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는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1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옛 도시로, 성경에 나오는 빌라델비아인데, 현지명은 알라셰히르(Alaşehir)이다. 필라델피아는 페르가뭄(Pergamum, 성서의 버가모) 왕국의 아탈로스(Attalus) 2(재위 기간 B.C. 159~138)가 세운 도시이다. 아탈로스 2세는 페르가뭄 왕국의 유메네스 2세 왕의 동생인데, 본래 이름은 필라델푸스(Philadelphus)이다. 그는 뛰어난 정치력과 군사적 지식을 갖고 있었는데, 형을 진심으로 도우며 충성하였다. 그는 뒤에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동부 진출의 전초기지로 이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도시 이름은 자기의 원래 이름을 따서 필라델피아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형제사랑[兄弟愛]’이다.

   토모로우스산 기슭에 자리 잡은 필라델피아는 비옥한 평야를 끼고 있다. 서쪽으로는 페르가뭄과 사르디스(사데)를 잇고, 동쪽으로는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크게 발달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었으나, 지진이 잦아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고, 농민들이 포도 농사를 짓고 사는 작은 도시가 되었다. 필라델피아에는 사도 시대에 약 1,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A.D. 17년과 23년에 일어난 큰 지진으로 도시가 모두 파괴되어 남은 유적이 거의 없다. 옛 도시가 있던 자리에 마을이 들어서 있어서 발굴하는 일도 쉽지 않다. 이곳에는 다만 사도요한 교회의 육중한 돌기둥 두 개와 돌들이 빌라델비아 교회라는 이름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다. 이것은 비잔틴 시대에 세워져 사도 요한에게 바쳐진 교회의 유적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요한계시록(3 : 7~13)에 일곱 교회 중의 하나로 나타난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믿음의 시련 중에서도 복음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한 탓에 서머나 교회와 함께 책망 받지 않고, 칭찬을 받은 교회이다. 서머나 교회의 폴리갑이 순교할 때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 10명도 함께 순교하였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네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3 : 8)는 표현으로 보아 규모도 크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는 무력한 것 같으나 내실이 있는 교회였던 것 같다. 이 교회는 건실한 신앙을 가지고 이단을 물리쳤으며, 여러 가지 신앙의 시련이 닥쳐와도 조금도 요동치 않고 인내와 성실로써 현실을 잘 극복해 나갔다. 그래서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몸에 써 두겠다는 약속을 받은 교회이다.

   버스에서 내려 빌라델비아 교회 터에 가니, ‘성 요한 교회라고 쓴 안내판이 붙어 있다. 주님의 칭찬을 받던 교회의 모습은 간데없고, 돌과 벽돌로 겹겹이 쌓은 육중한 기둥만이 쓸쓸히 서 있다. 교회 기둥 옆에는 주택들이 들어서 있고, 좁은 골목길 맞은편의 작은 자미(이슬람 사원) 앞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다.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돌아본 뒤에 샤데 교회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니, 올 때와 마찬가지로 포도밭이 많다. 키가 작은 포도나무 덩굴에는 알알이 익어가는 포도 알을 마음껏 매단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올바른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까닭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첫째, 이곳에는 지진이 유난히 많았다고 하니, 이곳 사람들은 잦은 지진을 겪으면서 삶에 대한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삶에 대한 불안은 신앙을 뜨겁게 하고,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 해 주었을 것이다. 둘째, 이곳 사람들은 도시보다는 비옥한 땅에서 포도 농사에 힘쓰면서 삶의 체험을 통해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이들은 포도를 수확한 뒤에 다음 해의 포도 수확을 위하여 쓸모없는 가지를 잘랐을 것이다. 이들은 쓸모없는 가지 즉, 열매를 맺지 않은 가지, 앞으로도 열매를 맺지 않을 것 같은 가지를 잘라 땔감으로 쓰면서, 신앙인으로서 쓸모없는 자가 되면 잘라낸 포도나무 가지와 같이 된다는 것을 수없이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열매를 맺어 농부의 보호를 받는 것과 같은 가지 즉, 온전한 믿음을 간직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힘썼을 것이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파묵칼레는 데니즐리(Denizli)l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들어간 곳에 있는, 인구가 2,500 명 정도 되는 작은 도시이다. 이곳은 자연이 만들어놓은 신기한 경치와 함께 고대 유적을 볼 수 있으며, 온천수에 목욕을 하고 쉴 수 있는 곳이어서 터키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아주 인기가 있는 곳이다.

