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4월 27일 오후 2시에  <장위교회 50년사> 발간 감사예배를 드렸다. 이 자리에서 이 책을 집필한 내가 편찬위원장으로 인사를 하였다.   

 

 

 

   <장위교회사>는 설립 30주년 무렵에 <장위교회 30년사>를 편찬해 보자는 논의가 있었고, 설립 40주년 무렵에도 <장위교회 40년사>를 편찬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50주년을 맞으면서 이를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이번에 장위교회 50년사가 발간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장위교회 50년사> 편찬을 시작할 때 집필을 외부인사에게 맡기는 것이 어떠냐 하는 의견과 교인 중에서 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이 문제에 관해 논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부족한 제가 <장위교회 50년사> 편찬의 책임을 맡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책에 실린 <편찬사>에 적어 놓았습니다. 저는 <장위교회 50년사> 편찬 책임을 맡게 된 것이 주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이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장위교회 50년사편찬 작업은 목사님과 제가 여러 차례 회합을 한 뒤에 2012711<장위교회 50년사 정리를 위한 간담회>를 연 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터키에 있다가 여름방학에 다니러 온 때여서 50년사 집필에 필요한 자료들을 스캔하여 파일로 만들어서 가지고 갔고, 그 뒤에도 필요한 모든 자료를 스캔하여 전자메일로 보내주어서 이를 참고하면서 작업을 하였습니다.

 

   집필을 시작할 때 저는 교회사(敎會史)를 연구한 사람도 아니고, 목회자도 아니며, 교회 행정을 아는 사람도 아니어서 50년사의 편찬 방향과 체재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난감(難堪)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맡기셨으니, 일을 감당할 능력도 주실 것이라 믿고 기도하며 진행하였고, 방학 때 한국에 와서는 집필한 내용을 목사님과 편찬위원 여러분들과 협의하면서 몇 차례 수정을 하였습니다.

 

   집필을 시작하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일이 많고,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1년 반 이상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일에 전념하면서 한국에서 제일 바쁘다고 하는 고3 수험생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아침에 책상 앞에 앉으면, 제일 먼저 이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건강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고 시작하였습니다. 집필할 때에는 많은 자료를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바르게 판단하고 기술하려고 정신을 집중하곤 하였습니다.

 

  《장위교회 50년사는 두 편으로 나누었습니다. 1편에서는 담임목사님이 사역한 기간을 기준으로 시기를 나누어 장위교회 발전의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당회록>, <임원회의록>, <구역회의록>, <기획위원회 회의록>, <주보>, <교회 통계표> 등의 기록물을 근거로 쓰고, 사진과 함께 수록한 것으로, 실증적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장위교회 설립부터 현재까지의 발전과 변화 과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2편에는 장위교회와 인연을 맺은 목사님과 전도사님, 장위교회 출신 성도, 그리고 현재의 장위교회 교인들이 장위교회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과 교감(交感)하고, 은혜를 받았는가를 개인의 삶과 관련지어 쓴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글들의 제재나 제목은 다양하지만, 모두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한 감동적인 글들로, 글쓴이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생생한 장위교회 역사입니다. 이것을 조선 시대의 역사서와 관련을 지어 말한다면, 조선 시대의 역사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과 같은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당시의 사회상이나 민심은 문인의 문학작품이나 여러 학자의 개인적 기록에 생생하고 진솔하게 나타나는 것에 견주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장위교회 50년사는 장위교회 50년의 역사를 더듬어보며 주님의 뜻을 지금보다 더 잘 실천하는 교회로 크게 변화하고 발전하기 위해 딛고 올라설 작은 디딤돌을 하나 마련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함이 많은 제가 이 일을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건강과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영광을 돌립니다.

 

   이 책을 편찬하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신현주 담임목사님과 편찬위원 여러분, 귀한 글을 써주신 교우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또 축간사를 써 주신 서울연회 김영헌 감독님과 성북지방 안희찬 감리사님, 교회사 전공학자의 안목으로 많은 분량의 원고를 검토해 주시고 축하의 글을 써 주시고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논찬(論贊)의 말씀을 해 주신 서울감리교신학대학교의 이덕주 교수님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정성과 땀을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상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 지난 4월 27일 주일 오후 2시에  장위교회에서 부족한 나의 장로 은퇴 찬하예배가 있었다. 실제 장로은퇴는 만 70세가 된 2013년이었는데, 내가 터키에 가 있었던 관계로 1년을 늦춰 장위교회 설립 50주년 기념주일에 새로 취임하는 장로 취임식과 함께 가졌다. 그 자리에서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감사 인사 

