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아내와 함께 용기를 내어 바깥출입을 시작하였다. 먼저 학교 안을 거닐어 숙소의 위치를 확인한 뒤에 교문 밖으로 나가서 학교 둘레의 지리를 익혔다. 그 다음에는 이곳 교수님들이 알려준 대로 가까운 공원, 쇼핑센터를 걸어서 갔다 오기도 하고,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사먹기도 하였다. 좀 먼 곳을 갈 때에도 처음에는 택시를 타고 다녔으나, 뒤에는 지도를 보고 대강의 방향을 살핀 뒤에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다. 이렇게 생활하는 동안 나는 문화의 차이를 느꼈다. 

  거리에 나가서 제일 먼저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자전거의 행렬이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보다는 덜하지만, 차도 양편의 자전거 전용도로에는 자전거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자전거를 탄 사람이 자전거 전용도로를 가득 메우며 달렸다. 자전거 행렬을 보고 있으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큰 힘이 느껴졌다. 그 힘은 내게로 밀려와 작은 충격과 전율을 안겨 주었다. 저 힘이 바로 중국을 움직이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서민들은 자전거를 유용한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지금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전거를 집에 두고 승용차나 버스를 이용한다면, 교통 혼잡으로 시내는 마비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전거는 대도시의 교통 혼잡을 덜어주는 데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기름진 음식을 먹는 데도 비만으로 보기 흉한 사람이 적은 것은 녹차를 많이 마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전거를 많이 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도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자전거 도로를 많이 만들어 출퇴근 때에 이용하게 함으로써 교통의 혼잡을 덜고, 유류를 절약하며, 대기 오염을 막고, 운동량을 늘려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게 하였으면 좋겠다.
 
   좁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또는 넓지 않은 인도를 걸을 때 나는 습관적으로 왼편으로 걷거나 비켜서곤 하였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 역시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거나 비켜섰다. 그래서 길싸움을 하느라고 서로 길을 막아서는 사람처럼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닌 적이 몇 번 있다. 그 때마다 나는 속으로 “여기 사람들은 왜 좌측통행을 하지 않지? 일본 사람들은 잘 하던데.”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곳은 ‘우측통행’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 때 나와 마주쳤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우측통행’도 모르는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옷차림이 매우 검박(儉朴)하다. 9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거리에서 넥타이를 맨 남자,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를 만난 적이 그리 많지 않다. 강의를 하는 교수들 역시 편한 복장이고, 대학생들의 옷차림 역시 수수하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의 깔끔하면서도 다양한 옷차림과 차이가 있다. 2년 전 9월에 일본 후쿠오카에 갔을 때 더운 날씨인데도 정장을 한 사람, 양복의 윗저고리는 입지 않았더라도 와이셔츠 차림에 넥타이를 맨 사람이 많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은 겉으로 꾸미기보다는 내실을, 형식이나 명분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중국 사람들의 의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양력 10월 1일은 국경절인데, 국경절 휴일이 며칠이냐고 물으니, 3일 또는 5일, 또는 7일로 대답이 각각 달랐다. 대학의 경우 7일을 쉬는 대학도 있고, 9일을 쉬는 대학도 있었다. 내가 있는 학교를 보니, 10월 1일부터 7일까지 쉬고, 토요일과 일요일인 8일과 9일에 강의를 하였다. 휴일이 닷새인데, 이틀을 앞당겨 7일을 연이어 쉬었기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에 강의를 하는 것이라 하였다. 7일까지 쉰 은행이 8일과 9일에 영업을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국경절이나 춘절(음력 설)에 쉬는 기간은 단위 기관마다 실정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용하여 연휴를 만들어 쉬고 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중국인들의 실용적인 사고의 표현이라 하겠다.
학교 안에서 대학생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기숙사에서 강의실로, 식당으로 옮겨갈 때에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으며 담소하는 것, 이성의 친구와 손을 잡거나 허리를 껴안고 다니는 것은 한국 학생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한적한 그늘 밑의 벤치에 앉아 있는 학생들의 모습은 아주 달랐다. 이른 아침, 낮, 오후를 가릴 것 없이 한국 학생들처럼 몇 사람씩 모여 앉아 담소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개는 혼자, 또는 두세 명이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 책을 읽거나 무엇을 쓰고, 영어 회화 연습을 한다. 식당이나 샤워장 앞에 줄을 서 있는 경우에도 앞뒤 사람과 담소하지 않고 각자 무엇을 읽거나 외우고 있다. 한국 학생들이 친구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여서, 또는 공부한다고 티내지 않으려고 시험 시간 직전이 아니면 남이 보는 데서 무엇을 읽거나 외우지 않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중국에서 한국에 유학 온 대학원생이 한국과 중국의 대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칼로 두부 자르기식’과 ‘스폰지식’이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한국 학생은 실컷 놀다가도 시험 때가 되거나 과제를 할 때에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밤을 새워 공부한다. 그러나 중국 학생은 조각나는 시간까지 활용하면서 꾸준히 공부한다고 한다. 대학생들의 공부하는 태도로 어떤 것이 좋을까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곳에서는 자동차도, 사람도 교통 신호를 엄수하기보다는 눈치껏 움직이는 것 같다. 길을 건너려고 신호를 기다리고 서 있으면, 보행자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는데도 사람들이 건너간다.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려 건너가려고 하면, 우회전하는 차가 길을 건너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 유턴하는 차와 좌회전하는 차가 밀고 오기도 하고, 자전거가 달려오기도 한다. 그래서 길을 건너려면 겁부터 났다. 차들도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 눈치를 보며 진행한다. 운전자나 보행자 모두 기 싸움에서 이기지 않으면 자기가 가려는 방향으로 갈 수 없는 것 같다.   