   파묵칼레(Pamukkale)‘Pamuk(목화)’‘kale()’가 합해진 말로, ‘목화의 성()’이란 뜻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칼슘 성분이 많은 온천물이 언덕 아래로 흘러내리는 동안 석회 성분이 침전되고 응고되어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목화송이가 피어 있는 성()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파묵칼레의 옛 이름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성경 <골로새서> 416절에서 언급되는 고대 도시 히에라볼리이다.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190년경에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B.C. 197~159년 재위)가 세웠다. 이 도시의 이름은 페르가몬 왕가의 시조인 텔레포스(Telephos)의 부인 히에로(Hiero)’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이 도시에 유난히 신전이 많아 성스러운 도시라는 뜻으로 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고 하기도 한다. 히에라폴리스는 B.C. 129년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B.C. 17년에 지진이 있었고,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A.D. 60년에 더 큰 지진이 있어 크게 파괴되었다. 네로 황제는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이 도시를 새로 건설하다시피 하였다. 지금 볼 수 있는 폐허의 유적들은 이 시대의 것들이다.

   히에라폴리스의 온천수는 심장병, 소화기장애, 신경통 등에 특수한 효과가 있다고 전해 온다. 그래서 로마 시대에는 황제를 비롯한 귀족층과 부유층의 휴양지로 이름을 날렸다. 로마의 황제들도 이곳을 찾았는데, A.D. 129년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215년에는 카라칼라 황제, 370년에는 발렌스 황제가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로마의 정치가이며 웅변가였던 키케로로 이곳에 와서 서사시와 연설문을 썼다고 한다.

   이곳은 온천 외에 구리 세공과 양모 산업, 카펫 산업, 염색 공업, 대리석 산지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비잔틴 시대에 크게 번영하였는데, 당시 인구가 약 1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아랍인의 침입, 비잔틴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 사이의 전투 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2세기에 이곳을 점령한 셀주크 투르크는 이곳의 이름을 파묵칼레로 바꾸었다. 그리고 주민들을 이웃 도시인 데니즐리로 강제 이주시켰다. 1334년에 대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파괴되고, 남아 있던 주민들마저 떠났다. 그래서 이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잊혀졌었는데, 19세기에 시작된 발굴 작업으로 폐허는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석회붕(石灰棚)

   마을 뒤편에 계단처럼 형성된 하얀 석회층이 있는데, 이곳이 파묵칼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석회층은 진 델리이라고 하는 굴에서 흘러내리는 온천수가 비탈진 언덕 아래 바위로 흘러내리면서 석회분이 침전되고 응고되어 바위 표면을 덮어 버렸다. 석회 성분이 많은 섭씨 33~36도의 온천수가 바위를 적시며 흐르는 동안 석회가 침전되고 응고되어 형성된 석회층이 마치 하얀 목화꽃이 겹겹이 피어 있는 것과 같다. 이 석회층은 약 4.9를 덮고 있는데, 해마다 1mm 정도 증가한다고 한다. 지금 있는 석회층의 두께를 거꾸로 계산해 보면, 14천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석회붕에 가는 길은 마을의 아래쪽에서 올라가는 길도 있고, 위쪽에서 내려가는 길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마을 위쪽에 있는 매표소를 거쳐 들어갔다. 석회층 가까이 가니, 안내자가 신발을 벗으라고 한다. 신발과 양말을 벗은 뒤에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에 들어가니, 넉넉하게 흐르는 물이 아주 따뜻하게 느껴진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하얀 석회층이 연이어 보이고, 온천수가 모여 이룬 파란 연못이 여러 군데 보였다. 석희층이 끝나는 곳에는 농작물이 자라는 밭이 있고, 그 끝에 집들이 보인다.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뒤로 눈을 돌려 급경사를 이룬 언덕을 보니, 높고 긴 절벽이 빙벽(氷壁)처럼 보인다. 자세히 보니, 햇빛을 받아 반사하면서 온갖 모양을 자랑한다. 건너편을 보니, 흰빛의 석회암들이 정말 목화꽃이 만발한 성과 같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모양의 바위들과 절벽을 보았지만, 하얀 석회층으로 이루어진 이런 장관은 처음 본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한 곳이다.