    장위교회 설립 50주년을 기념하고, <장위교회 50년사> 발간 감사예배를 드리는 뜻 깊은 오늘, 서울연회 김영헌 감독님과 성북지방 안희찬 감리사님을 비롯한 내외 귀빈과 장위교회 성도 여러분을 모신 자리에서 저의 장로 은퇴식을 갖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19982월부터 20132월까지 15년 간 장로로 담임 목사님을 보좌하며 교회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협조해 주시어서 무사히 장로의 직을 은퇴할 수 있게 해 주신 최청수 목사님과 신현주 목사님, 저를 권사·집사로 길러주신 최병원 목사님, 그리고 성도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의 삶을 되돌아보면,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참으로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충청남도 홍성의 농촌에서 자랐는데, 일찍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신 관계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살핌과 사랑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서 공부하여 사회적으로는 대학의 교수가 되어 30여 년을 근무한 뒤에 정년퇴직을 하였습니다. 정년퇴직 후에도 건강 주셔서 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4년을 근무하게 해 주셨습니다.

 

  가정적으로는 현명하고 착한 아내와 혼인하여 해로(偕老)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딸 3남매를 주셨으며, 6명의 손자·손녀를 보게 해 주셨습니다. 교회에서는 교회학교 교사·집사·권사를 거쳐 장로의 직분을 받아 봉사하다가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은퇴하게 해 주셨습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은 넓고, 크고, 높아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저는 제게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77~10절에 나오는, 주인의 명을 받아 밭을 갈거나 양을 치고 돌아온 종처럼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하는 겸손한 자세로 살겠습니다. , <민수기> 825~26절에서 은퇴한 레위인은 직무를 수행하는 레위인을 도우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시무장로님과 여러 성도님들을 돕는 정신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이러한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련해 주신 담임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 귀한 말씀을 해 주신 김영헌 감독님과 안희찬 감리사님, 귀한 은퇴 찬하의 말씀을 해주신 김동걸 목사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교일산우회 남부모임 회원들과 함께 2014418일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에 갔다. 서삼릉은 조선 제11대 중종(中宗)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를 모신 희릉(禧陵), 12대 인종(仁宗)과 그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를 모신 효릉(孝陵), 25대 철종(哲宗)과 그의 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강씨를 모신 예릉(睿陵)이 있는 곳이다. 대궐의 서쪽에 있는 세 능이라 하여 서삼릉(西三陵)’이라 한다.

 

  나는 회원 8명과 오전 10시에 지하철 3호선 삼송역에서 만나 41번 마을버스를 타고 15분쯤 달려 농협대학교 정문 앞을 지나서 버스 종점인 서삼릉 입구에서 내렸다. 바로 옆에 서삼릉 600m라고 쓰인 표지판이 서 있다. 서삼릉으로 걸어가면서 보니, 양옆에 허브 농장과 한국마사회 종마(種馬) 목장이 있다. 목장 앞에는 말들이 뛰어다닐 수 있는 널찍한 초지(草地)가 있다. 꽃잎이 떨어지면서 잎이 돋아나고 있는 벚나무길을 지나 서삼릉 출입문 앞에 오니 활짝 핀 조팝나무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정문 앞에서 문화재 해설사를 만나 인사한 뒤에 함께 희릉으로 향했다. 회릉 앞에서 해설사한테 중종이 연산군을 쫓아낸 반정공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는 과정, 반정 공신들의 주청으로 정비(正妃)인 단경황후(端敬王后)를 폐위하고 제1계비인 장경왕후 윤씨를 맞아들인 일,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별세하여 이곳에 묻힌 일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능제(陵制)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희릉은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이 없고 난간(欄干石)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조선 전기의 능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봉분에는 곡장(曲墻)이 둘러 있고,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봉분을 호위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과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양(石羊), 석호(石虎) 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원(陵園) 아래에는 부속건물인 정자각(丁字閣), 비각(碑刻),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瘞坎), 능 출입시 참배하는 곳인 배위(拜位), 홍살문이 있다.