   이곳에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동차가 경적을 울려댄다. 앞서가는 자동차나 사람에게 경고의 뜻으로 울리는 경우에도 필요 이상으로 자주, 길게 울린다. 앞의 버스가 손님을 내리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 차가 움직일 때까지 경적을 울린다. 주택가나 학교 안에서도 걷다가 경음기 소리 때문에 깜짝 놀라는 일이 많다. 숙소 안에서도 경음기 소리에 짜증이 나기 일쑤이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 앞에 육교가 있는데, 얼마 전에 육교의 바닥면을 뜯어내고 다시 입히는 공사를 하였다. 공사가 끝난 다음날에 그 육교를 올라가며 보니, 육교 바닥이 광고판이나 되는 듯이 명함 크기의 광고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글자가 작아 허리를 굽히고 자세히 보거나 앉아서 살펴보기 전에는 광고 내용을 볼 수 없는 데도 새로 만든 육교 바닥에 셀 수 없이 많은 광고 스티커를 붙이는 것은 정말 광고의 효과가 있기 때문일까?

  버스 정류장에 가면 아치 모양의 표지판이 있다. 표지판의 위쪽에는 그 정류장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노선표가 붙어 있어서 이용하기 편리하게 해 놓았다. 그런데, 정류장 이름을 적어놓은 곳에는 대부분 광고지가 붙어 있어서 그 정류장의 이름을 볼 수 없다. 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그게 필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처럼 중국말이 서툴러 물을 수도 없고, 차장들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도 없어서 버스 노선표에 적힌 정류장 이름을 적어가지고 다니면서 길을 익히고, 내릴 곳을 판단해야 하는 사람이나, 길이 선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정류장 이름이 광고지로 덮여 있거나 떨어져 버렸으니, 시설을 해 놓은 취지가 무색해졌다.

   버스 안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 귀가 따가울 만큼 큰 소리로 휴대전화를 받는 사람,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는 사람, 길가다 가래침을 뱉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이런 것은 모두 남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 음식은 기름기가 적고 담백하면서도 맛이 있으며 위생적이라 하여 점점 인기가 높아가고 있다고 한다. 북경 시내에는 한국 요리 전문식당이 많이 있다. 내가 간 식당은 하나같이 손님들이 많아 식사 시간에는 자리 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름 있는 한국 식당에 처음 가서 불고기를 먹을 때의 일이다. 값이 싸고 맛도 좋았는데, 식후에 계산서를 보니, 불고기 1인분 값은 18위앤인데, 젓가락과 물수건 값이 2위앤, 숯불 값이 6위앤, 상추를 추가로 시킨 것이 6위앤이었다. 차나 생수 값을 따로 받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크게 이상하지 않았으나, 밥을 먹는데 필요한 젓가락, 불고기를 굽는데 필요한 불 값을 따로 받는 것은 아주 생소하였다. 한국에서 불고기를 먹을 때 불 값이나 추가로 시킨 김치나 상추의 값을 따로 받지 않는 습관에 젖은 나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동안 나는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충격을 여러 번 받았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응하느냐를 놓고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던 중 30여 년 전에 판소리 감상회에 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박동진 명창이 무대에 나와 허두가를 불렀는데, 관객들이 모두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이를 본 박 명창은 마이크를 빼어 들고서, “아니, 요 잡것들 요렇게 가만히 자빠져 있으려면 뭐 하러 왔당가? 집에서 낮잠이나 자지. 내가 소리를 하면 ‘얼씨구!’, ‘잘한다!’ 하고 추임새를 해야 신명이 나지.” 하면서 관객들을 놀린 뒤에 추임새 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관객들이 추임새를 하자, 박 명창은 신명이 났다. 그래서 그 날 소리판은 소리꾼과 관객이 한 덩어리가 되어 아주 흥겨워졌다. 우리는 서양 음악 연주회에 가서는 정숙하게 앉아 있어야 하고, 판소리 감상회에 가서는 추임새을 해야 한다. 서양 음악 감상회에 가서 ‘얼씨구’ 하고 추임새를 하였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고, 판소리 감상회에 가서 얌전하게 앉았다가는 ‘잡것’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중국의 문화를 한국의 문화의 잣대로 평가하여 이를 폄하하거나 추켜올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것은 판소리 감상회에 간 서양 음악가가 “한국의 음악 청중은 듣는 태도가 나쁘다.”고 불평하였다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나는 이곳 문화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제 이곳에서 생활한 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났다. 이제 이곳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하여 이곳 사람들처럼 큰 두려움 없이 길을 건넌다. 그리고 음식점에 가서도 물 값, 불 값, 젓가락 값을 따로 청구하여도 그러려니 하고 돈을 낸다. 복식으로 된 아파트 복도가 컴컴하여 앞이 안 보이면, 발을 굴러서 소리로 감지하는 전등의 센서를 작동시켜 전등을 켜고 드나드는 일에도 익숙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나도 모르게 이곳 문화에 적응되고 있는 것이리라.

  <수필문학 통권 184호, 서울 : 수필문학사, 2006. 4. 1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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