   서쪽으로 기운 해가 비친 석회층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다. 우리는 아름다운 경관을 놓칠세라 사진기에 담고, 아내와 함께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앉아 쉬면서 경관의 아름다움을 이야기를 하였다. 호텔로 들어와 저녁 식사를 한 뒤에 호텔의 온천장에서 낮에 본 석회층의 광경을 떠올려 보며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로마의 목욕탕

   히에라폴리스 유적지로 들어서는 입구에 B.C. 2세기경에 지은 로마 시대의 목욕탕이 있다. 이 목욕탕에는 성스러운 샘이라고 불렸던 샘이 있는데, 깨끗한 온천수가 고여 있는 곳에 옛 건물의 잔해가 잠겨 있다. 이곳의 온천수가 심장병, 소화기장애, 신경통 등에 특수한 효과가 있다고 전해 왔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다. 목욕탕은 이를 감안하여 많은 사람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도록 크게 지었던 것 같다. 현재는 목욕탕의 일부가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로마의 개선문

   목욕탕 바로 앞에는 A.D. 84~85년에 세워진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재위기간 A.D. 81~96) 황제의 개선문이 있다. 개선문은 아치를 이룬 세 개의 통로와 두 개의 둥근 탑으로 되어 있다. 개선문 안으로 들어가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중앙 도로가 있고, 도로의 좌우에 대리석 기둥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 그 옆에 중요 관공서와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문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공동묘지

   개선문 너머에는 1,200여 기()의 석관들이 있는 헬레니즘 시대의 공동묘지가 있다. 석관을 땅에 묻은 것이 아니라 단을 쌓고 그 위에 올려놓거나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석관을 모셨다. 이것은 히에라폴리스에서만 볼 수 있는 무덤 양식으로, 다른 지방에서는 보기 어렵다.

   아폴로 신전과 플루토니온

   로마 목욕탕 뒤에 2세기에 건축된 아폴로 신전이 있었다. 아폴로 신전은 히에라폴리스의 주민들이 주신으로 모시던 태양신인 아폴로의 신전이다. 지금은 허물어져 기단(基壇)만 남아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히에라폴리에서는 아폴로신 외에도 아폴로와 쌍둥이 남매인 아르테미스(Artemis) 여신과 그들의 어머니인 레토(Leto), 지진을 관장하는 포세이돈(Poseidon) 등도 중요한 신으로 받들어 모셨다.

   아폴로 신전의 오른쪽 아래에는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hades)에게 바쳐진 플루토니온(Plutonion) 신전이 있다. 이 신전은 고대인들이 하데스의 왕국 즉, 지하세계로 통한다고 믿는 동굴에 세웠다. 이 동굴에서는 플루토니온(플루토니움)’이라고 불리는 유독가스가 솟아나왔다. 신관(神官)은 이 동굴에서 나오는 가스를 마시고 최면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신의 계시를 전했다고 한다.

   원형극장

   히에라폴리스의 북동쪽 산자락에 12,000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 터가 있다. 로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berus, 재위기간 A.D. 193~211) 황제 때 건축된 이 극장은 일부 장식판, VIP를 위한 앞줄 박스 좌석과 함께 무대 대부분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무대의 벽에는 아르테미스, 아폴로 등의 신상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조각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대 원형극장 가운데 아스펜도스의 극장 다음으로 보존상태가 좋아 지금도 여름 축제나 연극공연,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빌립 사도 순교 추모관

원형극장의 길 건너편 산 중턱에 빌림 사도 순교 추모관이 있다. 예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빌립 사도가 만년에 히에라폴리스에 와서 포교하다가 A.D. 80년에 딸과 함께 순교하였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인 A.D. 5세기경에 빌립이 딸과 함께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빌립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8각형의 건물을 지었다. 이것이 빌립 사도 순교 추모관이다. 빌림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라오디제아는 라오디키아(Laodikya)라고도 하는데, 데니즐리(Denizli)와 파묵칼레(Pamukkale)의 사이에 있다. 데니즐리에서 파묵칼레로 가는 길에 있는 코루주크(Korucuk) 마을에 라오디제아(Laodicea)행 표지판이 있었다. 그 표지판을 따라 1km쯤 가니 라오디제아 유적지가 나왔다. 이곳이 성경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초대 일곱 교회 중 하나인 라오디아교회가 있던 곳이다.