 

 

   희릉을 둘러본 우리는 예릉(睿陵)으로 가서 해설사로부터 초야에 묻혀 지내던 강화도령이 조선 제25대 철종으로 등극(登極)한 일과 재위 기간에 안동 김씨의 세도(勢道)로 국정을 바로잡지 못한 일, 철인왕후 김씨가 책봉되어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고 홀로 지내다가 이곳에 안장된 일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능제는 봉분을 난간석으로 연결한 쌍릉(雙陵)이다. 봉분 앞의 시설물은 희릉과 비슷하였다. 우리는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봉분까지 올라가 여러 가지 설명을 듣고 질문하여 궁금한 것을 알았다.

 

   왕릉에서 쓰는 말이나 시설물의 명칭은 전부터 알고 있는 것도 있지만, 잘 모르는 것도 있었다. 나는 예릉을 보면서 들은 해설사의 설명과 능 앞에 세워놓은 안내문을 참고로 하여 이를 대강 정리해 보았다.

   봉분(封墳)은 능()의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능침(陵寢)이라고도 한다. 봉분에는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삼면으로 둘러놓은 담장이 있는데, 이를 곡장(曲墻)이라고 한다. 곡장은 무덤의 기운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데, 8마리의 석수(石獸)가 곡장을 향해 서 있다. 석수는 산양과 호랑이인데, 산양은 중국에서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하는 짐승이었으므로 지하의 사기(邪氣)를 막으라는 뜻에서 세운 것이고, 호랑이는 지상의 사기를 막으라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왕릉의 봉분 앞에는 직사각형의 돌이 놓여 있는데, 이를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한다. 일반인의 묘에서는 상석(床石)이라고 하여 제물을 차려놓은 곳이지만, 왕릉은 정자각에서 제를 올리므로, 혼령이 앉아 노는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부른다. 혼유석은 북 모양의 돌 4개로 고였는데, 이를 고석(鼓石) 또는 북석이라고 한다. 고석은 귀면(鬼面)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담고 있다.

 

 

   봉분의 좌우측에 하나씩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이 있는데, 이것은 망주석(望柱石)이다. 혼유석 앞에는 석등(石燈)이 있는데, 이를 장명등(長明燈)이라고 한다. 이것은 돌아가신 분의 장생발복(長生發福)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예릉의 장명등은 문인석과 무인석보다 더 앞으로 나가 있어 다른 왕릉과 다르다. 이것은 예릉이 풍수지리설로 볼 때 배의 형국이어서 장명등을 앞으로 내어 돗대의 역할을 하면서 균형을 잡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혼유석 앞 장명등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이 서 있다. 문인석은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서 있고, 무인석(武人石)은 두 손으로 장검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로 서 있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왕릉에만 있는데, 문인석이 봉분 가까이 있다. 이것은 문()을 무()보다 중히 여기는 의식의 소산이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각각 석마(石馬)를 데리고 있다. 임금을 모시고 어디든지 갈 준비를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봉분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이곳은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황릉(皇陵)은 일자(一字) 모양으로 침전을 조성하고, 왕릉은 정자(丁字) 모양의 정자각을 조성하였다. 정자각 오른쪽에 비각(碑閣)이 있는데, 비석이나 신도비(神道碑)를 안치하였다. 신도비는 능 주인의 생전의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이다. 정자각을 오르는 계단은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동계(東階)는 왕, 제관(祭官)이 오르내리는 계단으로 오른 발을 먼저 내딛는다. 서계(西階)는 축관이 축문을 태우기 위해 오르내리는 계단으로, 왼 발을 먼저 내딛는다. 정자각 서쪽에는 제향을 올린 후에 축문(祝文)을 태우는 곳이 있는데, 이를 예감(瘱坎)이라고 한다. 정자각과 봉분 사이에 작은 골을 만들고 다리를 놓았는데, 이를 신교(神橋)라고 한다.

 

   왕릉 앞에는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있다.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 놓았는데, 홍문(紅門) 또는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한다. 홍살문 옆에 한 평 정도의 땅에 돌을 깔아놓은 곳이 있는데, 이곳은 왕이나 제관이 절을 하는 곳으로, 능을 향하여 4배를 하였다. 이곳을 판위(版位) 또는 어배석(御拜石), 망릉위(望陵位)라고도 한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곧은길을 참도(參道)라 하는데, 좀 높은 길은 신도(神道)로 신위를 모신 제관이 가는 길이고, 좀 낮은 길은 어도(御道)로 임금이 들어가는 길이다. 철종의 능에는 참도가 셋인데, 뒤에 철종을 황제로 추존하였기 때문에 황릉(皇陵)의 능제를 따른 것이다. 가운데 높은 길은 신도이고, 오른쪽은 황제가, 왼쪽은 황태자가 들어가는 길이라고 한다. 참도에는 박석(薄石, 얇고 넓은 돌)을 깔아놓았는데, 울통불퉁하다. 이것은 길 바닥이 울통불퉁하니 조심하여 걷도록 하려는 뜻과 함께 겉면을 곱게 갈아 바닥에 깔면 햇빛이 반사하여 왕의 눈을 피로하게 함으로 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참으로 세심한 배려라 하겠다.

