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지인이 카카오톡으로 부여 궁남지(宮南池) 주변의 연꽃을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이 사진을 보니, 넓은 연꽃단지와 그 중심에 있는 궁남지의 멋진 풍경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연꽃이 활짝 피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때를 택해 궁남지를 찾았다.

 

   궁남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백제 사비 시대의 궁원지(宮苑池)로, 사적 135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궁남지는 옛 기록을 바탕으로 1965년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만든 것으로, 넓이는 31,750㎡(9,605평)이다. 연못의 한가운데에는 삼신산(三神山)을 모방한 섬을 만들고, 연못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세워 육지와 연결하였다. 섬의 한 가운데에는 널찍한 ‘포룡정(抱龍亭)’이 서 있다.

 

   포룡정은 1971년에 중건하고, 2005년에 보수하여 지금의 단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용을 껴안다’는 뜻을 지닌 이 정자에는 백제 무왕(武王)의 탄생 설화가 전해 온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이 이야기는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아름다운 사랑을 맺게 한 향가 「서동요(薯童謠)」와 함께 널리 알려졌다. 정자 안에는 「포룡정기」와 함께 「서동요」를 향찰(鄕札)로 표기하고, 한글로 풀어쓴 현판이 걸려 있다. 나는 「서동요」를 읊조리며 포룡정을 살펴본 뒤에 서동의 출생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서울 남쪽의 연못가에 홀로 사는 여자가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는 마를 캐어다가 팔아 생계를 꾸렸으므로, 이름을 ‘서동(薯童)’이라고 하였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무척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자른 뒤에 서라벌로 갔다. 그는 동네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하고서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가 유명한 「서동요」이다. 이 노래가 장안에 퍼지자 백관들은 정숙하지 못한 선화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야 한다고 임금에게 주청하였다. 이 일로 쫓겨난 공주가 귀양지로 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타나 공주를 모시겠다고 하였다. 공주와 서동은 함께 가던 중 은밀히 정을 통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서동의 어머니는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서동을 낳았다고 한다. 서동의 어머니가 관계한 남자를 용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 남자는 평민이 아니고, 왕이거나 왕자 또는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동이 나중에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른 것은 그가 왕의 혈통을 이은 인물이었기에 가능하였다.

 

   서동은 아름답다고 소문난 선화공주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갔다. 이 대목을 서동이 신라의 형편을 탐지하라는 왕의 밀명을 받고 서라벌로 갔다고 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붙인 해석이다.

 

   선화공주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서라벌에 간 서동이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부르게 한 까닭은 무엇일까? 옛사람들은 ‘말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동요는 신이(神異)한 존재가 신의(神意)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언어관을 가진 신라의 백관들은 선화공주가 서동과 정을 통하고 있다고 신이 알려주는 것으로 믿고, 선화공주를 귀양 보내라고 주청한다. 왕 역시 그런 언어관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신하들의 말을 꺾지 못하고, 사랑하는 딸을 내쫓는다. 선화공주를 궁궐 밖으로 끌어내는 데에 성공한 서동은, 선화공주에게 접근하여 정을 통하였다. 선화공주는 그와 정을 통한 뒤에 그의 이름이 서동임을 알고, 동요의 영험함을 믿었다고 한다.

 

   「서동요」는 서동이 공주를 얻으려는 속셈에서, 자기의 소망을 표출한 노래이다. 이 노래가 선화공주와의 사랑을 이루게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보면, 서동은 당시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언어주술관을 활용하여 선화공주와의 사랑을 성취한 지혜로운 청년이다. 따라서 「서동요」는 불가능할 것 같던 두 사람의 사랑을 맺게 해 준 ‘사랑의 주가(呪歌)’이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설날에 덕담을 하고, 축원의 말을 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은 말한 것이 그대로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대중가요를 연구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는 대부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신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장수하고, 복을 누린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모두 ‘말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 의식이 현대인에게도 맥을 이어오고 있음을 말해 준다.

 

   선화공주와 함께 백제로 온 서동은 마를 캐던 구덩이에 쌓여 있는 금을 모아 신라 진평왕에게 보냈다. 많은 금을 받은 진평왕은 선화공주와 서동의 혼인을 인정한다. 그래서 서신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미륵사를 지을 때에는 건축기술자를 보내어 돕는다. 여기에는 신분이나 재력 면에서 부족하여 처가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신랑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야’ 처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것은 고구려 평강공주의 남편 온달이 사냥대회에서 1등을 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 내는 공을 세운 뒤에야 평강왕으로부터 “네가 과연 내 사위로다!” 하고 인정을 받는 것과 뜻을 같이 한다.

 

   서동은 나중에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백제 30대 무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무렵의 백제와 신라는 관계가 나빠 혼인을 할 형편이 아니었고, 역사적으로도 두 나라의 국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고, 백제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담아 재미있게 꾸민 이야기라 하겠다.

 

   나는 궁남지를 둘러싸고 있는 넓은 연꽃단지를 구획지어 만든 길을 걸으며, 서동 이야기를 되새겨 보았다. 「서동요」를 지어 서라벌에 퍼뜨리던 꾀 많은 서동의 모습, 선화공주를 얻은 뒤에 환하게 웃는 서동의 모습이 연꽃 위에 어른거린다. 수련이 예쁜 자태를 뽐내는 곳에 이르니 서동과 선화공주의 석상(石像)이 미소를 지으며 반갑다고 눈짓을 한다. 「서동요」를 읊조리며 연꽃단지의 꽃길을 걷던 나는, 진흙땅에서 자라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어내는 연꽃의 심성을 본받겠다는 다짐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2020. 0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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