   라오디게아에는 기원전 2,000년경에 이오니아인들이 살았는데, 그들은 이곳을 디오스폴리스(Diospolis), 또는 로아스(Lhoas)라고 불렀다. 기원전 261~253년에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2세는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하고, 아내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케아라고 하였다. 그 말의 뜻은 백성의 정의라고 한다. 라오디케아는 기원전 190년부터 페르가뭄의 통치를 받다가 A.D. 133년에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었다.

   옛날의 라오디케아는 리쿠스 강이 흐르는 산골짜기에 넓고 기름진 평야를 끼고 있었다. 이곳은 동서남북에 있는 도시들과 통하는 교통의 요지여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었다. 이곳 주민들은 넓은 평원에서 농사를 짓고, 양을 기르는 한편 인근 산에서 금을 캐내어 거래하였다.

   라오디게아에는 약 9km 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온천수가 흘러오고, 바바 산의 만년설(萬年雪)이 녹아 흘러내리는 곳이었다. 이들 온천수와 냉천수(冷泉水)는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인근에는 좋은 약재가 나는 곳이 많아 이를 이용하여 약을 생산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이곳에서 만든 귓병과 눈병 치료약은 치료 효과가 뛰어나서 아주 유명하였다. 그래서 이곳은 일찍부터 농업, 상업과 함께 의약이 발달하고, 은행과 고리대금업이 성행하였다.

   라오디게아는 A.D. 17년과 60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는데, 로마의 재정적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재건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라오디게아가 품질 좋은 흑양모 생산과 직조(織造), 염색업, 목화 재배와 면직물 생산, 의약품 생산, 금 생산 등을 통해 축적한 자본과 기술이 넉넉하였음을 말해 준다. 당시 이곳 사람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 삶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세속적인 만족에 이끌리어 영적인 문제에는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요한계시록 31518>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신앙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아 주님 보시기에 매우 못마땅하여 꾸짖은 말이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안 된 다른 지역의 교인들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이곳 교인들은 신앙적으로 게으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이를 꾸짖고,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라.”고 명하셨다.

   위에 적은 성경 말씀에는 당시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생활상을 반영한 표현이 여러 군데 나온다. 당시 라오디게아는 히에라볼리스에서 흘러오는 온천물을 사용하였는데, 9km를 흘러왔기 때문에 물이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았을 것이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고 한 표현은 이를 빗대어 표현한 것 같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은 당시의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생활상을 반영한 표현이라 하겠다. 당시 라오디게아는 목화 생산이 많았고, 면직 공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흰색 면직물이 유명하였는데, 로마 상원의원들이 입던 흰옷은 이곳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흰 옷을 사서 입으라.”고 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고 한 것은 이곳이 안약의 명산지임을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에 적은 성경의 말씀은 당시 라오디게아의 지역적 특성과 생활상을 예로 들어 표현하여 교인들의 잘못을 일깨우려한 것이다.