 

 

   왕릉 앞에는 금천(禁川)이라고 하는 작은 내가 있는데, 그 위에 놓은 작은 다리를 금천교(禁川橋)라고 한다. 이 다리를 중심으로 외부 공간은 속세이고, 내부 공간은 선왕의 영혼이 머무는 성역(聖域)임을 표시한다.

 

   왕릉 둘레에는 소나무, 오리나무 등을 심었는데, 두 종류의 나무를 심은 데에는 나름의 뜻이 있었다. 소나무는 상록수로 절개(節槪), 장수(長壽), 번영(繁榮)의 상징적 의미와 함께 소나무가 벌레들이 싫어하는 피톤치드를 발생하여 벌레들을 막음으로써 시신이 깨끗이 썩도록 하려는 실용적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오리나무는 습기를 좋아하므로 습기를 잘 빨아들여 땅이 습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들의 왕릉에 대한 배려가 매우 세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희릉과 의릉을 관람한 뒤에는 조선 영조(英祖)의 아들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제1자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의 묘소인 의령원(懿寧園), 조선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17821786)의 묘인 효창원(孝昌園)을 관람하였다. 의령원은 서대문구 북아현동 중앙여고 안에 있던 것을 1949년에 옮긴 것이고, 효창원은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서삼릉에는 조선 12대 인종(仁宗)과 그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의 능인 효릉(孝陵)이 있는데, 이곳은 비공개 지역이어서 관람하지 못했다. 조선 제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묘소인 소경원(昭慶園) 역시 비공개 지역이어서 보지 못하였다.

 

   이곳에는 폐비 윤씨의 묘, 후궁들의 묘, 왕자와 공주의 묘가 있고, 태실(胎室)도 있다. 태실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한 곳에 있어야 잘 관리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이곳으로 모은 것이다. 왕자의 태실은 왕자가 태어났을 때 전국에서 좋은 자리를 골라 묻은 것인데, 일제는 명당(明堂)에 묻혀 있는 태()의 후손 중에 큰 인물이 나지 못하게 하고, 태와 함께 묻은 귀중품을 발굴하려는 속셈에서 이러한 만행(蠻行)을 저질렀다. 이 때 비석도 훼손하고, 일본의 연호를 새겨 넣기도 하였다. 이러한 아픈 역사의 현장을 보고 싶었는데, 비공개 지역이어서 보지 못하였다. 후일을 기약하고 아쉬운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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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년에 비해 빨리 찾아온 봄 날씨 덕에 꽃이 피는 시기가 앞당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월요일(2014. 3. 31) 오전에 아내와 함께 남산에 갔다. 지하철 3호선 동국대역에서 장충공원으로 들어서니, 여러 가지 꽃들이 자기만의 독특한 빛깔과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국립극장 쪽으로 걸어가니, 먼저 수표교가 눈에 띄었다. 조선 초에 청계천에 이 다리를 놓고, 청계천의 수위(水位)를 측정하는 수표(水標)를 세웠으므로 수표교(水標橋)라고 불렸다. 이 다리는 처음에는 흙다리(土橋)였으나 뒤에 나무다리(木橋)가 되었고, 세종~태종 때 돌다리(石橋)가 되었다. 1760(영조 36)에는 교각(橋脚)경진지평(庚辰地坪)’이라는 네 글자를 새겨 네 단계로 물 높이를 측정하였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철거하여 옮겼다가 1965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아주 오래 전에 청계천에서 보던 다리를 오늘 이곳에서 보니 감개무량하였다. 나는 수표교를 보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았다.

 

 

   국립극장까지 가는 동안 길가에 있는 이준 열사 동상, 유관순 동상, 31운동기념탑을 보면서 선인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독립정신을 생각해 보았다. 동상과 기념탑 둘레에 예쁘게 피어 있는 꽃과 같이 아름다운 나라 사랑의 마음을 우리 모두 본받아야 하겠다.