   라오디게아 유적지에 와 보니, 넓은 산언덕에 여러 건물의 주춧돌과 벽을 쌓았던 돌과 건물의 기둥이 널려 있다. 아치형으로 된 건물의 잔해도 보이고, 원형극장과 교회 터 등도 있다. 잘 다듬어진 대리석 기둥이 서 있는 대로 양편에는 큰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양옆으로 건물의 잔해들이 즐비한 옛길을 걸으며 넓은 땅에 큰 규모의 화려한 건물들이 즐비하였던 거리의 모습, 그 거리를 오가며 풍요로움을 만끽하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버스를 타기 위해 언덕길을 내려올 때 차지도 덥지도 않으니 뱉어 버리리라.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이 귀에 들리는 듯하였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신앙적으로는 게으르고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현대인, 특히 나에게 꼭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꾸중을 들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길을 내려왔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하란은 산르우르파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도시로 인구는 약 1,500명이다. 이곳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기원전 2,000년경에도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고 한다. 기원전 1,100년경에는 달을 숭배하는 아시리아인이 지배하였고, 뒤에 로마 영토가 되었다

  하란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고향인 우르(산르우르파)를 떠나 하나님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가다가 머물러 산 땅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받들어 모시는 아브라함의 제2고향이다.

  전통가옥

  하란에는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지붕을 원뿔 모양으로 지은 집이 있다. 이 집은 이 지방의 기후와 환경에 맞는 건축 양식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한다. 이것은 기원전 6,000~3,000년 사이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전해온 주거 양식인데,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200여 년 전에 세운 것이다.

  하란에서는 독특한 건축 양식인 고깔 모양의 집을 관광객을 위하여 개방하고 있다. 우리는 하란 문화의 집으로 가서 집 안팎을 둘러보았다. 한 단지 안에 여러 집을 연달아 지어놓았는데, 집 밖에는 여러 가지 생활도구가 전시되어 있다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달아 지은 집들이 안으로 연결되어 있다. 돔 부분은 흙벽돌로 30∼40단을 쌓아올렸는데, 높이가 5m쯤 되어 보인다. 그 안에서 기념품도 팔고, 차와 음료수도 팔고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모두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 우리가 간 날은 맑은 날씨에 바깥 기온이 섭씨 38도가 넘어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집안에 들어가니 시원하였다

  문화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전통가옥들이 있고, 옛 성터도 보였다. 전통가옥이나 성벽 모두 흙과 돌을 섞어 만든 벽돌로 쌓은 것 같았다. 나는 이곳을 둘러보며 목재를 구하기 어려운 이곳 사정을 고려하여 일찍부터 흙벽돌로 원추형 집을 짓고 산 이곳 주민들의 지혜가 대단하였음을 알았다.

  

야곱의 샘

  전통가옥에서 2km쯤 떨어진 곳에 야곱의 샘으로 알려진 샘이 있다. 지금은 물이 나오지 않지만, 예전에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는 좋은 우물이었던 같다. 구약 성경에는 이 샘이 두 번 나온다먼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감을 구하는 이야기부터 살펴보겠다

  고향인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이곳 하란에서 와서 살았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하나님께서 지시한 가나안으로 가서 살았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낳은 아들 이삭의 신부감을 가나안 여자 중에서 고르지 않고, 자기의 고향에 사는 친척 중에서 고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하인을 하란으로 보내어 신부감을 구해 오게 한다. 구약 시대에는 민족과 가문의 혈통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근친혼(近親婚)을 하던 때였다. 아브라함의 종은 하란으로 와서 이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 나오는 사람을 기다린다. 그는 여기서 맨 먼저 물을 길러 나온 리브가를 만난다. 그는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이고, 인물과 성품이 훌륭한 여인임을 확인한 뒤에 청혼하여 이삭과 혼인하게 하였다

  그 다음에는 이삭의 아들 야곱 이야기가 나온다.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야곱은 가나안 여인과 혼인하지 말고, 어머니의 고향인 하란으로 가서 외가의 여인과 혼인하라는 아버지 이삭의 말에 따라 하란으로 왔다. 그는 이 우물가에 앉아 있다가 양떼를 이끌고 물을 먹이려고 온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나 혼인하였다.

  이처럼 이 샘은 리브가와 이삭, 야곱과 라헬이 혼인하도록 인연을 맺어준 의미 있는 장소이다. 지금은 물도 나오지 않고 메마른 밭 가운데에 방치되어 있지만, 아브라함의 아들과 손자가 배우자를 얻는 데에 중요한 몫을 한 뜻 깊은 장소이다 하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지자 엘리야의 무덤과 욥의 가족 무덤이 있고, 달의 신 (Sin)’의 신전이 있다고 하나 시간이 없어 가보지는 못하였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산르우르파는 터키 남동부에 자리 잡고 있는 인구 약 65만명의 도시이다. 이곳은 성경에 나오는 우르, 기독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받드는 아브라함의 탄생지이고, 동방의 의인 욥이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곳을 예언자의 도시라고 하였다산르우르파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기원전 3,000년경에는 후르리인이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 뒤에는 히타이트 왕국이 이곳을 지배하였다. 히타이트 왕국의 핫투샤가 함락된 뒤에는 신 히타이트가 주변에 소왕국을 건설하여 이 지역을 다스렸다. 기원전 6세기에는 페르시아가 이 지역을 점령하여 다스렸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곳을 점령하고, 이름을 에데싸(Edessa)’라고 하였다. 이곳은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요충지이므로, 로마와 아랍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곤 하였다. 1098년 십자군은 셀주크의 영토였던 에데싸를 빼앗아 에데싸 백령(伯領)’을 세웠으나, 50년밖에 지속하지 못하였다이곳은 1516년에 오스만제국의 영토가 되었는데, 오스만제국은 이곳의 지명을 우르파(urfa)’라고 하였다. 그래서 20세기까지 우르파로 불렸는데, 1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군이 이곳을 점령하였을 때 시민들이 맞서 싸워서 물리친 것을 기려 1984년에 도시 이름 앞에 산르(명예로운)’를 붙여 산르우르파가 되었다. 그러나 전과 같이 우르파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이 있다.

  20011622일 하란을 경유하여 산르우르파에 도착한 우리는 점심에 우르파케밥을 먹었다. 우르파케밥은 이 지역에서 자랑하는 요리로, 토마토와 가지, 고기완자를 번갈아 큰 꼬치에 꽂아서 구운 것인데, 아주 맛이 좋았다점심 식사 후에 우르파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는 아브라함 공원으로 들어섰다. 공원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터키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과 검은색 차도르를 쓴 사람들이 많이 눈에 뜨였다. 모두 터키 사람인지, 이웃나라에서 온 사람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대화를 해 보면 이웃나라에서 온 사람도 꽤 많았다.

아브라함 탄생지(Hz İbrahim Makammı/ Dergah)

  우리는 맨 먼저 아브라함 탄생 동굴을 찾았다. 아브라함이 탄생하여 자랐다는 동굴은 우르파 성채 바로 아래의 큰 바위산에 있는데, 건물을 지어 보호하고, 출입문도 만들어 놓았다. 출입문은 남자가 들어가는 문과 여자가 들어가는 문이 다른데, 안에 들어가면 합해진다. 거기에는 손발을 씻을 수 있도록 수도 시설을 해 놓았다. 여러 사람들이 이곳에서 손과 발을 깨끗이 씻은 뒤에 동굴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진지해 보였다. 지면 아래에 자리 잡은 동굴은 시멘트로 벽을 싸서 보호하고, 유리를 통해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동굴 안에서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 물을 성수(聖水)로 여긴다고 한다.

  아브라함 탄생 동굴은 무슬림들이 매우 신성하게 여기는 곳이다. 무슬림들은 아브라함 탄생 동굴 옆에 메블리드 할릴 자미(Mevlidi Halil Camii)를 지어 이곳을 성지로 만들었다. 이 동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에 이곳을 다스리던 아시리아의 님로트왕의 꿈에 한 신인이 나타나 그 해에 태어나는 아이가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왕은 그 해에 태어나는 남자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하였다.

  이 명령이 내려진 직후에 한 임신한 여인이 이 동굴로 와서 남자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이곳에 숨어 지내면서 아이가 일곱 살 먹을 때까지 기른 뒤에 아이의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 아이가 아브라함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또는 성인으로 받들어 모시는 인물이다. 그러나 성경이나 코란의 어디에서 아브라함의 탄생에 관련된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아브라함의 출생과 관련된 위의 전설을 진실되고 신성하다고 여겨 이곳을 성지(聖地)로 만들고 경배하고 있다.