 

   국립극장을 지나 남산 남측 순환로를 따라 남산타워까지 간 다음 다시 남측 순환로를 따라 소월시비 옆에 있는 남산도서관 휴게소까지 걸어갔다. 길 양편에 피어 있는 진달래와 개나리, 철쭉, 영산홍, 그리고 금낭화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길 양 옆에 피어 있는 벚꽃의 모습은 무엇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서울의 한복판에 이렇게 아름답고 멋있는 산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쁘고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꽃말이 순결(純潔)과 담백(淡白)인 벚꽃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자생(自生)하였다. 특히 제주도의 왕벚나무는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부터 전부터 자생하고 있고, 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왕벚나무의 원산지는 제주도로 알려졌다. 벚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한국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이나 절, 길가에 벚나무를 심어 가꾸었다. 그래서 봄이면 곳곳에 벚꽃이 만발하여 봄의 정취를 마음껏 돋우고, 기쁘게 한다.

 

   일본인들도 한국인들 못지않게 벚꽃을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한다. 한꺼번에 피어 화려함을 뽐내다가 한꺼번에 확 떨어지는 벚꽃은 일본에서 사무라이를 상징한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벚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야 탓할 일이 아니지만, 벚꽃의 원산지가 일본이고, 한국의 벚꽃은 일본에서 왔다고 떠벌이는 것은 지나친 것 같다.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열심히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일본의 벚나무는 제주도의 왕벚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벚꽃길을 다시 걷고 싶어서 411일에 교일산우회 회원들과 함께 이 길을 다시 걸었다. 먼저 왔을 때와는 달리 벚꽃이 지고 있었다. 길 양편에 서 있는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곳에서 벚꽃의 꽃잎들이 바람에 눈처럼 흩날리는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남산도서관 앞의 벚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한 뒤에 퇴계 이황 선생 동상을 보고, 남산공원으로 가서 안중근 의사 동상을 보았다. 그 앞에는 안 의사의 명언(名言)을 새긴 돌들을 세워놓은 공원이 있고, 그 옆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었다. 안 의사 기념관에 들러 안 의사의 친필과 기록물, 조형물을 통해 안 의사의 일생과 의거(義擧) 전후의 일들을 살펴보았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북쪽에는 상해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 동상이 있었다. 이를 살펴본 뒤에 회현역 쪽으로 내려왔다.

 

   오늘의 나들이는 남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끼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를 버리고 바른 길을 간 선인들의 행적을 되돌아볼 수 있어서 참으로 유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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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1000일의 체험>> 출간  (0) 2012.09.30

    서울 성동구 응봉동에 있는 응봉산은 봄과 희망을 상징하는 개나리꽃의 명소이다. 이른 봄에 개나리가 활짝 피어 온 산을 샛노랗게 물들이는 응봉산은 강남에서 성수대교를 건너 북쪽으로 올 때에는 산의 남쪽을 보여주고, 독서당길을 지날 때에는 북쪽을 가까이에서 보여준다. 나는 1980년대 중반에 이곳을 지나다가 개나리꽃이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환호(歡呼)하였다. 그 후로 가끔 이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꽃이 하도 예뻐서 산 밑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 개나리꽃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했던 적도 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응봉산이 보이는 금호동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금년에는 3월 하순인데 개나리가 만발하였다. 326일에는 아내와 함께, 328일에는 교일산우회 회원들과 함께 개나리가 만발한 응봉산에 올랐다. 온 산이 샛노란 개나리와 막 피어나는 목련, 벚꽃이 어우러져 새 봄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터키에 가 있는 4년 동안 보지 못하였던 개나리꽃들이 나를 반겨주는 듯하였다. 응봉산의 개나리는 새봄의 정취를 마음껏 누리게 해 주고, 내가 다시 한국에 와서 봄을 맞게 된 기쁨을 느끼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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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인사  (0) 2013.09.10
<<터키 1000일의 체험>> 출간  (0) 2012.09.30

   터키 카이세리 시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4년 간 근무를 마치고 20138월 말에 무사히 귀국하였습니다.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문화 익히기를 좋아하며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터키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학, 한국문화를 강의하며 지낸 4년은 아주 재미있고 유익하였으며, 보람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부족한 나를 선발하여 파견해 준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여러분과 내가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도록 염려하고 도와준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서울 종로 3가에 있는 종로오피스텔 1215호에 연구실을 마련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정다운 얼굴들을 대하기도 하면서 지내려고 합니다.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을 부탁합니다.

 

                                                                  2013 910

                                                                                       최운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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