성스러운 물고기 연못(Halilür Rahman Gölü)

  아브라함 탄생 동굴에서 나와 넓은 광장을 조금 걸어가니 폭이 약 10m, 길이가 약 100m쯤 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있었다. 맑고 깨끗한 물에는 수많은 잉어 모양의 커다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오가고 있었다. 이 연못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에 청년 아브라함이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으며 해와 달과 별의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였다. 그는 월신(月神)의 상()을 만들어 파는 아버지께도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였다. 이를 안 님로트 왕은 전통신앙을 부정하도록 백성을 선동하는 아브라함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왕은 그를 불러 지금까지 이 지역 사람들이 믿어온 다신교로 복귀할 것을 명하였다. 아브라함이 말을 듣지 않자, 왕은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왕은 아브라함을 형틀에 묶은 다음, 그 밑에 장작을 높이 쌓고 불을 붙였다. 불길이 아브라함에게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몸을 튕겨 오르게 하고, 천둥·번개와 함께 비를 내렸다. 잠시 후에 아브라함이 떨어진 곳에 연못이 생기고, 타던 장작은 물고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 연못을 성스러운 연못이라 하고, 물고기를 성스럽게 여겨 잡지 않는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화형(火刑)을 당할 뻔한 이야기가 전해 오지 않는다. 그러나 코란에는 왕이 아브라함을 화형에 처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를 불 가운데에서 건져냈다는 구절이 있고(2169절과 379798), 이 구절에 대한 주석에 위와 같은 이야기기 실려 있다. 무슬림들은 연못의 북쪽에는 르드바니예 자미(Rıdvaniye Camii), 서쪽에는 할릴뤼르 라흐만 자미(Halilür Rahman Camii)를 지어 이 지역을 성역(聖域)으로 만들었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내용 중 성경과 코란이 다른 예를 하나 적어 보겠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아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제물로 바치려고 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확고한 것을 확인한 하나님은 아들의 몸에 손대지 말고, 준비해 놓은 양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절대적이었음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종교사적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관습에서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 이야기가 구약 성경에도 실려 있고, 코란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두 경전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제물로 바치려는 아들이 성경에서는 '이삭'으로 되어 있는데 비하여 코란에서는 '이스마엘'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중 사라의 몸에서 난 이삭을, 아랍 민족은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을 조상으로 받드는 때문이라 하겠다.

젤리하의 연못(Aynı Zeliha)

  성스러운 물고기의 연못 남쪽에 젤리하의 연못(Aynı Zeliha)’이 있다. 이 연못은 아브라함을 홀로 연모하던 님로트 왕의 딸 젤리하가 아브라함을 화형하려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몸을 던진 연못이라고 한다. 공주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렸더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구하시는 이적(異蹟)을 볼 수 있었을 터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성스러운 물고기의 연못과 젤리하의 연못의 물은 좁은 수로로 연결되어 있어 서로 통한다. 물고기들은 수로를 따라 두 연못을 오가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제리하 공주의 슬픈 사연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듯하다.


우르파 성채(Şanlı Urfa Kalesi)

  성스러운 물고기 연못 남쪽 돌산에 우르파 성채가 있다. 이 성채는 고대 히타이트 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전해 오는 것은 서기 815년에 재건한 것이다. 언덕 위에 높이 17m의 돌기둥이 두 개 있는데, 이것은 기원전 3세기경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오르면, 아브라함의 탄생지와 성스러운 물고기 연못을 비롯하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욥의 동굴(Hz Eyyüb Peygamber Makamı)

  우르파 성채에서 버스를 타고 15분쯤 가면 욥이 은거(隱居)하던 동굴이 있다. 구약 성경 <욥기>에 나오는 욥은 우스 사람으로, 흠이 없고 정직하며,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로, 아들 일곱과 딸 셋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어느 날, 사탄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자, 하나님은 욥의 믿음을 칭찬하며 자랑하였다. 사탄은, 욥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부족함 없는 재물과 하는 일마다 잘되는 복을 주셨기 때문이므로, 그에게서 복을 거두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네게 맡겨 보겠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욥기 1 : 12).”고 하셨다. 사탄은 그에게서 자녀, 재물을 모두 빼앗고, 그의 몸에 악성 종기가 생기게 하였다. 모든 것을 다 잃고 갈 곳이 없게 된 욥은 병든 몸을 이끌고 이 동굴로 와서 지냈다고 한다.

  욥은 이 동굴에서 지내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신실한 믿음을 지켰다. 이를 확인한 하나님은 그에게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전보다 더 예쁜 자녀와 더 많은 재물을 허락해 주셨다.

  이곳에는 욥이 기거했던 동굴과 욥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천사가 팠다는 우물이 있다. 출입구 옆에 있는 수도에서 나오는 물이 그 우물물이라고 한다. 이 물은 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왔다. 요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참배한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넴루트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730분에 산르우르파로 향하였다. 버스가 1시간 남짓 달리니,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보였다. 가이드에게 강 이름을 물으니, 유프라테스 강이라고 하였다. 물줄기를 따라 20여 분을 달려 오전 915분경에는 아타튀르크 댐의 쉼터에 도착하였다쉼터에는 댐의 완공을 기념하는 조각품이 서 있고, 그 안쪽에 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조망대가 있었다. 조망대에서 보니, 강물이 흐르는 산과 산 사이를 막은 높은 둑이 있고, 둑에 만들어 놓은 수문을 통해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곳이 유프라테스 강에 만든 아타튀르크 댐이다.

   유프라테스 강은 터키에서 발원하여 시리아와 이라크를 거쳐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가는, 길이 약 2,800km의 긴 강이다. 이 강은 터키 동부의 에르주름(Erzurm) 북서쪽 산맥에서 시작한 카라수(Karasu) 강과 아르메니아 고원에 있는 아라랏 산(Ararat Dağı) 부근의 반(Van) 호수 근처에서 발원한 무랏 강(Murat Nehir)이 합류하여 본류를 이룬다. 터키에서는 1년에 25억 톤의 물이 흐르는 이 강에 높이 약 169m, 길이 약 1,600m, 두께는 맨 아래가 약 800m이고, 맨 위가 약 15m나 되는 거대한 댐을 쌓았다. 이 댐은 최대 저수량이 500억 톤에 이르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댐이다.

  이 댐은 남동부 아나톨리아 개발계획(Güneydoğu Anatolu Project)’에 의한 것이다. GAP는 관개시설(灌漑施設)과 수력발전시설 건설을 위한 프로젝트로,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후에 물이 없던 계곡에 물고기가 가득한 호수가 생겼고, 먼지만 날리던 마을에 시장이 들어서고, 공장이 들어섰다. 이 프로젝트의 규모는 엄청나게 큰 것이어서 9개의 도와 2개의 강(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포함되어 있다. 모두 22개의 댐이 계획되어 있는데, 그 중 17개가 2008년 이전에 이미 완공되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는 2012년 무렵에는 19개의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어 터키 전력의 22%를 공급할 예정이다.

  아타튀르크 댐은 198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5년에 완공하였는데, 공사비가 약 300억 달러나 되었다고 한다. 이 댐은 터키 남동부 지역의 농업용수 확보와 전력 생산을 위해 건설한 것인데, 교통과 관광 산업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댐의 물은 둘레 7.5m, 길이 26.4km의 쌍둥이 우르파 터널을 통과하여 하란 평야와 주변 지역에 공급된다. 이 물은 이 지역의 식수난을 해결하고, 목화를 비롯한 농산물 재배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또 이 댐 주위에 여러 개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여 많은 양의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은 옛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젖줄이었고, 지금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생명줄이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서는 이 댐이 건설되면 수력 발전용수와 농업용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심하면 식수난에 직면할 수도 있음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두 나라는 이 댐의 건설을 반대하면서 국제적으로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터키는 시리아와 이라크에 초당 500톤의 물을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높은 둑에는 ‘DSI’라고 쓴 영문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이 댐을 바라보면서 엄청나게 큰 규모의 공사를 한 터키인의 추진력과 뚝심,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되 다른 나라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고 배려하는 터키인의 넓은 마음을 생각하였다아타튀르크 댐은 오래된 문화유적지도 아니고, 경관이 빼어난 곳도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토목기술이 배우 발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고, 터키인의 추진력과 뚝심, 남을 배려하는 넓은 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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